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歸鄕)
1. 멈추어 선 빗줄기
호남고속도로를 가로지르며 세차게 차창을 두드리던 장대비는 전라북도 도계를 넘어서며 서서히 잦아들었다.
검붉은 황톳물을 거칠게 튀기며 젖은 아스팔트 위를 맹렬히 질주하던 대검찰청 특별수사본부 지휘 세단의 와이퍼가 거친 마찰음을 내며 한 템포 느리게 유리창을 훑어내렸다.
차창을 납덩이처럼 무겁게 짓누르던 잿빛 먹구름의 거대한 균열 사이로, 희뿌연 늦은 오후의 햇살이 비수처럼 날카롭게 비쳐 내렸다.
지휘 세단의 묵직한 6기통 엔진음만이 침묵이 무겁게 가라앉은 차내를 낮고 깊게 울리고 있었다.
성재환은 뒷좌석에 미동도 없이 곧은 자세로 앉아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남원의 초입 풍경을 응시했다.
7년이었다.
무려 2,558일이라는 아득하고도 처절한 시간의 무게였다.
열여덟의 어린 나이에 부친 성호석의 서슬 퍼런 위세와 가문의 억압에 짓눌려, 마치 죄인처럼 서울 성북동 사저로 강제 압송되듯 끌려가던 소년의 눈에 비쳤던 남원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지금, 칠흑 같은 어둠과 불의의 세월을 뚫고 대한민국 검사의 신분으로 돌아온 스물다섯 청년의 눈에 맺힌 풍경은 너무나도 달랐다.
그러나 결코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흙탕물이 거칠게 소용돌이치며 굽이치는 요천(蓼川) 너머로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내는 남원 시내의 낮은 기와지붕들, 그리고 여전히 저 멀리서 묵묵히 시내를 굽어보고 서 있는 지리산의 서늘한 능선이었다.
수해의 참혹한 상흔은 남원 초입부터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었다.
도로변의 백일홍 가로수들은 뿌리째 뽑혀 진흙탕 속에 흉물스럽게 나뒹굴고 있었고, 부러진 나뭇가지와 상류에서 떠내려온 찢겨진 비닐하우스의 잔해들이 전신주마다 어지럽게 엉겨 붙어 있었다.
진흙투성이가 된 가재도구를 멍하니 바라보며 길가에 주저앉아 있는 수재민들의 메마른 얼굴들이 빠르게 차창을 스쳤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조차 사치인 듯, 그들의 눈빛에는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막막한 절망과 황망함만이 고여 있었다.
그 비참한 광경을 지켜보는 재환의 턱 선이 서늘하게 굳어졌다.
운전대를 잡은 대검 특수부 수사관이 룸미러로 뒷좌석 재환의 서늘한 안색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입을 열었다.
"검사님, 방금 남원 톨게이트를 통과했습니다."
수사관의 목소리에는 서울 대검찰청에서부터 쉬지 않고 달려온 장시간 질주로 인한 피로감과 함께, 일촉즉발의 거대한 폭풍을 앞둔 팽팽한 긴장감이 배어 있었다.
"요천 수변공원 제방 붕괴 현장으로 바로 직행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전주지검 지원 인력 및 대검 후속 차량들과의 사전 합류 지점을 먼저 잡으시겠습니까?"
재환은 시선을 창밖의 거친 흙탕물에서 거두지 않은 채 낮고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구 남원역 광장으로 차를 돌려주십시오."
수사관이 뜻밖이라는 듯 룸미러로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남원역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검사님, 현장 상황이 대단히 급박합니다. 방금 무전으로 들어온 현지 첩보에 따르면, 강태석 시장이 남원경찰서 전경 병력을 총동원해서 제방 붕괴 현장 반경 500미터를 '재난위험구역'으로 묶고 외부 접근을 전면 차단하고 있습니다. 시청 관급 중장비와 덤프트럭들이 투입되어 무너진 옹벽 단면을 흙과 잡석으로 덮어버리려 한다는 보고도 있었습니다. 시간을 지체하면 부실시공 단면에 노출된 저급 골재와 규격 미달 철근 잔해를 인멸하거나 은폐할 위험이 큽니다."
"알고 있습니다."
재환의 입술 끝이 서늘하게 굳어졌다.
