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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3화

자전거와 푸른 노을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가슴에 박힌 글자들

 

카운터 바닥에 떨어진 낡은 종이 서류에는 묵은 먼지 냄새와 함께 지독하게 서늘한 공기가 묻어 있었다.

 

누렇게 바랜 서류 상단에는 선명하게 찍힌 관인과 함께 낯익다 못해 심장을 도려내는 이름 석 자가 또렷하게 박혀 있었다.

 

'성호석(成浩錫).'

 

그리고 그 옆에 붉은 인주 자국과 함께 거칠게 휘갈겨진 이름, '한석규(韓錫奎).'

 

성재환은 숨을 멈춘 채 떨리는 손끝으로 서류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종이가 바스락거리며 내는 작은 파열음조차 귓전을 날카롭게 찌르는 굉음처럼 울렸다.

 

남원군 토지 구획 정리 및 분할 측량 열람부라는 거창한 제목 아래에는 소유권 이전과 단독 환지라는 서슬 퍼런 법률 용어들이 촘촘하게 얽혀 있었다.

 

현 남원시장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성호석.

 

법과 원칙을 칼날처럼 내세우며 아들에게도 단 한 치의 흐트러짐을 용납하지 않던 그 아버지가, 어째서 이 작고 허름한 김밥집의 먼지 쌓인 서랍 깊은 곳에 이름을 남겨둔 것일까.

 

"재환아, 거기서 뭐 해?"

 

주방 문을 밀고 나오던 한지유의 맑은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그 목소리에 벼락이라도 맞은 듯 소스라치게 놀란 재환은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여 흩어진 종이들을 그러모았다.

 

서류 봉투의 찢어진 모서리를 황급히 안쪽으로 욱여넣고는, 서랍 틈새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가슴속에서 차가운 피가 역류하는 것 같은 서늘함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아…… 아니야."

 

재환은 억지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고개를 들었다.

 

"서랍 모서리에 가방이 살짝 스쳐서 종이가 떨어진 줄 알았어."

 

거짓말을 뱉어내는 입술 안쪽이 바짝 말라붙어 혀뿌리가 굳는 것 같았다.

 

지유는 손에 작은 돋보기안경을 든 채 의아한 눈빛으로 재환을 바라보았다.

 

눈처럼 맑고 티 없는 지유의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재환의 명치끝이 뻐근하게 저려왔다.

 

저토록 순수하게 웃으며 자신에게 소중한 만년필을 건네준 아이의 등 뒤에, 어쩌면 자신의 아버지가 찍어 누른 가혹한 상처가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머릿속을 사납게 휘저었다.

 

"다행이다. 엄마가 서류나 영수증 같은 거 정리 안 해두면 나중에 한참 찾으시거든."

 

지유는 별다른 의심 없이 배시시 웃으며 주방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엄마, 여기 안경 찾아왔어요."

 

"오냐, 지유야. 학생들 김밥 모자라면 더 말혀라. 참기름 듬뿍 발라줄텡게."

 

주방 안쪽에서 지유 어머니의 구수한 남도 사투리가 뚝배기 계란찜의 구수한 김과 함께 흘러나왔다.

 

평화롭고 다정한 이 소박한 공간의 온기가, 방금 서류를 목격한 재환에게는 견디기 힘든 가책으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테이블에 앉아 단무지를 우적우적 씹고 있던 최민재가 입가에 묻은 밥알을 털어내며 재환을 향해 턱짓을 했다.

 

"야, 성재환. 너 얼굴이 왜 그렇게 허옇게 질렸냐? 만년필 찾았으면 속이 시원해야지, 왜 영혼 털린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어? 얼른 와서 남은 김밥이나 먹어. 참기름 냄새가 예술이다, 진짜."

 

민재의 태평한 참견에도 재환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교복 안주머니에 꽂아둔 독일제 만년필의 묵직한 쇠붙이 감촉이 심장을 차갑게 짓누르는 듯했다.

 

'Fiat justitia, ruat caelum.'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라던 그 거창한 가문의 법언이, 지금 이 순간에는 지독한 모순이자 위선처럼 느껴져 재환의 입술을 쓰게 짓이겼다.

 

2. 침묵의 무게와 붉은 노을

 

삼거리 김밥집을 나섰을 때 남원의 하늘은 이미 푸르스름한 어스름 속으로 붉은 노을을 천천히 풀어놓고 있었다.

 

우체국 앞 전신주에 매달린 백열등이 하나둘 깜빡이며 주황빛을 토해냈다.

