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렌의 구원
1. 17번 국도의 비명
와이퍼가 미친 듯이 앞유리를 긁어내렸지만,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는 시야를 집어삼킬 듯 사나웠다.
엔진의 굉음이 차체를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성재환(成宰桓)은 젖은 아스팔트를 움켜쥐듯 미끄러지는 핸들을 두 손으로 짓이기며 가속 페달을 끝까지 짓밟았다.
속도계의 바늘이 시속 140km를 넘어 위태롭게 진동했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어둠 속 가로수들이 마치 검은 유령처럼 뒤로 곤두박질쳤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차가운 칼날 같은 통증이 치밀어 올랐다.
'지유야.'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삼거리 김밥집 시멘트 바닥에 뒹굴고 있던 깨진 액자 조각, 그리고 그 위에 짓이겨져 선혈로 굳어가던 자신의 학생증 증명사진.
7년 전 광한루원(廣寒樓苑) 오작교(烏竹橋)에서 건넸던 그 작고 닳은 종이쪽지를, 그녀는 짐승 같은 폭력배들의 손에 짓밟히면서도 끝끝내 손에 쥐고 있었다.
그것을 떨어뜨리며 그녀가 느꼈을 공포와 절망이 살갗을 파고드는 비수처럼 재환의 심장을 후벼 팠다.
조수석에 앉은 강태훈 수사관이 손잡이를 부서져라 움켜쥔 채 무전기 마이크를 입술에 바짝 들이댔다.
"남원서 112 지령실! 응답하라! 대검 특별수사본부 파견 성재환 검사 차랑이다! 용의 차량 검은색 그레이스 승합차, 번호판 미부착! 17번 국도 타고 주천면에서 산내면 방향으로 전속 도주 중이다! 관내 전 순찰차는 즉시 지리산 진입로 전면 봉쇄하라! 거듭 지시한다, 1급 비상경계 발령하고 산내면 입구와 육모정 삼거리에 바리케이드를 쳐라!"
치직거리며 잡음이 섞인 무전기 너머로 남원경찰서 상황실 근무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 수, 수사관님!
관내 순찰차 4대 긴급 출동 지시했습니다!
주천파출소 순찰차 2대가 육모정 삼거리 쪽으로 진입 중입니다!
"늦으면 전원 직무유기로 구속영장 칠 줄 알아! 당장 길을 막아!"
강태훈이 핏발 선 눈으로 무전기를 집어던지듯 내려놓으며 재환을 바라보았다.
"검사님, 조금만 더 가면 밤재 터널을 지나 지리산 구불길입니다. 거긴 가드레일도 낡아서 잘못 들이받으면 천길 낭떠러지예요. 속도를 조금만……!"
"못 늦춥니다."
재환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으나, 턱을 악문 입술 사이로는 붉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놈들, 지유를 부운리 별장으로 데려가려는 게 아니에요. 140억 장부가 털렸다는 걸 알았으니, 다른 은신처로 빼돌려 증거와 맞교환하려 할 겁니다. 지유가 그놈들 손에 1분이라도 더 있으면…… 목숨이 위험합니다."
재환의 눈동자가 전방의 칠흑 같은 암흑을 꿰뚫듯 번뜩였다.
그의 귓가에 최민재가 피를 토하며 남겼던 마지막 처절한 목소리가 맴돌았다.
'검사님…… 지유를…… 제발 지유를 살려주세요…… 승합차…… 17번 국도예요……!'
7년 전, 서울로 강제 압송되던 관용차 뒤를 맨발로 쫓아오다 남원 톨게이트 아스팔트에 무릎이 갈려 나가던 열여덟 살의 지유.
그리고 어머니의 영안실 앞에서도, 붉은 페인트가 도배된 가게 앞에서도 끝끝내 자신을 믿고 그 자리를 지켜주었던 스물다섯의 지유.
그녀가 지금, 짐승 같은 자들의 손에 끌려가고 있었다.
'절대로 안 빼앗겨.'
재환의 오른손이 기어봉을 거칠게 꺾어 내렸다.