"그들이 무엇을 감추려 발악하는지, 어떤 속도로 증거를 지우려 드는지 이미 손바닥 보듯 꿰뚫고 있습니다. 하지만 증거 인멸의 꼬리는 이미 사방으로 뻗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남원역이어야 합니다. 그곳은 내가 남원을 떠나며 가문과 세상에 패배했던 자리이자, 이 도시의 법과 정의가 억압 속에 유폐되었던 출발점입니다. 남원의 심장부에 내 발로 직접 내려서는 순간부터, 강태석과 그 일당에게 이 수사가 단순한 행정 감사가 아니라 사법 심판의 서막임을 똑똑히 각인시켜야 합니다. 더 이상 숨을 곳도, 도망칠 곳도 없다는 것을 가장 분명한 자리에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단호하고 추상같은 어조에 수사관은 더 이상 이의를 달지 못하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알겠습니다. 남원역 광장으로 진입하겠습니다."
방향지시등이 켜지고, 육중한 검은색 세단은 젖은 아스팔트를 날카롭게 가르며 남원 시내의 중심부, 붉은 벽돌의 구 남원역을 향해 속도를 높였다.
2. 7년 전의 승강장
구 남원역(舊 南原驛) 광장은 며칠간 쏟아진 폭우로 곳곳에 거대한 물웅덩이가 패어 있었다.
뿌연 흙탕물이 고인 아스팔트 광장 바닥 위로, 빗물에 젖어 짙은 암갈색으로 물든 붉은 벽돌 역사가 음울한 침묵 속에 서 있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자리를 지켜온 유서 깊은 역사는 세월의 때와 거친 비바람에 깎여나간 자국이 역력했다.
역사 꼭대기, 녹슨 철제 프레임에 안긴 둥근 기계식 시계탑은 삐걱거리는 초침 소리를 내며 묵묵히 돌아가고 있었다.
지휘 세단이 흙탕물을 가르며 역 광장 한복판에 부드럽게 멈춰 섰다.
엔진이 꺼지자, 빗물이 처마 밑으로 뚝뚝 떨어지는 규칙적인 물방울 소리가 적막을 깼다.
수사관이 신속히 차에서 내려 뒷좌석 문을 열었다.
성재환이 구두를 디뎠다.
흙탕물이 튄 거친 아스팔트 위에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완벽한 정장 차림의 청년이 우뚝 섰다.
단정하게 다려진 짙은 감색 싱글 수트, 바람에 미동조차 하지 않는 정갈한 흑청색 넥타이, 그리고 각 잡힌 롱코트 안주머니 속에 묵직하게 자리 잡은 대한민국 검사 신분증.
재환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역사 상단의 낡은 시계탑을 올려다보았다.
오후 5시 17분.
시계탑의 검은 철제 바늘은 7년 전 그날과 다름없이 무심한 시간의 궤적을 긋고 있었다.
그 순간, 코끝을 찌르는 디젤 매연 냄새와 귀를 찢을 듯 울부짖던 통일호 열차의 날카로운 기적 소리가 환청처럼 귓전을 때렸다.
7년 전 그날의 승강장이 시야 위로 파도처럼 겹쳐졌다.
부친 성호석의 지시를 받은 건장한 비서실 직원들에게 양팔을 붙잡힌 채 기차 난간으로 끌려가던 열여덟의 자신.
가문의 규율과 아버지의 서슬 퍼런 권력 앞에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무력하게 끌려가던 그 처참했던 굴욕의 순간.
그리고 저 차디찬 플랫폼 바닥을 향해 빗길을 뚫고 교복 치마를 펄럭이며 달려오던 한 소녀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남원 톨게이트 진입로 아스팔트에서 넘어져 피범벅이 되었던 무릎을 절뚝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며 끝끝내 기차를 향해 손을 뻗던 한지유.
차창 너머로 시선이 마주쳤을 때, 피눈물을 삼키며 주먹을 쥐고 자신의 학생증 모서리를 잘라 던져주었던 기억이 심장을 도려내듯 되살아났다.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지유가 선물했던 그 단정한 흑청색 잉크로 뒷면에 새겨 넣었던 친필 서약.
기차가 미끄러지듯 플랫폼을 빠져나갈 때, 바닥에 주저앉아 핏물이 배어 나오는 무릎을 부여잡고 목이 터져라 외치던 지유의 절규가 귓전을 사납게 맴돌았다.
