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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57화

차명 계좌의 꼬리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야간의 질주와 심야의 불빛

 

검은색 관용 세단은 젖은 아스팔트를 날카롭게 베어내며 남원 외곽을 향해 내달렸다.

 

차창을 때리는 빗줄기는 잦아들었으나, 지리산 자락에서 피어오른 짙은 밤안개가 헤드라이트 불빛을 둔탁하게 굴절시키고 있었다.

 

운전대를 쥔 대검 특수부 출신 강태훈 수사관은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의 성재환 검사를 살폈다.

 

재환은 묵묵히 무릎 위에 서류 가방을 얹어둔 채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단정한 턱선과 굳게 다문 입술 위로는 서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검사님, 골프장 진입로까지 이제 십 분 남았습니다."

 

강태훈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보고했다.

 

"남원상록골프장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왕복 2차선 지방도입니다. 입구 쪽에 사설 경비 초소가 서 있고, 안쪽 클럽하우스 별동은 지형 자체가 분지 형태라 외부 시선이 완벽하게 차단되는 곳입니다."

 

"외부 시선이 차단된다는 건, 안에서 벌어지는 짓도 그들만의 밀실에서 끝낼 수 있다는 뜻이지."

 

재환의 음성은 낮았으나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의 오른손 손가락 끝은 양복 안주머니에 꽂힌 백부의 유품,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을 천천히 매만지고 있었다.

 

캡 상단에 깊게 새겨진 라틴어 법언,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방금 전 삼거리 김밥집에서 마주했던 지유의 굳은살 박인 손, 그리고 어깨에 내려앉았던 애틋한 온기가 그의 가슴속에서 서슬 퍼런 칼날로 벼려지고 있었다.

 

지유가 7년 동안 겪어야 했던 그 끔찍한 고통과 어머니의 죽음, 부서진 유리창에 붙은 박스 테이프의 무게.

 

그 모든 비극의 대가로 저들은 산골짜기 호화로운 클럽하우스에서 양주잔을 부딪치며 죄를 지우려 하고 있었다.

 

"조동식 지청장이 내일 아침 여덟 시 반에 나를 호출한 이유도 명확해졌어."

 

재환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오늘 밤 이 골프장에서 전주지검 간부들과 강태석의 하수인들이 만나 모종의 거래를 끝내겠다는 뜻이다. 내일 아침이면 구속적부심 인용 의견서나 공소유지 불가에 따른 직무 배제 명령이 내려오겠지. 그들이 판을 짜놓고 나를 부르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 판을 엎어야 한다."

 

"하지만 검사님, 영장 없이 골프장 사유지 내부를 급습하는 것은 역공의 빌미가 될 수 있습니다. 상대 쪽엔 전주지검 차장이나 부장급 인사들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강태훈의 우려 섞인 조언에 재환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현장을 덮쳐 그자들의 멱살을 잡으려는 게 아니다. 자정에 모인다는 건 돈이 오간다는 뜻이고, 그 돈이 움직인 궤적을 밟는 것이 이번 작전의 핵심이다. 계좌추적팀에는 연락을 취해 두었나?"

 

"예, 본청 특수부에서 내려온 계좌추적 전담 수사관 두 명이 지금 남원상호신용금고 본점 전산실과 남원지청 204호에 나뉘어 대기하고 있습니다. 유성골재 경리 정미숙 주임이 넘긴 차명 입출금 일지와 배동진 대표에게서 압수한 대외 협력비 원장을 대조하는 작업이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세단이 급커브를 돌자, 빽빽한 편백나무 숲 너머로 높다란 철제 게이트와 붉은 벽돌 경비 초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원상록골프클럽(南原常綠Golf Club)'.

 

금빛 양각 현판 아래, 차단기가 내려진 채 사설 경비원 두 명이 우비를 입고 플래시를 비추며 경계를 서고 있었다.

 

어둠 속에 잠긴 산길 한쪽에 벤츠와 그랜저, 로얄 살롱 등 최고급 대형 세단 대여섯 대가 은밀히 주차장을 향해 미끄러져 들어가는 광경이 포착되었다.