엔진이 비명을 지르며 관용 세단이 빗길을 찢고 굽이치는 산악 도로로 쏘아져 들어갔다.
저 멀리, 굽이진 도로 모퉁이 너머로 검은색 차체의 붉은 미등 두 개가 어둠 속을 번뜩이며 도망치는 모습이 번개처럼 시야에 잡혔다.
"찾았다."
재환의 눈빛에 지옥에서 기어 나온 듯한 서슬 퍼런 살기가 차올랐다.
2. 어둠 속의 공포
덜컹거리는 승합차 바닥은 얼음장처럼 차갑고 축축했다.
손목과 발목을 옥죄고 있는 거친 나일론 밧줄이 살을 파고들어 감각이 마비되어 가고 있었다.
입에 틀어막힌 청테이프 때문에 숨을 들이쉴 때마다 젖은 섬유와 본드 냄새가 목구멍을 찔렀다.
한지유는 흔들리는 차체에 머리를 부딪치면서도 필사적으로 눈을 부릅떴다.
온몸이 쑤시고 찢어질 듯 아팠다.
가게 셔터 쇠막대를 휘두르며 버티다 사내의 쇠파이프에 스쳤던 왼쪽 어깨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던 오른쪽 무릎에서 뜨거운 통증이 맥박처럼 쿵쾅거렸다.
'재환아…….'
공포가 엄습할 때마다 그녀는 심장 속으로 그 이름을 불렀다.
바닥에 떨어뜨리고 만 그 작은 증명사진.
7년 동안 양철 상자 속에서, 그리고 자신의 가슴팍 품속에서 단 하루도 떨어져 본 적 없던 그의 얼굴.
그것을 떨어뜨렸을 때 느꼈던 단장의 고통이 온몸의 상처보다 더 아프게 가슴을 짓눌렀다.
하지만 지유는 울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을 흘리면 시야가 흐려지고, 정신이 무너지면 이 짐승 같은 놈들에게 끌려가 성재환의 발목을 잡는 짐이 될 뿐이었다.
"야! 뒤에 차 붙었잖아! 저거 뭐야?"
운전대를 잡은 사내가 백미러를 보며 꽥 소리를 질렀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우두머리 해결사가 담배꽁초를 창밖으로 튕겨 내며 거칠게 뒤를 돌아보았다.
"뭐? 경찰이야? 사이렌도 안 울리는데 무슨 소리야!"
"아니, 경찰차가 아니라 검은색 승용차인데…… 미친 새끼처럼 따라붙는다고요! 코너에서 속도도 안 줄여요! 벌써 50미터 뒤까지 왔습니다!"
우두머리가 지유를 걷어차듯 발로 툭 건드리며 흉흉한 칼자국이 새겨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성재환 그 애송이 검사 새끼구만. 혼자 차 몰고 쫓아온 거야. 간이 배 밖으로 나왔지."
사내가 허리춤에서 묵직한 쇠파이프를 집어 들며 섬뜩하게 씩 웃었다.
"형님, 저놈 저러다 우리 들이받겠는데요?"
"들이받으라고 해! 저 새끼가 들고 있는 140억 장부랑 USB가 없으면 우리는 어차피 끝장이야. 이 가시나 목에 칼 들이대고 내리면 저놈은 손가락 하나 못 까딱해. 밤재 터널 지나서 공터 나오면 차 세워. 거기서 성재환 저 새끼 손발 다 부러뜨리고 장부 회수해서 밀항 배 타러 간다."
우두머리는 뒷좌석 바닥에 웅크린 지유의 머리채를 거칠게 낚아채 끌어올렸다.
살점이 뜯겨 나가는 고통에 지유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사내의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지유의 얼굴을 향했다.
"네 서방 참 대단하더라? 혼자 여기까지 쫓아오고 말이야. 근데 어쩌냐? 오늘 밤 여기서 네놈도, 그 검사 새끼도 지리산 골짜기 거름이 될 텐데."
지유는 사내의 얼굴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입이 막혀 말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녀의 맑고 깊은 두 눈에는 비굴한 굴복 대신 서슬 퍼런 결기와 경멸이 가득 차 있었다.
