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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38화

지유의 김밥을 찾는 사람들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새벽 안개와 밥 짓는 온기

 

남원 동문 우체국 뒷골목의 새벽은 언제나 푸르스름한 안개 속에서 숨을 쉬었다.

 

습기를 듬뿍 머금은 지리산 자락의 서늘한 바람이 삼거리 골목 어귀를 스치며 메마른 흙먼지를 낮게 흩뿌렸다.

 

골목 어귀에 자리 잡은 삼거리 김밥집의 처마 끝에는 아직 걷히지 않은 어둠이 짙은 묵빛으로 고여 있었다.

 

투명 박스 테이프를 커다란 엑스 자로 덧대어 기운 전면 통유리창은 지난밤들이 남긴 참혹한 상흔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어린 소녀의 힘으로 촘촘히 엮어 붙인 테이프의 모서리마다 빳빳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가게 안쪽 단칸방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한지유는 삐걱거리는 나무 문을 열고 주방으로 발을 디뎠다.

 

어머니가 떠난 지 수일이 흘렀지만, 가게 구석구석에는 여전히 어머니가 다듬어 놓던 시금치 향과 참기름의 구수한 온기가 배어 있었다.

 

주방 한편, 흙벽 깊은 홈에 회반죽으로 감쪽같이 봉인해 둔 1968년 토지 매각 이면계약서 원본의 자리를 지유는 무의식적으로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단단하게 굳은 벽돌의 감촉이 서늘한 현실을 일깨웠다.

 

세무서 조사관들을 1원의 오차도 없는 3개년 회계 장부로 물리쳤지만, 강태석 남원시장이 순순히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지유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공권력의 탈을 쓴 사냥개들이 실패했다면, 다음은 어둠 속의 이빨이 드러날 차례였다.

 

지유는 무쇠 솥단지의 뚜껑을 열고 전날 밤 정성스럽게 씻어 불려둔 햅쌀을 안쳤다.

 

가스 밸브를 열고 불꽃을 당기자 파르스름한 화염이 솥바닥을 감싸 안으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치익거리는 증기 소리와 함께 뽀얀 김이 좁은 주방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살아생전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솥 김을 타고 귓가에 맴돌았다.

 

'지유야, 세상이 아무리 흉흉해도 먹는 장사하는 사람은 밥 뜸 들이는 시간을 속이면 안 된다. 밥알 하나하나에 정직함이 배어 있어야 손님들이 그걸 안다.'

 

지유는 앞치마 끈을 단단히 고쳐 맸다.

 

어머니가 남원 공설 방앗간에서 마지막으로 짜다 준 고소한 참기름을 큰 양푼에 붓고, 잘 지어진 밥을 퍼 담아 주걱으로 조심스럽게 갈랐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 속에서 퍼지는 고소한 향기가 깨진 유리창 틈새를 넘어 차가운 새벽 골목으로 퍼져나갔다.

 

조선간장에 조린 단단한 우엉과 소금에 절여 물기를 꼭 짠 시금치, 갓 부쳐낸 노란 달걀지단이 대나무 채반 위에 가지런히 자리를 잡았다.

 

지유는 조리대 한구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강태석이 내던져 깨뜨렸던 흑청색 잉크병의 파편은 치워졌지만, 바닥 목재 틈새에는 검푸른 얼룩이 지워지지 않는 흉터처럼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잉크 자국 위에, 서울 신림동에서 재환이 보내왔던 짧은 엽서의 문장이 겹쳐졌다.

 

'반드시 돌아간다. 법복을 입고 너를 지키러 갈 테니, 조금만 버텨다오.'

 

지유는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이 자리에서 밥을 짓고, 사람들을 맞이하며, 어머니의 터전과 재환과의 약속을 지켜내는 것만이 지유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싸움이었다.

 

2. 골목을 채우는 발소리

 

동틀 녘이 되자 동문 우체국 앞길을 따라 이슬을 머금은 장바구니를 든 발걸음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남원 5일장으로 향하는 근교 마을 농민들과 통근 버스를 타려는 공단 노동자들의 바쁜 그림자가 박스 테이프로 기운 김밥집 유리창 너머로 길게 드리워졌다.

