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의 응원
1. 아침 조례와 붉어진 귀밑
이른 아침의 교실은 간밤의 냉기를 채 털어내지 못한 채 웅성거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칠판 한구석에는 큼지막한 분필 글씨로 춘향제 기념 연합 학생 미술전과 교내 축제 부스 설치 일정이 적혀 있었다.
성재환(成宰桓)은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며 손가락 사이에 쥔 검은 옻칠 만년필을 조용히 매만졌다.
매끄러운 바디에 새겨진 가문의 낙인 같던 이름과 법언이 손끝에 닿을 때마다, 어젯밤 책상 위에 휘갈겨 썼던 부친 성호석(成浩碩)과 한석규(韓碩奎)라는 두 이름이 망막 위로 생생히 겹쳐 올랐다.
뒷덜미를 짓누르는 죄책감과 비밀의 무게는 하룻밤 사이 한층 더 무겁게 굳어져 있었다.
"야, 성재환."
등 뒤에서 툭 튀어나온 굵직한 손가락이 재환의 어깨를 찌르듯 쳤다.
"너 어제 지유네 집에서 자전거 빌려 타고 사라졌을 때부터 알아봤다. 표정이 왜 그렇게 사형 선고받은 피고인 같냐?"
최민재(崔敏在)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앞자리 의자를 거꾸로 돌려 털썩 걸터앉았다.
"어젯밤에 관사 들어가서 시장님한테 제대로 털린 거냐?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거냐?"
"……아냐, 그런 거."
재환은 서둘러 만년필을 교복 안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냥 요천 둑길에서 바람 좀 쐬고 들어갔을 뿐이야."
"바람만 쐰 놈 눈빛이 그래? 너 어제 지유랑 단둘이 무슨 대화 나눴는지 내가 끝까지 안 물어볼 줄 알았지?"
민재가 턱을 괴며 재환의 굳은 얼굴을 샅샅이 뜯어보았다.
"지유 걔, 평소에는 말수도 적고 웃는 것도 조심스러운데, 어제 너 만년필 찾아줄 때 보니까 딴사람 같더라. 너도 걔 쳐다볼 때 눈빛 아주 가관이었던 거 아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쓸데없는 소리인지 아닌지는 네 붉어진 귀밑이 다 말해주고 있거든, 성재환 군?"
민재가 킬킬거리며 재환의 명찰을 툭 건드렸다.
그 장난기 어린 목소리 덕분에 재환은 가슴속을 짓누르던 토지 구획 정리 서류의 서늘한 잔상을 간신히 밀어낼 수 있었다.
그때 교실 앞문이 드르륵 열리며 학생부 주임이 들어섰고, 아이들의 소음은 일순간에 잦아들었다.
자리에 바로 앉은 민재가 뒤를 돌아보며 재환에게만 들릴 법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 방과 후에 남원여고 쪽문 앞으로 가야 하는 거 알지? 하은이랑 지유가 이번 축제 홍보 현수막이랑 춘향제 전시 부스 도면 초안 가져온단다. 딴생각 말고 칼같이 튀어와라."
재환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교복 품속에 든 만년필의 단단한 감촉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지유의 맑은 눈망울과 그 속에 담겨 있던 과수원의 비극이, 햇살이 부서지는 교탁 너머로 아련히 떠올랐다.
2. 여고 앞 플라타너스 아래에서
방과 후의 햇살은 요천에서 불어오는 강바람을 타고 남원여고 담장 위로 부드럽게 쏟아져 내렸다.
학교 앞 오래된 분식점과 문구점 사이, 수령이 제법 된 플라타너스 나무 그늘 아래에 최민재와 성재환이 나란히 서 있었다.
재환은 가방끈을 쥔 손을 연신 쥐락펴락하며 골목 안쪽 교문을 주시했다.
교문 너머로 여고생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파도처럼 밀려나오고 있었다.
"야, 성재환. 너 솔직히 말해봐라. 지금 전교 1등 성재환이 아니라 첫사랑 기다리는 순정 만화 남주인공 꼴인 거 아냐?"
민재가 곁눈질로 짓궂게 놀려댔다.
"그냥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와서 기다리는 것뿐이야."
"말은 청산유수지. 어제 김밥집에서부터 오늘 아침까지 네 꼬라지를 보고도 모르면 그게 친구냐, 남이지?"
민재가 헛기침을 삼키며 목소리를 살짝 낮췄다.
