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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70화

너를 위한 도시락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흙탕물 속의 온기

 

깨진 달걀 노른자가 아스팔트 위에서 비릿한 김을 뿜어 올렸다.

 

남원지청 정문 앞마당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서늘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성재환은 지유의 어깨를 감싸 안은 팔에 핏줄이 터져 나갈 듯 힘을 주었다.

 

뺨에 묻은 노란 얼룩과 이마를 타고 붉게 흘러내리는 핏방울이 그의 시야를 붉게 물들였다.

 

지유의 숨결이 얇은 옷감을 투과해 가슴팍에 와닿았다.

 

그것은 온몸이 부서질 듯한 폭력 앞에서도 기어이 살아남아 건너온 자만이 지닐 수 있는 지독하게 뜨거운 날숨이었다.

 

"지유야."

 

재환의 입술 사이에서 으스러진 음절이 흘러나왔다.

 

서울에서 내려온 이래 단 한 번도 흐트러진 적 없던 그의 눈동자가 참담한 고통으로 흔들렸다.

 

법복을 입고, 차가운 법 조항을 방패 삼아 남원의 썩은 환부를 도려내겠다고 맹세했었다.

 

그러나 정작 그 칼날이 세워지는 동안 가장 참혹한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은 언제나 지유였다.

 

7년 전 요천 둑길에서 넘어져 무릎을 깨뜨렸을 때처럼, 그녀는 또다시 그를 대신해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지유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손은 흙투성이가 된 보온 도시락 가방의 손잡이를 바스러져라 쥐고 있었다.

 

상처 입은 손가락 마디마디에 붉은 핏물이 배어 나왔지만, 그녀의 시선은 놀라울 만큼 맑고 투명했다.

 

"재환아."

 

그 목소리는 거친 매연과 시위대의 웅성거림을 뚫고 재환의 심장 가장 깊은 곳을 정확히 찔렀다.

 

"나…… 하나도 안 아파."

 

거짓말이었다.

 

이마에서 찢겨 나간 살갗이 맥박에 맞춰 욱신거릴 터였고, 조폭들이 휘두른 몽둥이와 발길질에 온몸이 멍투성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유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7년 전, 광한루원 오작교 아래에서 검은 만년필을 조심스레 건네받던 그 열여덟의 소녀처럼.

 

"식기 전에…… 가져왔어."

 

지유가 품에 안고 있던 알루미늄 보온 도시락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겉싸개는 계란 파편과 흙탕물로 엉망진창이었지만, 뚜껑을 감싼 도톰한 무명천만큼은 그녀가 온몸으로 감싸 쥔 덕에 흙 한 방울 묻지 않은 채 깨끗했다.

 

"너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잖아."

 

재환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거대하게 무너져 내렸다.

 

서울 신림동 세 평짜리 고시원 방에서 컵라면 하나로 끼니를 때우며 흑청색 잉크로 밤을 새울 때도 이런 눈물은 나지 않았다.

 

대검 특수부에서 거악의 수뇌부를 마주하고 외압의 칼바람을 맞을 때도 그의 심장은 바위처럼 단단했다.

 

하지만 지금, 제 목숨조차 건사하기 힘든 폭력의 구렁텅이 속에서 오직 자신에게 따뜻한 밥 한 숟가락을 먹이겠다고 피 흘리며 걸어온 이 작은 여자의 온기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해졌다.

 

재환은 떨리는 손을 뻗어 지유의 이마에 흐르는 피를 제 소매로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고급 양모 정장 소매가 붉게 젖어 들어갔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미안하다. 지유야. 내가 널……."

 

"사과하지 마."

 

지유가 단호하게 재환의 말을 잘랐다.

 

그녀의 눈동자에 깃든 불꽃은 오히려 시위대의 붉은 깃발보다도 서슬 퍼렇게 타오르고 있었다.

 

"네가 왜 미안해? 저들이 도둑이고, 저들이 살인자인데…… 네가 왜 고개를 숙여?"

 

지유는 피 묻은 손으로 재환의 가슴에 꽂힌 검사 배지를 매만졌다.

 

차갑게 굳어 있던 쇠붙이가 그녀의 손끝에서 퍼져 나오는 체온으로 희미하게 덥혀졌다.

 

"넌 네가 해야 할 일을 해. 난 내가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킬 테니까."

 

2. 사법의 껍데기

 

"성재환 검사!"

 

현관 계단 위에서 벼락같은 호통이 쏟아져 내렸다.

 

대검찰청 감찰1과장 정태섭 부장검사였다.