 

지유가 김밥을 말기 위해 김 발을 펴고 밥을 얇게 펴 바르던 순간, 낡은 알루미늄 문틀에 달린 풍경이 맑은 소리를 내며 울렸다.

 

달그락.

 

문이 열리며 제일 먼저 들어선 이는 길 건너편에서 30년 넘게 구두를 닦고 수선해 온 구두 수선공 김 씨였다.

 

무릎이 튀어나온 헐렁한 작업복 바지에 기름때 묻은 가죽 앞치마를 두른 김 씨는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테이프로 누더기가 된 유리창을 씁쓸한 눈으로 훑었다.

 

"지유야, 아침 일찍부터 불을 뗐구나."

 

김 씨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특유의 투박한 다정함이 묻어났다.

 

"김 씨 아저씨, 어서 오세요. 벌써 나오셨어요?"

 

지유가 밥 묻은 손을 마른행주에 닦으며 밝은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김 씨는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천 원짜리 지폐 세 장을 꺼내 조리대 위에 반듯하게 펴놓았다.

 

"어제 그 세무서 놈들이 행패 부리고 간 뒤로 내 가슴이 벌렁거려서 잠을 한숨도 못 잤다. 그 파렴치한 벼락 맞을 놈들 같으니라고. 시장 끄나풀 노릇이나 하면서 힘없는 어린애를 쥐어짜려 들다니."

 

김 씨는 혀를 차며 지유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지유의 눈 밑에는 밤을 새운 흔적인 옅은 그늘이 져 있었으나, 눈빛만은 맑고 형형했다.

 

"괜찮아요, 아저씨. 어머니 장부 덕분에 아무 탈 없이 돌아갔어요. 1원도 꼬투리 잡을 게 없으니까 제 발로 꽁무니를 빼더라고요."

 

"그럼, 그렇고말고. 네 어미가 어떤 사람이었는데. 남원에서 제일로 올곧고 바른 사람이었다. 그 어미에 그 딸이지."

 

김 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김밥 세 줄만 말아다오. 오늘 아침엔 우리 영감들 수선대 앞에서 다 같이 네 김밥으로 배를 채우기로 했다."

 

지유는 정성을 다해 밥을 펴고 속재료를 넉넉하게 얹었다.

 

초록빛 시금치와 주황빛 당근, 검붉은 우엉이 어우러지며 도톰한 김밥이 단단하게 말려 나갔다.

 

칼날이 도마를 경쾌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아침 골목의 적막을 기분 좋게 깼다.

 

탁, 탁, 탁, 탁.

 

일정한 간격으로 썰려 나간 김밥 단면에는 어머니의 방식 그대로 참기름이 반질반질하게 발라졌다.

 

은박지에 김밥을 정성스레 싸서 건네는 지유의 손을 김 씨가 거친 손으로 살며시 감싸 쥐었다.

 

"지유야. 골목 사람들이 다 보고 있다. 그동안은 시장 놈이랑 토건 깡패들이 무서워서 다들 숨죽이고 눈치만 봤지만, 어제 네가 그 세무서 놈들 똑 부러지게 쫓아내는 거 보고 다들 부끄러워 고개를 못 들었다. 이제 아무도 널 혼자 두지 않을 게다. 기죽지 마라."

 

김 씨의 투박한 한마디에 지유의 목구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지유는 눈물을 보이는 대신 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감사해요, 아저씨. 저 절대 기 안 죽어요."

 

김 씨가 김밥 봉지를 품에 안고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금 풍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이번에는 골목 어귀에서 철물점을 하는 최 씨와 칠기 골목의 배 씨가 나란히 들어섰다.

 

최 씨는 손에 쥐고 있던 묵직한 쇠망치와 못 주머니를 가게 한쪽에 내려놓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지유야! 나 김밥 다섯 줄 포장해라! 우리 가게 조수 녀석들까지 든든하게 먹여야 쓰겄다."

