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관사의 그림자
1. 젖은 신발과 검은 세단
삼거리 김밥집의 낡은 유리문을 흔드는 빗소리는 갈수록 거칠어졌다.
좁은 홀 안에는 참기름의 고소한 내음과 뚝배기에서 피어오르는 달걀찜의 온기 어린 수증기가 자욱하게 맴돌고 있었다.
흠뻑 젖은 머리칼에서 흘러내린 빗방울이 재환의 교복 옷깃을 적시고 있었지만, 조금 전 처마 밑에서 맞잡았던 지유의 손끝 온기는 여전히 가슴 한가운데에 뜨거운 낙인처럼 남아 있었다.
"재환아, 감기 들겠다. 얼른 이거라도 둘러."
지유의 어머니가 주방 안쪽에서 마른 수건 두 장을 챙겨 나오며 안쓰러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지유는 어머니에게 건네받은 수건 하나를 조심스럽게 펼쳐 재환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수건 너머로 전해지는 지유의 손길은 더없이 다정했고, 수줍게 붉어진 그녀의 뺨에는 방금 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뒤 번져나간 생기가 어려 있었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재환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라는 호칭이 입술에 닿는 순간, 가슴속 깊은 구석에서 서늘한 죄책감이 바늘처럼 돋아났다.
카운터 서랍 속에 잠들어 있던 1990년대 초의 토지 환지 서류, 거기에 선명하게 찍혀 있던 아버지 성호석(成浩錫)의 도장과 한석규(韓錫奎)라는 이름.
억울하게 땅을 빼앗기고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난 지유의 아버지와, 그 비극의 한가운데 서 있던 자신의 아버지.
그 무거운 진실을 아직 지유는 알지 못했다.
'어떤 비가 쏟아져도 내가 너의 처마가 되어 주겠다.'
빗속에서 내뱉었던 그 맹세는 단순한 소년의 치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가문이 이 집안에 저지른 과오를 온몸으로 속죄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지유의 맑은 미소를 지켜내겠다는 결연한 서약이었다.
"따뜻한 보리차 좀 더 떠줄게. 속을 데워야 탈이 안 나지."
지유가 주전자를 들고 돌아선 찰나였다.
김밥집 바깥 골목 어귀에서 둔탁한 자동차 브레이크 소리가 빗소리를 찢으며 울려 퍼졌다.
번쩍이는 두 줄기 전조등 불빛이 유리문을 뚫고 들어와 홀 벽면의 낡은 메뉴판을 하얗게 탈색시켰다.
빗줄기 사이로 묵직한 검은색 세단 한 대가 김밥집 문 앞을 비스듬히 가로막아서는 모습이 보였다.
흙탕물을 튀기며 멈춰 선 차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우산을 펴 든 사내 둘이 신속하게 내리더니, 뒷좌석 문을 열고 한 사람을 호위하듯 양옆으로 늘어섰다.
차에서 내린 인물은 짙은 감색 정장을 입고 뿔테 안경을 쓴 남원시청 비서실장이었다.
"……!"
재환의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낯익은 실루엣, 관사에서 아버지의 손발처럼 움직이며 남원 시정의 온갖 추잡한 뒤처리를 도맡아 하던 자였다.
비서실장은 망설임 없이 김밥집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가죽구두가 보도블록의 웅덩이를 짓밟는 소리가 처마 밑의 빗소리보다 더 위압적으로 문풍지를 때렸다.
덜컹, 하고 유리문이 거칠게 열렸다.
축축하고 서늘한 비바람이 순식간에 온기 가득하던 홀 안으로 들이닥쳤다.
"도련님."
비서실장의 건조하고 낮은 목소리가 식당 안을 갈랐다.
주전자 물을 따르려던 지유의 손이 허공에서 굳었고, 물을 푸던 지유 어머니 역시 굳은 얼굴로 문가를 바라보았다.
비서실장의 시선은 지유 모녀를 훑고 지나가더니 이내 젖은 교복 차림의 재환에게 단단히 꽂혔다.
