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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77화

병원에서의 다짐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붉은 불빛 아래의 침묵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빗물 젖은 남원의료원(南原醫療院) 응급실 앞마당을 길게 찢어발겼다.

 

구급차 뒷문이 덜컹거리며 열리자마자 뿜어져 나온 것은 시린 초가을의 찬 공기와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였다.

 

들것을 받쳐 든 구급대원들의 발걸음이 다급하게 콘크리트 바닥을 짓이기며 내달렸다.

 

그 뒤를 따라 달리는 성재환의 구두 밑창에서도 축축한 흙탕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정장 바짓단은 밤재 터널 아스팔트 바닥에서 뒹굴어 찢겨 있었고, 빗물과 땀으로 엉망이 된 셔츠 깃 너머로 거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단 한 뼘도 들것 위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혈압 80에 50, 맥박 분당 백이십 회로 빈맥입니다! 경추와 요추에 심한 외상성 타박 의심되고, 두피 열상으로 인한 출혈 지속 중입니다!"

 

구급대원의 고함이 자동문을 뚫고 처치실 안으로 울려 퍼졌다.

 

형광등의 파리한 백색광이 쏟아져 내리자, 얇은 모포 틈으로 드러난 한지유의 얼굴이 처참하게 드러났다.

 

뺨에는 시퍼런 멍과 함께 거친 모래가 긁고 지나간 붉은 생채기가 짓물러 있었고, 입술은 핏기를 완전히 잃은 채 파랗게 질려 바짝 말라붙어 있었다.

 

그런데도 가냘픈 그녀의 오른손은 주먹을 쥔 채 심장 위에 굳건히 얹혀 있었다.

 

그 손가락 마디마디 사이로, 빗물과 선혈에 젖어 모서리가 뭉개진 반명함판 증명사진 한 귀퉁이가 삐져나와 있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끌려가는 순간에도 그녀가 놓지 않았던 성재환의 열여덟 살 얼굴이었다.

 

"지유야……."

 

재환의 목구멍에서 끓어오르는 신음이 멎지 않았다.

 

심장을 날카로운 유리 파편으로 난도질하는 듯한 통증이 가슴을 짓눌렀다.

 

밀려드는 처치실의 의료진들이 들것을 둘러싸자, 재환은 본능적으로 지유의 차가운 손끝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거친 손길이 그의 가슴팍을 가로막았다.

 

"보호자분, 뒤로 물러서세요! 응급 처치 들어갑니다! 밖에서 대기하세요!"

 

의사의 단호한 외침과 함께 녹색 커튼이 촥 소리를 내며 재환의 눈앞을 가로막았다.

 

닫힌 천막 너머로 가위로 옷가지를 자르는 소리, 금속 트레이가 부딪히는 소름 끼치는 금속음, 생체 신호 모니터의 규칙적이고도 위태로운 비프음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재환은 차가운 타일 벽에 등을 기댄 채 천천히 주저앉을 뻔한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었다.

 

손바닥에 묻어 있던 지유의 굳은 핏자국이 체온을 잃고 말라비틀어져 버석거렸다.

 

'내가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내가 지유의 고집을 꺾고 강제로라도 안전한 곳에 숨겨두었더라면.'

 

후회와 자책이 목구멍을 틀어막아 숨을 쉴 때마다 폐포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정의니 법이니 떠들며 7년의 세월을 벼려왔다고 자부했으나, 그 오만한 정의의 대가를 치른 것은 언제나 지유였다.

 

삼거리 김밥집의 어린 여학생이 홀로 감내해야 했던 폭력의 무게가 고스란히 이 피 묻은 손바닥에 새겨져 있었다.

 

2. 눈물의 복도

 

"지유야! 지유야, 어디 있어!"

 

정적을 깨뜨리며 복도 끝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메아리쳤다.

 

양말도 신지 못한 채 슬리퍼를 질질 끌며 달려온 윤하은이었다.

 

남원 동문 우체국 뒷골목 자택에서 김 경위의 다급한 연락을 받고 한달음에 달려온 그녀의 얼굴은 눈물과 빗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하은은 처치실 앞 복도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재환을 발견하자마자 털썩 무릎을 꿇으며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성 검사님…… 우리 지유, 우리 지유 어떻게 된 거예요? 죽는 거 아니죠? 아니라고 말 좀 해봐요!"