 

"차를 저쪽 임도 풀숲에 대라."

 

재환이 지시했다.

 

"지금부터는 꼬리를 밟는다. 저들이 무엇으로 사법부를 매수하려 하는지, 그 자금의 실체를 파헤친다."

 

2. 어둠 속의 비밀 회동

 

헤드라이트를 끄고 짙은 수풀 뒤로 숨어든 관용차 안에서, 강태훈 수사관이 고성능 야간 망원경을 들어 올렸다.

 

클럽하우스 2층 난초실의 널찍한 통유리창 너머로 따뜻한 주황색 조명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유리창 안쪽에서는 최고급 한식 연회가 차려져 있었고,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보입니다, 검사님."

 

강태훈이 렌즈의 초점을 맞추며 이를 악물었다.

 

"테이블 상석에 앉은 자는 전주지검 강력부장이자 차장검사 직무대리인 고진태입니다. 그 맞은편에 남원지원 형사단독 송 계장과 친분이 두터운 관내 부장판사 출신 전관 변호사 하영목이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강태석의 비서실장과 처남 조상태가 보입니다."

 

재환은 조수석 글러브 박스에서 소형 망원경을 꺼내 직접 눈에 가져다 댔다.

 

선명하게 잡힌 렌즈 속 풍경은 가히 역겨울 정도로 적나라했다.

 

수백 명의 수재민이 임시 대피소의 차가운 바닥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지유가 깨진 유리창 틈으로 들이치는 칼바람을 맞으며 밤을 새우던 바로 그 시각이었다.

 

강태석의 처남 조상태는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고진태 부장검사의 잔에 12년산 양주를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발치 옆, 바닥에 놓인 두 개의 묵직한 검은색 가죽 보스턴백이 재환의 시선에 걸렸다.

 

가죽 가방의 지퍼 틈새로 살짝 삐져나온 띠지 묶음.

 

5만 원권이 없던 1990년대 중반, 1만 원권 신권 다발로 꽉 채워진 현금 뭉치였다.

 

"현금 가방입니다."

 

강태훈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정도 부피면 가방 하나당 최소 3억에서 5억, 두 개면 10억에 달하는 거액입니다. 구속적부심 인용을 위한 사법 로비 자금이 틀림없습니다."

 

재환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저 현금이 어디서 나왔겠나. 유성골재에서 빼돌린 14억 원, 그리고 요천 수변공원 제방 공사비에서 빼돌린 40억 비자금의 일부다. 강태석이 전주교도소 독방에서 비밀 전화로 지시한 로비 자금의 실체가 바로 저것이다."

 

바로 그때, 재환의 정장 안주머니에서 무전기 크기의 카폰 수화기가 날카로운 신호음을 울렸다.

 

재환은 망원경을 내리고 신속하게 수화기를 귀에 대었다.

 

"성재환입니다."

 

치직거리는 잡음 너머로, 남원지청 204호에 잔류한 계좌추적팀 박철민 수사관의 긴박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검사님!

 

계좌추적팀 박 수사관입니다!

 

방금 남원상호신용금고 본점 전산 데이터와 유성골재 이중 장부, 배동진 대표의 차명 계좌 12개를 전부 교차 검증해 맞췄습니다!

 

드디어 요천 제방 1공구 공사비 횡령액 40억 중, 공중으로 증발했던 20억 원의 최종 세탁 경로를 찾아냈습니다!

 

재환의 심장이 차갑게 요동쳤다.

 

"경로가 어디로 이어지나?"

 

- 놀랍게도 단순 하도급 업체가 아니었습니다.

 

남원시청 건설과 및 도로교통과 간부들의 직계 친인척 명의로 개설된 6개의 유령 차명 계좌를 거쳐…… 단 사흘 만에 전액 현금으로 쪼개져 인출되었습니다!

 

그 인출자들의 주민등록번호와 배후를 추적한 결과, 종착지는 단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누군가?"

 

- 강태석 시장의 오랜 그림자이자, 남원상호신용금고 전무로 앉아 있는 비선 자금 관리인 '임종식'입니다!

 

지금 즉시 지청으로 복귀하셔야 합니다.

