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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40화

7년의 무게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흙벽 너머의 침묵

 

새벽의 냉기는 처마 끝을 타고 흘러내려 덜컹거리는 유리창 틈새로 스며들었다.

 

깨진 유리창을 투명 박스 테이프로 얼기설기 덧댄 자리가 바람을 맞아 비명 같은 파열음을 토해냈다.

 

삼거리 김밥집의 좁은 홀 한가운데에는 뜯겨 나간 흙벽의 잔해와 함께 30년 전의 누런 서류 한 장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1968년 남원읍지구 토지 매각 및 지분 양도 이면계약서 원본.

 

그 서류의 우측 하단, 보증인 난에 또렷하게 찍힌 붉은 인주 자국과 친부 성호석의 서명을 내려다보는 성재환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가문의 이름으로 세상을 바로잡겠다던 맹세, 서울에서 밤마다 컴퍼스로 허벅지를 찌르며 갈아왔던 법의 칼날이 정작 겨눠야 할 심장이 누구의 것인지 마주한 순간이었다.

 

재환의 입술 사이로 서늘하고 밭은 숨이 새어 나왔다.

 

한지유는 그 곁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며 그의 떨리는 손등 위로 자신의 거친 손을 얹었다.

 

참기름 냄새와 밥 뜸 들이는 김에 절어 거칠어진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는 지독하도록 따뜻했다.

 

"재환아."

 

낮게 가라앉은 지유의 목소리가 적막을 깼다.

 

재환이 고개를 돌려 지유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어머니를 잃고, 포클레인의 궤도 바퀴 앞에 홀로 섰던 그 참혹한 시간들을 견뎌낸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지독한 담담함이었다.

 

"네 아버지가 한 일이야.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건 그 사람이 아니라 너잖아."

 

"지유야."

 

"네 만년필 뚜껑에 뭐라고 적혀 있었는지 기억해?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라고 했어. 네가 스스로를 벨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 누구도 벨 수 없어. 난 널 믿었기 때문에 이 서류를 꺼내 놓은 거야."

 

재환은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배어 나왔으나, 그 고통조차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서늘한 결기를 억누르지 못했다.

 

그때 굳게 닫혀 있던 김밥집의 미닫이문이 거칠게 열리며 서울지검 특수2부 수사계장이 헐레벌떡 안으로 들어섰다.

 

수사계장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손에 쥔 모토로라 무전기에서는 잡음 섞인 다급한 음성이 연신 흘러나오고 있었다.

 

"성 검사님! 본청에서 긴급 전문이 떨어졌습니다!"

 

수사계장이 마른침을 삼키며 품에서 접힌 팩스 용지를 꺼내 내밀었다.

 

"강인철 부장님 결재도 건너뛴 채 차장검사 직인이 찍혀 내려왔습니다. 관할 위반 및 과잉 수사 논란을 이유로 남원 관내 모든 압수수색 및 체포 영장 집행을 '즉시 전면 보류'하고 전원 서울로 복귀하라는 명령입니다!"

 

재환의 서늘한 눈빛이 팩스 용지의 붉은 직인을 스쳤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서울 혜화동 요정 청운각에서 국회 내무위원장 김문현과 강태석이 결탁했을 때부터 이미 중앙의 외압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복귀 명령을 거부하면요."

 

"감찰부 긴급 징계 회부 및 직무 배제 처분이 내려질 겁니다. 검사님, 여기서 더 나가시면 옷을 벗어야 합니다!"

 

수사계장의 목소리가 다급함으로 젖어 들었다.

 

그러나 재환은 흔들리지 않고 품속에서 백부의 각인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2. 어둠 속의 결단

 

"수사계장님."

 

재환의 목소리는 차분하다 못해 시리도록 가라앉아 있었다.

 

"검찰청법 제7조, 검사는 구체적 사건과 관련하여 상급자의 지휘·감독의 적법성 또는 정당성에 대하여 이견이 있을 때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영장은 이미 법원에서 적법하게 발부되었고, 시청 지하 특수 금고의 증거 인멸 우려는 명백합니다."

 

"하지만 검사님, 상대는 국회 내무위원장입니다! 본청 수뇌부가 전부 움직였어요!"

 

"외압에 굴복해 범죄 증거가 인멸되는 것을 방치하는 것이야말로 직무유기입니다."

