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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51화

첫 압수수색 영장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새벽의 결의

 

남원 동문 우체국 뒷골목의 어둠은 짙고 무거웠다.

 

삼거리 김밥집의 낡은 처마 끝에 매달린 놋쇠 풍경이 밤바람에 잘게 흔들리며 청아한 쇳소리를 흩뿌렸다.

 

가게 안에는 참기름의 고소한 잔향과 막 삶아낸 우엉 냄새, 그리고 종이 냄새가 눅진하게 엉켜 있었다.

 

성재환은 손가락 끝으로 옻칠 만년필의 금빛 닙을 매만졌다.

 

차갑던 금속이 체온을 머금어 미지근해질 때까지, 그의 시선은 식탁 위에 펼쳐진 두툼한 누런 서류철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남원 제1건설(南原 第一建設).

 

대표자 배동진.

 

차명 지분 45퍼센트, 실소유주 강태석.

 

최민재가 3년 동안 신문사 캐비닛과 군청 창고를 뒤지며 악착같이 필사해 모은 특별 취재 파일은 토착 권력의 더러운 내장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게 강태석의 진짜 돈주머니였어."

 

성재환의 나지막한 음성이 적막을 깼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최민재가 피로에 충혈된 눈을 비비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형. 요천 수변공원 제방 공사만이 아니야. 지난 4년간 남원시에서 발주한 관급 공사 중에 알짜배기 기초 토목은 전부 저 남원 제1건설이 하도급을 싹쓸이했어. 원도급사인 동서개발이나 한양토건은 껍데기만 걸쳐놓고 수수료 5퍼센트만 뗀 뒤에 전부 저기로 밀어준 거지. 그리고 저기서 유령 노무비와 허위 자재 대금으로 빠져나간 돈이 고스란히 강태석의 차명 비자금 계좌로 흘러들어갔어."

 

한지유는 조용히 김이 피어오르는 보리차를 두 사람의 앞에 내려놓았다.

 

투명한 유리잔에 비친 재환의 얼굴은 날이 바짝 서 있었다.

 

사법연수원 27기 수석, 서울지검 특수2부의 검사.

 

그러나 그녀가 아는 성재환은 여전히 7년 전 오작교 아래에서 흑청색 잉크병을 손에 쥐고 약속을 새기던 그 소년이었다.

 

지유는 재환의 손등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수사를 위해 수없이 펜을 쥐었을 손가락 마디에 단단한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무리하지 마, 재환아. 네가 지청에 부임하자마자 강태석을 긴급 체포하고 구속영장까지 쳤어. 저들도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

 

지유의 차분하면서도 깊은 우려가 담긴 목소리에 재환이 엷은 미소를 지었다.

 

"불이 떨어졌을 때 숨통을 끊어야 해, 지유야. 강태석은 영장실질심사를 받으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어. 전주지검 간부들과 상록골프장에서 주말에 골프 회동을 잡아 구속적부심으로 빠져나갈 그림을 그리고 있더군. 시청 비서실과 건설사 놈들이 밖에서 움직이고 있어. 놈이 구치소 안에서 사법 로비망을 가동하기 전에, 놈의 숨통을 쥐고 있는 남원 제1건설의 이중 장부를 확보해야 해."

 

재환은 품 안에서 법무부 검사 신분증과 함께 손바닥만 한 수첩을 꺼냈다.

 

지유가 선물했던 흑청색 잉크가 가득 채워진 만년필로, 그는 메모장 상단에 단호한 필체로 써 내려갔다.

 

'형법 제123조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업무상과실치사상,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횡령).'

 

먹물이 종이의 결을 타고 깊숙이 스며들었다.

 

윤하은이 시계를 내려다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써 새벽 4시 반이야. 나 병원 교대 시간 맞춰 들어가 봐야 해. 병원 원무과 쪽에도 어제부터 수상한 사람들이 들락거려. 시청 비서실 직원들이 의료원장실을 찾아왔다는 소문도 돌고."

