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낸 약속
1. 놋쇠 풍경 아래 남겨진 온기
삼거리 김밥집의 낡은 나무 미닫이문이 다시 닫히며 처마 끝의 놋쇠 풍경이 길고 맑은 여운을 남겼다.
딸그랑, 딸랑.
어스름한 저녁 공기 사이로 퍼져 나가던 쇳소리는 밤안개 속으로 서서히 스며들었다.
가게 안에는 참기름의 고소한 향과 갓 지은 쌀밥의 훈김, 그리고 조금 전까지 서로의 체온을 나누었던 두 사람의 가쁜 숨결이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성재환(成宰桓)이 문을 열고 골목 밖으로 나서는 순간, 한지유(韓智由)는 멎었던 숨을 길게 몰아쉬었다.
그의 단단한 어깨에 닿았던 뺨에는 여전히 차가운 밤바람의 감촉과 뜨거운 눈물의 흔적이 엉켜 있었다.
"지유야, 정신 차려."
최민재(崔民宰)가 머리에 감긴 피 묻은 붕대를 고쳐 쥐며 다급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성재환 저 녀석, 진짜로 눈이 뒤집혔어."
"서울에서 내려오자마자 요천 제방으로 바로 들이닥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남원경찰서 놈들, 지금 전경 버스 세 대를 가로막아 놓고 시장 지시 없이는 파리 한 마리도 못 지나가게 하겠다고 악을 쓰고 있단 말이야."
민재는 주먹을 꽉 쥐며 창밖 어둠을 응시했다.
골목 너머 원호로 이어지는 큰길가에서 사이렌 소리가 찢어지듯 울려 퍼지고 있었다.
강태석(姜泰錫)이 부실공사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동원한 레미콘 차량들의 둔중한 디젤 엔진 소리였다.
그러나 지유는 민재의 다급한 외침에도 즉각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주방 앞 좁은 식탁, 붉은색 플라스틱 상판 위에 멈춰 있었다.
재환이 떠나기 직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간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과, 모서리가 하얗게 일어난 반명함판 증명사진 한 장.
7년이라는 세월 동안 단 하루도 잊은 적 없는 얼굴이었다.
지유는 떨리는 손을 뻗어 플라스틱 상판 위에 놓인 사진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
손끝에 닿는 종이의 질감은 닳고 닳아 부드러워져 있었다.
지유가 품속에서 매일 밤 꺼내 보며 눈물로 쓸어내렸던 바로 그 사진이었다.
2. 식탁 위에 놓인 시간
지유는 식탁 의자를 조용히 당겨 앉았다.
나무 의자가 삐걱거리며 낡은 비명을 질렀다.
"민재야."
지유의 목소리는 파도처럼 일렁이던 격랑을 지나 깊고 고요한 수면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응? 왜 그래, 지유야?"
"재환이가 방금 뭐라고 했는지 들었어?"
민재는 멍하니 서서 지유를 바라보다가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달싹였다.
"어? 그…… 이 남원의 썩은 물을 다 퍼내고 다시 오작교의 봄바람을 맞으러 오겠다고……."
"아니, 그전에."
지유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투명한 눈물방울 하나가 사진의 모서리 위로 툭 떨어졌다.
'지유야, 내가 늦지 않게 왔지.'
문을 열고 들어와 제 얼굴을 마주한 순간, 7년이라는 아득한 세월의 절벽을 단숨에 무너뜨리며 재환이 속삭였던 첫마디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속에 굳게 박혀 있던 얼음덩어리가 일시에 부서져 내렸었다.
지유는 손가락 끝으로 사진 뒷면에 적힌 검푸른 글씨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남원여고 앞 문구점에서 용돈을 모아 샀던 깊고 맑은 흑청색 잉크.
그 잉크로 꾹꾹 눌러썼던 재환의 필체는 7년의 풍파 속에서도 결코 바래지 않고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지유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용히 읊조렸다.
"난 알고 있었어."
"……뭘?"
"재환이가 약속을 지킬 거라는 거."