 

재환은 1968년 이면계약서 원본을 조심스럽게 방수 비닐에 넣어 자신의 정장 안주머니에 갈무리했다.

 

그의 시선이 문밖의 어둠을 향했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관용차를 몰아 광기에 차 내려오고 있을 강태석의 모습이 눈앞에 선연히 그려졌다.

 

지금 시청 지하 특수 금고를 열어젖히지 않는다면, 강태석은 도착하는 즉시 1991년 환지 비리 원천 측량 대장과 비자금 장부를 흔적도 없이 불태울 것이 분명했다.

 

"계장님은 서울 수사관들을 데리고 지금 즉시 남원경찰서로 가십시오. 현행범으로 체포된 한양토건 박진철의 신병을 남원경찰서 유치장에 입감시키고, 관할 지청으로 사건을 인계하는 서류를 작성하십시오. 그 누구도 접견하지 못하도록 문을 걸어 잠그세요."

 

"그럼 시청 특수 금고는 어떻게 하십니까? 혼자 가시겠다는 겁니까?"

 

"아닙니다."

 

재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정면으로 시청에 들이닥쳐 물리적으로 충돌한다면, 본청에서는 이를 빌미로 즉각 직무집행정지 명령을 내리고 모든 압수물을 '위법수집증거'로 몰아 무효화할 터였다.

 

부패한 권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어설픈 칼질이 아니라, 절차적 흠결 하나 없이 완성된 완벽한 사법의 올가미였다.

 

재환은 지유를 바라보았다.

 

지유의 눈동자에 재환의 결단이 오롯이 비쳤다.

 

"지유야, 이 싸움은 오늘 밤 하루 만에 끝나지 않아."

 

지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포클레인을 몰고 온 조폭 우두머리를 체포했다고 해서, 수십 년간 얽히고설킨 남원의 토착 권력과 중앙의 거대한 배후가 단숨에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강태석은 남원으로 돌아와 증거를 없애려 할 거야. 그리고 중앙의 힘을 등에 업고 우리를 짓밟으려 하겠지."

 

"알아, 재환아. 난 도망치지 않아."

 

"내가 서울로 올라가서 합법적인 절차로 이 사법 망을 완성해야 해. 중앙의 김문현과 내 아버지, 그리고 강태석으로 이어지는 고리를 한꺼번에 끊어내지 못하면 넌 평생 여기서 안전할 수 없어. 내가 검찰 내부에서 외압을 뚫고, 합법적인 특수수사 권한을 완전히 손에 쥘 때까지…… 남원을 지켜줄 수 있겠어?"

 

지유는 입술을 깨물며 재환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지유의 손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재환의 온기는 3년 전 구 남원역 플랫폼에서 헤어질 때의 그것보다 훨씬 단단하고 무거웠다.

 

"지킬 거야. 어머니가 목숨 걸고 지킨 이 가게도, 아버지가 남긴 이 땅도, 그리고 네가 돌아올 자리도 전부 다."

 

지유의 목소리에는 눈물 대신 서늘한 강철 같은 심지가 박혀 있었다.

 

골목 어귀에서 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깨진 유리창 틈으로 쏟아져 들어오며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재환은 지유의 이마에 잠시 자신의 이마를 맞대었다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김밥집 문을 열고 나섰다.

 

그것은 도망이 아니었다.

 

더 거대하고 완벽한 심판의 덫을 놓기 위한 고통스러운 후퇴이자, 길고 긴 전쟁의 선언이었다.

 

3. 춘하추동, 계절의 순환

 

세월은 강물처럼 무심하게 흘러갔다.

 

요천 변의 벚꽃이 피었다 지기를 수차례 반복했고, 푸르른 수양버들이 겨울의 찬바람에 앙상한 가지만을 남긴 채 눈보라를 견뎌내는 동안 남원의 시계는 멈추지 않고 돌아갔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남원은 변해갔다.

 

강태석은 중앙 정계의 비호를 등에 업고 기세등등하게 시정을 장악했다.

 

그는 춘향 테마랜드와 요천 수변공원 개발사업을 무자비하게 밀어붙이며 자신의 왕국을 공고히 쌓아 올렸다.

