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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5화

비 내리는 처마 밑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새벽 안개와 잉크 한 방울

 

이른 새벽, 남원(南原) 시내 외곽에 자리한 시장 관사(官舍)의 이층 서재 창문 너머로는 푸르스름한 박명이 짙게 깔려 있었다.

 

간밤에 도청 기획관리실장과 부친 성호석(成浩錫) 사이에서 오가던 낮은 통화 음성은 마치 끈적이는 타르처럼 재환의 귓전을 여전히 맴돌았다.

 

감사관 파견, 구획 정리 환지 서류, 그리고 유족 측의 재청원.

 

단어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심장을 헤집는 듯했다.

 

재환은 책상 위에 놓인 독일제 흑칠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캡 상단에 새겨진 선명한 라틴어 법언,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백부가 물려준 그 숭고한 문구 아래로, 어제 한지유(韓智攸)가 두 손으로 건네주었던 작은 유리병이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깊고 그윽한 푸른빛이 감도는 흑청색 잉크였다.

 

재환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잉크병의 뚜껑을 돌려 열었다.

 

맑은 유리병 입구로 번져 나오는 싸늘하면서도 청량한 먹물 냄새가 복잡하게 엉킨 머릿속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스포이트 피스톤을 천천히 끌어올리자 투명하던 만년필 배럴 안쪽으로 푸른빛이 도는 흑색 액체가 서서히 차올랐다.

 

잉크를 가득 머금은 금빛 닙을 부드러운 융포로 정갈하게 닦아낸 재환은 서랍 가장 깊숙한 곳에서 꺼낸 모눈종이 위에 천천히 펜촉을 가져다 댔다.

 

사각, 사각거리며 펜촉이 종이의 결을 긁는 소리가 정막한 방 안에 나직이 울렸다.

 

'성호석, 그리고 한석규(韓錫奎).'

 

어제 지유의 가게 카운터 서랍에서 목격했던 낡은 토지 소유권 확인서 속 두 이름이었다.

 

지유의 아버지가 과수원을 빼앗기고 화병으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나야 했던 그 서늘한 진실의 이면에, 바로 자신의 아버지가 서 있었다는 잔인한 사실.

 

만약 내무부의 불시 감사가 시작되어 과거의 치부가 만천하에 드러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아버지는 파멸할 것이고, 지유는 다시 한번 씻을 수 없는 상처에 난도질당할 것이 자명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라 하였거늘.'

 

재환은 주먹을 쥐었다.

 

그 무너져 내리는 하늘 아래 홀로 비를 맞고 서 있을 지유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저려왔다.

 

시계탑의 초침이 여섯 시를 알리며 가볍게 울렸다.

 

일층 복도에서 성 시장의 육중한 구둣발 소리와 함께 관용차가 대문 밖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멀어졌다.

 

재환은 만년필 캡을 딸깍 소리가 나게 닫고 교복 단추를 목 끝까지 단정히 채웠다.

 

오늘은 춘향제 거리 미술전 전시 준비를 위해 지유와 방과 후에 완월정(翫月亭)에서 다시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어떤 먹구름이 몰려오더라도 지유의 맑은 미소를 지켜내겠다는 결의가 소년의 눈빛 속에 파랗게 타오르고 있었다.

 

데스트용입니다.

 

2. 먹구름 아래의 잿빛 교정

 

오후가 되자 지리산 자락에서부터 밀려온 시커먼 먹구름이 남원 시내 상공을 무겁게 짓누르기 시작했다.

 

요천(蓼川) 변을 따라 늘어선 수양버들 가지들이 세찬 강바람에 이리저리 휘청거렸고, 빗방울을 머금은 흙냄새가 대기 중에 자욱하게 깔렸다.

 

고등학교 교실 창가에 앉은 재환은 선생님의 분필 소리 너머로 잿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줄곧 응시하고 있었다.

 

칠판에 적힌 수학 공식들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지유가 선물해 준 잉크의 냄새, 그리고 어제 노을 속에서 바람에 흩날리던 지유의 단발머리 잔상만이 가슴속을 가득 메웠다.

