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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55화

법으로 친 방어벽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멈춰 선 쇠 버킷

 

거대한 굴착기의 디젤 엔진이 뿜어내는 검은 매연이 한여름 정오의 달궈진 아스팔트 위로 사납게 흩어졌다.

 

쇠로 엮인 거대한 궤도가 삼거리 김밥집의 낡은 시멘트 턱을 짓이기며 삐걱거리는 비명을 토해 냈다.

 

기름때에 전 굴착기 암(Arm)이 유압 실린더의 압력을 받아 묵직하게 치솟았다가, 곧바로 지유의 머리 위를 향해 곤두박질치듯 허공을 갈랐다.

 

"안 돼! 지유야!"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졌던 김 씨가 피투성이가 된 팔꿈치를 짚고 절규했다.

 

배 씨와 최 씨를 짓누르고 있던 건장한 용역들이 비열한 미소를 입가에 띠며 쇠파이프를 고쳐 쥐었다.

 

흙탕물과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난 그 찰나, 지유는 두 발을 콘크리트 바닥에 단단히 붙인 채 눈을 감지 않았다.

 

어머니가 서른 해 동안 참기름을 바르고 김을 굽던 자리였다.

 

아버지가 억울하게 빼앗긴 과수원의 원한이 흙벽돌 틈새에서 숨 쉬고 있는 유일한 피난처였다.

 

그녀의 하얀 면 앞치마가 굴착기가 일으키는 메마른 풍압에 세차게 펄럭였다.

 

'도망치지 않아.'

 

지유의 턱 끝이 결연하게 치켜들렸다.

 

'재환이가 오고 있어. 늦지 않게 온다고 했어.'

 

쿠구구궁—!

 

육중한 쇠 버킷이 지유의 이마를 불과 반 뼘 남겨둔 허공에서 거친 굉음과 함께 멎었다.

 

급제동이 걸린 유압 호스에서 퓨욱 하는 고압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은색 그랜저 한 대가 찢어지는 듯한 스키드마크를 남기며 굴착기와 김밥집 처마 사이로 비스듬히 미끄러져 들어왔다.

 

차량의 보닛이 굴착기의 육중한 궤도 범퍼를 정면으로 가로막은 채 거친 열기를 뿜어냈다.

 

덜컹, 묵직한 문이 열렸다.

 

정갈하게 다려진 짙은 감색 양복 차림의 성재환이 흙먼지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흐트러짐 없는 걸음걸이, 그리고 그 손에 들린 서슬 퍼런 백색 공문서.

 

재환의 서늘한 시선이 김밥집 앞에 선 지유의 창백한 뺨과 흙먼지 묻은 앞치마를 스쳐 지나갔다.

 

안도감이 가슴 밑바닥에서 뜨겁게 울컥 치밀어 올랐으나, 그의 표정은 칼날보다 차가웠다.

 

재환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떨고 있는 지유의 앞을 제 등으로 완벽히 가로막아 섰다.

 

광한루원 팽나무처럼 단단하고 넓은 어깨였다.

 

"누가 이 집행을 지휘하고 있습니까."

 

재환의 낮고 서늘한 음성이 굴착기의 엔진 소음을 단숨에 찢어발기며 골목 전체로 울려 퍼졌다.

 

2. 사법의 방패

 

확성기를 쥔 채得意만만하게 서 있던 도로관리계장 김상태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가셨다.

 

그는 땀으로 범벅이 된 셔츠 깃을 잡아당기며 헛기침을 삼켰다.

 

옥중의 강태석 시장이 비밀 무선전화로 내렸던 불호령이 귓전을 때리고 있었지만, 눈앞에 나타난 사내의 기세는 상상을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서, 성재환 검사……?"

 

김상태가 말을 더듬으며 확성기를 내렸다.

 

"여, 여기는 시정 행정 집행 현장입니다! 검찰이 개입할 사안이 아니에요! 요천 제방 수해 복구와 구도심 소방도로 확보를 위한 정당한 긴급 대집행입니다! 공무집행을 방해하면 검사라도 용납 못 합니다!"