"시장님께서 관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금 당장 차에 오르십시오."
재환은 주먹을 쥐었다.
가슴 포켓에 꽂힌 만년필의 금속 닙이 젖은 교복을 뚫고 가슴팍을 단단히 눌러왔다.
'Fiat justitia, ruat caelum.'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라던 백부의 만년필과, 조금 전 지유가 건네주었던 하얀 손수건의 온기.
재환은 도망치듯 눈을 피하는 대신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비서실장님. 제가 왜 이 시간에 관사로 끌려가듯 가야 합니까. 아직 학교 자율학습 시간도 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야간자습 따위를 논할 한가한 상황이 아닙니다."
비서실장이 목소리를 한 톤 낮추며 문간 안쪽으로 구두를 디뎠다.
흙탕물이 묻은 구두창이 깨끗하게 닦인 김밥집 장판을 더럽혔다.
"내무부에서 감사관들이 남원에 들이닥쳤습니다. 관사 주변은 물론이고 시청 감사실까지 발칵 뒤집혔습니다. 이런 비상시국에 도련님께서 하필…… 이 집에 드나드시는 걸 시장님께서 아시면 어떤 사달이 날지 짐작이 안 가십니까?"
'이 집'이라는 단어에 섞인 노골적인 멸시와 경계심을 눈치챈 재환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지유는 영문을 모른 채 재환과 낯선 사내들을 번갈아 쳐다보며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저기…… 누구신데 우리 가게에 들어와서 소란이세요?"
지유의 어머니가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으며 조심스럽게 사내들을 가로막으려 했다.
비서실장은 지유 어머니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그저 차가운 어조로 단언했다.
"사사로운 인연 따위로 어물쩍 넘길 일이 아닙니다. 시장님의 명입니다, 도련님. 곱게 가시지 않으면 수행원들을 시켜 강제로라도 태울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더 꼴사나운 소동을 벌여 이 가게에 먹칠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비서실장의 비열한 협박은 정확히 재환의 가장 약한 고리를 파고들었다.
이 자리에서 실랑이를 벌이다가는 비서실장의 입에서 과거의 추악한 악연이 터져 나와 지유와 어머니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줄 것이 뻔했다.
무엇보다 내무부 감사관들의 남원 도착.
10년 전 한석규의 과수원을 짓밟았던 환지 비리의 진실이 드디어 중앙의 심판대 위에 오른 순간이었다.
관사로 가야 했다.
피할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구축해 놓은 그 차디찬 철옹성의 심장부로 걸어 들어가 진실을 직접 마주해야 했다.
재환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지유를 바라보았다.
영문을 몰라 불안에 떨고 있는 소녀의 맑은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처량했다.
"지유야."
"재환아……?"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 어머니, 챙겨주신 온기 잊지 않겠습니다.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지유 어머니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인 재환은 지유에게 다가가 조용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한 약속, 절대 잊지 않아. 무슨 비가 내려도 내가 다 막을 테니까, 아무 걱정 하지 마."
지유의 손끝이 재환의 젖은 소매를 붙잡으려다 허공에서 머뭇거렸다.
재환은 미련을 끊어내듯 몸을 돌려 쏟아지는 빗속으로 걸어 나갔다.
비서실장이 뒤따라 나오며 차 문을 열었다.
뒷좌석에 오르는 순간, 빗줄기 너머로 김밥집 문간에 홀로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지유의 작고 아련한 모습이 차창에 어렸다.
묵직한 배기음과 함께 검은 세단은 빗물 고인 요천로를 미끄러지듯 질주하기 시작했다.
2. 관사의 철문과 차가운 공기
남원 시내 외곽, 인적이 드문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남원 시장 관사는 흡사 거대한 감옥을 연상케 했다.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육중한 2층 양옥 구조의 공관은 굵은 비를 맞아 거무튀튀하게 젖어 있었다.
높은 담장 위에는 날카로운 유리 파편과 철조망이 촘촘히 박혀 있었고, 정문의 철문은 빗물에 젖어 묵직한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관사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빗속에 도열해 있는 여러 대의 검은색 관용차들이 눈에 들어왔다.
