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의 비웃음
1. 영장실질심사의 복도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 복도의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로 묵직한 가죽 구두 소리가 울렸다.
강태석은 손목에 감긴 푸른색 포승줄과 은빛 수갑을 양복 외투 소매 속으로 찔러 넣은 채 턱을 치켜들었다.
남원 시내를 주름잡던 민선 1기 시장의 얼굴에는 밤샘 검찰 조사로 인한 수면 부족의 흔적이 역력했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번들거리는 독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곁을 바짝 따르던 남원시청 비서실장은 연신 식은땀을 닦아내며 주변 눈치를 살폈다.
복도 양옆으로는 법원 경위들과 호송 교도관들이 도열해 있었고, 저 멀리 복도 모퉁이에는 남원 시내 건설사와 관변 단체를 쥐락펴락하는 지역 유지 대여섯 명이 사색이 된 얼굴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영장전담판사실의 문이 굳게 닫혀 있는 사이, 강태석은 자신을 호송하는 교도관의 손길을 거칠게 뿌리치며 헛기침을 뱉었다.
"어이, 비서실장."
강태석의 목소리는 낮게 긁히는 쇳소리를 냈다.
비서실장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조아렸다.
"예, 예, 시장님! 말씀하십시오."
"조동식 그 작자한테선 연락이 더 없어? 전주지검장 전결이라며 발을 뺐다던 그 얼간이 말이다."
비서실장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그, 그게…… 조동식 지청장실 직통 내선은 아침 여덟 시부터 계속 통화 중이거나 비서가 전화를 돌려놓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서울 대검 쪽에서 직접 감사관이 내려온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아서 몸을 사리는 듯싶습니다."
강태석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것은 공포에 질린 자의 표정이 아니라, 세상을 밑바닥에서부터 피비린내 나게 굴러먹어 본 자만이 지을 수 있는 지독한 냉소였다.
"간사한 쥐새끼 같은 놈. 내 돈으로 처자식 미국 유학 보내고 차장검사 승진 로비까지 발판을 놓아줬더니, 새파란 송사리 하나가 날뛴다고 바로 대가리를 굴 속으로 처박아?"
강태석은 포승줄에 묶인 주먹을 부르르 쥐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새벽녘 남원지청 204호 검사실에서 자신을 서늘하게 내려다보던 성재환의 눈빛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성호석의 핏줄.
그 오만하던 성호석의 아들이 법복을 입고 내려와 자신에게 수갑을 채우고, 40억 비자금 계좌와 감리 보고서를 들이밀던 그 순간의 굴욕이 온몸의 피를 거꾸로 솟구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강태석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 흔들릴 수 없었다.
그는 지난 30년간 남원의 흙바닥에서 주먹 하나로 시작해 삼거리 토건을 일구고, 군수와 시장을 갈아치우며 마침내 이 바닥의 황제로 군림해 온 사내였다.
법 조문 몇 줄과 종이 쪼가리 서류철로 자신을 단죄하겠다는 검사 애송이 따위에게 무릎을 꿇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2. 어둠 속의 밀담
영장실질심사가 잠시 정회된 틈을 타, 법원 지하 1층 접견실 모퉁이의 후미진 대기실로 비서실장과 유지들이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호송 교도관들은 이미 강태석 측이 찔러준 두툼한 봉투와 남원시 관급 공사 편의 약속에 길들어 있어, 문 밖에서 망을 보며 십여 분의 여유를 묵인해 주고 있었다.
대기실 문이 닫히자마자, 남원 상공회의소 부회장이자 대동건설 대표인 배동진이 사색이 되어 무릎을 꿇듯 다가왔다.
"시, 시장님! 이거 정말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침부터 남원일보 1면에 호외가 깔렸습니다! 배도식 그 빌어먹을 국장 놈이 손을 들어버렸어요! 요천 제방 붕괴가 폭우 때문이 아니라 동서개발이랑 한양토건이 철근을 3분의 1로 줄여먹고 모래를 섞어 쳐 넣은 인재라고 대문짝만하게 박아버렸단 말입니다!"
