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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62화

취조실의 심리전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지하 기계실의 포위망

 

남원상록골프장 클럽하우스 뒤편의 어둠은 묵직하고 축축했다.

 

자정을 갓 넘긴 시각, 지리산 줄기를 타고 내려온 찬 바람이 골프장 잔디를 스치며 음산한 파도 소리를 흉내 내고 있었다.

 

성재환은 검은 코트 깃을 세운 채, 클럽하우스 지하 기계실로 통하는 철제 비상계단 상단에 멈춰 섰다.

 

그의 바로 뒤편에는 방탄조끼를 착용한 강태훈 수사관과 대검 특수부 수사관 여섯 명이 소음 없이 대형을 갖추고 있었다.

 

최민재가 김밥집에서 건네주었던 도청 녹취 테이프의 내용이 재환의 귓전을 맴돌았다.

 

'오늘 밤 열두 시 반, 활어차 한 대가 기계실 하역장으로 들어간다. 짐짝(황선태)을 싣는 즉시 폐차장 소각로로 돌려라.'

 

강태석의 처남이자 동서개발 대표인 조상태의 목소리는 한 치의 온기도 없는 처형 명령 그 자체였다.

 

황선태는 자신이 부산 밀항선으로 향하는 활어차를 기다린다고 믿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 차는 밀항선이 아니라, 1,000도가 넘는 폐차장 용광로로 향하는 관짝에 불과했다.

 

"성 검사님, 하역장 진입로 쪽으로 1톤 냉동 활어차 한 대가 라이트를 끄고 접근 중입니다."

 

무전기를 쥔 강태훈이 나직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재환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자정 22분.

 

살인 청부업자들이 도착하기까지 정확히 8분이 남아 있었다.

 

"진입한다."

 

재환의 서늘한 단언과 함께 특수부 요원들이 철제 계단을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기계실 육중한 철문은 덜 잠긴 채 틈새로 기름 냄새와 컴프레서의 육중한 기계음만을 토해내고 있었다.

 

문이 소리 없이 밀려 열리자, 컴컴한 배관실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던 그림자가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누, 누구야! 조 대표요? 지금 온 거요?"

 

보일러 탱크 뒤편에서 기어 나온 사내는 남원시청 건설교통국장 황선태였다.

 

사흘 밤낮을 도망치며 씻지도 못한 듯 몰골은 처참했고, 와이셔츠 깃은 땀과 먼지로 누렇게 절어 있었다.

 

그의 양손에는 낡은 가죽 서류 가방 세 개가 마치 젖먹이 자식이라도 되는 양 핏줄이 서도록 쥐어져 있었다.

 

손전등의 강렬한 백색 광선이 황선태의 얼굴을 직격했다.

 

"황선태 국장."

 

어둠을 가르고 울려 퍼진 목소리는 조상태의 비열한 어조가 아니었다.

 

차가운 면도날처럼 폐부를 찌르는 단호하고 명료한 음성.

 

눈이 부셔 손으로 이마를 가리던 황선태의 동공이 경악으로 찢어졌다.

 

"성…… 성재환 검사?"

 

"피의자 신분 정식 소환장을 톨게이트에서 송달받고도 은신했더군요.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업무상횡령,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피의자로 긴급 체포합니다."

 

"이, 이럴 순 없어! 난 조 대표 차를 타야 해! 날 놔줘! 나 여기서 나가야 한단 말이오!"

 

황선태가 가방 세 개를 끌어안은 채 발악하듯 소리치며 벽 쪽으로 물러섰다.

 

그때 굳게 닫힌 기계실 환풍구 너머로 육중한 디젤 트럭의 엔진음이 낮게 깔리기 시작했다.

 

황선태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헛된 희망이 번졌다.

 

"왔다…… 조 대표가 보낸 차야! 나 밀항시켜 주기로 했다고! 비켜, 비키란 말이야!"

 

재환은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주머니에서 소형 녹음기를 꺼내 재생 버튼을 눌렀다.

 

지직거리는 노이즈 끝에 흘러나온 것은 조금 전 황선태가 그토록 애타게 부르던 조상태의 육성이었다.

 

―'형님(강태석) 지시요. 황 국장 놈 트렁크에 실어서 그대로 외곽 폐차장 소각로에 처넣어. 뼛가루도 안 남게 태워버려야 장부고 뭐고 검찰 놈들이 손을 못 대지. 활어차 물탱크 산소 잠그면 십 분도 안 돼서 질식하니까 소리도 못 질러.'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냉혹한 살해 계획에 기계실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황선태의 턱이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피가 완전히 빠져나간 그의 얼굴은 시체보다 창백했다.

