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길의 산책
1. 어둠이 내린 골목의 한숨
한낮의 맹렬했던 흙먼지와 쇠 긁히는 굉음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남원 시내를 집어삼킬 듯 포악하게 뿜어져 나오던 굴착기 엔진의 매캐한 매연 냄새도 어느덧 서늘한 밤공기에 흩어져 사라졌다.
동문 우체국 뒷골목의 낡은 가로등은 희미한 주황빛을 깜빡이며 깨지고 파헤쳐진 아스팔트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낮 동안 용역들의 군홧발과 시청 철거반의 몽둥이에 짓밟혔던 자리는 시장 상인들이 힘을 합쳐 말끔히 쓸어낸 뒤였다.
부서진 시멘트 벽돌 조각과 찢긴 비닐 차양막을 한데 모아 손수레에 싣던 배 씨와 김 씨도 이웃들의 다친 곳을 서로 보살피며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삼거리 김밥집의 찌그러진 알루미늄 문을 닫아걸자, 골목 안에는 오직 처마 끝에 매달린 놋쇠 풍경만이 서늘한 가을바람을 타고 맑고 파르스름한 쇳소리를 냈다.
지유는 조리대 앞에 멍하니 선 채 자신의 떨리는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 안쪽에는 굴착기의 육중한 쇠 버킷이 처마를 부수려던 절체절명의 순간 기둥을 악착같이 부여잡았던 붉은 쓸림 자국이 여전히 화끈거리고 있었다.
만약 그 정오의 순간, 허공을 가르며 지축을 울리던 검은 관용차와 빗발치듯 꽂히던 차가운 법원의 결정문이 아니었다면 이 작은 터전은 이미 산산조각이 나 잿더미가 되었을 터였다.
문밖에서 익숙하고도 단정한 구두 굽 소리가 낮게 울렸다.
규칙적이고 군더더기 없는 걸음걸이.
지유의 심장이 저도 모르게 덜컥 내려앉으며 맥박이 가파르게 뛰기 시작했다.
유리창 너머로 감청색 코트 차림의 길쭉하고 꼿꼿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남원지청 204호 검사실에서 밤늦도록 전주교도소의 통화 일지와 차명 계좌의 흐름을 쫓고 있었을 그 사람이었다.
"지유야."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문틈을 넘어 흘러들었다.
지유는 낡은 앞치마에 서둘러 손을 문질러 닦고는 자물쇠를 돌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차가운 밤바람과 함께 옅은 잉크 냄새, 그리고 수많은 공문서철 특유의 서늘한 종이 냄새를 품은 성재환이 서 있었다.
그의 넓은 어깨 위에는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자만이 지닐 수 있는 팽팽한 긴장과 피로가 짙은 그림자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짙은 눈동자만큼은 칠흑 같은 남원의 어둠 속에서도 한 자루의 서슬 퍼런 칼날처럼 형형하게 살아 빛났다.
"재환아…… 지청에서 아직 일이 다 안 끝난 거 아니었어?"
지유가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재환은 대답 대신 가게 안을 천천히, 그리고 아주 아프게 둘러보았다.
박스 테이프로 얼기설기 기워 붙인 통유리창, 낮의 소동으로 살짝 비틀려 기운 식탁 다리, 그리고 텅 빈 주방 한가운데 홀로 우두커니 서 있던 지유의 마른 어깨가 그의 시선에 고스란히 담겼다.
재환의 미간이 가늘게 떨렸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죄책감과 분노를 억누르려는 듯, 그가 숨을 길게 들이쉬며 주먹을 쥐었다.
"김상태 계장에 대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 피의자 조서 작성을 마쳤어. 불법 무선전화를 반입했던 교도관 이진택의 신병과 자백도 완벽하게 확보했고."
재환이 담담하게 말을 뱉었지만, 그 짧은 문장 속에 서려 있는 서슬 퍼런 사법적 결기는 결코 숨겨지지 않았다.
"불안해서 검사실에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더군. 가게는…… 정말 별일 없었지?"
"다들 도와주셔서 다 치웠어. 배 씨 아저씨랑 김 씨 아주머니가 부서진 간판 모서리도 굵은 철사로 단단히 묶어주고 가셨고."
지유가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애써 목소리를 밝게 꾸며냈다.
하지만 재환의 날카로운 눈길은 지유가 등 뒤로 슬그머니 감추려던 오른손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재환이 성큼 다가가 망설임 없이 지유의 가녀린 손목을 부드럽게 붙잡아 앞으로 끌어당겼다.