"뭐라? 배도식이가?"
강태석의 두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비서실장이 품 안에서 피 묻은 자국처럼 구겨진 신문 한 장을 꺼내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신문 1면 상단에는 무너져 내린 요천 제방 단면의 앙상한 철근 사진과 함께, '180억 춘향 테마랜드 정비사업의 추악한 민낯, 40억 비자금 횡령과 날림 공사가 부른 제방 붕괴 참사'라는 활자가 서슬 퍼렇게 박혀 있었다.
기사 하단에는 강태석 시장이 남원일보 편집국에 난입해 기사를 왜곡하려던 육성 녹취록의 주요 발언까지 활자화되어 폭로되어 있었다.
배동진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속삭였다.
"지금 남원 바닥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동문 우체국 앞이며 광한루 앞까지 시민들이랑 상인들이 몰려나와서 시장님 구속하라고 꽹과리를 치고 난리가 났어요. 저기 남원지원 정문 앞에도 벌써 플래카드가 걸렸습니다!"
함께 들어온 남원 번영회 감사 조칠성도 사색이 되어 거들었다.
"시장님, 서울 김문현 위원장님 쪽에서는 도대체 뭐라고 하십니까? 그 어른이 손을 써주셔야 영장이 기각되든 구속적부심으로 빠져나오든 할 것 아닙니까!"
주변의 숨 막히는 공포와 절망 속에서, 정작 강태석은 신문 1면을 천천히 훑어보더니 기괴할 정도로 나지막한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큭…… 큭큭, 크하하하!"
대기실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사방이 꽉 막힌 지하실 안에서 울려 퍼지는 강태석의 웃음소리는 흡사 굶주린 늑대의 울음 같았다.
"시장님……?"
비서실장이 질겁하며 물러섰다.
강태석은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신문지 위에 침을 퉤 뱉었다.
"병신 같은 놈들. 고작 이깟 종이 쪼가리 몇 장에 사시나무 떨듯 떨어? 배도식이 그 겁쟁이 새끼가 알량한 녹음테이프 하나에 오줌을 지리고 검찰 똥개들 바짓가랑이를 잡았다고 해서, 이 강태석이가 쌓아 올린 남원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것 같으냐?"
강태석이 번뜩이는 눈으로 배동진과 조칠성을 노려보았다.
"잘 들어라. 남원은 법전이나 파먹던 먹물 샌님들이 다스리는 곳이 아니야. 이 바닥의 흙탕물 밑바닥에는 지난 30년간 내가 깔아놓은 피와 돈, 그리고 수많은 놈들의 약점이 얽히고설켜 있어. 성호석이 그 잘난 놈도 결국 내 손바닥 위에서 춤추다가 서울로 도망치듯 기어 올라갔다. 그런데 그놈의 새파란 핏줄 하나가 내려와서 칼을 휘두른다고? 애송이가 제 아비 믿고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것뿐이다."
강태석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가라앉으며 지독한 확신으로 가득 찼다.
"영장? 판사가 영장을 발부해? 그래, 발부하라 그래라. 영장 떨어져 봤자 고작 구치소 방 한 칸 들어가는 것뿐이야. 내 뒤에는 여당 내무위원장 김문현이 있고, 내각 개편을 앞둔 중앙 정계의 거물들이 줄줄이 서 있어. 내가 입을 열면 서울 서초동 검찰청이며 내무부 청사까지 줄초상이 날 텐데, 감히 누가 날 끝까지 가둬둘 수 있단 말이냐?"
3. 썩어빠진 권력망의 계산
강태석은 포승줄에 묶인 두 손을 들어 올려 비서실장의 멱살을 잡듯 끌어당겼다.
비서실장이 숨이 막혀 컥컥거렸지만, 강태석의 눈빛에 질려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비서실장, 똑바로 들어라."
"예, 예! 시장님, 듣고 있습니다!"
"내가 오늘 법원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마치고 전주교도소 남원구치소로 넘어가는 즉시, 박철우 실장한테 연락을 넣어라."