 

민재가 하은의 얇은 겉옷을 여며주며 굳은 표정을 지었다.

 

"조심해, 하은아. 병원 안에서도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응, 너희도 조심해. 지유야, 가게 문 꼭 걸어잠그고 있어."

 

하은이 문을 열고 골목길의 서늘한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재환은 서류철을 덮어 가죽 서류가방에 쓸어 담았다.

 

"민재야, 넌 남원일보사로 돌아가서 후속 보도 준비해. 오늘 아침 9시,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에 남원 제1건설 본사와 대표 배동진의 자택, 그리고 공사 현장 현장사무소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일괄 접수한다. 영장이 떨어지는 즉시 집행할 거다."

 

"알았어, 형. 윤전실 쪽은 내가 배도식 국장 멱살을 잡고서라도 누르고 있을 테니까, 이번엔 확실하게 뿌리를 뽑아줘."

 

민재가 주먹을 불끈 쥐며 결의를 다졌다.

 

모두가 떠나고 김밥집 안에는 재환과 지유 둘만이 남았다.

 

지유는 조리대 밑에서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은박지 뭉치를 꺼내 재환의 손에 쥐여주었다.

 

"아침 거르지 마. 밥 든든하게 먹어야 힘을 쓰지."

 

재환은 은박지에 싸인 김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참기름 향이 은은하게 번지는 소박한 김밥.

 

지난 7년 동안 신림동의 차가운 고시원 방에서, 서초동 검찰청사 야근실에서 그토록 그리워하던 온기였다.

 

"반드시 끝내고 올게. 이번엔 도망치지도, 물러서지도 않아."

 

재환은 지유의 거친 손을 잠시 감싸 쥐었다.

 

그 손바닥의 흉터와 굳은살이 전해질 때마다 그의 심장은 차갑게 얼어붙으며 더욱 날카로운 칼날이 되었다.

 

"기다릴게. 7년도 기다렸는데, 하루가 대수겠어."

 

지유가 담담하게 웃어 보였다.

 

그 단단한 미소를 뒤로하고, 성재환은 김밥집의 낡은 나무문을 밀고 새벽의 안개 속으로 걸어 나갔다.

 

2. 적막 속의 남원지청

 

오전 6시 20분.

 

지리산 자락에서 흘러내린 습한 냉기가 전주지방검찰청 남원지청의 붉은 벽돌 청사를 감싸 안고 있었다.

 

녹슨 철문을 통과해 청사 뒤편 관용차 주차장으로 들어선 성재환의 지휘 세단이 멈춰 섰다.

 

차 문을 열고 내린 재환의 뒤로 서울지검 특수부 출신의 수사관들이 날렵하게 따라붙었다.

 

특별수사본부 파견 수사관 강태훈 계장이 두툼한 바인더를 품에 안은 채 재환에게 다가왔다.

 

"검사님, 남원지원 영장전담판사는 오늘 오전 9시 정각에 출근 예정입니다. 어젯밤 지청장실은 불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조동식 지청장이 전주 본청 차장검사와 대검 쪽으로 수차례 통화를 시도한 기록이 확인되었습니다."

 

"예상했던 일입니다."

 

재환은 정장 단추를 채우며 2층 검사실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다.

 

구두 굽 소리가 텅 빈 청사 복도에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

 

204호 특별수사전담 검사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수사관들이 재환을 향해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재환은 책상 위에 가죽 가방을 내려놓고 남원 제1건설의 법인 등기부등본과 관급 공사 수주 내역서를 펼쳐놓았다.

 

벽면에 걸린 화이트보드에는 이미 강태석을 정점으로 한 남원의 토착 카르텔 조직도가 붉은 매직으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동서개발, 세창물산, 한양토건, 그리고 그 모든 비자금의 세탁 창구인 남원 제1건설.

 

"강 계장님."

 

"예, 검사님."