 

하은의 통곡이 텅 빈 병원 복도를 날카롭게 울렸다.

 

재환은 굳은 얼굴로 떨리는 하은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살아 있습니다. 의사들이 지금 처치 중이에요. 반드시…… 살아납니다."

 

재환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으나, 끝자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을 숨기려는 듯 재환은 피가 배어 나온 자신의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하은은 벽에 기댄 채 가슴을 쥐어뜯으며 오열을 토해냈다.

 

"내가…… 내가 미쳤지. 오늘 밤에 혼자 두는 게 아니었는데. 서른 줄만 말고 일찍 들어간다고, 검사님이랑 같이 퇴근한다고 해서 믿었는데……. 그 개 같은 놈들이, 그 인간도 아닌 조폭 놈들이 지유를…… 지유 어머니도 그렇게 잡아가더니 지유까지……!"

 

하은의 울부짖음은 칼날이 되어 재환의 심장 가장 깊은 곳을 후벼 팠다.

 

박순례 여사의 죽음, 영안실을 둘러싸던 사내들의 조롱, 그리고 오늘 밤 지리산 17번 국도를 질주하던 무등록 승합차의 칼날까지.

 

모든 비극의 근원은 단 하나였다.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삶을 짓밟는 것을 숨 쉬듯 당연하게 여겨온 자, 강태석.

 

그 맹수의 아가리에 지유를 던져놓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재환 자신의 나약함이자 방심이었다.

 

그때 처치실 문이 열리고 녹색 수술복을 입은 당직 과장이 피 묻은 라텍스 장갑을 벗으며 걸어 나왔다.

 

재환과 하은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선생님, 환자는 어떻습니까?"

 

재환의 형형한 눈빛에 의사는 순간 헛기침을 삼키며 차트를 넘겼다.

 

"두피 열상은 여섯 바늘 꿰맸습니다. 다행히 두개골 골절이나 뇌출혈은 없습니다. 목에 가해진 외상으로 식도와 기도 주변 연조직이 부어올라 말을 하기는 당분간 힘들 겁니다. 갈비뼈 두 군데에 금이 갔고, 타박상이 전신에 심합니다만…… 가장 우려했던 다발성 장기 손상은 피했습니다."

 

의사는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덧붙였다.

 

"극도의 공포와 신체적 피로로 인한 쇼크 상태입니다. 혈압이 아직 정상 범주로 완전히 올라오지 않았으니, 오늘 밤이 고비입니다. 중환자실로 올릴 수도 있었으나 환자의 정신적 안정을 위해 일단 3층 1인 격리 병실로 옮기도록 조치했습니다. 절대 안정이 필요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하은이 바닥에 주저앉으며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재환은 의사에게 묵직하게 고개를 숙이며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서늘한 결의를 내뱉었다.

 

"오늘 밤, 병실 주변 경호는 검찰 수사관들이 맡을 겁니다. 외부인의 접근은 의료진을 제외하고 전면 차단해 주십시오."

 

3. 2561일의 무게

 

새벽 세 시, 남원의료원 3층 308호 병실.

 

창밖으로는 여전히 굵은 빗줄기가 유리창을 세차게 때리고 있었다.

 

병실 안은 오직 수액이 떨어지는 규칙적인 소리와 지유의 옅고 거친 호흡 소리만이 고요를 채우고 있었다.

 

지유의 이마에는 하얀 거즈와 반창고가 덧대어져 있었고, 목덜미에는 납치범 사내가 들이댔던 등산용 칼날의 서슬 퍼런 핏자국이 붉은 줄로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양쪽 손목에는 청테이프와 밧줄에 결박당해 살갗이 벗겨진 시뻘건 마찰흔이 처참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하은은 한참을 울다 지쳐 병실 한구석 보조의자에서 새우잠에 빠져 있었다.

 

재환은 침대 바로 곁에 놓인 철제 의자에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링거 바늘이 꽂히지 않은 지유의 왼손을 아주 조심스럽게, 부서질세라 감싸 쥐고 있었다.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재환은 자신의 두 손으로 그녀의 손을 감싸 쥐고, 제 입김을 불어넣으며 끝없이 온기를 전했다.