강태석의 눈동자에 교활한 계산이 번뜩였다.
"김문현 위원장한테 전해. 내가 혜화동 청운각에서 건넨 20억 무기명 CD 스무 장과 요천 수변지구 지분 계약서, 그게 내 머릿속에만 있는 게 아니라고. 그 서류들의 사본이 어디에 묻혀 있는지 그 양반도 잘 알 거라고 말이다. 내 입이 닫혀 있어야 본인 대선 자금 줄도 안전한 법이라고 전해."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강태석은 입꼬리를 잔인하게 비틀며 대동건설 배동진을 똑바로 응시했다.
"전주지검 관내 검찰 간부들 말이다. 전주지검 차장검사부터 시작해서 남원지청 부장들, 그리고 법원 수석부장판사까지 즉시 선을 대라."
배동진이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수, 선을 대라 하심은……?"
"다음 주 주말, 남원상록골프장에서 관내 검찰 간부들과의 극비 골프 회동을 주선해. 날짜는 다음 주 토요일 새벽 첫 티업이다."
배동진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시, 시장님! 지금 검찰 특수본 애들이 눈에 불을 켜고 계좌를 뒤지고 있는데, 검찰 간부들과 골프 모임을 잡으라니요? 그 작자들이 지금 이 시국에 나오겠습니까?"
"나오게 만들어야지!"
강태석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 인간들이 지난 3년간 내 돈으로 그린피 내고, 내 돈으로 룸살롱에서 계집 끼고 논 영수증이 내 비밀 장부에 다 들어 있어. 조동식이 놈만 해도 그래. 지 처남 토목 면허 따준 게 누구 덕인데 이제 와서 성재환이 칼끝을 피하겠다고 몸을 사려? 그놈들에게 전해라. 이번 주말 골프장에 얼굴을 비추지 않으면, 내가 법정 문턱을 넘기도 전에 기자회견을 자청해서 검찰청 간부 뇌물 상납 리스트부터 까발리겠다고!"
비서실장과 유지들의 등줄기로 서늘한 전율이 흘러내렸다.
강태석은 궁지에 몰렸다고 해서 숨을 죽이는 짐승이 아니었다.
오히려 물귀신처럼 주변의 모든 권력을 진흙탕 속으로 끌고 들어가 판을 깨부수려는 미친 독사였다.
강태석이 차갑게 덧붙였다.
"골프 회동 자리에 전주지검 간부 놈들을 앉혀놓고, 내 구속적부심 청구와 보석 허가를 일주일 안에 결재하도록 판을 짜라. 성재환 그 새파란 애송이 놈이 아무리 대검 특수부 완장을 차고 날뛰어봤자, 이 전라도 땅 검찰 조직의 대가리는 전주지검장과 차장검사들이야. 계통도 모르는 어린놈이 위아래 없이 칼을 휘두르면, 지 조직 선배들 손에 먼저 목이 잘려 나가는 법이지. 내 남원 권력망에 걸려들면 뼈도 못 추릴 것이다."
강태석의 장담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에게 법이란 정의를 세우는 저울이 아니라, 돈과 약점으로 얼마든지 매수하고 비틀 수 있는 거미줄에 불과했다.
힘없는 날벌레나 걸려 찢겨나갈 뿐, 자신 같은 거대한 맹수는 찢고 나가면 그만이라는 오만이 뼛속까지 박혀 있었다.
4. 삼거리의 아침 햇살
같은 시각, 남원 구도심 동문 우체국 안쪽 골목 삼거리 김밥집 앞은 평소와 전혀 다른 열기로 들끓고 있었다.
어젯밤의 흙탕물과 폭우의 잔해는 상인들의 빗자루 질과 물청소로 조금씩 씻겨 나가고 있었다.
가게 처마 끝에 걸린 낡은 놋쇠 풍경이 가을을 재촉하는 바람을 맞아 청아한 소리를 짤랑거리며 울렸다.
가게 안쪽 조리대 앞에는 지유가 단정한 흰 앞치마를 두른 채 서 있었다.