 

"이…… 이게……."

 

"당신이 타려던 활어차는 부산으로 가는 배가 아닙니다. 십 분 뒤 당신을 질식시켜 태워 죽일 이동식 관짝이지."

 

재환이 한 걸음 다가서며 손을 내밀었다.

 

"강태석은 이미 당신을 산 채로 불태우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신이 쥔 그 세 개의 가방과 함께 말입니다."

 

황선태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쿵, 쿵, 쿵.

 

남원시의 모든 검은돈 흐름이 담긴 가죽 가방 세 개가 축축한 시멘트 바닥으로 떨어졌다.

 

황선태는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짐승처럼 꺽꺽거리며 오열했다.

 

"데려가라."

 

재환의 명령에 수사관들이 신속하게 황선태를 결박해 끌어올렸다.

 

하역장으로 진입하려던 활어차는 골프장 입구에 매복해 있던 대검 수사 차량 두 대에 의해 퇴로가 차단되며 운전기사와 조폭들이 현장에서 일망타진되었다.

 

재환은 바닥에 놓인 가방 세 개를 직접 집어 들었다.

 

가죽 표면에 닿는 서늘한 촉감 속에서, 7년을 기다려온 사법 단죄의 거대한 칼날이 비로소 완성되었음을 직감했다.

 

2. 204호 검사실의 대치

 

새벽 2시 10분, 전주지방검찰청 남원지청 204호 검사실.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지청 복도와 달리, 204호 취조실 안은 천장의 형광등 두 개가 날카로운 백색 빛을 뿜어내며 공기를 달구고 있었다.

 

취조실 철제 탁자 위에는 방금 남원상록골프장에서 압수해 온 가죽 서류 가방 세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맞은편에 앉은 황선태는 수갑을 찬 두 손을 무릎 위에 얹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외투는 벗겨졌고, 땀에 젖었던 셔츠가 마르면서 오한이 드는지 그의 어깨는 쉴 새 없이 경련했다.

 

성재환은 탁자 상석에 앉아 양손을 깍지 낀 채 황선태를 응시했다.

 

재환의 양복 상의 안주머니에는 지유가 건네주었던 흑청색 잉크가 채워진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이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정적을 깬 것은 서류 가방의 지퍼가 열리는 날카로운 쇳소리였다.

 

치익.

 

재환은 첫 번째 가방에서 두툼한 서류철 서너 권을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요천 수변공원 조성사업 하도급 내역서', '춘향 테마랜드 전통 한옥 지구 시공 감리 일지', 그리고 '남원 제1건설 자재 수불 원장'.

 

"황선태 국장."

 

재환의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목소리가 취조실 벽을 쳤다.

 

"골프장 기계실에서 들었던 도청 녹음은 환청이 아닙니다. 조상태는 지금 긴급 체포되어 지청 1층 유치장에 입감되었습니다. 놈의 품에서 당신을 태워 죽이라는 강태석 시장의 옥중 쪽지가 그대로 나왔지요."

 

황선태의 어깨가 다시 한번 거칠게 들썩였다.

 

하지만 그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들지 않았다.

 

30년간 남원 시정의 음지를 주무르며 잔뼈가 굵은 관료였다.

 

공포의 파도가 한차례 지나가자, 남은 것은 본능적인 보신과 침묵의 벽이었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황선태가 마침내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방 속 서류는 시청 정기 감사 대비용으로 집에 가져가 검토하려던 실무 서류들일 뿐입니다. 뇌물이라니요? 횡령이라니요? 전 결재 라인에 올라온 서류에 공무원으로서 도장만 찍었을 뿐입니다."

 

"도장만 찍었다?"

 

재환의 입가에 서늘한 냉소가 스쳤다.

 

"공무원이 관내 공사 서류를 새벽에 골프장 지하 기계실로 빼돌려 은신합니까? 조상태가 보낸 밀항 활어차를 타려던 것은 공무 집행의 일환이었습니까?"

 

"그, 그건…… 겁이 나서 그랬습니다! 성 검사님이 시청 간부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인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고, 조 대표가 일단 서울로 피신해 있으라고 해서……."