 

지유의 거칠어진 손바닥바닥에는 지난 7년간 김밥을 말고 칼을 쥐며 굳은 굳은살들이 울퉁불퉁 만져졌다.

 

열여덟 살, 광한루원 완월정 난간에서 연필을 쥐고 요천 둑길을 스케치하던 그 부드럽고 말간 손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비바람과 공권력의 횡포를 홀로 맨몸으로 받아내며 굳어버린 거친 노동의 흔적.

 

재환의 시선이 지유의 손가락 사이를 지나 협탁 위에 놓인 물건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빗물과 피로 얼룩진 자신의 학생증 증명사진이 놓여 있었다.

 

7년 전, 남원을 강제로 떠나던 통일호 기차에 오르기 직전 광한루원 오작교 위에서 학생증 모서리를 잘라 건넸던 사진.

 

뒷면에는 지유가 선물했던 흑청색 잉크로 자신이 직접 눌러썼던 서약이 여전히 번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2561일이었다.

 

그가 서울로 압송되듯 끌려간 날부터, 오늘 밤 이 피투성이가 된 병실에 도달하기까지 흐른 시간의 총량.

 

재환은 그 기나긴 날들 동안 신림동의 세 평 고시원 단칸방에서 피를 토하듯 법전을 씹어 삼켰다.

 

자신이 겪는 외로움과 고통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인 줄 알았다.

 

그러나 지유가 남원에서 견뎌낸 2561일에 비하면, 자신의 고통은 한낱 온실 속의 투정에 불과했다.

 

지유는 어머니의 병환과 죽음을 홀로 지켰고, 야간에 날아드는 쇠파이프와 붉은 페인트를 맨손으로 닦아냈으며, 굴착기의 쇠 버킷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밤, 목에 차가운 칼날이 들어오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자신의 사진을 품에 안은 채 심장을 움켜쥐고 있었다.

 

"바보같이……."

 

재환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려 지유의 손등 위로 툭 떨어졌다.

 

"이따위 종이 쪼가리가 뭐라고…… 목숨을 걸어. 버렸어야지. 살기 위해서라면, 날 원망하고 다 내던졌어야지."

 

눈물이 빗물처럼 번져 지유의 손가락 마디를 적셨다.

 

재환은 이마를 지유의 차가운 손등에 파묻었다.

 

억누르지 못한 어깨가 잘게 떨렸다.

 

가문의 죄악을 단죄하겠다고, 법의 이름으로 정의를 세우겠다고 거창하게 떠벌렸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부끄러웠다.

 

정의란 무엇인가.

 

가장 지키고 싶었던 단 하나의 존재조차 지키지 못하고 피투성이로 만들어놓는 것이 검사의 정의란 말인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차디찬 분노가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그것은 사법시험을 준비하며 품었던 치기 어린 분노나, 부친 성호석을 향한 비틀린 반발심 따위와는 질적으로 다른 감정이었다.

 

뼈를 깎아내고 살을 저며내는,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지독한 살기(殺氣)였다.

 

4. 깨어난 숨소리

 

창밖의 빗소리가 점차 잦아들 무렵, 지유의 메마른 입술 사이로 가냘픈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 으음."

 

미세한 움직임이었으나, 지유의 손등에 이마를 대고 있던 재환은 번개에 맞은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지유의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파르르 떨리던 속눈썹 사이로 깊고 맑은 눈동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초점을 잃고 허공을 헤매던 지유의 시선이 천천히 깜빡이더니, 마침내 눈앞에 일그러진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재환의 얼굴에 멎었다.

 

"……재, 환…… 아?"

 

목이 심하게 붓고 쉬어버려 바람 빠지는 소리처럼 갈라져 나오는 목소리였다.

 

재환은 헐떡이며 지유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지유야. 나야, 재환이야. 정신이 들어? 내 말 들려?"

 

지유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멍하니 재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칼, 흙탕물이 튄 뺨, 붉게 충혈되어 눈물로 젖은 눈동자, 찢어진 입술.

 

서울에서 번듯한 양복을 입고 내려왔던 그 서슬 퍼런 검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7년 전, 통일호 기차 창틀을 붙잡고 피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바라보던 열여덟 살의 성재환 그대로였다.

 

지유의 시선이 협탁 위로 향했다.

