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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78화

시장 출석 요구서 발부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새벽을 가르는 결의

 

남원의료원 3층 복도의 차가운 타일 바닥 위로 새벽녘의 희뿌연 박명이 스며들고 있었다.

 

밤새 내리던 빗줄기는 잦아들었지만, 젖은 유리창 너머로 번져오는 공기는 여전히 칼날처럼 서늘했다.

 

병실 문손잡이를 조심스럽게 놓고 돌아선 성재환(成宰桓)의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 지유의 침상 곁에서 피 묻은 손을 맞잡고 쏟아내던 처절한 자책과 눈물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오직 거악을 뿌리째 도려내겠다는 서슬 퍼런 법조인의 냉철함만이 서려 있었다.

 

"검사님."

 

복도 구석에서 대기하고 있던 강태훈 수사관이 다가와 낮게 허리를 숙였다.

 

강태훈의 턱선은 밤샘 수사와 긴장으로 거칠게 굳어 있었고, 품에 안은 가죽 서류철에서는 방금 전 팩스로 수신된 문서 특유의 잉크 냄새가 풍겼다.

 

"지유 씨 상태는 좀 어떻습니까."

 

"장기 손상이나 두개골 골절은 피했습니다. 방금 진통제를 맞고 잠들었습니다."

 

재환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하며 코트 깃을 여몄다.

 

"하은 씨가 곁을 지키고 있고, 의료원 3층 출입구와 비상계단에는 이미 대검 특수부 수사관 네 명을 배치해 뒀습니다. 개미 한 마리도 함부로 병실 문을 넘지 못할 겁니다."

 

"잘하셨습니다."

 

재환의 시선이 강태훈의 손에 들린 서류철로 향했다.

 

"밤재 터널에서 체포된 자들의 조사는 어떻게 됐습니까."

 

강태훈이 즉시 서류철을 펼쳐 두툼한 조서 뭉치를 들어 보였다.

 

"현행범 체포된 해결사 넷 중 우두머리 사내가 입을 완전히 열었습니다. 지리산 140억 비자금 장부와 교환할 인질로 한지유 씨를 납치하라는 지시를 내린 배후는 남원시장 강태석이 맞습니다. 전주교도소 접견실에서 처남 조상태를 통해 옥중 비밀 지령이 하달되었고, 전달책으로 쓰인 불법 무선전화의 발신 기지국과 통화 내역까지 서울 통신수사반에서 전산 대조를 마쳤습니다."

 

강태훈의 목소리에 서늘한 분노가 묻어났다.

 

"게다가 조상태 역시 시내 은신처에서 긴급 체포되어 지청 취조실로 인치되었습니다. 그자 역시 처음에는 묵비권을 행사하려 했으나, 박철구의 자백과 밤재 터널 현장 검증 사진을 들이밀자 사색이 되어 자필 진술서를 작성했습니다. 강태석 시장이 직접 '계집애를 끌고 와서 장부와 맞바꾸고, 일이 틀어지면 지리산 골짜기에 파묻어 버리라'고 지시했다는 육성 녹음 테이프까지 조상태의 승용차 콘솔박스에서 확보했습니다."

 

재환의 턱 근육이 팽팽하게 굳어졌다.

 

피고인 강태석.

 

그자는 법원의 영장에 의해 구속 수감된 미결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교도관을 매수해 옥중에서 사병을 지휘하고 인질 납치와 살해를 획책했다.

 

더 이상 용서나 타협의 여지는 없었다.

 

"남원경찰서는요."

 

재환이 묻자 강태훈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밤재 터널에서 수사과장이 검사님께 범인도피죄 경고를 정면으로 얻어맞은 뒤로 경찰서 전체가 얼어붙었습니다. 서장 이한두는 관사에서 두문불출하고 있고, 수사과는 대검 특수본의 수사 지휘에 무조건 따르겠다며 납치범들의 신병 인계를 전적으로 검찰에 넘겼습니다. 경찰 내부의 토착 비호망은 사실상 와해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몸통뿐이군요."

 

재환은 계단 쪽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구둣발 소리가 적막한 병원 복도를 울렸다.

 

"지청으로 복귀합니다. 오전 9시 정각, 전주교도소에 수감된 현직 남원시장 강태석을 남원지청 204호 검사실로 강제 인치합니다."

 

"강제 인치라면…… 교도소로 직접 호송반을 보내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남원지청 정문 앞마당에 포토라인을 설치하십시오."