 

황선태는 뻔뻔하게 말을 지어내기 시작했다.

 

발뺌과 꼬리 자르기.

 

지방 토착 카르텔 관료들이 사법 당국의 칼날 앞에서 늘 써먹던 전형적인 방어 기제였다.

 

'시장님이 시켜서 한 일이다'라는 말을 뱉는 순간, 자신 역시 특가법상 뇌물 공범으로 최소 징역 10년 이상을 선고받을 수 있다는 계산이 선 것이다.

 

게다가 강태석의 배후에는 중앙 정계의 거물 김문현 의원이 버티고 있었다.

 

어떻게든 며칠만 버티면 서울에서 직무 배제 명령이 내려와 성재환을 쫓아내 줄 것이라는 실낱같은 기대를 품고 있는 눈빛이었다.

 

재환은 그의 비겁한 계산속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꿰뚫고 있었다.

 

탁.

 

재환이 두 번째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수십 개의 통장과 남원상호신용금고 명의의 당좌수표 사본철이었다.

 

"남원상호신용금고 차명 계좌 12개. 그중 6개가 당신의 처남, 사촌 동생, 그리고 팔순이 넘은 당신 장모의 명의더군요."

 

재환이 통장 사본을 황선태의 코앞으로 밀어 넣었다.

 

"요천 제방 공사비 180억 중 부실 자재를 사용하고 허위 세금계산서를 발행해 빼돌린 40억 원. 그중 20억 원이 이 6개 계좌로 분산 예치된 뒤, 정확히 990만 원씩 쪼개져 당신의 도장이 찍힌 출금 전표를 통해 현금화되었습니다. 금융실명제 위반을 피하기 위한 전형적인 쪼개기 수법이지요."

 

황선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그건 제 개인 친척들의 금융 거래일 뿐……."

 

"그 쪼개진 현금 20억 중 5억은 전주지검 고진태 차장검사에게, 3억은 우리 조동식 지청장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리고 10억은 국회 내무위원장 김문현 의원실의 무기명 양도성예금증서(CD)로 세탁되었지요."

 

재환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구체적인 숫자는 황선태의 숨통을 죄는 올가미였다.

 

"황 국장, 당신은 지금 이 돈을 당신이 단독으로 착복했다고 주장하고 싶은 겁니까? 그렇다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국고손실 및 횡령액이 40억 원입니다. 법정형은 무기징역 또는 10년 이상의 유기징역이지요. 당신 혼자 다 뒤집어쓰고 교도소에서 환갑, 칠순을 맞이하겠다는 뜻입니까?"

 

취조실 안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황선태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려 눈꺼풀을 적셨다.

 

3. 벼랑 끝의 증거들

 

황선태는 여전히 입술을 달싹거리며 버티려 애썼다.

 

"성 검사님…… 증거가 있습니까? 제가 돈을 건넸다는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전 배달 사고가 났는지 뭔지 모릅니다! 남원 제1건설 배동진이가 다 알아서 한 짓입니다!"

 

"배동진?"

 

재환이 기다렸다는 듯 세 번째 가방을 열었다.

 

그곳에는 황선태가 미처 불태우지 못하고 챙겨온 가장 은밀한 비밀들이 들어 있었다.

 

재환은 가방 안쪽 비밀 포켓에서 손바닥만 한 녹음테이프 두 개와, 두툼한 유선전화 요금 청구 내역서를 꺼냈다.

 

그리고 며칠 전 대검 감청반이 입수한 황선태의 관용차 카폰 및 국장실 직통 유선전화 도청 기록을 탁자 위에 펼쳤다.

 

"어제 오후 4시 12분, 남원 나들목으로 도주하기 직전 당신이 전주교도소 보안과 3번 라인으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더군요."

 

재환이 도청 녹취록의 한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황선태: 시장님, 검찰 놈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제1건설 장부는 다 탔지만 제 손에 2차 장부가 있습니다. 이거 가지고 일단 튀겠습니다.'

 

'강태석: 야 이 개새끼야, 튀긴 어딜 튀어! 그 장부 들고 나들목 빠져나가는 순간 네 마누라랑 새끼들 모가지부터 딸 줄 알아. 상록골프장 기계실로 기어들어가 처박혀 있어. 조 대표가 사람 보낼 테니까.'

 

재환이 녹취록을 읽어 내려가자, 황선태는 공포에 질려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우욱, 욱.