 

"어젯밤 최 기자가 넘겨준 파일에 따르면, 남원 제1건설 본사 3층 대표실 안쪽에 별도의 비밀 금고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벽장처럼 위장되어 있지만, 그 안에 관급 공사 리베이트 장부와 차명 계좌 통장 20여 개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요천 제방 공사의 실제 철근 투입량을 조작한 원본 감리 일지도 그곳에 있을 가능성이 90퍼센트 이상입니다."

 

재환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강 계장의 눈이 번뜩였다.

 

"그렇다면 그 금고만 열면 강태석과 배동진의 목줄을 완전히 쥐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저들도 필사적일 겁니다. 압수수색 영장 청구서의 압수할 물건 목록을 최대한 포괄적으로 작성하십시오. 회계장부, 컴퓨터 하드디스크, 차명 통장, 인감도장, 현금 출납 전표, 그리고 최근 3년간의 현장 감리 일지 원본 일체. 토씨 하나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법리적으로 촘촘하게 옭아매야 합니다."

 

재환은 만년필을 쥐고 직접 영장 청구서 양식의 범죄사실 요지를 수정해 내려갔다.

 

사법연수원 시절부터 갈고닦아 온 특수수사의 칼날이었다.

 

단순한 부실시공에 따른 업무상과실치사가 아니었다.

 

시공 단가를 후려쳐 빼돌린 40억 원의 공사비가 뇌물로 둔갑해 중앙 정계와 관내 사법기관으로 흘러 들어간 궤적을 명문화하는 작업이었다.

 

만년필 촉이 종이를 긁는 날카로운 소리만이 방 안을 메웠다.

 

그때, 닫혀 있던 검사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 인물은 지청장 조동식이었다.

 

헝클어진 머리칼과 벌겋게 충혈된 눈, 반쯤 풀린 넥타이가 그가 지난밤 동안 얼마나 극심한 초조함에 시달렸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성 검사!"

 

조동식이 굵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들이닥쳤다.

 

수사관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키며 경계 태세를 취했으나, 성재환은 만년필을 내려놓지 않은 채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찍고 나서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오셨습니까, 지청장님."

 

"지금 뭐 하는 짓인가! 강태석 시장 구속영장을 친 것도 모자라, 이번엔 남원 제1건설 압수수색 영장을 준비한다고? 자네 정말 제정신이야?"

 

조동식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남원 제1건설이 어떤 곳인지 몰라서 이래? 남원 상공회의소 핵심 임원사야. 지역 토목 공사의 절반을 책임지는 향토 기업이라고! 그런 기업의 본사를 털겠다는 건 남원 지역 경제 전체를 마비시키겠다는 소리야!"

 

재환은 조동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너무도 서늘하고 깊어, 조동식은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히는 압박감을 느꼈다.

 

"향토 기업이 아니라, 범죄 수익의 은닉처입니다."

 

재환이 서류 한 장을 조동식의 코앞에 내밀었다.

 

"요천 제방 붕괴 현장에서 수거한 콘크리트 시편 검사 결과입니다. 규격 철근의 3분의 1만 들어갔고, 방수 시멘트 대신 흙 섞인 잡석을 퍼부었습니다. 그 대가로 빼돌려진 40억 원이 남원 제1건설의 차명 계좌로 들어갔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하정리와 동충동의 주민 수백 명이 물바다에 잠겼고, 상인들의 삶의 터전이 흙탕물에 쓸려나갔습니다. 지역 경제를 마비시킨 건 검찰이 아니라, 바로 그 도둑놈들입니다."

 

"성 검사!"

 

"그리고 지청장님."

 

재환이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큰 키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이 좁은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이번 수사는 대검찰청 특별수사본부의 정식 지휘를 받고 있으며, 전주지검장의 직통 전결 사안입니다. 관내 수사 지휘권은 특별수사전담 검사인 저 성재환에게 있습니다. 혹시 남원 제1건설의 배동진 대표와 사적인 연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왜 정당한 영장 청구를 가로막으려 하십니까?"