 

이 자금 흐름도만 있으면 내일 아침 지청장의 직무 배제 지시는 물론, 저 골프장의 사법 거래 현장까지 한 번에 쓸어버릴 영장을 칠 수 있습니다!

 

재환은 클럽하우스 2층 창가를 다시금 매섭게 올려다보았다.

 

그들의 썩은 미소와 술잔 뒤로, 거대한 거악의 퍼즐 조각이 마침내 완벽하게 들어맞고 있었다.

 

"강 수사관, 차 돌려라."

 

재환이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낮게 명령했다.

 

"지청으로 간다. 새벽이 오기 전에, 저들이 상상조차 못 할 압수수색 영장과 체포영장을 완성한다."

 

3. 20억 원의 붉은 궤적

 

자정을 넘긴 시각, 전주지방검찰청 남원지청 204호 특별수사전담 검사실.

 

방 안은 뿜어져 나오는 담배 연기와 갓 출력된 복사 용지의 시큼한 화학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책상 세 개를 길게 이어 붙인 대형 회의 탁자 위에는 남원상호신용금고 전산 원장 출력물 수백 장과 유성골재의 이중 비밀 장부, 그리고 붉은색 형광펜으로 줄이 그어진 계좌 흐름도가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검사님, 오셨습니까!"

 

계좌추적팀의 박철민 수사관과 최민재 기자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재환을 맞이했다.

 

민재는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채 벽면에 대형 전지(全紙)를 압정으로 고정하고 있었다.

 

그 전지 한가운데에는 굵은 매직으로 적힌 글자가 선명했다.

 

[요천 수변공원 제방 공사비 40억 원 횡령 및 자금 세탁 구조도].

 

재환은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치고 곧바로 탁자 앞으로 다가섰다.

 

"박 수사관, 자금 세탁의 구체적인 방식을 보고해."

 

박 수사관이 안경을 고쳐 쓰며 두툼한 바인더를 펼쳤다.

 

"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남원시청이 요천 수변공원 제1공구 시공사로 선정한 '동서개발'과 하도급을 독점한 '남원 제1건설'에 지급한 기성금은 총 40억 원이었습니다. 이 중 14억 원은 앞서 확보한 유성골재의 가짜 세금계산서를 통해 저질 골재 차액으로 현금화되어 강태석 시장 관사로 직접 흘러 들어갔습니다. 문제는 나머지 26억 원 중 행방이 묘연했던 20억 원이었습니다."

 

박 수사관의 손가락이 전지 벽면의 복잡한 화살표를 짚었다.

 

"배동진 대표는 이 20억 원을 '현장 장비 임대료' 및 '준공 검사 감리 보상비' 명목으로 위장해 세창물산과 호남엔지니어링이라는 두 개의 페이퍼 컴퍼니로 송금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진짜 꼬리가 시작됩니다. 두 유령 회사는 돈이 입금된 당일 오후, 남원상호신용금고 동문지점에 개설된 6개의 차명 계좌로 3억에서 4억 원씩 분산 이체했습니다."

 

"그 6개 계좌의 명의자가 누구였지?"

 

재환의 서늘한 질문에 박 수사관이 명단을 담은 A4 용지를 내밀었다.

 

"남원시청 건설과장 조두만의 처남, 도로교통과 계장 김상태의 사촌 형, 그리고 도시계획과 실무 주임들의 인척 명의였습니다. 시청 인허가 결재 라인에 포진한 핵심 간부들의 친인척 명의를 그대로 도용한 겁니다."

 

탁자 옆에서 취재 수첩을 넘기던 최민재가 분통을 터뜨리며 말을 보탰다.

 

"지유네 김밥집을 부수려고 새벽부터 계고장을 들고 난입했던 그 김상태 계장 놈의 집안도 얽혀 있었던 겁니다! 공무원들이 자기 도장 찍어주는 대가로 공사비 횡령의 통로를 열어주고, 그 대가로 차명 계좌를 빌려준 겁니다."

 

"그리고 그 돈을 인출한 방식은?"

 

재환이 서류를 넘기며 물었다.

 

"철저한 쪼개기 수법이었습니다."