 

강태훈이 놀란 눈으로 재환을 바라보았다.

 

"포토라인 말입니까? 남원 관내 사건에서 현직 단체장을 상대로 정문 포토라인을 세운 전례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남원지원 영장실질심사 때도 지하 통로나 후문을 이용해 은밀히 출석하려 했던 자입니다. 변호인단과 지역 유지들이 거세게 반발할 텐데요."

 

"어둠 속에서 남원을 주무르던 자입니다. 이제는 백주 대낮의 햇빛 아래로 끌어내어 시민들 앞에 세워야 합니다."

 

재환의 입술에서 차가운 단언이 흘러나왔다.

 

"피의자 강태석에게 형법 제250조 및 제31조,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특수살인교사 및 특수약취유인교사 혐의를 적용해 정식 출석요구서를 발부할 겁니다. 지하 통로는 없습니다. 관용차로 정문 앞을 가로막는 꼼수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 오만한 자가 제 발로 지청 앞마당을 걸어 들어오게 만들어야 합니다."

 

병원 현관을 빠져나온 재환의 코트 자락 위로 남원의 서늘한 아침 공기가 매섭게 부딪쳐 왔다.

 

2. 204호 검사실의 서슬 퍼런 펜촉

 

오전 6시 20분, 전주지방검찰청 남원지청 본관 2층.

 

복도 끝자락에 위치한 204호 특별수사전담 검사실의 불은 환하게 켜져 있었다.

 

검사실 안쪽은 간밤에 확보된 서류와 증거물 상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벽면 한가운데에는 붉은 실로 얽힌 남원 카르텔의 계통도가 걸려 있었고, 그 정점에 박힌 강태석의 사진 위로는 붉은색 유성 매직으로 굵은 원이 쳐져 있었다.

 

책상 위에는 지리산 부운리 별장 지하 금고에서 압수한 140억 원대 비자금 장부 다섯 권과, 한지유의 어머니 박순례를 향한 표적 단속 일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재환은 코트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친 뒤, 책상 서랍에서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검은 옻칠이 단정하게 입혀진 독일제 만년필.

 

캡 상단에 금빛으로 음각된 법언이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또렷하게 빛났다.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재환은 만년필의 닙을 열고 잉크 피드를 확인했다.

 

지유가 선물해 주었던 깊고 그윽한 흑청색 잉크가 가득 차 있었다.

 

지난 7년간의 고통, 그리고 어젯밤 피투성이가 된 채 자신을 향해 손을 뻗던 지유의 얼굴이 망막 위로 스쳐 지나갔다.

 

재환은 책상 한가운데에 놓인 법무부 공식 양식의 '피의자 출석요구서'를 끌어당겼다.

 

사각, 사각.

 

고요한 검사실 안에 펜촉이 거친 백색 모조지를 긁어 내려가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사건번호: 1996형제 4108호]

 

[피의자: 강태석 (남원시장)]

 

[죄명: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횡령, 배임),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업무상과실치사상,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특수살인교사), 형법상 특수약취유인교사]

 

재환의 손끝에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었다.

 

적용 법조 하나하나가 강태석이라는 괴물이 지난 30년간 남원을 짓밟으며 쌓아 올린 죄악의 성벽을 무너뜨릴 사법의 포탄이었다.

 

특히 출석 이유란에는 밤재 터널에서 벌어진 납치 테러의 전모가 소름 끼칠 정도로 명확하게 적시되었다.

 

'피의자는 1996년 8월, 전주교도소에 구속 수감 중임에도 불구하고 매수된 교도관을 통하여 외부 통신망을 불법 확보한 뒤, 처남 조상태 및 전문 폭력 조직원들에게 범죄 피해자이자 중요 참고인인 한지유를 야간에 납치하여 위해를 가할 것을 교사하였음.'

 

'이에 따라 피의자에 대하여 형사소송법 제200조에 의거, 1996년 8월 24일 오전 9시 정각 전주지방검찰청 남원지청 204호 검사실로의 출석을 명함.'

 

문장의 끝에 닿은 재환은 펜을 멈추지 않고, 하단의 주임검사 란에 한 자 한 자 힘주어 자신의 이름을 써 내려갔다.

 

'전주지방검찰청 남원지청 특별수사전담 검사 성재환(成宰桓).'

 

인주를 묻힌 검사실 관인을 붉게 찍어 누르자, 출석요구서는 거역할 수 없는 국가 공권력의 집행 문서로 완성되었다.