지유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시울은 붉게 젖어 있었으나, 그 눈동자 안에는 세상을 다 준다 해도 흔들리지 않을 단단한 빛이 서려 있었다.
"광한루원 팽나무 아래에서 이 사진을 건넬 때, 재환이 눈빛이 그랬어."
"서울로 떠나는 기차 창문 너머로 주먹을 쥐고 피를 흘리면서도, 그 애는 단 한 번도 남원을, 날 버릴 눈빛이 아니었어."
지유의 손이 가슴팍으로 올라갔다.
어머니의 유품이었던 1968년 이면계약서는 이제 재환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
30년 전 아버지 한석규(韓錫奎)가 피눈물을 흘리며 빼앗겼던 땅과, 강태석과 성호석(成浩錫)이 결탁해 조작했던 거대한 죄악의 사슬.
그 모든 족쇄를 끊어내기 위해 재환은 7년 동안 스스로를 고시원 골방에 유폐시키고 칼을 갈았다.
"약속을 지킬 줄 알았어, 그 애는."
지유의 입술 사이로 번지는 미소는 처연하면서도 찬란했다.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어."
"다만…… 그 애가 짊어져야 할 짐이 너무 무거워서, 그게 가슴이 미어졌을 뿐이야."
3. 거칠어진 손과 흉터의 기록
최민재는 식탁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카메라 끈을 풀고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은 민재의 거친 숨소리가 좁은 공간을 채웠다.
"지유야, 그래도 넌…… 넌 너무 많은 걸 혼자 견뎠어."
민재의 시선이 식탁 상판을 짚고 있는 지유의 손으로 향했다.
열여덟 살의 지유는 단정한 교복을 입고, 갱지에 연필로 자전거를 타는 소년의 뒷모습을 섬세하게 스케치하던 고운 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손등에는 겨울철 찬물에 배추를 씻고 칼질을 하느라 튼 흉터와, 뜨거운 참기름에 데인 얼룩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손가락 마디마다 굵직한 굳은살이 박여 있었고, 손톱 밑은 언제나 단단하게 닳아 있었다.
"재환이가 네 손을 보는데…… 내 가슴이 다 무너지더라."
민재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 녀석, 네 손을 만져보더니 숨을 못 쉬더라."
"자기가 서울에서 종이 위의 법이나 외우고 있을 때, 넌 여기서 피눈물을 흘렸다고 자책하면서."
지유는 조용히 제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낡은 면바지 아래, 오른편 무릎을 살며시 쓸어내렸다.
남원 톨게이트 진입로 아스팔트 바닥에서 재환의 관용차를 뒤쫓다 넘어져 갈려 나갔던 자리.
그 비극의 흔적은 비가 올 때마다 시큰거리며 재환을 향한 기다림을 일깨우는 징표였다.
"자책할 필요 없어."
지유가 고개를 저었다.
"이 손이 부끄러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까."
"이 손으로 어머니를 모셨고, 이 손으로 김밥을 말아 정직하게 돈을 벌었어."
"강태석이 깡패들을 보내 식칼을 꽂아놓고, 세무서 놈들이 들이닥쳐 횡포를 부려도 난 1원 한 장 속이지 않고 버colon버텼어."
지유의 눈동자가 주방 한편을 향했다.
쇠파이프에 찌그러졌던 알루미늄 싱크대와, 이웃 목공소 윤 씨 아저씨가 덧대어 고쳐준 삐뚤빼뚤한 수납장 나무판자.
그리고 투명 박스 테이프로 'X' 자를 엮어 붙인 깨진 유리창.
그 상처투성이의 공간이야말로 지유가 지켜낸 정직의 보루였다.
"재환이가 법복을 입고 남원에 내려왔을 때, 내가 비겁하게 무너져 있거나 그자들의 돈에 굴복해 있었다면…… 난 그 애 얼굴을 볼 수 없었을 거야."
지유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재환이는 가문의 죄악을 베어내기 위해 검사가 되었고, 난 그 애의 신념이 부끄럽지 않도록 이 자리를 지킨 거야."
"우린 각자의 자리에서 싸우고 있었던 거야, 민재야."
