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역습
1. 렌즈 앞에 선 진실
골목 어귀를 휘감아 도는 새벽바람에는 여전히 매캐한 석유 냄새와 들큼한 붉은 페인트의 비린내가 뒤섞여 있었다.
골목 담벼락과 삼거리 김밥집의 통유리창을 시뻘겋게 물들였던 협박 문구들은, 한지유가 손톱 밑이 터져라 문질러 댄 흔적 탓에 희뿌연 석유 자국과 얼룩덜룩한 핏빛 찌꺼기로 번져 있었다.
최민재는 낡은 가죽 재킷 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골목 입구를 향해 연신 시선을 던졌다.
지유가 손수 찢어버린 서울행 무궁화호 기차표의 서슬 퍼런 종이 파편들이 아직도 그의 바지 주머니 안쪽에서 바스락거리고 있었다.
‘내가 도망치면 재환이의 싸움도 도망치는 거야.’
그 단호하고도 처연했던 목소리가 귓전을 때릴 때마다 민재의 명치 끝이 바늘로 쑤시듯 저려왔다.
남원에 남아 목숨을 걸고 터전을 지키겠다는 그 어린 여자의 등 뒤에서, 자신은 그저 도망칠 궁리나 하고 있었다는 지독한 수치심이 온몸의 피를 거꾸로 솟구치게 만들었다.
골목 너머에서 무거운 디젤 엔진 소리와 함께 청색 밴 한 대가 진입로의 웅덩이를 덜컹거리며 튀어 올랐다.
차량 옆면에는 전북 지역 민영 방송사인 JBS 탐사보도국의 푸른색 로고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차량이 멈추어서자마자 조수석 문이 거칠게 열리며 헝클어진 곱슬머리에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사내가 뛰어내렸다.
JBS 보도국 사회부의 베테랑 탐사보도 전문 기자, 강혁이었다.
그의 뒤를 이어 무거운 ENG 카메라를 어깨에 멘 촬영기사와 오디오 장비를 든 조연출이 신속하게 차에서 쏟아져 나왔다.
강혁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코를 찌르는 석유 냄새에 미간을 찌푸리며 골목길과 김밥집 전면을 훑었다.
"최민재! 네가 새벽 세 시에 전화를 걸어 지서 망루가 무너졌다고 소리를 지르더니, 이 꼬라지를 보여주려고 날 여기까지 끌고 온 거냐?"
강혁의 시선이 김밥집 벽면에 처참하게 긁혀 나간 붉은 페인트 자국과, 박스 테이프로 'X' 자를 촘촘히 엮어 붙인 깨진 유리창에 멎었다.
민재는 주저 없이 강혁의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선배, 단순히 시정잡배들이 깽판 친 자리가 아닙니다. 요천 제방 붕괴 참사의 본류가 바로 이 골목에서부터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한 겁니다."
민재는 품 안에서 닳고 닳은 취재 수첩과 두툼한 마닐라삼 서류 봉투를 꺼내 강혁의 가슴팍에 내리꽂듯 들이밀었다.
"이걸 보십시오. 남원시청과 토건 조폭 한양토건, 그리고 시장 강태석이 지난 3년간 삼거리 일대 상인들을 어떻게 합법의 탈을 쓰고 쥐어짰는지 적힌 내부 공문과 현장 녹음테이프입니다."
강혁은 특유의 날카로운 눈매로 서류철의 첫 장을 넘겼다.
위생과의 억지 시정명령서, 소방과의 표적 개수명령서, 그리고 한양토건 박진철이 번영회 오 회장에게 건넨 뇌물 녹취록의 녹취 요약본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강혁의 입술이 바싹 말라붙었다.
"이게…… 전부 진짜란 말이지? 네가 남원일보 캐비닛에서 긁어모았다는 그 장부들이?"
"그뿐만이 아닙니다. 어젯밤 하정리 삼거리에서 15톤 덤프트럭이 시청 건설교통국장 황선태의 차를 밀어버린 사건, 경찰은 빗길 단순 교통사고로 종결하려 했죠?"
