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노벨
← 목록
3x
1.0
[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41화

무너진 제방 공사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빗속의 경고음

 

삼거리 김밥집의 낡은 유리창 위로 거센 폭우가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렸다.

 

하늘에 먹구름이 겹겹이 들어차며 대낮처럼 밝아야 할 시간조차 칠흑 같은 암흑으로 물들여 버린 지 오래였다.

 

처마 끝을 타고 떨어지는 낙숫물은 이미 줄기를 이루다 못해 세찬 폭포수처럼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남원 시내를 관통하는 요천(蓼川) 변의 둑길을 집어삼킬 듯 맹렬하게 들이치는 빗줄기는 양철 지붕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가게 안쪽, 오래된 참기름 냄새가 은은하게 배어 있는 조리대 앞에는 7년의 세월을 딛고 돌아온 성재환이 서 있었다.

 

단정한 짙은 남색 코트 차림의 그는 7년 전 소년의 티를 완전히 벗어던진, 서슬 퍼런 특수부 검사의 풍모를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삼베 앞치마를 두른 한지유가 서 있었다.

 

투박하게 굳은살이 박인 두 손을 모아 쥔 채, 지유는 붉어진 눈시울 속에서 흘러넘치려는 눈물을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작은 양철 식탁 위에는 세월의 풍파를 증명하듯 누렇게 변색된 1968년의 토지 매각 이면계약서 원본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바로 곁에는 성재환이 품속에서 꺼내어 놓은 대검찰청 특별수사본부 파견 검사 신분증과 공문이 나란히 자리했다.

 

7년이라는 아득한 시간 동안 홀로 가게와 어머니의 유언을 지켜낸 지유의 고통, 그리고 그 고통을 가슴에 품고 신림동 고시촌과 특수부의 암흑 속에서 칼을 갈아온 재환의 침묵이 빗소리 사이로 무겁게 교차했다.

 

침묵을 깬 것은 유리창을 흔드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만이 아니었다.

 

요천 상류 쪽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육중하고 기괴한 파열음이 남원 구도심의 젖은 대지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쿵, 쿵, 거리는 둔탁한 소리가 마치 거대한 괴수가 땅속 깊은 곳에서 몸부림치며 뼈마디를 부러뜨리는 것처럼 골목 바닥을 울렸다.

 

지유가 본능적으로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마른입술을 깨물었다.

 

"재환아, 이 소리…… 단순한 천둥 번개가 아니야. 요천 쪽이야."

 

재환의 서늘한 눈빛이 한순간 차갑게 굳어지며 날카로운 긴장감이 그의 온몸을 감쌌다.

 

"강태석 일파가 시공한 수변공원 제방 제1공구다."

 

재환은 이미 서울에서 특별수사본부 주임검사로 차출되기 전, 요천 정비사업에 투입된 콘크리트 배합 비율과 자재 납품 내역을 이 잡듯 파헤친 상태였다.

 

동서개발과 세창물산, 그리고 한양토건이 빼돌린 40억 원의 비자금은 허공에서 저절로 만들어진 돈이 아니었다.

 

제방의 뼈대가 되어 거센 수압을 견뎌내야 할 고장력 철근은 설계 기준의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수중 침식을 막아내야 할 방수 시멘트 대신 규격 미달의 저가 골재와 진흙 섞인 자갈 모래가 마구잡이로 채워졌던 것이다.

 

이 정도로 쏟아붓는 기록적인 호우라면 제방 기초 지반의 전단 응력이 한계에 도달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때, 덜컹거리며 거칠게 김밥집 미닫이문이 열렸다.

 

빗물에 온몸이 흠뻑 젖은 최민재가 숨을 헐떡이며 안으로 들이닥쳤다.

 

손에 쥔 낡은 소형 카메라와 비닐로 감싼 취재 수첩을 품에 안은 채였다.

 

"재환아! 지유야! 큰일 났어!"

 

민재의 목소리는 공포와 극심한 흥분으로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제방이야! 요천 수변공원 제방 콘크리트 벽면에 균열이 손바닥만하게 벌어지더니, 흙탕물이 제방 하부를 뚫고 분수처럼 솟구치고 있어!"

 

2. 침식되는 제방

 

민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마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올렸다.

 

물에 젖은 그의 점퍼 자락에서는 흙탕물이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내가 둑 위에서 망원렌즈로 찍고 있었거든. 한양토건 현장소장 놈들이 불법 하도급 준 인부들 서넛을 데리고 나와서 포클레인으로 대충 흙포대를 쌓아 막으려 하더군. 그런데 옹벽 밑바닥에서 모래바람 같은 흙탕물이 솟구치더니 순식간에 흙포대 수십 개를 삼켜버렸어!"