 

한양토건과 동서개발은 관급 공사를 독식하며 막대한 자금을 긁어모았고, 시청 공무원들과 경찰들은 시장의 눈짓 하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사병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그 거대한 철옹성 같은 권력의 한복판에서, 단 한 군데 결코 굴복하지 않는 바위 같은 섬이 있었다.

 

동문 우체국 뒷골목, 삼거리 김밥집이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3년, 그리고 5년.

 

지유는 홀로 김밥집의 새벽을 열었다.

 

매일 새벽 네 시면 어김없이 가게의 낡은 형광등이 켜졌고, 솥에서는 고슬고슬하게 잘 익은 쌀밥의 구수한 김이 피어올랐다.

 

강태석 일파의 괴롭힘은 집요하고도 잔인했다.

 

때로는 심야에 깡패들이 지나가며 가게 문을 발로 차고 유리창에 쓰레기를 던졌고, 때로는 정체불명의 민원을 핑계로 행정지도 차량이 골목을 가로막고 섰다.

 

남원일보는 삼거리 일대의 노후 상가를 '도시 미관을 해치는 암적인 존재'로 묘사하며 왜곡 기사를 쏟아냈다.

 

하지만 지유는 단 한 번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지유는 매일 아침 깨진 유리창을 닦았고, 깡패들이 버린 오물을 묵묵히 쓸어냈으며, 시청 단속반이 들이닥칠 때마다 1원의 오차도 없는 회계 장부와 완벽한 소방 검사 필증을 들이밀며 그들을 돌려세웠다.

 

지유의 곁에는 친구들이 있었다.

 

최민재는 지역 신문사에서 해직된 이후에도 펜을 꺾지 않았다.

 

민재는 시청 기자실 대신 현장을 발로 뛰며 지방 자치단체의 토착 비리를 전문으로 다루는 독립 주간지를 창간했다.

 

남원 전역의 공사 현장과 시청 하위직 공무원들의 양심선언을 추적하며, 강태석 일파의 공사비 횡령과 부실시공 정황을 한 장 한 장 취재 수첩에 모아나갔다.

 

윤하은은 남원의료원의 정식 간호사가 되어 지유의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주었다.

 

하은과 민재는 거친 현실 속에서도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았고, 마침내 소박한 가정을 꾸리며 지유에게 따뜻한 가족의 울타리를 내어주었다.

 

그리고 남원의 민초들이 있었다.

 

구두 수선공 김 씨는 새벽마다 가게 앞을 지키며 거친 용역들의 그림자를 감시했고, 철물점 최 씨는 헐거워진 김밥집의 문틀과 셔터를 제 돈을 들여 튼튼한 강철로 보수해 주었다.

 

지유가 싼 정직한 김밥 한 줄은 남원 시민들에게 단순한 끼니가 아니었다.

 

거대한 권력의 폭압 앞에서도 무릎 꿇지 않고 버텨내는 하나의 깃발이었고, 정직함이 불의를 이길 수 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시민들은 매일 아침 줄을 서서 김밥을 샀고, 그 작은 동전과 지폐들이 모여 지유가 강태석의 어떤 경제적 압박에도 흔들리지 않고 버텨내는 거대한 방파제가 되어주었다.

 

4. 서초동의 칼잡이

 

같은 시간, 서울 서초동 검찰청사의 밤은 언제나 하얗게 지새워지고 있었다.

 

서울지방검찰청 특수2부 검사실.

 

방 한가운데에는 천장까지 닿을 듯 쌓아 올려진 압수수색 서류 상자들이 거대한 장벽을 이루고 있었다.

 

그 서류 더미 사이에서, 이제는 앳된 티를 완전히 벗어던진 성재환 검사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금융 계좌 추적 내역을 대조하고 있었다.

 

그의 책상 모서리에는 지유가 남겨주었던 낡은 스케치 한 장과 백부의 검은 옻칠 만년필이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만년필 캡에 새겨진 'Fiat justitia, ruat caelum'이라는 문구는 수없이 쥐고 펴기를 반복한 탓에 금빛 각인이 닳아 은은한 옥빛을 띠고 있었다.

 

7년이라는 시간은 재환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는 더 이상 가문의 그늘 아래서 방황하던 유약한 소년이 아니었다.

 

재환은 특수부에서 가장 지독하고 집요한 칼잡이로 악명을 떨쳤다.