도청 번호판을 단 차량부터 시청 총무과 차량까지, 관사 앞마당은 이미 비상사태를 맞은 야전 사령부처럼 살벌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차가 멈추자 비서실장이 먼저 내려 우산을 받쳐 들었다.
"들어가십시오. 시장님께서 1층 서재에서 독대(獨對)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재환은 우산을 사양하고 성큼성큼 관사 현관 계단을 올랐다.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구두를 벗고 들어선 현관 복도는 무겁고 침통한 침묵에 짓눌려 있었다.
짙은 마호가니 원목으로 마감된 벽면과 샹들리에의 차가운 백색 조명이 바닥의 대리석을 시리게 비추었다.
복도 끝 서재 문앞에는 시청 간부 둘이 서류 봉투를 가슴에 안은 채 사색이 된 얼굴로 대기하고 있었다.
재환이 다가가자 간부들은 헛기침을 삼키며 길을 비켜주었다.
똑똑.
재환이 단단한 서재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라."
안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으나, 숨길 수 없는 칼날 같은 서슬이 배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시가(Cigar) 연기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섞인 텁텁한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남원시장 성호석(成浩錫).
그는 책상 뒤 커다란 가죽 의자에 앉아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밤비를 응시하고 있었다.
희끗희끗한 반백의 머리칼을 뒤로 단정하게 넘긴 성 시장은 날카로운 턱선과 굳게 다문 입술을 지닌, 권력의 단맛과 쓴맛을 모두 뼛속까지 새겨 넣은 풍운아였다.
성 시장은 천천히 의자를 돌려 아들을 마주 보았다.
젖은 교복을 입은 채 꼿꼿하게 서 있는 재환의 눈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에는 서늘한 경멸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꼴이 볼만하구나."
성 시장이 책상 위에 놓인 크리스털 재떨이에 시가 재를 털어내며 낮게 읊조렸다.
"남원여고 앞 분식집 구석에서 촌것들과 어울려 비를 피하다가 관용차에 실려 들어온 몰골이라니. 그것이 서울 명문 법대로 진학해 성씨 가문의 기둥이 되어야 할 놈의 태도냐?"
재환은 눈을 내리깔지 않았다.
"친구의 가게에 들렀을 뿐입니다. 비를 피해 몸을 녹인 것이 가문의 이름을 더럽힐 죄가 됩니까."
탕!
묵직한 서류 뭉치가 책상 위로 내리꽂히며 굉음을 냈다.
성 시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장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이 좁은 서재를 단숨에 집어삼켰다.
"친구? 네놈이 누구 집 문턱을 넘었는지 정말 몰라서 그따위 소리를 지껄이는 게냐! 한석규의 피붙이다. 10년 전, 남원의 개발 구획을 정리할 때 관청에 꽹과리를 들고 와 불을 지르겠다며 행패를 부리던 망나니의 종자란 말이다!"
서재 안의 공기가 급격하게 팽창했다.
재환의 턱 끝이 굳어졌다.
아버지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었기에 더 집요하고 가혹하게 아들의 발걸음을 감시해 온 것이었다.
"그분이 망나니였습니까?"
재환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과수원을 빼앗기고, 엉뚱한 자갈밭으로 강제 환지 처분을 당해 피눈물을 흘리던 힘없는 농민이 아니었습니까. 법을 무기 삼아 남의 삶의 터전을 강탈한 자들이 누구인데, 그분을 망나니라 부르십니까."
성 시장의 눈썹이 사납게 치켜올라갔다.
번개처럼 다가온 성 시장의 손바닥이 재환의 뺨을 거칠게 후려쳤다.
찰싹!
살과 뼈가 부딪치는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재환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입술 안쪽이 터져 비릿한 핏물이 입안에 고였다.
재환은 비틀거리지 않고 입가의 피를 교복 소매로 닦아내며 다시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성 시장의 숨소리가 거칠게 흔들렸다.
