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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60화

판도라의 상자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궤짝 속의 진실

 

창밖으로 쏟아지던 비는 가늘어졌으나, 전주지방검찰청 남원지청 2층 204호 특별수사전담 검사실의 공기는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성재환은 숨을 죽인 채 책상 위에 펼쳐진 서류들을 내려다보았다.

 

지유가 품에 안고 달려왔던 양철 궤짝 속의 종이들은 수십 년의 세월을 견뎌 누렇게 바래 있었지만, 그 위에 박힌 글자들은 살아서 요동치는 듯했다.

 

1970년대 초반 남원읍 하정리 토지 원천 측량 및 소유권 이동 대장과 한석규의 위조된 목도장 자국, 그리고 1989년 성호석 전 남원시장이 친필로 작성한 극비 내사 보고서였다.

 

지유는 책상 모서리를 꼭 쥔 채, 아직 붉은기가 가시지 않은 눈으로 재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재환아, 서류에 적힌 날짜를 봐."

 

지유의 떨리는 목소리가 적막한 검사실을 조용히 갈랐다.

 

재환은 마른침을 삼키며 만년필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릴 만큼 억센 악력이었다.

 

빛바랜 갱지 맨 윗장에는 1989년 10월 14일이라는 일자가 선명히 찍혀 있었다.

 

'남원군 구도심 환지 및 국유지 불법 불하 특별 내사 중간보고서.'

 

그 아래에 정갈하지만 서슬 퍼런 필체로 적힌 글귀가 재환의 망막을 찔렀다.

 

'피의자 삼거리 토건 대표 강태석. 1970년대부터 지속된 사문서위조 및 토지 강탈, 관할 공무원 뇌물 공여 혐의 명백. 금주 내 전격 구속영장 청구 및 계좌 추적 착수 예정. 남원군수 성호석.'

 

그것은 친부 성호석이 직접 쓴 수사 결재서였다.

 

재환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지난 7년 동안, 아니 남원을 떠나 신림동의 좁은 고시원 방에서 형법전을 씹어 삼키던 그 지옥 같은 밤들 내내, 재환은 아버지가 강태석과 손을 잡고 남원의 피를 빨아먹은 공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버지가 중앙 내무부로 영전하여 승승장구할 때, 그것이 부패와 타협한 대가라고만 여겼다.

 

그래서 친부의 목에 사법의 칼날을 들이대기 위해 제 손을 피로 물들이며 달려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놓인 문건은 정반대의 진실을 웅변하고 있었다.

 

성호석은 침묵한 공범이 아니었다.

 

오히려 강태석이라는 괴물을 가장 먼저 법의 심판대에 세우려 했던 고독한 추적자였다.

 

재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게…… 아버지가 직접 쓰신 거라고?"

 

"그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이 서류를 벽장 속에 숨겨두셨어. 강태석이 왜 그토록 우리 집을 부수려 했는지, 왜 우리 가게 밑바닥을 파헤치려 했는지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아떨어져."

 

지유는 숨을 고르며 서류의 다음 장을 넘겼다.

 

바스락거리는 종이 소리가 마치 마른 뼈가 부러지는 소리처럼 섬뜩하게 울렸다.

 

다음 장에 철해진 것은 공문서가 아니었다.

 

붉은색 볼펜으로 거칠게 휘갈겨 쓴 협박 쪽지였다.

 

거기에는 관인이 아닌, 대한민국 최고 권력층의 오만한 압력이 먹물처럼 번져 있었다.

 

2. 비열한 협박장

 

'성호석 군수 보아라.'

 

협박장의 첫머리는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지방의 군수 나부랭이가 중앙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제 발등을 찍으려 드는구나. 삼거리 토건 강태석은 당과 중앙 정무라인이 관리하는 사람이다. 자네가 만약 구속영장 청구를 강행한다면, 자네의 관복만 벗겨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글씨는 뒤로 갈수록 잔혹한 비수를 품고 있었다.

 

'남원중학교에 다니는 자네 외아들 성재환. 매일 아침 요천 둑길을 지나 학교로 향하더군. 아이가 하굣길에 덤프트럭에 치여 불구가 되거나 요천 흙탕물에 처박히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당장 감사를 중단하고 서류를 파쇄하라. 이것은 경고가 아니라 마지막 자비다. 국회 내무위원 김문현.'

 

재환의 시선이 '성재환'이라는 석 자에 닿은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는 듯한 현기증이 엄습했다.

 

1989년 가을.

 

열두 살이었던 재환은 그 당시의 기억을 또렷이 떠올렸다.

