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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74화

궁지에 몰린 맹수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찢겨 나간 보고서

 

차가운 철창 너머로 빗물 섞인 바람이 들이쳤다.

 

전주교도소 미결수 특별 독방의 시멘트 바닥에는 눅눅한 습기와 곰팡내, 그리고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가 고여 있었다.

 

벽 모서리에 웅크려 앉아 있던 강태석(姜泰錫)은 굳게 닫힌 철문 밖에서 들려오는 교도관의 무거운 군화 소리에 번뜩 고개를 들었다.

 

그의 두 눈은 핏발이 서서 짓물러 있었고, 텁수룩하게 자란 수염 사이로 드러난 입술은 바짝 말라 터져 있었다.

 

철창 배식구가 덜컹거리며 열리더니, 교도관의 은밀한 손길을 통해 두껍게 접힌 서류 봉투 하나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강태석은 짐승처럼 바닥을 기어가 봉투를 낚아챘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봉투를 찢어발기자, 그 안에서 피비린내 나는 글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밖에서 대기하던 비서실과 잔존 조직원들이 긴급히 타전해 온 비밀 상황 보고서였다.

 

종이에 적힌 문장들을 내려읽던 강태석의 동공이 일순간 찢어질 듯 확장되었다.

 

'금일 오전 10시 40분경, 성재환 검사 지휘하에 대검 특수부 및 남원지청 합동 수사팀, 지리산 산내면 부운리 별장 급습 완료.'

 

'지하 1층 특수 방화 금고 강제 개방, 보관 중이던 현금 및 무기명 채권 140억 원 전액 압수.'

 

'남원 특별 대외관리 원부 5권 및 디지털 녹음 USB 일체 검찰에 압수됨.'

 

'황선태 전 건설교통국장, 남원의료원 중환자실에서 의식 회복 후 마스터키 및 비밀번호 자진 공여 확인.'

 

'대검 중수부 정종길 부장 지휘로 국회 내무위원장 김문현 출국금지 및 체포영장 청구 접수, 중앙 정무라인 연결선 전면 차단.'

 

문장이 끝날 때마다 강태석의 마른 목구멍에서 쇳소리가 섞인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황선태…… 그 개새끼가……!"

 

단말마 같은 비명이 좁은 독방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강태석은 손에 쥔 종이를 구기다 못해 갈기갈기 찢어 허공에 뿌렸다.

 

부운리 별장의 지하 금고는 그가 지난 30년 동안 남원 바닥에서 피와 땀, 그리고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짓밟고 일궈낸 왕국의 심장이었다.

 

어떤 사정기관도, 중앙의 어떤 정권도 감히 손을 대지 못했던 그 철옹성 같은 보루가 단 반나절 만에 털렸다.

 

그것도 자신이 풋내기라 비웃었던 성호석의 아들, 성재환의 손에 말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그 금고 안에 들어 있던 다섯 권의 바인더였다.

 

그 바인더 속에는 자신이 정관계 실세들에게 뿌린 뇌물 장부뿐만 아니라, 삼거리 김밥집의 박순례를 어떻게 옥죄고 피를 말려 죽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세부 공작 일지가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위생과와 소방과를 동원해 목을 조르고, 세무조사로 피를 말리고, 끝내 병원비와 치료를 틀어막아 숨통을 끊어 놓았던 그 모든 살인 행정의 기록들이 성재환의 손에 통째로 넘어간 것이다.

 

"끝장이야…… 이대로 가면 사형이야……."

 

강태석은 벽에 뒤통수를 찧으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피가 배어 나오는 이마의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김문현마저 출국금지가 떨어지고 대검 중수부의 칼날 아래 목이 달아나게 생긴 마당이었다.

 

더 이상 중앙의 빽도, 법무부의 직무 배제 외압도 자신을 구해줄 수 없었다.

 

성재환은 이제 자신을 요천 제방 붕괴의 주범뿐만 아니라 살인교사, 나아가 한 사람을 조직적으로 말려 죽인 파렴치한 살인마로 법정에 세울 터였다.

 

그의 눈동자에 섬뜩하고 기괴한 광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살아날 구멍은 단 하나뿐이었다.

 

법과 절차, 그따위 허울 좋은 규칙이 모두 무너져 내린 막다른 골목에서 맹수가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상대의 가장 연약한 목덜미를 물어뜯는 것뿐이었다.