 

딩동댕동, 방과 후 야간자율학습 시작을 알리는 예비종이 울리자마자 뒷자리에 앉아 있던 최민재가 슬그머니 다가와 재환의 어깨를 툭 쳤다.

 

"야, 성재환. 하늘 꼴 보니까 금방이라도 한 바가지 쏟아부을 것 같은데? 오늘 목재소 들러서 합판이랑 각목 싣기로 한 건 어쩌냐?"

 

민재의 우려 섞인 목소리에 재환은 책상 위 교과서를 정리하며 담담히 가방을 챙겼다.

 

"비 오기 전에 자재들을 완월정 누각 밑으로 옮겨 둬야 해. 비를 맞으면 합판이 뒤틀려서 지유가 그린 포스터가 울어버리잖아."

 

"거 참, 지유 챙기는 건 아주 남원 일등이구만. 하긴 나도 윤하은 그 괄괄한 성격에 비 맞았다고 한소리 듣기는 싫다만. 얼른 가자, 비 쏟아지기 전에 튀어야지."

 

두 사람은 복도 끝 비상계단을 타고 조심스럽게 운동장 쪽 담장을 향해 달렸다.

 

학생주임 교사의 호각 소리가 교무실 창문 너머로 희미하게 울렸지만, 이미 익숙해진 두 소년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교문을 벗어나자마자 첫 빗방울이 재환의 이마 위로 툭 하고 떨어졌다.

 

차갑고 묵직한 촉감이었다.

 

먼 산자락에서부터 우르릉거리는 낮은 천둥소리가 지축을 울리기 시작했다.

 

공기 중에 스며든 습기가 순식간에 살갗을 파고들었고, 남원 시내의 좁은 골목길 위로 회색빛 장막이 서서히 드리워지고 있었다.

 

3. 완월정의 분주한 손길

 

광한루원(廣寒樓苑) 안쪽 완월정에 도착했을 때, 정자 처마 밑에는 이미 지유와 하은이 비닐 포장을 덮어둔 이젤을 지키며 서 있었다.

 

하은은 빗물이 들이칠세라 목장갑을 낀 채 노끈을 묶고 있었고, 지유는 스케치북을 가슴에 꼭 품은 채 헐레벌떡 뛰어오는 재환과 민재를 바라보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재환아, 민재야! 여기야! 비가 생각보다 일찍 쏟아질 것 같아."

 

지유의 맑은 음성이 바람을 타고 전해지자 재환의 가슴속에 웅크리고 있던 무거운 먹구름이 순식간에 걷히는 듯했다.

 

재환은 숨을 헐떡이며 누각 계단을 딛고 올라섰다.

 

"지유야, 다친 덴 없고? 바람이 너무 세서 걱정했어."

 

"응, 괜찮아. 하은이랑 미리 나와서 이젤이랑 전시판은 비 안 들이치는 쪽으로 다 밀어 넣었거든."

 

지유는 환하게 웃으며 재환의 교복 어깨에 떨어진 흙먼지를 조심스럽게 털어내 주었다.

 

그 자연스러운 손길에 재환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끼며 시선을 살짝 내리깔았다.

 

곁에서 그 꼴을 지켜보던 하은이 혀를 차며 민재에게 굵은 노끈 뭉치를 던졌다.

 

"아이고, 아주 둘이서 영화를 찍으셔. 최민재, 멍하니 보지 말고 저쪽 천막 모서리나 단단히 묶어! 바람 불어서 날아가면 우리 일주일 치 작업 다 날아가는 거야."

 

"알았어, 알았다고. 내가 왜 이 고생을 사서 하는지 모르겠다만, 남원 오작교의 든든한 돌다리가 되려면 이 정도 풍파는 견뎌야지 않겠냐?"

 

민재가 너스레를 떨며 기둥으로 달려가 밧줄을 잡아당겼다.

