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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65화

가게 앞의 붉은 페인트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핏빛으로 물든 새벽

 

동문 우체국 뒷골목의 새벽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지리산 줄기를 타고 내려온 늦여름의 습한 바람이 요천(蓼川)의 비린 물내를 품은 채 구도심의 좁은 골목길을 흝고 지나갔다.

 

동이 트기 직전인 새벽 다섯 시, 남원(南原) 시가지 전체가 깊은 어둠과 침묵에 젖어 있는 시간이었다.

 

삐걱거리는 목조 계단을 밟고 내려온 한지유는 평소처럼 가게 문을 열기 위해 열쇠 꾸러미를 손에 쥐고 있었다.

 

어머니가 살아생전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시간이었다.

 

"새벽밥을 안치는 사람의 손끝이 부지런해야 하루를 사는 사람들의 뱃속이 든든한 법이다."

 

어머니의 그 온기 어린 목소리는 이제 차가운 영안실의 침묵 너머로 사라졌지만, 지유는 단 하루도 새벽 다섯 시의 첫 불을 꺼뜨린 적이 없었다.

 

어제 낮에는 시청의 굴착기가 가게 처마를 찍어 누르려 했고, 성재환이 법원의 결정문을 들고 달려와 그 폭압을 온몸으로 가로막았다.

 

그리고 밤새 들려온 소식은 가슴을 난도질하기에 충분했다.

 

재환이 그들을 옭아맬 결정적 증거를 지닌 건설교통국장을 구하려다 살인 테러에 휘말렸고, 빗길 속에서 피의자를 직접 격투 끝에 체포했다는 소식.

 

그 모든 격랑 속에서도 지유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였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

 

재환이 법정에서, 거대한 악의 소굴 한가운데서 비틀거리지 않고 돌아올 수 있도록, 이 삼거리 김밥집의 불을 환하게 켜두는 것뿐이었다.

 

"후우……."

 

지유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낡은 미닫이 출입문의 자물쇠를 풀었다.

 

철컥, 하는 쇠붙이 소리와 함께 미닫이문을 옆으로 밀어젖힌 순간이었다.

 

지유의 발걸음이 돌바닥 위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것은 구수한 참기름 냄새도, 밥 짓는 훈김도 아니었다.

 

코를 찌르는 역하고 지독한 화학 유기용제의 악취였다.

 

석유와 시너, 그리고 쇠 냄새가 뒤섞인 역겨운 냄새가 골목 안개 속에서 진동을 하고 있었다.

 

지유의 시선이 천천히 위로 향했다.

 

"……아."

 

그녀의 입술 사이로 짧고 메마른 탄식이 새어 나왔다.

 

가게 정면, 지난번 쇠파이프 난동 때 산산조각 났다가 투명 박스 테이프로 촘촘히 엮어 붙였던 대형 통유리창과 하얀 회벽 전체가 온통 핏빛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새빨간 유성 페인트였다.

 

채 마르지 않은 붉은 액체가 벽면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려 처마 밑 디딤돌과 시멘트 바닥까지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피를 토하고 지나간 것만 같은 참혹한 광경이었다.

 

그 붉은 페인트로 휘갈겨 쓴 글씨들은 악의와 저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빨갱이 소굴.'

 

'남원 발전을 가로막는 년.'

 

'살인자 집안, 썩 꺼져라.'

 

'남원을 떠나라, 안 나가면 불태워 죽인다.'

 

가게 출입문 손잡이에는 누군가 으스러뜨려 놓은 생선 대가리와 썩은 계란 껍데기가 붉은 페인트 범벅이 된 채 짓이겨져 매달려 있었다.

 

새벽안개 속에서 번져나가는 붉은빛은 단순한 장난이나 낙서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것이었다.

 

그것은 명백한 사형선고이자, 이 골목에서 사람으로 숨 쉬고 살아가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잔인무도한 폭력이었다.

 

지유는 떨리는 손을 가슴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얼음물에 담긴 것처럼 차갑게 굳어갔다.