 

정관계 대형 로비 게이트, 재벌가의 차명 계좌 비자금 사건, 거대 토건족의 입찰 담합 수사를 도맡아 처리하며 단 한 번도 권력의 외압에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주었던 강인철 부장검사는 차장검사로 승진하여 검찰 내부의 거대한 방패막이가 되어주었고, 재환은 그 그늘 아래서 사법 역사상 유례없는 정밀한 계좌 추적 기법과 토착 비리 포섭 법리를 완성했다.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친부 성호석은 내무부 차관을 거쳐 여당의 실세로 군림하며 아들에게 수없이 사람을 보내 회유와 압박을 가했다.

 

성북동 가문의 만찬에 참석하라, 거물 정치인의 뒤를 봐주고 서울 중앙지검 요직을 꿰차라, 네 아비의 등에 칼을 꽂을 셈이냐.

 

하지만 재환은 부친이 보낸 사자들을 단 한 번도 집무실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재환은 오히려 부친의 이름이 적힌 비리 내사 문건을 가슴 깊숙이 품은 채, 그 죄악의 뿌리가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를 밤낮없이 파고들었다.

 

재환의 독신자 관사 벽면에는 여전히 낡은 대한민국 전도가 걸려 있었다.

 

다른 모든 지역은 빛바랜 종이 그대로였으나, 유독 전라북도 남원 한가운데 꽂힌 붉은 플라스틱 핀만은 세월의 먼지 속에서도 선혈처럼 붉은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핀은 재환의 나침반이었고, 그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였다.

 

재환은 서랍을 열어 낡은 양철 통을 꺼냈다.

 

그 안에는 지유가 보낸 편지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남원의 소소한 일상, 김밥집 앞 팽나무에 새순이 돋았다는 이야기, 요천 변에 억새가 피었다는 담담한 안부들.

 

지유는 단 한 번도 자신이 겪는 고통과 외로움을 편지에 적지 않았다.

 

하지만 재환은 행간에 묻어나는 지유의 피눈물과 고독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재환은 만년필을 쥐었다.

 

지유가 선물했던 흑청색 잉크는 이미 오래전에 바닥났지만, 그는 서울 인사동의 먹물 장인을 수소문해 그 깊고 푸른빛이 도는 흑청색 잉크를 특별히 주문해 사용해 오고 있었다.

 

서류철을 덮은 재환의 눈빛에 차가운 살기가 번뜩였다.

 

때가 무르익고 있었다.

 

남원에서 날아온 민재의 비밀 보고서에는 강태석이 추진해 온 춘향 테마랜드와 요천 수변공원 제방 공사가 공사비 착복으로 인해 심각한 부실시공 상태에 이르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서는 김문현 위원장의 비자금 관리 계좌에 남원상호신용금고의 차명 자금이 유입된 결정적 단서가 포착되었다.

 

7년 동안 갈아온 칼을 마침내 칼집에서 뽑아낼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5. 7년의 무게

 

1990년대의 끝자락, 새로운 밀레니엄을 목전에 둔 늦은 봄의 어느 날.

 

남원의 요천 변에는 여느 해와 다름없이 흐드러지게 벚꽃이 피어났다가, 차가운 봄비에 젖어 꽃잎들을 둑길 위로 떨구고 있었다.

 

삼거리 김밥집의 낡은 나무 미닫이문 위로 맑은 풍경 소리가 딸랑이며 울렸다.

 

가게 안은 정갈했다.

 

박스 테이프로 기워졌던 전면 통유리창은 상인들의 도움으로 단단한 새 유리로 교체되어 있었고, 그 너머로 요천 둑길의 푸른 노을이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한지유는 조리대 앞에 서서 단정하게 도마를 행주로 닦아냈다.

 

그녀의 손목에는 7년 전 재환의 관용차를 뒤쫓다 넘어져 생겼던 무릎의 상흔처럼, 오랜 칼질과 뜨거운 밥솥을 다루며 생긴 희미한 화상 자국들이 훈장처럼 새겨져 있었다.

 

지유의 턱선은 한층 날렵해졌고, 눈빛은 깊은 호수처럼 고요하면서도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을 단단한 위엄을 품고 있었다.

 

스물넷의 봄이었다.