 

민재의 목소리에는 그 처참한 광경을 직접 목격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전율이 묻어났다.

 

"그걸 보더니 현장소장 놈들은 포클레인 시동도 안 끄고 승합차에 올라타서 도망쳐 버렸단 말이다! 주민들한테 사이렌 한 번, 대피 방송 한 번 안 때리고 저들만 살겠다고 내빼버렸어!"

 

지유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그럼 그 아래 하정리랑 동충동 저지대 주민들은요? 그쪽엔 거동도 못 하시는 노인분들이 태반인데……! 당장 물이 넘치면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그대로 갇혀버려요!"

 

요천 제방 바로 아래에 맞닿아 있는 구도심 골목들은 남원에서 가장 지대가 낮고 오래된 목조 가옥들이 밀집한 구역이었다.

 

배수 시설조차 70년대 수준에 머물러 있어, 둑이 조금만 넘쳐도 순식간에 어른 허리 높이까지 물이 차오르는 취약 지대였다.

 

성재환은 망설임 없이 코트 자락을 여미며 탁자 위의 특별수사본부 체포영장과 공문, 그리고 검사 신분증을 안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그의 얼굴에는 한 점의 망설임도 없는 냉철한 결단이 서려 있었다.

 

"강태석 시장은 지금 관사에 있나?"

 

민재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관사 2층 집무실에 불이 훤하게 켜져 있어. 시청 당직실에선 남원 전역에 호우경보가 내렸는데도 비상근무 소집조차 안 내렸어. 시장 놈은 관사에서 문 걸어 잠그고 시청 문서고 대장이랑 공사 장부 파쇄 지시만 내리고 있단다! 시청 청원경찰들이랑 비서실 놈들이 비에 젖은 마대 자루를 들고 지적과 지하로 들락거리는 걸 내가 우체국 골목에서 똑똑히 봤어."

 

천인공노할 작태였다.

 

도시 전체가 수마의 문턱에서 신음하고 무고한 시민들의 생명이 풍전등화에 놓인 순간에도, 강태석은 오직 자신의 30년 비리와 횡령 흔적을 인멸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제방이 터져 수해가 발생하면 그 혼란을 틈타 장부를 모두 태워 없애고, 모든 책임을 하늘이 내린 천재지변으로 둔갑시키려는 사악한 속셈이었다.

 

"지유야, 너는 민재와 함께 동문 우체국 쪽으로 올라가서 완월정 고지대로 대피해."

 

재환이 지유의 어깨를 짚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지유는 고개를 강하게 가로저었다.

 

그녀의 두 눈동자 속에는 7년 전, 어머니의 빈소에서 조문 방명록을 덮어버리며 권력의 위선에 맞섰던 바로 그 서슬 퍼런 결기가 타오르고 있었다.

 

"아니, 난 지금 고지대로 피할 수 없어. 삼거리 상인회 아저씨들, 칠기사 배 씨 아저씨랑 구두방 김 씨 아저씨한테 먼저 알려야 해. 그분들 가게와 살림집이 요천 둑길 바로 아랫목이야. 옹벽이 무너지면 10분도 안 돼서 물바다가 된단 말이야!"

 

지유는 조리대 한구석에 걸려 있던 노란 우비와 비상용 메가폰을 집어 들었다.

 

어머니가 피땀으로 지켜낸 터전이었고, 강태석의 용역 깡패들이 쇠파이프를 휘두를 때 온몸으로 인간 띠를 만들어 지유를 지켜주었던 이웃들이었다.

 

혼자만 살겠다고 발길을 돌릴 수는 없었다.

 

재환은 지유의 맑고 굳센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말린다고 들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신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내고 싶었던 한지유의 고결한 영혼임을 재환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재환은 지유의 차갑게 굳은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반드시 안전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몸을 먼저 챙겨. 내가 관사로 가서 강태석의 증거 인멸을 막고, 시청 소방대와 경찰력을 강제로라도 끌어내 현장을 수습할 테니까."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불꽃처럼 얽혔다.

 

7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마주한 두 사람의 신념은 하나의 거대한 정의를 향해 타오르고 있었다.

 

재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김밥집 문을 박차고 나가 어둠과 폭우가 소용돌이치는 거리로 몸을 던졌다.

 

3. 암흑 속의 비명

 

남원 시내를 가로지르는 요천의 물길은 이미 강이 아니라 거대한 흙빛의 용이 되어 날뛰고 있었다.

 

지리산 자락에서부터 밀려 내려온 엄청난 유량은 평소의 다섯 배를 훌쩍 넘어서 있었다.