 

성재환이 목숨을 걸고 법으로 방어벽을 쳐두었더니, 그들은 법이 미치지 않는 어둠 속에서 가장 비열하고 더러운 칼을 꺼내 든 것이다.

 

2. 침묵의 골목, 차가운 시선

 

달칵.

 

지유의 뒤편, 주방 쪽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윤하은이 냄비 뚜껑을 든 채 밖으로 나왔다.

 

친구의 곁을 지키기 위해 어젯밤부터 김밥집 단칸방에서 함께 새우잠을 잤던 하은이었다.

 

"지유야, 밥솥 보온 불이 안 들어오는데 코드가……."

 

말을 건네며 문밖으로 발을 디디던 하은의 시선이 가게 외벽에 닿았다.

 

순간, 하은의 손에서 알루미늄 냄비 뚜껑이 맥없이 떨어져 내렸다.

 

쨍그랑-!

 

정적을 깨뜨리는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냄비 뚜껑이 바닥을 굴렀다.

 

하은의 두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뜨였고,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이, 이게…… 이게 뭐야……?"

 

하은의 목소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 나왔다.

 

하은은 비틀거리며 붉은 벽 앞으로 다가갔다.

 

손을 뻗어 벽을 만지려다, 손끝에 묻어나는 진득하고 차가운 붉은 페인트를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뒤로 뺐다.

 

붉은 페인트가 뚝뚝 떨어지는 글자들, '불태워 죽인다'는 그 끔찍한 협박 문구를 읽어 내려가던 하은의 눈에 순식간에 굵은 눈물이 차올랐다.

 

"어떻게…… 어떻게 사람이 이래? 어제 검사님이 와서 다 해결해 줬잖아! 법원에서 철거하지 말라고 했다며! 그런데 왜, 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

 

하은의 절규가 골목 안개 속으로 메아리쳤다.

 

분노와 공포가 뒤섞여 터져 나온 하은의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부들부들 떨렸다.

 

"개자식들…… 진짜 짐승만도 못한 새끼들! 어머니 돌아가신 지가 언젠데, 사람 목숨을 그렇게 쥐락펴락해 놓고 이제는 가게에다 피칠갑을 해 놔? 지유야, 경찰 불러! 당장 경찰서에 전화해!"

 

하은이 울부짖으며 가게 안쪽의 다이얼식 전화기로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지유가 조용히 손을 뻗어 하은의 차가운 손목을 붙잡았다.

 

지유의 손길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고요하고 단단했다.

 

"하은아."

 

"놓아봐, 지유야! 이거 그냥 넘어가면 안 돼! 저놈들 진짜 미쳤어! 너 이러다 정말 칼 맞는단 말이야! 경찰 불러서 지문이라도 떠야 할 거 아니야!"

 

"경찰은 안 와."

 

지유의 낮은 목소리가 새벽 공기를 갈랐다.

 

하은이 멍한 눈으로 지유를 쳐다보았다.

 

지유는 깨진 유리창 너머, 붉은 페인트가 튄 자신의 하얀 앞치마를 내려다보았다.

 

"경찰에 전화해도, 저들이 보낸 순찰차가 오겠지. 와서 뭐라고 할까? CCTV도 없고 목격자도 없으니 철거 반대하는 놈들 자작극 아니냐고 묻겠지. 아니면 상인들끼리 이권 싸움 하다가 앙심 품은 짓이라고 적어 넣고 덮어버릴 거야. 그게…… 남원 경찰이야."

 

지유의 눈동자는 깊은 심연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어머니가 병실에서 사경을 헤맬 때도, 쇠파이프를 든 괴한들이 유리창을 깨부술 때도, 늑장 출동한 경찰들은 늘 피해자인 지유를 다그쳤다.

 

관등성명을 적어 내려가던 자신의 수첩을 비웃던 그들의 얼굴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했다.

 

그들에게 전화하는 것은, 저 붉은 페인트를 칠한 자들에게 또 한 번 비웃을 기회를 던져주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때였다.

 

골목 어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벽 기도를 가기 위해 나선 동문성당의 노인들과, 아침 첫 장사를 준비하러 나온 건너편 건어물가게 배 씨, 그리고 떡방앗간 김 씨가 골목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삼거리 김밥집의 붉은 외벽에 꽂혔다.