 

네 사람은 굵어지는 빗줄기 속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목재소에서 미리 가져다 놓았던 합판들을 누각 기둥 안쪽 깊숙이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그 위로 커다란 비닐 방수포를 이중으로 덮었다.

 

재환은 지유가 정성스레 채색해 둔 남원의 풍경화들이 빗물 한 방울이라도 튈세라 자신의 겉옷을 벗어 감싸 쥐었다.

 

"재환아, 그러다 네 옷 다 젖어. 이 비닐로 덮으면 충분한데."

 

지유가 만류하며 재환의 팔을 붙잡았지만, 재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네가 어제 밤새워서 그린 거잖아. 이 그림들은 춘향제 거리전의 중심이야. 절대 젖게 둘 수 없어."

 

지유는 묵묵히 자신의 그림을 지켜주는 재환의 단단한 눈빛을 바라보며 가슴속 깊은 곳에서 형언할 수 없는 온기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세상의 풍파에 늘 위축되어 살아가던 자신에게, 이처럼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준 존재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처음이었다.

 

"고마워, 재환아. 정말로."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치는 찰나, 하늘이 번쩍하며 푸른빛 섬광이 번뜩였고 곧이어 귓전을 때리는 거대한 낙뢰 소리가 남원 하늘을 뒤흔들었다.

 

4. 쏟아지는 폭우와 흩어지는 발길

 

쏴아아아아!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거센 장대비가 완월정 지붕 기와를 사정없이 때려 붓기 시작했다.

 

정자 앞 요천의 수면 위로 무수한 물보라가 하얗게 피어올랐고, 정원의 배롱나무 가지들이 세찬 빗줄기에 꺾일 듯 요동쳤다.

 

완월정 처마 끝으로 흘러내린 빗물은 이내 굵은 폭포수가 되어 바닥의 자갈돌을 세차게 튀겼다.

 

"야, 이거 장난 아니다! 완전히 게릴라성 폭우야!"

 

민재가 처마 밑으로 바짝 붙어서며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은은 발을 동동 구르며 시내 쪽을 바라보았다.

 

"큰일 났네. 우리 집 가게 앞에 내놓은 채소 바구니들 다 비 맞고 있을 텐데! 엄마 혼자서는 저거 다 못 들여놓을 텐데 어떡하지?"

 

하은의 어머니는 동문 시장 어귀에서 청과물 가게를 하고 있었다.

 

비가 오면 비가림막을 치지 못한 채소들이 물에 잠겨 썩어버리기 일쑤였다.

 

그 모습을 본 민재가 팔을 걷어붙이며 큰 소리로 외쳤다.

 

"하은아, 가자! 내가 가서 바구니 다 날라줄게! 내 자전거 뒤에 타!"

 

"뭐? 이 빗속에 자전거를 탄다고? 미쳤어?"

 

"걷는 것보다 백배는 빨라! 완월정 정리는 다 끝났으니까 여긴 재환이랑 지유한테 맡기고 얼른 뛰자고!"

 

민재는 지유와 재환을 돌아보며 눈짓을 보냈다.

 

"재환아, 지유 데리고 조심해서 삼거리 가게로 가라! 우린 먼저 튄다!"

 

"민재야, 비 조심해! 하은이 꼭 챙기고!"

 

재환의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민재와 하은은 방수포 하나를 머리 위로 함께 뒤집어쓴 채 빗속으로 내달렸다.

 

첨벙거리는 물소리와 함께 두 친구의 실루엣은 뿌연 빗줄기 너머로 순식간에 사라져 갔다.

 

순식간에 완월정에는 거센 빗소리와 함께 재환과 지유, 단둘만이 남겨졌다.

 

처마를 타고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요란한 와중에도,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하게 고요하고 밀도 높은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5. 빗속을 뚫고 달리는 발걸음

 

"지유야, 여기서 비가 잦아들길 기다리기엔 너무 늦어질 것 같아. 바람이 점점 세져서 정자 안쪽까지 빗물이 들이치고 있어."