민재는 주머니에서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꺼내 들었다.
"하정리 삼거리 주유소 사설 방범 카메라 원본 테이프입니다. 전조등을 끈 덤프트럭이 10분간 잠복하다 정확히 황 국장의 차량 운전석을 겨냥해 돌진했습니다. 트럭에서 내려 도주한 놈은 한양토건 행동대장 박철구였고요."
강혁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흔들렸다.
"박철구? 그 조폭 놈이 황선태를? 왜?"
"황선태가 요천 제방 붕괴의 원인이 된 규격 미달 철근과 불량 골재 납품 비리를 입증할 강태석 시장의 비밀 장부를 쥐고 있었으니까요. 입을 막으려고 살인 청부를 한 겁니다."
민재의 목소리에는 서슬 퍼런 분노가 실려 있었다.
강혁은 서류와 비디오테이프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뒤편의 촬영기사를 향해 손짓했다.
"오 선배, 카메라 돌려. 골목 벽면의 페인트 자국이랑 깨진 유리창, 그리고 저기 안에서 밥 짓고 있는 사람부터 타이트하게 따."
카메라의 붉은색 녹화 램프가 깜빡이며 기계음을 냈다.
렌즈의 차가운 눈동자가 삼거리 김밥집의 굳게 닫힌 상처를 정면으로 응시하기 시작했다.
2. 침묵을 깨는 도마 소리
가게 문을 밀고 들어서는 취재진의 발소리에 처마 밑에 걸린 낡은 놋쇠 풍경이 맑고 시린 소리를 냈다.
조리대 안쪽에서는 자욱한 밥 뜸 들이는 김 사이로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새하얀 앞치마를 두른 한지유는 거칠게 까진 손등에 대일밴드를 덕지덕지 붙인 채, 식어가기 전의 따스한 쌀밥을 커다란 양푼에 쏟아붓고 있었다.
어머니가 남겨주신 나무 주걱을 쥔 지유의 손길은 한 치의 떨림도 없었다.
취재진의 거대한 카메라 렌즈와 붐 마이크가 머리 위로 들이밀어졌지만, 지유는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탁, 탁, 탁, 탁.
일정한 간격으로 도마를 울리는 칼질 소리가 좁은 가게 안을 가득 메웠다.
노랗게 부쳐낸 달걀지단과 소금에 절인 오이, 당근이 정갈하게 썰려 나갔다.
강혁 기자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조리대 앞으로 다가섰다.
"한지유 씨 되십니까? JBS 방송 강혁 기자입니다."
지유는 썰어둔 단무지를 가지런히 정리한 뒤에야 비로소 칼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맑고 깊은 지유의 검은 눈동자에는 두려움이나 위축감 대신, 가혹한 비바람을 온몸으로 견뎌낸 고목 같은 담담함이 서려 있었다.
"기자님, 아침 일찍 오셨네요. 김밥 주문하시게요?"
강혁은 당돌할 정도로 차분한 지유의 태도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어젯밤 살해 협박과 붉은 페인트 테러를 겪은 열아홉의 처녀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침착함이었다.
"지유 씨, 바깥의 저 핏빛 낙서들을 봤습니다. 불태워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받았으면서, 왜 도망치지 않고 이 시간에 문을 연 겁니까? 경찰에 신변 보호를 요청하거나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지유의 시선이 깨진 유리창 너머, 희뿌옇게 밝아오는 남원의 구도심 골목으로 향했다.
"도망치면요?"
지유의 나지막한 음성이 조용한 주방에 울렸다.
"내가 무서워서 가게 문을 닫고 도망치면, 저들이 이기는 거잖아요. 저 붉은 글씨를 쓴 사람들은 내가 겁을 먹고 제 발로 남원을 떠나길 바랐을 거예요. 그러면 우리 어머니가 지키려 했던 가게도, 억울하게 빼앗긴 우리 아버지의 땅도, 그리고……."