 

어제 정오까지만 해도 굴착기 앞에 드러누워

"지유네를 지키자"

 

며 꽹과리를 치고 인간 띠를 만들었던 이웃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눈에 떠오른 것은 어제의 뜨거운 연대감이 아니었다.

 

서늘하고 음습한, 본능적인 공포였다.

 

'안 나가면 불태워 죽인다.'

 

저 붉은 글씨는 지유만을 향한 협박이 아니었다.

 

이 가게와 엮이는 자, 이 가게를 돕는 자는 누구든 같은 꼴을 당할 것이라는, 남원 카르텔이 내린 피의 경고장이었다.

 

배 씨 아저씨가 들고 있던 생선 바구니를 고쳐 쥐며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평소 지유를 보면

"지유야, 아침밥 든든히 묵었냐"

 

며 정답게 말을 건네던 방앗간 김 씨마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마치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빠른 걸음으로 골목 모퉁이를 돌아 사라져 버렸다.

 

출근길에 김밥 세 줄씩을 꼬박꼬박 사 가던 동문 우체국 집배원들도 멀찍이서 가게를 힐끔거리더니, 발길을 돌려 큰길 쪽으로 우회해 걸어갔다.

 

침묵.

 

골목 전체가 거대한 얼음장 같은 침묵 속에 갇혀버렸다.

 

물리적인 폭력보다 더 잔인한 사회적 고립의 장벽이, 붉은 페인트 한 통으로 김밥집 주위에 둘러쳐진 것이다.

 

3. 걸레를 든 손끝의 무게

 

"봤지……?"

 

하은이 피눈물을 흘리듯 마른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어제는 다 같이 도와주겠다고 하더니…… 저 사람들도 다 겁먹었어. 지유야, 너 진짜 이러다 고립돼. 아무도 이 가게에 발 안 들여놓을 거야. 소문 순식간에 퍼진다고. 삼거리 김밥집에 깡패들이 불 지른다고 낙서해 놨다고 소문나면, 대체 누가 여기서 김밥을 사 먹겠어?"

 

하은의 말은 뼈아픈 현실이었다.

 

음식을 파는 가게 외벽에 핏빛 협박과 저주가 칠해져 있는 한, 그 어떤 손님도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을 터였다.

 

손님이 끊기면 수입이 끊기고, 수입이 끊기면 남원의료원에 밀린 어머니의 병원비와 가게를 유지할 최소한의 자금마저 메말라버린다.

 

강태석과 토건 카르텔은 바로 그것을 노린 것이다.

 

법으로 쫓아내지 못한다면, 굶겨 죽이고 말려 죽이겠다는 말라비틀어진 악의.

 

"지유야, 일단 들어가자. 응? 문 닫아걸고 오늘은 장사 접자. 내가 민재 선배한테 연락해 볼게. 검사님한테도 알려야 해. 검사님이 아시면……."

 

"재환이는 지금 법정에 가야 해."

 

지유가 하은의 말을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끊었다.

 

하은이 흠칫하며 지유를 바라보았다.

 

지유의 두 눈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새벽안개보다 더 맑고, 팽나무 고목의 뿌리처럼 깊은 빛이 감돌고 있었다.

 

"어젯밤에 재환이가 살인범을 직접 잡았대. 온몸에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피를 흘리면서 갈대밭을 뛰어서 그놈을 잡았대. 왜 그랬겠어, 하은아?"

 

"지유야……."

 

"오늘 오전 열 시에 남원지원에서 강태석의 구속적부심이 열려. 그 사람들은 재환이를 흔들고 싶어 해. 재환이가 법정에서 흔들리게 하려고, 지청 앞에서는 직무 배제 팩스를 보내고, 내 가게 앞에는 이 붉은 페인트를 칠해 놓은 거야."

 

지유는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가게 구석에 놓여 있던 양철 양동이를 집어 들었다.

 

수도꼭지를 틀자 차가운 지하수가 콸콸 쏟아져 양동이를 채웠다.