 

김상태는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넣듯 꽥 소리를 질렀다.

 

용역 사내 대여섯 명이 쇠파이프를 덜렁거리며 재환의 주변을 둥글게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러나 재환의 눈동자는 눈앞의 쇠파이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뒤편에서 강태훈 수사관이 관용차 트렁크에서 대검 특별수사본부의 푸른색 수사 서류 가방을 꺼내 들고 재환의 곁으로 다가섰다.

 

"공무집행?"

 

재환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비틀렸다.

 

그는 품에서 하얀 장갑을 꺼내 끼지도 않은 맨손으로, 법원의 붉은 관인이 선명하게 찍힌 문서를 김상태의 코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 제1민사부. 1996카합412호."

 

재환의 목소리는 법정의 판결 선고문처럼 한 자 한 자 아스팔트 바닥에 쐐기를 박듯 내리꽂혔다.

 

"‘신청인 한지유, 피신청인 남원시장. 피신청인이 1996년 8월 24일 신청인에 대하여 행한 남원시 동충동 182번지 소재 점포에 대한 도로 점용 허가 직권 취소 처분 및 행정대집행 계고 처분은, 본안 소송의 판결 선고 시까지 그 효력을 정지한다.’"

 

"뭐, 뭐라고요……?"

 

김상태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사시나무 떨듯 흔들렸다.

 

재환이 서류철을 탁 접으며 한 걸음 바싹 다가섰다.

 

김상태는 질겁하며 뒤로 물러섰지만, 그의 등 뒤에는 물러설 곳 없는 시청 관용 승합차가 가로막고 있었다.

 

"행정소송법 제23조 제2항. 처분 등이나 그 집행 또는 절차의 속행으로 인하여 생길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를 예방하기 위하여 긴급한 필요가 있다고 인정할 때에는, 법원은 당사자의 신청 또는 직권에 의하여 효력정지를 결정할 수 있다."

 

재환의 손가락이 문서 하단의 붉은 직인을 가리켰다.

 

"당직 판사인 문성현 부장판사의 정식 결정문이다. 오전 11시 40분부로 법원에 정식 접수 및 결재가 완료되었고, 남원시청 감사담당관실과 도로교통과 팩스로도 동시 송달되었다. 효력정지 결정문이 발부된 순간부터, 네놈들이 쥐고 있는 계고장은 쓰레기 종이 쪼가리에 불과해."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접수된 지 불과 두 시간 만에 가처분이 인용된다는 게 말이 됩니까?! 행정소송 본안도 제기되지 않았는데!"

 

김상태가 새파랗게 질린 입술로 악을 썼다.

 

"본안 소송?"

 

재환이 낮게 조소했다.

 

"‘남원시 도로 점용 허가 직권 취소 처분 취소 청구의 소’. 영장전담판사실에서 집행정지 신청서와 함께 본안 소장까지 한 번에 접수했다. 접수 번호까지 확인해 줄까?"

 

재환이 들고 있던 결정문 사본을 김상태의 가슴팍에 거칠게 찔러 넣었다.

 

종이 모서리가 빳빳하게 가슴을 찌르자 김상태가 헉 숨을 들이켰다.

 

"지금 당장 저 중장비의 시동을 끄고 철수해라. 1분이라도 지체할 경우, 법원의 정당한 결정을 무시하고 위력을 행사한 특수공무집행방해, 그리고 행정권 남용에 따른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현행범으로 여기 있는 전원을 긴급 체포하겠다."

 

재환의 시선이 쇠파이프를 쥐고 있던 용역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었다.

 

"형법 제123조, 제144조. 법원 집행정지 결정문을 보고도 중장비를 작동시킨 순간부터 너희들은 단순 노무자가 아니라 징역 5년 이상의 특수공무집행방해 공동정범이다. 어디 한번 그 쇠 버킷을 한 뼘이라도 더 내려찍어 봐라. 내가 내 손으로 공소장에 너희 이름을 적어 전주교도소 감방으로 보내줄 테니."