 

어느 날 갑자기 관사 주변에 정체불명의 검은 지프차가 맴돌기 시작했고, 아버지는 평소와 달리 핏발 선 눈으로 재환의 등굣길을 직접 뒤따라 걸었다.

 

학교가 끝나면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말라며 벼락같이 호통을 치던 아버지의 떨리던 어깨.

 

어린 재환은 그것이 단지 엄격한 훈육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훈육을 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저격수의 총구로부터, 하나뿐인 아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방패를 치고 있었던 것이었다.

 

재환의 눈가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툭 떨어져 협박장 여백을 적셨다.

 

"나였어……."

 

재환의 목에서 찢어지는 듯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나 때문에…… 아버지가 멈추셨던 거야. 아버지가 강태석을 놓아준 게 아니라, 나를 살리기 위해서……."

 

지유는 조용히 다가가 재환의 떨리는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지유의 손바닥에 배어 있는 거친 굳은살과 화상 흉터가 재환의 차가운 살갗에 닿았다.

 

그 따뜻한 온기가 얼어붙은 재환의 심장에 닿는 순간, 억눌러왔던 비통함이 둑 터지듯 터져 나왔다.

 

"지유야, 나는 그것도 모르고…… 지난 7년 동안 아버지를 저주했어. 남원을 버리고 서울로 올라간 아버지를 경멸했고, 강태석과 한패가 되어 출세가도를 달린 괴물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내 손으로 아버지를 구속하겠다고, 법복을 입고 내려와 아버지의 목을 베겠다고 칼을 갈았는데……."

 

재환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책상 위로 고개를 묻었다.

 

뜨거운 눈물이 서류 위로 후두둑 쏟아졌다.

 

아버지의 침묵은 야합이 아니라 피눈물 나는 굴복이었다.

 

권력의 칼날 앞에서 자식을 지키기 위해, 평생 쌓아온 공직자의 명예와 신념을 쓰레기통에 처박고 스스로 오물을 뒤집어쓴 부정(父情)의 비극이었다.

 

지유는 아무 말 없이 재환의 등을 쓸어내렸다.

 

지유의 눈에서도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려 뺨을 타고 떨어졌다.

 

"울지 마, 재환아. 네 아버지는 결코 굴복해서 끝내려던 게 아니었어. 여기 그다음 서류를 봐."

 

3. 좌천의 이면과 감춰진 복선

 

지유가 가리킨 서류는 협박장 뒤에 묶여 있던 1993년의 비밀 감사 일지였다.

 

내무부 감사관실 마크가 선명한 문건의 여백에는, 성호석의 친필 메모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1993년 9월. 김문현과 강태석의 결탁이 남원 전역의 토지를 집어삼키고 있다. 중앙 정무라인은 본인을 서울 내무부 기획조정실장으로 전격 발령 내어 남원에서 강제로 떼어놓았다. 영전의 탈을 쓴 유배다. 남원군수직을 박탈당한 본인은 더 이상 현장에서 손을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놈들이 조작한 1991년 환지 대장과 횡령 리스트 원본은 삼거리 김밥집과 군청 문서고 특수 금고에 남아 있다. 언젠가 사법의 칼날이 바로 서는 날, 이 기록이 놈들의 목을 벨 것이다.'

 

성호석의 영전.

 

그것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정권 실세의 총애를 받아 승승장구한 것이 아니었다.

 

강태석의 비리를 집요하게 캐내던 성호석을 남원에서 축출하기 위해, 여당 내무위원장 김문현이 꾸며낸 정교한 배제 공작이었던 것이다.

 

성호석을 중앙의 허울 좋은 자리로 끌어올려 손발을 묶어버린 뒤, 무주공산이 된 남원에 보궐선거를 열어 토건 조폭 강태석을 시장 자리에 앉힌 것.

 

그것이 바로 민선 1기 강태석 철권통치의 추악한 시작점이었다.

 

재환은 흐려진 눈을 들어 문건의 세부 내용을 짚어 내려갔다.

 

'1991년 남원 구도심 토지 구획 정리 당시, 강태석은 한석규의 과수원 4,200평을 공공도로 부지로 강제 수용하고, 그 대가로 지급되어야 할 환지를 교룡산 바위 비탈 잡종지로 빼돌렸다. 그리고 본래의 비옥한 요천 변 금싸라기 땅은 강태석의 처남 조상태와 동서개발 명의로 단독 환지 처분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석규가 군청에 찾아와 항의하자, 강태석 휘하의 폭력배들이 그를 집단 폭행하여 뇌출혈로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 재환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지유의 아버지 한석규의 억울한 죽음.