 

지유는 낡은 면 걸레 세 자루와 철 수세미를 물속에 담갔다.

 

그리고 벽장 구석에서 어머니가 쓰시던 독한 석유통을 꺼내 들었다.

 

"지유야, 너 뭐 하려고……?"

 

"지워야지."

 

지유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저들이 칠해 놓은 오물이잖아. 내 가게고, 우리 어머니가 평생을 바쳐 밥을 짓던 곳이야. 저런 더러운 협박 몇 글자 때문에 문을 닫고 숨으면, 그게 저들이 바라는 대로 되는 거야."

 

"지유야, 저거 유성 페인트야! 물로는 안 지워져! 손 다 망가진다고!"

 

하은이 소리쳤지만, 지유는 이미 고무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으로 석유에 적신 걸레를 움켜쥐고 있었다.

 

지유는 붉은 페인트가 흉측하게 흘러내린 회벽 앞으로 다가섰다.

 

맨손으로 잡은 걸레를 벽에 대고 힘껏 문지르기 시작했다.

 

슥, 스윽-.

 

석유 냄새와 페인트 냄새가 뒤섞여 올라오며 눈이 따갑고 숨이 턱턱 막혀왔다.

 

굳어가던 붉은 페인트가 희미하게 번지며 지유의 손바닥과 손목을 붉게 물들였다.

 

마치 손에서 피가 철철 흘러넘치는 것만 같았다.

 

"안 나가면 불태워 죽인다"

 

는 글자 위로 지유의 작은 손이 사정없이 오갔다.

 

박스 테이프로 기워 놓은 유리창의 틈새마다 붉은 물이 스며들어 쉽게 닦이지 않았다.

 

철 수세미를 쥔 손가락 끝이 시멘트 거친 단면에 긁혀 생채기가 났다.

 

손톱 밑으로 붉은 페인트와 피가 뒤엉켜 파고들었다.

 

지독한 쓰라림이 신경을 타고 올라왔지만, 지유는 입술을 꽉 깨문 채 손을 멈추지 않았다.

 

한 번 문지를 때마다 어머니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지유야, 바람이 세게 불수록 풀잎은 땅바닥에 바짝 엎드려 뿌리를 지키는 법이란다. 부러지는 건 뻣뻣하게 선 마른 나뭇가지지, 살아서 숨 쉬는 풀잎이 아니야.'

 

어머니의 유언이 귓전을 때렸다.

 

가게를 지켜라.

 

너의 정직함을 지켜라.

 

지유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는 순간, 저 골목 어귀 어둠 속에서 자신을 비웃으며 지켜보고 있을 그 더러운 눈동자들에게 굴복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눈물 대신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려 턱 끝으로 떨어졌다.

 

"아이고, 이 미련한 계집애야……!"

 

하은이 결국 참지 못하고 주저앉아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하은은 울면서도 양동이에서 다른 걸레를 꺼내 들었다.

 

맨손으로 석유를 묻혀 지유의 옆에 나란히 붙어 서서 벽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나쁜 놈들…… 천벌 받을 놈들……! 우리 지유가 뭘 잘못했다고……! 우리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데……!"

 

하은의 통곡 소리가 텅 빈 골목길을 울렸다.

 

두 소녀의 손끝에서 붉은 페인트가 지워져 나갈 때마다, 골목의 아침 햇살이 조금씩 잿빛 안개를 걷어내며 붉은 벽을 비추기 시작했다.

 

4. 끊어진 발길과 따뜻한 국물

 

아침 일곱 시 반.

 

두 시간 동안의 사투 끝에, 벽면에 칠해졌던 굵은 글씨들은 간신히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문질러져 지워졌다.

 

완벽하게 지워진 것은 아니었다.

 

오래된 회벽의 숨구멍마다 붉은 얼룩이 깊숙이 스며들어, 마치 거대한 화상 자국처럼 흉터로 남아 있었다.

 

지유의 양손은 석유 독과 철 수세미의 마찰로 인해 벌겋게 붓고 군데군데 살갗이 벗겨져 있었다.

 

손톱 밑에 낀 붉은 색소는 아무리 씻어내도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유는 쉬지 않았다.