 

교복을 입고 광한루원 오작교를 건너던 열일곱의 소녀는 이제 남원의 거친 바닥에서 비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삶을 일구어낸 어엿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가게 벽면 한구석, 낡은 달력이 걸려 있었다.

 

지유는 손을 뻗어 한 장 한 장 넘겨온 달력의 7년째 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유의 손끝이 5월의 붉은 날짜 위를 스쳐 지나갔다.

 

7년이었다.

 

재환이 서울로 강제 압송되듯 떠났던 그날로부터,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채 김밥집 문을 열고 나타나 30년 전의 서류를 확인하고 다시 서울로 칼을 갈러 떠났던 그 비 내리던 새벽으로부터 흘러간 시간.

 

그 시간 동안 지유는 단 한 번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남원 사람들은 모두 말했다.

 

서울로 올라간 성호석 시장의 아들이 사법시험에 붙어 검사가 되었으니, 이제 호의호식하며 가문의 영화를 누릴 텐데 시골 김밥집 가시내 따위를 기억하겠느냐고.

 

강태석 일파는 비웃으며 지유에게 헛된 꿈을 버리고 지금이라도 땅을 넘기라고 조롱했다.

 

하지만 지유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앞치마 안주머니에는 언제나 재환이 건네주었던 학생증 증명사진이 들어 있었다.

 

사진 뒷면에 흑청색 잉크로 적혀 있던 글씨.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지유는 그 글씨를 매일 밤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버텼다.

 

그것은 단순한 남녀 간의 연정이 아니었다.

 

빼앗긴 삶의 터전을 되찾고, 억울하게 죽어간 부모들의 피눈물을 닦아주며, 이 비틀린 세상을 법과 진실의 힘으로 바로잡겠다는 두 영혼의 처절한 맹세였다.

 

달력의 숫자를 어루만지던 지유의 가슴속에서 문득 기이할 정도로 선명한 떨림이 일어났다.

 

바람의 냄새가 달라져 있었다.

 

요천 변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 속에, 익숙하면서도 서늘한 긴장감이 실려 있었다.

 

'이제 곧 당신이 올 시간이야.'

 

지유는 입술을 달싹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7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가슴에 품어왔던 예감이, 마침내 손에 잡힐 듯한 현실로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는 순간이었다.

 

6. 서초동에서 울린 전화

 

같은 시각, 서울 서초동 서울지방검찰청 특수2부 집무실.

 

성재환은 검은색 서류 가방을 닫았다.

 

가방 안에는 지난 7년간 그가 피땀 흘려 추적해 온 남원 토착 카르텔의 모든 범죄 혐의가 완벽한 공소장 형태로 정리되어 있었다.

 

강태석 남원시장의 춘향 테마랜드 공사비 40억 원 횡령 및 남원상호신용금고 차명 계좌 세탁 내역.

 

한양토건과 동서개발의 관급 공사 담합 및 폭처법 위반 증거.

 

그리고 국회 내무위원장 김문현에게 흘러 들어간 20억 원 상당의 무기명 CD와 토지 지분 상납 내역.

 

심지어 친부 성호석이 1991년 환지 비리와 1993년 축출 과정에서 관여했던 직권남용의 편린들까지, 그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망라되어 있었다.

 

그것은 남원이라는 작은 도시를 집어삼키고 있던 거악의 목을 일거에 베어 넘길 단두대의 칼날이었다.

 

책상 위의 직통 유선전화기가 날카로운 비명처럼 울려 퍼졌다.

 

재환은 천천히 수화기를 들었다.

 

"특수2부 성재환 검사입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로 영전한 그의 스승이자 든든한 방패, 정종길 검사장이었다.

 

"성 검사."

 

정종길의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으나, 그 밑바닥에는 억누를 수 없는 결전의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때가 왔다."

 

재환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방금 법무부에서 특별수사본부 편성 승인이 떨어졌다. 남원 일대에서 벌어진 대규모 국책 및 시정 개발 비리, 그리고 중앙 정계로 이어진 불법 정치자금 수수 게이트를 전담할 특별수사반이다."

 

"……."

 

"수사 지휘는 서울지검과 전주지검 남원지청이 합동으로 맡는다. 그리고 현장 파견 주임검사 자리에 자네가 최종 낙점되었네. 성호석 차관과 김문현 의원이 온갖 연줄을 동원해 막으려 했지만, 자네가 지난 7년간 쌓아 올린 수사 기록과 계좌 추적 결과가 너무나 완벽해서 그 누구도 이견을 달지 못했어."