 

"성재환…… 네놈이 내 심장을 도려냈겠다?"

 

강태석은 독방 바닥에 흩어진 종이 쪼가리들을 짓밟으며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의 시선이 독방 한구석, 환기창 틈새로 비쳐 드는 희미한 잿빛 하늘에 멎었다.

 

성재환에게 심장이 어디인지, 그 오만한 애송이 검사가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바로 동문 우체국 뒷골목, 삼거리 김밥집의 한지유였다.

 

2. 어둠 속의 비밀 지령

 

독방 철문의 배식구가 다시금 조용히 열렸다.

 

강태석에게 매수되어 옥중 불법 통신을 눈감아주던 교도관의 은밀한 눈빛이 번뜩였다.

 

강태석은 품속에서 꼬깃꼬깃하게 접어둔 쪽지 하나와 함께, 교도관의 손에 묵직한 약속을 쥐여주었다.

 

"면회실로 가자. 조상태가 왔을 거다."

 

교도관은 침을 꿀꺽 삼키며 쇠창살 문을 열었다.

 

몇 겹의 육중한 철문을 지나 도착한 곳은 일반 수용자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교도소 지하 구치감 뒤편의 특별 접견실이었다.

 

탁자 맞은편에는 강태석의 처남이자 온갖 음지의 더러운 폭력을 도맡아 처리해 온 조상태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앉아 있었다.

 

조상태의 옷자락에는 아직 빗물이 흥건히 젖어 있었고, 손가락은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매형…… 소식 들으셨습니까? 부운리가…… 별장이 통째로 털렸습니다! 황선태 그 미친놈이 금고 번호까지 다 불어버렸어요!"

 

조상태가 자리에 앉자마자 목을 빼고 울먹이듯 속삭였다.

 

강태석은 아무 말 없이 조상태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철제 의자가 바닥을 긁으며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닥쳐라. 목소리 낮춰, 이 병신 같은 새끼야."

 

강태석의 낮게 깔린 목소리는 마치 지옥 밑바닥에서 긁어 올린 듯한 살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의 짓무른 눈동자가 조상태의 미간을 꿰뚫을 듯 노려보았다.

 

"김문현이도 모가지가 날아가게 생겼다. 서울에서 손을 쓸 수 있는 놈은 이제 아무도 없어. 알겠냐?"

 

"그, 그럼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합니까? 검찰 놈들이 조만간 저한테도 영장 치고 들어올 텐데……! 당장 밀항선이라도 타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밀항?"

 

강태석이 조소하듯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남원 나들목, 군산항, 목포항, 여수항까지 성재환 그 새끼가 쥐새끼 한 마리 못 빠져나가게 검경 합동 통제선을 다 깔아놨다. 지금 움직이면 십 리도 못 가서 모가지에 쇠고랑 찬다."

 

"그럼 가만히 앉아서 죽으란 말입니까? 매형, 저 장부 속에 우리 이름 석 자가 다 박혀 있다고요!"

 

조상태가 숨이 넘어갈 듯 헐떡였다.

 

강태석은 잡고 있던 조상태의 멱살을 탁자 위로 패대기치듯 밀어붙였다.

 

쾅 소리와 함께 조상태의 이마가 합판 탁자에 처박혔다.

 

강태석이 상체를 숙여 조상태의 귓가에 뱀처럼 차가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장부는 털렸어도 판을 뒤엎을 카드는 남아 있어."

 

"카, 카드라니요……?"

 

"성재환 그 애송이 새끼의 아킬레스건. 그놈이 지 목숨보다 아끼는 년이 누구냐."

 

조상태의 떨리던 눈동자가 멈칫했다.

 

"한지유…… 말씀이십니까?"

 

"그래. 삼거리 김밥집 계집년."

 

강태석의 이빨 사이로 섬뜩한 악취와도 같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성재환이가 아무리 칼을 쥐고 날뛰어도, 그 계집 목에 칼이 들어오면 그 칼을 제 손으로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그놈은 그런 놈이야. 제 아비 성호석이처럼 계집질에 목숨 걸고 정의놀음에 미쳐 있는 위선자 새끼니까."

 

강태석은 뼈마디가 굵은 주먹으로 탁자를 쾅 내리쳤다.

 

"지금 당장 대기시켜 둔 애들 풀어. 어중이떠중이 양아치들 말고, 예전에 화순 광산이랑 군산 부두에서 사람 담그던 놈들로 긁어모아."