 

그는 흙바닥에 나뒹굴던 제 안경을 주워 코에 걸치며, 살기등등한 눈으로 마당의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부러질 뻔했던 손목을 감싸 쥔 채, 그의 얼굴은 수치심과 광기로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감찰관의 정당한 직무 집행을 폭력으로 방해하고,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 피의자 유족과 백주대낮에 치정을 벌이다니! 네놈이 정녕 대한민국 검사란 말이냐!"

 

정태섭의 등 뒤로 감찰관 세 명이 헐레벌떡 뛰어나와 성재환의 주위를 반원형으로 에워쌌다.

 

그들의 손에는 차가운 은색 수갑과 긴급 구인장이 들려 있었다.

 

정태섭이 계단을 성큼성큼 밟고 내려오며 품속에서 또 다른 서류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새벽에 법무부 기조실과 여당 내무라인의 합작으로 기습 결재된 감찰위원회 긴급 직무정지 통보서였다.

 

"형법 제136조 공무집행방해, 그리고 감찰관에 대한 특수폭행 현행범이다!"

 

정태섭의 목소리가 앙칼지게 갈라졌다.

 

"수사관들, 뭣들 하고 있나! 저 파렴치한 놈에게 당장 수갑을 채워 연행해!"

 

지청 앞마당의 공기가 순식간에 영하로 얼어붙었다.

 

시위대를 통제하기 위해 서 있던 남원경찰서 전경들과 지청의 방호원들조차 숨을 죽인 채 두 검사의 서슬 퍼런 대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성재환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지유를 자신의 등 뒤로 숨기며 몸을 일으켰다.

 

장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이 정태섭을 정면으로 내리눌렀다.

 

흙탕물 속에서 일어선 재환의 눈빛은 조금 전 지유를 바라보던 애틋한 소년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서초동 특수부 취조실에서 거악의 목줄을 끊어내던 서늘한 사법의 사신(死神), 바로 그 자체였다.

 

"정태섭 부장님."

 

재환의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다.

 

하지만 그 평온함 밑바닥에는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용암 같은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감찰위원회의 정식 심의도 거치지 않고, 피의자 강태석의 거짓 기자회견이 끝난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기안된 표적 직무정지 공문이 과연 정당한 직무 집행입니까?"

 

"뭐, 뭐라고?"

 

"검찰청법 제7조 제2항, 검사는 구체적 사건과 관련된 상급자의 지휘·감독의 적법성 또는 정당성에 대하여 이견이 있을 때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재환이 코트 안주머니에서 붉은 직인이 찍힌 문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정종길 대검 중수부장의 친필 서명과 검찰총장의 관인이 선명하게 박혀 있는 '남원 정경유착 카르텔 특별수사본부 독립 수사 지휘권 보장 훈령'이었다.

 

"본 검사는 검찰총장과 특별수사본부장의 직속 명령에 따라 파견된 특별수사전담 검사입니다. 본 검사의 직무 배제는 검찰청법과 대검 특임 규정에 따라 적격심사위원회의 정식 의결을 거쳐 총장의 인가가 있어야만 효력이 발생합니다."

 

재환의 발걸음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정태섭이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정 부장님. 국회 내무위원장 김문현 의원실에서 어젯밤 몇 시에 전화를 받으셨습니까?"

 

순간 정태섭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어, 어젯밤이라니…… 무슨 헛소리를!"

 

"강태석이 전주교도소에서 살인미수 덤프트럭 테러를 사주하고, 요천 제방 붕괴로 40억의 비자금을 착복한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자, 김문현 의원이 법무부 기조실을 통해 당신을 남원으로 급파했지요. 목적은 단 하나, 오늘 오전 집행될 남원시청 2차 압수수색과 강태석의 추가 구속영장을 막기 위해서."

 

재환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올라갔다.

 

"부장님께서 손에 쥐고 계신 그 종이 쪼가리는 감찰 통보서가 아니라,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와 범인도피죄의 자백서입니다."

 

3. 멈추어 선 광기

 

"이, 이런 발칙한 놈이!"

 

정태섭이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삿대질을 해댔다.

 

"네깟 평검사 놈이 감히 대검 감찰본부를 상대로 협박을 해? 저 계집년을 봐라! 시장을 모함하고 남원 시정을 마비시킨 불순분자의 딸년이 아닌가! 저런 천한 것과 붙어먹으며 가문의 사적 복수를 위해 공권을 휘두르는 놈이 정의를 입에 담아?"

 

'천한 것.'

 

그 단어가 정태섭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순간, 재환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가 손을 뻗으려던 찰나, 등 뒤에 있던 지유가 조용히 걸어 나왔다.