 

정종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지극히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자네가 그토록 기다려왔던 귀환이다, 성재환. 남원으로 내려가게. 가서…… 법이 살아있음을 자네 손으로 증명해 보여라."

 

"알겠습니다, 검사장님."

 

재환은 짤막하게 답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의 시선이 벽면의 지도, 전라북도 남원에 박힌 붉은 핀에 멎었다.

 

재환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검은색 검사 법복을 집어 들었다.

 

단정한 비단 깃과 서늘한 감촉.

 

사법시험 1차 수석 통과, 연수원 수석 수료, 그리고 특수부 7년의 처절한 사투.

 

모든 것은 오직 이 순간, 죄악으로 물든 남원의 권력을 단죄하고 한 소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수련의 시간이었다.

 

재환은 법복을 단정하게 개어 가방에 넣고, 코트 안주머니에 백부의 각인 만년필을 꽂아 넣었다.

 

집무실 문을 열고 나서는 그의 발걸음에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었다.

 

7. 벼랑 끝의 남원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은 남원 시내, 남원시장 관사의 2층 집무실.

 

강태석 남원시장은 위스키 잔을 손에 쥔 채 넓은 통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봄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7년의 세월 동안 덕지덕지 들러붙은 탐욕과 오만이 흉터처럼 굳어져 있었다.

 

민선 1기에 이어 재선까지 성공하며 남원의 절대 권력자로 군림해 온 그였지만, 최근 들어 그의 신경은 극도로 곤두서 있었다.

 

요천 수변공원 제방 공사 현장에서 자재를 빼돌리고 모래와 시멘트 배합 비율을 속여 조성한 둑길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는 보고가 연일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마철이 다가오고 있었다.

 

만약 집중호우가 쏟아져 제방이 무너진다면, 그가 춘향 테마랜드와 수변공원에서 빼돌린 수십억 원의 비자금과 부실공사의 전모가 고스란히 수면 위로 드러날 판이었다.

 

"시장님."

 

비서실장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무슨 일이야. 노크도 없이."

 

강태석이 굵직한 저음으로 으르렁거렸다.

 

"서, 서울에서 긴급 전문이 도착했습니다."

 

비서실장이 벌벌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내밀었다.

 

"대검찰청과 법무부에서 남원 관내 개발 비리와 관급 공사 담합에 대해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했다고 합니다. 내일 아침부로 전격 특별감사와 현장 압수수색이 시작된다는 첩보입니다!"

 

강태석의 손에서 위스키 잔이 멈추었다.

 

얼음 부딪히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특별수사본부? 김문현 위원장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내가 그 영감한테 가져다 바친 돈이 얼만데!"

 

"그, 그게…… 김문현 위원장 본인도 지금 검찰 내사망에 걸려들어 손을 쓸 수 없는 처지라고 합니다. 더 큰 문제는……."

 

비서실장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잇지 못했다.

 

"더 큰 문제가 뭔데! 똑바로 말 못 해?!"

 

강태석이 잔을 벽으로 내던졌다.

 

크리스털 잔이 박살 나며 누런 양주가 벽지를 적셨다.

 

비서실장이 바닥에 엎드리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번 특별수사본부의 현장 파견 주임검사로…… 서울지검 특수2부의 성재환 검사가 임명되어 지금 남원으로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순간, 강태석의 거대한 덩치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 굳어졌다.

 

성재환.

 

7년 전, 삼거리 김밥집에서 자신의 부하들을 영장 한 장으로 쓸어 담고 사라졌던 애송이.

 

성호석의 아들이자, 그 지독한 계집년 한지유의 눈빛 속에 살아 숨 쉬던 그 이름.

 

"성재환…… 그놈이 결국 기어 내려온다고?"

 

강태석의 눈에 핏발이 곤두서며 섬뜩한 광기가 차올랐다.

 

"박진철 불러. 그리고 동서개발 조상태 처남한테 당장 연락해! 시청 지하 문서고 대장실, 그리고 요천 변 제방 공사 현장 장부 일체 전부 소각장으로 빼돌려! 남원에 성재환이 아니라 그 애비 성호석이 직접 내려온다 해도, 내 땅 남원에서 날 건드릴 수 있는 놈은 없어!"