 

"매형, 그건…… 납치는 일이 너무 커집니다. 검사 애인을 건드렸다가는 검찰 전체가 들고일어날 텐데요!"

 

"어차피 이대로 가면 우린 사형 아니면 무기징역이야!"

 

강태석이 핏발 선 눈을 부라리며 으르렁거렸다.

 

"살인교사에 뇌물에 횡령까지 다 털렸는데, 여기서 납치 하나 더 얹는다고 뭐가 달라져? 판을 흔들어야 산다. 그 계집을 손에 쥐고 지리산 골짜기로 끌고 가. 그리고 성재환이한테 전화를 걸어라. 증거 바인더 다섯 권이랑 USB 원본 들고 혼자 기어오라고. 안 그러면 계집년 사지를 찢어 요천 바닥에 던져버리겠다고."

 

조상태는 강태석의 얼굴에서 번뜩이는 완벽한 파멸의 광기를 보았다.

 

이 사내는 이미 정상적인 인간의 이성을 상실했다.

 

물에 빠진 맹수가 지푸라기 대신 상어의 아가리를 물어뜯으려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조상태 역시 다른 탈출구가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애들은 몇 놈이나 붙일까요?"

 

"승합차 두 대로 움직여라. 번호판 떼고, 유리창엔 까만 썬팅 제일 짙은 걸로 발라. 김밥집 골목 앞뒤를 완전히 틀어막아. 계집년이 가게 문 닫고 나오는 순간, 입 틀어막고 마대자루 씌워서 30초 안에 실어 날라."

 

강태석이 조상태의 뺨을 거칠게 툭툭 쳤다.

 

"실수하면 네놈 목숨도 끝이다. 성재환이 냄새채기 전에, 오늘 밤 어둠이 완전히 깔리는 그 순간 끝내."

 

조상태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접견실의 무거운 철문이 열리고, 조상태가 쫓기듯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강태석은 핏물 밴 입술을 핥으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성재환…… 네놈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끝까지 가보자."

 

3. 204호의 온기와 비극의 그림자

 

같은 시각, 남원지청 2층 204호 검사실 안에는 팽팽했던 긴장감이 가라앉고 묵직한 적막이 감돌고 있었다.

 

창밖에서는 지리산을 적시던 장대비가 조금씩 잦아들며 부슬비로 바뀌어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산내면 부운리 별장에서 목숨을 걸고 압수해 온 다섯 권의 검은색 가죽 바인더와, 손가락만 한 디지털 USB 메모리가 놓여 있었다.

 

지유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바인더의 모서리를 쓸어내렸다.

 

먼지와 곰팡내, 그리고 빗물이 얼룩진 가죽 표면은 30년간 남원을 짓누르고 있던 거대한 어둠의 무게를 고스란히 뿜어내고 있었다.

 

"이게…… 그 사람들이 숨겨왔던 전부인가요?"

 

지유의 떨리는 물음에, 책상 맞은편에 서 있던 성재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재환의 어깨와 셔츠는 지리산의 진흙과 빗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새벽의 서릿발처럼 형형하게 살아 있었다.

 

"그래. 140억의 비자금, 그리고 남원의 땅을 빼앗고 법을 농락했던 자들의 이름이 1원 단위까지 적혀 있어. 대검 중수부에서 방금 김문현에 대한 긴급 체포영장을 청구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제 그 누구도 이 수사를 막을 수 없어."

 

재환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그 안에 서린 무게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는 지유의 곁으로 다가와 탁자 한구석에 놓인 알루미늄 3단 보온 도시락을 바라보았다.

 

지청 정문에서 계란과 흙탕물을 뒤집어쓰면서도 지유가 가슴에 품고 지켜냈던 바로 그 도시락이었다.

 

뚜껑 안쪽에 흑청색 잉크로 단정하게 적혀 있던 글귀.

 

'남원은 당신의 약속을 기억합니다.'

 

그 한 줄의 문장이 없었더라면, 서울에서 들이닥친 대검 감찰반의 표적 탄압과 정오 면직 공작의 칼날 앞에서 재환 역시 무너졌을지도 몰랐다.

 

재환은 바인더를 펼치려던 지유의 손을 조용히 감싸 쥐었다.

