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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61화

소환장 발부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찢어진 영장과 차가운 먹물

 

남원지청 2층 204호 특별수사전담 검사실의 공기는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창문 틈새로 스며드는 지리산의 새벽바람이 낡은 형광등을 미세하게 흔들었다.

 

책상 위에는 조금 전까지 성재환 검사의 손에 들려 있던 서류 한 장이 두 동강 난 채 버려져 있었다.

 

친부이자 내무부 차관인 성호석의 이름 석 자가 적혀 있던 압수수색 영장이었다.

 

찢겨 나간 백지 단면 위로 희미하게 푸른빛이 감돌았다.

 

성재환은 만년필을 쥔 손가락 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백부에게 물려받았던 묵직한 독일제 옻칠 만년필이었다.

 

금빛 닙 둘레에는 지유가 선물했던 흑청색 잉크의 마지막 흔적이 마르지 않은 채 검푸른 숨을 쉬고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캡 상단에 새겨진 라틴어 법언이 그의 시선을 사납게 찔렀다.

 

7년 전, 서울행 통일호 열차 안에서 친부를 가문의 죄인이자 단죄해야 할 거악이라 믿으며 이를 갈았던 밤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진실은 피를 토하듯 참혹했다.

 

아버지는 타협한 괴물이 아니었다.

 

어린 아들의 목숨을 덤프트럭 바퀴 아래 깔아뭉개겠다는 국회 내무위원 김문현의 비열한 협박 앞에서, 스스로 온몸에 오물을 뒤집어쓰고 유폐를 택했던 초라한 아버지였을 뿐이었다.

 

"재환아."

 

조용히 곁을 지키고 있던 한지유의 목소리가 얼어붙은 침묵을 깼다.

 

지유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책상 모서리에 놓인 낡은 양철 궤짝의 뚜껑을 어루만졌다.

 

그 안에는 어머니가 평생을 품고 살았던 1970년대 토지 원천 측량 대장과, 1989년 성호석 시장이 목숨을 걸고 작성했던 친필 내사 보고서 원본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지유의 손가락마디에는 여전히 굳은살과 덴 자국, 붉은 페인트의 희미한 흔적이 배어 있었다.

 

지유가 맑고 깊은 눈동자로 재환을 올려다보았다.

 

"네 아버지는 널 살리기 위해 침묵하셨어. 그건 죄가 아니라 피눈물이야. 이제 네가 짊어져야 할 칼날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네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잖아."

 

재환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치밀어 올랐다.

 

친부를 향해 갈아왔던 7년간의 복수심이, 이제는 남원을 집어삼킨 토착 권력 강태석과 중앙의 괴물 김문현을 향한 서슬 퍼런 사법적 분노로 완전히 탈바꿈하고 있었다.

 

재환은 찢어진 영장 조각을 쓰레기통에 거칠게 처넣었다.

 

그리고 서류함에서 붉은색 결재인이 찍히지 않은 백색 소환 통보서 한 장을 거칠게 꺼내 책상 중앙에 내리쳤다.

 

"그래. 이제 망설일 시간은 1초도 없다."

 

재환의 목소리는 낮고 서늘했다.

 

"강태석의 30년 토건 카르텔과 김문현의 검은돈 줄기, 그 정중앙을 관통하는 놈부터 끌어내린다."

 

만년필 촉이 종이 위를 거칠게 긁어내리기 시작했다.

 

피의자 성명란에 적힌 세 글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황선태(黃善泰).'

 

남원시청 건설교통국장.

 

강태석이 시장으로 군림하며 주물렀던 모든 관급 공사의 설계 변경, 춘향 테마랜드와 요천 수변공원의 40억 비자금 횡령, 그리고 하도급 페이퍼 컴퍼니 세창물산과 호남엔지니어링의 인허가를 총괄 집행해 온 토착 부패의 실무 총책이었다.

 

2. 나들목으로 향하는 바퀴

 

같은 시각, 남원시청 본관 3층 건설교통국장실의 문이 안쪽에서 덜컥 잠겼다.

 

블라인드가 빽빽하게 내려앉은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황선태 국장은 짐승처럼 헐떡이며 서류를 닥치는 대로 쓸어 담고 있었다.

 

이마에서는 굵은 식은땀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려 와이셔츠 깃을 축축하게 적셨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황선태의 손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책상 위에는 남원상호신용금고 지하 2층 비밀 대여금고가 털렸다는 조동식 지청장의 다급한 육성이 담긴 메모가 구겨져 있었다.