 

지유는 피가 흐르는 이마를 닦지도 않은 채, 정태섭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섰다.

 

정태섭의 수행 감찰관들이 반사적으로 긴장하며 몸을 굳혔다.

 

지유의 시선은 정태섭의 오만한 눈을 똑바로 꿰뚫고 있었다.

 

"내가 천하다고요?"

 

지유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으나, 지청 앞마당을 가득 메운 시위대의 고함조차 잠재울 만큼 서늘하고 명징했다.

 

"새벽 세 시부터 일어나 국산 쌀을 안치고, 참기름 한 방울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땀 흘려 하루하루 밥을 파는 내가 천합니까?"

 

지유가 손에 든 보온 도시락 가방을 정태섭의 눈앞에 들어 올렸다.

 

"남의 땅을 도둑질하고, 수천 명의 목숨이 걸린 강둑에 모래와 잡석을 쏟아부어 무너뜨리고, 뇌물과 거짓말로 자리를 보전하려는 자들이 귀한 사람입니까?"

 

정태섭이 혀를 차며 지유를 밀쳐내려 손을 뻗었다.

 

"건방진 계집이 어디서 훈계질이야! 비켜!"

 

그러나 정태섭의 손은 지유의 옷자락에 닿지도 못했다.

 

성재환의 단단한 손아귀가 정태섭의 손목을 허공에서 낚아챈 것이다.

 

우두둑.

 

뼈마디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으아악!"

 

정태섭이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꺾었다.

 

재환은 정태섭의 귓가에 차갑게 내려앉는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 앞에서 이 사람에게 손끝 하나라도 대면, 검사복을 벗는 게 아니라 네놈의 그 더러운 손모가지를 부러뜨려 놓을 것이다."

 

재환이 정태섭을 거칠게 밀쳐냈다.

 

정태섭은 계단 아래 흙바닥으로 꼴사납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꽹과리를 치며 선동하던 포목점 오 회장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한양토건에서 돈을 받고 동원된 어깨들도, 붉은 피켓을 들고 흔들던 상인들도 넋이 빠진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지유는 무너지지 않았다.

 

수백 명이 던진 계란과 오물 속에서도, 그녀는 마치 거센 비바람을 견뎌낸 광한루원의 팽나무 고목처럼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대한민국 최고의 사법 권력을 상징하는 검사가 온몸으로 그녀를 호위하며 서 있었다.

 

돈에 매수되어 소리를 지르던 시위대의 양심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남원 토박이 상인 몇몇의 얼굴에 부끄러움과 망설임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삼거리 김밥집의 지유 모녀가 지난 세월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어머니가 투병하면서도 단 한 번도 외상을 떼어먹지 않았고, 남원의 가난한 학생들에게 김밥 한 줄을 말아줄 때도 밥을 아끼지 않았던 그 정직함을 남원의 골목길은 기억하고 있었다.

 

4. 남원은 당신의 약속을 기억합니다

 

재환은 뒤를 돌아보았다.

 

지유가 가만히 보온 도시락을 내밀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육체적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이 거대한 악의 소굴 속으로, 자신을 대신해 다시 칼을 들고 걸어 들어가야 하는 남자를 향한 애절함 때문이었다.

 

"먹어."

 

지유가 속삭였다.

 

"밥을 먹어야…… 싸우지."

 

재환은 말없이 두 손으로 그 도시락을 받아 들었다.

 

겉싸개에 묻은 오물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오직 무명천을 뚫고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묵직하고 뜨거운 밥의 온기만이 그의 전신을 타고 흘렀다.

 

그것은 7년 전 서울행 완행열차 안에서 그를 버티게 했던 기억의 무게였고, 신림동 차가운 책상머리에서 그를 지탱해 주었던 지유의 편지들이 품고 있던 바로 그 생명력이었다.

 

재환은 조심스럽게 도시락 가방의 지퍼를 내렸다.

 

흙탕물이 묻지 않은 안쪽에서 은빛으로 반짝이는 3단 알루미늄 찬합이 모습을 드러냈다.

 

뚜껑을 돌려 열자, 구수한 쌀밥의 김과 함께 고소한 참기름 내음이 확 퍼져 나갔다.

 

정갈하게 말아 올린 김밥 두 줄과, 지유의 어머니가 손수 담가두었던 매실 장아찌, 그리고 따뜻한 보리차.

 

그리고.

 

맨 위쪽 뚜껑 안쪽 면에 정갈하게 접힌 갱지 한 장이 테이프로 단단히 붙어 있었다.