 

탁, 하고 문이 열리며 안진우 검사가 들어섰다.

 

안진우의 손에는 서울 대검찰청 중수부와 통화한 내역이 적힌 메모지가 들려 있었다.

 

"성 검사님."

 

안진우가 숨을 몰아쉬며 다가왔다.

 

"대검 중수부 정종길 부장님과 직통 통화를 마쳤습니다. 정 부장님께서 지리산에서 확보된 140억 비자금 원부와 김문현 의원실 로비 녹음파일 사본을 검토하신 뒤, 청와대와 법무부에 강력히 통보하셨답니다. 이번 남원 수사는 정권의 명운을 건 성역 없는 단죄이며, 주임검사의 모든 지휘권을 전폭 지지한다는 지침입니다. 법무부 기조실에서 획책하던 면직 제청은 완전히 백지화되었습니다."

 

"다행이군요."

 

재환은 완성된 출석요구서를 가죽 파일철에 끼워 넣으며 일어섰다.

 

"그렇다면 이제 중앙의 외압도, 내부의 방해도 없습니다."

 

"교도소로 직접 가실 겁니까?"

 

안진우가 묻자 재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직접 갈 필요는 없습니다. 강태훈 수사관과 지청 호송팀, 그리고 관할 기동순찰대를 전주교도소로 급파할 겁니다. 피의자 강태석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미결수 호송 버스에 태워 이곳 남원지청 정문 앞으로 데려오도록 지휘하겠습니다."

 

재환의 서늘한 눈빛이 안진우를 향했다.

 

"안 검사님은 남원시청 기자실과 지방 언론사, 그리고 서울에서 내려온 방송사 취재진에게 공식 보도자료를 배포해 주십시오."

 

"보도자료 내용이……."

 

"오늘 오전 9시 정각, 현직 남원시장 강태석을 특수살인교사 및 140억 비자금 횡령 혐의의 피의자 신분으로 남원지청 정문 포토라인에 세운다는 사실입니다."

 

안진우의 눈이 크게 뜨였다.

 

공개 소환.

 

그것은 남원이라는 작은 지방 도시에서 30년간 절대 권력자로 군림해 온 강태석의 신화를 온 시민이 지켜보는 앞에서 완전히 산산조각 내겠다는 선언이었다.

 

"알겠습니다, 성 검사님. 취재진이 구름처럼 몰려들 겁니다."

 

안진우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뛰어나갔다.

 

3. 철창 너머로 날아든 족쇄

 

오전 7시 40분, 전주교도소 미결수 특별 수용동.

 

두꺼운 철제 배식구 틈새로 교도소 복도의 탁한 형광등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독방 안쪽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강태석은 핏발 선 눈을 부릅뜬 채 굳게 닫힌 철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하룻밤 사이에 십 년은 늙어버린 것처럼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밤새 처남 조상태로부터도, 지리산으로 보낸 해결사들로부터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교도관을 매수해 넘겨받았던 비밀 무선전화는 새벽 세 시경부터 전원이 완전히 끊겨 먹통이 되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조상태 이 빌어먹을 새끼가 왜 연락이 없어!'

 

강태석은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분명히 어젯밤, 삼거리 김밥집을 덮쳐 그 기집애를 납치하는 데 성공했다는 중간 보고를 받았었다.

 

그렇다면 지금쯤 지리산 산내면 아지트에 가둬두고 성재환에게 협박 전화를 걸었어야 맞았다.

 

장부를 내놓지 않으면 한지유의 목을 따서 요천 물에 띄워 보내겠다고, 내 목숨을 옥죄는 서류들을 당장 소각하라고 윽박질렀어야 했다.

 

그런데 왜 아무런 기척이 없는가.

 

왜 교도소 복도가 이토록 불길할 정도로 조용한가.

 

쿵!

 

쿵!

 

쿵!

 

적막을 찢고 독방 철문을 거칠게 걷어차는 둔탁한 굉음이 복도를 울렸다.

 

강태석이 흠칫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철문에 달린 이중 자물쇠가 요란한 쇠소리를 내며 풀리더니, 육중한 철문이 활짝 젖혀졌다.

 

문 앞에는 평소 강태석의 돈을 받아먹으며 굽실거리던 당직 교도관이 서 있지 않았다.

 

푸른색 완장을 찬 전주교도소 보안과 계장과 무장 교도관 서넛, 그리고 그 뒤편으로 남원지청의 강태훈 수사관이 서슬 퍼런 눈으로 버티고 서 있었다.