사내가 불쾌하다는 듯 혀를 차며 지유의 뺨을 거칠게 밀쳐냈다.
쿵, 하고 지유의 이마가 철판 벽에 부딪혔다.
어지러운 시야 속에서, 뒷유리창 너머로 눈이 멀 것 같은 강렬한 상향등 불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비바람을 뚫고 무섭게 따라붙은 검은색 세단의 헤드라이트였다.
그 빛줄기 속에 비친 운전자의 실루엣.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단정하면서도 서슬 퍼런 그 남자의 윤곽이었다.
'재환아……!'
지유의 메마른 눈가에서 마침내 뜨거운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3. 밤재 터널의 충돌
17번 국도 구불길이 끝나고 왕복 2차선의 어두운 밤재 터널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승합차는 터널 안으로 미끄러지듯 돌진했다.
터널 내부의 주황색 나트륨등 아래에서 두 차량의 추격전은 더욱 처절해졌다.
재환은 기어를 내리며 굉음과 함께 승합차의 오른쪽 후미를 향해 세단의 보닛을 바짝 밀어붙였다.
쾅-!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검사님!"
강태훈이 비명을 질렀지만 재환의 눈동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직 냉철한 계산과 분노만이 그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지유가 다치지 않으려면 차를 전복시켜선 안 된다. 회전시켜 벽에 가둬야 해.'
재환은 능숙하게 핸들을 꺾으며 승합차의 우측 뒷바퀴 휠하우스 부분을 범퍼로 강하게 압박했다.
PIT 기동(차량 강제 정지 기술)의 궤적이 빗물 젖은 터널 바닥 위에서 날카롭게 그려졌다.
승합차의 뒷바퀴가 접지력을 잃고 기괴한 마찰음을 내지르며 좌우로 요동쳤다.
"으아악! 핸들이 안 먹혀요!"
승합차 운전수가 비명을 지르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체가 반 바퀴를 빙글 돌며 터널 출구 쪽 비상 주차대 콘크리트 벽을 거칠게 들이받고 멈춰 섰다.
쿠웅-!
자욱한 연기와 함께 승합차의 라디에이터가 터지며 하얀 수증기가 치솟았다.
재환 역시 급브레이크를 밟아 승합차의 앞을 대각선으로 가로막으며 차를 세웠다.
타이어 타는 냄새와 매연이 터널 출구를 가득 메웠다.
차가 멈추기 무섭게 재환은 운전석 문을 박차고 나갔다.
"검사님! 무기 들고 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강태훈이 권총을 꺼내 들며 뒤따라 내렸다.
승합차의 찌그러진 슬라이딩 도어가 덜컹거리며 열렸다.
피를 흘리며 차에서 기어 나온 해결사 둘이 각목과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이 개새끼가! 죽어라!"
쇠파이프가 바람을 가르며 재환의 머리통을 향해 내리꽂혔다.
재환은 피하지 않았다.
한 걸음 안쪽으로 파고들며 왼쪽 팔뚝으로 쇠파이프를 든 사내의 손목을 쳐올렸다.
둔탁한 충격이 팔을 타고 올라왔지만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재환의 오른 주먹이 사내의 턱주가리를 정확하게 박살 냈다.
우두둑-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이어 다른 사내가 각목을 휘두르며 달려들자, 뒤따라온 강태훈 수사관이 사내의 무릎을 걷어차고 아스팔트에 메다꽂은 뒤 등을 짓누르며 수갑을 채웠다.
찰칵-!
"대검 특별수사본부다! 꼼짝 마!"
하지만 재환의 시선은 이미 그들을 지나쳐 승합차 내부로 향해 있었다.
수증기 사이로, 운전석 문을 열고 나온 우두머리 해결사가 지유의 머리채를 움켜쥔 채 끌어내리고 있었다.
사내의 오른손에 들린 서슬 퍼런 사시미 칼날이 지유의 창백한 목덜미에 바짝 닿아 있었다.