 

정적.

 

골목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긴장감이 일순간 차갑게 얼어붙었다.

 

굴착기 조종석에 앉아 있던 기사가 사색이 되어 허겁지겁 시동 레버를 꺾었다.

 

푸슈욱— 기계음이 꺼지며 거대한 쇠 버킷이 맥없이 흙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쇠파이프를 쥐고 있던 용역들이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야, 야! 너희들 어디 가! 서 있어! 시장님이 가만 안 두실 거라고!"

 

김상태가 허탈하게 고함을 질렀으나, 이미 검사의 살기 어린 법리 선언 앞에 용역들의 대열은 흩어지고 있었다.

 

3. 꺾이지 않는 방패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동문 우체국 뒷골목 상인들이 하나둘씩 몸을 일으켰다.

 

김 씨가 찢어진 셔츠 소매로 이마의 피를 닦아내며 굵은 눈물을 떨구었다.

 

"검사님…… 성 검사님이 해냈어……!"

 

"법이…… 우리 같은 사람들을 살렸어……!"

 

배 씨와 최 씨가 부둥켜안으며 환호성을 터뜨렸다.

 

지유는 조용히 숨을 고르며, 제 앞을 가로막고 선 재환의 단단한 등판을 바라보았다.

 

7년 전, 힘없는 열여덟 소년으로 서울행 열차에 강제로 실려 가며 피눈물을 흘리던 그 소년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부조리한 칼날을 맨몸으로 받아내며 지유의 삶을 짓밟으려던 거대한 포클레인 앞에, 그는 가장 완벽하고 차가운 법의 방패가 되어 서 있었다.

 

재환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살기를 띠고 있던 그의 눈빛이 지유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거짓말처럼 부드러운 온기를 머금었다.

 

그는 떨리는 손을 뻗어 지유의 어깨에 묻은 거친 흙먼지를 조심스레 털어냈다.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 공예품을 다루듯, 그의 손길은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다친 곳은 없어?"

 

재환의 음성이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유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입술을 꾹 깨문 채 눈물을 참아내려 했지만, 눈가에 맺힌 눈물이 기어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응. 다치지 않았어, 재환아."

 

지유의 짧은 대답에 재환의 가슴 한구석이 묵직하게 조여들었다.

 

7년 동안 이 작은 체구로 얼마나 많은 쇠파이프와 위협을 견뎌냈을까.

 

어머니를 잃고, 가게 유리창이 박살 나고, 붉은 페인트가 칠해지는 동안 홀로 이 자리를 지켜냈을 지유의 고통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재환은 자신의 양복 안주머니를 매만졌다.

 

그 안에는 지유가 선물했던 흑청색 잉크로 채워진 검은 옻칠 만년필과, 그녀가 7년간 눈물로 써 내려간 백여 통의 부치지 못한 편지가 들어 있었다.

 

"내가 말했지."

 

재환이 지유의 젖은 눈가를 굵은 엄지손가락으로 살며시 훔쳐냈다.

 

"이제는 내가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어떤 폭압도, 어떤 비열한 권력도 네 삶을 흔들지 못하게 내가 법으로 막아줄 거라고."

 

지유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온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의 임종 이후, 홀로 세상에 내팽개쳐진 줄로만 알았던 영혼에 다시 피가 도는 기분이었다.

 

"고마워, 재환아. 네가 올 줄 알았어. 단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어."

 

지유의 목소리에 담긴 불변의 신뢰가 재환의 심장에 서슬 퍼런 맹세를 아로새겼다.

 

4. 검사실의 결전 준비

 

패퇴한 김상태와 시청 철거반이 굴착기를 끌고 먼지 속으로 도망치듯 빠져나간 뒤, 골목은 비로소 평온을 되찾았다.

 

상인들은 김밥집 앞을 청소하고 부서진 간판을 일으켜 세우며 서로를 다독였다.