 

그는 자신의 목을 쥐어뜯으며 경악에 찬 눈으로 재환을 올려다보았다.

 

"이, 이것까지…… 도청을……."

 

"법원에서 정식으로 발부받은 통신제한조치 허가서에 따른 합법적 감청입니다."

 

재환이 차갑게 말을 잘랐다.

 

"황 국장, 강태석은 당신을 동업자로 본 적이 없습니다. 언제든 도마 위에 올려 자를 수 있는 미끼, 자기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죽어줄 충견으로 여겼을 뿐이지요. 당신이 살아서 법정에 서는 것을 그자가 용납할 것 같습니까? 교도소에 수감된 뒤에도 과연 당신이 무사할 것 같습니까? 밥에 독이 들지, 운동 시간에 칫솔대로 목이 찔릴지, 하루하루 숨 쉬는 것조차 지옥이 될 겁니다."

 

황선태의 전신이 경련하듯 떨렸다.

 

재환의 말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강태석이 어떤 인간인지, 지난 30년간 그의 손에 피를 묻히고 사라져간 수많은 남원의 토착 인사들이 어떤 비참한 최후를 맞았는지 황선태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검사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전…… 전 시키는 대로만 했습니다. 시장님이 시키는 대로……."

 

황선태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재환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수사의 칼날은 감정에 휘둘릴 때 무뎌지는 법이었다.

 

재환은 탁자 서랍에서 서류 한 장을 더 꺼냈다.

 

그것은 황선태의 막내딸이 재학 중인 서울 모 사립대의 등록금 납부 영수증과, 강남에 위치한 아파트 전세 계약서 사본이었다.

 

"당신 딸이 이번 가을에 피아노 독주회를 연다지요?"

 

재환의 서늘한 질문에 황선태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 굳어졌다.

 

"당신이 입을 닫고 40억 국고손실의 주범이 되는 순간, 이 아파트와 예금, 당신 가족들의 모든 재산은 범죄수익은닉규제법에 따라 전액 몰수 추징됩니다. 당신 딸은 범죄자의 자식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길바닥으로 쫓겨나겠지요. 강태석을 지키기 위해 당신 가족의 인생 전부를 시궁창에 처넣을 생각입니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검사님! 제발…… 제 딸아이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제 처자식만은……!"

 

황선태가 수갑을 찬 채로 탁자 위로 엎어지며 절규했다.

 

탁자의 유리가 그의 이마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선택하십시오."

 

재환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큰 키가 드리운 짙은 그림자가 황선태의 굽은 등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강태석의 하수인으로 남아 가족과 함께 파멸할 것인지, 아니면 공소권 매수와 비리를 고발한 내부 협조자로서 법의 관용을 받을 것인지. 법은 진실을 털어놓는 자에게만 방패가 되어줍니다."

 

4. 흔들리는 건설국장

 

취조실의 공기는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팽팽했다.

 

황선태는 바닥에 이마를 박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수천 가지 계산과 공포가 어지럽게 교차하고 있었다.

 

30년간 다져진 남원의 토착 권력망, 강태석의 서슬 퍼런 칼날, 그리고 중앙 정계의 김문현.

 

그 거대한 산맥에 맞서 싸운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짓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선 성재환 검사는 단순한 젊은 검사가 아니었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 숨겨둔 비자금 가방의 위치, 교도소 통화 내용, 심지어 가족의 약점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꿰뚫고 있는 거대한 사법의 저승사자였다.

 

더구나 강태석은 이미 자신을 죽이려 했다.

 

자신이 지키려 했던 그 권력은 이미 자신을 폐차장 소각로의 땔감으로 내던진 뒤였다.

 

"……제가, 제가 자백하면……."

 

황선태가 마침내 피눈물이 밴 얼굴을 들어 재환을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갈가리 찢겨 나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흐느적거렸다.

 

"제 가족들의 신변을 보장해 주실 수 있습니까? 강태석의 깡패 놈들이 제 집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그자들은 진짜로 사람을 죽이는 놈들입니다!"

 

"검찰의 증인보호프로그램을 즉시 가동하겠습니다."

 

재환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서울 대검찰청 직속 수사관들이 당신 가족들의 사저를 밀착 경호할 것이며, 재판이 끝날 때까지 안전가옥을 제공할 겁니다. 당신의 진술이 사실로 입증되고 강태석의 직권남용과 횡령 교사가 명백해진다면, 특정범죄신고자 보호법에 따라 기소유예 혹은 대폭적인 형량 감경을 법원에 정식 요청하겠습니다."