 

지유의 손등은 아침의 거친 몸싸움으로 인해 붉게 긁혀 있었고, 손가락마디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재환의 가슴 한구석이 칼로 베인 듯 아려왔다.

 

바인더의 세 번째 권에는 차마 지유에게 보여줄 수 없는 끔찍한 기록이 적혀 있었다.

 

'삼거리 김밥집 박순례 관리 일지.'

 

위생과 직원을 매수해 소금통을 뒤엎게 만들고, 소방과를 앞세워 한겨울에 가스 밸브를 잠그게 하고, 끝내 병원 원무과장을 압박해 중환자실 투석 치료비를 일시 청구하도록 종용했던 강태석의 친필 메모들.

 

그것은 단순한 탄압이 아니라, 한 가난한 어머니의 숨통을 합법이라는 이름의 올가미로 서서히 조여 죽인 잔혹한 학살의 일기장이었다.

 

이 비극의 전모를 알게 된다면 지유의 여린 심장이 얼마나 갈기갈기 찢겨 나갈 것인가.

 

재환은 입술을 짓씹으며 지유의 손을 더욱 단단히 쥐었다.

 

"지유야."

 

"네, 재환아."

 

"오늘 밤엔…… 가게 문을 열지 마."

 

지유가 의아한 듯 큰 눈을 깜빡이며 재환을 올려다보았다.

 

"가게를요? 왜요? 아침에 페인트 지우느라 난리가 났었지만, 낮에 동네 분들이 도와주셔서 다 치웠어요. 오늘 저녁엔 기다리시는 단골분들도 계실 텐데……."

 

"강태석이 궁지에 몰렸어."

 

재환의 목소리가 한층 가라앉았다.

 

"맹수는 덫에 걸려 목줄이 죄어들 때 가장 사납게 발악하는 법이야. 그놈의 별장이 털렸고, 김문현마저 목이 달아나게 생겼다는 걸 교도소 안에서도 알게 될 거다. 조상태나 잔존 세력들이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 오늘 밤은 당장 지청 숙직실이나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하자. 내가 수사관들을 붙여줄게."

 

지유는 재환의 흔들리는 눈동자 속에서 자신을 향한 깊은 공포와 절박함을 읽어냈다.

 

그것은 서슬 퍼런 검사 성재환의 눈빛이 아니었다.

 

7년 전, 남원역 승강장에서 피 흘리는 무릎으로 주저앉았던 자신을 바라보며 가슴을 찢기듯 울부짖던 열여덟 소년의 눈빛이었다.

 

지유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자유로운 다른 한 손으로 재환의 거친 소매 끝을 살며시 쥐었다.

 

"재환아. 나 도망 안 친다고 했잖아."

 

"지유야."

 

"내가 도망치면, 저 사람들이 또 수군거릴 거야. 김밥집이 결국 겁을 먹고 도망쳤다고. 성재환 검사가 제 사람 하나 못 지켜서 숨겨뒀다고. 나는 네 뒤에 숨는 짐이 되고 싶지 않아."

 

지유의 음성은 맑고 단단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7년간 비바람을 견뎌내며 어머니의 곁을 지켰던 소년 가장의 굳은 심지가 또렷이 박혀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그러셨어. 가게를 지키는 게 우리 가족의 뼈를 지키는 거라고. 붉은 페인트도 지워냈고, 포클레인도 당신 법전 하나로 막아냈잖아. 지금 가게 불을 끄면, 남원 사람들 마음속에 켜진 희망의 불도 꺼져버려."

 

"하지만……."

 

"걱정하지 마. 일찍 들어갈게. 저녁에 단골분들 김밥 딱 서른 줄만 말아 드리고, 여덟 시가 되기 전에 셔터 내리고 문 걸어 잠글게. 응?"

 

지유는 재환의 손등을 토닥이며 안심시키듯 속삭였다.

 

그 올곧은 고집 앞에서 재환은 더 이상 강요할 수 없었다.

 

그녀의 저 당당한 자존심이야말로 지난 7년 동안 자신이 신림동의 차가운 단칸방에서 피를 토하며 버텨낼 수 있었던 유일한 등대였기 때문이었다.

 

재환은 길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대신 일곱 시 반에 내가 직접 모시러 갈게. 강태훈 수사관이랑 김 경위한테 김밥집 골목 입구에 잠복 순찰을 돌리라고 지시해 둘 테니까,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소리쳐. 알겠지?"

 

"응. 약속할게."