 

피 묻은 증명사진이 오롯이 그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을 본 지유의 눈가에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링거 바늘이 꽂히지 않은 왼손을 들어 올리려 했다.

 

하지만 갈비뼈의 극심한 통증으로 인해 얼굴을 와락 찌푸리며 짧은 비명을 삼켰다.

 

"움직이지 마! 갈비뼈에 금이 갔어. 가만히 있어, 제발."

 

재환이 기겁하며 지유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내리누르고, 허공으로 뻗어 올라온 그녀의 손을 얼른 두 손으로 맞잡았다.

 

지유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잡힌 손을 빼지 않고 오히려 힘없는 손가락을 오므려 재환의 손등을 꼭 쥐었다.

 

그 메마르고 상처투성이인 손끝에서 전해지는 미약한 힘에 재환의 가슴이 또다시 무너져 내렸다.

 

"……살아…… 있구나."

 

지유의 입술이 간신히 달싹였다.

 

찢긴 목구멍을 긁고 나오는 고통 속에서도, 지유가 가장 먼저 내뱉은 말은 자신의 안위가 아니었다.

 

"너…… 다친 데는…… 없어? 그 사람들…… 칼…… 총……."

 

"난 하나도 안 다쳤어. 아무렇지도 않아. 지유야, 제발 네 걱정만 해. 제발……."

 

재환의 목소리가 울컥 터져 나온 오열에 젖어 갈라졌다.

 

성재환은 고개를 떨구며 지유의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미안하다……. 내가 널 지켰어야 했는데. 내가 다 망쳤어. 널 이 지옥 속에 홀로 남겨두고, 돌아와서도 또다시 널 사지로 몰아넣었어. 전부 내 탓이야. 내가…… 내가 널……."

 

통제할 수 없는 죄책감이 거친 숨소리와 함께 터져 나왔다.

 

대한민국 최고 권력인 특수부 검사의 오만함도, 어떤 거악 앞에서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던 냉철함도 이 침상 앞에서는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그저 지유를 다치게 했다는 끔찍한 자책감에 짓눌린 한 명의 나약한 남자가 있을 뿐이었다.

 

그때, 재환의 정수리 위로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닿았다.

 

지유가 갈비뼈를 쥐어짜는 고통을 억누르며, 간신히 들어 올린 손으로 재환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가만히 쓸어내리고 있었다.

 

마치 7년 전, 요천 둑길에서 자전거를 멈춰 세우고 재환의 땀방울을 닦아주던 그날처럼.

 

재환이 멍하니 고개를 들자, 지유가 눈가에 눈물을 매단 채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창백한 뺨 위로 번지는 그 미소는 너무나 처연해서, 보는 이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만큼 눈이 부셨다.

 

"울지 마…… 바보야."

 

지유의 갈라진 목소리가 재환의 귓전을 적셨다.

 

"약속 지키러 온 사람인데…… 내가 다치면 안 되지."

 

5. 약속을 지키러 온 사람

 

'약속 지키러 온 사람인데, 내가 다치면 안 되지.'

 

그 한마디가 병실의 공기를 단숨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재환은 숨조차 쉬지 못한 채 지유를 응시했다.

 

목에 칼이 들이밀어지고, 전신이 멍투성이가 된 채 사경을 헤매다 깨어난 사람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원망을 쏟아내도 모자랄 판이었다.

 

왜 날 찾아와서 이 생지옥을 겪게 만드느냐고, 당신의 그 빌어먹을 복수와 정의 때문에 내가 왜 죽을 고비를 넘겨야 하느냐고 멱살을 잡고 울부짖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지유는 오히려 재환의 가슴에 맺힌 죄책감을 씻겨내기 위해, 제 부서진 몸을 돌보지도 않고 먼저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

 

지유의 떨리는 손가락이 천천히 내려와 재환의 뺨에 묻은 흙탕물을 살며시 훔쳐냈다.

 

손톱 밑이 깨져 피딱지가 앉은 그 손가락의 감촉이 서늘하면서도 말할 수 없이 따스했다.

 

"네가…… 올 줄 알았어."

 

지유가 띄엄띄엄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그 어두운 터널에서…… 뒤에서 비추던 헤드라이트 불빛 봤을 때…… 알았어. 너구나. 재환이가 날 구하러 왔구나……."