 

지유는 가게 앞 평상에 기대어 선 채, 배웅하듯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헐렁한 앞치마를 두른 작은 체구, 봄바람에 살랑이는 단정한 단발머리 사이로 엿보이는 지유의 얼굴은 저녁 노을빛을 받아 부드러운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재환아, 펜 잘 챙겨. 아까 보니까 정말 소중한 것 같던데, 또 잃어버리면 안 되잖아."

 

지유가 손을 흔들며 조용히 건넨 그 한마디에, 재환의 발걸음이 돌바닥에 무겁게 멎었다.

 

'너에게는 그저 소중한 펜일 뿐이겠지.'

 

재환은 차마 속내를 꺼내놓지 못한 채, 가슴속으로 무겁게 흩어지는 한숨을 삼켰다.

 

성호석이라는 이름 석 자가 그 서류에 적혀 있었던 까닭을 지유는 과연 알고 있을까.

 

아니, 모르는 게 분명했다.

 

안다면 이렇게 아무런 원망도 그늘도 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온전히 바라볼 수는 없을 테니까.

 

"어, 고마워. 지유야. 정말로."

 

재환은 억지로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낮게 대답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물끄러미 지켜보던 민재가 배를 두드리며 낄낄거렸다.

 

"야, 성재환. 너 아까부터 반응이 왜 이리 굼뜨냐? 김밥 너무 맛있어서 뇌까지 소화된 거냐? 야자 짼 김에 나는 집에 가서 뻗을란다. 담임한테 걸리면 내일 아침 교무실에서 엉덩이 터지겠지만, 일단 오늘은 살고 봐야지."

 

민재는 하품을 길게 내뱉으며 반대편 골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지유야, 나 간다! 김밥 진짜 잘 먹었다고 어머니한테 꼭 전해드려라!"

 

"응, 민재야. 조심히 가!"

 

민재의 요란스러운 발소리가 골목 너머로 멀어져 가자, 순식간에 골목 안에는 짙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봄날의 저녁 공기는 낮 동안의 훈기를 간직하고 있었지만, 강가에서 불어오는 바람 끝에는 은근한 서늘함이 묻어 있었다.

 

재환은 골목 어귀에 세워둔 자신의 낡은 자전거 손잡이를 잡았다.

 

아버지가 사준 값비싼 로드바이크 대신, 어머니가 타던 낡은 은색 통학용 자전거였다.

 

앞바구니가 삐걱거리고 페달에 약간의 녹이 슬어 있는 이 자전거만이 재환이 시장 관사라는 숨 막히는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너…… 바로 집으로 들어가?"

 

재환이 자전거를 끌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유는 앞치마 주머니에 양손을 푹 찔러 넣은 채 고개를 갸웃했다.

 

"가게 정리는 대충 끝났어. 엄마가 이제 들어가서 쉬라고 하셨거든. 왜?"

 

"그냥……."

 

재환은 자전거 핸들을 그러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가슴속을 짓누르는 토지 서류의 잔상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지만, 그 잔상을 지워내고 싶을 만큼 지유와 조금 더 함께 있고 싶다는 이기적인 갈망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지금 관사로 돌아가면 서재에 앉아 계실 아버지의 차가운 얼굴을 마주해야만 했다.

 

그 얼굴을 대면하는 순간, 의혹과 원망이라는 괴물이 자신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요천(蓼川) 변에 벚꽃이 아직 다 안 졌더라. 강바람 쐬러 잠깐 안 갈래?"

 

재환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유는 깜빡이는 눈등으로 재환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늘 단정하고 빈틈없어 보이던 모범생 시장 아들의 눈동자 바닥에 깔린 위태로운 흔들림을, 지유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듯했다.

 

지유의 입꼬리가 호를 그리며 잔잔하게 올라갔다.

 

"좋아. 안 그래도 오늘 하루 종일 기름 냄새 맡아서 머리가 좀 띵했거든. 바람 쐬고 싶었어."

 

그 꾸밈없는 한마디가 얼어붙어 있던 재환의 심장에 따뜻한 봄비처럼 스며들었다.

 

3. 요천 둑길의 페달 소리

 

덜컹거리는 자전거의 뒷자리에 지유가 조심스럽게 올라탔다.

 

짐받이의 차가운 쇠판 위에 걸터앉은 지유는 균형을 잡기 위해 재환의 교복 셔츠 자락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미약한 온기에 재환의 등줄기가 빳빳하게 굳었다.

 

"꽉 잡아. 둑길 올라갈 때 턱이 좀 높아."

 

"응, 준비됐어. 출발해."