거칠게 긁히고 붉게 부어오른 손바닥이 백열등 불빛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재환의 턱관절이 부서질 듯 굳게 다물어졌다.
"낮에 다친 거로군."
"아니야, 기둥 잡다가 살짝 스친 것뿐이야.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지유가 당황하며 손을 빼내려 했지만 재환은 손아귀의 힘을 풀지 않은 채 코트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새하얗고 정갈하게 다려진 면 손수건.
7년 전 여름날, 폭우가 쏟아지던 낡은 처마 밑에서 지유가 재환의 젖은 머리칼과 교복 옷깃을 정성껏 닦아주었던 바로 그 온기를 품은 결이었다.
재환은 아무런 말도 없이 지유의 쓸린 손바닥을 부드러운 천으로 감싸 쥐었다.
그의 단단한 손끝은 수많은 서류를 넘기고 영장을 집행할 때의 냉철함과는 전혀 다른, 금방이라도 깨어질세라 조심스러운 떨림을 머금고 있었다.
지유는 코끝이 찡하게 아려오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이 가게가 무너지면 나도 완전히 무너져 내릴 것 같았어. 그래서 한 발짝도 물러설 수가 없었어, 재환아."
"알아. 하지만 네가 다치는 걸 보려고 내가 7년 만에 법복을 입고 이 남원에 내려온 게 아니다."
재환의 목소리가 억눌린 고통으로 낮게 젖어 들었다.
"밖으로 나가자. 잠깐이라도 바람을 쐬어야겠어."
지유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가게 불을 끄고 재환의 뒤를 따라나섰다.
2. 돌담길에 깃든 7년의 기억
두 사람은 말없이 나란히 걸어 광한루원(廣寒樓苑) 담장 길로 접어들었다.
남원의 밤은 깊었고, 시내의 소음은 저 멀리 요천(蓼川) 너머로 아득히 물러나 고요했다.
오래된 황토와 짚을 섞어 정갈하게 쌓아 올린 광한루원의 기와 돌담은 창백한 달빛을 받아 은은한 회백색으로 빛났다.
담장 너머로는 수령 수백 년 된 팽나무와 축 늘어진 수양버들 가지들이 초가을 밤바람에 사각거리며 잎을 부딪쳤다.
7년 전, 열여덟의 소년과 소녀가 수줍게 나란히 걷던 바로 그 길이었다.
그때는 푸른 남색 교복 차림이었고, 옷자락만 스쳐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달아오르던 찬란한 봄날이었다.
하지만 지금 두 사람 사이에는 7년이라는 잔혹한 세월의 골짜기와, 피와 눈물로 얼룩진 수많은 상처가 가로놓여 있었다.
재환은 자신의 감청색 코트 안쪽에 묵직하게 자리한 만년필의 서늘한 감촉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서울 명문 로스쿨을 졸업한 백부에게 물려받아, 지유가 선물했던 흑청색 잉크를 가득 머금고 수천 장의 고시 답안지를 채워 내려갔던 독일제 만년필.
그 금빛 닙 캡 상단에 새겨진 라틴어 법언 'Fiat justitia, ruat caelum'이 오늘따라 가슴을 서늘하게 찔러왔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그 서글프고도 엄중한 정의를 세우기 위해 청춘을 바쳐 내달려온 끝에 마주한 진실은 너무도 참혹했다.
자신의 아비인 성호석 차관이 옥중의 조폭 출신 시장 강태석과 결탁해 이 모든 비극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었다는 잔인한 현실.
재환의 걸음이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감출 수 없이 무거워졌다.
지유는 곁에서 묵묵히 걷는 재환의 굳은 옆모습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낮에 굴착기 앞을 가로막을 때 뿜어내던 서슬 퍼런 검사의 위압감 뒤편에, 홀로 모든 고통을 짊어진 한 청년의 고독이 짙게 배어 있었다.
"재환아."
지유가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재환이 걸음을 늦추며 지유를 내려다보았다.
"지청에 돌아가서…… 힘든 일 있었지?"
지유의 맑고 깊은 눈동자가 달빛을 오롯이 담고 있었다.
그 정직한 눈빛을 마주하자 재환은 가슴속에 굳게 채워두었던 빗장이 일순간 헐거워지는 듯한 예리한 통증을 느꼈다.
교도관 이진택이 넘긴 노란색 비밀 통화 일지.
거기 선명하게 적혀 있던 서울 성북동 사저와 내무부 차관 집무실의 직통 유선 전화번호.