 

박 수사관이 계좌 거래 내역표를 손끝으로 두드렸다.

 

"금융정보분석원의 고액 현금 거래 보고 기준을 피하기 위해, 동일 날짜에 990만 원씩 수십 회에 걸쳐 전액 현금으로 인출했습니다. 창구 전표에 서명된 필적은 단 한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남원상호신용금고 전무이자 강태석 시장의 사촌 자형인 비선 금고지기, '임종식'이었습니다."

 

박 수사관이 서류철 밑바닥에서 빼낸 한 장의 문서를 탁자 중앙에 내려놓았다.

 

그것은 남원상호신용금고 VIP 금고 대여 원장 사본이었다.

 

"임종식 전무는 인출한 현금 20억 원을 전액 신권 1만 원권 다발로 묶어, 상호신용금고 지하 2층 비밀 대여금고 제7호에 보관해 왔습니다. 그리고 지난 일주일간, 이 금고에서 수억 원씩 현금이 반출된 기록이 확인되었습니다. 그 출납 일시가…… 배동진이 도주하던 날, 그리고 오늘 밤 자정 남원상록골프장 회동 시간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검사실 안의 공기가 얼어붙듯 가라앉았다.

 

골프장 2층 통유리창 너머로 보았던 그 두 개의 묵직한 검은색 가죽 보스턴백.

 

전주지검 부장검사와 전관 변호사들의 발치에 놓여 있던 그 돈의 정체가 마침내 백일하에 드러난 순간이었다.

 

"결국 제방을 무너뜨려 시민들을 수마에 빠뜨린 그 피 묻은 돈으로, 사법부의 입을 틀어막으려 한 거로군."

 

재환의 눈동자에 푸른 불꽃이 일렁였다.

 

그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검은 옻칠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캡을 돌려 열자, 지유가 채워주었던 깊고 푸른 흑청색 잉크의 향이 은은하게 번져 나왔다.

 

"박 수사관, 강 수사관."

 

재환의 명료한 명령이 정적을 깼다.

 

"지금 즉시 남원상호신용금고 본점 및 임종식 전무의 자택, 그리고 비밀 대여금고 제7호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작성해라. 피의자 임종식에 대해서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공여 및 업무상 횡령 공범 혐의로 체포영장을 청구한다."

 

"검사님!"

 

박 수사관이 놀라며 되물었다.

 

"지금 영장을 청구하면 법원 야간 당직실을 거쳐야 합니다. 남원지원 송진호 계장 같은 내부 첩자가 또 정보를 흘릴 위험이 있습니다!"

 

"아니, 이번엔 남원지원을 거치지 않는다."

 

재환이 만년필을 쥐고 공소 사실 요지서 상단에 힘차게 글자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종이를 가르는 만년필 촉의 소리가 마치 출진을 알리는 북소리처럼 울렸다.

 

"이 사건은 단순한 지방 토착 비리가 아니라, 대검 특별수사본부가 관할하는 권력형 금융 비리 사건이다. 전주지방법원 본원 영장전담재판부로 직접 인편을 보내 직통 결재를 받는다. 새벽 다섯 시까지 영장을 발부받아, 아침 여덟 시 상호신용금고 셔터가 올라가는 순간 금고를 통째로 뜯어낸다."

 

4. 어둠을 뚫고 온 불청객

 

새벽 세 시 반.

 

남원 시내를 뒤덮었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검푸른 새벽하늘 아래로 차가운 서리가 내려앉고 있었다.

 

남원지청 204호 검사실에서는 타자기 소리와 팩스 송수신음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성재환은 붉게 물든 눈으로 A4 용지 서른 장에 달하는 영장 청구서의 마지막 장에 서명을 마쳤다.

 

'전주지방검찰청 검사 성재환'.

 

지유의 흑청색 잉크로 적힌 그의 서명 위로 붉은 인주 압인이 선명하게 찍혔다.

 

바로 그때, 굳게 닫혀 있던 검사실 문이 거칠게 벌컥 열렸다.

 

"성재환 검사!"