- 재환아!
잊지 마!
나 여기서 안 가고 기다릴 거야!
10년이 걸려도, 20년이 걸려도 기다릴 테니까 꼭 돌아와야 해!
그 외침은 지난 7년 동안 단 하루도 성재환의 뇌리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신림동 9동 고시원의 곰팡내 나는 세 평 단칸방에서, 뼛속까지 시려오던 겨울밤 졸음을 쫓기 위해 컴퍼스로 제 허벅지를 찔러가며 피를 쏟던 순간마다 그 목소리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사법연수원의 살인적인 경쟁 속에서도, 대검 중수부와 서울지검 특수부의 험악한 수사 현장 속에서도 그 외침은 성재환을 지탱하는 유일한 닻이었다.
재환은 무의식중에 양복 안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손끝에 묵직하고 단단한 감촉이 닿았다.
서울 명문 로스쿨을 졸업한 백부에게 물려받아, 지유의 하얀 손수건에 감겨 제게 건네졌던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이었다.
캡 상단에 새겨진 금빛 한자 이름 '成宰桓', 그리고 그 아래 선명한 라틴어 법언.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손끝으로 그 차가운 금빛 글귀를 더듬어 내리는 순간, 심장 밑바닥에서부터 서늘한 분노와 주체할 수 없는 결의가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지유야."
재환의 메마른 입술 사이로 나직한 읊조림이 흘러나왔다.
"약속대로, 내가 돌아왔다."
그것은 허공에 흩어지는 독백이 아니었다.
7년의 고통과 인내를 딛고 일어선 한 사내가 자신의 전부를 걸고 바치는 맹세의 귀환 보고였다.
3. 왜곡된 광장의 공기
역 광장 모퉁이, 비가림막이 찢겨나간 신문 가판대 앞에 몇몇 시민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서 있었다.
재환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가판대 위에는 방금 인쇄소 윤전기에서 쏟아져 나온 듯, 역한 화학 약품과 기름 잉크 냄새를 짙게 풍기는 신문 뭉치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지방 일간지 남원일보의 1면 호외였다.
시뻘겋고 거대한 활자가 비에 젖은 공기를 찢으며 눈을 찔러왔다.
[100년 만의 320mm 기습 폭우!
요천 제방 불가항력 붕괴!]
[강태석 시장, 전 직원 비상소집 및 철야 인명 구조 지휘… 구도심 수해 복구에 총력 선언]
헤드라인 바로 아래에는 낯익고 추악한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었다.
노란색 민방위복을 입고 허리까지 차오른 흙탕물 속에 장화를 신은 채 들어가, 물에 젖은 노인을 비장한 표정으로 부축하고 있는 남원시장 강태석의 모습이었다.
완벽하게 연출된 위선의 극치였다.
재환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요천 수변공원 제1공구 제방 붕괴 참사의 실체는 100년 만의 폭우 따위가 아니었다.
강태석 남원시장과 그 처남 조상태의 동서개발, 세창물산, 그리고 한양토건이 결탁하여 40억 원의 공사비를 횡령하기 위해 저지른 천인공노할 인재(人災)였다.
설계 기준상 반드시 들어가야 할 고장력 철근의 규격을 3분의 1로 잘라내고, 방수 시멘트 대신 하천 바닥의 저급 잡석과 진흙 모래를 쑤셔 넣어 만든 모래 옹벽이었다.
그 탐욕과 부실의 대가로 하정리와 동충동의 힘없는 서민들이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흙탕물 속에 빼앗겼다.
수많은 상인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지붕 위로 피신해야 했건만, 참사를 일으킨 장본인은 언론을 겁박해 자신을 재난 극복의 영웅으로 둔갑시키고 있었다.
가판대 앞에 선 남루한 옷차림의 노인이 신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혀를 끌끌 찼다.
"아이고, 하늘도 무심하시지. 비가 웬만큼 와야지 원, 하룻밤 새 300미리가 넘게 퍼부었으니 저 단단한 돌둑이 버텨낼 재간이 있었겠어? 그래도 시장님이 저렇게 직접 흙탕물에 뛰어들어서 노인네들 업고 다니니 그나마 다행이제…."