 

재환이 처마 밑으로 들이치는 비바람을 등으로 막아서며 지유를 내려다보았다.

 

지유는 젖어가는 재환의 어깨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삼거리 가게 처마가 넓으니까 거기로 가는 게 낫겠어. 엄마 혼자 계실 텐데 가게 앞 차양도 걱정되고."

 

"좋아. 내 가방이랑 겉옷으로 스케치북 감싸 안아. 내가 앞장설 테니까 내 발자국만 보고 따라와."

 

재환은 자신의 겉옷을 벗어 지유의 머리와 어깨 위로 덮어씌워 주었다.

 

옷감에서 배어 나오는 재환의 따뜻한 체온과 은은한 비누 향기가 지유의 코끝을 스쳤다.

 

지유는 가슴이 두근거려 얼굴이 붉어졌지만, 어둑해진 날씨 덕분에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준비됐지? 하나, 둘, 셋!"

 

두 사람은 완월정 계단을 박차고 쏟아지는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줄기는 살갗을 아프게 때릴 정도로 거셌다.

 

흙탕물이 신발을 적시고 교복 바짓단이 무겁게 달라붙었지만, 재환은 지유의 작은 손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곁을 바짝 지키며 달렸다.

 

돌담길을 지나 춘향관 쪽문을 빠져나가는 동안, 재환은 온몸으로 빗바람을 막아내며 지유가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이끌었다.

 

"조심해, 지유야! 여기 돌부리 있어!"

 

지유가 빗물에 미끄러질 뻔하자 재환이 번개처럼 손을 뻗어 지유의 허리를 단단하게 받쳐 안았다.

 

순간적으로 밀착된 두 사람의 숨결이 빗소리 사이로 뜨겁게 엉켰다.

 

빗물에 젖은 지유의 맑은 눈망울이 재환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고마워, 재환아..."

 

지유의 가녀린 음성에 재환은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삼키며 다시 지유의 손을 감싸 쥐었다.

 

"조금만 더 가면 돼. 힘내."

 

요천 둑길을 가로질러 동문 우체국 뒷골목으로 접어들자, 저 멀리 빗물 안개 속에서 삼거리 김밥집의 낡은 간판이 희미한 형광등 불빛을 깜빡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6. 푸른 천막 아래의 피신

 

찰방거리는 물웅덩이를 건너 두 사람은 마침내 삼거리 김밥집 앞 처마 밑으로 뛰어들었다.

 

가게 앞에는 비바람을 막기 위해 길게 드리워진 짙은 푸른색 차양이 펄럭이고 있었다.

 

빗줄기가 차양의 두꺼운 천막을 타격하는 소리가 마치 드럼 연주처럼 둔탁하고 요란하게 울렸다.

 

"하아, 하아... 다 왔다."

 

재환은 지유를 처마 가장 안쪽, 비가 들이치지 않는 벽 쪽으로 밀어 넣은 뒤에야 비로소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두 사람의 교복은 이미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유는 가슴에 품고 있던 스케치북을 황급히 확인했다.

 

재환의 겉옷으로 꽁꽁 싸맨 덕분에 그림들은 거짓말처럼 단 한 방울의 물도 묻지 않은 채 온전했다.

 

"재환아, 그림 멀쩡해! 하나도 안 젖었어!"

 

지유가 아이처럼 기뻐하며 스케치북을 들어 보였다.

 

하지만 정작 그 그림을 지키기 위해 비를 온몸으로 받아낸 재환의 교복 셔츠는 속살이 비칠 정도로 젖어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빗물이 턱선을 따라 끊임없이 흘러내렸고, 소년의 입술은 서늘한 봄비의 한기에 살짝 파리해져 있었다.

 

"다행이다. 그거 젖었으면 오늘 네가 한 고생이 다 허사가 될 뻔했잖아."

 

재환은 거친 숨을 내쉬면서도 안도감 어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지유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왈칵 치밀어 올랐다.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깊고 뜨거운 감정이 작은 심장을 걷잡을 수 없이 두드렸다.