 

찬물에 손을 대충 헹군 뒤, 곧바로 주방으로 들어가 가스 불을 켰다.

 

다시마와 멸치를 듬뿍 넣은 육수 솥이 끓어오르며 구수한 냄새가 골목 밖으로 퍼져 나갔다.

 

어제 공설 방앗간에서 빻아온 햅쌀로 밥을 짓고, 지단과 당근, 우엉을 볶아 정갈하게 김밥 재료를 준비했다.

 

평소라면 이 시간, 삼거리 김밥집 앞은 장사진을 이루어야 마땅했다.

 

아침 일찍 통근버스를 타려는 남원 방직공장 여공들과, 군청과 시청으로 출근하는 하위직 공무원들, 그리고 등교하는 남원여고 학생들이 줄을 서서 지유가 말아주는 따뜻한 김밥을 받아 가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시계추가 여덟 시를 지나 여덟 시 반을 가리킬 때까지, 김밥집의 미닫이문은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가게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가게 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았다.

 

유리창 너머로 비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곤혹스러움과 두려움이 묻어 있었다.

 

가게 앞 벽면에 지워지다 만 흉측한 붉은 얼룩, 그리고 문 앞에 흩뿌려졌던 석유 냄새를 맡은 사람들은 흠칫 놀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야, 저 집 진짜 깡패들이 손댄 거 맞네."

 

"시청에서 밉보여서 그렇다며? 저기 드나들다간 우리까지 사진 찍혀서 불이익당해."

 

"불 지른다는 소문도 돌던데, 재수 없게 엮이지 말고 저 앞 분식집 가자."

 

유리창 너머로 수군거리는 소리가 환청처럼 지유의 귓가를 찔렀다.

 

조리대 위에 곱게 썰어 놓은 김밥 세 줄이 식어가고 있었다.

 

지유는 묵묵히 칼을 들어 단무지를 썰었다.

 

탁, 탁, 탁, 탁-.

 

일정한 리듬으로 도마를 울리는 칼소리만이 고요한 가게 안을 채웠다.

 

하은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참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지유야…… 김밥 그만 썰어. 재료 아까워. 오늘 손님 안 와……."

 

"아니야, 하은아."

 

지유는 칼질을 멈추지 않았다.

 

"손님이 한 명이 오든, 열 명이 오든, 문을 열었으면 밥은 준비되어 있어야 해. 그게 우리 집 약속이야."

 

지유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쥐고 있는 칼자루 위로 붉게 부르튼 손가락 마디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외로움.

 

세상 전체가 거대한 벽이 되어 자신을 밀어내고 있는 것 같은 지독한 고립감이 밀려왔다.

 

성재환은 지금 남원지원 법정에서 강태석의 변호인단과 목숨을 건 법리 공방을 벌이고 있을 터였다.

 

그는 법정에서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고, 자신은 이 텅 빈 가게 안에서 홀로 이 차가운 시선들을 견뎌내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전쟁터에서, 서로의 등을 지키며 서 있는 것이다.

 

지유는 앞치마 안주머니에 든 작은 물건을 가만히 쥐었다.

 

성재환의 학생증 증명사진.

 

뒷면에 지유가 선물했던 흑청색 잉크로 정갈하게 적혀 있던 글귀.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그 서늘하고도 따뜻한 잉크의 필맥이 손끝을 통해 지유의 심장으로 전해져 왔다.

 

'재환아, 나는 흔들리지 않아. 네가 법을 세울 때까지, 나는 이 자리를 지킬 거야.'

 

5. 뜻밖의 손님과 연대의 불씨

 

오전 아홉 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이었다.

 

달그락-.

 

가게 처마 끝에 매달려 있던 낡은 놋쇠 풍경이 청아한 쇳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지유와 하은의 시선이 동시에 출입문으로 향했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미닫이문이 열렸다.

 

골목의 따가운 햇살을 등지고 가게 안으로 들어선 이는 뜻밖의 인물이었다.

 

남원우체국 집배원 유니폼을 입은 중년의 사내, 박 씨 아저씨였다.