 

비선 자금 관리인이던 임종식이 체포되었고, 배동진 대표마저 폐차장에서 장부를 빼앗긴 채 구속되었다.

 

그리고 방금 전, 전주교도소에 수감된 강태석 시장과의 비밀 접선을 시도했던 비서실 직원이 전해 온 전언은 황선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성재환 검사가 성호석 차관에 대한 영장을 철회하고, 시청 결재 라인 전체를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 및 업무상횡령 혐의로 직접 조준했다.'

 

황선태는 가죽 서류 가방 세 개를 바닥에 내던지듯 내려놓았다.

 

가방 안에는 지난 5년간 요천 수변공원 제방 공사와 춘향 테마랜드 사업에서 조성된 비자금 분배 내역, 시의원들과 도청 공무원들에게 살포된 뇌물 영수증 사본, 그리고 강태석의 친필 배임 지시 공문 원본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이것들은 그의 목숨줄이자, 동시에 그를 단두대로 보낼 독약이었다.

 

"내가 여기서 잡히면…… 다 뒤집어쓰고 죽어. 강태석 그 인간이 날 살려둘 리가 없어!"

 

황선태는 코트를 거칠게 걸쳐 입고 서류 가방들을 양손에 움켜쥐었다.

 

그는 후문 비상계단을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은밀히 내려갔다.

 

시청 직원들의 눈을 피해 미리 대기시켜 둔 짙은 감색 소나타 승용차 트렁크에 가방들을 쑤셔 넣었다.

 

시동을 걸자 낡은 엔진이 신경질적인 굉음을 토해냈다.

 

차량이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와 남원 시내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백미러를 응시하는 황선태의 눈동자가 광기에 젖어 번들거렸다.

 

순천완주고속도로로 통하는 남원 나들목(IC)까지는 불과 10분 거리였다.

 

일단 남원을 빠져나가 광주나 부산의 밀항 브로커와 접선해야만 했다.

 

그의 주머니 속에는 위조 여권과 함께 스위스 차명 계좌의 일련번호가 적힌 쪽지가 들어 있었다.

 

차량이 요천 삼거리를 지나 외곽 국도로 접어드는 순간, 조수석 대시보드 위에 놓여 있던 황선태의 모토로라 무선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에는 남원시청 비서실의 내선 번호가 찍혀 있었다.

 

황선태는 마른침을 꿀컥 삼키며 떨리는 손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 여보세요! 국장실 비웠다고 소문났습니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것은 시청 직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낮고 묵직한, 쇠를 긁는 듯한 차가운 음성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황 국장."

 

황선태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교도관을 매수해 전주교도소 독방에서 걸려 온, 낯익고도 소름 끼치는 목소리였다.

 

강태석 시장이었다.

 

3. 도청된 비명

 

"시, 시장님……!"

 

황선태의 목소리가 단번에 뒤집혔다.

 

핸들을 쥔 손바닥에 땀이 흥건하게 배어 미끄러졌다.

 

"시장님, 지금 남원지청이 미쳤습니다! 성재환 그 새끼가 임종식 금고를 털고 배동진이 장부까지 다 쥐었습니다! 이제 시청으로 밀고 들어온답니다! 저, 저 일단 몸을 피해야겠습니다! 광주 쪽에 사람을 좀 붙여주십시오!"

 

수화기 건너편에서는 서늘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철창 너머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음습한 냉기였다.

 

"도망을 가시겠다?"

 

강태석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당혹감도 없었다.

 

오히려 먹잇감을 구석으로 몰아넣은 맹수 특유의 잔인함이 묻어났다.

 

"황 국장. 자네 차 트렁크에 실린 가죽 가방 세 개. 거기 뭐가 들었는지 내가 모를 것 같나?"

 

"시, 시장님, 그건…… 그건 제 보신용이 아니라,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닥쳐라, 이 미련한 새끼야."

 

강태석의 서늘한 일갈에 황선태는 숨이 턱 막혔다.