옆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서 있던 중년의 행인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 양반 아니었으면 동충동 아랫동네 사람들은 밤새 통째로 쓸려 내려갈 뻔했어요. 어용 신문이니 뭐니 해도, 위기 닥치니까 시장이 제일 앞장서서 뛰는구먼."
거짓이 진실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언론사 편집국장을 윽박지르고, 시정 홍보비 삭감과 세무조사 위협으로 기사를 조작하며, 무지한 시민들에게 공포와 동정을 동시에 주입하는 전형적인 토착 카르텔의 폭압적 지배 방식이었다.
재환의 곁으로 다가선 특수부 수사관이 신문 1면을 쏘아보며 거칠게 이를 갈았다.
"정말 파렴치한 인간들입니다. 최민재 기자가 신문사 캐비닛 뒤에 숨어서 목숨 걸고 녹음한 외압 테이프가 없었다면, 이 조작된 호외 한 장으로 모든 게 덮일 뻔했습니다. 온 도시가 물에 잠겼는데 저자는 그 피눈물 위에서 정치 쇼를 벌이고 있습니다."
"덮이지 않습니다."
재환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장처럼 차갑고 단호했다.
"진실은 썩은 권력이 찍어낸 종이 쪼가리 몇 장 따위로 가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7년 전, 피 흘리며 바닥을 기어 다니던 자들의 눈물과 상처가 이 땅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 한, 그들이 세운 거짓의 성벽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재환은 코트 안섶을 열어 묵직한 서류철 하나를 꺼냈다.
서울 대검찰청 중수부에서 정식으로 결재받고 법원에서 발부된 체포영장 및 압수수색영장 원본이었다.
피의자 난에 적힌 이름들이 선명했다.
'남원시장 강태석, 동서개발 대표 조상태, 한양토건 회장 박진철.'
그 아래 붉은 인주로 찍힌 법원의 압인과 함께 적시된 죄명들이 시퍼런 날을 세우고 있었다.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업무상과실치사상,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건설산업기본법위반.'
재환의 서늘한 눈빛이 붉은 영장 직인 위에 가만히 내려앉았다.
"이 신문 뭉치들이 얼마나 비열하고 허망한 사기극이었는지, 오늘 남원의 모든 시민들 앞에서 법의 이름으로 증명해 보일 겁니다."
4. 가슴에 품은 신분증
재환은 역 광장 한편, 페인트가 흉하게 벗겨진 낡은 공중전화 부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유리창에 누렇게 때가 낀 부스 안에는 수화기가 위태롭게 걸려 있었다.
순간, 신림동 고시촌 백조당 인쇄소 앞 공중전화의 기억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다.
갓 찍어낸 문제집 냄새와 기름내가 진동하던 그 골목길에서,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지유의 처절한 비명.
각목과 쇠파이프가 철문을 사납게 후려치던 둔탁한 소리와, 피습당한 최민재의 거친 신음.
그때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끊어져 버린 수화기를 부여잡고 무력감에 치를 떨며 피눈물을 삼켰을 뿐이었다.
부친 성호석의 꼭두각시가 되기를 거부하고 남원으로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법이라는 합법적 무기를 쥐지 못한 채 내려갔다간 그 탐욕스러운 카르텔의 아가리에 흔적도 없이 먹혀버릴 뿐임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를 악물고 버텼다.
지유가 보내준 흑청색 잉크가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법전을 파고들었고, 마침내 사법시험 전국 수석이라는 무기를 손에 쥐었다.
사법연수원 최우수 학술상을 받으며 지자체 토착 비리를 일망타진할 특수수사 법리를 완성했고, 서울지검 특수2부의 거친 현장에서 거악의 숨통을 끊는 법을 완벽히 체득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대검 특별수사본부 파견 주임검사라는 절대적인 사법 권력을 쥐고 이곳에 섰다.
재환은 코트 안쪽 주머니에 깊숙이 손을 집어넣었다.
부드러운 검은 가죽 지갑에 싸인 은빛 테두리의 검사 신분증이 손가락 마디에 감겨왔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특별수사본부 파견 검사 성재환.'
대한민국 헌법과 형사소송법이 부여한 가장 무겁고 서슬 퍼런 칼날.
이것은 사사로운 원한을 갚기 위한 복수의 흉기가 아니었다.