 

황선태의 목울대가 크게 꿀꺽 넘어갔다.

 

재환은 품에서 검은 옻칠 만년필을 꺼내 백지 조서 첫 장을 펼쳤다.

 

사각.

 

금빛 닙이 조명 아래서 차갑게 번쩍였다.

 

'成宰桓', 그리고 'Fiat justitia, ruat caelum'.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만년필 캡에 새겨진 라틴어 문구가 백색 형광등 빛을 받아 형형한 안광을 뿜어내는 듯했다.

 

만년필 촉 끝에서 흘러나온 지유의 흑청색 잉크가 백지 위에 푸르스름한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피의자 신문 조서.

 

피의자: 황선태.

 

죄명: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국고손실), 업무상횡령,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황선태 국장, 묻겠습니다. 요천 제방 공사에서 철근 배근 규격을 3분의 1로 축소하고 저질 순환 골재를 사용하라고 지시한 자가 누구입니까?"

 

재환의 만년필 끝이 백지 위를 겨누었다.

 

황선태는 마른침을 삼키며 파들거리는 손술을 모았다.

 

"……강태석 시장입니다."

 

마침내 굳게 닫혀 있던 첫 번째 수문이 열렸다.

 

"공사비를 아껴야 춘향 테마랜드 부지 매입 자금과 중앙 정계 상납금을 맞출 수 있다고…… 강 시장이 직접 구두로 지시했습니다. 군청 시절부터 쓰던 방식이라고…… 제방은 흙만 덮어놓으면 십 년은 아무도 모른다면서……."

 

"그 자금으로 조성된 40억 원의 비자금은 어디로 흘러갔습니까? 임종식 전무의 금고와 김문현 의원실로 전달된 내역을 본인이 직접 확인했습니까?"

 

재환의 만년필이 맹렬한 속도로 백지 위를 달렸다.

 

사각, 사각, 사각.

 

흑청색 글씨들이 황선태의 자백을 한 글자 한 글자 사법의 올가미로 엮어내고 있었다.

 

황선태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음을 깨달았다.

 

한번 터져 나온 진실은 둑이 무너지듯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내렸다.

 

"예…… 임종식 전무를 통해 현금으로 인출된 돈 중 10억은 김문현 의원의 보좌관에게 남원 요천각 난초실에서 직접 전달되었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 동석해 가방을 날랐습니다. 그리고……."

 

황선태가 숨을 헐떡이며 말을 멈추었다.

 

그의 눈동자에 마지막 망설임과 극도의 공포가 뒤섞여 일렁였다.

 

무언가, 지금까지 털어놓은 비자금 장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치명적인 핵폭탄을 가슴에 품고 있는 자의 눈빛이었다.

 

5. 숨겨진 수첩의 그림자

 

재환은 만년필을 멈추지 않은 채 황선태를 서늘하게 쏘아보았다.

 

"그리고, 무엇입니까?"

 

취조실 안의 모든 공기가 두 사람의 시선 사이에 응축되었다.

 

형광등의 미세한 떨림 소리만이 찌르르하게 울렸다.

 

황선태는 떨리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손바닥 사이로 새어 나오는 그의 숨소리가 유난히 거칠었다.

 

"……구두 지시만으로는, 법정에서 강태석을 완벽하게 엮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황선태가 마침내 목구멍 깊은 곳에서 은밀한 고백을 끄집어냈다.

 

"강태석은 조폭 출신입니다. 관공서 공문에 절대로 자기 친필 결재를 남기지 않는 치밀한 놈입니다. 모든 불법 지시는 구두로 내리고, 서류에는 항상 국장인 제 도장과 과장들 전결로만 처리하게 했습니다. 나중에 사단이 나면 우리 같은 공무원들에게 덮어씌우려는 속셈이었지요."

 

"그렇다면 강태석의 직접 교사를 입증할 물증이 없다는 뜻입니까?"

 

재환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만약 강태석이 법정에서 '나는 모르는 일이며, 황선태 국장이 개인 비리로 공사비를 횡령한 것'이라고 발뺌하고 시청 부하 직원들을 매수한다면, 재판은 지루한 진실 공방으로 흘러갈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황선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입가에 자조적인, 그러나 비릿한 생존의 미소가 번졌다.