 

재환의 시선이 그 갱지에 멈추었다.

 

지유가 며칠 밤을 지새우며 펜을 쥐고 눌러썼을 글씨.

 

그 잉크는, 7년 전 남원여고 앞 문구점에서 지유가 용돈을 모아 선물했던 그 깊고 푸른빛의 흑청색 잉크였다.

 

비록 그 병은 깨어졌으나, 지유의 가슴속에는 여전히 마르지 않고 흐르고 있던 그 약속의 색채였다.

 

'남원은 당신의 약속을 기억합니다.'

 

단 한 줄의 문장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법조문보다도 무겁고, 그 어떤 사법 판결문보다도 준엄한 문장이었다.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7년 전 광한루원 오작교 위에서 재환이 학생증 증명사진 뒷면에 적어 남겼던 그 맹세에 대한, 지유의 응답이었다.

 

남원은 부패한 토건 세력 강태석의 것도 아니었고, 권력을 쥐고 흔드는 중앙의 김문현의 것도 아니었다.

 

남원은 흙탕물 속에서도 정직하게 살아가는 지유와, 묵묵히 땀 흘리는 시민들의 땅이었다.

 

그 남원이 지금, 돌아온 검사 성재환에게 정의를 묻고 있었다.

 

재환은 천천히 도시락 뚜껑을 덮었다.

 

그의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마르고, 그 자리에 서릿발 같은 결기가 내려앉았다.

 

그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을 꺼내 손에 쥐었다.

 

캡 상단에 새겨진 금빛 글자.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재환은 지유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올게."

 

그것으로 충분했다.

 

더 이상의 긴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지유 역시 눈물을 거두고 꼿꼿이 서서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5. 법복을 입은 자의 출진

 

재환이 도시락을 강태훈 수사관에게 건넸다.

 

"강 수사관."

 

"예, 검사님!"

 

강태훈이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관등성명을 외쳤다.

 

"지유 씨를 지청 안 당직실로 모셔라. 보건소 의사를 즉시 불러 상처를 치료하고, 수사관 두 명을 배치해 한 발자국도 떼지 말고 경호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재환의 시선이 바닥에서 흙을 털며 일어서는 정태섭과 그 수하들을 향했다.

 

"지금 즉시 남원경찰서 기동대를 호출해라. 정태섭 부장검사와 감찰반 전원에 대해 형법 제123조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제136조 공무집행방해, 그리고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범인도피 교사 혐의로 피의자 입건하고 임의동행을 요구해라."

 

"서, 성재환! 네놈이 미쳤구나! 감찰부장을 입건해?"

 

정태섭이 비명을 질렀다.

 

재환이 그에게 다가섰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차가운 음성이 정태섭의 귓전을 때렸다.

 

"불응 시 긴급체포해라. 내가 발부한 수임검사 지휘권으로 전원 남원지청 유치장에 입감시킨다. 영장은 내가 직접 청구한다."

 

정태섭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백지장이 되었다.

 

성재환은 빈말을 하는 사내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친부 성호석의 영장까지 작성했던 괴물이었다.

 

그런 놈이 감찰부장 따위를 두려워할 리 없었다.

 

재환은 더 이상 정태섭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시위대를 향해 몸을 돌렸다.

 

마당을 메우고 있던 시위대의 함성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재환의 서슬 퍼런 시선이 시위대 맨 앞줄에 서 있는 포목점 오 회장에게 꽂혔다.

 

"오 회장님."

 

오 회장이 흠칫 놀라며 꽹과리를 쥔 손을 등 뒤로 숨겼다.

 

"한양토건 박진철 회장에게 받은 현금 5천만 원, 그리고 신축 테마 상가 1층 3호실 우선 분양 확약서. 지청 지하 다방에서 주고받은 녹음파일과 전표 사본이 이미 제 집무실 책상 위에 있습니다."

 

"그, 그게 무슨……!"

 

"집시법 위반, 업무방해, 그리고 배임수재 혐의입니다. 오늘 정오까지 시위대를 해산하고 자진 출석하지 않으면, 오늘 오후 즉시 체포영장을 집행하겠습니다."

 

오 회장의 입술이 덜덜 떨리며 꽹과리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땡그랑, 하는 쇳소리가 적막을 깼다.

 

그 소리를 신호로, 뒤편에 서 있던 상인들이 술렁이며 깃발을 내리기 시작했다.

 

돈 몇 푼에 눈이 멀어 끌려 나왔던 그들의 눈에 비친 것은,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서슬 퍼런 법의 칼날이었다.