 

성난 파도처럼 솟구쳐 오른 흙탕물이 제방 상단의 안전 난간을 사정없이 후려쳐 엿가락처럼 휘어놓았다.

 

길이 수백 미터에 달하는 콘크리트 옹벽 표면에는 손가락 굵기의 균열이 거미줄처럼 뻗어나가며 비명을 질러댔다.

 

콰아아아― 쾅!

 

수압을 견디지 못한 제방 옹벽 틈새로 희뿌연 시멘트 가루와 진흙이 뒤섞인 물기둥이 마치 대포알처럼 뿜어져 나왔다.

 

철근이 얽혀 있어야 할 자리에 성긴 철선 몇 가닥만이 앙상하게 드러나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피하십시오! 어서 둑길 밖으로 대피하세요!"

 

폭우가 쏟아지는 동충동 골목길 한복판에서 지유의 찢어질 듯한 외침이 메가폰을 타고 울려 퍼졌다.

 

민재는 양손에 꽹과리와 쇠막대기를 들고 어두컴컴한 처마 밑을 내달리며 굳게 닫힌 문들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쨍, 쨍, 쨍그랑!

 

"김 씨 아저씨! 배 씨 아저씨! 어서 문 여세요! 요천 제방이 터집니다! 당장 빠져나오셔야 해요!"

 

빗소리에 묻힐 뻔한 꽹과리 소리에 놀란 주민들이 하나둘 방문을 열고 뛰어나왔다.

 

잠결에 속옷 바람으로 나온 노인들이 훅 끼쳐오는 비릿한 흙탕물 냄새와 땅바닥을 울리는 지진 같은 진동에 사색이 되었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이여? 비가 좀 많이 온다 싶기는 했는디……!"

 

"요천 수변공원 둑이 무너지고 있단 말입니다! 세간 살피지 마시고 몸만 빠져나오세요! 어서 완월정 언덕 쪽으로 올라가세요!"

 

지유는 칠기사 골목 안쪽으로 내달렸다.

 

평소 다리가 불편해 거동이 힘든 구두 수선공 김 씨의 노모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단칸방 문을 거칠게 밀치고 들어가자, 흙탕물이 이미 방바닥 문턱까지 찰랑거리며 차오르고 있었다.

 

공포에 질려 떨고 있던 김 씨 노모가 지유를 보며 울음을 터뜨렸다.

 

"지유야…… 아이고, 지유야…… 밖에서 귀신 우는 소리가 난다……."

 

"할머니, 걱정 마세요. 제가 업어드릴 테니 제 목을 꼭 잡으세요. 어서요!"

 

지유는 한 치의 주저도 없이 노모 앞에 등을 내밀었다.

 

칠순을 넘긴 노인의 몸무게가 젖은 어깨 위로 묵직하게 얹혔다.

 

허벅지까지 차오르기 시작한 차가운 흙탕물을 헤치며 지유는 문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발밑에서는 떠내려온 쓰레기와 깨진 유리병들이 밟혀 살을 긁었지만, 통증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골목길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생지옥이었다.

 

아이들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 서로의 이름을 부르짖는 부모들의 비명, 그리고 어둠 속에서 덮쳐오는 거대한 물의 포효가 뒤엉켰다.

 

바로 그 순간, 요천 쪽 하늘이 번개로 번쩍이며 대낮처럼 밝아졌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대지가 통째로 찢겨 나가는 듯한 파멸적인 굉음이었다.

 

쿠구구구구― 쾅!

 

수만 톤의 수압을 이기지 못한 요천 수변공원 제1공구 제방 옹벽 50여 미터가 굉음과 함께 두 동강이 나며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규격 미달의 잡석과 흙모래로 채워져 있던 둑의 속살이 한순간에 터져 나갔다.

 

마치 거대한 댐이 붕괴된 것처럼, 검붉은 흙탕물의 장벽이 3미터 높이의 파도가 되어 저지대 상가 골목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덮쳐들었다.

 

전신주가 힘없이 꺾이며 불꽃을 튀겼고, 골목 전체가 일순간 칠흑 같은 암흑 속에 잠겨버렸다.

 

4. 시장 관사의 광기

 

비슷한 시각, 남원 시장 관사 2층 집무실.

 

두꺼운 암막 커튼이 빈틈없이 드리워진 방 안은 숨이 막힐 듯한 종이 타는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고급 대리석 벽난로 안에서는 붉은 화염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서류 더미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춘향 테마랜드 정비사업 자재 하도급 내역서, 세창물산과 호남엔지니어링의 차명 세금계산서, 그리고 요천 수변공원 제방 공사의 실제 감리 일지가 불길 속에서 검은 재로 바스러져 내렸다.