 

지유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 뒤에 도사린 끔찍한 비극의 그림자를, 그녀는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다.

 

4. 깔리는 땅거미와 낯선 숨결

 

오후 여섯 시가 넘어가자 남원 시내 위로 짙은 먹구름과 함께 빠른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장대비는 잦아들었지만, 대신 눅눅한 안개가 요천 변에서부터 피어올라 구도심의 좁은 골목길들을 뱀처럼 휘감았다.

 

동문 우체국 뒷골목, 삼거리 김밥집의 처마 밑에는 노란 백열전구가 희미한 빛을 밝히고 있었다.

 

낮 동안 상인들과 시민들이 달라붙어 수세미로 문지르고 닦아낸 덕분에, 외벽에 도배되었던 붉은 페인트 낙서는 희미한 얼룩으로만 남아 있었다.

 

가게 안에서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와 갓 지은 밥 냄새가 훈훈하게 번져 나왔다.

 

"지유야, 진짜 괜찮겠냐? 내가 오늘 밤은 가게에서 같이 자줄까?"

 

단짝 친구 윤하은이 밥주걱을 든 채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하은은 낮에 시위대가 던진 계란을 맞고 넘어져 무릎에 멍이 시퍼렇게 들어 있었다.

 

지유는 정갈하게 만 단무지와 우엉을 김 위에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하은아. 너희 어머니도 낮에 소식 듣고 놀라셔서 쓰러지실 뻔했다며. 어서 들어가 봐. 나 진짜 서른 줄만 딱 싸고 바로 문 닫을 거야. 성 검사님이 일곱 시 반에 데리러 오기로 했어."

 

"성 검사님이? 직접?"

 

하은의 눈이 동그래졌다.

 

"응. 그러니까 아무 걱정 말고 얼른 가. 빗길에 미끄러라."

 

지유는 하은의 등을 떠밀다시피 하여 은박지에 싼 김밥 두 줄을 손에 쥐여주었다.

 

하은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가게 안에 홀로 남은 지유는 조리대 앞에 섰다.

 

칼날이 도마 위를 규칙적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적막한 골목 안에 울려 퍼졌다.

 

탁, 탁, 탁, 탁.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매일같이 듣던 그 소리였다.

 

도마의 나무 결마다 어머니의 손때가 묻어 있었고, 벽면의 달력에는 어머니가 삐뚤빼뚤하게 적어둔 장날 표시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지유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칼질을 이어갔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골목 안의 인적은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낮 동안 북적이던 상인들도 흉흉한 소문과 낮의 테러 여파 때문인지 일찌감치 셔터를 내리고 귀가한 뒤였다.

 

요천 변에서 불어오는 강바람에 김밥집 처마 끝에 매달린 낡은 놋쇠 풍경이 달그락거리며 서늘한 쇳소리를 냈다.

 

달그랑, 달그랑.

 

그 청아했던 풍경 소리가 오늘따라 왠지 모르게 불길한 경고음처럼 지유의 고막을 찔렀다.

 

지유는 문득 한기를 느끼며 고개를 들어 통유리창 밖을 내다보았다.

 

박스 테이프로 거미줄처럼 기워놓은 유리창 너머, 짙은 어둠이 깔린 삼거리 골목 어귀에 이상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비어 있어야 할 폐가 골목 모퉁이에, 번호판이 진흙으로 짓이겨진 검은색 그레이스 승합차 한 대가 라이트를 끈 채 비스듬히 서 있었다.

 

차창 전체에는 안을 전혀 들여다볼 수 없을 정도로 짙은 검은색 썬팅 필름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반대편, 동문 우체국 쪽 좁은 일방통행로 입구에도 또 다른 검은색 봉고차 한 대가 골목의 퇴로를 완전히 막아서듯 시동을 끈 채 멈춰 섰다.

 

승합차의 머플러에서는 빗물 섞인 하얀 매연만이 낮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지유의 손이 멈칫했다.

 

칼날이 도마 위에서 헛돌았다.

 

골목 안의 공기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붙었다.

 

5. 함정에 빠진 수사관들

 

같은 시각, 삼거리 김밥집에서 불과 200미터 떨어진 남원천 변 공영주차장.

 

성재환 검사의 지시를 받고 현장 경계를 위해 잠복 중이던 강태훈 수사관과 김 경위의 은색 쏘나타 승용차 안.