 

"네놈이 그 장부를 들고 나들목을 빠져나가는 순간, 검찰 놈들이 널 잡겠나, 아니면 내 식구들이 널 먼저 찾겠나? 성재환 그 애송이가 휘두르는 칼날이 무서워서 30년 밥그릇을 엎어버려? 당장 차 돌려라. 시장 관사 뒤편 창고로 가서 조용히 대기해. 중앙에서 김문현 위원장님이 손을 쓰고 계신다. 오늘 정오만 넘기면 대검에서 성재환 직무 배제 명령서가 떨어진다."

 

"거짓말! 거짓말 마십시오!"

 

황선태가 핸들을 내리치며 절규했다.

 

차량은 이미 남원 톨게이트를 2킬로미터 앞둔 편도 2차선 도로를 시속 100킬로미터로 질주하고 있었다.

 

"조동식 지청장도 피의자로 입건됐습니다! 그 괴물 같은 놈은 자기 아버지 목줄도 쥐고 흔들던 악귀예요!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치는 거 아닙니다! 시장님, 제발…… 제발 살려주십시오! 저 검찰에 들어가면 다 불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아니, 제 입을 찢어놓으실 거잖아요!"

 

"황 국장."

 

강태석의 목소리가 한층 더 가라앉았다.

 

그것은 사형선고와도 같은 음조였다.

 

"말귀를 못 알아먹는 짐승은 고기 맛도 못 보는 법이지. 나들목 톨게이트 지나기 전에 마지막 기회를 준 거다. 네 처자식이 살고 있는 대치동 아파트 주소, 내가 잊어버렸을 것 같으냐?"

 

뚝.

 

무자비하게 끊긴 전화기 너머로 단조로운 통화 연결음만이 귓전을 때렸다.

 

황선태는 기겁하며 전화기를 조수석 바닥으로 내던졌다.

 

공포가 온몸의 신경을 마비시켰다.

 

앞을 봐도 절벽, 뒤를 봐도 낭떠러지였다.

 

그러나 황선태가 미처 알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그의 무선전화 신호는 이미 20분 전부터 남원지청 204호 검사실 책상 위에 놓인 특수 통신 감청 장비와 연결되어 있었다.

 

4. 검사실의 포위망

 

남원지청 204호 검사실.

 

대검 특수부에서 급파된 감청 전문 수사관이 헤드폰을 벗으며 성재환 검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카세트 릴테이프가 천천히 회전하며 두 사람의 통화 내용을 한 글자도 빠짐없이 자성(磁性) 테이프 위에 박아 넣고 있었다.

 

"녹취 완료되었습니다, 검사님."

 

수사관의 목소리에 흥분이 감돌았다.

 

"피의자 황선태 국장과 전주교도소 강태석의 통화입니다. 황선태의 횡령 사실 자인, 가죽 가방 세 개에 담긴 비자금 장부 은닉 정황, 그리고 강태석의 가족 협박 및 도주 교사 정황까지 명백히 채증되었습니다."

 

책상 앞에 버티고 서 있던 강태훈 수사관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검사님! 놈이 남원 나들목으로 빠져나가기 직전입니다! 지금 바로 긴급체포조를 출동시켜야 합니다! 고속도로로 올라타면 전주나 광주 관할로 넘어가 추적이 까다로워집니다!"

 

지유 역시 긴장된 눈빛으로 성재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성재환의 표정은 호수처럼 고요했다.

 

분노로 이글거리던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냉철한 법관의 이성만이 서슬 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재환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긴급체포로 도로 한복판에서 들이받지 않는다."

 

"예?"

 

강태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재환은 책상 위에 정갈하게 작성된 서류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남원지청 특별수사전담 검사의 직인과 푸른빛 만년필 잉크로 날인된 정식 문서였다.

 

'피의자 소환 통보서(被疑者召喚通報書).'

 

죄명: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업무상횡령,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증거인멸교사.

 

출석 일시: 1996년 9월 12일 오전 10시.

 

출석 장소: 전주지방검찰청 남원지청 204호 검사실.

 

재환이 서류를 들어 보이며 차갑게 말했다.

 

"황선태는 지금 극도의 공포에 질려 있다. 저놈을 도로 위에서 무리하게 덮치면 장부를 불태우거나 차를 가드레일에 처박아 자폭할 위험이 있어. 저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검찰의 법리가 아니라 강태석의 암살이다."

 

재환의 시선이 지유의 양철 궤짝에 머물렀다.