지유는 잠시 말을 멈추고 앞치마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성재환의 학생증 증명사진 모서리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차디찬 법정에서 홀로 거악과 맞서 싸우고 있을 그의 뒷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지금 법정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그 사람의 싸움도 전부 거짓이 되어버리니까요."
강혁의 목구멍이 턱 막혔다.
지유는 김 한 장을 대발 위에 얹고 따스한 밥을 골고루 펴 바르기 시작했다.
"우리 어머니는 참기름 한 방울, 밥 한 톨도 속이지 않고 이 가게를 지키셨어요. 시청에서 위생 검사로 협박하고, 소방 법을 들이대며 문을 닫으라고 으름장을 놓아도, 우리는 법을 어긴 적이 없어요. 법을 어긴 건 시장님과 그 뒤에 숨은 토건 깡패들이에요."
지유가 김밥을 야무지게 말아 올렸다.
단단하게 말린 김밥 위로 고소한 참기름이 발라지고, 푸른 칼날이 지나갈 때마다 정갈한 김밥 단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원에 사는 사람들은 다 알아요. 요천 둑이 무너진 건 비가 많이 와서가 아니에요. 저들이 돈을 빼돌리고 썩은 자재를 썼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왜 피해자인 우리가 도망쳐야 하나요? 저는 여기서 김밥을 말 거예요. 우리 가게 손님들이 출근길에 배를 곯지 않도록, 그리고 저 거짓말쟁이들에게 우리가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요."
카메라 뷰파인더 너머로 지유의 얼굴을 응시하던 촬영기사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강혁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마이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지유 씨, 그 증언…… 방송에 전부 나가도 괜찮겠습니까? 얼굴과 이름이 전국에 공개되면, 저들의 보복이 더 잔혹해질 수도 있습니다."
지유는 참기름이 묻은 손을 마른 수건에 닦아내며 강혁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내보내 주세요. 숨길 것도, 부끄러운 것도 없습니다.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들은 지금 전주교도소와 시청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그 사람들입니다."
지유의 단호한 선언과 함께, 주방 한구석에서 묵묵히 밥솥을 닦고 있던 윤하은이 붉어진 눈시울을 훔치며 취재진 앞에 섰다.
"저도 증언할게요. 어젯밤 저 골목에 붉은 페인트를 칠하고 도망치던 놈들의 인상착의, 제가 똑똑히 봤어요!"
가게 안을 가득 채우는 도마 소리가 더 이상 가련한 영세 상인의 신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권력의 폭압에 맞서 울리는 민초들의 서슬 퍼런 출진 북소리였다.
3. 편집국의 긴급 호출
골목길을 빠져나온 취재 차량 안에서 강혁은 쉴 새 없이 담배를 물어뜯으며 서울과 전주의 데스크로 무전을 쳤다.
"부장! 나 강혁입니다. 지금 당장 오늘 낮 뉴스 특보 라인 비워두세요. 판이 뒤집혔습니다!"
무전기 너머로 보도국장의 앙칼진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강 기자, 무슨 헛소리야?
남원 요천 제방 붕괴는 이미 도청이랑 시청에서 '300mm 국지성 집중호우에 따른 불가항력적 천재지변'으로 공식 브리핑 끝냈어!
지금 남원시장 강태석이 구속적부심 받고 있는데, 중앙 정계 라인에서 조용히 넘어가라고 압박 넣는 거 몰라?
"불가항력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강혁이 차량 대시보드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포효했다.
"인재(人災)입니다, 부장! 시청 건설교통국장이 횡령 장부 빼돌리다 청부 살해당할 뻔한 현장 CCTV를 땄다고요! 그리고 요천 제방 1공구에 기준치 3분의 1 토막 난 철근이랑 모래 잡석 쑤셔 넣은 감리 보고서 원본, 현장 콘크리트 시편까지 완벽하게 확보했습니다!"