 

재환은 지유에게 가게 문을 잠그고 쉴 것을 신신당부한 뒤, 강태훈 수사관과 함께 전주지검 남원지청으로 복귀했다.

 

남원지청 204호 검사실.

 

정오를 넘긴 태양이 낡은 블라인드 틈새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배동진에게서 압수한 두 권의 검은색 가죽 바인더 ‘특별 대외 협력비 정산서’와, 유성골재 경리 정미숙이 목숨 걸고 지켜낸 ‘이중 비밀 장부’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타다닥, 타닥—.

 

검사실 한편에서 강태훈 수사관이 타자기를 두드리며 김상태와 시청 도로관리계에 대한 직권남용 혐의 입건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재환은 백부에게 물려받은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을 쥐었다.

 

캡 상단에 선명하게 새겨진 라틴어 법언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서늘하게 번뜩였다.

 

'Fiat justitia, ruat caelum.'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재환은 만년필 끝으로 서류의 한 페이지를 짚었다.

 

유성골재 비밀 장부 47페이지.

 

1995년 10월 14일, 요천 제방 1공구 기초 타설 당시 출하된 콘크리트 골재 내역.

 

정품 세척사(洗滌砂) 대신 요천 하류의 진흙 섞인 저질 강모래와 건축 폐기물 분쇄 골재가 납품된 수량이 붉은색 볼펜으로 낱낱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적힌 단 하나의 메모.

 

‘시장실 비서관 직접 수령. 현금 3억 원. 차명 계좌 4개 분산 입금.’

 

"완벽합니다, 검사님."

 

강태훈 수사관이 타자기에서 보고서를 뽑아내며 감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남원지원 문성현 판사님도 효력정지 가처분을 인용하시면서 시청의 행태에 혀를 차셨습니다. 영장전담판사가 직접 검토한 사안이니, 행정소송 본안도 우리가 100% 승소합니다. 강태석이 옥중에서 교도관을 매수해 지령을 내린 정황만 확보하면, 직권남용교사죄까지 추가해 구속 만기를 꽉 채울 수 있습니다."

 

"그걸로 끝낼 싸움이 아닙니다."

 

재환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깊은 분노가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만년필을 내려놓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저 멀리 남원 시내를 가로지르는 요천의 흙탕물이 누렇게 흐르고 있었다.

 

붕괴된 제방 제1공구에는 여전히 방수포가 덮여 있었고, 그 밑바닥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눈물과 30년 동안 이어진 가문의 탐욕이 썩은 냄새를 풍기며 똬리를 틀고 있었다.

 

"강태석은 꼬리에 불과해요. 그자가 옥중에서도 시청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흔들 수 있는 진짜 이유는, 이 지역 사법과 행정 카르텔 전체가 그자의 뇌물로 엮여 있기 때문입니다."

 

재환의 시선이 책상 모퉁이에 놓인 최민재의 비리 특별 취재 파일로 향했다.

 

그 파일의 맨 첫 장에는 붉은색 매직으로 굵직하게 적힌 글자가 있었다.

 

‘남원상록골프장. 극비 회동 명단.’

 

5. 은밀한 거래의 냄새

 

"강태석이 전주교도소에 갇혀 있으면서도 왜 저토록 기고만장한지 아십니까?"

 

재환이 강태훈 수사관을 돌아보며 물었다.

 

강태훈이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을 꺼내줄 밧줄이 아직 튼튼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재환이 특별 대외 협력비 정산서의 뒤쪽을 펼쳤다.

 

배동진이 소각하려다 실패한 그 장부에는, 관내 유력 인사들에게 살포된 무기명 골프 회원권과 그린피 대납 내역이 날짜별로 빼곡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 명단 안에는 전주지검 차장검사는 물론, 남원지청 내부의 핵심 부장검사들의 이름이 영문 이니셜로 적혀 있었다.

 

"이번 주말입니다."

 

재환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강태석의 측근인 배동진과 조칠성이 체포되기 직전, 남원상록골프장에 전주지검과 법원 고위 간부들을 초청해 극비 회동을 잡았습니다. 강태석의 구속적부심 청구와 보석 허가를 사전에 조율하기 위한 자리였죠."