 

"강태석은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언제나 수하들의 입을 막아왔다. 1970년대 지유 아버님을 짓밟았을 때도 그랬고, 1989년 내 아버지를 협박해 수사를 덮었을 때도 그랬지. 황선태 역시 그 사슬의 끝에 서 있다. 강태석이 내린 마지막 경고를 들었겠지. '처자식이 있는 대치동 아파트 주소.' 그건 협박이 아니라 곧 닥칠 사형선고다."

 

재환은 만년필을 주머니에 꽂으며 강태훈에게 명료한 어조로 지시를 내렸다.

 

"나들목 톨게이트 전방 500미터 지점에 수사 차량 세 대를 투입해 도로를 통제해라. 체포영장을 들이밀며 강제로 끌어내리지 마라. 도로교통법상 단순 음주 단속 및 과적 검문으로 위장해 황선태의 차를 갓길로 유도한다. 그리고 이 피의자 소환장을 그자의 눈앞에 정식으로 송달해라."

 

"소환장을 직접 건넨단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그 자리에서 황선태에게 알려줘라. 네 놈이 강태석의 손에 도살당하기 전에 목숨을 건질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는 대한민국 검찰의 취조실뿐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톨게이트 통과 후 황선태의 동선을 1미터도 놓치지 말고 전담 밀착 감시해라. 놈이 제 발로 이 204호 문을 열고 들어오게 만든다."

 

강태훈 수사관의 눈이 번쩍 뜨였다.

 

상대의 퇴로를 막아 도주를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생존의 닻을 검찰로 돌려놓는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알겠습니다, 검사님! 즉시 남원 나들목으로 출동하겠습니다!"

 

강태훈이 수사관 둘을 이끌고 검사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복도 너머로 다급한 구둣발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5. 톨게이트의 검문선

 

남원 톨게이트 진입로.

 

회색 아스팔트 위로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황선태의 감색 소나타가 요금소를 300미터 앞두고 속도를 줄였다.

 

차량 앞유리 너머로 붉은색 경광등을 번쩍이는 경찰 순찰차와 도로공사 표지판이 시야에 들어왔다.

 

'전방 도로 유실로 인한 차선 축소 및 특별 안전 검문.'

 

황선태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젠장, 하필 이 타이밍에……!"

 

황선태는 핸들을 틀어 유턴을 시도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그의 차 뒤편으로 대형 화물 트럭 두 대가 바짝 따라붙어 퇴로를 완전히 막아선 상태였다.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려 눈을 찔렀다.

 

황선태는 와이셔츠 깃을 거칠게 풀어헤치며 떨리는 손으로 기어를 중립에 놓았다.

 

검은색 레인코트를 입은 건장한 사내 둘이 소나타 승용차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교통경찰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눈빛과 각 잡힌 체격을 지닌 대검 특수부 수사관들이었다.

 

조수석 창문을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에 황선태는 기겁하며 몸을 움츠렸다.

 

"황선태 국장님 되십니까?"

 

창문 틈새로 강태훈 수사관의 서늘한 얼굴이 불쑥 들이밀어졌다.

 

황선태는 혀가 굳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누, 누구신데 남원시청 관용 차량을 막아섭니까? 나, 나 지금 도청에 긴급 업무가 있어서……!"

 

강태훈은 대답 대신 품 안에서 빳빳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황선태의 무릎 위에 툭 던졌다.

 

봉투 겉면에는 붉은색 고무인으로 찍힌 선명한 문구가 박혀 있었다.

 

'전주지방검찰청 남원지청 특별수사본부.'

 

황선태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이, 이게 뭡니까……?"

 

"남원지청 성재환 주임검사님이 발부하신 피의자 신분 정식 소환 통보서입니다."

 

강태훈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묵직한 위압감을 품고 있었다.

 

"죄명은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및 횡령, 직권남용입니다. 출석 일시는 내일 오전 10시. 장소는 지청 2층 204호 검사실입니다."

 

황선태의 입술이 파랗게 질려 덜덜 떨렸다.

 

"체, 체포영장도 없이 날 막는 겁니까? 이건 불법 감금이야! 난 지금 도청으로 가야 한다고!"

 

강태훈은 비웃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더 다가가 황선태의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 목소리는 얼음장보다 차가웠다.

 

"체포하지 않습니다, 황 국장님. 가고 싶으시면 고속도로를 타십시오. 다만 검사님께서 전하라신 말씀이 있습니다."

 

황선태가 침을 꼴깍 삼키며 강태훈을 쳐다보았다.