 

"뭐, 뭐라고? 이 버릇없는 놈이! 내가 네 상관이야!"

 

"상관이기 이전에 대한민국 검사입니다."

 

재환의 음성은 낮았지만 비수처럼 날카로웠다.

 

"법복을 입고 거악의 범죄를 눈감아주는 순간, 검사는 공범이 됩니다. 지청장님께서 공범의 자리에 서시겠다면, 저 역시 법에 따라 조치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동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성호석의 아들이라는 배경 뒤에 숨겨진, 오직 법리 하나만으로 상대를 압살해 버리는 이 젊은 검사의 기세는 조동식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넘어서 있었다.

 

조동식은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쥐었다가, 혀를 차며 돌아섰다.

 

"좋아. 어디 네 마음대로 해봐. 법원에서 영장이 순순히 나올 것 같아? 남원이 네 생각처럼 그렇게 만만한 곳인 줄 아나!"

 

쾅!

 

문이 부서질 듯 닫혔다.

 

강 계장이 마른침을 삼키며 재환을 바라보았다.

 

"검사님, 괜찮으시겠습니까? 지청장이 저 정도로 나오는 걸 보면 법원 쪽에도 손을 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재환은 차분하게 영장 청구서에 자신의 서명을 날인했다.

 

선명한 붉은색 인주가 성재환(成宰桓) 세 글자 위에 찍혔다.

 

"법관이 법을 버리지 않는 한, 이 영장은 기각될 수 없습니다. 오전 8시 50분, 남원지원으로 출발합니다."

 

3.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

 

오전 8시 55분.

 

남원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완만한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 청사.

 

법원 마당에는 늦은 장마의 잔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성재환은 검은색 우산을 받쳐 들고 법원 종합민원실 계단을 올랐다.

 

그의 뒤를 따르는 강 계장의 손에는 '압수·수색·검증 영장 청구서'가 담긴 가죽 결재판이 들려 있었다.

 

법원 로비는 아침부터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어제 강태석 남원시장의 영장실질심사가 열렸던 탓에, 청사 안팎에는 남원일보를 비롯한 지방 언론사 기자들과 시청 관계자 몇몇이 서성거리며 검찰의 동향을 살피고 있었다.

 

재환이 모습을 드러내자 수군거리는 소리가 번져나갔다.

 

"저 사람이야. 강태석 시장한테 수갑 채운 대검 특수부 검사."

 

"새벽에 남원지청 지청장실에서 고성이 오갔다던데, 또 어딜 털려는 거지?"

 

재환은 시선조차 주지 않고 곧장 2층 영장전담판사실로 향했다.

 

문패에는 '판사 문성현'이라는 정갈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재환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노크를 했다.

 

"들어오세요."

 

안에서 들려온 차분한 목소리에 문을 열고 들어섰다.

 

서재처럼 단정하게 정리된 방 안에서 안경을 쓴 40대 중반의 판사 문성현이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문성현은 남원지원에 부임한 지 1년 남짓 된 인물로, 원칙주의적 성향이 강해 지역 토착 세력과의 유착 소문이 없는 몇 안 되는 법관 중 하나였다.

 

"전주지방검찰청 남원지청 특별수사전담 검사 성재환입니다."

 

재환이 정중하게 묵념을 표했다.

 

문성현 판사가 안경을 고쳐 쓰며 고개를 들었다.

 

"성재환 검사. 어제 강태석 피의자에 대한 영장실질심사 조서를 보았습니다. 아주 치밀하고 서슬이 퍼렇더군요. 그런데 오늘은 또 무슨 일입니까?"

 

재환은 강 계장에게서 결재판을 건네받아 문 판사의 책상 위에 단정히 놓았다.

 

"주식회사 남원 제1건설 본사 및 대표 배동진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합니다."