 

와이퍼가 유리창에 맺힌 빗방울을 둔탁하게 훔쳐내고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강태훈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오후 7시 10분.

 

검사실에서 성재환 검사가 마지막 대검 보고 서류를 결재하고 출발하기까지 불과 20분도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김 경위님, 아까부터 저 삼거리 쪽 골목길에 수상한 차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조수석에 앉아 있던 김 경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무전기를 고쳐 쥐었다.

 

"어둠이 짙어서 잘 안 보입니다만…… 동문 우체국 쪽으로 봉고차 한 대가 들어가는 걸 봤습니다. 남원 번호판이 아닌 것 같더군요."

 

"순찰 한번 돌고 오겠습니다. 성 검사님 오시기 전에 골목 정리해 둬야 합니다."

 

강태훈이 시동을 걸기 위해 키를 돌리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쿵-!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승용차 뒷범퍼가 거대하게 흔들렸다.

 

강태훈과 김 경위의 상체가 앞으로 튕겨 나갔다가 안전벨트에 걸려 덜컹 멎었다.

 

"크악! 뭐야!"

 

강태훈이 룸미러를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헤드라이트를 상향등으로 번쩍이며 돌진해 온 낡은 1톤 타이탄 트럭 한 대가 자신들의 승용차 뒤꽁무니를 그대로 들이받아 박살을 낸 채 밀어붙이고 있었다.

 

운전석 문을 열고 뛰어나오려던 강태훈의 시야에, 트럭 조수석에서 뛰어내린 건장한 체격의 사내 서너 명이 들어왔다.

 

사내들의 손에는 묵직한 쇠파이프와 각목이 들려 있었다.

 

"검찰 놈들이다! 차 문 열지 못하게 막아!"

 

사내들이 소리를 지르며 쏘나타의 보닛과 앞유리창을 향해 가차 없이 쇠파이프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콰창-!

 

앞유리창이 하얗게 거미줄을 치며 깨져 나갔다.

 

"개새끼들이……! 강태석 패거리다!"

 

김 경위가 권총 홀스터에 손을 가져가며 문을 박차고 나가려 했지만, 밖에서 사내 둘이 어깨로 차 문을 짓누르며 쇠파이프를 문틈에 쑤셔 박았다.

 

"김 경위님, 무전 쳐요! 검사실로 무전 쳐! 지유 씨가 위험해!"

 

강태훈이 부서진 유리창 틈새로 손을 뻗어 한 놈의 멱살을 잡으며 소리쳤다.

 

김 경위가 다급히 무전기 송신 버튼을 눌렀다.

 

"치익- 204호! 성 검사님! 습격입니다! 주차장에서 트럭에 받혔습니다! 놈들의 목표는 삼거리 김밥집입니다! 지유 씨를…… 치이익-!"

 

그러나 밖에서 내리친 각목이 무전기 안테나를 후려치며 통신은 거친 노이즈와 함께 끊어지고 말았다.

 

트럭은 쏘나타를 주차장 구석 콘크리트 벽면으로 거칠게 밀어붙여 차 문조차 열 수 없도록 완벽히 가두어버렸다.

 

조상태가 사주한 해결사들의 철저하고 치밀한 유인 차단 작전이었다.

 

6. 닫히지 않는 셔터

 

오후 7시 18분.

 

동문 우체국 뒷골목의 가로등 불빛이 전압이 불안정한 듯 지직거리며 깜빡였다.

 

삼거리 김밥집 안에서 지유는 마지막 김밥을 썰어 도시락 통에 담았다.

 

서른 줄의 주문이 모두 끝났다.

 

손목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가게 밖의 적막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깊었다.

 

지유는 조리대 위의 행주를 빨아 널고, 앞치마를 벗어 벽걸이에 걸었다.

 

그리고 가게 입구로 걸어가 알루미늄 셔터의 쇠손잡이를 잡았다.

 

끼이익-

녹슨 셔터를 아래로 끌어내리려는 찰나였다.

 

탁.

 

육중하고 둔탁한 군화발 하나가 내려오던 셔터 밑동을 거칠게 틀어막았다.

 

셔터가 덜컹거리며 멈추어 섰다.

 

지유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누, 누구세요……?"

 

지유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으며 반쯤 내려온 셔터 틈새로 시선을 내렸다.