 

"그, 그렇다면 지청 내부에서도 검사님의 수사를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텐데요……."

 

강태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지청장 조동식은 이미 성재환의 수사에 사사건건 제동을 걸며 윗선의 외압을 전달하고 있었다.

 

만약 전주 본청의 차장검사들까지 이 카르텔에 엮여 있다면, 성재환 검사는 검찰 조직 전체를 적으로 돌리고 칼을 휘둘러야 하는 처지였다.

 

그때 검사실 문이 벌컥 열렸다.

 

수사관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와 숨을 몰아쉬었다.

 

"서, 성 검사님! 최민재 기자가 지금 청사 후문 쪽에 도착했습니다! 아주 급한 물건을 확보했다고 합니다!"

 

재환의 눈썹이 꿈틀했다.

 

"민재가? 정미숙 주임 호송을 끝내고 전주에서 돌아온 건가?"

 

"예! 그런데 혼자가 아닙니다. 전주교도소 교도관 한 명을 대동하고 왔습니다!"

 

재환과 강태훈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전주교도소.

 

강태석이 갇혀 있는 바로 그곳이었다.

 

6. 교도소 담장을 넘어온 통화 일지

 

잠시 후, 204호 검사실의 두꺼운 철문이 닫히고 낯선 사내 하나가 들어섰다.

 

사복을 입고 있었지만, 짧게 깎은 머리와 특유의 제복 냄새가 물씬 풍기는 사십 대 초반의 남성.

 

그의 얼굴은 공포로 하얗게 질려 있었고, 곁에 선 최민재의 눈빛은 맹수처럼 형형하게 살아 있었다.

 

"재환아."

 

민재가 거친 숨을 내쉬며 품에서 두툼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탁 올려놓았다.

 

"네가 삼거리 김밥집에서 포클레인을 막아내는 동안, 난 전주에서 이 사람을 만났다. 전주교도소 보안과 소속 교도교사 이진택이다."

 

사내가 몸을 바들바들 떨며 재환에게 고개를 숙였다.

 

"서, 성 검사님…… 살려주십시오. 전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재환은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대며 차가운 눈길로 교도관을 응시했다.

 

"강태석에게 무선전화를 넘겨준 자가 당신입니까."

 

"……예."

 

이진택의 목소리가 모기 소리처럼 기어들어 갔다.

 

"강태석 시장의 처남인 조상태가…… 면회를 와서 현금 오백만 원이 든 담뱃갑을 건넸습니다. 독방 배전반 뒤쪽에 무선전화기를 숨겨둘 테니, 매일 밤 11시부터 새벽 2시 사이에 교도관 순찰을 피해 통화할 수 있게 눈감아 달라고……."

 

"그 전화로 누구와 통화했는지 기록했습니까?"

 

재환의 목소리에 서늘한 압박감이 실렸다.

 

최민재가 서류 봉투 안에서 노란색 스프링 공책 한 권을 꺼내 펼쳤다.

 

"이 양반이 간이 작아서 말이야, 훗날 자기가 뒤집어쓸까 봐 강태석이 통화한 상대방 번호와 통화 일시를 몰래 적어뒀더군."

 

재환의 시선이 공책의 필적을 따라 빠르게 움직였다.

 

‘8월 22일 23:40 - 남원시청 도로교통과 김상태 계장 (지령: 24일 정오 삼거리 김밥집 긴급 대집행 강행, 굴착기 동원).’

 

‘8월 23일 01:15 - 서울 국회 내무위원장 김문현 의원실 직통 비서관실.’

 

그리고 그 밑에 적힌 가장 충격적인 이름.

 

‘8월 23일 02:30 - 내무부 차관 성호석 집무실 직통 유선.’

 

쿵—.

 

재환의 심장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친부, 성호석.