"난 네가 시장 아들이라서 부러운 적 한 번도 없었다. 맨날 숨 막히는 관사에서 두꺼운 법서나 파고 있는 꼴이 솔직히 불쌍했거든. 근데 어제 지유랑 있을 때 너, 태어나서 제일 사람다운 표정 짓더라."
재환의 발끝이 우뚝 멈췄다.
민재의 말은 농담 속에 뼈가 있었고, 그 뼈는 재환의 마음 가장 취약한 지점을 정확히 건드렸다.
"야, 저기 나온다!"
민재가 손을 번쩍 들며 크게 흔들었다.
교문 쪽에서 남색 교복 치마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두 여학생이 걸어오고 있었다.
성큼성큼 걸어오며 손을 흔드는 윤하은(尹夏恩)과, 커다란 화구통을 어깨에 메고 조심스럽게 발을 맞추는 한지유(韓智唯)였다.
지유는 재환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뺨을 발그레 붉히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어제 요천 둑길에서 노을을 함께 바라보며 나누었던 그 내밀한 다짐이, 두 사람의 시선이 얽히는 찰나에 전류처럼 흘렀다.
"민재 너 목소리 좀 줄여! 전교생이 다 쳐다보잖아!"
하은이 민재의 팔뚝을 찰싹 때리며 눈을 흘겼다.
"아얏, 넌 손이 매운 게 아주 시장 골목 대장 노릇 하던 버릇 못 버렸지?"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재환은 자연스럽게 지유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지유의 어깨에 걸린 무거운 화구통이 눈에 들어왔다.
"지유야, 그거 줘. 내가 들게."
재환이 조심스레 손을 뻗자 지유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아냐, 재환아. 이거 별로 안 무거워. 그냥 도화지랑 물감 몇 개 든 건데 뭐."
"하루 종일 메고 다녔잖아. 줘, 광한루원까지 걸어가려면 멀어."
재환은 단호하지만 다정한 손길로 화구통 끈을 넘겨받아 자신의 어깨에 둘러멨다.
손끝이 스치는 순간 지유의 귀밑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하은과 민재가 서로 눈짓을 교환하며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 웬일이니? 남원고 냉혈한 전교 1등께서 짐꾼을 자처하시네?"
하은이 입을 가리며 놀려대자 지유는 어쩔 줄 몰라 하며 하은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하은아, 제발……."
네 사람은 완연한 봄바람을 맞으며 광한루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벚꽃 잎이 인도 위로 분분히 흩날리고 있었고, 재환은 곁에서 조용히 보폭을 맞추는 지유의 작은 그림자를 눈에 담으며 가슴 한구석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3. 완월정 마루와 펼쳐진 도면
광한루원(廣寒樓苑) 안으로 들어서자 시내의 번잡함은 물러나고 맑은 연못과 고색창연한 누각이 차분한 정취를 드리웠다.
연못 위에 세워진 완월정(玩月亭) 넓은 누마루에는 평일 늦은 오후라 인적이 드물었다.
신발을 벗고 올라선 마루는 매끄럽게 닦여 있었고, 연못 너머로 솔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자, 일단 다들 앉아봐. 이번 연합 축제 부스 배치도랑 춘향제 거리 미술전 기획안인데, 지유가 밤새도록 다듬어 온 거야."
하은이 가방에서 커다란 모조지와 크로키북을 꺼내 마루 한가운데에 쫙 펼쳤다.
모조지 위에는 남원 시내 고교 연합 축제 부스의 동선과 함께, 광한루원 외곽 돌담길을 따라 시민들의 추억을 전시할 거리 갤러리의 스케치가 정교한 펜선으로 그려져 있었다.
각 구역마다 연필로 꼼꼼하게 적힌 설명과 수채화 물감으로 엷게 채색된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거…… 지유 네가 다 그린 거야?"
재환이 감탄 어린 눈빛으로 도면을 내려다보았다.
도면 한구석에 그려진 돌담길 풍경에는 낡았지만 따스한 남원의 골목 정서가 오롯이 배어 있었다.
단순한 도면이 아니라 남원을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이 깃든 하나의 작품이었다.
"응, 남원고랑 우리 학교가 같이 쓰는 공간이라 동선이 엉키지 않게 짜봤어. 춘향제 기간에는 타지에서도 손님들이 많이 오시니까, 우리 고향의 옛 모습이랑 골목길 풍경을 수채화로 담아서 돌담에 걸면 좋을 것 같아서……."
지유가 쑥스러운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설명했다.