 

재환이 힘차게 페달을 밟자, 자전거 체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삼거리 골목을 빠져나온 자전거는 요천을 따라 길게 뻗은 둑길을 향해 매끄럽게 미끄러져 나갔다.

 

요천 변의 둑길은 봄의 절정을 지나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길 양옆으로 늘어선 벚나무들이 연분홍빛 꽃비꽃잎을 흩뿌렸다.

 

붉게 타오르던 서쪽 하늘의 노을은 어느덧 짙은 푸른빛과 섞이며 신비로운 보랏빛 그라데이션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른바 개와 늑대의 시간, 낮의 명확함과 밤의 어둠이 뒤섞이는 그 모호한 경계 속에서 두 사람은 바람을 가르며 달렸다.

 

귓가를 스치는 강바람이 재환의 이마를 적신 식은땀을 식혀주었다.

 

뒤에서 지유의 머리칼이 바람에 날려 재환의 어깨 언저리를 간지럽혔다.

 

은은한 비누 냄새와 햇볕에 말린 빨래 냄새가 섞인 지유만의 향기가 바람을 타고 콧등을 맴돌았다.

 

"와…… 진짜 시원하다!"

 

지유가 재환의 등 뒤에서 탄성을 터뜨렸다.

 

셔츠를 잡고 있던 지유의 손이 바람에 흔들리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조금 더 단단하게 재환의 허리춤을 감싸 쥐었다.

 

그 작은 접촉만으로도 재환의 심장은 고장 난 시계추처럼 불규칙하게 요동쳤다.

 

복잡하게 얽혀 있던 번민과 죄책감의 실타래가 바람에 흩날려 잠시 멀어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지유야, 안 무서워?"

 

"전혀! 오히려 날아가는 것 같아. 나 자전거 뒷자리에 타본 거 진짜 오랜만이거든."

 

"초등학교 때 타보고 안 탔어?"

 

"응. 아빠 계실 때는 아빠 자전거 뒤에 매일 탔었는데…… 아빠 떠나시고 나서는 한 번도 못 탔지."

 

지유가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진 '아빠'라는 단어에, 재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페달을 밟던 다리에 힘이 빠질 뻔한 것을 재환은 이를 악물며 버텨냈다.

 

서류에 적혀 있던 이름, 한석규.

 

그 이름이 바로 지유가 말하는 아버지였던 것이다.

 

재환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질문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자전거의 속도를 늦췄다.

 

길가에 늘어선 수양버들이 요천의 잔잔한 물결 위로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물비린내와 풀잎 냄새가 섞인 강바람이 두 사람의 교복 옷자락을 부드럽게 부풀렸다.

 

"아버지는…… 어디 계시는데?"

 

묻지 말았어야 했을까.

 

하지만 묻지 않고는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재환의 떨리는 음성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지유는 한동안 대답 없이 요천의 푸른 수면을 바라보았다.

 

바퀴가 자갈을 밟으며 차르륵거리는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채웠다.

 

4. 수양버들 아래의 고백

 

요천 둑길 중간, 강물을 가장 가까이서 내려다볼 수 있는 오래된 정자 근처에서 재환은 자전거를 멈췄다.

 

지유가 짐받이에서 사뿐히 내려섰다.

 

자전거를 풀밭에 기대어 세운 재환은 둑길 난간에 기대어 섰다.

 

푸른 노을이 강물 위로 짙게 내려앉아, 요천의 물결은 마치 거대한 남청색 비단을 펼쳐놓은 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지유는 난간에 두 팔을 얹고 턱을 괸 채 아득한 수평선을 응시했다.

 

"우리 아빠, 내가 열 살 때 돌아가셨어."

 

지유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슬픔이나 원망이 오랜 세월 풍화되어 단단한 조약돌처럼 굳어버린 듯한 어조였다.

 

"원래는 남원 외곽에서 꽤 큰 과수원을 하셨거든. 복숭아랑 배 농사였는데, 봄만 되면 과수원 전체가 분홍빛이랑 하얀빛으로 뒤덮여서 장관이었어. 나는 그 나무들 사이를 뛰어다니면서 그림 그리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았고."

 

지유의 눈가에 아련한 추억의 빛이 어렸다.

 

재환은 숨을 죽인 채 지유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땅 구획 정리가 들어서고, 군청에서 사람들이 찾아오고…… 그러더니 과수원 땅이 헐값에 넘어가 버렸어. 아빠는 친구한테 보증을 잘못 섰다느니, 측량이 잘못돼서 땅이 잘려 나갔다느니 하면서 매일 군청이랑 법원을 뛰어다니셨지."

