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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53화

우회 수사의 시작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거악의 꼬리

 

전주지방검찰청(全州地方檢察廳) 남원지청(南原支廳) 1층 서무과 복도에는 아직도 묵직한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바닥에 엎드러진 채 수갑을 찬 박영선 수사계장의 거친 숨소리가 타일 바닥을 타고 을씨년스럽게 울렸다.

 

성재환은 손에 쥔 소형 카세트 녹음기의 정지 버튼을 천천히 눌렀다.

 

달칵 하는 플라스틱 기계음이 서무과 복도의 살얼음판 같은 공기를 날카롭게 갈랐다.

 

녹음기 테이프 속에는 조금 전 박영선이 남원지원(南原支院) 송진호 계장과 나누었던 은밀한 통화가 한마디도 빠짐없이 담겨 있었다.

 

‘남원상록골프장에서 전주지검 간부들을 만나 구속적부심으로 빼내기로 했다’는 그 추악한 사법 거래의 음모였다.

 

"수사관님, 박영선 계장을 즉시 2층 조사실로 인치하고 신병을 철저히 격리하십시오. 휴대폰, 수첩, 개인 소지품 일체를 압수하고 외부 통신은 완전히 차단합니다."

 

재환의 서늘한 목소리에 대기하고 있던 대검 특별수사본부 수사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성 검사님! 이거 놓으십시오! 내가 지청에서 몇 년을 일했는데 이러십니까! 지청장님을 뵙게 해줘요!"

 

박영선이 버둥거리며 소리를 질렀지만, 수사관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의 양팔을 결박해 복도 저편으로 끌고 갔다.

 

복도 한구석에 서 있던 최민재가 주먹을 불끈 쥐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지청 안의 쥐새끼 하나를 잡아넣었네. 7년 동안 이 안에서 강태석의 눈과 귀 노릇을 하던 놈인데, 네 손으로 직접 수갑을 채우는 걸 보니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간다, 재환아."

 

민재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그러나 재환의 표정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재환은 자신의 짙은 감색 양복 소매를 내려다보았다.

 

외곽 폐차장 진흙탕에서 배동진을 제압하고 올라온 강태훈 수사관이 숨을 헐떡이며 복도를 달려오고 있었다.

 

그의 품에는 흙탕물이 얼룩덜룩 묻은 검은색 가죽 바인더 두 권이 들려 있었다.

 

남원 제1건설의 ‘특별 대외 협력비 정산서’ 원본이었다.

 

"검사님! 폐차장 소각로에 던져지기 직전에 확보했습니다. 배동진과 비서실장 놈들, 지금 지하 유치장으로 압송 완료했습니다."

 

강 수사관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인더를 건넸다.

 

재환은 두툼한 바인더를 받아 들었다.

 

표지에는 불길에 살짝 그을린 자국과 함께 거친 매연 냄새가 뱄다.

 

바인더를 조심스럽게 펼치자, 1994년부터 최근까지 강태석과 배동진이 요천 수변공원 제방 공사와 춘향 테마랜드 사업에서 빼돌린 비자금의 흐름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시청 위생과, 소방과, 지적과, 남원경찰서 간부들, 그리고 남원지원 실무 계장들에게 살포된 차명 계좌와 뇌물 액수가 날짜별로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다.

 

"대외 협력비…… 결국 이게 그들이 말하던 관행의 실체였군."

 

재환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바인더의 책장을 넘기던 재환의 손길이 한순간 멈칫했다.

 

1994년 이전의 기록, 즉 1991년 남원 구도심 토지 환지 처분 당시의 초기 자금 흐름과 원천 회계 장부 페이지가 칼로 도려내진 듯 깨끗이 뜯겨 나가 있었다.

 

배동진이 도주 직전 일부러 뜯어내 소각했거나, 애초에 다른 곳에 분리 보관해 둔 것이 분명했다.

 

그 도려내진 빈틈 속에는 재환의 부친 성호석이 관여했던 과거의 비극이 묻혀 있을 터였다.

 

"왜 그래, 재환아? 장부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

 

민재가 굳어진 재환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몸통의 최근 범죄는 이 장부로 충분히 입증할 수 있어. 뇌물과 횡령, 배임 혐의는 빼도 박도 못해. 하지만…… 요천 제방 붕괴 참사의 실질적인 물리적 증거, 즉 40억 원대의 자재 빼먹기와 부실시공을 뒷받침할 원천 하도급 거래 내역이 비어 있어."