 

쩌렁쩌렁 울리는 분노에 찬 목소리와 함께, 남원지청장 조동식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평소의 단정한 머리칼은 헝클어져 있었고, 급하게 걸쳐 입은 양복 깃 사이로 술 냄새가 훅 풍겼다.

 

그의 뒤편 복도에는 남원지청 총무과 계장과 방호원들이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었다.

 

"지청장님."

 

재환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손에 쥔 만년필을 서류철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으며 그를 차갑게 쳐다보았다.

 

"내일 아침 여덟 시 반에 호출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새벽부터 검사실에 무슨 용무이십니까."

 

조동식은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남원상호신용금고의 금융 전산 전표들과 벽면의 자금 세탁 구조도를 보더니 사색이 되었다.

 

그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거칠게 흔들렸다.

 

"이…… 이게 다 무슨 짓인가! 남원 제1건설 수사로 관내를 발칵 뒤집어 놓은 것도 모자라, 이제는 지역 서민들의 젖줄인 상호신용금고까지 쑤셔대겠다는 건가? 자네 지금 제정신이야?"

 

조동식이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고함을 질렀다.

 

"지금 서울 대검과 법무부에서 어떤 전화가 내려오고 있는지 아는가? 자네 친부인 성호석 차관님은 물론이고, 국회 내무위원장 김문현 의원실에서 지청으로 직접 항의가 빗발치고 있어! 사법고시 갓 패스하고 연수원 수석 좀 했다고 해서 세상 물정을 몰라도 분수가 있지, 감히 누구 목을 베겠다고 칼을 휘두르는 거야!"

 

재환의 입가에 서늘한 냉소가 번졌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조동식 지청장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키가 머리 하나는 더 큰 재환이 품어내는 압도적인 기세에, 길길이 날뛰던 조동식의 숨이 턱 막히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지청장님, 옷깃에서 지리산 솔잎 냄새와 12년산 스카치위스키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재환의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검사실을 무겁게 짓눌렀다.

 

"남원상록골프장 2층 난초실의 공기가 참으로 아늑했던 모양입니다."

 

조동식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입술을 바들바들 떨며 뒷걸음질 치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범죄자의 그것이었다.

 

"자, 자네…… 그걸 어떻게……!"

 

"고진태 부장검사와 하영목 변호사, 그리고 강태석의 처남 조상태가 앉아 있던 그 술자리에 지청장님도 함께 계셨더군요."

 

재환이 책상 위에서 사진 한 장을 집어 들어 조동식의 눈앞에 내밀었다.

 

불과 한 시간 전, 강태훈 수사관이 야간 망원 렌즈로 촬영해 현상한 흑백 사진이었다.

 

사진 속에는 조상태가 건네는 검은색 가죽 보스턴백을 건네받으며 흡족하게 웃고 있는 조동식 지청장의 얼굴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이…… 이건 모함이야! 난 그저 관내 유관기관 간담회에……!"

 

"그 가방 안에 든 현금 5억 원이 유관기관 간담회 비용입니까?"

 

재환의 서슬 퍼런 일갈이 조동식의 말을 단칼에 베어냈다.

 

"요천 제방 붕괴로 집을 잃은 하정리 노인들과 동충동 상인들의 피눈물입니다! 강태석 일파가 철근을 빼돌리고 모래를 섞어 챙긴 그 20억 원의 비자금이, 지금 지청장님과 골프장에 모인 자들의 주머니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검찰청법 제4조, 검사는 공익의 대표자로서 정의와 인권을 수호해야 한다. 지청장님께서는 지금 검사입니까, 아니면 토건 조폭의 장학생입니까?"

 

검사실 안은 쥐 죽은 듯한 침묵에 휩싸였다.

 

박철민 수사관과 최민재는 주먹을 불끈 쥐며 조동식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조동식은 목덜미를 부여잡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재환을 향해 핏발 선 눈을 부라렸다.

 

"성재환…… 네가 기어이 파멸을 자초하는구나. 내일 아침 여덟 시 반, 대검 정식 공문으로 네 특별수사전담 직무 정지 명령이 내려올 것이다. 네 아버지 성호석 차관이 직접 서명한 인사 조치 공문이다!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넌 내일 아침이면 단 한 장의 영장도 청구할 수 없는 일개 수험생 껍데기로 돌아갈 뿐이야!"