 

지유의 손가락이 난간의 낡은 나무껍질을 무의식적으로 긁어내렸다.

 

재환의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아까 보았던 그 서류, 1990년대 초반의 남원군 토지 구획 정리 및 단독 환지 서류.

 

성호석의 이름과 한석규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던 그 불길한 종이의 정체가 지유의 입을 통해 선명한 비극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결국 아빠는 소송에서 다 지고, 과수원도 다 뺏겼어. 화병으로 쓰러지시더니…… 끝내 못 일어나시더라고. 엄마랑 나는 남은 빚 갚느라 시내로 쫓겨나듯 들어와서 그 김밥집을 차린 거고."

 

지유는 말을 맺으며 재환을 돌아보았다.

 

뺨에 닿는 강바람에 지유의 머리칼이 흩날렸다.

 

그 눈동자에는 눈물이 고여 있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더욱 깊고 처연한 슬픔이 배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법이라는 게 참 무서워. 아빠는 항상 법대로 하면 다 밝혀질 거라고, 법은 거짓말을 안 한다고 하셨거든. 그런데 법은 아빠 편이 아니었어. 힘없고 모르는 사람한테는 그냥 무서운 칼날 같았지."

 

그 말은 재환의 심장을 예리한 비수로 찔러 쪼개는 것 같았다.

 

교복 주머니 안에서 만년필이 불덩이처럼 뜨겁게 달아올라 살갗을 태우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그 만년필에 새겨진 거창한 문구가 지유의 아버지에게는 과수원을 빼앗고 죽음으로 몰아넣은 잔인한 흉기였단 말인가.

 

그리고 그 칼자루를 쥐고 있던 사람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 성호석이었단 말인가.

 

죄책감이 목구멍을 턱 막아와 재환은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내가…… 너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진실을 밝혀야 할까.

 

네 아버지를 몰락시킨 그 서류에 적힌 이름이 바로 내 아버지라고, 지금 당장 무릎을 꿇고 사죄해야 할까.

 

하지만 그 고백을 내뱉는 순간,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저 맑은 눈동자가 경멸과 증오로 일그러질 것이라는 공포가 재환의 발목을 옭아맸다.

 

5. 푸른 어스름 속의 약속

 

침묵이 길어지자 지유가 어색함을 깨려는 듯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

 

"아, 미안해. 갑자기 우울한 얘기나 하고. 모처럼 자전거 태워줬는데 분위기만 망쳤네."

 

"아니야…… 전혀 아니야, 지유야."

 

재환은 떨리는 손을 뻗어 난간을 짚었다.

 

손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재환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맹렬한 결의를 느꼈다.

 

도망치지 않겠다.

 

진실이 무엇이든, 아버지가 저지른 일이 어떤 추악한 과거이든, 자신이 반드시 알아내야만 했다.

 

그리고 만약 가문의 이름으로 지유의 집안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그 죗값을 치러야 했다.

 

법이 힘없는 자를 짓밟는 흉기가 아니라, 상처받은 자를 지켜주는 방패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자신이 증명해내야만 했다.

 

"지유야."

 

재환이 결연한 목소리로 지유를 불렀다.

 

지유가 동그란 눈으로 재환을 올려다보았다.

 

노을이 완전히 사그라지고, 요천 위로는 푸른빛이 감도는 밤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둑길을 따라 켜진 가로등 불빛이 재환의 단단한 턱선과 결연한 눈빛을 비추었다.

 

재환은 요천의 굽이치는 물결과 저 멀리 어둠 속에 잠겨가는 남원 시내를 가리켰다.

 

"나, 서울로 대학 가고 로스쿨에 가더라도…… 남원을 절대 잊지 않을 거야."

 

그 한마디는 단순한 고향에 대한 애착이 아니었다.

 

지유에 대한 약속이자, 자신이 짊어져야 할 숙명에 대한 선언이었다.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리고 네가 겪었던 아픔들…… 다 기억할 거야. 그리고 진짜 법이 뭔지, 내가 꼭 보여줄게. 억울한 사람이 울지 않게 만드는 그런 법을 내가 공부할 거야."

 

지유는 재환의 진지한 눈빛에 압도된 듯 숨을 멈췄다.

 

평소 차갑고 다가가기 힘들었던 전교 1등 성재환의 얼굴 뒤에 감춰진 뜨거운 열정과 고뇌가 지유의 가슴을 세차게 두드렸다.

 

지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재환아. 너라면 꼭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네 만년필에 새겨져 있던 그 글자처럼 말이야."