 

"모두 물러가십시오."

 

재환의 준엄한 목소리가 지청 앞마당에 울려 퍼졌다.

 

"이곳은 범죄자들을 단죄하는 사법의 전당입니다. 남원의 피를 빨아먹은 자들은 단 한 놈도 이 청사를 온전히 걸어 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재환은 당당하게 뒤를 돌아 지청 현관 계단을 올랐다.

 

그의 등 뒤로 지유가 강태훈 수사관의 안내를 받으며 청사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지유의 눈과 재환의 눈이 다시 한번 허공에서 마주쳤다.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의 불안은 없었다.

 

오작교의 맹세는 부서지지 않았다.

 

그것은 피와 눈물을 먹고 자라나, 마침내 남원을 뒤덮은 거대한 어둠을 찢어발길 단죄의 빛이 되어 타오르고 있었다.

 

6. 혼수의 끝에서

 

같은 시각, 남원의료원 3층 응급 중환자실.

 

살균 소독약 냄새가 진동하는 병실 안에는 거친 기계음만이 규칙적으로 울리고 있었다.

 

삑, 삑, 삑.

 

심전도 모니터의 녹색 곡선이 위태롭게 요동치고 있었다.

 

침대 위에는 전신에 붕대를 칭칭 감은 사내가 산소마스크를 쓴 채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하정리 삼거리에서 덤프트럭에 직격당해 뇌사 직전까지 내몰렸던 남원시청 건설교통국장 황선태였다.

 

병실 문밖에는 무장한 대검 특수부 수사관 두 명이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었다.

 

강태석의 처남 조상태가 보낸 암살조를 차단하기 위해 24시간 철통같은 감시가 이어지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차갑게 식어 있던 황선태의 오른쪽 검지손가락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두터운 거즈로 덮인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모니터의 심박수가 급격히 상승하며 경고음이 울렸다.

 

삐- 삐- 삐-.

 

간호사가 놀라 차트를 떨어뜨리며 뛰쳐나갔다.

 

"의사 선생님! 3호 환자 의식이 돌아옵니다! 중환자실 담당의 선생님!"

 

황선태의 굳게 닫혀 있던 입술 사이로 거친 숨구멍이 열렸다.

 

피 묻은 가래가 목구멍을 긁으며 밭은기침이 터져 나왔다.

 

"커헉…… 쿨럭!"

 

산소마스크 안에 뿌옇게 김이 서렸다.

 

흐릿하게 초점을 잃었던 황선태의 동공이 천장의 백색 형광등 불빛을 향해 서서히 모여들었다.

 

지옥의 문턱까지 끌려갔다 돌아온 자의 극심한 공포가 그의 전신을 지배했다.

 

자신을 덮쳐오던 15톤 덤프트럭의 거대한 범퍼.

 

자택 벽장에 숨겨두었던 강태석의 친필 비밀 업무 수첩을 빼앗아가던 괴한들의 비열한 비웃음.

 

그리고…… 옥중에서 서늘하게 속삭이던 강태석의 목소리.

 

'국장, 조용히 가 주는 게 남원에 남아 있을 처자식을 위하는 길이야.'

 

황선태의 눈가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은 버려졌다.

 

30년간 충견처럼 온갖 비리의 오물을 뒤집어쓰며 강태석의 돈세탁을 도맡아 왔건만, 그 대가는 처참한 암살과 가족을 향한 협박뿐이었다.

 

그가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산소마스크를 벗겨내려 했다.

 

황급히 달려온 의사가 그의 어깨를 눌렀다.

 

"환자분,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뇌출혈 수술을 받은 지 얼마 안 됐어요!"

 

황선태는 의사의 가운 소매를 부스러져라 쥐었다.

 

산소마스크 틈새로 피 섞인 절규가 터져 나왔다.

 

"서…… 성 검사……."

 

"예? 뭐라고요?"

 

"성재환…… 검사를…… 불러줘……."

 

황선태의 눈에 서슬 퍼런 독기가 서렸다.

 

그것은 더 이상 권력의 꼭두각시가 아닌, 자신을 죽이려 한 주인을 물어뜯기 위해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사냥개의 눈빛이었다.

 

"그놈들이…… 수첩을 뺏어갔어…… 하지만……."

 

황선태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쇳소리를 냈다.

 

"진짜…… 진짜 장부는…… 거기가 아니야…… 지리산……."

 

의사와 간호사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남원을 뒤흔들 거대한 판도라의 상자가, 피 흘리는 건설국장의 입에서 마침내 그 진짜 주소를 뱉어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