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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43화

자원 검사 성재환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빗속의 긴급 전언

 

폭우가 남원(南原)의 밤하늘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깨진 기와 틈새로 흘러내린 빗물이 관사 뜰의 자갈을 요란하게 때렸다.

 

관사 2층 집무실에 서 있던 성재환(成宰桓)은 손에 쥔 서류철을 거두고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흙탕물이 이미 남원 시내 저지대를 집어삼키고 있다는 무전 소리가 무전기 너머에서 찢어질 듯 울렸다.

 

강태석(姜泰錫)은 쥐새끼처럼 관사 뒤란의 비상 통로를 통해 어둠 속으로 달아난 뒤였다.

 

비서실장이 남기고 간 파쇄기 앞에는 반쯤 타다 만 공사 감리 일지와 허위 세금계산서 조각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재환은 바닥에 흩어진 종잇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거기에는 규격 미달의 철근 수량과 ‘동서개발 조상태’라는 직인이 검붉은 인주로 찍혀 있었다.

 

요천(蓼川) 제1공구 제방 옹벽이 터져 나간 것은 결코 하늘의 장난이 아니었다.

 

40억 원의 공사비를 빼돌려 주머니를 채운 자들이 빚어낸 명백하고 잔혹한 인재(人災)였다.

 

그때 계단을 급하게 뛰어 올라오는 거친 군화 소리가 적막을 깼다.

 

남원 시내에 긴급 파견되어 지원을 나왔던 특수부 수사관이 숨을 헐떡이며 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검사님! 방금 남원일보사 쪽에 잠복해 있던 우리 쪽 협조자로부터 긴급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최민재 기자가 신문사 안에서 강태석의 육성을 직접 확보했답니다!"

 

재환의 서늘한 눈매가 번뜩였다.

 

"강태석의 육성?"

 

"예! 강태석이 신문사 편집국장실로 들이닥쳐 호외 교정지를 찢어버리고, 시정 홍보비를 볼모로 300밀리미터 기습 폭우에 따른 천재지변으로 기사를 조작하라고 협박했답니다. 최 기자가 캐비닛 뒤에 숨어서 그 발언을 카세트테이프로 전부 녹음했습니다!"

 

재환의 입술 끝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리고 광한루원(廣寒樓苑) 쪽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수사관이 마른침을 삼키며 보고를 이었다.

 

"한지유 씨가 주민들을 이끌고 완월정(翫月亭) 언덕으로 피신했습니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까지 업고 물길을 뚫었다고 합니다. 최 기자가 제방 현장에서 건져낸 부실 콘크리트 시편과 한양토건 설계 감리 보고서 원본도 그곳 팽나무 바위 틈에 안전하게 은닉해 두었답니다."

 

재환은 묵묵히 주머니 속 만년필을 쥐었다.

 

검은 옻칠 위로 차가운 금빛 닙의 감촉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지유가 목숨을 걸고 주민들을 지키며 증거를 품고 있었다.

 

그녀가 진흙탕 속에서 홀로 버텨내는 동안, 자신은 합법의 칼날을 들고 이 썩어빠진 카르텔의 숨통을 끊어야 했다.

 

"지금 즉시 서울 대검찰청(大檢察廳)으로 연락을 취해라. 정종길(鄭鍾吉) 중수부장님 직통 내선으로 연결해."

 

"예, 알겠습니다!"

 

수사관이 유선 전화기를 붙들고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재환은 피 묻은 가슴을 억누르듯 젖은 코트 깃을 여미며 창밖을 응시했다.

 

남원을 집어삼킨 저 탁류 속에서, 진실을 감추려는 자들과 밝혀내려는 자들의 마지막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2. 어둠 속의 탈출로

 

남원일보사 건물 3층 복도는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자료실 낡은 철제 캐비닛 뒤편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최민재는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었다.

 

품속 안주머니에 들어 있는 소형 카세트테이프가 묵직하게 심장을 짓눌렀다.

 

그 안에는 조금 전 강태석이 편집국장 배도식을 향해 내뱉은 표독스러운 협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천재지변이야. 백 년 만에 쏟아진 하늘의 재앙이라고 대문짝만하게 박아. 시정 홍보비 3억 날아가고 신문사 문 닫는 꼴 보기 싫으면 내 말대로 해.’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가.