 

그 순수한 믿음이 재환의 심장을 다시금 아프게 에어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망치고 싶은 고통이 아니었다.

 

기꺼이 짊어지고 나아가야 할 십자가와 같은 무게였다.

 

두 사람은 말없이 나란히 서서 요천의 푸른 어스름을 바라보았다.

 

봄바람이 강물을 흔들며 지나갈 때마다, 두 사람의 어깨가 조용히 맞닿았다 떨어졌다.

 

손을 잡지는 않았지만, 이미 두 사람의 영혼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끈으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6. 어둠 속의 귀가

 

둑길을 내려와 동문 우체국 앞 골목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밤 아홉 시가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김밥집 셔터는 반쯤 내려가 있었고, 가게 안쪽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형광등 불빛만이 골목길의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자전거를 멈춰 세운 재환은 지유가 안전하게 내리는 것을 도왔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 재환아. 자전거도 태워주고, 내 답답한 얘기도 다 들어주고."

 

지유가 교복 스커트를 털며 환하게 웃었다.

 

강바람을 쐬고 온 덕분인지 지유의 두 뺨에는 발그레한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아니야. 내가 더 고마워. 지유야, 내일 학교에서 보자."

 

"응. 조심히 들어가. 시장 관사 쪽은 밤에 가로등도 별로 없잖아."

 

지유가 반쯤 열린 셔터 문 안으로 쏙 들어가며 손을 흔들었다.

 

셔터가 완전히 닫히고 '철컥' 하는 자물쇠 소리가 들릴 때까지 재환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골목길에 홀로 남겨진 재환은 자전거를 돌려 어두운 시내 도로로 나섰다.

 

관사로 향하는 페달을 밟는 발걸음은 둑길을 달릴 때와는 달리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남원 시내 외곽,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시장 관사는 어둠 속에서 거대한 성채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정문을 통과해 자전거를 마당 한구석에 세우는 동안, 2층 서재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서늘한 백색 불빛이 재환의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가 아직 깨어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서재 특유의 마른 종이 냄새와 묵직한 침묵이 온몸을 휘감았다.

 

"재환이냐?"

 

2층 계단 난간 너머로 성호석 시장의 낮고 위압적인 목소리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재환은 신발을 벗다 말고 숨을 들이켰다.

 

계단 위를 올려다보자, 돋보기안경 너머로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이는 아버지가 서 있었다.

 

정갈하게 빗어 넘긴 백발과 각 잡힌 셔츠 차림의 아버지는, 그 자체로 범접할 수 없는 권력과 규율의 화신 같았다.

 

"야간 자율학습이 끝난 지 한 시간이 넘었다. 어디를 들렀다 오는 길이냐?"

 

추궁하는 듯한 아버지의 물음에 재환의 주먹이 바지 주머니 속에서 꽉 쥐어졌다.

 

그 주머니 속에는 지유가 돌려준 만년필이 들어 있었다.

 

"도서관에 들러…… 머리를 좀 식히고 왔습니다."

 

평생 아버지에게 단 한 번도 거짓을 고하지 않았던 모범생 성재환의 입에서 다시 한번 거짓말이 흘러나왔다.

 

성호석은 아들의 얼굴을 가만히 뜯어보더니, 헛기침을 한 번 내뱉고는 서재 안으로 돌아섰다.

 

"모의고사가 코앞이다. 잡념에 흔들리지 마라. 너는 내 뒤를 이어 법복을 입어야 할 아이다."

 

서재 문이 닫히는 소리가 거실에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

 

재환은 어두운 복도에 서서 닫힌 서재 문을 노려보았다.

 

가슴속에서 억누를 수 없는 불길한 의문과 반발심이 사납게 타올랐다.

 

'당신이 말하는 법복이란 대체 무엇입니까.'

 

남의 과수원을 빼앗고, 한 가정을 파탄으로 몰아넣은 대가로 쌓아 올린 그 거룩한 명예 위에 입는 옷이란 말인가.

 

재환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내려놓고 책상 앞에 앉았다.

 

스탠드 불빛 아래, 주머니에서 꺼낸 독일제 만년필을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옻칠된 검은 배럴과 금빛 닙이 차갑게 번쩍였다.

 

'성호석, 그리고 한석규.'

 

재환은 노트를 펼치고 만년필을 쥐었다.

 

사각거리는 펜촉 끝에서 잉크가 번져 나가며 두 사람의 이름이 종이 위에 또렷하게 새겨졌다.

 

소년의 순수했던 세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그 균열 사이로 혹독한 진실의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