지유의 얼굴은 흙먼지와 핏물로 엉망이었고, 결박된 손발은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가까이 오지 마! 한 발짝만 더 오면 이 년 목을 따버린다!"
우두머리가 광기 어린 눈을 희번덕거리며 칼을 고쳐 쥐었다.
칼날이 스치며 지유의 흰 목덜미에서 가느다란 핏방울이 배어 나왔다.
재환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의 호흡이 거칠게 떨려 나왔다.
피를 흘리고 있는 지유의 모습, 입에 청테이프가 붙은 채 고통스러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재환의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듯했다.
지유의 눈동자가 재환을 향했다.
오지 말라고, 위험하니 다가오지 말라고 외치는 듯한 간절한 눈빛이었다.
4. 어둠을 찢는 사이렌
빗줄기가 터널 입구로 사납게 들이쳤다.
정적 속에서 오직 차가운 빗소리와 거친 숨소리만이 감돌았다.
우두머리 해결사는 재환이 굳어버리자 비열한 조소를 흘리며 소리쳤다.
"성재환 검사님, 대단하시네? 혼자서 여기까지 쫓아오고 말이야. 어이, 강태석 시장님 장부랑 그 USB 어디 있어? 차 트렁크에 있지? 당장 그거 들고 와서 바닥에 내려놔! 안 그러면 이 년 숨통을 여기서 끊어놓고 나 혼자 산으로 튈 테니까!"
칼끝이 지유의 살갗을 더 깊게 눌렀다.
지유가 고통에 눈을 질끈 감았다.
재환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눈빛은 살을 에는 북풍한설보다 차가웠으나, 내면은 끓어오르는 용암처럼 폭발 직전이었다.
"그 칼 치워."
재환의 입에서 낮게 깔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인간의 목소리가 아닌, 벼랑 끝에 몰린 맹수의 으르렁거림에 가까웠다.
"치우라고? 웃기지 마! 장부 가져오라고, 씨발 놈아! 셋 센다! 하나, 둘……!"
사내가 숫자를 세기 시작한 바로 그 찰나.
터널 반대편, 그리고 산 아래 굽잇길 너머에서 거대한 굉음이 지리산 골짜기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위이이이이잉-!
삐뽀삐뽀삐뽀-!
하나가 아니었다.
수십 개의 붉고 푸른 경광등 불빛이 밤재 터널 입구의 어둠을 찢어발기며 쏟아져 들어왔다.
터널 벽면을 타고 울려 퍼지는 거대한 사이렌 소리가 벼락처럼 고막을 때렸다.
"뭐, 뭐야?!"
사내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흔들리며 고개가 흔들렸다.
남원경찰서 소속 순찰차 세 대와 지청 기동 타격대 차량이 빗길을 가로지르며 터널 양쪽 입구를 완전히 에워싸고 있었다.
타이어 마찰음과 함께 멈춰 선 순찰차들에서 방탄조끼를 입고 삼단봉과 권총을 든 경찰관들이 쏟아져 나왔다.
- 남원경찰서다!
전원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도주로는 완전히 차단되었다!
확성기에서 터져 나오는 경고 방송이 터널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사내의 시선이 공포에 질려 경찰차 쪽으로 쏠린 바로 그 0.1초의 순간.
재환은 망설이지 않았다.
쾅-!
아스팔트를 박차고 나간 재환의 몸이 허공을 갈랐다.
사내가 당황해 다시 칼을 지유의 목으로 가져가려던 찰나, 재환의 긴 다리가 사내의 칼을 쥔 손목을 정확하게 걷어찼다.
퍽-!
"크아악!"
사시미 칼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가 차가운 빗물 바닥으로 땡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재환은 지체 없이 사내의 멱살을 틀어쥐며 몸통 전체로 들이받았다.
쿵-!
두 사람의 육신이 찌그러진 승합차 보닛 위로 내리꽂혔다.
재환의 주먹이 자비 없이 사내의 안면을 강타했다.
퍼억-!
퍼억-!
"감히 누구를 건드려. 감히 누구를!"