 

박 씨는 어젯밤 야간 배달을 마치고 퇴근길에 김밥을 자주 사 가던 단골손님이었다.

 

아침에 골목을 지나치며 눈길을 피했던 그 박 씨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가게 안으로 성큼 들어선 것이었다.

 

"지, 지유야."

 

박 씨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

 

하은이 벌떡 일어나며 반색을 했다.

 

"아저씨!"

 

박 씨는 가게 문을 얼른 닫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에는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뒤섞여 있었다.

 

박 씨는 지유의 벌겋게 부르트고 상처투성이가 된 손과, 가게 외벽의 붉은 얼룩을 번갈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에구, 몹쓸 것들…… 진짜 천벌을 받을 종자들이야. 어떻게 어린것한테 이런 짓을 해……."

 

"아저씨, 아침 식사 아직 안 하셨어요?"

 

지유가 언제나처럼 맑은 미소를 지으며 따뜻한 보리차 한 잔을 건넸다.

 

손끝의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찻잔을 쥔 지유의 손은 흔들리지 않았다.

 

박 씨는 차를 받아 들지 못하고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지폐 세 장을 꺼내 조리대 위에 올려놓았다.

 

"지유야, 김밥 다섯 줄만 싸 다오. 포장으로."

 

"다섯 줄이나요? 혼자 드시기엔 많은데요."

 

"우리 우체국 당직실 녀석들 줄 거다. 녀석들이…… 밖에서 소문 듣고 무섭다고 안 오려고 하길래, 내가 네 가게 김밥 아니면 아침 안 먹는다고 호통을 치고 나왔어."

 

박 씨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지유야, 아침에 내가 그냥 지나쳐서 서운했지? 미안하다. 솔직히…… 그 붉은 글씨를 보니까 가슴이 덜컥 내려앉더라고. 나도 처자식 딸린 놈이라 순간 겁이 났어. 그런데 우체국 분사실에 앉아 있는데, 자꾸 네 손수건이랑 네 어머니 얼굴이 눈에 밟히는 거야. 저 어린것이 밤새 저걸 지우느라 손이 다 닳았을 텐데, 우리가 모른 척하면 남원에 사람 사는 도리가 어디 있나 싶더구나."

 

지유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무리 닦아내도 흘리지 않으려 억누르고 또 억눌렀던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아저씨……."

 

"기죽지 마라, 지유야. 어제 그 젊은 검사님이 그 흉악한 굴착기 앞을 법으로 막아서는 걸 온 남원 사람들이 다 봤다. 세상이 아무리 썩었어도, 옳은 건 옳은 거고 그른 건 그른 거야. 네가 정직하게 만 김밥에는 아무런 죄가 없어."

 

지유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떨리는 손으로 김발을 펴고 밥을 얹었다.

 

그 어느 때보다 정성스럽게, 꾹꾹 눌러 담아 김밥을 말아 올렸다.

 

참기름을 바르고 참깨를 솔솔 뿌려 은박지에 정갈하게 싼 김밥 다섯 줄을 건네는 지유의 손등 위로 굵은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정말 감사합니다."

 

"고맙기는 뭐가 고마워. 내가 점심때 또 올 테니까 국물 따뜻하게 데워 놔라."

 

박 씨는 김밥 봉지를 품에 소중히 안고 문을 나섰다.

 

그가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골목 저편에서 또 다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동문성당의 수녀 두 분이 조용히 골목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수녀님들은 붉은 페인트 자국이 남은 벽면을 잠시 바라보더니, 성호를 긋고는 주저 없이 김밥집 문을 열고 들어섰다.

 

"자매님, 아침 김밥 두 줄만 부탁드려요."

 

그 목소리는 얼어붙었던 골목의 침묵을 녹이는 따뜻한 봄바람과도 같았다.

 

하은이 눈물을 훔치며 환하게 웃음을 터뜨렸고, 지유는 다시 도마 앞에 섰다.

 

탁, 탁, 탁, 탁-.

 

칼소리가 다시금 힘차게 울려 퍼졌다.

 

저들이 칠해 놓은 붉은 페인트는 공포의 표식이었지만, 그 공포의 벽 너머에서 사람들의 숨은 양심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다.