지난 7년간 그녀의 손에 박힌 거친 굳은살과 데인 흉터 위로, 갓 지어낸 쌀밥의 따스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골목 어귀까지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가게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리며, 최민재가 땀에 흠뻑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뛰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갓 인쇄되어 잉크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남원일보 1면 호외 수십 장이 들려 있었다.
"지유야! 지유야, 봤어?"
민재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는 신문 한 뭉치를 식탁 위에 쾅 내려놓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지유가 밥주걱을 내려놓고 민재를 바라보았다.
밤을 꼬박 새웠음에도 그녀의 맑고 깊은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차분했다.
"민재야, 숨 좀 돌려. 물부터 한 잔 마시고."
"물 마실 때가 아니야! 이거 봐! 배도식 국장 그 인간이 결국 항복했어. 우리가 완월정 팽나무에서 건져 올린 부실 콘크리트 시편이랑 감리 보고서, 그리고 어제 편집국에서 녹음한 강태석 육성 테이프를 들이미니까 사색이 돼서 호외를 찍어냈다고!"
민재가 신문 1면을 활짝 펼쳤다.
신문 중앙에 박힌 강태석의 비리와 제방 부실공사 전모를 알리는 활자들을 본 지유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가게 안으로 구두 수선공 김 씨와 철물점 최 씨, 칠기사 배 씨가 잇달아 들이닥쳤다.
상인들의 얼굴에는 벅찬 환희와 눈물이 범벅되어 있었다.
"지유야! 들었냐? 강태석 시장 놈, 아침에 법원으로 영장실질심사 받으러 끌려갔단다!"
김 씨가 흙 묻은 작업복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소리쳤다.
"그 악마 같은 놈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어! 우리 저지대 사람들 수몰시키고 김밥집 밀어버리려던 그 천하의 잡놈이, 드디어 법의 심판을 받으러 끌려갔다고!"
"어제 제방에서 영장 들고 나타났던 그 젊은 검사님…… 그분이 밤새 지청에서 조서를 꾸며서 법원에 영장을 접수했다더구먼! 지청장 놈이 가로막는 것까지 다 뚫어버리고 말이야!"
최 씨가 주먹을 불끈 쥐며 통쾌하게 외쳤다.
상인들의 환호성 속에서 지유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조리대 한구석, 정갈하게 닦아놓은 작은 나무 받침대 위에는 성재환이 남겨두고 간 낡은 학생증 증명사진과 검은 옻칠 만년필이 놓여 있었다.
지유의 시선이 사진 뒷면에 흑청색 잉크로 적혀 있던 글귀에 닿았다.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그는 정말로 돌아왔다.
소년 시절의 약속을 가슴에 품고, 홀로 고시촌의 혹독한 어둠을 견뎌내며 검사의 법복을 입고 마침내 이 비루한 남원 땅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이웃들의 삶의 터전을 짓밟았던 거대한 괴물의 손목에 차가운 쇠고랑을 채웠다.
지유의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 한 방울이 투명하게 흘러내려 앞치마를 적셨다.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지난 7년간 온몸으로 감내해야 했던 공포와 외로움,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새벽빛에 대한 안도감의 눈물이었다.
5. 폭풍의 중심, 204호
그러나 민재의 표정은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상인들이 밖으로 나가 호외를 이웃들에게 나눠주는 사이, 민재는 지유의 곁으로 다가와 목소리를 바짝 낮추었다.
"지유야. 근데…… 성재환 검사님 말이야."
지유가 젖은 눈을 들어 민재를 바라보았다.
"재환이가 왜? 검사실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아침에 지청 기자실에 잠깐 들렀다가 들었는데…… 상황이 간단치가 않아. 성 검사님이 강태석 구속영장을 법원에 밀어 넣긴 했는데, 지청 내부 분위기가 완전히 살얼음판이래."
민재는 주머니에서 손때 묻은 취재 수첩을 꺼냈다.