 

강태석이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육중한 참나무 책상이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창밖에는 빗줄기가 점점 거세어지며, 요천을 집어삼킬 듯 무섭게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8. 불변의 맹세

 

자정을 넘긴 시각.

 

남원 시내를 적시는 빗줄기는 굵은 장대비로 변해 요천의 수면을 하얗게 때리고 있었다.

 

삼거리 김밥집의 불은 여전히 꺼지지 않고 있었다.

 

한지유는 조리대 앞에 서서 마지막 남은 밥솥을 정리하고 있었다.

 

가게 밖 골목길, 어둠을 가르고 미끄러져 들어오는 묵직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평소 시청 용역들이나 깡패들이 몰고 오던 거칠고 요란한 승합차의 소리가 아니었다.

 

낮고 묵직하며, 정적을 가르는 단정한 엔진음.

 

차량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빗물 웅덩이를 밟으며 다가오는 구두 굽 소리가 골목의 벽을 타고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지유의 손이 멈추었다.

 

그녀의 심장이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7년 동안 수없이 꿈속에서 들었던, 그리고 지난밤 달력을 넘기며 가슴 깊이 예감했던 바로 그 발걸음이었다.

 

딸랑.

 

유리창에 매달린 낡은 풍경이 청명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가게의 미닫이문이 열리고, 서늘한 밤공기와 함께 빗물에 젖은 흑색 코트를 입은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우산도 쓰지 않은 채 비를 맞은 그의 어깨는 넓고 단단해져 있었고, 이마를 덮은 젖은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눈빛은 칼날처럼 서늘하면서도 깊은 슬픔을 품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낡은 검은색 서류 가방이 들려 있었고, 코트 깃 사이로 금빛 닙을 감춘 백부의 각인 만년필이 빗방울을 머금은 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성재환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 들었다.

 

7년이라는 시간, 수천 일의 밤과 낮, 뼈를 깎는 기다림과 사투의 무게가 두 사람의 침묵 속에 고스란히 내려앉았다.

 

지유는 조리대 모서리를 꽉 쥐었다.

 

눈물이 왈칵 차올랐으나, 그녀는 울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재환은 천천히 한 걸음씩 걸어와 지유의 앞에 멈추어 섰다.

 

그의 젖은 손이 조심스럽게 올라와, 7년 동안 거친 세월을 견뎌낸 지유의 뺨을 가만히 감싸 안았다.

 

지유의 차가운 볼에 재환의 뜨거운 손바닥이 닿았다.

 

"지유야."

 

재환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7년 전, 서울행 기차 안에서 피눈물을 삼키며 맹세했던 그 목소리.

 

신림동 고시촌 세 평 방에서 허벅지를 찌르며 되뇌었던 그 이름이었다.

 

"늦어서 미안해."

 

지유의 눈에서 마침내 억눌러왔던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려 재환의 손가락을 적셨다.

 

지유는 재환의 손을 잡으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늦지 않았어."

 

지유는 앞치마 안주머니에서 7년 동안 단 하루도 몸에서 떼어놓지 않았던 학생증 증명사진을 꺼내 재환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사진 뒷면에 흑청색 잉크로 적혀 있던 글씨는 지유의 체온에 닳아 희미해져 있었지만,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맹세로 또렷하게 살아 있었다.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재환은 사진을 내려다보며 떨리는 손으로 지유를 자신의 품 안으로 강하게 끌어안았다.

 

거친 빗줄기가 함석지붕을 세차게 때렸지만, 두 사람이 맞닿은 가슴속에는 그 어떤 비바람도 꺼뜨릴 수 없는 거대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지유야, 다 끝내러 왔어."

 

재환이 지유의 귓가에 낮게, 그러나 온 세상을 뒤흔들 만큼 서슬 퍼런 어조로 속삭였다.

 

"네 어머니의 눈물도, 내 가문의 죄악도, 그리고 이 남원을 짓밟아온 저 추악한 괴물들도…… 내가 전부 법정에 세울 거야."

 

지유는 재환의 젖은 코트를 움켜쥐며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7년의 긴 어둠이 끝나고, 마침내 부패한 남원의 심장을 향해 법의 서슬 퍼런 칼날이 떨어질 시간이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