민재는 지유의 말을 들으며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신뢰의 깊이는 자신과 같은 제삼자가 온전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고 웅장했다.
4. 요천 제방의 비명
그때, 쿵 하는 둔중한 진동이 김밥집 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멀리 요천 수변 쪽에서 메가폰을 든 경찰관의 거친 고함과 중장비의 굉음이 뒤섞여 들려왔다.
"남원경찰서 경비과에서 알린다! 이곳은 재난위험구역으로 지정된 통제선이다!"
"허가받지 않은 차량과 인원은 즉시 물러나라! 공무집행 방해 시 전원 현행범으로 체포하겠다!"
민재가 자리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시작됐어!"
민재는 창문 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동문 우체국 너머, 요천 둑길 방향의 밤하늘이 붉은색과 푸른색 경광등 불빛으로 어지럽게 번쩍이고 있었다.
"강태석 그자가 기어코 경찰을 앞세워서 붕괴 현장을 덮으려는 거야!"
"레미콘을 부어서 무너진 단면을 덮어버리면, 철근이 규격의 삼분의 일밖에 안 들어갔다는 증거도, 잡석 콘크리트도 전부 생시멘트 밑에 파묻혀 버려!"
민재가 발을 동동 굴렀다.
"재환이가 아무리 대검 검사라 해도, 현장에는 남원경찰서 전경들이 쫙 깔렸어."
"영장을 들이밀어도 시간을 끌면서 밀어붙이면 끝장이야!"
지유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식탁 위에 놓여 있던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차갑고 매끄러운 옻칠의 감촉이 손바닥에 감겨들었다.
재환은 이 만년필을 지유에게 맡겨두고 갔다.
자신이 남원의 썩은 물을 다 퍼내고 돌아오는 그 순간, 다시 이 만년필로 정의의 기록을 마무리 짓겠다는 무언의 약속이었다.
"민재야."
지유가 앞치마를 벗어 개며 말했다.
"완월정 팽나무에 숨겨둔 증거, 안전하지?"
"응. 방수포로 세 겹을 싸서 고목 뿌리 밑 바위 틈새에 밀어 넣었어."
"그 자리는 나랑 너 말고는 귀신도 몰라."
"좋아. 그럼 넌 지금 완월정으로 가."
지유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민재가 깜짝 놀라 물었다.
"완월정? 재환이가 있는 제방으로 가는 게 아니고?"
"제방 현장에서는 재환이가 법의 칼날로 그자들을 막아설 거야."
지유는 조리대 옆 벽면에 걸려 있던 남원 시내 지도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하지만 강태석은 영장이 집행되는 순간,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증거들을 모조리 불태우려 들 거야."
"시청 지하 특수 금고와 남원일보사, 그리고 혹시라도 눈치챘을지 모를 완월정까지 사람을 보낼 수도 있어."
지유의 판단은 정확했다.
7년 동안 남원에서 홀로 강태석 일파의 비열한 수법을 온몸으로 겪어온 그녀였기에 가능한 혜안이었다.
"넌 완월정의 부실 콘크리트 시편과 한양토건 감리 보고서를 지켜."
"그건 제방 현장이 시멘트로 덮이든 말든, 강태석의 목을 완전히 벨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물리적 증거니까."
민재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난 완월정으로 뛴다."
"그런데 지유 너는? 넌 어디로 가려고?"
지유는 닳고 닳은 재환의 증명사진을 셔츠 왼쪽 안주머니, 심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 소중히 갈무리했다.
그리고 만년필을 단단히 쥐었다.
"난 삼거리 골목 상인들을 만날 거야."
"상인들을? 이 한밤중에?"
"강태석이 경찰을 사유화해서 공권력을 휘두른다면, 그 공권력이 가짜라는 걸 증명할 사람들은 이 땅에서 피땀 흘려 살아온 남원 시민들뿐이야."
지유의 목소리에는 거스를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구두 수선공 김 씨 아저씨, 철물점 최 씨 아저씨, 칠기사 배 씨 아저씨…… 다들 지난번 포클레인을 막아섰던 분들이야."
