유지들의 손절
1. 204호의 침묵과 복도의 소란
철제 문이 둔중한 금속음을 토해내며 닫혔다.
전주지방검찰청 남원지청 2층 204호 특별수사전담 검사실 안에는 지독하게 농밀한 침묵만이 가라앉아 있었다.
방금 전까지 피의자 강태석이 내뿜던 살기 어린 저주와 거친 숨소리는 사라지고, 오직 책상 위에 놓인 카세트 녹음기의 작은 주황색 정지 버튼만이 신문이 끝났음을 알리고 있었다.
성재환 검사는 검은 옻칠 만년필의 뚜껑을 돌려 닫았다.
챙, 하는 맑고 청아한 금속성이 고막을 스쳤다.
만년필 캡 상단에 새겨진 라틴어 문구,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위로 백열등 불빛이 번득였다.
만년필 배럴 안에는 지유가 선물했던 깊고 푸른 흑청색 잉크가 가득 차 있었고, 책상 위에는 그 잉크로 빼곡하게 작성된 피의자 신문조서 서른여덟 장이 정갈하게 포개져 있었다.
마지막 장 하단에는 피의자 강태석의 지장이 붉은 인주로 번져 있었다.
자신의 죄를 부정하지 못하고 끝내 찍어 누른 굴복의 낙인이었다.
재환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지 않았다.
헝클어진 넥타이를 고쳐 매지도 않았다.
그의 서늘한 시선은 문밖에 서 있는 강태훈 수사관과 김 경위에게 향했다.
"강태석을 지하 유치장으로 인치하십시오."
재환의 목소리는 메말라 있었으나 흔들림이 없었다.
"변호인 접견은 일체 불허합니다. 구속영장 청구서 작성이 끝날 때까지 외부와의 통신은 물론, 단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내보내지 마세요."
"예, 검사님!"
강태훈 수사관이 허리를 숙이며 묵직한 조서 뭉치를 받아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7년 전 소년이던 도련님이 마침내 괴물을 집어삼키는 검사가 되어 돌아왔음을 확인한 전율이 역력했다.
그때였다.
2층 복도 끝에서 거친 발소리와 함께 당직 수사관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복도의 적막을 찢는 다급한 소음이었다.
"검사님! 성 검사님! 큰일 났습니다!"
수사관은 문손잡이를 부여잡고 무릎을 짚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시위대가 다시 몰려왔습니까?"
안진우 검사가 눈살을 찌푸리며 앞으로 나섰다.
당직 수사관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시위대가 아니라…… 1층 민원실이 지금 난리가 났습니다!"
"민원실이?"
"남원 시내에 있는 놈들이란 놈들은 죄다 기어들어 왔습니다! 포목점 오 회장은 물론이고, 관내 하도급 건설업체 대표들, 구도심 번영회 임원들, 심지어 시청 도시과랑 위생과 계장들까지…… 서류 봉투랑 장부 가방을 양손에 바리바리 싸 들고 와서 자수를 하겠다고 민원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당직 수사관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떨렸다.
"강태석 시장이 204호에서 조서에 손도장을 찍고 자백했다는 소문이 밖으로 퍼지자마자, 다들 지들이 살겠다고 먼저 번호표를 뽑아 달라고 아우성입니다! 서로 먼저 진술서를 쓰겠다고 멱살잡이까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재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피비린내를 맡고 달려들던 하이에나들이, 우두머리 사자가 목덜미를 뜯기자마자 썩은 고기를 버리고 제 목숨을 부지하려 진흙탕 속으로 대가리를 처박는 꼴이었다.
재환은 책상 위에서 피 묻은 지유의 작은 증명사진을 집어 들었다.
유리 액자가 깨진 틈으로 여전히 선명하게 박혀 있는 붉은 혈흔.
7년 전 그 가혹했던 세월 동안, 이 토착 유지들이라는 자들은 지유와 그 어머니를 향해 침묵하고, 비웃고, 때로는 몽둥이를 쥐어주며 권력의 충견 노릇을 자처했다.
이제 와서 손절이라니.
재환의 입가에 차가운 냉소가 번졌다.
"안 검사님."
"예, 성 검사님."
"1층으로 내려갑시다. 저들이 들고 온 '선물'이 무엇인지, 단 한 톨도 빠짐없이 거두어야겠습니다."
2. 침몰하는 배의 쥐새끼들
남원지청 1층 민원실 로비는 아비규환의 난장판이었다.