 

사람 목숨이 흙탕물 속에 쓸려 나가고 저지대 가옥들이 지붕만 남긴 채 가라앉고 있는데, 제 권력을 지키겠다고 진실을 짓밟으려 들다니.

 

민재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쿵, 쿵, 쿵.

 

복도 끝 계단 쪽에서 육중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야, 이쪽 샅샅이 뒤져봐! 혹시 쥐새끼 한 마리 숨어 있을지 모른다!"

 

강태석의 사주를 받은 폭력배들의 거친 목소리였다.

 

손전등의 노란 불빛이 굳게 닫힌 자료실 문틈 사이로 어지럽게 번뜩였다.

 

민재는 이를 악물고 발소리를 죽인 채 창문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남원일보사 뒤편은 좁은 배수로와 맞닿은 비탈길이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통에 흙벽이 무너져 내릴 위험이 있었지만, 정문으로 나갔다가는 테이프를 빼앗기고 시체조차 찾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는 삐걱거리는 창틀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차디찬 빗방울이 순식간에 얼굴을 때렸다.

 

"어이! 저기 창문 열리는 소리 안 났어?"

 

문밖에서 다급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문고리가 덜컹거리며 쇠지레로 문을 부수는 소리가 이어졌다.

 

민재는 망설이지 않고 창턱을 넘어 빗물받이 홈통을 붙잡았다.

 

미끄러운 쇠 파이프를 타고 미끄러져 내리자마자 바닥의 진흙탕 위로 굴러떨어졌다.

 

무릎이 찢어지는 통증이 엄습했으나 멈출 수 없었다.

 

그는 안주머니의 테이프를 손으로 꼭 쥔 채, 어둠 속 요천 둑길을 우회하여 광한루원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지유야, 재환아.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이 증거는 목숨 걸고 넘길 테니까.'

 

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어져 앞을 분간하기 힘들 지경이었지만, 소년 시절부터 누비던 남원의 골목길은 그의 발끝에 생생하게 새겨져 있었다.

 

3. 대검찰청의 새벽 회의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청사의 새벽은 차갑고 무거웠다.

 

지상 8층 중앙수사부 회의실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타자기로 쳐 내려간 갱지 보고서들이 책상 위에 어지럽게 쌓여 있었고, 굵은 담배 연기가 형광등 불빛 사이로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중앙에 앉은 대검 중수부장 정종길은 굳은 얼굴로 전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남원 현장에서 올라온 성재환 검사의 긴급 보고를 직접 들은 직후였다.

 

탁상 위에는 방금 전 전북지방경찰청과 남원지청에서 올려보낸 엉터리 초기 상황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

 

‘남원 일대 기습 강우량 320mm 기록, 요천 제방 불가항력적 자연 붕괴, 인명 피해 없음.’

 

정종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불가항력적 자연 붕괴? 허위 보고를 올려도 유분수지. 옹벽에 고장력 철근 대신 잡석을 쑤셔 넣고 40억을 해먹은 놈들이, 하늘이 노해서 무너졌다고 둘러대?"

 

회의실에 둘러앉은 대검 수뇌부 간부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대검 기획조정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장님, 남원시장 강태석은 단순한 토착 토건족이 아닙니다. 여당 내무위원장 김문현(金文顯) 의원이 뒷배를 봐주고 있고, 이미 중앙 정무라인을 통해 사건 축소 지침이 내려왔다는 첩보가 있습니다. 지금 검찰이 전면에 나섰다가는 정권 핵심부와의 정면충돌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또 다른 간부 역시 거들었다.

 

"그렇습니다. 더군다나 현장에 내려가 있는 성재환 검사는 내무부 차관 성호석(成浩錫)의 아들이 아닙니까. 성호석 차관 역시 과거 남원시장 시절 환지 비리로 얽혀 있다는 투서가 계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친아버지가 연루된 지역에 아들을 주임검사로 보낸다는 것은 사법적 중립성 시비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정종길이 싸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책상을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의자를 뒤로 물렸다.

 

"중립성? 자네들은 지금 남원 바닥에서 시민들이 흙탕물에 집을 잃고 울부짖는 소리가 안 들리나? 이따위 사정을 봐주며 정치권 눈치나 살피라고 우리가 칼을 쥐고 있는 줄 알아!"

 

정종길의 서슬 퍼런 일갈에 회의실 전체가 찬물을 끼얹은 듯 얼어붙었다.