 

"바보같이... 너는 온통 다 젖었잖아. 입술까지 파랗게 질려서..."

 

지유의 눈가에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투명한 방울이 맺혔다.

 

지유는 교복 주머니를 뒤져 정갈하게 접어둔 하얀 손수건을 꺼냈다.

 

첫날 재환의 만년필을 소중하게 감싸 돌려주었던 바로 그 손수건이었다.

 

7. 손수건과 온기

 

지유는 떨리는 손길로 손수건을 들어 재환의 이마와 뺨에 흘러내리는 빗물을 조심스럽게 닦아내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면포의 감촉과 함께 지유의 가느다란 손가락 끝이 재환의 차가운 뺨에 스쳤다.

 

재환은 숨이 멎는 듯한 충격에 몸을 굳혔다.

 

코앞까지 다가온 지유의 젖은 속눈썹, 살구꽃 향기처럼 번져오는 지유의 숨결, 그리고 빗소리에 묻혀 희미하게 들려오는 서로의 가빠진 심장 소리.

 

세상의 모든 소음이 일순간에 지워지고, 오직 처마를 때리는 빗소리만이 두 사람을 감싸는 독점적인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내가 닦아도 되는데..."

 

재환이 낮게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지유의 손목을 가볍게 잡으려 했다.

 

하지만 지유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손수건을 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어 재환의 턱선과 목덜미를 정성스레 훔쳐냈다.

 

"가만히 있어. 나 때문에 비 다 맞았잖아."

 

지유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 맑은 눈동자 안에 오롯이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보며 재환은 더 이상 감정을 통제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지난 며칠 동안 가슴을 짓누르던 가문의 죄책감, 아버지의 어두운 비밀, 다가올 비극에 대한 공포가 지유의 따스한 손길 앞에서 눈 녹듯 사라져 갔다.

 

남아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눈앞에 서 있는 이 작고 단단한 소녀를 향한 주체할 수 없는 마음뿐이었다.

 

재환은 지유의 손목을 잡고 있던 자신의 손을 아래로 내려, 지유의 차가워진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깍지 끼워 넣었다.

 

탁, 하고 두 사람의 손바닥이 완전히 맞물렸다.

 

지유의 손길이 일순 멎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혔다.

 

빗줄기는 처마 끝에서 굵은 물줄기를 이루며 쏟아져 내렸고,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숨소리가 닿을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8. 비 내리는 처마 밑의 고백

 

"지유야."

 

재환의 목소리는 비바람 소리 속에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또렷하고 깊게 울렸다.

 

지유는 맞잡힌 손에서 전해져 오는 재환의 뜨거운 맥박을 느끼며 가만히 숨을 죽였다.

 

"나 말이야. 남원에 오기 전까지는 내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아버지가 정해준 그 높은 길을 왜 걸어가야 하는지 단 한 번도 진심으로 납득한 적이 없었어."

 

재환의 시선이 지유의 젖은 입술과 맑은 눈동자에 머물렀다.

 

"관사의 높은 담장 안에서 나는 늘 혼자였고, 그 차가운 서재는 나를 짓누르는 감옥 같았어. 그런데... 광한루 팽나무 아래에서 널 본 그 순간부터 내 세상이 전부 뒤바뀌었어."

 

지유의 눈가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너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됐어. 내가 왜 법을 공부해야 하는지, 왜 그 힘을 가져야 하는지."

 

재환은 잡고 있던 지유의 손을 조금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부서질세라 조심스러우면서도 결코 놓지 않겠다는 듯한 단호한 힘이었다.

 

"너를 지키고 싶어. 네가 흘렸던 눈물, 네 가슴에 맺힌 그 억울한 상처들... 내가 전부 씻어주고 싶어."

 

"재환아..."

 

지유의 떨리는 입술 사이로 재환의 이름이 나직이 흘러나왔다.

 

재환은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빗물이 처마 안쪽으로 들이쳐 재환의 등을 차갑게 적셨지만, 소년은 지유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그녀를 완전히 비바람으로부터 가려주었다.