유리문 안쪽은 고급 정장을 차려입었으나 넥타이가 삐뚤어지고 땀범벅이 된 중년 사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들의 손에는 저마다 큼직한 가죽 서류 가방, 갱지에 싼 장부 묶음, 노란 서류 봉투들이 들려 있었다.
"비켜! 내가 먼저 왔어! 내가 번영회 대표야!"
구도심 번영회 회장이자 포목점 주인인 오 회장이 청원경찰의 제지를 뚫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흙빛으로 질려 있었고, 며칠 전 남원지청 정문 앞에서 어깨띠를 두르고 계란을 던지던 그 기고만장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오 회장 네가 뭔데 먼저 들어가! 강태석이한테 뒷돈 제일 많이 처먹은 놈이 너잖아!"
그 뒤에서 남원 제2건설의 배 사장이 오 회장의 멱살을 낚아채며 고함을 질렀다.
"너 때문에 우리가 한양토건 밑으로 들어가서 요천 제방에 폐자재 집어넣은 거 아냐! 성 검사님 오시기 전에 내가 먼저 통장 거래 내역 제출해야 형량 감경받는단 말이다! 비키라고, 이 개새끼야!"
"뭐라고? 네놈은 강태석이 칠순 잔치 때 관사 앞마당에 금송아지 들고 간 놈이 이제 와서 발뺌을 해? 야! 서류 뺏지 마! 이거 성재환 검사님한테 드릴 자수서야!"
욕설과 고성이 좁은 민원실 공기를 진흙탕처럼 뒤흔들었다.
남원 지역에서 유지 행세를 하며 군림하던 자들이, 서로의 죄를 검찰에 먼저 팔아넘겨 제 목숨을 건지겠다고 개처럼 물고 뜯고 있었다.
찰칵, 찰칵, 찰칵!
섬광처럼 터지는 플래시 불빛이 그들의 추악한 실랑이를 낱낱이 도려냈다.
민원실 구석 기둥 뒤에서 카메라를 든 남원일보 최민재 기자가 붕대를 감은 이마를 찌푸리며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삼거리 김밥집에서 쇠파이프에 맞아 부러진 갈비뼈가 시큰거렸지만, 민재는 카메라를 내리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경멸로 짓씹혔다.
"추악한 새끼들…… 강태석 발밑에서 꼬리 흔들며 지유네 가게를 때려부술 때는 신이 났었지. 이제 호랑이가 죽게 생겼으니 가죽을 벗겨서라도 지들 목에 두르겠다고?"
민재의 시선이 민원실 중앙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 위에서 묵직한 구두 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탁, 탁, 탁.
규칙적이고 서늘한 발걸음 소리에 그 난장판이던 민원실이 일순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성재환 검사였다.
각 잡힌 검사 법복을 단정하게 걸치고, 품에는 독일제 검은 만년필을 꽂은 채 내려오는 젊은 검사의 모습에 로비에 모여 있던 유지들이 일제히 숨을 멈췄다.
그의 등 뒤로는 안진우 검사와 건장한 체구의 특수부 수사관 대여섯 명이 서슬 퍼런 기세로 도열해 있었다.
재환의 차가운 눈동자가 민원실 바닥을 훑었다.
바닥에 나뒹구는 서류 봉투들, 짓밟힌 영수증, 그리고 공포에 질려 자신을 쳐다보는 수십 개의 흔들리는 눈동자들.
"성, 성 검사님!"
오 회장이 무릎으로 기어 나와 재환의 구두 코앞에 넙죽 엎드렸다.
그는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올리며 품 안에서 두툼한 갈색 서류철을 꺼내 바쳤다.
손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고 있었다.
"살려주십시오, 검사님! 제가, 제가 눈이 멀었습니다! 강태석 그 악마 같은 놈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여기, 여기 다 있습니다!"
오 회장의 목소리가 울음 섞인 비명으로 갈라졌다.
"강태석이가 삼거리 상가 강제 철거 찬성하라고 저한테 준 뇌물 통장이랑, 신축 상가 우선 분양권 이면 각서 원본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지유네 김밥집 앞에 조폭들 풀어서 붉은 페인트 칠하라고 박철구한테 돈 전달한 현금 인출 영수증까지 몽땅 다 적어놨습니다! 저는 협박을 당해서 어쩔 수 없이 심부름만 한 겁니다, 검사님! 자수하겠습니다! 제발 구속만은 면하게 해주십시오!"