 

"성재환이라는 놈은 말이지, 연수원 시절부터 제가 모시는 스승 앞에서도 가문의 비리를 도려내겠다고 눈을 부라리던 놈이야. 제 아비의 죄를 덮으려는 게 아니라, 제 손으로 그 썩은 살점을 도려내겠다고 7년을 이 악물고 버틴 놈이란 말이다."

 

정종길은 서류철을 넘기며 결재판을 집어 들었다.

 

"법무부 장관의 정식 재가가 떨어졌다. 남원 수변공원 붕괴 참사 및 관급 비리 사건을 규명하기 위해 '대검찰청·서울지검 남원 정경유착 특별수사본부'를 정식으로 출범시킨다. 문제는 현장에 내려가 칼을 휘두를 주임검사인데……."

 

그때 회의실 육중한 문이 조용히 열렸다.

 

물에 젖은 바바리코트를 걸친 단정한 체구의 사내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성재환이었다.

 

남원에서 새벽 첫 기차를 타고 본청으로 직행한 그의 구두에는 아직 붉은 황토흙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새벽이슬처럼 맑고 서슬 퍼렇게 벼려져 있었다.

 

회의실의 모든 시선이 일제히 성재환에게 쏠렸다.

 

4. 자원 검사(自願 檢事)

 

재환은 정종길과 대검 수뇌부 간부들을 향해 허리를 굽혀 묵직하게 목례를 올렸다.

 

"서울지검 특수2부 성재환 검사입니다."

 

간부들의 얼굴에 당혹과 경계의 빛이 역력했다.

 

기획조정관이 헛기침을 하며 재환을 바라보았다.

 

"성 검사, 지금 남원 현장이 아수라장이라 들었는데 여기까지 어찌 올라온 겁니까?"

 

재환은 대답 대신 가슴 안주머니에서 정갈하게 접힌 백색 보고서 한 권을 꺼내 회의 탁자 중앙에 내려놓았다.

 

표지에는 단정한 흑청색 글씨로 제목이 적혀 있었다.

 

‘남원 요천 수변공원 붕괴 참사 원인 규명 및 토착 정경유착 카르텔 수사 파견 자원서.’

 

정종길이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자원서라…… 성 검사, 자네가 직접 남원 특수본의 주임검사로 내려가겠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중수부장님."

 

재환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남원은 단순한 수해 지역이 아닙니다. 지난 30년간 토착 토건 세력과 부패한 관료, 그리고 중앙 정치권이 결탁해 민초들의 피를 빨아먹은 거대한 부패의 온상입니다. 요천 제방 붕괴는 그 부패가 한계에 달해 터져 나온 필연적 참사입니다."

 

기획조정관이 미간을 찌푸리며 쏘아붙였다.

 

"성 검사, 자네도 알다시피 이번 사건의 배후에는 여당 실세 김문현 의원이 버티고 있어. 게다가 자네 선친인 성호석 차관의 이름까지 거론되고 있네. 검찰 내부에서도 자네가 수사를 맡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 사적 감정이나 가문의 이해관계가 개입될 수 있다는 지적을 어떻게 피할 텐가?"

 

재환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기획조정관의 시선을 받아냈다.

 

"사적 감정이 개입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재환의 손이 품속에서 만년필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칠흑 같은 옻칠 캡 위로 ‘Fiat justitia, ruat caelum’이라는 문구가 형광등 불빛을 받아 서늘하게 빛났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져야 합니다. 만약 제 친아버지가 그 비리에 연루되어 있다면, 제가 가장 먼저 성호석 차관을 법정에 세울 것입니다. 가문의 이름을 걸고, 검사의 법복을 걸고 맹세합니다."

 

회의실 안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친아버지를 직접 기소하겠다는 서슬 퍼런 맹세 앞에서 간부들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정종길이 보고서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거기에는 성재환이 7년간 서울지검 특수부에서 추적해 온 남원상호신용금고 차명 계좌 12개의 흐름과, 한양토건 및 동서개발의 페이퍼 컴퍼니 자금 세탁 구조도가 소름 끼칠 정도로 치밀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것은 며칠 만에 급조된 수사 계획서가 아니었다.

 

오랜 세월 가슴속에 복수의 칼을 갈아온 자만이 작성할 수 있는 완벽한 사법 심판의 설계도였다.

 

정종길이 서류를 덮으며 결단을 내렸다.