 

"강태석 시장의 처남 조상태가 보낸 청부 용역들이 지금 나들목 건너편 휴게소에서 국장님의 차 번호를 기다리고 있더군요. 트렁크에 실린 가죽 가방 세 개를 회수하고, 국장님은 요천 흙탕물에 담그라는 오더가 떨어졌답니다. 시장님이 교도소에서 내린 '마지막 배려'라더군요."

 

"히익……!"

 

황선태의 입에서 짐승의 단말마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셔 하얗게 질려버렸다.

 

조금 전 전화통화에서 강태석이 내뱉었던 살벌한 음성이 머릿속을 벼락처럼 때렸다.

 

'말귀를 못 알아먹는 짐승은 고기 맛도 못 보는 법이지.'

 

강태훈은 창틀에서 손을 떼며 무심하게 물러섰다.

 

"소환장은 정식으로 교부되었습니다. 내일 오전 10시까지 오시지 않으면 전국에 지명수배가 내려질 겁니다. 물론, 그때까지 국장님의 숨통이 붙어 있다면 말입니다. 갈 길 가십시오."

 

수사관들이 길을 터주며 거수경례를 붙였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바리케이드가 치워졌다.

 

하지만 황선태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을 수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칠흑 같은 고속도로 어둠 속에서, 아가리를 벌린 덤프트럭과 사시미를 든 조폭들의 형상이 어른거렸다.

 

저곳으로 나가는 순간 자신은 시체가 된다.

 

황선태는 핸들에 이마를 처박은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살기 위해서는, 오직 살기 위해서는 그 악귀 같은 검사의 방으로 기어들어 가야만 했다.

 

6. 김밥 한 줄의 온기

 

정오가 가까워진 시각, 삼거리 김밥집의 놋쇠 풍경이 맑은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검은색 정장 차림의 성재환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가게 안은 고소한 참기름 냄새와 따뜻한 밥 짓는 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난 7년간의 테러와 횡포 속에서도 지유가 끝끝내 지켜낸 생명의 냄새였다.

 

박스 테이프로 촘촘히 엮어 붙인 통유리창 너머로 남원의 정오 햇살이 비쳐 들었다.

 

지유는 조리대 앞에 서서 갓 말아낸 김밥을 썰고 있었다.

 

칼날이 도마를 규칙적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검사실의 삭막한 긴장감을 단숨에 녹여내렸다.

 

지유가 고개를 들어 재환을 바라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왔어?"

 

"어."

 

재환은 의자를 빼고 앉았다.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짐이 지유의 온기 어린 목소리 앞에서 잠시나마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지유는 은쟁반에 정갈하게 썰어낸 김밥 한 접시와 따뜻한 멸치 육수 한 대접을 내어왔다.

 

김밥 옆에는 작은 종지에 담긴 단무지 세 쪽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지유의 모친이 평생을 고집했던 정직한 상차림 그대로였다.

 

재환은 젓가락을 들기 전, 지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지유가 쑥스러운 듯 손을 뒤로 감추려 하자, 재환이 그녀의 거친 손등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손가락 곳곳에 남은 화상 흉터와 칼자국이 손바닥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지유야."

 

"응."

 

"황선태에게 소환장을 보냈다."

 

재환의 말에 지유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자가…… 올까?"

 

"올 수밖에 없다. 강태석은 자신이 살기 위해 황선태를 죽이려 할 테니까. 권력으로 맺어진 카르텔은 이익이 사라지는 순간 가장 추악한 피비린내를 풍기며 서로를 물어뜯는 법이야."

 

재환은 김밥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씹을수록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어머니의 사랑과 지유의 눈물이 켜켜이 배어 있는 맛이었다.

 

재환은 목이 메는 것을 참으며 국물을 들이켰다.

 

지유가 재환의 맞은편에 앉아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았다.

 

"네 아버지는…… 서울에서 괜찮으실까?"

 

재환의 젓가락이 잠시 멈칫했다.

 

아버지를 떠올리는 재환의 눈가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7년 동안 원망하고 증오했던 아버지.

 

그러나 진실을 알고 난 지금,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시궁창을 버텨온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서울 성북동 사저 주변에 김문현의 사람들이 깔려 있다고 하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물러서지 않으실 거다. 나를 살리기 위해 7년을 숨죽여 오셨던 분이야. 이제는 아들의 등에 칼이 꽂히지 않도록 서울의 외압을 온몸으로 막아내고 계셔."