 

6. 결전의 법정, 법복의 무게

 

같은 시각, 오전 아홉 시 사십오 분.

 

남원 시내 외곽에 위치한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 제1호 법정 복도.

 

육중한 참나무 문 앞에는 삼엄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남원경찰서에서 차출된 무장 경찰들과 법원 경위들이 복도 양편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지역 유지들과 관변 단체 간부들, 그리고 어용 상인회 사람들이 초조한 표정으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시장님이 오늘 풀려나신다지?"

 

"그렇다더군. 서울에서 거물 변호사가 내려왔고, 여당 쪽에서도 손을 썼다니까. 그 새파란 성 검사 놈이 아무리 날뛰어 봤자 법원이 누구 손을 들어주겠어?"

 

"황선태 국장도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됐다면서? 비자금 장부도 사라졌다는데, 검찰이 무슨 수로 혐의를 입증해?"

 

비열한 기대와 조소가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때, 복도 끝 계단에서 구두 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또각, 또각, 또각-.

 

일정한 보폭,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서늘하고 단호한 발걸음 소리였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계단 쪽으로 쏠렸다.

 

성재환이었다.

 

검은색 정장 위에 짙은 감청색 검사 법복을 단정하게 걸친 성재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곁에는 두꺼운 증거 서류 상자를 든 강태훈 수사관과, 눈빛이 살아난 김 경위, 박 경사가 호위하듯 양옆을 지키고 있었다.

 

재환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밤샘 수사와 격투의 피로는 온데간데없었다.

 

오직 날카롭게 벼려진 비수 같은 눈빛만이 안경 너머에서 서슬 퍼런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낡은 가죽 서류철 하나가 들려 있었다.

 

백부에게 물려받은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이 가슴 포켓에 단단히 꽂혀 있었다.

 

'Fiat justitia, ruat caelum.'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그 라틴어 법언이 각인된 만년필 속에는, 지유가 선물했던 마지막 흑청색 잉크가 가득 차 있었다.

 

복도에 서 있던 토건 세력들이 재환의 압도적인 기세에 눌려 슬금슬금 길을 비켜섰다.

 

재환은 그들의 비열한 시선을 단 한 번도 마주하지 않은 채, 정면을 응시하며 법정 문을 향해 걸어갔다.

 

법정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최민재가 재환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속삭였다.

 

"재환아, 방금 들어온 소식이야. 새벽에 지유 김밥집에 붉은 페인트 테러가 있었어."

 

재환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재환의 턱관절이 서서히 굳어졌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에 일순간 걷잡을 수 없는 분노의 불꽃이 일렁였다.

 

"지유는…… 다친 데는 없나?"

 

"다치진 않았어. 벽에 '불태워 죽인다'고 낙서를 해 놨는데…… 하은이가 울고불고 난리가 났는데도, 지유가 손톱이 다 벗겨지도록 맨손으로 그 페인트를 지워내고 아침 장사를 시작했대."

 

민재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지유가 그러더라. 자기는 여기서 김밥을 말 테니, 너는 법정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말라고."

 

재환은 눈을 감았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치밀어 올랐다.

 

붉은 페인트로 범벅이 된 벽을 맨손으로 문지르고 있을 지유의 작은 손.

 

피가 배어 나오는 손끝으로 칼을 쥐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을 그녀의 처절한 결기.

 

그것은 나약한 피해자의 눈물이 아니었다.

 

자신을 향한 가장 강력한 명령이자, 이 거악을 단 한 조각도 남기지 말고 도려내라는 불멸의 신뢰였다.

 

재환은 가슴 포켓의 만년필을 꾹 눌렀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가락을 통해 심장으로 스며들었다.

 

재환이 눈을 떴을 때, 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일말의 감정적 동요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거악을 향해 내리꽂힐 서슬 퍼런 사법의 칼날만이 서늘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들어가자."

 

재환이 낮게 읊조렸다.

 

오전 열 시 정각.

 

성재환 검사는 거대한 참나무 법정 문을 거침없이 밀어젖히며, 결전의 심판대 위로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