"완벽하네. 미술관 큐레이터가 와서 기획했다고 해도 믿겠다."
재환의 진심 어린 칭찬에 지유의 얼굴에 수줍고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근데 문제가 하나 있다."
민재가 턱을 괴고 도면의 한 지점을 짚었다.
"이 메인 부스 세우는 합판이랑 천막, 그리고 돌담길에 갤러리 와이어 거는 작업 말이야. 이거 우리 넷이서 주말 안에 다 할 수 있겠냐? 학생회 놈들은 벌써부터 생색만 내고 일은 우리한테 다 떠넘길 태세던데."
"맞아, 학생회장 선배는 축제 총괄이란 핑계로 결재만 하고 현장 작업은 거들떠도 안 보더라."
하은이 팔짱을 끼며 투덜거렸다.
"걱정하지 마. 목재랑 합판 옮기는 건 내가 할 테니까. 춘향교 앞 목재소 아저씨가 우리 집이랑 잘 아시거든. 내가 리어카 빌려서 토요일 아침에 다 실어 나를게."
민재가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치며 든든하게 장담했다.
"그럼 나는 축제 추진위원회 측이랑 협의해서 광한루원 관리사무소에 야간 작업 허가서랑 전시 승인 공문 받아올게. 학교 측 도장은 내가 내일 학생부 통해서 받아둘 수 있어."
재환이 나서서 행정적인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자청했다.
시장 아들이라는 지위를 결코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차분하고 치밀하게 공적인 절차를 챙기는 재환의 태도에 세 사람의 얼굴에 안도감이 감돌았다.
"역시 전교 1등이라 서류 일은 기가 막히게 맡네. 좋아, 그럼 행동대장은 최민재, 행정 보급은 성재환, 총괄 디자인은 한지유, 현장 감독 및 보급관은 이 윤하은 님이 맡는다! 불만 있는 사람?"
하은이 당차게 선언하자, 완월정 마루 위로 네 사람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번져나갔다.
연못 수면 위로 드리운 수양버들 가지가 봄바람에 살랑이며 청춘들의 웃음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4. 수양버들 아래 팽나무 그늘
회의를 마친 후 민재와 하은은 축제 준비용 붓과 노끈을 사러 읍내 지물포로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완월정을 내려온 재환과 지유는 자연스럽게 연못을 돌아 춘향관 뒤란 오솔길로 향했다.
그곳에는 며칠 전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마음의 빗장을 열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수백 년 된 팽나무 고목이 변함없는 위용으로 서 있었다.
팽나무 잎사귀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햇살이 흙길 위에 점점이 흩어졌다.
"지유야."
침묵을 깨고 재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잘 잤어?"
어제 요천 둑길에서 과수원의 상처를 털어놓았던 지유의 눈물이 내내 마음에 걸려 있던 터였다.
지유는 걸음을 멈추고 팽나무 둥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응. 신기하게도 어젯밤엔 아주 오랜만에 악몽을 안 꿨어. 늘 꿈속에서 아버지가 쓰러지시던 그 과수원 흙탕길이 나왔었는데…… 어젯밤엔 그냥, 바람 부는 강둑길만 보였어."
지유가 돌아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 미소는 연약해 보이면서도 깊은 내면의 단단함을 품고 있었다.
"재환이 네가 남원을 잊지 않겠다고, 억울한 사람을 지키는 법을 세우겠다고 말해줘서 그런가 봐. 그 말이 참…… 따뜻했어."
그 순간 재환의 심장이 바늘로 찔린 듯 아릿하게 저려왔다.
지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그 기름진 과수원을 빼앗아 간 원흉의 이름이, 바로 자신의 방 책상 위에 적혀 있던 '남원시장 성호석'이라는 진실을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너를 속이려는 게 아니야, 지유야.
내가 반드시…… 그 억울함의 뿌리를 찾아내서 바로잡을 거야.'
재환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죄책감을 삼키며 교복 주머니 속의 만년필을 꽉 쥐었다.
"약속해, 지유야. 내가 한 말은 빈말이 아니야. 세상이 법이란 이름으로 힘없는 사람을 짓밟지 못하게 할 거야. 네가 그린 이 아름다운 남원의 풍경도, 네가 간직한 기억도…… 내가 끝까지 지킬게."
재환의 떨리지만 확신에 찬 음성에 지유의 눈동자가 깊게 흔들렸다.
지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서 작고 네모난 종이 상자를 꺼내 재환에게 내밀었다.