 

문 판사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남원 제1건설? 요천 제방 공사의 실제 하도급 업체로 지목된 곳이군요."

 

"그렇습니다. 단순한 하도급 비리가 아닙니다. 강태석 피의자가 차명 지분을 통해 실소유하고 있는 범죄 수익의 은닉 저수지입니다. 요천 제방 붕괴로 수백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고, 40억 원대의 공사비가 불법 편취되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피의자 측의 증거 인멸 시도가 실시간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신속한 압수수색이 집행되지 않으면, 이중 장부와 비자금 세탁 계좌 원장이 소각될 위험이 극히 높습니다."

 

문 판사는 천천히 영장 청구서를 넘겼다.

 

재환이 밤을 새워 작성한 범죄사실 요지와 소명 자료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최민재 기자가 목숨을 걸고 입수한 관급 공사 담합 일지, 콘크리트 시편의 강도 시험 성적서, 그리고 남원상호신용금고 차명 계좌 12개의 자금 흐름도.

 

법리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소명이었다.

 

문 판사의 시선이 서류의 맨 마지막 장에 멈추었다.

 

'압수할 장소: 전북 남원시 하정동 45-2 남원 제1건설 사옥 전 층 및 대표실 내부 비밀 금고.'

 

"비밀 금고의 존재까지 특정을 해두었군요. 소명이 매우 구체적입니다."

 

문 판사가 안경을 벗으며 재환을 응시했다.

 

"하지만 성 검사, 남원 제1건설은 관내 토건 업계의 중심입니다. 이 영장이 발부되어 집행되는 순간, 남원 전체가 벌집을 쑤신 듯 요동칠 겁니다. 검찰 내부에서도 상당한 반발이 있을 텐데요."

 

"법은 힘 있는 자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재환의 대답에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져야 합니다. 둑이 터져 삶의 터전을 잃은 남원 시민들에게 사법부가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법 앞에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죄를 지은 자가 반드시 단죄받는다는 진실뿐입니다."

 

'Fiat justitia, ruat caelum.'

 

만년필 캡에 각인된 그 법언이 재환의 입을 통해 무겁게 울려 퍼졌다.

 

문 판사는 재환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젊은 검사가 단순히 출세를 위해 칼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 눈빛에 서린 깊은 분노와 책임감이 증명하고 있었다.

 

문 판사가 펜을 집어 들었다.

 

"검찰의 청구 사유가 타당하고, 증거 인멸의 우려가 매우 농후하다고 판단됩니다."

 

사각사각.

 

문 판사의 결재 서명이 영장 원본 위에 새겨졌다.

 

'압수·수색·검증 영장 발부. 유효기간: 발부일로부터 7일간.'

 

쿵!

 

법원의 붉은 관인이 찍히는 순간, 재환의 가슴속에서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활시위가 튕겨 나갔다.

 

"감사합니다, 판사님."

 

"성 검사, 부디 진실을 밝혀내길 바랍니다."

 

재환은 영장 원본을 품에 소중히 넣고 영장전담판사실을 빠져나왔다.

 

복도를 걸어 내려가는 그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남원 제1건설 본사로 들이닥쳐 저들의 숨통을 끊어놓는 일뿐이었다.

 

4. 닫힌 문 뒤의 밀담

 

성재환 검사가 판사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선 직후였다.

 

영장전담판사실 옆, 법원 행정처 사무관실의 문틈이 조용히 닫혔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50대 초반의 계장 송진호가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송 계장은 남원에서 나고 자란 토착 공무원으로, 10년 전 자신의 아들이 뺑소니 사고를 쳤을 때 강태석 당시 삼거리 토건 회장의 도움으로 합의금을 치르고 형사 처벌을 면했던 '강태석 장학생' 중 한 명이었다.

 

다이얼을 돌리는 송 계장의 손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달칵.

 

신호음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상대방이 수화기를 낚아챘다.