"네놈이 법을 안다고 까부는 것이냐? 법이란 본래 힘 있는 자의 결단을 뒷받침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남원을 관통하는 도로를 내고, 공단을 유치하고, 신시가지를 구획하는 대업(大業) 앞에서 고작 과수원 몇 마지기가 대수냐? 전체의 발전을 위해 썩은 뿌리를 잘라내는 것이 행정이고 권력이다. 네가 입는 그 비단옷과 네 가슴에 꽂힌 백부의 금닙 만년필이 어디서 나왔다고 생각하느냐! 네가 누리는 그 고결한 도덕과 정의감은 모두 내 피와 오물 위에서 자란 기생목(寄生木)에 불과해!"
"그래서…… 행복하십니까?"
재환이 핏기 없는 입술로 되물었다.
"남의 눈에 피눈물을 쏟게 하고 쌓아 올린 그 권력의 성채에서, 지금 아버지는 무엇이 두려워 내무부 감사 소식에 이토록 떨고 계십니까."
성 시장의 눈동자에 일순간 짙은 균열이 일었다.
아들의 정곡을 찌르는 말은 어떤 정적(政敵)의 비수보다도 예리하게 그의 명치를 꿰뚫고 있었다.
성 시장은 떨리는 손을 거두며 서랍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그 찰나, 서재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시장님, 강태석(姜泰錫) 회장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뒷문 쪽으로 은밀히 모셨습니다."
비서실장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성 시장의 안색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지며 냉철한 정치가의 가면을 다시 덮어썼다.
"들여보내라."
성 시장은 재환을 서늘하게 노려보며 명령했다.
"너는 거기 그대로 서 있어라. 네가 그토록 혐오하는 현실이라는 것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네 잘난 눈으로 똑똑히 보거라."
3. 밤의 방문자와 은밀한 거래
서재의 두꺼운 참나무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물에 젖은 레인코트를 벗으며 들어섰다.
다부진 체구에 한쪽 뺨을 가로지르는 굵은 흉터, 기름진 이마 아래 번들거리는 눈빛을 지닌 자였다.
남원 일대의 토건 사업과 운수업을 쥐고 흔들며 음지의 폭력과 이권을 도맡아 온 지역 토착 세력의 우두머리, 강태석이었다.
강태석은 서재 안에 교복을 입고 입가에 피를 흘린 채 서 있는 재환을 보자 기괴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 도련님께서도 여기 계셨습니까. 비바람이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집안 분위기가 아주 흉흉합니다 그려."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본론만 말해."
성 시장이 가죽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턱짓을 했다.
강태석은 품속에서 방수 비닐로 꽁꽁 싸맨 두툼한 황갈색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툭 던졌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서류 봉투의 모서리가 성 시장의 손끝에 닿았다.
"시장님께서 그토록 애타게 찾으시던 물건입니다. 1991년 남원군 도통동 일대 환지 처분 당시의 원천 측량 대장(原泉測量臺帳)과, 군청 계장 놈이 몰래 빼돌려 유족 측에 넘기려 했던 이면 합의 각서 원본입니다."
재환의 눈이 서류 봉투로 향했다.
저것이 바로 김밥집 서랍 속에 있던 사본의 '원형'이자, 부친의 치부를 완전히 폭로할 수 있는 결정적 물증이었다.
성 시장은 조심스럽게 비닐을 벗겨내고 서류를 넘겨보았다.
누렇게 바랜 종이 위에는 지유의 선친 한석규의 서명이 위조된 흔적과, 단독 환지 명목으로 성호석의 친인척 차명 계좌로 흘러 들어간 토지 목록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성 시장의 굳어 있던 미간이 미세하게 풀리며 안도의 숨이 흘러나왔다.
"뒤처리는 확실히 했겠지? 내무부 특별감사반 놈들이 서울에서 내려오면서 이미 유족 측 고발장을 손에 쥐고 내려왔다. 증거의 뿌리를 뽑지 못하면 이번 일로 내 목만 날아가는 게 아니야. 강 회장, 당신이 운영하는 삼거리 토건의 면허까지 모조리 취소될 판국이었어."