 

"너…… 너희들 뭐야!"

 

강태석이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질렀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문을 발로 차! 당직 과장 불러와! 내가 누군지 몰라? 내가 남원시장 강태석이야!"

 

그러나 강태석의 고함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보안과 계장은 차가운 표정으로 한 걸음 물러섰고, 강태훈 수사관이 성큼 독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강태훈의 손에는 붉은 관인이 찍힌 백색 서류철이 들려 있었다.

 

"피의자 강태석."

 

강태훈이 사무적인, 그러나 얼음처럼 차가운 음성으로 문서를 펼쳐 들었다.

 

"전주지방검찰청 남원지청 204호 특별수사전담 검사실로부터 정식 발부된 피의자 출석요구서를 전달합니다."

 

"뭐? 출석요구서?"

 

강태석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난 이미 구속적부심 기각에 대해 서울 대형 로펌 변호인단을 선임했어! 조사받을 이유 없어! 묵비권을 행사할 테니 당장 꺼져!"

 

"묵비권은 검사실에 가서 행사하십시오. 이건 단순한 임의 출석 조사가 아닙니다."

 

강태훈이 출석요구서의 죄명 란을 강태석의 얼굴 바로 앞까지 들이밀었다.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특수살인교사, 그리고 형법상 특수약취유인교사."

 

그 단어가 떨어지는 순간, 강태석의 턱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살인교사.

 

약취유인교사.

 

'어떻게…… 어떻게 벌써 그 혐의가…….'

 

강태훈이 비웃듯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당신이 보낸 해결사 네 명은 어젯밤 17번 국도 밤재 터널에서 주임검사님에 의해 전원 현행범 체포되었습니다. 한지유 씨는 무사히 구출되어 병원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고, 당신의 처남 조상태 역시 새벽 다섯 시에 체포되어 옥중 교사 전모를 자백했습니다. 당신이 건넸던 비밀 무선전화의 통화 내역, 녹음 테이프, 해결사들의 자필 진술서까지 검찰이 모두 쥐고 있습니다."

 

"거, 거짓말 마! 조상태가 불었을 리가 없어!"

 

강태석이 발악하듯 소리를 질렀으나, 목소리는 이미 바들바들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

 

지리산의 140억 비자금 장부도 빼앗겼고, 마지막 인질극마저 완벽하게 분쇄되었다.

 

자신을 비호해 주던 서울의 김문현마저 침묵하고 있는 지금, 자신은 완벽하게 고립된 독방의 쥐새끼에 불과했다.

 

"자, 일어나시죠, 시장님."

 

강태훈이 뒤편의 교도관들에게 턱짓을 했다.

 

무장 교도관들이 달려들어 강태석의 양팔을 거칠게 꺾어 뒤로 돌렸다.

 

찰칵!

 

차가운 강철 수갑이 강태석의 양 손목을 파고들었다.

 

살을 에는 듯한 쇠의 감촉에 강태석이 비명을 질렀다.

 

"이거 놔! 이거 안 풀어?! 내가 시장이야! 민선 1기 남원시장이라고! 성재환 그 어린놈의 새끼가 감히 나한테 이따위 짓을 해?!"

 

"성재환 검사님께서 특별히 전해드리라더군요."

 

강태훈이 강태석의 귓가에 차갑게 속삭였다.

 

"'남원의 힘은 썩었다고 했던 네놈의 통치 논리를, 오늘 그 남원의 시민들 앞에서 법으로 완벽히 부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강태석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그것은 과거 시장 관사에서 자신이 성재환에게 내뱉었던 오만한 권력관이었다.

 

그 말이, 고스란히 자신의 목을 죄는 족쇄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포승줄에 온몸이 꽁꽁 묶인 채 끌려 나가는 강태석의 등 뒤로 교도소 복도의 철문들이 육중하게 닫혀갔다.

 

4. 남원시청과 지청 앞, 들끓는 민심

 

오전 8시 15분, 남원 시내는 거대한 폭풍의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남원시청 본관 정문과 광한루원 앞 사거리, 그리고 전주지검 남원지청으로 이어지는 도로변에는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JBS 방송사의 정오 특보와 남원일보 최민재 기자가 배포한 특별 호외를 통해 요천 제방 붕괴 참사가 40억 횡령에 의한 인재였다는 사실이 온 도시에 퍼져나간 터였다.