 

서울 성북동 사저와 세종로 정부종합청사를 호령하는 내무부 차관이자, 7년 전 재환을 남원에서 강제로 끌어올렸던 가문의 절대 권력.

 

강태석은 옥중에서 성호석과 직접 내통하고 있었다.

 

단순한 지방 토착 비리가 아니었다.

 

1991년 남원 환지 비리부터 시작해, 요천 제방 붕괴 참사, 그리고 삼거리 김밥집을 향한 불법 철거 시도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거악의 사슬 끝에는 친부 성호석의 그림자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재환아……."

 

최민재가 조심스럽게 재환의 안색을 살폈다.

 

검사실 안의 공기가 숨이 막힐 정도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강태훈 수사관조차 펜을 멈춘 채 마른침을 삼켰다.

 

친아버지를 피의자로 입건해야 하는 천륜(天倫)의 비극 앞에서, 어떤 인간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성재환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지며 깊이를 알 수 없는 암흑으로 가라앉았다.

 

그는 지유의 작은 손에 박혀 있던 굳은살과, 어머니의 묘소 앞에 홀로 서서 눈물을 삼키던 그녀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지유가 목숨처럼 지켜내 제게 건네주었던 1968년 토지 이면계약서 속 성호석의 날인을 떠올렸다.

 

재환이 천천히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검은 옻칠 배럴을 타고 흐르는 지유의 흑청색 잉크.

 

그는 교도관의 비밀 통화 일지 맨 밑바닥, 성호석의 이름 옆에 붉은색 결재인을 찍듯 굵은 만년필 선을 그었다.

 

"이진택 교도관."

 

재환의 목소리는 한 치의 떨림도 없었다.

 

"공무원 뇌물수수 및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긴급 피의자 신문을 진행한다. 다만, 네놈이 강태석의 통화 녹취 테이프나 추가 증거를 법정에서 성실히 증언한다면 형량 감경을 적극 참작하겠다."

 

이진택이 울먹이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다, 다 진술하겠습니다! 강태석이 서울에 정치자금을 보낸 영수증 사본도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7. 밤안개 속의 맹세

 

조사가 자정을 넘겨 끝났다.

 

이진택 교도관의 자백 조서와 압수된 무선전화기, 그리고 성호석과 김문현의 이름이 적힌 통화 일지가 특수부 비밀 금고에 안전하게 봉인되었다.

 

재환은 코트 깃을 세운 채 지청 계단을 내려왔다.

 

남원의 밤하늘은 짙은 먹구름이 걷히고 차가운 초승달이 홀로 떠 있었다.

 

지청 앞마당을 가로질러 걷던 재환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요천 둑길을 향했다.

 

밤바람을 타고 은은한 풀 냄새와 함께 저 멀리 광한루원의 팽나무 고목 실루엣이 어둠 속에 웅장하게 드러났다.

 

재환은 둑길 난간에 기대어 서서 남원 시내의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저 골목 어귀, 작은 불빛 하나가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곳.

 

삼거리 김밥집이었다.

 

그곳에는 지유가 있었다.

 

포클레인의 쇠 버킷 앞에서도 끝내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터전을 지켜낸 단단한 아이.

 

'지유야.'

 

재환은 가슴속 만년필을 손끝으로 쥐었다.

 

'네가 피 흘리며 지켜낸 그 자리, 내가 법으로 반드시 지킨다.'

 

내일 아침이면 남원상록골프장으로 향하는 전주지검 간부들의 목덜미를 낚아채야 했다.

 

그리고 그 칼끝은 필연적으로 서울 세종로의 친부 성호석을 향해 겨누어질 것이다.

 

가문의 이름을 더럽힌 죄, 무고한 사람들의 삶을 짓밟고 일궈낸 피 묻은 권력의 탑을, 성재환은 자신의 손으로 남김없이 무너뜨릴 작정이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광한루원 완월정 처마 끝에 걸린 차가운 달빛 아래, 젊은 검사의 서슬 퍼런 눈빛이 밤안개를 꿰뚫으며 결전의 새벽을 향해 타오르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