 

"저도 세 줄 부탁합니다. 식기 전에 집사람 갖다주게요."

 

배 씨 역시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지갑을 열었다.

 

어제 세무서 조사관들이 들이닥쳤을 때만 해도 강태석의 서슬에 떨며 뒤편에 웅성거리기만 했던 상인들이었다.

 

그러나 홀로 권력의 칼날을 받아내고도 당당하게 서 있는 열아홉 살 소녀의 정직함 앞에서, 억눌려 있던 상인들의 부채감과 양심이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3. 참기름 냄새와 번져가는 소문

 

오전 7시가 넘어가자 김밥집 앞 풍경은 전례 없는 생기로 들썩였다.

 

평소라면 동문 우체국 직원 몇몇이나 이른 아침을 거른 장사꾼 한두 명이 드나들던 소박한 가게였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남원 시내 곳곳으로 입소문이 퍼져나간 탓이었다.

 

시장 관사의 비호를 받는 토건 깡패들이 심야에 유리창을 깨부수고, 시청 소방과와 위생과가 연일 트집을 잡고, 급기야 세무서 조사관들까지 들이닥쳐 쑥대밭을 만들려 했으나 어린 여학생이 어머니의 3개년 회계 장부를 들이밀며 합법적으로 박살을 냈다는 이야기는 이미 남원 구도심 바닥을 뒤흔든 일대 사건이었다.

 

골목 밖으로 김밥을 사려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기 시작했다.

 

"여기가 그 집 맞제? 세무서 놈들 코를 납작하게 해줬다는 그 올곧은 김밥집."

 

남원여고 체육복을 입은 학생들이 까르르 웃으며 줄 뒤편에 섰고, 완월정 쪽에서 아침 산책을 마친 백발의 노인들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가게 안을 기웃거렸다.

 

"지유야, 나도 두 줄만 줘라! 어제 소문 듣고 아침밥도 안 차리고 달려왔다!"

 

근처 채소전 아주머니는 갓 뽑아온 싱싱한 쪽파 한 단을 지유의 조리대 옆에 툭 던져놓으며 지갑을 열었다.

 

"아주머니, 이러시면 안 돼요. 파 값은 드릴게요."

 

지유가 손사래를 치자 아주머니는 눈을 흘기며 도리어 핀잔을 주었다.

 

"시끄럽다, 요 가시나야. 덤으로 주는 거니까 입 다물고 받아 둬. 남원 바닥에서 강태석이 그 잡놈 코를 납작하게 해준 사람이 너 말고 또 누가 있다고 그러냐? 속이 다 시원하다, 속이 다 시원해!"

 

가게 안은 참기름의 고소한 향과 사람들의 훈훈한 열기로 가득 찼다.

 

지유의 손길은 쉴 틈 없이 움직였다.

 

김을 펴고, 밥을 얹고, 재료를 올리고, 말아서 썰어내는 동작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이어졌다.

 

어머니 곁에서 중학교 시절부터 눈으로 보고 몸으로 익혀온 손재주였다.

 

밥알 하나 뭉개지지 않고 단단하게 말아 쥔 김밥은 써는 족족 매끄러운 단면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테이프로 기운 흉측한 유리창 아래 서 있으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는 테이프 자국을 보며 혀를 찼고, 누군가는 조리대 위에 놓인 3개년 일일 결산록의 단정한 바인더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저것 봐라. 애가 저렇게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장부를 썼으니 그 독사 같은 세무서 놈들이 도망을 쳤지."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더니, 저 어린것이 법과 정직으로 주먹을 이겨낸 거여."

 

손님들이 주고받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지유의 가슴속 깊은 응어리를 부드럽게 녹여 내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세상 천지에 홀로 버려진 것만 같았던 참담한 고독 속에서 처음으로 따스한 온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어머니가 평생을 바쳐 지켜온 정직이라는 가치가, 이 작은 김밥 한 줄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에 가닿고 있었다.

 

그때, 문을 열고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인물이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에 낡은 야상 점퍼를 걸친 최민재였다.