 

재환이 바인더를 덮으며 낮게 읊조렸다.

 

"배동진이 본사 사무실에서 불태운 캐비닛 서류들이 바로 그 세부 하도급 내역서와 자재 납품 명세서였어. 본류 장부가 타버린 이상, 법정에 섰을 때 저들은 '돈은 오갔을지 몰라도 제방 붕괴는 천재지변이었다'고 발뺌할 거다."

 

"그럼 어떡하지? 강태석 그 인간은 구속실질심사에서도 여전히 큰소리를 치고 있다던데. 전주지검 윗선에 줄을 대서 보석으로 빠져나가려고 발악하는 판국에 제방 부실을 확실히 못 박지 못하면 위험해지는 거 아니야?"

 

민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재환은 품안에서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을 꺼내 손끝으로 단단히 쥐었다.

 

만년필 캡에 새겨진 'Fiat justitia, ruat caelum'이라는 문구가 형광등 불빛 아래 서늘한 금빛을 뿜어냈다.

 

"본류가 막혔다면, 우회로를 뚫는다."

 

재환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우회로라니? 본사 장부가 다 탔는데 어디서 증거를 찾아?"

 

"남원 제1건설이라는 거대한 몸통 혼자서 둑을 쌓고 시멘트를 부을 수는 없어. 그 밑에서 실제로 모래를 나르고, 철근을 자르고, 중장비를 굴린 수십 개의 작은 실핏줄들이 존재해. 그 하도급 업체들을 전방위로 털면 바닥에서부터 진실이 올라온다."

 

2. 실핏줄을 추적하다

 

남원지청 204호 검사실은 순식간에 야전 사령부로 변했다.

 

검사실 벽면 한쪽에는 민재가 3년 동안 목숨 걸고 모아온 남원 제1건설의 취재 파일과 조직도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 옆으로는 대검 특별수사본부에서 파견된 수사관들이 들이닥쳐 상자째 내려놓은 하도급 관련 기초 서류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재환은 칠판 앞에 서서 분필을 쥐었다.

 

탁, 탁, 소리를 내며 칠판에 스물여덟 개의 상호가 빼곡하게 적혀 내려갔다.

 

남원 시내와 인근 순창, 임실 일대에 흩어져 있는 골재상 5곳, 레미콘 및 아스콘 업체 4곳, 중기 임대업체 3곳, 철근 가공업체, 그리고 현장 잡부들을 조달한 인력 사무소들까지 총 28개 하도급 거래처였다.

 

"모두 주목하십시오."

 

재환이 돌아서며 검사실 안의 수사관들을 응시했다.

 

방 안의 공기가 단숨에 얼어붙었다.

 

젊은 주임검사의 눈빛은 지리산의 칼바람처럼 매서웠다.

 

"남원 제1건설 본사 회계장부는 불탔지만, 거래는 일방통행이 아닙니다. 본사가 돈을 줬다면 받아 간 쪽이 있고, 가짜 세금계산서를 발행했다면 상대방의 장부에도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야 합니다. 28개 하도급 업체의 부가가치세 신고 내역, 세금계산서 합계표, 그리고 거래 은행 계좌 추적 영장을 지금 즉시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에 일괄 접수합니다."

 

강태훈 수사관이 서류 뭉치를 넘겨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판사님 영장 발부는 문제없겠습니까? 본사 압수수색 정보가 송진호 계장 손에서 샜던 걸 생각하면 또 기밀이 샐 수도 있습니다."

 

"문성현 영장전담판사님께 제가 직접 비공개로 집무실에 들어가 영장을 청구할 겁니다. 그리고 송진호 계장은 이미 박영선의 자백과 통화 녹음으로 직무배제 및 긴급 체포 절차를 밟고 있으니 법원 쪽 유출 구멍은 막혔습니다. 영장이 나오는 즉시 7개 조로 나누어 28개 업체를 동시다발적으로 기습합니다. 단 하나의 서류도 파쇄기에 들어가지 못하게 입구를 봉쇄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수사관들이 경례를 붙이고 일사천리로 방을 빠져나갔다.

 

검사실에는 재환과 민재 두 사람만이 남았다.

 

민재는 담배를 한 대 피우려다 말고 검사실 창가에 서서 요천 쪽을 바라보았다.

 

먹구름이 낮게 깔린 남원 하늘 아래로 흙탕물이 넘실대던 요천 제방의 참상이 여전히 눈에 밟혔다.