- 뭐?
시편에 감리 보고서 원본까지?
"거기다 삼거리 김밥집 테러 현장 인터뷰 땄습니다. 시청이 조폭 동원해서 영세 상인들 어떻게 고사시키려 했는지, 피해자 육성이랑 얼굴 그대로 털 겁니다! 오늘 정오 특보로 안 내보내면 나 이거 서울 본사 추적 60분 팀으로 통째로 넘겨버릴 테니까 알아서 하십시오!"
차량 안의 침묵을 깬 것은 최민재의 낮게 깔린 목소리였다.
"선배, 방송국으로 가기 전에 한 군데 더 들러야 합니다."
강혁이 핏발 선 눈으로 민재를 돌아보았다.
"어디? 시간이 없어. 낮 열두 시 방송 맞추려면 지금 당장 전주 편집실로 쏴야 해."
"광한루원 완월정 뒤편 팽나무입니다."
민재는 주머니에서 기름종이에 싼 녹슨 열쇠 하나를 꺼내 보였다.
"그곳 바위 틈에 지유와 제가 숨겨둔 요천 제1공구 부실 콘크리트 시편 실물과, 한양토건 박진철의 도장이 찍힌 하도급 빼먹기 이면 계약서 원본이 있습니다. 눈으로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물증이 화면에 올라가야, 강태석의 어용 언론들이 천재지변이라고 입을 못 뗍니다."
강혁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기사 제대로 쓸 줄 아는 놈이네. 야, 차 돌려! 광한루원으로 쏜다!"
승합차는 굉음을 내며 요천 둑길을 따라 질주하기 시작했다.
무너져 내린 제방 제1공구 현장 주변에는 여전히 경찰의 노란색 통제선이 쳐져 있었고, 전경 버스 두 대가 버티고 서서 일반인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그러나 둑길 아래로 펼쳐진 처참한 몰골은 가릴 수 없었다.
앙상하게 드러난 옹벽의 단면, 엿가락처럼 휘어버린 녹슨 철근 몇 가닥, 그리고 진흙더미 속에 파묻힌 하정리와 동충동 저지대 상가들의 참상이 렌즈 속으로 낱낱이 빨려 들어왔다.
취재 차량은 광한루원 후문 공터에 급정거했다.
민재는 강혁과 카메라 기사를 이끌고 완월정 뒤편, 수령 수백 년 된 아름드리 팽나무 고목으로 은밀히 숨어들었다.
이곳은 7년 전, 성재환과 한지유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만년필을 쥐여주었던 운명의 공간이었다.
팽나무 밑동, 젖은 이끼가 낀 바위 틈 안쪽에서 민재가 손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두꺼운 군용 방수포에 꽁꽁 싸인 묵직한 덩어리가 햇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방수포를 벗겨내자, 손가락으로 꾹 누르기만 해도 푸석하게 부서져 내리는 회색빛 잡석 콘크리트 덩어리와, 푸른 곰팡이가 슬어가는 두툼한 감리 일지 원본이 나타났다.
"세상에……."
카메라를 들이대던 기사가 탄식을 내뱉었다.
"이게 댐 제방을 쌓는 콘크리트라고? 이건 그냥 모래 반죽이잖아!"
강혁이 장갑을 낀 손으로 부서진 잔해를 집어 들며 카메라를 향해 돌아섰다.
"똑똑히 찍어. 철근 피복 두께는 규격의 반도 안 되고, 골재는 세척도 안 한 흙모래를 그대로 퍼부었어. 40억을 떼어먹고 남원 시민들의 목숨을 이 모래성 위에 올려놓았던 거야."
민재는 품에서 최후의 녹음테이프를 꺼내 강혁의 손에 쥐여주었다.
"남원일보 배도식 국장의 육성 테이프입니다. 강태석 시장이 3억 원 시정 홍보비를 무기로 '100년 만의 기습 폭우'로 왜곡 호외를 찍어내라고 협박한 통화 녹음입니다."