강태석이 허리를 굽히며 비열하게 웃었다.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당시 측량에 관여했던 전직 공무원 놈은 이미 지난달에 가족들 데리고 파라과이로 이민 보냈습니다. 남원에 남아 있는 찌꺼기들이야 뭐…… 그 김밥집 과부 모녀 말고 더 있겠습니까? 원본이 제 손에 들어와 시장님 책상 위에 놓였으니, 내무부 놈들이 와서 백날 뒤져봐야 공소시효 지난 민원 서류 쪼가리밖에 더 찾겠습니까?"
강태석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재환에게 닿았다.
흉터진 뺨을 실룩거리며 강태석이 뼈 있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런데 시장님, 듣자 하니 도련님께서 그 집 딸년하고 아주 애틋하게 어울려 다니신다면서요? 오작교에서 벚꽃 놀이를 하질 않나, 비를 맞으며 처마 밑에서 손을 잡질 않나. 싹수가 노란 인연은 아예 싹부터 잘라버려야 뒤탈이 없는 법입니다. 제가 사람 몇 풀어서 그 김밥집 간판을 아예 뜯어내고 남원에서 영원히 쫓아내 버릴까요?"
"닥쳐라!"
침묵을 지키던 재환이 폭갈을 터뜨리며 강태석을 향해 짓쳐 나갔다.
소년의 눈에 서린 살기에 강태석조차 움찔하며 뒤로 반 걸음 물러섰다.
"손대지 마. 그분들과 지유의 머리털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내 손으로 네놈의 목을 물어뜯어 버릴 테니까."
핏발 선 재환의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어린 고등학생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벼랑 끝에 몰린 맹수의 포효였다.
강태석이 기가 질린 듯 혀를 차며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허허, 도련님 성정이 아주 불같으십니다 그려. 시장님 젊은 시절보다 더 지독하십니다."
"재환이 너는 입 다물어라!"
성 시장이 책상을 내리치며 서류를 서랍 안쪽에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차가운 눈길로 강태석을 응시했다.
"강 회장, 헛소리하지 말고 선을 지켜. 그 집 모녀는 건드릴 필요 없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면 오히려 내무부 감사반 놈들의 코를 자극할 뿐이야. 이 서류만 소각로에 들어가면 그들의 주장은 그저 패배자의 억지 탄원에 불과해진다."
"예, 예. 시장님 뜻이 그러시다면야 따릅죠."
강태석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번들거리는 눈으로 품속에서 또 다른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번 봉투는 가죽 케이스에 단단히 봉인된, 중앙정부의 관인이 선명하게 찍힌 최고급 문서였다.
"그리고…… 시장님께서 목 빠지게 기다리시던 진짜 선물이 여기 있습니다."
강태석의 목소리에 은밀하고 탐욕스러운 기름기가 흘렀다.
서재 안의 공기가 다시 한번 기묘하게 요동쳤다.
4. 중앙 발탁의 이면
성 시장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며 관인이 찍힌 가죽 케이스를 받아 들었다.
케이스를 열자, 대한민국 내무부 장관의 직인이 선명하게 날인된 공식 인사 내신서(內申書)와 청와대 정무수석실의 비밀 메모가 모습을 드러냈다.
[차기 내무부 기획조정실장 및 차관보 직속 정무비서관 발탁 예정자 : 성호석]
지방 중소도시의 시장 자리를 넘어, 중앙 정계의 핵심 요직으로 단숨에 수직 상승하는 엘리트 관료의 출셋길.
성호석이 지난 수년간 남원의 온갖 이권을 주무르고 지역 토착 세력과의 피비린내 나는 유착을 견뎌내며 갈망해 온 바로 그 권력의 정점이었다.
그러나 그 문서 아래 첨부된 조건부 합의서에는 추악한 이면이 적혀 있었다.
[조건 : 남원 일대 국책 고속도로 연계 공단 부지의 단독 개발권 및 토지 용도 변경을 '삼거리 토건'에 독점 배정할 것.