 

"누구야."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강태석의 비서실장이었다.

 

"저, 저 송 계장입니다."

 

송 계장은 복도 쪽을 힐끔 살피며 목소리를 극도로 낮추었다.

 

"방금 성재환 검사가 나갔습니다."

 

"영장은? 문성현 판사가 결재했습니까?"

 

비서실장의 목소리가 벼락처럼 쏘아붙였다.

 

"예, 발부됐습니다. 남원 제1건설 본사 전 층하고 배동진 대표 자택, 현장사무소까지 모조리 털겠다고 영장을 쳤습니다. 지금 성 검사가 영장 원본을 들고 청사를 빠져나갔으니, 길어야 30분입니다. 30분 안에 들이닥칠 겁니다!"

 

"제길!"

 

수화기 너머에서 거친 욕설과 함께 재떨이가 깨지는 듯한 파열음이 들렸다.

 

"확실합니까? 대상에 본사 3층 대표실도 포함되어 있습니까?"

 

"포함 정도가 아닙니다. 영장 목록에 '대표실 내부 비밀 금고'라고 콕 집어서 적시되어 있었습니다. 성 검사 그놈, 이미 금고 위치까지 다 꿰고 있습니다!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다 끝장납니다!"

 

"알겠습니다. 송 계장, 입 닥치고 계세요. 수사가 끝나면 시장님이 알아서 챙겨줄 테니까."

 

뚝.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겼다.

 

송 계장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손수건으로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냈다.

 

창밖을 내다보니, 성재환 검사의 검은 세단이 빗줄기를 뚫고 법원 정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지청에서 합류한 세 대의 승합차가 무서운 속도로 남원 시내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5. 기름 냄새와 소각로

 

전북 남원시 하정동, 4층짜리 회색 석조 건물인 남원 제1건설 본사.

 

비가 내리는 우중충한 날씨 속에서도 건물 주변은 묘하게 적막했다.

 

대표실이 위치한 3층 집무실.

 

커튼이 두껍게 드리워진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남원 제1건설 대표 배동진이 미친 사람처럼 서류를 캐비닛에서 끄집어내고 있었다.

 

그의 셔츠는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안경은 콧등 아래로 흘러내려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대형 양철 드럼통이 놓여 있었고, 그 안에서 시뻘건 불길과 함께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기름 냄새와 종이가 타들어 가는 매캐한 악취가 집무실 안을 가득 메웠다.

 

"빨리, 빨리 던져!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배동진이 소리를 지르며 부하 직원들에게 서류 뭉치를 내던졌다.

 

조폭 출신의 덩치 큰 사내 세 명이 땀을 뻘뻘 흘리며 서류철을 뜯어내 드럼통 안으로 쑤셔 넣고 있었다.

 

요천 수변공원 제방 공사의 실제 철근 매입 전표, 무자료 유류 대금 청구서, 남원상호신용금고 차명 통장 사본들이 붉은 불꽃 속에서 순식간에 재로 변해갔다.

 

철컥.

 

비밀 벽장이 열리며 강태석의 비서실장이 뛰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기름통이 들려 있었다.

 

"배 대표! 지금 성재환 검사 차가 하정동 로터리를 통과했답니다! 5분도 안 남았어요!"

 

"뭐, 5분? 아직 금고 절반도 못 태웠어! 강 시장님 비자금 원장하고 시청 뇌물 리스트가 아직 남아 있단 말이야!"

 

배동진이 새파랗게 질려 금고 안쪽을 가리켰다.

 

금고 안에는 두툼한 가죽 바인더 세 권이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지난 5년간 남원시청 간부들과 시의원들, 그리고 도청 토목과 라인에 뿌려진 뇌물의 날짜와 액수, 수령자의 친필 서명이 담긴 절대 열려서는 안 될 판도라의 상자였다.

 

비서실장이 이를 악물며 기름통의 뚜껑을 비틀어 열었다.