"조동식 지청장이 새벽에 서울 김문현 의원실 전화를 받고 강태석 체포를 막으려고 검사실까지 쳐들어갔었대. 성 검사님이 지청장 얼굴에 대고 직권남용 공범으로 체포하겠다고 들이받아서 쫓아내긴 했지만…… 검찰 조직이라는 게 그렇잖아. 지청장을 건너뛰고 전주지검장 직통으로 영장을 쳤으니, 관내 간부 놈들이 성 검사님을 가만두겠어?"
지유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7년 전, 시장 관사에서 뿜어져 나오던 성호석의 서늘한 권력과, 그 권력의 그늘 아래서 신음하던 남원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곳 남원은 강태석 혼자만의 왕국이 아니었다.
시청과 경찰, 검찰과 토건 자본, 그리고 서울의 중앙 정치권까지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거대한 부패의 늪이었다.
재환은 지금 그 거대한 늪 한가운데 홀로 뛰어들어 칼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었다.
지유는 조리대 위에 놓인 검은 만년필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캡 상단에 새겨진 라틴어 문구가 손끝을 파고들었다.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재환은 그 법언대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고 있었다.
심지어 그 칼날의 끝에는 강태석뿐만 아니라, 자신의 친부인 성호석 차관까지 놓여 있었다.
지유는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아릿한 통증을 느꼈다.
재환이 짊어진 그 가혹한 무게를 생각하면 숨이 턱턱 막혀왔다.
"민재야."
"응?"
"재환이는…… 성 검사님은 지금 어디 계셔?"
"영장실질심사 법정에 들어가 계실 거야. 강태석이 워낙 거물 변호사들을 주렁주렁 달고 나와서, 판사 앞에서 직접 혐의를 입증하고 구속을 관철하겠다고 직접 법정으로 가셨어."
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갓 지은 밥을 김 위에 가지런히 펴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길은 더없이 정갈하고 단단했다.
참기름을 바른 단무지와 정성껏 볶은 당근, 공설 방앗간의 통깨가 고슬고슬한 밥 위에 올려졌다.
"지유야, 김밥은 왜 싸?"
"재환이…… 어제 남원에 내려와서 흙탕물 뒤집어쓰고 밤새 한숨도 못 잤을 거야. 밥 한 끼도 제대로 못 챙겨 먹었을 테고."
지유는 김밥 한 줄을 단단하게 말아 썰어내며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이야. 그 애가 법정에서 거악과 싸우고 돌아왔을 때, 굶주리지 않게 따뜻한 밥 한 줄 건네는 것. 7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나는 여기서 내 자리를 지키며 그 애의 든든한 밥이 되어줄 거야."
민재는 그런 지유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말없이 주먹을 쥐었다.
상처투성이의 손으로 말아내는 소박한 김밥 한 줄.
그것은 부패한 권력자들의 수십억 뇌물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가장 순결하고 강력한 진실의 방패였다.
6. 애송이 검사를 향한 비수
정오가 가까워진 시각,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 1호 법정 앞.
영장실질심사를 마치고 나온 성재환 검사는 서류 가방을 든 채 묵묵히 복도를 걸어 나왔다.
감청색 정장 위로 뿜어져 나오는 그의 기세는 서슬이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법정 안에서 강태석 측 변호인단이 들고나온 '천재지변론'과 '단순 행정 지도'라는 궤변을, 재환은 한양토건 감리 보고서 원본과 세창물산 페이퍼 컴퍼니 금융 흐름도로 완벽하게 박살 내버렸다.
영장전담판사의 표정은 이미 구속영장 발부 쪽으로 굳어져 있었다.
복도 저편에서 포승줄에 묶인 채 교도관들에게 이끌려 나오던 강태석과 성재환의 시선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부딪쳤다.
강태석의 입가에 여전히 비열하고 끈적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교도관들이 제지하려 했으나, 강태석은 재환의 바로 앞 1미터 거리에 우뚝 멈춰 섰다.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영하로 얼어붙었다.
"성재환 검사님."
강태석이 낮게 으르렁거리며 혀를 찼다.