 

어깨에는 취재용 가죽 가방을 메고 손에는 검은 손때가 묻은 서류철을 든 민재는 가게 안을 가득 메운 손님들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유야!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민재가 땀을 닦으며 조리대 앞으로 다가왔다.

 

지유는 이마의 땀을 앞치마로 훔치며 민재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민재야, 일찍 왔네. 아침 안 먹었지? 잠깐만 기다려, 김밥 한 줄 말아줄게."

 

"아니, 내 밥이 문제가 아니라…… 골목 밖까지 줄이 서 있잖아. 남원 시내 바닥에 네 소문이 쫙 퍼졌어."

 

민재는 주위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의 눈빛에는 흥분과 함께 짙은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4. 수첩에 적힌 진실과 연대의 벽

 

손님들이 잠시 뜸해진 틈을 타 민재는 조리대 옆 의자에 걸터앉았다.

 

지유가 건넨 따뜻한 보리차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켠 민재는 품속에서 익숙한 비밀 취재 수첩을 꺼냈다.

 

강태석 일파의 비리와 어제 세무서 조사반의 위법 채증 내용이 빽빽하게 적힌 수첩이었다.

 

"지유야, 아침 일찍 전주지검 남원지청에 다녀왔어. 어제 세무서 놈들이 영장도 없이 카운터를 뜯으려 했던 사진이랑 녹음 파일 사본, 그리고 남원세무서 한기철 계장의 직권남용 고발장을 민원실에 정식으로 접수시키고 왔다."

 

민재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

 

"지청에서 받아줬어? 거기도 시청이랑 한패 아니야?"

 

지유가 묻자 민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청장실 쪽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얼마 전에 사법연수원에서 수석으로 임관한 신임 검사가 서울지검 특수부로 가면서 남원 토착 비리를 겨냥한 논문을 썼다는 소문이 검찰 내부망에 돌았대. 그 논문 때문에 대검에서도 남원 쪽을 주시하고 있다는 얘기가 있더라. 그래서인지 지청 직원들도 예전처럼 대놓고 시청 편을 들지 못하고 있어."

 

지유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사법연수원 수석…… 서울지검 특수부.'

 

재환이었다.

 

서울 서초동의 차가운 빌딩 숲에서, 재환이 홀로 칼을 갈며 자신을 향해 길을 내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저릿하게 파고들었다.

 

재환은 결코 약속을 잊지 않았다.

 

남원에서 자신이 정직의 방패로 버텨내는 동안, 재환은 서울에서 거대한 사법의 칼날을 완성해 가고 있는 것이었다.

 

민재는 수첩을 넘기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남원일보 쪽 선배한테 들었는데, 강태석이 어제 관사에서 세무서 실패 소식을 듣고 완전히 이성을 잃었대. 재떨이를 집어 던지고 난리를 쳤다더라. 한양토건 박진철을 불러서 오늘 밤 무슨 짓을 꾸밀지 몰라. 놈들이 합법의 탈을 벗어던지고 마지막 발악을 할 수도 있어."

 

민재의 경고에 지유는 주방 벽면의 흙벽을 묵묵히 응시했다.

 

벽 속에는 30년 전 부친 한석규의 피눈물이 담긴 1968년 토지 이면계약서 원본이 숨겨져 있었다.

 

강태석이 노리는 것은 결국 그 서류와 자신이었다.

 

그 서류만 영원히 불태워 없애버린다면, 강태석은 남원의 절대 군주로 군림하며 중앙 정계까지 손을 뻗칠 수 있을 터였다.

 

"알아, 민재야. 강태석이 순순히 포기할 리 없지. 하지만 나도 물러서지 않아."

 

지유는 조리대 위에 놓인 어머니의 낡은 가계부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어머니는 이 작은 가게에서 1원 한 장 속이지 않고 사셨어. 강태석 같은 자들이 수십억, 수백억을 훔치고 빼앗으며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굴어도, 결국 그들이 두려워하는 건 우리가 가진 이 작은 정직함이야. 난 여기서 한 발자국도 안 움직여."