내무부 불시 감사는 중앙 정무라인과의 조율을 통해 '단순 행정 착오'로 종결 처리함.]
완벽한 거래였다.
중앙정부는 지역 토착 토건 세력의 자금을 대선 비자금으로 흡수하고, 성 시장은 자신의 과거 비리를 덮는 대가로 중앙 요직으로 영전하며, 강태석은 남원의 알짜배기 땅을 모조리 집어삼키는 삼각 밀약.
내무부 불시 감사라는 거대한 폭풍우는 성 시장을 파멸시키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성 시장의 목줄을 죄어 중앙의 거대한 정치 기계 안으로 복속시키기 위해 연출된 거대한 쇼였다.
성 시장의 입가에 서서히 잔인하고 오만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결국…… 판이 이렇게 짜였군."
"축하드립니다, 시장님. 아니, 머지않아 차관님, 장관님 소리를 들으실 영감님."
강태석이 허리를 반쯤 꺾으며 아첨을 떨었다.
"내무부 감사반 놈들은 내일 오전 시청에서 요식 행위로 서류 몇 장 훑어보고 철수할 겁니다. 남원은 이제 시장님의 발목을 잡는 시골 구석이 아니라, 중앙으로 도약하기 위한 디딤돌이 된 셈이지요. 그러니…… 도련님도 하루빨리 서울로 올려보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촌구석에 더 뒀다가는 저 김밥집 계집아이 같은 불순한 것들에게 물들기 십상입니다."
재환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권력의 추악한 거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의?
법?
하늘이 무너져도 세워야 한다던 그 고결한 가치들은, 이 음습한 서재 안에서 한 줌의 먼지보다 못하게 짓밟히고 있었다.
아버지가 지유의 가문을 짓밟았던 것은 단순한 행정 착오가 아니었다.
자신의 출세와 권력을 위해 약자의 목숨줄을 제물로 바친 탐욕의 결과물이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 탐욕은 더 거대하게 자라나 남원 전체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강 회장, 나가 있어. 내일 아침 도청 회의실에서 세부 조율을 하지."
성 시장이 가죽 케이스를 덮으며 낮게 명했다.
강태석은 재환을 힐끔 쳐다보며 비릿한 눈웃음을 남긴 채 조용히 서재 문을 닫고 나갔다.
다시 서재에는 부자 둘만이 남았다.
빗소리는 여전히 창문을 깨뜨릴 듯 요란하게 부딪쳐 왔다.
성 시장은 담배 한 개비를 새로 꺼내 물며, 차가운 눈빛으로 아들을 응시했다.
"보았느냐? 이것이 세상의 법칙이다."
성 시장의 목소리는 오만함과 냉혹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약자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울부짖다가 제풀에 지쳐 쓰러지지만, 강자는 그 울부짖음을 발판 삼아 더 높은 곳으로 올라선다. 내무부 감사가 두려워 내가 떨고 있다고 생각했더냐? 천만에. 저들이 남원에 내려온 진짜 이유는 나를 굴복시켜 중앙의 충견으로 쓰기 위함이었고, 나는 그 대가로 날개를 얻었다."
성 시장은 책상 서랍에서 또 다른 서류 한 장을 꺼내 재환의 가슴팍을 향해 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는 서울의 명문 사립 고등학교로의 전학 수속 서류였다.
"이 남원 땅에서의 유희는 오늘로 끝이다. 임기가 2년 남았으나, 내 차출 발령은 당장 다음 주 초로 결정될 것이다. 너는 이번 주말 안으로 짐을 싸서 서울 평창동 백부 댁으로 올라간다."
재환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서울이요?"
"그래, 서울이다. 남원 같은 촌구석에서 천박한 계집아이의 손장난에 놀아날 시간이 없다. 짐을 싸라. 두 번 말하지 않겠다."
5. 폭우 속의 맹세와 어두운 결의
서재를 뛰쳐나온 재환은 관사 2층 자신의 방으로 올라와 문을 걸어 잠갔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 안, 창밖에서 번쩍이는 번개 불빛만이 벽면에 걸린 액자와 책상을 푸르스름하게 비추었다.