"강태석이 제방을 날림으로 지어 구도심을 물바다로 만들고, 이제는 천재지변으로 조작해 제 잇속을 챙기려 한다는 걸 시민들이 알아야 해."
"재환이가 법정의 칼이라면, 남원의 사람들은 그 칼을 쥐여준 진짜 주인들이야."
민재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전율이 치솟았다.
소년 가장으로 남아 김밥이나 말던 연약한 소녀가 아니었다.
어느새 한지유는 거대한 불의의 카르텔에 맞서 남원의 민심을 일으켜 세우는 저항의 구심점이 되어 있었다.
"지유야, 조심해."
"응. 너도 조심해, 민재야."
민재는 카메라 가방을 단단히 동여매고 김밥집 뒷문을 통해 어둠 속으로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5. 통제선 앞의 대치
같은 시각, 요천 제방 제1공구 입구.
진흙투성이가 된 아스팔트 제방 도로 위로 거대한 전경 버스 두 대가 'V' 자 형태로 길목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 뒤편으로는 공포에 질린 채 레미콘 트럭 세 대가 시동을 켠 채 대기하고 있었고, 남원경찰서 경비과 소속 전경 40여 명이 방패와 진압봉을 든 채 살벌한 대열을 형성하고 있었다.
제방 아래 저지대 상가에서 밀려든 흙탕물이 빠져나가지 못해 도로변 배수구에서는 악취가 진동했다.
"비켜서라!"
쩌렁쩌렁한 일갈이 밤안개를 갈랐다.
검은색 코트를 입은 성재환 검사가 전경들의 방패벽 바로 앞 5미터 지점에 우뚝 멈춰 섰다.
그의 등 뒤로는 서울지검 특수부 수사관들과 대검에서 급파된 정예 수사관 20명이 검은색 수사관 점퍼를 입은 채 도열해 있었다.
수사관들의 손에는 두툼한 영장 서류철과 카메라, 캠코더가 들려 있었다.
전경 대열 사이를 가르고 남원경찰서 경비과장이 신경질적인 얼굴로 걸어 나왔다.
가슴팍에 무전기를 찬 경비과장은 권총집의 가죽 덮개를 만지작거리며 재환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당신들 누구요?"
"여기는 남원시 재난안전대책본부의 통제에 따라 일반인 출입이 전면 통제된 재난위험구역입니다!"
"서울에서 온 검찰이라 해도 관할 경찰서장과 남원시장의 현장 승인 없이는 한 발짝도 들여보낼 수 없소!"
경비과장의 목소리는 고압적이었으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젊은 검사가 뿜어내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재환은 코트 안주머니에서 붉은 직인이 선명하게 찍힌 법원의 정식 서류를 꺼내 들었다.
차르륵, 소리를 내며 펼쳐진 종이가 경비과장의 눈앞에 들이밀어졌다.
"대검찰청·서울지검 남원 정경유착 특별수사본부 파견 주임검사 성재환이다."
재환의 음성은 낮았지만, 쇠를 긁는 듯 서늘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 위반(뇌물), 업무상과실치사상,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피의자 강태석, 조상태, 박진철에 대한 법원의 정식 체포영장 및 현장 검증·압수수색영장이다."
경비과장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체…… 체포영장?"
"요천 수변공원 제1공구 붕괴 현장은 이번 참사의 가장 결정적인 범죄 현장이다."
재환의 서슬 퍼런 시선이 전경 버스 뒤편의 레미콘 차량들을 똑바로 겨누었다.
"형사소송법 제215조에 의거하여 이 시각 이후 제방 현장의 모든 출입과 작업을 통제한다."
"저 레미콘 차량들은 증거인멸을 위해 투입된 불법 공작 차량이다."
"만약 경찰이 불법 영장 집행을 방해하고 피의자들의 증거인멸 행위를 방조한다면, 경비과장 당신을 포함해 이곳에 서 있는 지휘 라인 전원을 직무유기 및 증거인멸교사죄의 현행범으로 즉시 긴급 체포하겠다."