강혁의 눈빛에 언론인으로서의 전율과 투지가 번뜩였다.
"완벽하다. 증거, 증언, 배후 외압 녹취까지. 최민재, 너 오늘 남원의 역사를 새로 쓰는 거다."
4. 전파를 탄 폭로
정오를 알리는 시보가 울리자, 전북 전역의 텔레비전 화면이 일제히 전환되었다.
'JBS 정오 뉴스 특보.'
붉은색 긴급 자막과 함께 메인 앵커의 굳은 얼굴이 브라운관을 채웠다.
-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정오 뉴스 특보는 백 년 만의 천재지변으로 알려졌던 남원 요천 제방 붕괴 참사의 충격적인 이면을 단독 보도합니다.
본사 취재팀의 단독 취재 결과, 이번 참사는 자연재해가 아닌 남원시청과 토착 건설 세력의 유착이 빚어낸 명백한 인재(人災)였음이 단독 입수된 내부 문건과 현장 물증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화면이 바뀌며 현장 취재를 맡은 강혁 기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화면 가득, 붕괴된 요천 제방의 처참한 단면과 엿가락 철근이 클로즈업되었다.
- 이곳은 집중호우로 50여 미터가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남원 요천 수변공원 제1공구 현장입니다.
수해 직후 남원시는 백 년 만의 기록적인 폭우를 탓하며 불가항력의 재해라고 강변했습니다.
그러나 취재진이 단독 입수한 한양토건의 감리 보고서 원본과 현장 콘크리트 시편 분석 결과는 전혀 다른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화면에는 강혁 기자가 장갑 낀 손으로 푸석하게 부스러지는 콘크리트 시편을 쥐어짜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모래와 흙탕물이 힘없이 바스러져 내리는 적나라한 영상 위로 성분 분석표 그래픽이 겹쳐졌다.
- 보시는 것처럼 규격 철근은 설계치의 3분의 1에 불과했고, 고강도 방수 시멘트 대신 규격 미달의 하천 모래와 폐기물 잡석이 채워졌습니다.
공사비 180억 원 중 무려 40억 원에 달하는 비자금이 유령 페이퍼 컴퍼니와 차명 계좌를 통해 빼돌려진 정황이 검찰 수사팀에 의해 포착되었습니다.
이어 화면은 어두컴컴한 골목길, 붉은 유성 페인트로 처참하게 더럽혀진 삼거리 김밥집의 외벽과 깨진 유리창을 비추었다.
골목의 적막을 깨고, 정갈한 앞치마를 두른 채 도마질을 멈추지 않는 한지유의 결연한 모습이 클로즈업되었다.
- 하지만 비리의 대가는 고스란히 힘없는 서민들의 몫이었습니다.
붕괴 위험을 사전에 경고하고 부패 카르텔에 저항해 온 구도심 상인들을 향해, 시청과 결탁한 토건 세력은 심야 쇠파이프 난동과 붉은 페인트를 동원한 살해 협박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지유의 맑고 서늘한 음성이 브라운관을 타고 남원 시내 전역의 안방과 상가로 울려 퍼졌다.
"내가 무서워서 가게 문을 닫고 도망치면, 저들이 이기는 거잖아요……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들은 지금 높은 자리에 앉아 거짓말을 일삼는 그 사람들입니다."
지유의 인터뷰에 이어, 하정리 삼거리에서 덤프트럭이 황선태 국장의 차량을 들이받는 흑백 방범 카메라 영상이 여과 없이 전파를 탔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박철구가 트럭에서 뛰어내려 도주하는 장면, 그리고 남원일보 배도식 국장이 강태석 시장의 협박에 굴복해 천재지변으로 기사를 조작했음을 시인하는 생생한 육성 테이프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 취재진은 강태석 남원시장의 비자금 관리 내역이 담긴 비밀 장부를 입수하려던 시청 간부가 어젯밤 의문의 청부 덤프트럭 테러를 당한 현장 영상과, 지역 언론을 매수해 보도를 통제하려 한 육성 녹음 파일까지 단독 확보했습니다.