 

그 배후에 도사린 거대한 음모의 실체가 30년 만에 완전히 그 민낯을 드러내고 있었다.

 

강태석이 오늘날 남원 최고의 토건 재벌로 군림하고, 시장 완장까지 차며 휘둘렀던 권력의 종잣돈은 다름 아닌 지유 집안의 피와 눈물로 일군 과수원 땅이었던 것이다.

 

"강태석……."

 

재환의 입에서 지옥 밑바닥을 긁는 듯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강태훈 수사관조차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숨을 멈추었다.

 

재환의 두 눈은 이제 참회의 눈물을 거두고, 서슬 퍼런 사법의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놈은 단순한 토착 비리 사범이 아니었어. 살인자이자, 한 가정을 도륙하고 그 시체 위에 권력의 탑을 쌓아 올린 악마였다."

 

재환은 책상 한쪽에 놓여 있던, 친부 성호석 내무부 차관 사저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 청구서를 집어 들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성호석이라는 이름을 적어 넣었던 그 영장 청구서.

 

재환은 서류를 양손으로 잡고 단숨에 쫘악 찢어발겼다.

 

두 번, 세 번, 갈기갈기 찢겨진 영장 조각들이 허공으로 흩날리며 차가운 리놀륨 바닥 위로 떨어졌다.

 

지유가 그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재환은 책상 위에 놓인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을 쥐었다.

 

캡 상단에 선명하게 새겨진 라틴어 법언,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지유가 사주었던 깊고 푸른 흑청색 잉크가 가득 채워진 그 펜촉을 들어, 재환은 깨끗한 백지 위에 새로운 피의자들의 이름을 거침없이 휘갈겨 내려갔다.

 

'피의자: 강태석, 김문현.'

 

죄명: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살인교사 및 사문서위조·동행사.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적막한 방 안을 날카롭게 갈랐다.

 

바로 그때였다.

 

검사실 한구석에 놓인 육중한 검은색 관용 전화기가 요란한 비명을 지르며 울리기 시작했다.

 

4.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

 

따르릉!

 

따르릉!

 

찢어질 듯한 벨 소리에 검사실 안의 공기가 일순 얼어붙었다.

 

강태훈 수사관이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하자, 재환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재환은 붉어진 눈가를 소매로 거칠게 닦아낸 뒤, 차가운 수화기를 천천히 들어 귀에 가져다 대었다.

 

"남원지청 특별수사전담 검사실, 성재환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은 거친 숨소리와 희미한 잡음뿐이었다.

 

하지만 재환은 직감할 수 있었다.

 

이 팽팽하고 무거운 침묵의 무게를.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기억의 가장 깊은 곳에 화인처럼 박혀 있던 바로 그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재환이냐."

 

낮고, 메마르고, 지독하게 갈라진 음성이었다.

 

내무부 차관 성호석이었다.

 

재환의 목구멍이 턱 막혀왔다.

 

수화기를 쥔 손가락마디가 하얗게 굳어졌다.

 

지난 수년간 단 한 번도 먼저 말을 건네지 않았던 아버지, 마주칠 때마다 경멸과 조소를 던지며 돌아섰던 아들이었다.

 

"……예, 아버지."

 

재환의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은 떨리지 않았다.

 

그것은 검사의 음성이자, 비로소 진실의 문을 열어젖힌 아들의 대답이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마치 수십 년 동안 가슴을 짓누르던 거대한 바위를 간신히 밀어낸 사람처럼, 성호석의 호흡은 가쁘고 처절했다.

 

"지유 그 아이가…… 결국 너를 찾아갔구나."

 

성호석의 첫마디는 뜻밖에도 지유에 대한 것이었다.

 

재환은 지유를 바라보았다.

 

지유 역시 마른침을 삼키며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지유가 어머니의 궤짝 속에서 아버지가 남기신 서류들을 가져왔습니다."

 

재환은 이를 악물었다.

 

"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왜 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으시고, 그 모든 오물과 치욕을 홀로 뒤집어쓰셨습니까! 제가 아버지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얼마나 증오하며 칼을 갈았는지 아시면서…… 왜 끝까지 침묵하셨습니까!"

 

재환의 목소리가 격앙되어 터져 나왔다.

 

검사실 벽을 때리는 아들의 외침에, 전화선 너머의 성호석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흘러나온 노인의 목소리에는 깊은 자책과 통한이 서려 있었다.

 

"네가 알면…… 네 성정에 가만히 있었겠느냐."