 

"그건 불로 태울 시간이 없습니다. 가지고 튑니다!"

 

"어, 어디로?"

 

"뒷문 주차장에 번호판 뗀 합판 트럭을 대기시켜 놨습니다. 그걸로 싣고 외곽 폐차장으로 빼돌려야 합니다. 여기 있는 잡서류들만 태워서 시간을 벌고, 핵심 원장은 차로 뺍니다! 당장 챙기세요!"

 

배동진은 떨리는 손으로 가죽 바인더 세 권을 낚아채 여행용 가방에 쑤셔 넣었다.

 

자크를 채우는 손가락이 미친 듯이 떨렸다.

 

드럼통 속에서는 서류들이 타오르며 뿜어내는 검은 재가 천장 환풍기를 타고 건물 옥상으로 뿜어져 나가고 있었다.

 

하정동 골목길 위로 매캐한 종이 탄내가 비안개와 섞여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끼이이익-!"

 

빗길을 찢는 날카로운 타이어 마찰음이 건물 앞마당을 뒤흔들었다.

 

이어지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

 

"왔다! 검찰 놈들이야!"

 

망을 보던 사내가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배동진은 숨이 멎을 것 같은 공포에 질려 여행용 가방을 품에 안았다.

 

"비서실장! 뒷문, 뒷문으로 가자!"

 

"서둘러요!"

 

두 사람은 어두운 비상계단을 향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6. 빗속의 돌입

 

쾅-!

 

남원 제1건설 본사 1층의 강화유리 출입문이 거칠게 밀려 열렸다.

 

"검찰입니다! 전원 그 자리에 멈추세요!"

 

특수부 수사관 강태훈 계장의 우렁찬 고함과 함께 푸른색 완장을 찬 열두 명의 검찰 수사관들이 로비로 쏟아져 들어왔다.

 

경비원 두 명이 몽둥이를 들고 가로막으려 했으나, 건장한 수사관들의 완력에 밀려 바닥에 내리꽂혔다.

 

"공무집행방해로 현행범 체포합니다! 손 떼세요!"

 

로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놀란 여직원들의 비명과 흩날리는 전단지들 사이로, 성재환 검사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검은색 레인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들어선 그의 눈빛은 맹수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코끝을 찌르는 냄새.

 

비 냄새 사이로 섞여 드는 역겨운 기름 냄새와 종이가 타는 냄새.

 

재환의 미간이 무섭게 찌푸려졌다.

 

'태우고 있다.'

 

직관적인 확신이었다.

 

남원지원에서 영장이 발부된 지 불과 25분 만이었다.

 

이동 시간을 고려하면, 영장이 발부되자마자 누군가가 이곳으로 정보를 흘리지 않고서는 이토록 기민하게 소각 작업을 시작할 수 없었다.

 

"강 계장! 3층 대표실로! 전원 진입해!"

 

"예! 3층으로 올라갑니다!"

 

수사관들이 계단을 박차고 뛰어올라갔다.

 

재환 역시 레인코트를 젖히고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올랐다.

 

3층 복도에 다다르자 매캐한 연기가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기침이 터져 나올 정도로 짙은 연기 너머로, 대표실 철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부숴!"

 

강 계장의 지시에 수사관 두 명이 휴대용 유압 절단기와 해머를 들이댔다.

 

쾅!

 

쾅!

 

쩌정!

 

경첩이 뜯겨 나가며 철문이 힘없이 나뒹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뿜어져 나오는 유독가스와 열기.

 

방 한가운데 양철 드럼통 속에서 서류들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남아 있던 조폭 사내 두 명이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저항하려 했으나, 최루가스를 뿌리며 진입한 수사관들에게 순식간에 제압당해 바닥에 짓눌렸다.

 

"소화기! 소화기 가져와! 불 꺼!"

 

수사관들이 분말 소화기를 드럼통 안으로 난사했다.