취재에 강혁입니다.
뉴스가 끝나는 순간까지, 화면 하단에는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에서 현재 진행 중인 강태석 시장의 구속적부심 심문 소식이 붉은 자막으로 쉴 새 없이 흐르고 있었다.
5. 들끓는 남원
방송이 송출된 지 불과 10분도 지나지 않아, 남원 시내 전체가 거대한 용광로처럼 들끓기 시작했다.
남원 동문 우체국 앞 삼거리 골목길에는 점심 식사를 하러 나온 직장인들과 시장 상인들이 삼삼오오 텔레비전이 놓인 식당과 전자 대리점 쇼윈도 앞으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세상에…… 저게 사실이란 말이여?"
건어물가게 배 씨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쇼윈도 안의 브라운관을 가리키며 턱을 바들바들 떨었다.
"하늘이 노해서 물난리가 난 줄 알았더니, 벼락을 맞을 놈들이 둑에 넣을 철근을 빼돌려 지들 배를 불렸단 말여?"
"배 씨 영감, 그것뿐인 줄 아요? 저기 김밥집 색시 인터뷰 나오는 거 못 봤소?"
방앗간 김 씨가 흥분해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그 어린것이 밤마다 조폭 놈들한테 쇠파이프 테러를 당하고, 벽에 뻘건 페인트로 난도질을 당하면서도 저렇게 꼿꼿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단 말이요! 우리가 그것도 모르고 무서워서 침묵하고 있었으니, 에라이 빌어먹을 천벌을 받을 것들!"
분노는 순식간에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누군가 들고 있던 신문지 뭉치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것은 오늘 아침 남원일보가 뿌려댄 '100년 만의 폭우, 수해 복구 영웅 강태석'이라는 거짓 호외였다.
"이따위 사기 신문을 돈 주고 보란 말이냐! 강태석이 조폭 두목이지 시장이냐!"
"남원 사람들을 개돼지로 알고 물에 빠뜨려 죽이려 한 살인마 놈들이다!"
시장 골목 곳곳에서 거친 고함과 함께 상인들이 하나둘 가게 밖으로 뛰쳐나왔다.
택시 기사들은 경적을 길게 울리며 요천 둑길 방향으로 차 머리를 돌렸고, 남원시청 앞 광장에는 수해로 삶의 터전을 잃은 하정리와 동충동 이재민들이 흙 묻은 장화를 신은 채 모여들기 시작했다.
삼거리 김밥집 앞은 순식간에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공포와 보복이 두려워 멀찍이 피해 다니던 이웃들이, 부끄러움과 미안함에 고개를 숙인 채 김밥집 문을 두드렸다.
"지유야! 지유야, 아지매가 왔다!"
인근 야채가게 아주머니가 파와 양파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조리대 위에 쿵 내려놓으며 눈물을 쏟아냈다.
"이 모진 것, 이 험한 꼴을 당하면서 왜 말을 안 했어! 우리가 눈이 멀고 귀가 먹어서 너 혼자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었구나!"
"지유 학생, 힘내요! 우리가 지켜줄게! 어디 그 깡패 놈들이 다시 오나 보자, 내 쇠스랑으로 대가리를 찍어버릴 테니까!"
철물점 윤 씨가 몽둥이를 쥐어 잡고 가게 앞을 가로막아 섰다.
삼거리 김밥집의 낡은 유리창에 붙은 테이프 너머로, 이웃들의 뜨거운 온기와 눈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조리대 앞에 서 있던 지유는 밀려드는 손님들의 손을 하나하나 맞잡으며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거칠어진 손등 위로, 마침내 참아왔던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져 내렸다.
이제 지유는 혼자가 아니었다.