"이거…… 받아줄래?"
"이게 뭔데?"
"어제 네 만년필 돌려주면서 보니까, 잉크가 거의 바닥났더라고. 우리 집 앞 문구점에서 제일 좋은 흑청색 잉크로 샀어. 네가 앞으로 쓸 법서랑 정의로운 글들에 어울리는 색이었으면 좋겠어서."
지유의 작은 손바닥 위에 올려진 것은 단정한 유리병에 담긴 잉크였다.
비싼 수입 잉크는 아니었지만, 여고생의 얇은 용돈과 지극한 정성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선물이었다.
재환은 떨리는 손으로 그 잉크병을 받았다.
병을 감싼 종이 포장지 너머로 지유의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고마워, 지유야. 내 평생…… 가장 소중한 잉크가 될 거야."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더 이상 단순한 친구의 그것이 아니었다.
바람에 날린 벚꽃 잎 하나가 지유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고, 재환은 숨을 죽인 채 그 꽃잎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지유의 뺨이 석양보다 붉게 물들었다.
5. 요천 물길과 네 사람의 맹세
해 질 무렵, 지물포에서 한가득 재료를 사 들고 온 민재와 하은이 합류했다.
네 사람은 광한루원을 나와 요천 제방 둑길로 향했다.
강물은 서산으로 기우는 붉은 노을을 받아 황금빛과 보랏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둑길 잔디밭에 짐을 내려놓은 네 사람은 나란히 앉아 헐떡이는 숨을 골랐다.
"야, 진짜 축제 준비하다가 사람 잡겠다! 그래도 이렇게 다 모여서 보니까 뭔가 진짜 큰일 하나 해내는 기분인데?"
민재가 풀밭에 대자로 드러누우며 호탕하게 웃었다.
"기분만 내지 말고 주말에 리어카 끌고 늦지나 마셔. 1분이라도 늦으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하은이 핀잔을 주면서도 가방에서 시원한 보리차 주전자를 꺼내 넷에게 종이컵으로 나누어 주었다.
구수한 보리차를 한 모금 들이켠 지유가 강 너머 지리산 자락을 바라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난 남원이 참 좋아. 때로는 슬픈 일도 많았고 아픈 기억도 있지만…… 요천 물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거든. 너희랑 이렇게 축제를 준비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
지유의 진솔한 고백에 하은이 지유의 어깨동무를 하며 따뜻하게 웃었다.
"지유 넌 너무 착해서 탈이야. 하지만 걱정 마. 네 곁엔 의리의 윤하은이 있고, 힘쓰는 최민재 머슴이 있으니까."
"야! 머슴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잖아!"
민재가 발끈하며 일어나 앉더니,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셋을 둘러보았다.
"근데 난 진짜 진심이다. 재환이 너는 서울 명문대로 가설랑 큰 법조인 될 거고, 하은이 넌 서울로 디자인 유학이라도 갈지 모르지만…… 난 남원에 남을 거다."
뜻밖의 진지한 선언에 재환과 지유, 하은 모두 민재를 쳐다보았다.
"남원에 남아서 뭐 하게?"
하은이 묻자 민재가 씩 웃으며 요천 강물을 가리켰다.
"난 공부 머리는 없어도 사람 챙기는 건 일등이잖아. 남원에 뼈를 묻으면서 경찰이 되든, 면장이 되든, 아니면 의용소방대장을 하든 해서 내 고향 지킬 거다. 그래야 나중에 너희가 세상에 나가서 풍파를 겪고 지쳤을 때, 언제든 남원에 내려와 쉴 수 있는 든든한 언덕이 되어주지 않겠냐?"
민재의 말은 투박했지만 가슴을 울리는 묵직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재환은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민재야……."
"특히 재환이 너, 그리고 지유 너희 둘. 내가 두 눈 부릅뜨고 남원에서 버티고 서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생기면 무조건 나 찾아와라. 내가 둘 사이의 튼튼한 오작교가 되어줄 테니까!"
민재가 재환과 지유를 번갈아 가리키며 윙크를 던졌다.
지유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고, 재환은 말없이 민재의 단단한 어깨를 감싸 쥐었다.
친구들의 무조건적인 믿음과 온기 속에서, 재환은 자신이 짊어진 비밀과 싸워나갈 용기를 얻고 있었다.
'그래, 지유 곁에는 나 혼자만이 아니야.
우리 모두가 지유를 지키고 있어.'