30년 전 아비 성호석이 저질렀던 과수원 강탈과 단독 환지 비리의 원죄부터, 강태석과 결탁해 남원의 힘없는 이들을 짓밟아온 거대한 토착 권력의 숨통을 끊어내기 위한 엄정한 단죄의 칼이었다.
아버지는 일찍이 차가운 목소리로 훈계하듯 말했었다.
'남원의 힘은 썩었다. 지방 토착 세력과 무지한 농민들의 세계는 이미 썩어 문드러졌어. 바닥의 정의에 매달려서는 개미처럼 짓밟힐 뿐이다. 오직 중앙의 막강한 사법과 행정 권력을 장악해야만 세상을 지배하고 바로잡을 수 있는 법이다.'
재환의 입꼬리가 차갑게 비틀렸다.
'아닙니다, 아버지. 틀렸습니다. 바닥의 정의가 썩은 것이 아니라, 그 바닥을 짓밟고 서서 탐욕을 채우던 당신들의 권력이 썩었던 겁니다. 개미처럼 짓밟힌 이들이 피눈물로 지켜낸 그 정직이야말로 세상을 지탱하는 진짜 뿌리입니다.'
지유가 7년 전 선물했던 흑청색 잉크.
그 푸른 잉크로 새겼던 약속은 단 한 번도 흐려진 적이 없었다.
어머니의 임종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삼베 상복을 입은 채 영안실을 지켰던 지유.
심야 쇠파이프 테러로 깨진 유리창을 투명 박스 테이프로 'X' 자로 기워 붙이며 가게를 지켜냈던 지유.
부패한 세무서 조사관들의 표적 단속 앞에서도 1원의 오차도 없는 투명한 회계 장부로 공권력의 횡포를 꾸짖었던 지유.
그녀가 온몸을 던져 지켜낸 진실의 터전 위로, 이제 자신이 법의 이름으로 가장 거대한 방파제를 세울 차례였다.
5. 요천 제방을 향한 진군
수사관이 차 문을 열며 재환을 향해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검사님, 후속 수사 차량 석 대가 남원 시계(市界)를 완전히 통과했다고 무전이 왔습니다. 대검 특별수사팀 12명, 전주지검 지원 수사관 8명, 총 20명의 정예 인력이 집결 중입니다."
"좋습니다."
재환은 남원역 시계탑에서 마침내 시선을 거두고 돌아섰다.
그의 눈빛에는 더 이상 7년 전 소년의 나약함이나 흔들림은 티끌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부패한 거악의 숨통을 정확히 꿰뚫어 끊어놓겠다는 서슬 퍼런 살기만이 서늘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합류 지점은 요천 제1공구 제방 붕괴 현장 통제선 바로 앞입니다."
수사관이 긴장된 표정으로 덧붙였다.
"남원경찰서 전경들이 둑길을 따라 3중 차단선을 구축하고 취재진과 주민들을 완전히 밀어내고 있습니다. 남원경찰서장이 강태석 시장의 최측근인 만큼, 검찰의 현장 접근을 재난위험구역 안전 통제라는 핑계로 물리적으로 가로막으며 격렬하게 저항할 가능성이 큽니다."
재환은 담담한 걸음으로 차 뒷좌석에 다시 올랐다.
"막아서게 두십시오. 직권남용이든, 공무집행방해든, 범인은닉이든 상관없습니다. 법의 정당한 집행을 가로막는 자는 그 계급과 직책이 무엇이든 그 자리에서 현행범으로 함께 엮어 넣을 겁니다."
쾅, 하고 육중한 지휘 세단의 문이 닫혔다.
엔진이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차체가 튀어 나가듯 역 광장을 빠져나갔다.
창밖으로 빗물에 젖은 남원의 익숙한 골목들이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
남원 동문 우체국 안쪽 골목, 삼거리 김밥집이 있는 방향을 스쳐 지나갈 때 재환의 가슴 밑바닥이 미세하게 요동쳤다.
'조금만 더 버텨줘, 지유야. 현장의 악귀들을 먼저 법의 철창에 가두고, 지체 없이 너에게로 가겠다.'
검은색 세단은 먹구름이 걷혀가는 요천 둑길을 향해 거침없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7년간 피눈물로 벼려온 사법의 칼날이, 마침내 썩어 문드러진 남원의 심장부를 향해 정면으로 겨누어지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