 

게다가 조금 전, 남원지청에서 긴급 공식 브리핑을 통해 '현직 시장 강태석에 대한 특수살인교사 피의자 소환'을 발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민심은 걷잡을 수 없이 들끓었다.

 

"강태석을 당장 구속하라!"

 

"살인마 시장을 단죄하라!"

 

동문 우체국 앞 삼거리 김밥집 골목에서부터 시작된 상인들의 행렬이 남원지청 정문 앞마당으로 밀려들었다.

 

포목점 오 회장과 한양토건이 일당을 주고 동원했던 어용 시위대는 이미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흙탕물에 삶의 터전을 잃었던 수재민들, 억울하게 토지를 빼앗겼던 농민들, 그리고 삼거리 김밥집의 붉은 페인트를 함께 지워냈던 평범한 남원 시민들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우리의 세금으로 배를 불린 도둑놈 강태석을 처단하라', '성재환 검사님, 남원의 썩은 뿌리를 뽑아주십시오'라는 글귀가 적힌 피켓이 들려 있었다.

 

남원지청 정문 앞 도로는 이미 전국에서 몰려든 취재 차량과 중계차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서울의 주요 일간지 사회부 기자들과 방송 3사 카메라 기자들이 삼각대를 펼치고 지청 본관 현관 계단 앞마당에 빽빽하게 진을 쳤다.

 

남원지청 역사상 유례가 없는 광경이었다.

 

지청 앞마당 한가운데에는 굵은 노란색 테이프로 사각형의 구획이 선명하게 그어져 있었다.

 

'포토라인(PHOTO LINE).'

 

그 네 글자가 아침 햇살을 받아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현관 계단 위에는 대검 특수부 수사관들이 정복을 입고 도열해 있었고, 안진우 검사가 긴장된 표정으로 시계를 확인하며 서성이고 있었다.

 

그때, 204호 검사실 창문 커튼을 살며시 걷어 올린 성재환의 모습이 보였다.

 

재환은 마당을 가득 메운 시민들의 함성과 번쩍이는 카메라 플래시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의 분노는 단순한 소란이 아니었다.

 

지난 수십 년간 지방 토착 권력의 폭압과 갈취 아래 숨죽이며 흘려온 피눈물이 마침내 거대한 파도가 되어 권력의 심장을 향해 밀려드는 것이었다.

 

재환은 품 안에서 흑청색 잉크로 채워진 만년필을 쥐었다.

 

'어머니, 그리고 지유야.'

 

그의 눈빛이 푸른 불꽃처럼 타올랐다.

 

'남원이 기억하고 있는 그 약속을, 오늘 여기서 반드시 이루어 내겠습니다.'

 

5. 호송 버스의 출현

 

오전 8시 50분.

 

지청 정문 초소의 차단봉 너머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온다! 호송 버스가 온다!"

 

기자 중 누군가가 소리치자, 마당에 대기하고 있던 수백 명의 취재진이 일제히 카메라 셔터를 장전하며 앞으로 쏠렸다.

 

철제 정문을 통과해 미끄러져 들어온 것은 전주교도소의 푸른색 대형 호송 버스였다.

 

그 뒤를 남원경찰서 순찰차 두 대와 검찰 호송 세단이 호위하듯 바짝 뒤따르고 있었다.

 

시민들의 함성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강태석을 처벌하라!"

 

"살인 교사범 강태석은 물러나라!"

 

호송 버스가 포토라인 바로 앞 3미터 지점에 육중한 브레이크 파열음을 내며 멈춰 섰다.

 

버스의 유압식 문이 치익 소리를 내며 열리자, 마당 전체에 서슬 퍼런 침묵이 내려앉았다.

 

먼저 차에서 뛰어내린 강태훈 수사관과 건장한 검찰 수사관 넷이 버스 문 앞뒤를 완벽히 에워쌌다.

 

그리고 마침내.

 

버스 계단을 딛고 내려서는 한 사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강태석이었다.

 

그는 평소 시찰을 돌 때 입던 최고급 맞춤 양복 대신, 가슴팍에 수형 번호 '2804'가 붉은 실로 박힌 잿빛 미결수 수의를 입고 있었다.

 

포승줄이 어깨와 가슴, 허리를 빈틈없이 결박하고 있었고, 앞으로 모아진 두 손목에는 묵직한 강철 수갑이 채워진 채 하얀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헝클어진 백발과 초췌하게 깎인 볼, 핏발 선 눈은 지난날 남원을 호령하던 '조폭 출신 시장'의 위세를 완전히 잃어버린 모습이었다.