재환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책상 앞에 섰다.
입술이 터진 자리에서 여전히 비릿한 피 맛이 맴돌았고, 뺨은 화끈거리며 욱신거렸다.
그러나 육체의 고통 따위는 가슴을 갈가리 찢어놓는 비참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서울로 떠나라니.'
당장 다음 주라니.
지유에게 평생의 처마가 되어주겠다고, 어떤 비가 내려도 너를 지키겠다고 맹세한 지 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의 아버지는 지유의 가문을 파멸시킨 원흉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추악한 죄악을 발판 삼아 서울로 영전하며 자신을 강제로 끌고 가려 하고 있었다.
재환은 교복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흑청색 옻칠이 입혀진 차가운 만년필.
지유가 용돈을 모아 선물해 준 깊고 푸른 흑청색 잉크가 가득 채워져 있는, 세상에서 가장 순결하고 단단한 무기.
캡에 새겨진 라틴어 법언이 번개 불빛 아래 형형하게 빛났다.
'Fiat justitia, ruat caelum.'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재환의 손가락이 만년필을 부서져라 쥐었다.
아버지는 법이 강자의 칼날일 뿐이라 말했다.
약자를 짓밟고 권력을 탐하는 자들의 오물 위에서 피어난 꽃이라 조롱했다.
'아닙니다, 아버지.'
재환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려 굳게 쥔 만년필의 금빛 닙 위로 떨어졌다.
'법은 그런 추악한 거래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억울하게 빼앗긴 자의 눈물을 닦아주고, 당신들처럼 거대한 권력의 괴물들을 심판대에 세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재환은 책상 서랍을 열고 백지를 꺼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만년필을 쥐고 글자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지유의 흑청색 잉크가 백지 위로 번져나가며 서늘한 검푸른빛을 토해냈다.
[성호석, 그리고 한석규.
1991년 남원군 도통동 환지 처분 및 강태석의 삼거리 토건.
내무부 감사 조작과 중앙 발탁의 이면 밀약.]
아버지가 서재 금고 속에 숨겨둔 원본 서류의 행방, 강태석이 내뱉은 추악한 자백들.
재환은 조금 전 서재에서 목격한 모든 진실을 한 글자도 빠짐없이 백지 위에 기록했다.
이것은 단순한 메모가 아니었다.
훗날 자신이 반드시 힘을 길러, 법이라는 가장 엄정한 무기를 쥐고 돌아와 이 거대한 악의 사슬을 끊어내겠다는 피의 맹서(盟誓)였다.
하지만 당장 닥쳐온 가혹한 운명의 칼날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다음 주면 영문도 모른 채 남겨질 지유.
완월정에서 함께 웃으며 축제를 준비하던 민재와 하은.
남원의 푸른 노을과 요천의 둑길, 팽나무 아래에서 나누었던 그 모든 따스한 약속들이 산산조각 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재환은 창가로 다가가 유리창에 이마를 기대었다.
어둠에 잠긴 남원 시내 저편, 동문 우체국 골목 어귀의 작은 김밥집 처마 밑이 눈에 밟혔다.
지금쯤 지유는 방금 전 들이닥친 사내들의 정체를 궁금해하며 홀로 불안에 떨고 있을까.
자신을 걱정하며 창밖의 빗소리를 듣고 있을까.
"지유야……."
재환의 입술 사이로 애절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
가문이라는 거대한 감옥, 아버지가 드리운 잔인한 그림자가 두 사람의 여린 사랑을 통째로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재환은 도망치지 않기로 결심했다.
서울로 끌려가더라도 결코 남원을 잊지 않을 것이며, 힘없는 소년의 무력함을 딛고 일어나 반드시 온전한 정의의 이름으로 지유의 곁으로 돌아오리라.
번개가 다시 한번 남원의 밤하늘을 가르며 어두운 관사의 서재와 소년의 방을 환하게 밝혔다.
폭풍우는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거대한 비극의 서막이 소년 소녀의 머리 위로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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