재환의 눈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
7년 동안 억눌러왔던 가문의 죄악, 강태석의 비열한 폭압, 지유가 흘려야 했던 피눈물, 그리고 오늘 밤 그녀를 잃을 뻔했다는 참담한 공포가 한 줌의 자비도 남기지 않고 주먹에 실려 터져 나갔다.
"사, 살려…… 살려주……!"
사내의 코뼈가 내려앉고 피범벅이 된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검사님! 멈추십시오! 검사님! 숨 끊어집니다!"
달려온 강태훈 수사관과 남원서 경위가 필사적으로 재환의 양팔을 붙잡아 뜯어말렸다.
"이놈은 법정에 세워야 합니다! 검사님, 지유 씨를 보십시오! 지유 씨를!"
'지유 씨를 보십시오.'
그 한마디가 광기 어린 재환의 이성을 차갑게 번쩍 깨웠다.
재환의 거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주먹을 떨구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차디찬 터널 바닥에, 빗물과 기름때를 뒤집어쓴 채 힘없이 쓰러져 있는 작은 그림자가 보였다.
5. 빗속의 포옹
재환은 비틀거리며 지유를 향해 다가갔다.
그의 무릎이 바닥의 기름 흙탕물 속으로 사정없이 털썩 꺾여 내려앉았다.
정장 바지가 젖어 들고 흙탕물이 튀었지만,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오직 떨리는 손으로 지유의 얼굴을 감싸 쥐었을 뿐이었다.
"지유야……."
목소리가 갈라져 터져 나왔다.
재환은 떨리는 손끝으로 지유의 입을 막고 있던 청테이프를 조심스럽게, 살점이 상하지 않도록 천천히 떼어냈다.
이어 품속에서 각인 만년필 대신 주머니칼을 꺼내어 그녀의 손목과 발목을 옥죄고 있던 나일론 밧줄을 단숨에 끊어냈다.
탁, 하고 끊어진 밧줄 사이로 피가 통하지 않아 보랏빛으로 변한 손목과 깊게 패인 붉은 흉터가 드러났다.
재환의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눈물이 빗물과 뒤섞여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미안해…… 내가 늦었어. 내가…… 널 또 이렇게 만들었어…… 미안하다, 지유야……."
대한민국 검사 성재환이 아니었다.
세상을 호령하는 권력자들을 단죄하던 차가운 특수부 검사의 오만함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곳에는 그저 7년 전, 지키지 못한 약속 앞에서 피눈물을 흘리던 열여덟 소년만이 무릎을 꿇고 울부짖고 있었다.
재환은 자신의 젖은 정장 재킷을 벗어 지유의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부서질 듯 연약한 몸을 조심스럽게, 부서진 보물을 품에 안듯 자신의 가슴속으로 힘껏 끌어당겼다.
지유의 이마가 재환의 단단한 어깨에 닿았다.
재환의 체온, 그 익숙하고 깊은 냄새, 그리고 그의 가슴속에서 미친 듯이 요동치는 심장 박동이 지유의 온몸으로 전해져 왔다.
공포로 얼어붙어 있던 지유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재…… 재환아……."
쉰 목소리가 겨우 흘러나왔다.
지유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떨리는 손을 들어, 재환의 젖은 등 뒤를 더듬었다.
그의 등이 거칠게 들썩이고 있었다.
그가 울고 있었다.
늘 단정하고, 흔들림 없이 바위처럼 버티고 서 있던 그 남자가, 아이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자신을 끌어안고 울고 있었다.
지유는 아픈 어깨를 참아내며, 재환의 옷자락을 꼭 쥐었다.
'살아있구나.'
'그가 무사하구나.'
자신이 살아났다는 안도감보다, 재환이 다치지 않고 자신의 곁에 와 주었다는 안도감이 먼저 가슴을 가득 채웠다.
지유의 입술 끝에 희미하고 가녀린 미소가 번졌다.
"다행이다…… 너…… 안 다쳐서……."
"바보야…… 네가 다쳤잖아. 네가 이렇게 피를 흘리고 있는데……."