 

성호석의 음성이 젖어 들었다.

 

"그 당시의 김문현은 살아있는 권력이었다. 청와대 정무라인과 안기부, 검찰 수뇌부까지 손아귀에 쥐고 흔들던 괴물이었어. 내가 군수 직을 걸고 강태석을 치려 했을 때, 그자들이 네 등굣길 사진을 내 책상 위에 던져놓더구나. 네 목숨이 걸려 있었다, 재환아. 내 목이 백 번 달아나는 것은 두렵지 않았으나, 내 욕심 때문에 하나뿐인 내 자식의 숨통이 끊어지는 꼴은 죽어도 볼 수 없었다."

 

노인의 마른 기침 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권력에 무릎을 꿇고 서울로 올라간 것은 비겁한 도망이었다. 석규 형님에게도, 지유 그 아이에게도 나는 죽어서도 씻지 못할 죄인이다. 그래서 너만은…… 법을 제대로 배워 그 어떤 권력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검사가 되기를 바랐다. 내가 꺾였던 그 자리에서, 내 아들만은 괴물들에게 짓밟히지 않고 그들의 목을 꺾어버릴 수 있는 진짜 칼이 되기를 바랐어."

 

성호석의 절절한 고백이 비수가 되어 재환의 가슴을 후벼 팠다.

 

재환은 만년필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버지는 도망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영혼을 팔았고, 훗날 아들이 장성하여 그 괴물들을 베어 넘길 수 있도록 고독한 인내의 세월을 견뎌온 것이었다.

 

"아버지……."

 

"재환아. 서울에서 김문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호석의 목소리가 돌연 서슬 퍼런 경고로 바뀌었다.

 

정치판의 음지에서 평생을 구른 관료의 날카로운 감각이었다.

 

"강태석이 전주교도소에서 옥중 지령을 내리며 버티는 것은 김문현이 뒤를 봐주고 있기 때문이다. 김문현이 오늘 오전,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을 잇달아 만나 남원 특별수사를 강제 종결시키고 너를 직무 배제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조동식 지청장에게 내려간 직무 배제 공문은 시작에 불과해. 내일 아침이면 대검에서 너를 서울로 강제 소환하는 인사 명령이 떨어질 거다."

 

재환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래, 물러서선 안 된다. 놈들이 마지막으로 노리는 것은 단 하나다."

 

성호석의 음성이 낮고 은밀하게 가라앉았다.

 

"남원시청 건설교통국장 황선태. 강태석이 30년간 조성한 모든 비자금의 세부 집행 장부와, 김문현에게 건너간 양도성예금증서의 실물 영수증을 관리해 온 놈이다. 강태석은 지금 교도소 안에서 황선태를 시켜 그 장부들을 모조리 소각하고 해외로 밀항시키려 하고 있다. 황선태의 입을 막고 장부를 태우면, 내가 남긴 보고서도, 지유가 가진 서류도 법정에서 '정치적 음해'로 몰아붙여 빠져나갈 속셈이야."

 

재환의 뇌리에서 전광석화처럼 하나의 연결고리가 번뜩였다.

 

남원 제1건설 배동진의 장부 소각, 유성골재의 14억 횡령, 그리고 요천 제방의 부실시공.

 

그 모든 자금의 흐름을 최종 결재하고 중앙으로 상납한 실무의 총책임자.

 

남원시청 건설교통국장 황선태.

 

그가 바로 강태석 카르텔의 마지막 빗장이자, 김문현의 목줄을 죌 수 있는 결정적 열쇠였다.

 

"황선태를 잡아야 한다, 재환아. 놈이 움직이기 전에, 오늘 밤 안에 반드시 놈의 신병을 확보해야 해."

 

성호석이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내 걱정은 마라. 김문현이 나를 물고 늘어지겠다면, 내 목을 내놓아서라도 네 앞길을 막아서는 놈들의 발목을 잡을 테니. 가거라, 재환아. 가서…… 30년 묵은 남원의 원혼들을 네 손으로 위로해 주어라."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5.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검사실 안에는 깊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재환의 얼굴에는 더 이상 망설임도, 슬픔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시퍼렇게 날이 선 서슬 퍼런 사법의 결의만이 가득 차 있었다.

 

재환은 고개를 돌려 지유를 바라보았다.

 

지유는 재환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고, 그가 마침내 모든 족쇄를 풀고 진정한 검사로서 바로 섰음을 깨달았다.

 

"재환아, 들었어?"

 

"그래. 다 들었다."