그리고 그 번호 옆에 강태석의 비열한 지령과 함께 날짜별로 빼곡히 적혀 있던 친부의 이름 석 자.
그 모든 것을 이 맑고 가녀린 소녀에게 어떻게 털어놓을 수 있을까.
30년 전 아버지 한석규의 과수원을 헐값에 강탈하고 지유의 집안을 풍비박산 낸 원수 중 한 명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차마 지금 이 자리에서 꺼내놓을 수는 없었다.
"수사는 순조로워. 증거는 이미 차고 넘칠 만큼 모였고, 강태석의 숨통은 내가 틀어쥐고 있다."
재환은 감정을 억누르며 낮게 속삭였다.
하지만 지유는 고개를 가만히 가로저었다.
"그런 거 말고…… 네 마음이 다치고 있는 거잖아."
지유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광한루원 서문 쪽 돌담 모퉁이, 달빛조차 들지 않는 짙은 고목의 그늘 아래였다.
"낮에 네가 관용차에서 내려 뛰어왔을 때…… 네 눈을 봤어. 굴착기를 막아서고 그 무서운 사람들을 향해 소리칠 때, 넌 영락없는 검사님 같았지만…… 내 눈엔 7년 전 남원역 승강장에서 기차 창문에 손을 대고 피눈물을 흘리던 그 소년으로 보였어."
지유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난 바보가 아니야, 재환아. 강태석이라는 사람이 왜 감옥 안에서까지 우리 가게를 부수려 했는지, 왜 너를 그렇게 흔들려고 했는지 알아. 네가 싸우는 상대가 그 사람 하나만이 아니라는 것도…… 어렴풋이 느껴져."
재환은 숨을 멈추었다.
지유가 어디까지 짐작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지유는 언제나 말하지 않는 고통까지 먼저 알아채는 아이였다.
"어머니가 남원의료원 중환자실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기 전에 그러셨어. 세상은 힘없는 사람들에게 너무 가혹해서, 정직하게 살려고 하면 할수록 더 큰 몽둥이가 날아온다고. 하지만 재환이 그 아이는 반드시 돌아올 테니, 그 아이가 오면 미워하지 말고 따뜻한 밥 한 끼 꼭 먹여주라고 하셨어."
지유의 눈가에 투명한 이슬이 맺혔다.
"난 지난 7년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널 기다렸어. 하지만 널 기다린 건 나를 구해달라고 조르기 위해서가 아니었어. 네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외롭고 무서운 길을 걸어갈지 아니까…… 그 길 끝에서 네가 돌아왔을 때, 네가 돌아올 집이 아직 여기 남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
3. 어깨에 기댄 온기
돌담을 타고 스쳐 지나가는 밤바람이 두 사람의 옷자락을 차갑게 흔들었다.
재환은 지유를 바라보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아릿한 통증을 남겼지만,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격정을 잠재우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신림동 고시촌의 곰팡내 나는 세 평짜리 지하방에서, 찬밥 한 덩이로 끼니를 때우며 수만 페이지의 법전을 피눈물로 외우던 밤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이고 관절이 닳아 피가 배어 나올 때마다 그를 버티게 했던 유일한 빛.
그것은 바로 이 작은 소녀가 남겨준 흑청색 잉크와, 남원에 반드시 법복을 입고 돌아가겠다는 결사의 서약이었다.
하지만 그 7년 동안, 지유는 시청 위생과와 소방과의 표적 단속, 조폭들의 쇠파이프 난동, 그리고 어머니의 쓸쓸한 죽음까지 온몸으로 받아내며 홀로 이 남원의 비극을 견뎌내고 있었다.
"지유야……."
재환의 입술 사이로 메마른 신음 같은 부름이 새어 나왔다.
지유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까치발을 들고, 재환의 단단하고 차가운 감청색 코트 어깨에 자신의 이마를 가만히 얹었다.
순간, 재환의 온몸이 벼락을 맞은 듯 굳어졌다.
7년 전 오작교 위에서 스치듯 나누었던 손길 이후, 단 한 번도 허락되지 않았던 지유의 체온이었다.
지유의 작은 머리칼에서 은은한 방앗간 참기름 냄새와 비누 냄새, 그리고 고단한 하루의 땀 냄새가 섞인 온기가 훅 풍겨왔다.
"다시 돌아와 줘서…… 날 잊지 않아 줘서 고마워."