 

강태석은 핏발이 허옇게 선 눈으로 크리스털 잔에 담긴 독한 양주를 연거푸 들이켜고 있었다.

 

그의 거친 손은 서류철의 철끈을 사정없이 뜯어내며 벽난로 불길 속에 던져 넣었다.

 

"타라…… 모조리 타버려! 재가 되어 날아가면 그만이야! 서류 원본이 없는데 대검 놈들이 무슨 재주로 날 엮어 넣어?"

 

그의 턱 밑 살이 광기 어린 경련으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중앙 정계의 뒷배였던 김문현마저 특수부의 내사망에 묶여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는 소식이 들려온 뒤였다.

 

게다가 7년 전 서울로 쫓아냈던 성호석의 아들 성재환이 대검찰청의 칼을 쥐고 남원으로 내려왔다는 첩보까지 접수한 상태였다.

 

궁지에 몰린 맹수처럼 강태석의 눈에는 살기와 불안이 뒤섞여 번뜩였다.

 

그때, 집무실의 육중한 문이 벌컥 열리며 비서실장이 사색이 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비서실장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시, 시장님! 큰일 났습니다! 제방이…… 요천 제1공구 제방 옹벽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강태석이 마시던 양주잔을 벽난로 옆 벽면을 향해 사정없이 내던졌다.

 

쨍그랑―!

 

산산조각 난 유리 파편이 튀며 위스키가 벽지에 얼룩을 남겼다.

 

"시끄러워! 고작 둑 모퉁이 하나 터진 것 가지고 왜 이리 호들갑이야! 흙포대 쌓고 중장비 밀어 넣으라고 현장소장한테 일렀잖아!"

 

"시장님, 단순한 누수가 아닙니다! 옹벽 수십 미터가 통째로 뜯겨 나가서 하정리랑 동충동 저지대 상가가 통째로 침수되고 있습니다! 물길이 삼거리 골목 쪽으로 직격하고 있단 말입니다! 사람이…… 사람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당장 시청 전 직원 비상소집을 걸고 소방차랑 보트를 투입해야 합니다!"

 

비서실장이 바닥에 무릎을 꿇을 듯이 매달리며 절규했다.

 

그러나 강태석의 얼굴에서는 일말의 당혹감이나 인간적인 동요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비틀려 올라가며 잔인한 냉소가 번졌다.

 

그는 책상 모서리를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사람이 죽어? 촌구석 장사치 몇 놈 물에 빠진 게 대수야? 잘 들어. 이건 100년 만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게릴라성 집중호우야. 하늘이 내린 불가항력의 천재지변(天災地變)이란 말이다. 알아들어?"

 

강태석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시청 직통 전화를 거칠게 낚아챘다.

 

"공보관실 당장 연결해. 내일 아침 조간신문이랑 방송사에 나갈 보도자료 초안부터 작성하라고 해. 남원시 수해는 상류 댐의 기습적인 무단 방류와 유례없는 폭우 탓이라고 못 박아. 그리고 남원일보 사주한테 내가 직접 전화할 테니 연결 대기시켜. 제방 부실시공 운운하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놈들은 계엄령에 준해서 엄단하겠다고 기사 1면에 대문짝만하게 박으라고 해!"

 

사람의 목숨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강태석의 머릿속에는 오직 이 미증유의 참사를 방패막이 삼아 자신의 횡령과 부실공사 비리를 영구히 수장시키겠다는 잔혹한 계산만이 번뜩이고 있었다.

 

물이 빠지고 나면 쑥대밭이 된 구도심 상가를 재해 위험지역으로 묶어 강제 철거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토록 눈엣가시 같았던 삼거리 김밥집도 흙탕물 속에 가라앉혀 버리면 그뿐이었다.

 

"시장님…… 하지만 도청과 내무부에서 상황 보고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경찰서에서도 병력 동원 지침을 달라고……."

 

"경찰서장한테 내 말 똑똑히 전해! 수해 복구와 치안 유지를 핑계로 요천 일대 민간인 출입을 전면 봉쇄하라고 해! 특히 냄새 맡고 기어드는 신문 기자 놈들이랑,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검찰 끄나풀들…… 둑 근처에 발 한 짝이라도 붙이면 공무집행방해로 모조리 쳐넣으라고 해!"

 

강태석이 서랍 깊숙한 비밀 금고에서 권총처럼 쥐고 있던 마지막 비자금 원장과 약속어음 뭉치를 꺼내 코트 안주머니에 찔러 넣는 순간이었다.

 

쾅―!