 

어둠 속에서 시커먼 가죽점퍼를 입고 벙거지 모자를 깊게 눌러쓴 사내 세 명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입가에는 축축한 비릿함과 조소 어린 살기가 걸려 있었다.

 

"누구긴 누구야. 남원 바닥에서 제일 귀하신 몸 모시러 온 손님이지."

 

가장 덩치가 큰 사내가 비열하게 큭큭거리며 셔터를 번쩍 들어 올렸다.

 

쾅 소리와 함께 셔터가 위로 말려 올라가며 쇠사슬이 요란하게 요동쳤다.

 

사내들의 뒤편, 골목길 한가운데에 서 있던 검은색 그레이스 승합차의 슬라이딩 도어가 드르륵 열리며 시커먼 입을 벌렸다.

 

승합차 안에는 이미 마대자루와 청테이프, 굵은 나일론 밧줄이 준비되어 있었다.

 

"너, 너희들 뭐야……! 나가요! 당장 나가!"

 

지유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며 조리대 뒤편으로 물러섰다.

 

그녀의 손이 조리대 위에 놓인 묵직한 주방용 칼자루를 향해 뻗어나갔다.

 

하지만 사내들의 움직임은 지유의 생각보다 훨씬 빠르고 노련했다.

 

"어디서 칼질이야, 기집년이!"

 

앞장서 들어온 사내가 번개처럼 손을 뻗어 지유의 손목을 틀어쥐고 비틀었다.

 

쨍그랑-!

 

칼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냈다.

 

사내는 지유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조리대 앞으로 끌어당겼다.

 

"꺅-! 이거 놔! 사람 살려요! 불이야! 읍……!"

 

지유가 목청껏 비명을 질렀지만, 뒤따라 들어온 다른 사내가 미리 준비해 온 약품 냄새 진동하는 두꺼운 걸레로 지유의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독한 에테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숨이 막혀오고 눈앞이 아찔하게 흔들렸다.

 

지유는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며 다리를 휘저었다.

 

그녀의 발끝이 조리대 모퉁이에 놓여 있던 양념통과 빈 그릇들을 걷어찼다.

 

와장창-!

 

유리 그릇들이 바닥에 산산조각이 나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벽면에 걸려 있던 낡은 놋쇠 주전자와 프라이팬들이 쏟아져 내리며 굉음을 냈다.

 

"이 년이 발악을 하네! 야, 마대자루 씌워! 빨리 실어!"

 

"조용히 해, 밖에서 듣는다! 대가리를 쳐!"

 

사내 하나가 주먹으로 지유의 옆구리를 거칠게 가격했다.

 

둔탁한 충격과 함께 지유의 폐부에서 공기가 한 번에 빠져나갔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무릎이 바닥의 깨진 유리 파편 위로 털썩 꺾였다.

 

7년 전, 남원 톨게이트 아스팔트에서 찢겨 나갔던 그 무릎의 흉터 위로 다시금 선혈이 배어 나왔다.

 

지유는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도 조리대 모퉁이를 필사적으로 손톱으로 긁었다.

 

손톱 밑이 뒤집어지며 나무 기둥에 핏빛 긁힌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재환아…….'

 

입안으로 맴도는 그 이름은 차마 밖으로 터져 나오지 못했다.

 

사내들은 지유의 머리 위로 시커먼 마대자루를 뒤집어씌운 뒤, 그녀의 양팔과 다리를 번쩍 들어 올렸다.

 

가게 밖으로 끌려 나가는 지유의 발끝에 채여, 조리대 선반 위에 위태롭게 얹혀 있던 작은 액자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7년 전 오작교에서 재환이 교복 학생증 모서리를 잘라 건네주었던, 뒷면에 흑청색 잉크로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라고 적혀 있던 그 빛바랜 증명사진 액자였다.

 

유리 액자가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사내들은 지유를 거칠게 승합차 뒷좌석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쿵-!

 

슬라이딩 도어가 닫히는 육중한 쇠소리가 골목의 적막을 갈기갈기 찢었다.

 

7. 핏자국과 깨진 액자

 

오후 7시 28분.

 

남원지청 204호 검사실을 나선 성재환 검사의 검은색 관용 세단이 빗길을 가르며 동문 우체국 뒷골목 어귀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운전대를 잡은 재환의 미간은 아까부터 불길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현장 잠복조로 보낸 강태훈 수사관과 김 경위에게서 20분이 넘도록 무전 보고가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호출을 삐삐로 날려도, 차량 무전을 연결해도 거친 잡음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뭔가 잘못됐어."