 

재환은 성호석이 남긴 1989년 내사 보고서와, 지유의 아버지가 남긴 1970년대 토지 대장을 나란히 책상 중앙에 정돈해 놓았다.

 

수십 년 동안 굳게 닫혀 있던 판도라의 상자가 마침내 완전히 열린 것이었다.

 

상자 안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추악한 죄악과 비극이었지만, 그 바닥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것은 결코 꺾이지 않은 정의의 약속이었다.

 

재환은 강태훈 수사관을 향해 매서운 눈빛을 던졌다.

 

"강 수사관님."

 

"예, 주임검사님!"

 

강태훈이 굳은 자세로 관등성명을 대었다.

 

"지금 즉시 남원시청 건설교통국장 황선태에 대한 긴급 피의자 소환 통보서를 작성하십시오. 죄명은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공여 및 수수), 업무상과실치사상 공범, 그리고 증거인멸 교사입니다."

 

"알겠습니다! 관용 승합차 대기시키고 수사관 4명 동원해 시청 국장실로 즉각 송달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송달로 끝내선 안 됩니다."

 

재환의 입술에서 서늘한 냉소가 흘러나왔다.

 

"황선태의 자택과 국장실 주변에 잠복조를 배치하십시오. 놈이 조금이라도 서류를 챙겨 도주하려 하거나 파쇄기에 손을 대는 순간, 영장 없이 현행범으로 긴급 체포합니다. 지청장의 결재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대검 특별수사본부장 긴급 수사명령권으로 밀어붙입니다."

 

"예, 검사님!"

 

강태훈이 문을 박차고 뛰어나가자, 복도 너머로 수사관들을 소집하는 긴박한 고함이 울려 퍼졌다.

 

검사실 안에는 다시 재환과 지유 둘만이 남았다.

 

창밖의 비는 완전히 그치고, 먹구름 사이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서서히 번져오고 있었다.

 

지유는 조용히 다가와 재환의 옷깃을 매만져 주었다.

 

구겨진 셔츠깃을 바로잡아 주는 지유의 손길은 더없이 다정하고 단단했다.

 

"7년 전, 네가 남원역에서 떠나던 날…… 네가 왜 그렇게 슬픈 눈을 하고 있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아."

 

지유의 눈동자에 새벽의 푸른빛이 어렸다.

 

"너는 혼자서 그 무거운 짐을 지고 떠났던 거였어. 네 아버지의 죄라고 믿었던 그 어둠을 혼자서 짊어지려고."

 

재환은 지유의 작은 손을 꼭 쥐었다.

 

상처투성이인 손, 김밥을 말고 테이프로 깨진 유리창을 붙이며 7년의 지옥을 버텨낸 손이었다.

 

재환은 그 손등에 이마를 대었다.

 

"지유야. 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너희 어머니를 고통 속에서 눈감게 만든 자들…… 단 한 놈도 법망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할 거야."

 

재환은 품속에서 닳고 닳은 학생증 증명사진을 꺼내 지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사진 뒷면에 흑청색 잉크로 적혀 있던 글귀.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나는 돌아왔고, 약속은 지켜질 거다."

 

지유는 사진을 가슴에 꼭 품으며 눈물을 삼켰다.

 

"그래. 믿어, 재환아. 끝까지 지켜볼게."

 

재환은 검은색 서류 가방을 닫았다.

 

가방 안에는 1968년 이면계약서, 1989년 성호석 친필 내사 보고서, 1970년대 위조 토지 대장, 그리고 강태석의 비자금 원천 장부가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그것은 30년 동안 남원을 지배해 온 거대한 어둠을 일격에 도륙할 사법의 벼락이었다.

 

재환이 법복을 걸쳐 입고 검사실 문을 열어젖히려는 찰나였다.

 

다급하게 계단을 뛰어 올라온 수사관 한 명이 숨을 헐떡이며 복도 끝에서 소리쳤다.

 

"검사님! 큰일 났습니다!"

 

재환의 눈썹이 꿈틀했다.

 

"무슨 일입니까."

 

수사관이 창백해진 안색으로 보고했다.

 

"남원시청 건설교통국장 황선태가…… 조금 전 국장실에서 극비 서류 가방 세 개를 들고 관용차로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지금 남원 나들목을 향해 시속 140킬로미터로 질주 중이라는 첩보입니다!"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마지막 빗장이 도주를 시작했다.

 

재환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전 차량 출동시킵니다. 남원 나들목을 전면 봉쇄하십시오. 단 한 발자국도 남원 땅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습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검사실 밖으로, 거악의 몸통을 향한 최후의 추격전이 서막을 올리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