수사관들이 일제히 앞으로 반 걸음 전진했다.
철컥, 소리와 함께 수갑을 꺼내 든 수사관들의 기세에 전경 방패벽이 뒤로 주춤 물러났다.
경비과장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검사님! 서장님께서 시장님과 직접 상의 중이시라고……."
"경찰서장?"
재환이 차갑게 비웃었다.
"남원경찰서장 이한두가 강태석에게 분기마다 상납받은 뇌물 장부 사본이 이미 내 차 안에 있다."
"그자가 오늘 밤 온전할 것 같은가?"
경비과장은 숨이 턱 막힌 듯 뒤로 비틀거렸다.
재환은 시계를 확인하지도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무너져 내린 제방 단면의 흉측한 상처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7년 전, 아버지가 남원의 힘은 썩었다며 군림하려 했던 그 땅.
그 썩은 권력의 잔재들이 제방을 무너뜨리고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갈 뻔했다.
그 비극을 막아서고 진실을 지켜낸 것은 중앙의 거창한 사법 권력이 아니라, 삼거리 김밥집에서 정직하게 살아온 한지유와 소박한 시민들이었다.
"길을 열어라."
재환이 마지막 경고를 던졌다.
"대한민국 사법의 이름으로 명한다."
6. 골목에서 피어오른 불빛
그 순간, 요천 둑길 아래 어두운 구도심 골목길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둠을 뚫고 수십 개의 손전등 불빛과 호롱불, 촛불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다! 요천 제방 쪽이다!"
"강태석 시장 놈이 기어코 밤중에 시멘트를 들이붓는단다!"
"남원 사람 다 죽여놓고 어디다 증거를 파묻으려고 해!"
거친 함성과 함께 꽹과리 소리가 밤하늘을 찢었다.
깽- 깽- 깽마깽-
구두 수선공 김 씨 아저씨가 쇠망치를 든 채 앞장서서 걸어오고 있었고, 철물점 최 씨와 칠기사 배 씨, 그리고 채소전 아주머니들과 남원 시내 택시 기사들 수십 명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진흙탕에 장화를 신은 상인들과 시민들의 손에는 몽둥이와 삽, 꽹과리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맨 앞, 하얀 면장갑을 끼고 촛불을 든 채 걸어오는 인물이 있었다.
한지유였다.
머리를 질끈 묶은 지유는 흔들림 없는 걸음걸이로 전경 버스와 경찰 통제선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경비과장과 전경들이 사색이 되어 뒤를 돌아보았다.
앞에는 서슬 퍼런 대검 특수부 검찰 수사팀이, 뒤에는 분노로 들끓는 남원 시민 수백 명이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지유의 시선이 경찰의 방패벽을 넘어, 그 너머에 서 있는 성재환과 마주쳤다.
어두운 밤, 촛불과 경광등 불빛이 교차하는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깊게 얽혔다.
지유의 눈빛은 말하고 있었다.
'너 혼자 싸우게 두지 않아.'
'우리가 지켜낸 남원의 진실을, 네 손으로 베어내.'
재환의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불길이 솟구쳐 올랐다.
7년 전, 서울로 끌려가며 플랫폼에서 흘렸던 피눈물이 비로소 거대한 정의의 물결로 화하여 돌아왔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재환은 수사관들을 향해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대검 특별수사본부, 전원 진입하라!"
"방해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공무집행방해 현행범으로 전원 체포한다!"
"와아아아-!"
시민들의 함성이 제방을 뒤흔들었다.
수사관들이 전경 방패벽을 밀어붙이며 통제선을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당황한 전경들이 방패를 내던지고 뒤로 물러섰고, 레미콘 트럭 기사들은 차 문을 열고 논두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재환은 망설임 없이 진흙탕을 밟으며 무너진 제1공구 제방 단면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7. 드러난 흉터와 영장의 집행
비바람에 씻겨 내려간 옹벽의 단면은 그야말로 참혹한 사기극의 현장이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춘 콘크리트 벽면 안쪽에는 있어야 할 고장력 철근 대신, 굵기가 손가락만 한 규격 미달의 철사 수준 철근들이 드문드문 삐져나와 있었다.