 

"직무 정지 공문이 도착하는 시각이 아침 여덟 시 반이라고 하셨습니까?"

 

재환이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초침이 새벽 세 시 사십오 분을 가리키며 쉼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게는 아직 네 시간 사십오 분이 남아 있군요."

 

재환의 얼굴에는 일말의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었다.

 

오직 바위처럼 굳건한 정의의 결기만이 서려 있을 뿐이었다.

 

"그 네 시간 동안, 나는 남원상호신용금고의 문을 부수고 20억 원의 비자금 원장을 압수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청장님을 포함해 그 돈을 받아 챙긴 자들의 손목에 내 손으로 직접 수갑을 채울 겁니다."

 

"성재환!"

 

조동식의 비명 같은 절규를 뒤로한 채, 재환은 책상 위의 결재 서류철을 덮어 강태훈 수사관에게 넘겼다.

 

"강 수사관, 전주지법으로 출발해라. 나는 지금 즉시 남원상호신용금고 본점으로 간다."

 

5. 여명 속의 금고, 그리고 드러난 진실

 

새벽 다섯 시 반.

 

동쪽 지리산 능선 너머로 희미한 푸른 여명이 번져오기 시작했다.

 

남원 시내 중심가, 육중한 화강암으로 지어진 남원상호신용금고 본점 앞마당에 검찰 호송 버스 한 대와 대검 특수부 관용 세단 세 대가 굉음을 울리며 급정거했다.

 

끼이익!

 

차 문이 열리며 방탄조끼를 착용한 검찰 수사관 스무 명이 신속하게 대열을 갖추고 건물을 포위했다.

 

건물 앞을 지키던 청원경찰들이 기겁하며 몽둥이를 집어 들었으나, 앞장서 걸어 나오는 성재환 검사의 위압적인 기세에 질려 뒷걸음질을 쳤다.

 

"검찰입니다. 전원 움직이지 마십시오!"

 

강태훈 수사관이 메가폰을 잡고 외쳤다.

 

"전주지방법원이 발부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 및 뇌물공여 피의사건 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합니다! 출입문을 개방하십시오!"

 

철커덕, 쿵!

 

수사관들이 굳게 닫혀 있던 유리 출입문의 자물쇠를 절단기로 끊어내고 로비로 진입했다.

 

비상벨이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2층 임원실에서 잠을 자고 있던 비선 금고지기 임종식 전무가 셔츠 바람으로 허겁지겁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이, 이게 무슨 짓들이야!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새벽부터 들이닥쳐! 내가 남원시장 강태석의 친척이야! 당장 지청장 불러!"

 

임종식이 삿대질하며 발악했으나, 재환은 서늘한 눈빛으로 그에게 다가가 품에서 푸른색 간인이 찍힌 체포영장을 펼쳐 보였다.

 

"남원상호신용금고 전무 임종식. 당신을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방조 및 배임, 뇌물공여 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찰칵!

 

강태훈 수사관의 차가운 쇠 수갑이 임종식의 양 손목을 인정사정없이 죄어 들어갔다.

 

"수갑 채워! 그리고 지하 2층 비밀 대여금고로 간다!"

 

재환의 추상같은 호령에 수사관들이 임종식을 앞세우고 지하로 통하는 육중한 철문을 열어젖혔다.

 

지하 2층 금고실은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차가운 쇠 냄새가 엉겨 붙어 있었다.

 

수백 개의 대여금고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가운데, 가장 안쪽 모퉁이에 자리 잡은 육중한 다이얼식 특수 금고 제7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열어."

 

재환이 임종식의 멱살을 잡고 금고 앞으로 밀어붙였다.

 

"마스터키와 비밀번호를 대라."

 

"모, 모릅니다! 난 그냥 관리만 했을 뿐…… 시장님이 직접 관리하시는 금고라 난 번호를 몰라요!"

 

임종식이 사시나무 떨듯 떨며 발뺌했다.

 

재환은 차가운 눈빛으로 금고 옆 다이얼을 응시했다.

 

'강태석이 사용할 비밀번호.'