재환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오 회장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에는 분노조차 없었다.
오직 시궁창 속에서 꿈틀거리는 벌레를 응시하는 듯한 건조하고 메마른 경멸만이 서려 있을 뿐이었다.
"오 회장님."
재환의 낮은 목소리가 민원실 천장을 서늘하게 울렸다.
"며칠 전 남원지청 정문 앞에서, 피 흘리며 들어오던 열아홉 여학생의 머리 위에 계란을 던지고 욕설을 퍼붓던 분이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그, 그것은…… 강태석이가 안 하면 제 포목점을 세무조사로 찢어버리겠다고 협박을 해서……!"
"협박?"
재환이 천천히 한 걸음 다가섰다.
오 회장은 재환의 구두가 다가오자 기겁하며 뒤로 엉덩이를 뺐다.
"당신들이 말하는 협박이란 참으로 편리하군요. 강태석의 권력 아래서 수십억 대의 분양권을 챙기고, 영세 상인들의 피눈물을 빨아먹을 때는 '지역 발전'이라 자화자찬하더니, 그 권력이 부서지니 이제는 '협박당한 피해자'가 되셨습니까?"
재환의 시선이 민원실 로비에 모여 선 다른 사내들을 차례로 꿰뚫었다.
남원 제2건설 배 사장, 유림토건 최 대표, 관내 아스콘 납품업체 조 사장.
재환의 서늘한 시선이 닿을 때마다 사내들은 도살장에 끌려온 가축처럼 고개를 푹 숙이며 어깨를 떨었다.
"검사님! 저도 자수합니다!"
배 사장이 서류 가방을 열어젖히며 무릎을 꿇었다.
"요천 제방 1공구에 기준 미달 재생 골재 납품하고 5억 빼돌려서 강태석 관사 비서실로 보낸 전표 원본입니다! 강태석 처남 조상태가 도장 찍은 인수증도 있습니다! 저희는 진짜 시키는 대로 모래만 퍼 날랐을 뿐입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저희도 있습니다, 검사님! 시청 도시과 이 계장하고 위생과장한테 명절마다 뿌린 떡값 리스트입니다!"
"남원경찰서 정보과 형사들한테 술값 대준 영수증철입니다!"
서류들이 재환의 발밑으로 쏟아져 내렸다.
30년간 남원을 지배해 온 거대 카르텔의 실체였다.
강태석이라는 맹수의 그늘 아래서 떡고물을 받아먹으며 남원을 썩어 문드러지게 만들었던 공범들이, 이제는 제 살점을 뜯기지 않기 위해 자신들의 수괴를 도살대에 올려놓고 있었다.
3. 붕괴된 카르텔과 최민재의 증언
민재가 셔터를 누르던 손을 멈추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렌즈를 내린 그의 두 눈동자에는 지독한 환멸과 함께, 오랜 세월 가슴속에 맺혀 있던 응어리가 풀려나가는 묵직한 카타르시스가 교차하고 있었다.
"성 검사님."
민재의 목소리에 재환이 고개를 돌렸다.
이마에 하얀 붕대를 칭칭 감고, 입술이 터진 채 카메라를 목에 건 청년.
지유가 납치당하던 그 절체절명의 순간, 맨몸으로 쇠파이프를 들이받으며 지유의 도주로를 끝까지 지켜냈던 친구였다.
재환의 눈빛이 순간 미세하게 흔들렸다.
법복 안쪽, 가슴 깊숙한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부채감과 고마움이 교차했다.
"최 기자."
"장관이네요."
민재가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유지들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헛웃음을 삼켰다.
"남원의 어르신이라 불리며 요천각 상좌를 차지하던 양반들이, 오늘은 검찰청 바닥 청소를 아주 몸으로 해주고 계십니다."
유지들 중 몇몇이 민재를 노려보려 했으나, 재환의 서늘한 눈빛과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다시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
민재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낡고 두툼한 가죽 수첩 하나를 꺼냈다.
수첩의 모서리는 닳아 헤져 있었고, 겉표지에는 핏자국이 옅게 배어 있었다.
지난 3년간 남원일보의 어용 기사들 틈바구니에서, 폐지통을 뒤지고 군청 퇴직자들을 만나며 비밀리에 기록해 온 '남원 카르텔 인맥도 및 상납 일지'였다.