진실의 전파를 탄 정의의 불씨가, 마침내 얼어붙었던 남원 시민들의 양심을 거대한 들불로 타오르게 만들고 있었다.
6. 전주교도소의 발작
쿵!
전주교도소 미결수 특별 독방의 육중한 배식구가 뒤흔들릴 정도로 거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벽걸이 브라운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JBS 뉴스 특보 화면을 노려보던 강태석 남원시장이, 손에 쥐고 있던 플라스틱 물컵을 벽면으로 집어 던졌다.
물컵이 산산조각 나며 튄 물방울이 강태석의 기름진 죄수복 앞섶을 흠뻑 적셨다.
"이…… 개자식들이! 감히 뉘 앞이라고 그 주둥이를 함부로 놀려!"
강태석의 두 눈은 핏발이 서다 못해 살기등등한 광기로 뒤덮여 있었다.
화면 속에서는 자신이 '백 년 만의 천재지변'으로 완벽하게 포장해 두었던 요천 제방의 부실 콘크리트가 바스러지고 있었고, 황선태를 들이받은 덤프트럭의 영상과 박철구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삼거리 김밥집 지유의 차분하고도 서슬 퍼런 인터뷰.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들은 지금 높은 자리에 앉아 거짓말을 일삼는 그 사람들입니다.'
강태석의 누런 이빨이 빠득빠득 갈렸다.
"어린 계집년이…… 내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야 할 버러지 같은 년이 감히 방송 카메라 앞에서 내 목을 졸라?"
그때, 독방 철문이 덜컹거리며 열리더니 사색이 된 강태석의 변호인이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변호인의 손에 들린 서류 가방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시, 시장님! 큰일 났습니다! 지금 남원지원 앞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강태석이 변호인의 멱살을 잡고 거칠게 끌어당겼다.
"구속적부심은 어떻게 됐어! 문성현 그 판사 새끼, 내가 손써둔 대로 보석 허가 도장 찍었냐고!"
"그, 그게 아닙니다……!"
변호인이 사시나무 떨듯 떨며 울먹였다.
"대검 감찰부장이 법정 앞에서 성재환 검사를 직무 배제로 묶어 연행하려 했는데, 성재환이 검찰청법상 이의제기권을 들이대며 감찰반을 물리력으로 밀어내고 법정 안으로 난입했습니다!"
"뭐라고? 감찰부장 그 밥통 새끼가 평검사 하나를 못 틀어막았단 말이냐?"
"그뿐만이 아닙니다! 성재환 검사가 방금 체포된 한양토건 박철구의 자백 조서와 현장 감식 결과, 그리고 방금 방송에 나간 JBS 특보 비디오테이프를 증거로 제출했습니다! 문성현 부장판사가…… 구속적부심을 '이유 없음'으로 즉각 기각해 버렸습니다!"
"기각?!"
강태석의 뇌리에 벼락이 내리꽂히는 듯했다.
구속적부심 기각은 곧 옥중에서의 석방이 완전히 무산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성재환 검사가 그 자리에서 시장님에 대해 업무상과실치사상 외에 '특수살인교사' 및 '특가법상 뇌물수수' 혐의로 추가 구속영장을 재청구했습니다. 판사가 영장 발부를 위해 오늘 오후 3시에 시장님을 남원지원 법정으로 강제 구인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강태석의 다리에 힘이 풀리며 비틀거렸다.
자신이 30년간 쌓아 올린 철옹성 같은 토착 권력의 바닥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조폭 출신으로 시작해 시의회를 장악하고 민선 시장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 누구도 거역하지 못했던 자신의 공포 정치가 단 한 명의 젊은 검사와, 굴복하지 않은 어린 여자의 도마 소리 앞에서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하지만 강태석의 눈빛 속에서 타오르는 독기는 결코 사그라들지 않았다.
오히려 벼랑 끝에 몰린 맹수처럼 더욱 흉포하고 비열하게 번뜩였다.