 

재환의 뇌리 속에서 지난 7년간 수집했던 강태석의 모든 신상 정보와 비리 연표가 전광석화처럼 스쳐 지나갔다.

 

1991년 환지 비리 사건의 날짜, 강태석의 취임일, 그리고…….

 

재환은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탁, 타닥, 틱.

 

마지막 번호가 맞아떨어지는 순간, '철컥' 하는 둔탁한 금속 마찰음과 함께 육중한 금고 문이 천천히 앞으로 벌어졌다.

 

"열렸다!"

 

수사관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금고 문을 활짝 젖히자, 내부의 광경이 드러났다.

 

선반 위에는 채 반출되지 못한 수십억 원 상당의 1만 원권 신권 다발들이 벽돌처럼 빼곡하게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돈다발 한가운데, 붉은 인주가 찍힌 두툼한 가죽 서류철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재환은 떨리는 손을 뻗어 그 서류철을 꺼내 들었다.

 

표지에는 굵은 붓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남원 구도심 개발 및 요천 정비사업 비자금 차명 분배 원천 대장].

 

서류철의 첫 장을 넘긴 순간, 계좌추적팀 박 수사관이 숨을 들이켰다.

 

거기에는 20억 원의 현금이 인출되어 누구의 손으로 흘러 들어갔는지가 날짜와 액수, 수령인의 서명까지 1원의 오차도 없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다.

 

[1996년 8월 22일 - 전주지검 고진태 차장검사 직무대리: 5억 원(현금 보스턴백 전달)]

 

[1996년 8월 22일 - 남원지청장 조동식: 3억 원(골프장 접견실 현금 전달)]

 

[1996년 8월 23일 - 국회 내무위원장 김문현 의원실 보좌관: 10억 원(무기명 CD 교환 및 전달)]

 

남원을 지배해 온 토착 토건 권력과, 그들을 비호하던 사법부, 그리고 중앙 정치권의 거물들이 하나의 검은 사슬로 묶여 있는 완벽한 증거였다.

 

그러나 그 명단의 가장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순간, 성재환의 숨이 그대로 멎어버렸다.

 

서류철 맨 뒷장, 특수 비자금 배정 난에 적힌 이름.

 

그 석 자를 확인한 재환의 눈동자가 극심한 고통과 분노로 세차게 흔들렸다.

 

[내무부 차관 성호석 - 1991년 환지 지분 보상 및 대선 정무 활동비 명목: 20억 원권 약속어음 배서 교부].

 

자신의 친아버지.

 

자신에게 법복을 입고 가문을 지키라 명했던 그 아비의 이름이, 가장 추악한 비자금의 정점에 선명하게 날인되어 있었다.

 

"검사님……."

 

강태훈 수사관이 참담한 표정으로 재환을 바라보았다.

 

재환은 두 눈을 감았다.

 

가슴이 찢겨 나가는 비극적 격통이 온몸의 혈관을 타고 번졌다.

 

하지만 눈을 다시 떴을 때, 그의 눈동자에는 한 점의 망설임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시퍼렇게 날이 선 서슬 퍼런 정의만이 번뜩이고 있었다.

 

재환은 안주머니에서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친부 성호석의 이름 바로 옆에, 지유의 흑청색 잉크로 단호하게 기소 대상자 압류 집행 번호를 적어 넣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광한루원에서, 그리고 요천 둑길에서 지유에게 맹세했던 그 약속.

 

피 흘리는 무릎으로 자신을 기다려 준 여인을 위해, 그리고 불의에 짓밟힌 수많은 약자들을 위해, 그는 가문의 심장이라 할지라도 도려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전 수사관, 들어라."

 

재환의 목소리는 지하실의 얼어붙은 공기를 깨뜨리며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

 

"비자금 대장 원본과 현금 전액을 지청으로 압송한다. 그리고 조동식 지청장 집무실과 서울 성북동 내무부 차관 사저에 대한 긴급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한다."

 

그 시각, 아침 여덟 시의 사이렌이 남원 시내 전역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남원을 뒤흔들 거대한 사법 심판의 폭풍이 마침내 시작되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