지유의 속삭임은 바람결처럼 부드러웠으나, 재환의 심장 한가운데를 무겁게 흔들었다.
그녀의 떨리는 어깨가 재환의 가슴에 닿았다.
재환은 천천히 떨리는 두 팔을 들어 지유의 등을 감싸 안았다.
거칠어진 그녀의 손, 야윈 어깨, 그동안 홀로 견뎌냈을 공포와 설움의 무게가 재환의 품 안으로 고스란히 쏟아져 들어왔다.
재환은 지유의 머리칼에 턱을 묻은 채 눈을 감았다.
뜨거운 눈물 한 줄기가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려 지유의 옷깃에 스며들었다.
"늦어서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지유야."
"아니야, 늦지 않았어. 넌 제시간에 왔어. 오늘도 날 지켜줬잖아."
지유는 재환의 품에 기댄 채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그 고른 숨결 하나하나가 재환에게는 그 어떤 대법원 판례나 법전의 조문보다 엄중한 명령이었고, 살아가야 할 이유였다.
두 사람은 달빛 아래 고요히 멈춰 서서 서로의 심장 박동을 나눴다.
돌담 너머 완월정 연못에서는 잉어가 수면을 차는 소리가 청아하게 들려왔고, 요천 제방 쪽에서는 풀벌레 소리가 처연하게 밤을 채우고 있었다.
지유는 재환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그 단단한 품 안에서 비로소 지난 7년간 단 하루도 누려보지 못했던 깊은 안식을 느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밤마다 낡은 양철 상자를 끌어안고 울음을 삼키던 고독한 밤들이 이 따뜻한 체온 속에서 서서히 녹아내리는 듯했다.
4. 요천의 밤물결과 맹세
한참의 침묵이 흐른 뒤, 두 사람은 광한루원 돌담길을 벗어나 요천 둑길로 향했다.
며칠 전 붕괴되었던 제1공구 제방 쪽은 여전히 검찰 통제선이 쳐진 채 서치라이트 불빛이 을씨년스럽게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걷는 상류 쪽 둑길은 수양버들이 길게 늘어서 있고, 은빛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고즈넉한 풍경을 간직하고 있었다.
서늘한 강바람이 두 사람의 얼굴을 스쳤다.
재환은 코트 주머니 속에서 하얀 손수건에 싸인 지유의 손을 놓지 않고 꼭 쥐고 있었다.
"이 강물은 7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흐르네."
지유가 잔잔하게 흐르는 요천의 검푸른 물결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가 자전거를 타고 달렸을 때도 이 노을이었는데."
"그때 네가 말했었지. 요천 물줄기가 남원을 지나 섬진강으로 가고, 결국엔 넓은 바다로 흘러간다고."
재환이 나지막이 기억을 되살렸다.
지유가 엷게 미소 지었다.
"기억하고 있었네."
"단 하루도 잊은 적 없다. 신림동 고시원 벽에 남원 지도를 붙여놓고 매일 요천 물줄기를 바라봤어. 내가 가야 할 곳은 오직 여기뿐이었으니까."
재환의 목소리는 다시 차분하고 단단해져 있었다.
품 안에서 지유의 온기를 확인한 뒤, 그의 내면에서는 더욱 서슬 퍼렇고 흔들림 없는 결의가 솟구치고 있었다.
이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 고향 남원의 썩은 뿌리를 도려내기 위해서라도, 자신은 결코 멈춰 서거나 타협해서는 안 되었다.
설령 그 칼날이 자신의 살붙이인 아버지를 베어내는 파멸의 칼이 될지라도.
"지유야."
재환이 둑길 난간에 멈춰 서서 요천 하류를 응시했다.
저 멀리, 불 꺼진 남원 시가지 너머 지리산 자락 쪽에는 관내 사법 카르텔의 온상인 상록골프장이 웅크리고 있을 터였다.
"내일부터는 더 험한 싸움이 될 거다."
재환이 경고하듯, 그러나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어조로 말했다.
"강태석을 구속시켰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야. 남원의 경찰, 법원, 그리고 검찰 내부까지…… 강태석의 돈을 받아먹은 자들이 여전히 도처에 깔려 있어.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사를 덮으려 할 거다."
지유는 재환의 손을 꽉 마주 쥐었다.
"알아. 하지만 난 이제 무섭지 않아. 네가 곁에 있으니까. 그리고 우리 곁엔 민재도 있고, 하은이도 있고…… 김 씨 아저씨랑 배 씨 아저씨 같은 이웃들도 있어."
지유의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맑았다.