재환이 울먹이며 지유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녀의 창백한 뺨에 묻은 흙탕물을 자신의 셔츠 소매로 닦아내며, 피가 배어 나오는 목덜미의 상처를 손수건으로 조심스럽게 눌렀다.
지유는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도 재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려 애썼다.
자신의 품속, 갈기갈기 찢겨 나간 카디건 주머니 속을 더듬던 지유가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진…… 네 사진…… 가게 바닥에…… 떨어뜨렸어…… 미안해…… 그거…… 끝까지 가지고 있으려고 했는데……."
그 말에 재환의 심장은 완전히 부서져 내렸다.
그 생사의 갈림길에서, 칼날이 목에 들어오는 그 찰나에도 그녀는 자신의 사진을 지키지 못했다고 자책하고 있었다.
재환은 품속 안주머니에서 붉은 피가 묻은 작은 종이 조각을 꺼내 지유의 떨리는 손바닥 위에 쥐여주었다.
김밥집 바닥에서 그가 피눈물을 삼키며 주워 올렸던, 바로 그 증명사진이었다.
"여기 있어. 내가 찾아왔어. 네가 지킨 거야, 지유야."
지유의 손가락이 피 묻은 사진의 모서리를 더듬었다.
뒷면에 적힌 흑청색 글씨,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그 글씨의 온기가 지유의 손끝을 타고 심장으로 스며들었다.
지유의 긴장이 스르르 풀려나갔다.
머릿속을 짓누르던 극심한 통증과 차가운 공포가 물러가고, 재환의 품이 주는 한없는 안식과 따뜻함이 그녀의 온몸을 감싸 안았다.
"재환아…… 나…… 너무…… 졸려……."
지유의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녀의 고개가 재환의 품속으로 힘없이 툭 떨어졌다.
"지유야? 지유야!"
재환이 소스라치게 놀라 그녀를 흔들었지만, 지유는 깊은 안도감 속에서 가녀린 숨만을 내쉬며 의식을 잃은 채 잠들어 있었다.
극도의 공포와 신체적 고통을 오직 재환을 기다리는 정신력 하나로 버텨내다, 그의 품에 안긴 순간 모든 끈을 놓고 깊은 기절 속으로 빠져든 것이었다.
6. 사법의 벼락
"구급차! 당장 구급차 불러!"
재환의 벼락같은 고함이 밤재 터널을 뒤흔들었다.
순찰차 사이로 대기하고 있던 남원소방서 119 구급차가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터널 안으로 진입했다.
구급대원들이 들것을 들고 달려왔다.
재환은 남의 손에 맡기지 않고 지유를 직접 안아 올려 조심스럽게 들것 위에 눕혔다.
구급대원이 신속하게 지유의 맥박을 짚고 목덜미의 상처에 멸균 거즈를 덧대었다.
"맥박은 약하지만 안정적입니다! 뇌진탕 증세와 극심한 탈진, 타박상으로 인한 쇼크성 실신입니다! 남원의료원으로 긴급 후송하겠습니다!"
"나도 같이 탑승한다."
재환이 구급차 안으로 뛰어오르려던 찰나, 강태훈 수사관이 다급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
"검사님!"
강태훈의 턱짓이 터널 입구를 가리켰다.
터널 바닥에는 피투성이가 된 우두머리 해결사와 일당 셋이 경찰관들에게 짓눌린 채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남원경찰서 수사과장과 형사들이 사색이 된 얼굴로 서 있었다.
자신들이 비호하던 강태석 시장의 사병들이 현직 검사 살해 협박 및 민간인 특수납치 현행범으로 모조리 검거된 현장이었다.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도, 은폐할 핑계도 없었다.
재환은 들것에 누워 산소마스크를 쓴 지유의 차가운 손을 꼭 쥐었다.
그의 눈빛에서 슬픔이 걷히고, 서슬 퍼런 사법의 칼날이 다시 벼려지기 시작했다.
'지유야, 잠시만 기다려.'
'네 피와 상처를 만든 자들의 숨통을, 내가 법의 이름으로 완전히 끊어놓고 네 곁으로 갈게.'