 

지유의 눈가에서 맑은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7년 전에도…… 넌 약속했잖아. 반드시 돌아온다고. 그리고 진짜로 돌아왔잖아. 검사가 되어서, 그 무서운 사람들 앞에서…… 날 지켜주려고."

 

"지유야……."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마. 난 하나도 안 억울해. 네가 날 살렸고…… 우리 엄마가 남긴 서류도, 네가 찾아줬잖아. 난 네가 부끄러운 검사가 되지 않을 거라는 거……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지유의 눈동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맑고 투명했다.

 

그것은 어둠에 굴복하지 않는 남원의 들풀 같은 생명력이었고, 어떤 폭압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영혼의 결기였다.

 

그 맑은 시선 앞에서 재환은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은 법전 속의 죽은 문자가 아니었다.

 

오직 이 순결하고 단단한 진심, 세상의 모든 흙탕물을 뒤집어쓰면서도 빛을 잃지 않는 한지유라는 존재 그 자체였다.

 

재환은 지유의 작은 손을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대며 눈을 감았다.

 

심장이 다시금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약한 자책과 눈물은 흔적도 없이 증발하고, 그 자리에 시퍼렇게 벼려진 칼날 같은 맹세가 들어찼다.

 

재환은 지유의 손등에 깊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망설임이나 두려움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거악을 향해 번뜩이는 서슬 퍼런 사법관의 살기만이 오롯이 타오르고 있었다.

 

"지유야, 들어."

 

재환의 목소리가 낮고 단호하게 병실을 울렸다.

 

"두 번 다시…… 네 몸에 칼끝 하나 닿지 않게 하겠다. 두 번 다시 네가 피 흘리며 눈물 흘리게 만들지 않아. 내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할게."

 

재환은 품속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끝에 묵직한 옻칠의 감촉이 닿았다.

 

백부에게 물려받아 가문의 규율과 숙명을 상징하던 독일제 검은 만년필.

 

그 캡 상단에 새겨진 라틴어 법언이 손가락 끝을 파고들었다.

 

'Fiat justitia, ruat caelum.'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그것은 이제 가문의 법언이 아니었다.

 

지유를 지켜내고, 지유의 삶을 짓밟은 자들을 모조리 지옥으로 끌어내리겠다는 성재환 자신의 절대적인 율법이었다.

 

재환은 협탁 위에 놓인 피 묻은 학생증 증명사진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지유의 떨리는 손바닥 위에 조심스럽게 쥐여주며,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감싸 쥐었다.

 

"이 약속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내가 이 남원의 썩은 뿌리를 완전히 도려내고, 널 벼랑 끝으로 몬 자들을 법정에 무릎 꿇릴 때…… 그때 이 사진을 나한테 돌려줘."

 

지유는 재환의 손안에서 사진을 꼭 쥐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창백한 얼굴 위로 번지는 미소가 비장하면서도 평온했다.

 

6. 새벽의 칼날

 

지유가 안정을 취하며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자, 재환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기척을 느낀 윤하은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성 검사님……."

 

"하은 씨."

 

재환이 나지막하게 하은을 불렀다.

 

하은은 재환의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숨을 들이켰다.

 

방금 전까지 지유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던 남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사람을 베어 넘길 듯한 푸른 검기(劍氣)가 안광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지유 곁을 지켜주십시오. 병실 문밖에는 무장한 대검 특수부 수사관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의료진 외에는 그 누구도 이 방에 발을 들이지 못할 겁니다."

 

"네…… 걱정 마세요. 제가 눈 한 번 안 깜빡이고 지킬게요."

 

하은이 주먹을 쥐며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환은 코트 깃을 바로 세우고 병실 문을 열고 나섰다.

 

복도로 나오자, 복도 양끝을 지키고 서 있던 대검 특별수사본부 수사관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주임검사님."

 

강태훈 수사관이 다가와 경례를 붙였다.

 

그의 얼굴 역시 밤샘 추격전과 밤재 터널에서의 난투로 찰과상이 가득했다.

 

"지유 씨 상태는 어떻습니까?"

 

"의식을 찾았습니다. 생명에는 지장 없습니다."

 

재환의 짧은 대답에 강태훈의 얼굴에 비로소 안도의 빛이 스쳤다.

 

"정말 다행입니다……."

 

"터널에서 체포한 피의자들은?"