 

귓전을 때리는 폭음과 함께, 굳게 닫혀 있던 관사 집무실의 육중한 마호가니 문이 산산조각 날 듯 부서지며 활짝 열렸다.

 

5. 법복의 그림자

 

부서진 문틀 사이로 세찬 밤바람과 함께 차가운 빗물이 사정없이 들이쳤다.

 

벽난로 안에서 타오르던 불길이 거센 외풍에 휘말려 푸른빛을 내뿜으며 요동쳤다.

 

문간에 우뚝 선 인물을 확인한 강태석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부릅떠졌다.

 

흠뻑 젖은 검은색 코트, 각진 어깨 위로 차갑게 흘러내리는 빗물, 그리고 그 속에서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타오르는 서슬 퍼런 안광.

 

성재환이었다.

 

그의 곁에는 서울지검 특수부 수사관들과 남원지청 소속 사법경찰관 서넛이 결연한 표정으로 뒤를 받치고 서 있었다.

 

재환의 오른손에는 형광등 불빛을 받아 차갑게 번뜩이는 강철 수갑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의 왼손에는 대검찰청 특별수사본부의 붉은 압인이 선명하게 찍힌 법원의 사전 구속영장이 쥐어져 있었다.

 

"강태석."

 

재환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쏟아붓는 폭우의 천둥소리보다 더 무겁고 날카롭게 방 안의 공기를 갈랐다.

 

강태석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등 뒤의 책상 서랍을 더듬었다.

 

"너…… 성재환……! 네놈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발을 디뎌! 관사 경비들은 다 어디로 처박힌 거야!"

 

"네놈이 심어둔 청원경찰과 용역들은 이미 정문에서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전원 제압되었다."

 

재환이 천천히 집무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구두 밑창에서 묻어난 젖은 흙탕물이 고급 카펫 위에 선명한 발자국을 남겼다.

 

재환의 서늘한 시선이 벽난로 속에서 반쯤 타들어 가고 있는 감리 일지와 공사 장부를 훑고 지나갔다.

 

"대한민국 검사 성재환이다.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및 배임, 하천법 위반, 그리고 업무상과실치상 및 증거인멸 교사 혐의로 널 긴급 체포한다."

 

재환의 단호한 음성이 마호가니 벽면을 때리며 울렸다.

 

강태석의 얼굴이 수치심과 공포로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그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육중한 청동 문진을 낚아채 허공에 휘두르며 악에 받쳐 고함을 질렀다.

 

"웃기지 마라! 피도 안 마른 애송이 놈이 어디서 검사 행세를 해! 네 애비 성호석이도 7년 전에 내 손에 쥐여 있던 장부 한 장 때문에 무릎을 꿇고 서울로 도망친 놈이야! 네놈 가문 전체가 내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 더러운 공범들인데, 네가 감히 누굴 단죄하겠다는 거냐!"

 

강태석의 입에서 튀어나온 독설은 공간을 더럽히며 악취를 풍겼다.

 

그러나 재환의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빛은 만년 설산의 빙벽처럼 차갑고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재환은 품속에서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을 천천히 꺼내 들었다.

 

금빛 닙 위로 벽난로의 불꽃이 어른거렸다.

 

캡 상단에 깊게 새겨진 라틴어 법언이 선명한 자태를 드러냈다.

 

'Fiat justitia, ruat caelum.'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내 아버지가 지은 죄는 법정에 세워 죗값을 치르게 할 것이다. 내 살을 베어내는 한이 있더라도 가문의 죄악을 결코 덮지 않는다."

 

재환의 목소리는 조용했으나, 방 안의 모든 공기를 짓누르는 거대한 위압감을 품고 있었다.

 

그는 만년필을 쥔 채 강태석의 코앞까지 성큼 다가섰다.

 

"하지만 그전에, 네놈이 요천의 흙탕물 속에 묻어버리려 했던 30년의 죄악과, 오늘 밤 무고한 남원 시민들의 목숨을 담보로 벌인 이 추악한 학살부터 심판한다."

 

재환의 서늘한 손이 허공을 갈라 강태석의 멱살을 거칠게 틀어쥐었다.

 

달그락거리는 쇠사슬 소리와 함께 강철 수갑이 강태석의 두 손목을 단단하게 옥죄어 들어갔다.

 

창밖에서는 마침내 요천의 제방이 완전히 부서져 내리며 구도심을 집어삼키는 처절한 굉음이 남원의 밤하늘을 갈랐다.

 

남원의 모든 진실을 수장시키려던 부패의 흙탕물은, 마침내 거악의 목줄을 끊어낼 거대한 역사의 격랑이 되어 사납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