재환은 지유의 손을 가만히 내려놓고 구급대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료원 중환자실로 가십시오. 대검 수사관 둘을 붙여 병실 앞을 24시간 철통 경호하게 할 겁니다. 털끝 하나 손대지 못하게 하세요."
"알겠습니다, 검사님!"
구급차의 뒷문이 닫히고, 적색 경광등을 번뜩이며 17번 국도를 타고 남원의료원을 향해 맹렬히 질주해 나갔다.
재환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비에 젖은 그의 검은 정장과 셔츠 곳곳에는 지유의 피와 범인들의 흙탕물이 얼룩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걸음걸이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재환이 바닥에 꿇어앉혀진 우두머리 해결사 앞으로 다가갔다.
사내는 피범벅이 된 얼굴로 부들부들 떨며 재환의 구두코를 바라보았다.
"누구 지시냐."
재환의 목소리는 터널 벽을 타고 스산하게 울렸다.
사내는 겁에 질려 말을 더듬었다.
"저, 저희는 그냥…… 위에서 시키는 대로……."
"형법 제288조 영리·추행 등 목적 약취·유인, 제276조 체포·감금,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제3조 특수폭행,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보복범죄, 그리고 형법 제250조 살인미수."
재환이 코트 안주머니에서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금빛 닙에 새겨진 라틴어 법언,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그 펜촉이 사내의 미간 바로 앞을 겨누었다.
"네놈들이 불지 않아도 상관없다. 너희가 쓰던 대포차, 무전기, 그리고 지리산 은신처 통화 내역까지 1시간 안에 싹 다 털어낼 테니까. 그리고 너희에게 옥중 지령을 내린 강태석, 그 지령을 밖에서 전달한 처남 조상태까지……. 남원의 모든 부패를 엮어 법정에 세울 거다. 내 장담하지. 너희는 살아서 이 교도소 담장 밖으로 다시는 못 나온다."
사내들의 얼굴이 사색을 넘어 잿빛으로 질려갔다.
재환은 남원경찰서 수사과장을 향해 차갑게 고개를 돌렸다.
수사과장은 재환의 서슬 퍼런 눈빛을 마주하자마자 오금이 저려 뒷걸음질을 쳤다.
"과장님."
"네, 넷! 성 검사님!"
"현행범 네 명, 전원 특수강도상해 및 살인미수 혐의로 남원지청 지하 특별취조실로 직접 압송합니다. 남원경찰서 유치장엔 단 1초도 안 넣습니다. 압송 과정에서 말 한마디라도 새어나가면, 과장님부터 범인도피죄 및 직무유기로 긴급 체포할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명, 명심하겠습니다! 즉시 지청으로 호송하겠습니다!"
경찰관들이 허둥지둥 해결사들의 멱살을 잡아채 순찰차 안으로 쑤셔 넣었다.
재환은 강태훈 수사관을 돌아보았다.
"강 수사관."
"예, 검사님."
"지청에 연락해서 안진우 검사 깨우세요. 그리고 전주교도소에 통보하십시오."
재환의 입술에서 얼음장 같은 사법의 선고가 떨어져 내렸다.
"피의자 강태석에 대한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특수살인교사 및 특수약취유인 교사 혐의로 피의자 신문 출석요구서를 지금 즉시 교도소로 송달합니다. 내일 오전 9시. 남원시장 강태석을 지청 204호 검사실로 강제 인치하여 포토라인에 세웁니다."
강태훈의 눈에 전율이 어렸다.
"알겠습니다, 검사님! 즉시 집행하겠습니다!"
비바람이 잦아들기 시작한 17번 국도 밤재 터널 위로, 먼동이 트기 전의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서서히 번져가고 있었다.
재환은 피 묻은 만년필을 가슴 안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지유가 목숨을 걸고 지켜낸 진실, 그리고 그녀가 흘린 피의 대가를 치르게 할 시간이었다.
재환의 발걸음이 지유가 기다리고 있는 남원의료원을 향해 힘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