 

번쩍!

 

번쩍!

 

번쩍!

 

강태석이 땅을 밟는 순간, 수백 대의 카메라 플래시가 일제히 터져 나가며 대낮 같은 백색 섬광의 벽을 만들어냈다.

 

찰칵거리는 셔터 소리가 마치 기관총 연사처럼 귓전을 때렸다.

 

"강태석 시장! 요천 제방 붕괴 참사의 40억 횡령 혐의를 인정하십니까!"

 

"어젯밤 삼거리 김밥집 피해자 한지유 씨 납치를 옥중에서 직접 지시한 것이 사실입니까!"

 

"살인교사 혐의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십시오!"

 

기자들의 마이크가 숲을 이루며 강태석의 턱밑까지 들이밀어졌다.

 

강태석은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비틀거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가리려 했으나, 양옆을 붙든 수사관들의 완강한 손아귀 때문에 피할 곳조차 없었다.

 

"이, 이건……."

 

강태석이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떼어냈다.

 

메마른 목구멍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건…… 정치 검찰의 음해다…… 전임 시장 아들의 사적인 정치 보복이야……! 난 모르는 일이다……!"

 

그 순간, 지청 본관 현관 유리문이 열렸다.

 

검은색 정장 위에 검사 법복을 단정하게 걸친 성재환이 계단을 밟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6. 포토라인의 대면

 

성재환의 구둣발이 시멘트 계단을 울릴 때마다 기자들이 길을 터주듯 양옆으로 물러섰다.

 

법복의 검은 자락이 서늘한 아침 바람에 펄럭였다.

 

재환은 포토라인 바깥 1미터 지점에 우뚝 멈춰 섰다.

 

플래시 세례 속에서 비틀거리던 강태석의 시선이 마침내 성재환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7년 전, 시장 관사에서 어린 소년을 멸시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며 '남원의 힘은 썩었다'고 조롱하던 토건 폭력배의 우두머리.

 

그리고 지금, 법의 심판관이 되어 그 우두머리를 사법의 족쇄로 옭아맨 청년 검사.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하는 순간, 지청 앞마당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재환의 눈빛은 북풍한설처럼 차가웠고, 강태석의 눈빛은 공포와 적의로 짓물러 있었다.

 

"피의자 강태석."

 

재환의 낮고 묵직한 음성이 마당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마이크를 통하지 않았음에도 모든 기자의 귀에 서슬 퍼렇게 꽂혔다.

 

"남원시장이라는 공적 권력을 사유화하여 시민의 생명을 앗아가고, 옥중에서 사병을 동원해 무고한 시민을 납치·살해하려 한 혐의로 당신을 이 자리에 소환했습니다."

 

강태석이 이를 갈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성재환…… 네놈이 감히……! 성호석이 아들놈 주제에…… 네 아비의 죄는 잊었느냐!"

 

"내 가문의 원죄 역시 법정에서 낱낱이 가려질 것입니다."

 

재환은 추호의 동요도 없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단죄받아야 할 자는 바로 30년간 남원을 피눈물로 물들인 당신입니다."

 

재환은 손을 들어 품 안에서 꺼낸 출석요구서 원본을 높이 치켜들었다.

 

붉은색 검찰 관인이 취재진의 카메라 렌즈를 향해 선명하게 드러났다.

 

"피의자 강태석에 대한 특수살인교사,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및 업무상 횡령 혐의에 대한 조사를 지금부터 남원지청 204호 검사실에서 개시합니다."

 

재환의 서늘한 시선이 강태석의 일그러진 얼굴을 정조준했다.

 

"들어오십시오, 강태석 피의자. 당신이 만든 지옥을, 이제 법으로 마주할 시간입니다."

 

말을 마친 재환이 몸을 돌려 현관 계단을 향해 당당히 걸어 올라갔다.

 

강태석은 수갑 찬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절규하듯 고함을 질렀으나, 수사관들의 억센 손에 이끌려 포토라인을 넘어 현관 문턱으로 질질 끌려 들어갔다.

 

수백 명의 시민들이 터뜨리는 함성과 박수 소리가 남원의 푸른 가을 하늘을 뒤흔들며 메아리쳤다.

 

그것은 30년간 남원을 짓누르던 어둠의 장막이 걷히고, 마침내 정의의 빛이 찬란하게 쏟아져 내리는 역사의 한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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