 

"재환아, 그런데 28개 업체를 다 턴다고 해도 문제가 있어. 남원에서 장사하는 놈치고 강태석의 서슬에 안 쫄 놈이 없거든. 세금계산서야 허위로 맞췄다고 둘러대면 그만이고, 장부도 이미 입을 맞춰뒀을 가능성이 높아. 하도급 사장 놈들은 전부 강태석한테 코가 꿰인 토착 업자들이야."

 

민재의 지적은 정확했다.

 

지방 토착 비리의 가장 큰 벽은 바로 '침묵의 카르텔'이었다.

 

사장을 두들겨 패도,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입을 닫아버리면 부실시공의 고의성을 입증하기가 쉽지 않았다.

 

재환은 칠판에 적힌 28개 업체 중 한 곳의 이름 밑에 붉은 분필로 굵은 밑줄을 그었다.

 

'유성골재(柳成骨材)'.

 

"골재상이야. 요천 제방 1공구에 콘크리트용 골재와 잡석을 전량 납품했다고 서류상에 올라와 있는 핵심 하도급 업체지."

 

재환이 돌아보며 말했다.

 

"유성골재? 거긴 사장이 조칠성(曺七星)의 사촌 동생인 조두식(曺斗植)이잖아. 강태석 시장의 최측근 패거리야. 그자가 순순히 불 리가 없는데?"

 

"사장을 털겠다는 게 아니야."

 

재환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거대한 건설 비리의 장부를 실제로 손으로 쓰고, 은행을 오가며 무통장 입금표를 뽑고, 부가가치세 신고철을 맞추는 건 사장이 아니야. 매달 얼마 되지도 않는 월급을 받으면서 사장의 비리를 두 눈으로 똑똑히 목도하는 사람.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 진짜 장부와 가짜 장부를 구분해 숨겨두고 매일 밤 가슴을 졸이며 살아가는 사람이지."

 

민재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경리?"

 

"그래. 유성골재의 회계를 실질적으로 도맡아 온 실무자. 그 사람을 찾아야 한다. 사장의 충성심 뒤에 숨겨진 실무자의 공포와 양심을 파고드는 게 이 우회 수사의 유일한 열쇠다."

 

민재가 무릎을 탁 쳤다.

 

"잠깐만, 재환아. 유성골재 경리라면…… 내가 알고 있을지도 몰라."

 

3. 흙탕물 속의 양심

 

민재는 재빨리 자신의 가죽 취재 수첩을 뒤적였다.

 

낡은 수첩의 모서리는 닳고 해져 있었지만, 그 안에는 3년 동안 남원 시내 구석구석을 누비며 적어둔 깨알 같은 메모들이 빼곡했다.

 

"찾았다. 유성골재 사무실에서 일하는 경리 주임, 이름이 정미숙(鄭美淑)이야. 나이는 스물여덟. 남원여고 나와서 줄곧 그 회사에서 장부를 봤어. 작년에 남원일보에서 관급 공사 자재 납품 비리를 은밀히 취재할 때, 사무실 앞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거든."

 

민재가 손가락으로 수첩의 한 줄을 짚었다.

 

"그때 그 여자가 사장이 자리를 비운 틈에 나한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어. '기자님, 회사가 시키는 대로 가짜 영수증을 써주면 저도 감옥에 가나요?'라고.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지. 강태석 패거리들이 무서워서 도망치지도 못하고 억지로 붙들려 있는 눈치였어."

 

"지금 어디에 있지? 유성골재 사무실에 출근해 있나?"

 

"아니. 제방이 무너진 날 이후로 유성골재 사무실 문은 굳게 닫혔어. 사장 조두식은 잠적했고. 하지만 정미숙의 집 주소를 내가 적어뒀어. 하정리 저지대 쪽이야. 이번에 요천 둑이 터지면서 물이 찼던 그 골목 안쪽 단독주택이야."

 

재환은 주저하지 않고 옷걸이에 걸려 있던 정장 상의를 집어 들었다.

 

"민재야, 지금 바로 가자."

 

두 사람은 지청 후문을 빠져나와 빗줄기가 잦아든 남원 구도심 골목으로 차를 몰았다.

 

하정리 저지대는 처참했다.

 

불과 이틀 전 터진 요천 제방의 흙탕물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여전히 진흙과 쓰레기, 부서진 가구들이 뒤엉켜 아수라장이었다.