 

"앞으로 어떤 비가 쏟아져도, 세상 모든 풍파가 너를 덮치려 해도... 내가 네 처마가 되어줄게."

 

재환의 눈동자에 푸른 불꽃 같은 맹세가 서려 있었다.

 

"내가 너를 지킬 거야. 어떤 비가 와도,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절대 네 손 놓지 않을게. 지유야, 널 좋아해."

 

쿵, 쿵, 쿵.

 

빗소리보다 더 거대한 심장 박동이 두 사람의 귓전을 가득 채웠다.

 

지유는 참아왔던 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빗물과 뒤섞여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소녀의 입가에는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나도야, 재환아."

 

지유가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까치발을 들었다.

 

"네가 잃어버렸던 그 만년필을 주워 들었을 때부터... 내 마음도 이미 너를 향해 달리고 있었어. 어떤 비가 와도, 나도 네 곁에 있을게."

 

소나기가 내리는 낡은 김밥집 처마 밑, 두 소년 소녀는 마침내 서로의 가슴에 가닿은 진심을 확인하며 단단하게 손을 맞잡았다.

 

빗물에 젖은 옷자락의 한기 따위는 두 사람의 맞닿은 온기 앞에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다.

 

9. 젖은 골목길에 드리운 그림자

 

빗줄기가 조금씩 잦아들며 굵은 물방울로 변해갈 무렵, 가게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덜커덕 소리와 함께 낡은 미닫이문이 열리며 지유의 어머니가 둥근 눈을 뜬 채 문밖을 내다보았다.

 

"어머나, 지유야! 이 빗속에 어디 갔다가 이제 와? 아이고, 총각도 꼴이 이게 뭐야! 둘 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네!"

 

어머니의 놀란 목소리에 지유와 재환은 흠칫 놀라며 잡고 있던 손을 황급히 풀었다.

 

지유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엄마! 완월정에서 축제 도면 정리하다가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서..."

 

"아이고, 말할 것 없다! 얼른 들어와! 감기 들면 큰일 난다. 총각도 어서 들어와요, 수건부터 줄 테니!"

 

지유 모는 두 사람의 등을 떠밀며 따뜻한 온기가 감도는 가게 안으로 이끌었다.

 

연탄난로 위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보리차의 구수한 냄새가 차가워진 공기를 포근하게 덥혀주었다.

 

지유 모가 내어준 마른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내는 동안에도, 재환과 지유는 서로의 눈을 마주칠 때마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방금 전 처마 밑에서 나눈 맹세는 두 사람의 영혼에 지워지지 않을 각인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 찬란한 온기도 잠시였다.

 

삼거리 김밥집 건너편, 빗물이 고인 어두운 골목 모퉁이에 검은색 고급 세단 한 대가 전조등을 끈 채 조용히 정차해 있었다.

 

차창의 짙은 선팅 너머로, 관사 운전기사의 날카로운 시선이 김밥집 안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뒷좌석에는 남원시청 비서실장의 굳은 얼굴이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비서실장은 무전기처럼 묵직한 차량용 무선전화기를 귀에 댄 채 낮게 읊조렸다.

 

"시장님, 도련님을 찾았습니다. ...예, 삼거리 그 김밥집에 들어가 있습니다. 지금 당장 데려가겠습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성호석 시장의 차갑고 서늘한 음성이 빗줄기를 가르고 전해졌다.

 

'내무부 감사관들이 남원에 도착했다. 지체할 시간 없다. 당장 끌고 와.'

 

뚝, 하고 통화가 끊겼다.

 

세단의 육중한 문이 열리며 검은 우산을 받쳐 든 사내들이 빗물이 고인 도로 위로 구둣발을 내디뎠다.

 

먹구름 낀 남원의 하늘 아래, 두 소년 소녀의 순수한 사랑을 집어삼킬 거대한 비극의 파도가 마침내 그 서늘한 아가리를 벌리고 다가오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