 

"좋다. 대검찰청 특별수사본부 남원 현장 파견 주임검사로 성재환 검사를 공식 임명한다. 강인철 부장의 특수2부 정예 수사관 전원과 계좌 추적 전문 요원들을 자네 휘하에 배속시키겠다."

 

"감사합니다, 부장님."

 

정종길이 자리에서 일어나 재환의 어깨를 묵직하게 쥐었다.

 

"성 검사, 칼을 뽑았으면 끝까지 베어야 해. 도중에 멈추면 자네 손목이 먼저 날아간다."

 

"명심하겠습니다. 절대로 멈추지 않습니다."

 

재환은 허리를 굽혀 경례를 올린 뒤, 결재가 떨어진 파견 명령서를 받아 들고 뒤돌아섰다.

 

그의 등 뒤로 회의실 문이 닫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이제 남원으로 돌아갈 명분과 권한이 모두 주어졌다.

 

7년 전, 서울행 통일호 기차에 실려 쫓겨나듯 남원을 떠나며 흘렸던 피눈물이 떠올랐다.

 

‘반드시 법복을 입고 돌아오겠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한 시간표가 마침내 완성되었다.

 

5. 완월정의 밤과 팽나무의 맹세

 

같은 시각, 남원 광한루원 완월정 누각 아래는 수해민들의 울음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요천 제방이 터지면서 하정리와 동충동 저지대 상가와 판잣집들이 물에 잠기자, 갈 곳을 잃은 주민 100여 명이 완월정 대청마루와 누원 잔디밭으로 대피해 있었다.

 

한지유는 흙탕물에 젖은 치마를 걷어붙인 채 주민들에게 따뜻한 보리차와 주먹밥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옛 부상 부위인 오른쪽 무릎이 쑤셔왔지만 멈출 수 없었다.

 

구두 수선공 김 씨의 늙은 어머니가 지유의 손을 꼭 쥐며 눈물을 글썽였다.

 

"지유야, 네가 아니었으면 난 그 방구석에서 흙탕물에 쓸려 죽었을 게다. 착한 것, 네 어머니가 하늘에서 널 보고 계실 텐데……."

 

"할머니, 괜찮아요. 이제 물은 더 안 차오를 거예요. 기운 차리셔야 해요."

 

지유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며 노인의 거친 손을 토닥였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완월정 뒤란, 어둠 속에 서 있는 수백 년 된 팽나무 고목을 향해 있었다.

 

그 나무뿌리 바위 틈에는 최민재가 목숨을 걸고 건져온 부실 콘크리트 시편과 한양토건 설계 감리 보고서 원본이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김밥집을 덮친 흙탕물을 뚫고 자신이 기어이 지켜낸 어머니의 유품, 1968년 토지 매각 이면계약서 역시 방수포에 싸여 함께 은닉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단순한 종이 뭉치가 아니었다.

 

이 참사를 일으킨 자들을 단죄할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의 징표였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팽나무 뒤쪽 숲에서 누군가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지유야……!"

 

흙투성이가 된 최민재였다.

 

온몸이 긁히고 멍이 든 채 숨을 헐떡이는 민재의 모습에 지유는 깜짝 놀라 달려갔다.

 

"민재야! 어떻게 된 거야? 다친 데는 없어?"

 

민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품에서 소형 카세트테이프를 꺼내 지유의 손에 쥐여주었다.

 

"해냈다…… 강태석 그 악마 놈 육성을 다 땄어. 편집국장을 협박해서 호외 기사를 천재지변으로 둔갑시키려던 걸 전부 녹음했다고!"

 

지유는 손바닥에 닿는 차가운 플라스틱 테이프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수고했어, 민재야. 정말 큰일을 해냈어."

 

"재환이는…… 재환이는 어디 있니? 그 녀석 관사에서 강태석을 놓쳤다고 하던데……."

 

민재의 물음에 지유는 고개를 들어 서울로 이어지는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먹구름 사이로 희미한 새벽빛이 번져 나가고 있었다.

 

"재환이는 올 거야. 그 아이는 단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어."

 

지유는 가슴속에 품은 흑청색 잉크의 서약을 떠올렸다.

 

7년이라는 모진 세월 동안 온갖 협박과 회유 속에서도 김밥집을 지키며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언젠가 법복을 입고 돌아오겠다던 재환의 그 한마디 때문이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지유는 완월정 난간을 짚으며 주먹을 쥐었다.