"검사님. 저자들이 지금 던져놓고 있는 장부들, 가짜는 아닙니다. 지들 살겠다고 제일 확실한 스모킹 건만 골라온 거니까요. 하지만…… 저것들이 전부는 아닙니다."
민재가 수첩을 펼쳐 재환에게 건넸다.
"저들은 강태석과 조상태에게 준 돈만 불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남원지원과 전주지검, 그리고 경찰서 내부에서 저들의 뒤를 봐주며 영장을 빼돌리고 수사를 무마해 준 관내 사법 협조자들의 이름은 쏙 빼놓고 있어요. 자기들이 내일이라도 살아남으면 다시 그 연줄을 붙잡아야 하니까요."
민재의 예리한 일갈에, 바닥에 엎드려 있던 배 사장과 오 회장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어졌다.
들켰다는 공포가 그들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재환은 민재가 건넨 수첩을 천천히 넘겨보았다.
흑청색 잉크와 볼펜으로 빽빽하게 적힌 이름들.
남원지원 송진호 계장에게 전달된 명절 떡값 500만 원, 전주지검 간부들의 골프비 대납 전표 번호, 남원경찰서 수사과 간부들의 차명 계좌.
심지어 오늘 아침까지도 시위대에 자금을 대주었던 남원 관내 운수업체 대표의 이름까지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재환의 입술이 차갑게 굳어졌다.
"강태훈 수사관."
"예, 검사님!"
"수사관 전원 비상 소집하십시오. 1층 민원실 문을 폐쇄하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자들 전원의 신병을 확보합니다."
재환의 명령에 민원실 안이 발칵 뒤집혔다.
"예? 거, 검사님! 자수하러 온 사람들을 구속한다고요? 자수 감경은요?"
오 회장이 사색이 되어 비명을 질렀다.
재환이 그를 서늘하게 내려다보며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자수(自首)란 자신의 범죄를 숨김없이 고백할 때 성립하는 것입니다. 주범에게 상납한 꼬리표만 던져주고, 사법 공조자들과의 뇌물 거래를 은폐한 채 흥정하려 드는 것은 자수가 아니라 증거 인멸이자 수사 방해입니다."
재환의 서슬 퍼런 일갈이 로비를 짓눌렀다.
"형법 제129조 수뢰죄 공범,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공여, 건설산업기본법 위반, 그리고 한지유에 대한 업무방해 및 폭처법 위반 교사 혐의. 오늘 이 자리에서 자수서를 제출한 자들 전원을 '임의동행' 형식으로 제1조사실부터 제6조사실까지 분산 인치하십시오. 최 기자가 제출한 비밀 수첩과 저들이 낸 장부를 1원 단위까지 대조하여, 단 한 글자라도 거짓이나 누락이 발견되는 즉시 전원 긴급체포합니다."
"검사님! 살려주십시오! 검사님!"
"성재환 검사님! 제가 다 불겠습니다! 법원 계장 이름도 다 적겠습니다!"
비명과 통곡이 터져 나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특수부 수사관들과 청원경찰들이 민원실 문을 걸어 잠그고 사내들의 팔을 꺾어 차례대로 끌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30년간 단 한 번도 부서지지 않을 것 같았던 남원의 견고한 토착 카르텔.
그것은 외세의 거대한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탐욕으로 뭉쳤던 자들이 제 목숨을 부지하려 서로를 물어뜯는 가장 추악하고 비열한 배신의 연쇄 속에서 완전히 와해되고 있었다.
4. 남겨진 맹세와 남원의료원의 봄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1층 로비에는 짓밟힌 종이 쪼가리들과 서늘한 침묵만이 남았다.
재환은 창가로 다가가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지청 앞마당을 가득 메웠던 어용 시위대의 천막과 피켓은 흔적도 없이 철거되어 있었다.
오 회장을 비롯한 지도부가 자수를 하겠다며 청사 안으로 기어들어 가 체포되자, 돈을 받고 동원되었던 시위대는 썰물처럼 흩어져 달아났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남원의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동문 우체국의 집배원들, 앞치마를 두른 시장 상인들, 요천 제방 수해로 삶의 터전을 잃을 뻔했던 하정리의 주민들이 지청 정문 앞에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피켓 대신 따뜻한 차가 담긴 보온병과 갓 구운 빵, 그리고 소박한 응원의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청사 정문 담벼락에 종이 한 장을 붙였다.