 

동네 주민들은 젖은 이불과 가재도구를 마당에 꺼내놓고 한숨을 내쉬고 있었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썩은 흙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 모든 비극이 강태석과 조두식 같은 자들이 수십억 원의 공사비를 빼돌리기 위해 싸구려 잡석과 규격 미달 모래를 쏟아부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골목 막다른 곳에 위치한 붉은 벽돌 단층집 앞마당에서 한 여성이 흙투성이가 된 고무장화를 신고 흙탕물을 퍼내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핼쑥했고, 물을 퍼 올리는 손은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정미숙 씨."

 

민재가 마당 안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디디며 불렀다.

 

여인이 흠칫 놀라며 들고 있던 플라스틱 바가지를 떨어뜨렸다.

 

바가지가 진흙탕 바닥을 구르며 탁한 소리를 냈다.

 

"누, 누구세요? 사장님이 보낸 사람들인가요? 저 아무것도 몰라요! 저한테 이러지 마세요!"

 

정미숙은 뒷걸음질을 치며 마당 구석의 수돗가 벽으로 몸을 웅크렸다.

 

극도의 공포가 그녀의 눈동자를 지배하고 있었다.

 

민재가 두 손을 내저으며 다가갔다.

 

"미숙 씨, 진정해요. 나 남원일보 최민재 기자예요. 작년에 사무실 앞에서 명함 건넸던 거 기억하죠? 조두식 사장이 보낸 깡패들 아니에요."

 

정미숙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민재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이내 긴장이 풀린 듯 주저앉으며 울먹였다.

 

"최 기자님…… 여긴 왜 오셨어요? 저 이제 골재상 일 안 해요. 제발 찾아오지 마세요. 시장님 패거리들이 입 열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우리 어머니 병원까지 찾아가서 협박했단 말이에요."

 

그때, 민재의 뒤편에서 묵직한 구두 소리가 진흙탕을 밟으며 다가왔다.

 

단정한 감색 양복 차림의 성재환이었다.

 

재환은 품에서 은색 검사 신분증을 꺼내 조용히 내보였다.

 

"전주지방검찰청 남원지청 검사 성재환입니다."

 

검사라는 말에 정미숙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검, 검사님……? 저 감옥 가나요? 전 그냥 시키는 대로 컴퓨터에 숫자만 쳤을 뿐이에요. 조 사장님이 도장 찍으라고 해서 찍은 것밖에 없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정미숙이 진흙 묻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재환은 그녀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고급 양복 바짓단이 마당의 축축한 진흙탕에 닿아 더러워졌지만, 재환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재환의 시선은 정미숙의 떨리는 어깨 너머, 물에 젖어 마당에 널려 있는 가재도구들과 흙탕물 자국이 선명한 벽면을 향했다.

 

"미숙 씨, 집이 물에 많이 잠겼군요."

 

재환의 음성은 낮고 차분했다.

 

호통을 치거나 추궁하는 검사의 서슬 퍼런 목소리가 아니었다.

 

정미숙이 고개를 들고 젖은 눈으로 재환을 바라보았다.

 

"이 골목에 사는 어르신들과 이웃들이 왜 이 차가운 흙탕물을 뒤집어써야 했는지 아십니까?"

 

재환이 천천히 마당 밖, 무너진 제방 쪽을 가리켰다.

 

"요천 둑은 자연재해로 무너진 게 아닙니다. 강태석 시장과 남원 제1건설, 그리고 유성골재가 규격 철근의 3분의 1을 빼돌리고, 방수 콘크리트 대신 강바닥에서 긁어모은 저질 잡석과 흙모래를 쏟아부었기 때문에 무너진 겁니다."

 

정미숙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미숙 씨가 작성했던 가짜 세금계산서, 그 숫자 하나하나가 바로 이 마당을 덮친 흙탕물이 되었고, 이웃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흉기가 되었습니다."

 

"전…… 전 정말 몰랐어요. 그냥 도로 공사에 들어가는 골재인 줄로만……."

 

"알고 모르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미숙 씨가 침묵한다면 저들은 풀려나고, 이 참사의 책임은 힘없는 하도급 업체 직원들과 아무 죄 없는 시민들의 몫으로 남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재환이 품속에서 만년필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검은 옻칠 캡 위에 새겨진 라틴어 문구가 그녀의 시선에 닿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그게 제가 법을 배운 이유입니다. 그리고 오늘 제가 여기 온 이유는 미숙 씨를 처벌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저 거악을 무너뜨릴 유일한 진실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미숙 씨의 가족과 신변은 대검찰청 특별수사본부의 이름으로 제가 목숨 걸고 지키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도와주십시오."