"기세가 아주 등등하십니다 그려. 서울 특수부에서 사람 잡는 칼 쓰는 법을 제법 배워오셨어."
성재환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차가운 시선으로 강태석을 내려다보았다.
"피의자 강태석. 법정 안에서 충분히 소명하지 못한 변명이 아직 남았습니까?"
"변명? 큭큭…… 애송이가 아직 세상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먼."
강태석이 재환의 귓가에 닿을 듯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그의 입에서 역겨운 담배 냄새와 피비린내가 풍겼다.
"네 아비 성호석이가 왜 남원을 버리고 서울로 도망쳤는지 아느냐? 그놈도 처음엔 너처럼 정의니 법이니 지껄이며 내 목을 비틀려고 설쳤지. 하지만 결국 내 손바닥 안에서 환지 서류에 도장을 찍고, 내 돈을 받아 처먹으며 서울로 기어 올라갔어. 왜냐? 이 남원이라는 바닥은 말이다, 법전으로 굴러가는 곳이 아니거든."
강태석의 눈동자에 광기 어린 비웃음이 번졌다.
"네가 오늘 나한테 영장 하나 쳤다고 해서 이긴 것 같으냐? 천만에. 넌 이제 막 남원이라는 거대한 벌집을 쑤셔놓은 거야. 내 권력망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넌 상상조차 못 해. 당장 네가 속한 전주지검 간부들부터 시작해서, 네 대가리 꼭대기에 있는 법무부, 내무부 어른들까지…… 전부 내 식구들이야."
강태석은 포승줄에 묶인 주먹으로 재환의 가슴팍을 툭 쳤다.
"새파란 핏덩이 놈이 칼춤 좀 췄다고 세상이 바뀔 줄 알았다면 오산이다. 며칠만 지나 봐라. 네 선배 검사들이 네 손에서 이 사건을 어떻게 빼앗아 가는지. 넌 네 아비의 썩은 죄악까지 뒤집어쓴 채, 이 바닥에서 뼈도 못 추리고 개처럼 쫓겨나게 될 테니까."
강태석의 폭압적인 협박에도, 성재환의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히려 재환의 입가에 서늘한 조소가 번졌다.
재환은 품 안에서 독일제 검은 만년필을 꺼내 손가락 사이에 가볍게 쥐었다.
금빛 닙이 차가운 형광등 불빛을 받아 서슬 퍼런 섬광을 뿜어냈다.
"강태석."
재환의 목소리는 법도처럼 낮고 단호했다.
"네가 말하는 그 썩어빠진 권력망, 네가 돈으로 매수하고 골프채로 엮어놓은 그 추악한 카르텔…… 내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찢어발겨 주마."
재환의 서늘한 시선이 강태석의 심장을 꿰뚫듯 박혔다.
"네가 믿는 서울의 김문현이든, 전주지검의 부패한 간부들이든, 그리고…… 내 아비인 성호석 차관이든 상관없다. 법을 더럽히고 이 남원의 무고한 사람들을 짓밟은 자들은, 그 누구도 내 칼날을 피하지 못해."
재환이 한 걸음 다가서며 강태석의 귓가에 차갑게 속삭였다.
"구치소 독방에 들어가서 무릎 꿇고 기도나 해라. 네가 지은 죄의 대가가 얼마나 참혹한지, 내가 직접 네 눈앞에서 똑똑히 보여줄 테니까."
강태석의 얼굴에서 비웃음이 굳어졌다.
처음으로, 사내의 등줄기 아래로 지독한 공포의 전율이 스쳐 지나갔다.
성재환은 단순한 출세욕에 눈이 먼 젊은 검사가 아니었다.
자신의 살점을 도려내고 가문 전체를 심판대에 올릴 각오로 지옥에서 걸어 나온 복수의 집행관이었다.
"끌고 가십시오."
재환의 차가운 명령에 교도관들이 강태석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법원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강태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성재환은 만년필을 쥔 주먹에 힘을 주었다.
마침내 거악과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남원의 하늘 위로, 거대한 폭풍우가 다시금 몰아칠 준비를 마친 채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