시멘트는 손으로 건드리기만 해도 푸석푸석 부서져 내렸고, 기초 골재 대신 강바닥에서 퍼 올린 썩은 모래와 진흙 잡석들이 가득 차 있었다.
"촬영해라!"
재환의 명령에 수사관들이 카메라 플래시를 연신 터뜨렸다.
번쩍이는 섬광 속에서 40억 비자금의 추악한 실체가 낱낱이 필름에 각인되었다.
그때, 통제선 밖에서 거친 브레이크 마찰음과 함께 검은색 관용 세단 로얄 살롱 한 대가 흙탕물을 튀기며 급정거했다.
보닛 앞에 봉황 문양 시청 깃발을 단 관용차였다.
차 문이 거칠게 열리며 감색 양복을 입은 사내가 비틀거리며 내렸다.
강태석 남원시장이었다.
그의 얼굴은 분노와 공포로 핏기가 완전히 가셔 있었다.
"이게 무슨 짓거리야! 감히 뉘기 앞이라고 남원 시정에 칼을 대!"
강태석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내질렀다.
그의 곁으로 시청 비서실 직원들과 한양토건 사내 몇몇이 따라붙었으나, 성난 시민들의 몽둥이와 살벌한 기세에 눌려 다가오지 못했다.
재환은 흙투성이가 된 구두를 딛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헤드라이트의 강렬한 역광을 등지고 선 재환의 장신이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재환은 품속에서 체포영장을 꺼내 들고 강태석을 향해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재환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서서히 드러났다.
강태석의 눈동자가 재환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경악으로 찢어질 듯 커졌다.
"너…… 너는……?!"
7년 전, 서울행 기차에 태워 쫓아냈던 전임 시장 성호석의 어린 아들.
그 어린애가 지금 검은 코트에 서슬 퍼런 검찰의 칼을 쥐고 제 눈앞에 서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강태석 시장님."
재환의 목소리는 얼음물처럼 차가웠다.
"7년 전, 당신이 내 등 뒤에 대고 남원의 힘은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고 지껄였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성…… 성재환……? 네놈이 감히……! 네 아비 성호석이 중앙에서 날 지켜주고 있는데 네놈 따위가……!"
강태석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재환을 가리켰다.
재환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그 미소는 너무나 잔혹하고 완벽한 포식자의 것이었다.
"내 아버지 성호석 차관 역시 오늘 밤 대검 중수부에 소환 통보되었습니다."
"뭐…… 뭐라고?!"
강태석의 턱관절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재환은 품에서 1968년 토지 매각 이면계약서 사본과 함께 체포영장을 강태석의 가슴팍에 내리꽂듯 들이밀었다.
"피의자 강태석."
재환의 음성이 요천 제방의 밤하늘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당신을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 위반 뇌물수수, 업무상과실치사상,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고,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권리가 있으며……."
철컥!
재환의 뒤에 서 있던 특수부 수사관이 번개처럼 달려들어 강태석의 두 손목에 차가운 쇠고랑을 채웠다.
"이거 놓아라! 내가 남원시장이다! 내가 이 남원의 왕이야!"
강태석이 비명을 지르며 발악했으나, 건장한 수사관 두 명의 완력에 짓눌려 무릎이 흙탕물 바닥으로 꺾여 내려앉았다.
시민들의 환호성이 제방을 뒤덮었다.
그 아수라장의 한가운데에서, 성재환은 조용히 고개를 들어 통제선 밖에 서 있는 한지유를 바라보았다.
촛불을 든 지유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이 불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였다.
지유는 가슴팍에 품은 재환의 낡은 증명사진을 덧누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7년의 눈물과 기다림, 닳고 닳은 학생증 사진에 새겨졌던 약속이 마침내 남원의 흙탕물 위에서 완전한 정의로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재환은 코트 주머니 속 지유의 만년필을 조용히 어루만지며, 남원을 향한 길고 길었던 사법의 심판을 비로소 완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