강태석은 바닥에 떨어진 변호인의 서류 가방을 걷어차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아직 안 끝났어. 서울의 김문현 위원장에게 연락해. 이대로 내가 죽으면 김문현 그 양반한테 건너간 20억 CD랑 요천 땅 지분 서류도 세상에 다 까발려진다고 전해!"
강태석이 변호인의 귀에 바짝 다가가 피 끓는 목소리로 짓씹어 뱉었다.
"남원 기자실 놈들 전부 소집해. 오늘 오후 세 시, 법정으로 끌려가기 전에 전주교도소 접견실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연다."
"기, 기자회견이요? 이 난리통에요?"
"그래. 이 모든 게 성호석 그 늙은 여우의 아들놈이 제 애비의 과거 비리를 덮고 나를 매장하기 위해 기획한 '정치 검찰의 조작극'이라고 발표할 거다! 남원 바닥을 피바다로 만들어서라도, 난 살아서 저 문을 나갈 거다!"
7. 법정 계단에서 마주한 눈빛
정오의 햇살이 남원지원 붉은 벽돌 청사 위로 눈부시게 쏟아져 내렸다.
법원 정문 앞마당은 방송을 보고 몰려든 수백 명의 시민들과 취재진, 그리고 구속 촉구 피켓을 든 이재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토건 조폭 강태석을 엄벌에 처하라!"
"살인마 시장에게 법정 최고형을 선고하라!"
성난 민심의 파도 같은 함성이 법원 청사 유리창을 뒤흔들고 있었다.
제1호 법정의 육중한 참나무 문이 열리고, 검은 법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성재환 검사가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한 손에는 문성현 부장판사의 서명이 날인된 강태석에 대한 추가 구속영장 결정문이, 다른 한 손에는 캡 상단에 'Fiat justitia, ruat caelum'이 각인된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이 쥐여져 있었다.
재환의 서슬 퍼런 눈빛은 법원 계단 아래를 가득 메운 군중을 담담히 응시했다.
법원 청사 계단 밑에서 성재환을 강제 연행하려 대기하고 있던 대검 감찰부장과 감찰반원들은, 쏟아져 나오는 플래시 세례와 성난 시민들의 서슬 퍼런 눈초리에 짓눌려 차마 손을 뻗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 있었다.
"성재환 검사님! JBS 뉴스 특보 보셨습니까?"
"강태석 시장의 추가 구속영장이 발부된 것이 사실입니까?"
기자들의 마이크가 벌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재환은 마이크 앞에 서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법원 계단을 한 걸음씩 내려왔다.
그의 시선 너머, 법원 정문 울타리 가자미나무 그늘 아래에 숨을 헐떡이며 서 있는 최민재의 모습이 보였다.
민재의 손에는 취재 수첩과 작은 소형 카세트 라디오가 들려 있었다.
두 청년의 시선이 허공에서 묵직하게 교차했다.
민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재환을 향해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냈다, 재환아. 지유가 해냈고, 우리가 해냈어.'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그 뜨거운 연대의 무게에 재환의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재환은 가슴 안주머니에 손을 얹었다.
그곳에는 지유가 지난밤 정성스럽게 싸서 건네주었던 따뜻한 김밥 한 줄의 온기가, 그리고 7년간 품어왔던 닳고 닳은 지유의 흑청색 잉크병의 기억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지유야, 네가 목숨을 걸고 남원을 지켰듯, 나는 법으로 이 땅의 악을 도려내겠다.'
재환은 자신을 둘러싼 취재진과 감찰반을 향해 단 한마디의 말을 남겼다.
"법은 권력의 시녀가 아닙니다. 이제 곧, 남원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법정에서 가려질 것입니다."
성재환 검사의 서늘하고도 단호한 선언과 함께, 법원 앞마당을 가득 메운 시민들의 우레와 같은 함성이 남원의 하늘을 뒤흔들었다.
거악의 심장을 향해 겨누어진 정의의 칼날이,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 심판의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