 

정미숙은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젊은 검사의 눈빛을 마주했다.

 

거짓이나 위선이 없는, 칼날처럼 단단하면서도 깊은 슬픔을 품고 있는 눈빛이었다.

 

이윽고 정미숙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사무실 금고 뒤편에 바닥 장판이 들리는 곳이 있어요."

 

정미숙이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옷깃을 쥐어짜며 입을 열었다.

 

"조 사장님이…… 세무서 검사 나올 때마다 숨겨두라고 했던 진짜 출하 전표와 이중 비밀 장부가 거기 있어요. 제가 매일 밤 불안해서 복사해 둔 납품 확인서 원본도…… 제 방 장롱 밑에 숨겨뒀어요."

 

4. 장롱 밑의 진실

 

정미숙의 방 장롱 밑바닥에서 꺼내 올린 서류 뭉치는 상상 이상으로 방대하고 치명적이었다.

 

노란색 서류봉투 세 개에 가득 담긴 서류들은 유성골재가 지난 2년간 남원 제1건설을 통해 요천 수변공원 제1공구와 춘향 테마랜드 현장에 납품한 실제 골재 내역서였다.

 

남원지청 204호 검사실로 돌아온 재환과 민재는 책상 위에 서류들을 넓게 펼쳤다.

 

창밖에는 어느덧 남원의 푸른 저녁노을이 짙게 깔리고 있었다.

 

"이걸 봐, 재환아."

 

민재가 서류 한 장을 집어 들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설계 감리서에는 포틀랜드 방수 시멘트와 25밀리미터 세척 골재를 사용하기로 되어 있는데, 실제 납품된 건 세척도 안 된 요천 강모래와 건축 폐기물을 분쇄한 순환 골재야. 납품 단가는 정품의 4분의 1도 안 되는 헐값인데, 청구서는 정상 규격품 가격으로 발행됐어. 그 차액만 무려 14억 원이야!"

 

"그리고 여기를 봐."

 

재환이 다른 장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정미숙이 자필로 꼼꼼하게 기록해 둔 '차명 입금 및 현금 인출 일지'였다.

 

"남원 제1건설 배동진이 유성골재 계좌로 공사 대금을 입금하면, 그날 오후 즉시 현금으로 인출되어 사장 조두식의 손을 거쳐 시장 관사로 배달되었어. 배달된 현금 다발에는 '시장님 특별 판공비'라는 라벨이 붙어 있었군."

 

완벽했다.

 

본사의 원천 장부는 불탔지만, 바닥의 실핏줄인 하도급 골재상의 이중 비밀 장부와 정미숙의 진술서가 결합되면서, 강태석 카르텔의 부실시공과 비자금 조성 경로가 1원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복원되었다.

 

"조두식의 자필 서명과 강태석의 비서실 인수증까지 고스란히 첨부되어 있어. 이제 강태석과 배동진은 천재지변이라는 궤변을 절대로 늘어놓지 못해. 이건 명백한 업무상과실치사상이며,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와 횡령의 직접 증거다."

 

재환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민재야, 정미숙 씨의 진술 조서를 지금 즉시 작성해야겠다. 네가 신변 보호 경찰관들과 함께 정미숙 씨를 전주 안가로 안전하게 호송해 줘."

 

"그래, 그건 내게 맡겨. 지유한테는…… 가볼 거지?"

 

민재가 겉옷을 걸치며 물었다.

 

재환은 잠시 시선을 떨구었다.

 

가슴 안주머니에 소중히 품어둔 지유의 흑청색 잉크병과 닳고 닳은 증명사진의 감촉이 심장 언저리를 따스하게 덥혀왔다.

 

"지금 가면 지유가 걱정해. 오늘 밤 안에 28개 하도급 업체 압수수색 결과물을 취합해서 강태석과 배동진의 공소장을 완성해야 한다. 내일 아침 법정에 완벽한 사법의 철퇴를 올려놓은 뒤에 갈 거다."

 

"독한 놈. 7년 동안 고시촌에서 어떻게 버텼는지 알 만하다. 알았어, 난 미숙 씨 챙겨서 전주로 쏜다. 조심해라, 재환아. 쥐새끼도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무는 법이니까."

 

민재가 어깨를 툭 치고 검사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다시 204호 검사실에는 깊은 침묵이 찾아왔다.

 

재환은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았다.