 

재환은 골목 어귀에 차를 거칠게 세우고 문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골목길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하지만 그 고요함은 평화로운 적막이 아니었다.

 

피비린내와 타이어 탄 냄새가 섞인, 거대한 폭력의 잔향이 눅눅한 안개 속에 짙게 배어 있었다.

 

삼거리 김밥집 앞.

 

반쯤 찌그러진 채 비스듬히 들려 있는 알루미늄 셔터.

 

가게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따뜻한 백열등 불빛뿐이었다.

 

사람의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재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유야……!"

 

재환은 미친 듯이 셔터를 밀치고 가게 안으로 난입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재환의 숨이 멎었다.

 

가게 내부는 마치 폭탄을 맞은 것처럼 처참하게 난도질당해 있었다.

 

유리 그릇과 양념통들이 바닥에 산산조각 나 뒹굴고 있었고, 흩어진 쌀밥과 단무지가 진흙 묻은 군화 자국에 짓밟혀 뭉개져 있었다.

 

그리고 조리대 앞 바닥.

 

선명하고 붉은 핏자국이 점점이 흩뿌려져 있었고, 누군가를 질질 끌고 나간 듯한 쓸린 자국이 출입문 쪽을 향해 길게 이어져 있었다.

 

벽면 나무 기둥에는 손톱이 뒤집히며 남긴 처절한 핏빛 긁힘 흔적이 굳어 있었다.

 

재환의 다리가 사정없이 떨려왔다.

 

그는 휘청거리며 피 묻은 바닥으로 다가갔다.

 

무릎을 꿇은 재환의 시선에, 깨진 유리 파편들 사이에 엎어져 있는 작은 종이 조각 하나가 들어왔다.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집어 올렸다.

 

7년 전 자신이 지유에게 건넸던 학생증 증명사진이었다.

 

사진 뒷면, 지유가 선물했던 흑청색 잉크로 적었던 글씨.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그 글씨 위로 방금 흘린 것이 분명한 지유의 생생한 핏방울이 붉게 튀어 굳어가고 있었다.

 

"지유야……."

 

재환의 입술 사이로 찢어지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방금 전까지 검사실에서 자신의 손을 잡으며 '일찍 들어갈게'라고 웃어 보이던 그 얼굴이, '네 뒤에 숨는 짐이 되고 싶지 않다'고 당당히 말하던 그 목소리가 귓가를 미친 듯이 때렸다.

 

자신이 지켜주지 못했다.

 

자신이 법과 정의를 세우겠다고 오만을 부리는 사이, 맹수는 가장 비열하고 잔혹한 발톱으로 지유를 낚아채 간 것이다.

 

그때, 재환의 허리춤에 차고 있던 무전기에서 찢어지는 노이즈와 함께 피 묻은 기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치익…… 성, 성 검사님……! 강태훈입니다……."

 

재환은 무전기를 낚아채듯 움켜쥐었다.

 

"강 수사관! 어디야! 무슨 일이야!"

 

"주차장에서…… 놈들의 트럭에 기습을 당했습니다…… 놈들이 지유 씨를…… 검은색 그레이스 승합차입니다…… 번호판 없는…… 지리산 방면…… 17번 국도로 빠져나갔습니다……!"

 

무전기 너머로 강태훈의 절규가 이어졌다.

 

재환은 피 묻은 지유의 증명사진을 가슴 안주머니에 거칠게 쑤셔 넣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일말의 온기도, 흔들림도 완전히 지워졌다.

 

남은 것은 오직 활활 타오르는 검푸른 살기와, 살을 에는 듯한 복수의 결기뿐이었다.

 

재환은 허리춤에서 백부에게 물려받았던 각인 만년필을 꽉 쥐었다.

 

금빛 닙 상단에 새겨진 라틴어 법언이 그의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하늘이 무너져도……."

 

재환의 입술에서 얼음장 같은 맹세가 흘러나왔다.

 

"네놈들의 목을 베어 피로 씻어내겠다."

 

성재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빗속으로 뛰어나가 세단의 시동을 걸었다.

 

타이어가 아스팔트를 찢는 굉음을 내며, 칠흑 같은 어둠이 삼켜버린 지리산 17번 국도를 향해 전속력으로 쏘아져 나갔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