그것은 온갖 폭압과 불의를 온몸으로 겪어내며 다져진, 영세한 삶의 가장자리에서 피어난 불굴의 강인함이었다.
재환은 그런 지유를 보며 가슴 한구석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법과 권력이라는 무기를 쥐고 싸우는 검사라면, 지유는 그 어떤 불의 앞에서도 정직을 잃지 않는 삶 그 자체의 거대한 방파제였다.
"그래, 물러서지 않는다. 남원의 법을 다시 세울 거다.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재환의 입에서 흘러나온 법언이 요천의 밤물결 위로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5. 새벽안개 속의 불길한 전조
요천 둑길을 돌아 삼거리 김밥집 앞까지 지유를 바래다준 뒤, 재환은 처마 밑에 섰다.
"들어가서 푹 자. 손에는 연고 꼭 바르고."
재환이 다정하게 당부했다.
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고리를 잡았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재환아."
"응?"
"아침에…… 따뜻하게 밥 해놓을게. 꼭 들러서 한 줄이라도 먹고 가."
그 소박하고 다정한 제안에 재환의 입가에 오랜만에 진정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 꼭 올게."
지유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켜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재환은 발길을 돌렸다.
주황빛 불빛이 새어 나오는 창문을 등지고 어두운 골목을 빠져나오는 재환의 눈빛은 순식간에 다시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졌다.
검사 성재환의 시간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골목 어귀에 세워둔 관용 세단으로 다가가자, 운전석 문이 열리며 특수부 강태훈 수사관이 다급하게 뛰어나왔다.
강 수사관의 얼굴은 밤안개 속에서도 사색이 되어 있었다.
"검사님!"
"강 수사관, 무슨 일입니까?"
재환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강태훈은 주위를 살피며 목소리를 극도로 낮췄다.
"조금 전, 지청 서무과를 통해 전주지검 본청에서 긴급 공문이 팩스로 내려왔습니다."
"본청에서?"
"예…… 조동식 지청장이 내일 오전 8시 30분부로 검사님을 지청장실로 호출했습니다. 서울 대검 기획조정관실과 법무부 검찰국 라인에서 직접 연락이 온 것 같습니다."
강태훈이 침을 꿀꺽 삼키며 덧붙였다.
"그리고…… 최민재 기자가 방금 남원상록골프장 쪽에서 급한 무전을 쳐왔습니다. 내일 밤으로 예정되어 있던 전주지검 간부들과 강태석 측 유지들의 비밀 회동 일정이…… 무슨 영문인지 오늘 밤 자정으로 기습적으로 앞당겨져 지금 골프장 클럽하우스 난실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재환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번뜩였다.
강태석이 옥중에서 교도관을 통해 지령을 내린 뒤, 사법 카르텔의 부패한 하수인들이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야간 기습 회동을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조동식 지청장의 소환 통보는 그 회동의 결과에 맞춰 재환의 손발을 묶으려는 사전 포석이 분명했다.
"배동진의 장부에서 빠져 있던 20억 원의 행방……."
재환이 낮게 읊조렸다.
"그 검은돈의 꼬리가 바로 오늘 밤, 그 골프장 잔디밭 위에서 맞춰지겠군."
"검사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청장 호출에 앞서 본청 차장검사까지 움직이고 있다면…… 내일 아침 수사 직무 배제 명령이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강태훈의 목소리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재환은 코트 안쪽 주머니에서 흑청색 잉크가 가득 찬 독일제 만년필을 꺼내 손가락 사이에 쥐었다.
캡 상단에 새겨진 백부의 각인, 그리고 조금 전 지유가 어깨에 기대며 남겨준 온기가 손끝을 타고 뜨겁게 전해졌다.
두려움 따위는 먼지 한 톨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차에 타십시오, 강 수사관."
재환이 단호하게 차 문을 열며 명령했다.
"지청으로 가기 전에, 먼저 들러야 할 곳이 생겼습니다."
"예? 그곳이 어디입니까?"
"남원상록골프장."
재환의 입술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한마디가 떨어졌다.
"내 수사 관할 안에서 벌어지는 사법 거래의 현장이다. 영장이 도착하기 전에, 내가 직접 그자들의 목덜미를 확인해야겠어."
검은 관용 세단이 굉음을 내며 어두운 골목을 박차고 나갔다.
새벽을 향해 치닫는 남원의 밤하늘 아래, 붉은 후미등 불빛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어둠을 가르며 지리산 자락을 향해 질주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