 

지유가 선물해 주었던 깊고 푸른빛의 흑청색 잉크병을 열고, 백부에게 물려받은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에 조심스럽게 잉크를 채워 넣었다.

 

피스톤이 올라가며 푸른 잉크를 빨아들이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나직하게 울렸다.

 

재환은 하얀 공소장 용지를 펼쳤다.

 

피고인 강태석.

 

피고인 배동진.

 

피고인 조상태.

 

피고인 박진철.

 

그 이름들 아래로, 유성골재의 비밀 장부에서 터져 나온 부실시공의 진실과 횡령의 궤적이 흑청색 잉크를 타고 거침없이 적혀 내려갔다.

 

한 자 한 자 눌러쓸 때마다, 7년 전 남원역 플랫폼에서 피 흘리는 무릎으로 울부짖던 지유의 얼굴과, 삼거리 김밥집의 깨진 유리창, 그리고 흙탕물에 잠겨 통곡하던 구도심 주민들의 모습이 재환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정의(正義)는 책 속에 있는 문자가 아니었다.

 

짓밟힌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죄지은 자들에게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하는 서슬 퍼런 칼날이어야 했다.

 

새벽 세 시가 넘어갈 무렵, 두툼한 공소장철이 완성되었다.

 

재환은 만년필을 내려놓고 뻐근한 목을 뒤로 젖혔다.

 

그때였다.

 

검사실 책상 위의 유선 전화기가 요란한 비명을 지르며 울리기 시작했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새벽의 정적을 찢는 날카로운 벨 소리에 재환의 눈빛이 순식간에 매섭게 굳어졌다.

 

남원지청 내부 전선이 아닌, 외부에서 직통으로 걸려 온 전화였다.

 

재환은 천천히 수화기를 들어 귀에 댔다.

 

"전주지검 남원지청 검사실입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한동안 거칠고 쇳소리 섞인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이윽고, 지독하게 낮고 끈적끈적한 음성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성재환 검사님…… 밤늦게까지 고생이 아주 많으십니다 그려."

 

익숙하면서도 오만한 음성.

 

전주교도소 미결수 독방에 수감되어 있어야 할 자, 그러나 여전히 외부와 비밀 통신선을 쥐고 있는 자.

 

남원시장 강태석이었다.

 

"강태석."

 

재환이 서늘하게 이름을 뱉어냈다.

 

전화 너머에서 강태석의 비열하고 거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하하! 그래, 나다. 새파란 놈이 제 아비 얼굴에 먹칠하는 줄도 모르고 아주 기세등등하게 칼을 휘두르고 다닌다지? 하도급 업체 찌끄레기들을 털어서 장부를 모았다고 좋아하고 있겠지?"

 

"수감자가 교도관을 매수해 불법 통신을 사용하는 죄까지 공소장에 추가해 주지. 할 말이 그게 다인가?"

 

"애송이 놈이 끝까지 건방을 떠는구나."

 

강태석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지며 맹독 같은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성재환, 네놈이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넌 성호석의 피를 물려받은 씨종자에 불과해. 내일 아침 남원시청 도시계획과에서 삼거리 김밥집으로 특별 공문이 하나 날아갈 거다."

 

재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수화기를 꽉 쥐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무슨 짓이냐고? 법대로 하는 거지. 네놈이 좋아하는 그 빌어먹을 법대로! 삼거리 김밥집 앞 도로 무단 점용 허가 전면 취소, 그리고 내일 정오를 기해 도시정비구역 행정대집행 계고장 발부다. 중장비 포클레인 세 대가 네년이 목숨처럼 아끼는 그 지유년의 가게로 밀고 들어갈 거다. 네 놈이 법을 휘두르면, 나도 법으로 네년의 목을 비틀어버리면 그만이야."

 

강태석의 조소 어린 음성이 수화기를 타고 뱀처럼 기어들었다.

 

"어디 한번 막아봐라, 성재환 검사. 네가 그 계집년의 터전이 가루가 되는 걸 먼저 보게 될지, 날 법정에 세우는 게 먼저일지!"

 

뚝.

 

통화가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삐- 하는 차가운 기계음만이 텅 빈 검사실 안을 가득 메웠다.

 

재환은 굳어버린 채 수화기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강태석이 궁지에 몰리자, 결국 가장 잔혹하고 비열한 방식으로 한지유를 인질 삼아 칼을 휘두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창밖 요천 너머로, 핏빛 같은 새벽 여명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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