 

재환의 목소리가 일순간 영하의 기온처럼 차갑게 내려앉았다.

 

강태훈이 즉각 자세를 고쳐 잡으며 품에서 보고서를 꺼냈다.

 

"남원지청 지하 특별취조실로 전원 압송 완료했습니다. 신원 확인 결과, 한양토건 소속 행동대원 둘과 목포에서 올라온 전문 청부 해결사 둘입니다. 우두머리 놈은 안면 골절로 치료를 받게 한 뒤 수갑을 채워 독방에 처박아 두었습니다."

 

"자백은."

 

"처음엔 입을 꾹 다물었지만, 김 경위와 박 경사가 지리산 별장에서 압수한 비자금 장부와 황선태 국장 덤프트럭 테러 건을 들이밀며 특수살인미수로 사형까지 갈 수 있다고 압박하자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전주교도소의 강태석이 처남 조상태를 통해 내린 옥중 납치 지령 전문을 자백했습니다. 녹음과 자필 진술서 작성까지 마쳤습니다."

 

강태훈이 건넨 진술서 첫 장에는 서슬 퍼런 문장이 적시되어 있었다.

 

'성재환 검사가 압수한 140억 장부와 한지유를 맞교환할 것.

 

응하지 않을 시 한지유를 살해해 지리산 계곡에 암매장할 것.'

 

재환의 눈가 근육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강태석.

 

그는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자신의 권력과 탐욕을 위해서라면 남원 구도심 전체를 물에 잠기게 하고, 무고한 여인의 목숨을 밥 먹듯 앗아가려 드는 금수(禽獸)에 불과했다.

 

그런 자에게 법의 자비란 사치였다.

 

"조상태는."

 

"남원 시내 외곽 은신처를 급습해 오늘 새벽 네 시 십오 분에 긴급 체포했습니다. 도주하려다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팔이 부러진 상태로 지청에 입감되었습니다. 강태석과의 통화 내역이 담긴 무선전화기도 현장에서 압수했습니다."

 

"완벽하군."

 

재환이 차갑게 읊조렸다.

 

동쪽 창밖으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밤새 대지를 적시던 비는 완전히 멎어 있었고, 유리창 너머로 씻은 듯 맑아진 지리산의 능선이 칼날처럼 날카로운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폭풍우는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심판의 시간이었다.

 

재환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새벽 다섯 시 사십오 분.

 

"강 수사관."

 

"예, 검사님."

 

"남원지청으로 복귀한다."

 

재환은 코트 주머니에서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금빛 닙에 흑청색 잉크가 가득 차 있었다.

 

"출석요구서를 작성한다. 피의자 남원시장 강태석. 적용 죄명,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업무상과실치사상,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그리고……."

 

재환의 목소리가 복도의 정적을 서늘하게 갈랐다.

 

"형법 제250조 및 제31조, 특수살인교사."

 

강태훈의 눈이 번쩍 뜨였다.

 

현직 지방자치단체장을 상대로 살인교사 혐의를 적용해 강제 인치하겠다는 것은, 건국 이래 유례가 없는 사법적 선전포고였다.

 

"출석 시각은 오늘 오전 아홉 시 정각이다. 전주교도소 보안과에 검찰 호송 버스를 급파해 강제 인치하도록 지휘해."

 

"알겠습니다! 그런데 검사님, 강태석 측 변호인단과 지역 관변 언론들이 포토라인 출석을 거부하고 지하 통로로 빼돌리려 할 수도 있습니다."

 

재환은 서늘한 냉소를 머금었다.

 

그의 시선이 지유가 잠들어 있는 308호 병실 문을 스쳐, 남원 시내를 향해 꽂혔다.

 

"어림없는 소리. 남원지청 정문 앞마당에 포토라인을 설치해라. 남원 시내 모든 취재진과 시민들에게 공표해. 그자가 어떤 추악한 짓을 저질렀는지, 수갑을 차고 끌려오는 그 흉포한 얼굴을 온 남원 시민의 눈앞에 똑똑히 보여줄 것이다."

 

재환의 발걸음이 거침없이 병원 복도를 가로질러 계단을 향했다.

 

펄럭이는 검은 코트 자락 뒤로, 결전의 태양이 지리산 자락을 붉게 물들이며 솟아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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