'남원의 진실을 밝혀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재환 검사님, 힘내십시오.'
그 투박한 손글씨를 바라보던 재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7년 전, 아버지가 남원을 버리고 떠나던 날.
남원 톨게이트 아스팔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피를 흘리며 울부짖던 지유의 모습이 겹쳐졌다.
'남원의 힘은 썩었다. 바닥의 정의에 매달려서는 개미처럼 짓밟힐 뿐이다.'
아비 성호석이 내뱉었던 그 냉혹한 약육강식의 논리.
하지만 틀렸다.
남원은 썩지 않았다.
썩은 것은 저 꼭대기에서 권력을 쥐고 흔들던 몇몇의 탐욕스러운 벌레들이었을 뿐, 그 밑바닥에서 하루하루 땀 흘려 김밥을 말고 편지를 배달하며 정직하게 살아가는 이 땅의 사람들은 썩지 않았다.
그들이야말로 권력의 폭압에 맞서 지유의 곁을 지켜준 거대한 민심의 방파제였다.
"검사님."
안진우 검사가 두툼한 서류철을 들고 다가왔다.
"강태석에 대한 사전 구속영장 청구서 작성이 끝났습니다. 특가법상 뇌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및 배임, 업무상과실치사상, 그리고 한지유에 대한 특수약취유인 및 살인교사까지…… 청구서 두께만 백 페이지가 넘습니다."
재환은 뒤를 돌아보았다.
안진우 검사의 눈빛에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었다.
서울에서 내려올 때만 해도 감찰의 눈치를 보던 청년 검사가, 이제는 거악을 단죄하는 칼날이 되어 서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안 검사님."
재환은 만년필을 꺼내 구속영장 청구서 맨 앞장에 자신의 이름을 정갈하게 서명했다.
성재환(成宰桓).
흑청색 잉크가 종이 깊숙이 스며들었다.
"지금 즉시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에 영장을 접수하십시오. 판사가 누구든, 영장실질심사 기일은 내일 오전으로 잡도록 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안진우 검사가 깍듯하게 경례를 하고 돌아섰다.
재환은 코트를 집어 들었다.
"어디 가십니까, 검사님?"
뒤에서 민재가 물었다.
재환은 코트 깃을 여미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피로에 찌든 얼굴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7년 만에 가장 맑고 따뜻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유에게 가야지."
남원의료원 3층 308호 격리 병실.
창밖으로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이 하얀 침대 시트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고 있었다.
지유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목에 감긴 붕대와 이마의 반창고는 여전했지만, 창백했던 뺨에는 제법 발그레한 생기가 돌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깨끗하게 닦인 알루미늄 보온 도시락 통이 놓여 있었다.
지청 정문 앞에서 계란과 흙탕물을 뒤집어쓰면서도 지유가 온몸으로 품어 안았던, '남원은 당신의 약속을 기억합니다'라는 쪽지가 붙어 있던 바로 그 도시락이었다.
스르륵.
병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지유가 고개를 돌렸다.
문가에 서 있는 사내.
검은색 정장 차림에 코트를 팔에 걸친 성재환이었다.
지유의 눈동자가 커졌다.
재환은 천천히 걸어와 침대 곁의 작은 나무 의자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다.
2561일.
서로를 부르지 못하고, 만질 수 없었으며, 오직 가슴속에 품은 흑청색 잉크의 약속 하나만으로 버텨온 기나긴 어둠의 시간.
그 시간의 끝에서, 마침내 두 사람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를 벗어나 온전한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재환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거칠어지고 굳은살이 박인, 그러나 따뜻한 지유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지유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다 끝났다, 지유야."
재환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울음을 참아내느라 목구멍이 묵직하게 조여왔다.
"강태석은 자백했고, 그 밑에서 꼬리 치던 자들도 전부 검찰청 바닥에 무릎을 꿇었어. 내일…… 영장이 발부되면, 그자는 다시는 이 남원 땅을 밟지 못할 거야."
지유의 커다란 눈망울에 맑은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재환아."
"응."
"고생했어…… 정말, 고생 많았어."
원망도, 한탄도 없었다.
왜 이제야 왔느냐는 투정도,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겪었던 그 지옥 같은 외로움에 대한 토로도 없었다.
오직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가문의 죄악을 짊어지고 홀로 칼을 휘둘러온 사내를 향한 지극한 위로뿐이었다.