 

치이익- 소리와 함께 하얀 분말이 방 안을 뒤덮으며 불길이 잦아들었지만, 드럼통 안의 서류들은 이미 80퍼센트 이상 검은 재로 화해 있었다.

 

성재환은 소화기 분말을 털어내며 방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열려 있는 비밀 벽장.

 

그 안의 육중한 금고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휑하니 뚫린 금고 바닥에는 방금 전까지 무언가가 놓여 있던 사각형의 먼지 자국만이 선명했다.

 

"놓쳤습니다, 검사님! 배동진과 비서실장 놈들이 핵심 장부를 챙겨서 방금 비상구로 빠져나간 것 같습니다!"

 

무전기를 든 수사관이 다급하게 외쳤다.

 

재환은 재로 변해버린 드럼통 속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활짝 열린 금고의 내부를 바라보았다.

 

완벽한 기습이어야 했던 첫 압수수색이었다.

 

남원지청의 외압을 뚫고, 법원에서 정식 영장을 발부받아 30분도 채 되지 않아 들이닥친 현장이었다.

 

그런데도 저들은 이미 불을 지르고 금고를 비운 채 도주했다.

 

재환의 입술에서 차가운 실소가 흘러나왔다.

 

'정보가 샜다.'

 

남원지원 판사실에서 영장이 떨어지고 내가 차에 올라탄 그 찰나의 순간.

 

법원 내부의 누군가가, 혹은 검찰 내부의 첩자가 강태석 측에 영장 청구와 발부 사실을 그대로 넘겨준 것이다.

 

"검사님! 뒷문 주차장에서 트럭 한 대가 차단기를 부수고 도주했습니다! 외곽 국도 쪽으로 달아나고 있습니다!"

 

무전기에서 다급한 보고가 터져 나왔다.

 

수사관들의 얼굴에 낭패감이 역력했다.

 

기껏 얻어낸 첫 압수수색 영장이 눈앞에서 무력화될 위기였다.

 

그러나 성재환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갑고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재환은 품 안에서 검은 옻칠 만년필을 꺼내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지유가 채워준 흑청색 잉크의 서늘한 무게감이 손끝을 타고 전해져 왔다.

 

"추적팀, 즉시 차량 추적 개시하십시오. 관내 경찰은 믿을 수 없으니, 특수부 관용차량으로 직접 쫓습니다."

 

재환의 명령은 차분했고, 그래서 더 서슬이 퍼랬다.

 

"그리고 강 계장님."

 

"예, 검사님!"

 

"현장에 남은 재들을 한 조각도 버리지 말고 전부 수거하세요. 국과수에 의뢰해 타다 남은 조각들의 글자를 복원할 겁니다. 그리고 이 방의 지문, 통화 내역,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흙먼지 하나까지 모조리 압수목록에 올리십시오."

 

재환은 창가로 다가가 빗물이 흘러내리는 유리창 너머를 내려다보았다.

 

저 멀리 회색 빗줄기 속으로 남원 시가지가 흐릿하게 펼쳐져 있었다.

 

광한루원의 팽나무도, 요천의 흙탕물도, 그리고 동문 우체국 뒷골목의 작은 김밥집도 그 안개 속에 잠겨 있었다.

 

적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남원의 주인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법원의 영장을 비웃고, 정보를 빼돌려 증거를 인멸하면 이 그물망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었다.

 

'아니, 너희는 빠져나가지 못해.'

 

재환은 주먹을 쥐었다.

 

손바닥 안에서 만년필의 각인이 살을 파고들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법원 내부의 첩자가 누구든, 검찰 내부의 공범이 누구든, 이제는 그 썩은 뿌리까지 모조리 뽑아낼 차례였다.

 

첫 번째 칼날은 허공을 갈랐을지언정, 검사의 손에 쥐인 칼자루는 더욱 단단해져 있었다.

 

비안개 낀 남원의 하늘 위로, 거대한 전쟁의 두 번째 막이 서서히 오르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