 

강태석이 제아무리 언론을 틀어막고 경찰을 동원해 진실을 묻으려 해도, 이 팽나무 아래 묻힌 증거들과 사람들의 증언까지 없앨 수는 없었다.

 

6. 어용 언론의 호외와 거리의 분노

 

아침이 밝아오자 남원 시내 거리에 호외 신문이 뿌려졌다.

 

배도식 국장이 강태석의 협박에 굴복해 윤전기를 돌려 찍어낸 남원일보 1면 호외였다.

 

대문짝만하게 박힌 활자가 시민들의 눈을 찌를 듯 번쩍였다.

 

‘100년 만의 320mm 기습 폭우! 요천 제방 불가항력 붕괴!’

 

‘강태석 남원시장, 밤샘 진두지휘로 시민 피해 최소화! 구도심 수해 복구 총력!’

 

신문 1면에는 노란 민방위복을 입고 진흙탕 속에 장화를 신은 채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강태석의 커다란 사진이 실려 있었다.

 

참사의 원인을 철저히 하늘의 탓으로 돌리고, 학살자를 재난 극복의 영웅으로 둔갑시킨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신문을 받아 든 상인들과 시민들의 손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폭우는 무슨 놈의 폭우! 제방을 모래랑 자갈로 대충 처바를 때부터 알아봤다!"

 

"강태석 저놈이 밤새 요천각에서 술 처먹고 관사에서 도망쳤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지가 진두지휘를 해?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으로 아는 파렴치한 놈!"

 

동문 우체국 앞 거리에서 신문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짓밟는 시민들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강태석은 이미 남원경찰서를 움직여 요천 제방 일대를 ‘재난위험구역’으로 선포하고 전경 병력을 배치해 일반인의 접근을 전면 통제하고 있었다.

 

무너진 제방 단면에 드러난 부실 콘크리트와 규격 미달의 철근 흔적을 외부 시선으로부터 철저히 차단하려는 비열한 은폐 공작이었다.

 

남원경찰서장의 지휘 아래 경찰 버스 서너 대가 요천 둑길을 가로막았고, 기자들의 취재와 시민들의 항의를 곤봉과 방패로 거칠게 밀어냈다.

 

진실은 그렇게 두꺼운 공권력의 장벽 뒤로 영원히 묻히는 것처럼 보였다.

 

7. 결전의 출진(出陣)

 

같은 시각,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청사 지하 주차장.

 

엔진 소리와 함께 검은색 관용 세단 세 대와 수사관들을 태운 특수 승합차가 시동을 걸었다.

 

차량 앞 유리창 안쪽에는 ‘대검찰청 특별수사본부’라는 비표가 선명하게 부착되어 있었다.

 

가장 앞선 세단의 뒷좌석에 성재환이 올라탔다.

 

그의 옆자리에는 법원으로부터 정식 발부받은 체포영장과 압수수색영장 묶음이 두툼한 서류 가방에 담겨 놓여 있었다.

 

피의자 명단에는 강태석 남원시장, 처남 조상태, 한양토건 박진철, 그리고 남원경찰서 간부들의 이름이 빠짐없이 적시되어 있었다.

 

죄명은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업무상과실치사상,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그리고 증거인멸교사.

 

재환은 품속에서 낡은 학생증 증명사진을 꺼내 들었다.

 

그 뒷면에는 7년 전 자신이 지유에게 적어주었던 글귀가 여전히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그동안 흘렸던 고독한 피땀, 신림동 단칸방에서 허벅지를 찌르며 법전을 파고들던 밤들, 서울지검 특수부에서 거악의 목줄을 죄며 갈고닦았던 모든 시간들이 오직 이날을 위한 것이었다.

 

운전석의 수사관이 백미러로 재환을 바라보며 물었다.

 

"주임검사님, 곧바로 남원시청으로 향합니까?"

 

재환은 시선을 들어 정면을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서슬 퍼런 칼날이 번뜩였다.

 

"아니다. 남원역을 거쳐 곧장 요천 제방 현장으로 간다. 경찰 놈들이 쳐놓은 바리케이드를 부수고, 진실이 묻힌 그 자리에서부터 놈들의 목을 벨 것이다."

 

"출발하겠습니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대검 특별수사본부의 차량 행렬이 주차장을 빠져나와 고속도로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먹구름이 서서히 걷히고 가을의 차가운 바람이 남원 들판을 향해 불어오고 있었다.

 

7년의 인내와 침묵이 끝나고, 마침내 정의의 사법 심판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