재환은 참지 못하고 지유의 손등에 이마를 묻었다.
뜨거운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려 지유의 손등을 적셨다.
법복을 입고 수백 명의 범죄자 앞에서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던 특수부 검사가, 열아홉 소녀의 손을 잡고 아이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지유는 다른 한 손을 들어 재환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창밖 요천 둑길을 따라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그 바람 속에는 더 이상 최루탄 냄새도, 썩은 폐자재의 악취도 묻어 있지 않았다.
지리산 자락에서부터 불어오는 맑고 청명한 흙내음.
마침내 남원에, 길고 길었던 겨울을 밀어내고 진짜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
5. 폭풍의 잔해, 그리고 최후의 법정으로
오후 늦은 시각, 남원지청 2층 복도는 여전히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돌고 있었다.
1층에서 연행된 유지 서른두 명에 대한 분산 신문이 각 검사실과 조사실에서 숨 가쁘게 진행되고 있었다.
피의자들의 자백 조서가 분 단위로 출력되어 복도를 오가는 수사관들의 손에 들려 나갔다.
"성 검사님, 남원지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안진우 검사가 숨을 헐떡이며 204호 검사실로 들어섰다.
재환은 책상 위에 서류들을 정리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영장실질심사 기일이 잡혔습니까?"
"예. 내일 오전 10시, 남원지원 제1호 법정입니다. 영장전담판사는 문성현 부장판사로 배당되었습니다."
"문성현 부장판사……."
재환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과거 남원 제1건설의 압수수색 영장을 엄정하게 발부해 주었던 강직한 법관이었다.
토착 권력의 외압이나 정치권의 입김에 흔들리지 않는 인물이었기에, 법리만 완벽하다면 구속영장 발부는 확실했다.
그때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내선 유선 전화가 날카롭게 울렸다.
지청장실 직통 벨이었다.
재환이 수화기를 들었다.
"성재환 검사입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것은 조동식 지청장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극도로 긴장한 서울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정종길 부장의 묵직하고 서늘한 음성이었다.
[성 검사, 나 정종길이다.]
"예, 중수부장님."
[남원에서 보내온 강태석 자백 조서와 지리산 비자금 장부 사본, 잘 받았다. 그 덕분에 방금 전 국회에서 여당 내무위원장 김문현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압도적인 표차로 가결되었다.]
재환의 가슴속에서 묵직한 돌덩이 하나가 내려앉았다.
김문현.
30년 전 아비 성호석을 협박해 남원을 피눈물로 물들이고, 강태석이라는 괴물을 키워냈던 중앙 정계의 거악.
마침내 그자의 목덜미에도 사법의 쇠사슬이 채워진 것이다.
[하지만 방심하지 마라.]
정종길 부장의 목소리가 한층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김문현이 구속되기 직전, 서울의 최고위 법조 로펌과 손을 잡고 전관 출신 변호인단을 대거 남원으로 급파했다. 전직 대법관과 전주지법원장을 지낸 거물급 변호사 셋이 오늘 저녁 남원에 도착한다.]
"전관 변호인단 말입니까?"
[그래. 내일 오전 영장실질심사에서 강태석의 자백이 '강압 수사와 회유에 의한 허위 자백'이었다고 뒤집으려는 속셈이다. 뇌출혈과 급성 심근경색을 핑계로 구속집행정지나 영장 기각을 이끌어내려 할 게야. 법정에서 저들의 마지막 발악이 펼쳐질 거다.]
재환은 책상 위에 놓인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을 쥐었다.
금빛 닙이 백열등 아래서 서슬 퍼런 칼날처럼 빛났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부장님."
재환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갑고 단호했다.
"저들이 전직 대법관을 데려오든, 법의 신을 데려오든 상관없습니다. 피고인 강태석이 짓밟은 것은 법조문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숨과 영혼이었습니다."
재환은 창밖, 어둠이 짙게 내려앉는 남원 시내를 응시했다.
멀리 요천 변을 따라 켜지는 가로등 불빛들이 마치 길고 긴 어둠을 밝히는 등불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내일 법정에서, 강태석이라는 이름의 권력이 어떻게 파멸하는지 똑똑히 보여주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재환의 손끝에서 흑청색 잉크의 묵직한 파동이 번져 나갔다.
내일 오전 10시.
30년간 이어져 온 가문의 원죄와 토착 권력의 사슬을 끊어낼 최후의 심판이, 이제 단 반나절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