노을빛이 네 청춘의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요천 강물 위로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6. 관사의 서늘한 저녁 식탁
밤이 깊어 관사로 돌아온 재환의 발걸음은 다시금 무거워졌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숨 막히는 적막과 함께 묵직한 가죽 냄새가 코를 찔렀다.
1층 식당에는 남원시장 성호석이 단정한 정장 셔츠 차림으로 홀로 식탁 상석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숟가락과 사기그릇이 부딪히는 규칙적인 소리만이 적막을 깨뜨릴 뿐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재환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성호석은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낮게 깔린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늦는구나. 고등학교 3학년의 시간은 금보다 귀하다는 것을 내 누차 일렀을 텐데."
"축제 연합 부스와 춘향제 전시 관련해서 학생회 일을 돕느라 늦었습니다."
재환은 목소리의 떨림을 억누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성호석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날카로운 안광이 재환의 교복 옷깃과 어깨에 멘 가방을 훑어내렸다.
"축제 따위의 잔심부름에 네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넌 이 남원에서 썩을 인재가 아니다. 서울로 올라가 법관의 자리에 올라 가문의 위상을 바로 세워야 할 아이다. 하찮은 감상이나 또래들의 어울림에 휩쓸려 네 본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부친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냉혹한 엘리트 의식과 아들을 향한 철저한 통제욕이 서려 있었다.
과거 한석규의 과수원을 빼앗고 그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을 때도, 아버지는 이토록 냉정하고 합리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재환의 주먹이 바지 옆단에서 파르르 떨렸다.
"명심하겠습니다."
간신히 대답을 마친 재환은 가벼운 목례를 남기고 2층 자신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성호석의 서늘한 시선이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7. 흑청색 잉크와 불길한 전화
방문을 걸어 잠근 재환은 가방을 내려놓고 책상 앞에 앉았다.
스탠드 불빛 아래, 지유가 건네준 작은 잉크병이 놓여 있었다.
포장지를 조심스럽게 벗겨내자 투명한 유리병 속에서 짙푸른 흑청색 잉크가 영롱하게 빛났다.
재환은 교복 품에서 독일제 각인 만년필을 꺼냈다.
캡을 열고 피스톤을 돌려 만년필 내부에 남아 있던 찌꺼기 잉크를 닦아낸 뒤, 지유가 선물한 흑청색 잉크를 천천히 빨아올렸다.
닙 끝으로 잉크가 차오르는 모습은 마치 메말랐던 그의 영혼에 새로운 숨결이 채워지는 것만 같았다.
재환은 노트 한가운데에 지유가 준 잉크로 정갈하게 글씨를 써 내려갔다.
'Fiat justitia, ruat caelum.'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그리고 그 아래, 지유와 친구들과 함께 보낸 요천의 노을을 기억하며 적었다.
'남원의 봄을, 그리고 지유를 지킨다.'
바로 그 순간, 1층 복도에서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야심한 시각에 관사로 걸려 오는 전화는 결코 흔치 않은 일이었다.
재환은 만년필을 쥔 채 숨을 죽였다.
아래층에서 서재 문이 거칠게 열리고 부친 성호석의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복도를 가로질렀다.
수화기를 든 성호석의 목소리가 방문 너머로 희미하게 새어 올라왔다.
"……도청 기획관리실장입니다. 시장님, 지금 급히 보고드릴 중앙의 동향이 있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다급하게 흘러나오는 상대방의 목소리는 정적에 휩싸인 관사의 밤공기를 찢고 있었다.
"중앙정부 내무부에서 남원 일대 국책 도로망 확장 및 개발 구역 재조정 건으로 감사관을 급파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었습니다. 특히 90년대 초반 토지 환지 처분 관련 서류 일체를 불시에 감사할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성호석의 호흡이 거칠게 멎는 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그 일은 이미 10년 전에 완결된 사안이다. 당시 토지 구획 정리 위원회 도장까지 완벽하게 찍혀 있을 텐데, 대체 누가 뒤를 캐고 있단 말인가?"
"당시 소송 당사자 유족 측에서 과거 청원서를 다시 접수했다는 첩보가……."
2층 방 안에서 이 모든 대화를 엿들은 재환의 손끝이 하얗게 질려갔다.
만년필 촉에서 떨어진 짙푸른 잉크 한 방울이 노트 위의 '정의'라는 단어 위로 번지며 거대한 얼룩을 만들어냈다.
폭풍이, 피할 수 없는 가문의 어두운 그림자가 이미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