 

"아닙니다…… 저도 바보는 아닙니다. 공무원 생활 삼십 년에 강태석 밑에서 칠 년을 썩었습니다. 그 인간이 언젠가 날 사냥개처럼 삶아 먹을 거라는 걸 모르고 있었겠습니까?"

 

황선태가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의 목소리가 모기 소리처럼 작아졌지만, 그 무게는 남원 전체를 뒤흔들 만큼 묵직했다.

 

"수첩이 있습니다."

 

재환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수첩?"

 

"강태석이 시장에 당선된 민선 1기 첫날부터, 지난달 요천 제방이 무너지기 직전까지…… 강태석이 제게 직접 내린 모든 불법 지시를 날짜, 시간, 장소별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받아 적은 비밀 업무 수첩입니다."

 

황선태의 눈에 섬뜩한 안도가 번져나갔다.

 

자신의 목숨을 지켜줄 마지막 패를 드디어 꺼내놓았다는 안도감이었다.

 

"그 수첩에…… 요천 제방 철근을 빼돌리라고 지시한 날짜와 강태석의 친필 메모, 김문현 의원에게 10억을 전달하라고 명령한 통화 일시, 그리고 삼거리 김밥집을 표적으로 삼아 위생과와 소방과를 동원해 박살 내라고 지시한 구체적인 지령까지 모조리 적혀 있습니다."

 

재환의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삼거리 김밥집.

 

지유를 사지로 몰아넣고, 지유 어머니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그 모든 악마 같은 행정 폭압의 지휘관이 강태석이었음을 명명백백하게 입증할 최후의 스모킹 건.

 

"그 수첩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재환의 음성이 낮게 가라앉았다.

 

가죽 가방 세 개 안에는 그런 수첩이 없었다.

 

황선태는 바보가 아니었다.

 

모든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아 도망칠 만큼 어리숙한 관료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가방 안에는 없습니다. 빼앗길까 봐…… 가장 안전한 곳에 따로 숨겨두었습니다."

 

황선태가 침을 꼴깍 삼키며 재환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약속해 주십시오, 성 검사님. 제 구속영장 청구를 보류하고, 제 가족들을 서울 안가로 옮겼다는 확인 전화를 받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그 수첩이 있는 위치를 불겠습니다. 그 수첩만 손에 넣으면 강태석은 물론이고 서울의 김문현까지 빼도 박도 못하게 단두대에 올릴 수 있습니다."

 

황선태가 마지막 거래를 제안하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기 직전, 생존을 위한 마지막 밧줄을 쥔 피의자의 처절한 배수진이었다.

 

재환은 옻칠 만년필을 조서 위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시계는 새벽 3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청 밖에서는 여전히 어둠이 남원을 집어삼키고 있었고, 그 어둠 너머 어딘가에서 강태석의 잔당들이 황선태의 입을 막기 위해 혈안이 되어 움직이고 있을 터였다.

 

재환은 인터폰을 들었다.

 

"강태훈 수사관, 서울 대검 상황실 연결해. 황선태 국장 가족들에 대한 긴급 신변보호 및 안가 호송 작전 개시하라고 전해."

 

인터폰을 내려놓은 재환이 황선태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가족들의 안전이 확인되는 즉시, 당신은 그 수첩의 위치를 내게 넘기게 될 겁니다. 십 분 뒤, 조서를 완성하지."

 

황선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 순간, 204호 검사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강태훈 수사관이 사색이 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성 검사님! 큰일 났습니다!"

 

재환의 미간이 날카롭게 좁혀졌다.

 

"무슨 일입니까?"

 

강태훈이 취조실 안의 황선태를 흘긋 보더니, 재환의 귓가에 다급하게 속삭였다.

 

"서울에서…… 법무부 기획조정실 직통 팩스가 내려왔습니다. 국회 내무위원장 김문현 명의의 긴급 감사 요구서와 함께, 성 검사님에 대한 '대검 감찰본부 대기발령 및 남원지청 직무 배제 명령서'가 정식 결재되어 송부되었습니다!"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김문현의 외압이 마침내 법무부의 공식 행정 명령이라는 족쇄가 되어 성재환의 목덜미를 낚아챈 것이다.

 

탁자 위의 백지 조서, 그리고 황선태의 입에서 터져 나오기 직전인 강태석의 비밀 수첩.

 

사법의 정의가 완성되기 직전, 거악의 거대한 손길이 검사실의 문턱을 넘어 들이닥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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