 

지유가 고개를 끄덕이며 재환의 손등을 토닥였다.

 

따뜻한 위로였다.

 

"그래, 그러니까 너도 부러지면 안 돼. 우리 엄마가 늘 그러셨어. 정직하게 지은 밥은 천둥 번개가 쳐도 썩지 않는다고. 네가 쥐고 있는 법도 그래야 해."

 

그때 김밥집 문이 거칠게 열리며 최민재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민재의 손에는 남원일보사 마크가 찍힌 팩스 용지 수십 장이 쥐어져 있었다.

 

7. 도청된 유언

 

"재환아! 지유야! 큰일 났다!"

 

최민재가 숨을 헐떡이며 테이블 위로 팩스 용지들을 쏟아놓았다.

 

남원일보 배도식 편집국장의 서명이 날인된 내부 취재 첩보철이었다.

 

민재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서류 위로 뚝뚝 떨어졌다.

 

"황선태 그 인간, 나들목에서 검찰 검문받고 차 돌려서 시내로 들어왔어! 그런데 그놈이 지금 어디 처박혀 있는지 아냐?"

 

재환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민재를 응시했다.

 

"어디냐?"

 

"남원상록골프장 클럽하우스 지하 기계실이다! 강태석의 처남 조상태가 관리하는 은신처야! 황선태는 거기가 안전한 줄 알고 기어들어 갔는데, 방금 전주교도소 면회실에서 나온 조상태의 지령을 내가 도청했어!"

 

민재가 품 안에서 소형 카세트 녹음기를 꺼내 재생 버튼을 눌렀다.

 

지지직거리는 잡음 사이로, 사시나무 떨듯 흐느끼는 황선태의 비명과 강태석의 처남 조상태의 살벌한 육성이 흘러나왔다.

 

- '조 대표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저 지금 골프장 지하에 있습니다!

 

성재환 검사가 나들목에 진을 치고 소환장을 던졌습니다!

 

저 내일 오전 10시까지 검찰에 안 가면 끝장납니다!'

 

- '황 국장, 진정해.

 

매형(강태석)이 다 생각이 있으시니까 거기 숨어 있으라는 거 아니야.

 

오늘 밤 12시에 부산으로 빠지는 활어차 한 대를 보낼 테니까, 트렁크에 실린 가죽 가방 세 개 들고 대기하고 있어.'

 

- '정말입니까? 정말 절 빼내 주시는 겁니까?'

 

- '그럼, 우리가 10년을 한배를 탄 식구인데 버리겠어?

 

몸단장이나 하고 있어.

 

아주 영원히 편안한 곳으로 모셔다줄 테니까.'

 

철컥, 소리와 함께 녹음이 끊겼다.

 

민재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재환을 바라보았다.

 

"재환아, 활어차는 개뿔! 폐차장 소각로로 끌고 가서 황선태를 통째로 묻어버리겠다는 소리야! 조상태 이 조폭 새끼들이 오늘 밤 황선태를 입막음 살해하려고 작정했어!"

 

가게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지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재환아……!"

 

재환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의 눈빛은 한겨울 지리산의 칼바람보다 더 서늘하고 날카로웠다.

 

재환은 주머니에서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을 꺼내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황선태가 죽으면 강태석의 횡령 장부와 김문현으로 이어지는 뇌물 사슬은 영원히 암매장된다.

 

단 1초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절체절명의 시간표였다.

 

"민재야."

 

"어?"

 

"남원일보 윤전기 대기시켜라."

 

재환의 입술 사이로 단호한 명령이 흘러나왔다.

 

"오늘 밤, 남원상록골프장에서 대한민국 토착 권력의 가장 추악한 살인 미수 현장이 덮쳐질 거다. 황선태는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청 취조실에 앉아야만 해. 살아서, 자신의 죄를 낱낱이 자백하며 법의 심판대 위에 서야 한다."

 

재환이 지유를 돌아보았다.

 

지유가 떨리는 손으로 재환의 정장 옷깃을 단정하게 여며주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무겁게 맞물렸다.

 

"다녀올게."

 

"조심해, 재환아. 반드시 살려서 데려와."

 

재환은 문을 박차고 나섰다.

 

처마 끝의 놋쇠 풍경이 요란하게 울부짖으며 폭풍전야의 밤을 알리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