 

지유의 눈동자에 서린 서슬 퍼런 결기에 민재는 숨을 들이켰다.

 

가냘픈 소녀의 외양 뒤에 감춰진 바위 같은 내면이 민재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그때, 문밖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동문 우체국 집배원 복장을 한 박 씨가 커다란 우편 가방을 멘 채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지유 학생, 김밥 세 줄만 싸줄 수 있나? 배달 나가기 전에 든든하게 먹어두려고."

 

"네, 박 아저씨! 바로 말아드릴게요."

 

지유가 싹싹하게 대답하며 김 발을 쥐었다.

 

박 씨는 가방에서 하얀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조리대 모퉁이에 살그머니 올려놓았다.

 

"이게 뭔가요, 아저씨?"

 

지유가 의아한 눈으로 묻자, 박 씨는 골목 안팎을 힐끔 살피더니 목소리를 극도로 낮추었다.

 

"오늘 아침에 시청 도시과랑 건설과 쪽으로 들어가는 등기 우편을 분류하다가 본 건데…… 한양토건이랑 동서개발 명의로 야간 중장비 도로 점용 허가 신청서 사본이 접수되어 있더군. 구도심 관광특구 기반 정비 명목인데, 점용 위치가 바로 이 동문 우체국 뒷골목 일대야. 오늘 밤 자정부터 내일 새벽 5시까지로 되어 있어."

 

지유의 손이 멈칫했다.

 

민재의 눈이 번쩍 뜨였다.

 

"중장비 도로 점용 허가요? 포클레인을 끌고 들어오겠다는 거군요!"

 

박 씨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주제에 이런 걸 빼돌려 알려주는 게 공무원으로서 도리는 아니지만…… 나도 이 골목에서 20년을 오가며 지유 어머니 김밥 먹고 산 사람이야. 어린 학생 하나를 잡겠다고 시청이랑 깡패들이 저 지랄을 떠는 꼴을 도저히 눈 뜨고 볼 수가 없어서 그래. 오늘 밤 조심해라, 지유 학생. 놈들이 진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박 씨는 김밥을 받아 들고는 돈을 쥐여주며 황망히 가게를 빠져나갔다.

 

조리대 위에 남겨진 백색 봉투를 바라보는 민재의 얼굴이 굳어졌다.

 

"포클레인이야. 강태석 이 미친놈이 결국 야간에 밀어버리겠다는 뜻이야!"

 

5. 사람의 마음을 짓는 김밥

 

불안과 긴장이 공기 중에 팽팽하게 감돌았지만, 지유의 표정은 오히려 기이할 정도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지유는 봉투를 가만히 집어 카운터 서랍 깊숙이 넣었다.

 

"민재야."

 

"어, 지유야."

 

"겁내지 마. 밤은 아직 오지 않았어. 지금 내게 온 손님들에게 김밥을 파는 게 내 일이야."

 

지유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 밥솥의 뚜껑을 열었다.

 

아침나절 동안 준비해 둔 밥 세 통이 벌써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유는 쉴 틈도 없이 다시 쌀을 씻어 솥에 안치고 불을 올렸다.

 

소문은 정오가 가까워질수록 들불처럼 남원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점심시간이 되자 삼거리 김밥집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남원시청 공무원들조차 강태석의 눈치를 보느라 대놓고 오지는 못했지만, 시청 별관의 하위직 서기들이 모자를 푹 눌러쓰고 찾아와 김밥을 대량으로 사 갔다.

 

"저…… 지유 씨. 저희 지적과 직원들 열 줄만 포장해 주세요."

 

젊은 여직원이 수줍게 돈을 내밀며 귓속말로 속삭였다.

 

"저희도 시정명령이니 세무조사니 하는 거 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힘내세요."

 

"고맙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지유는 환한 미소로 김밥을 건넸다.

 

동문 우체국 직원들은 아예 점심 회식을 삼거리 김밥집 김밥으로 대체하겠다며 스무 줄을 한꺼번에 주문했다.

 

골목의 철물점 최 씨는 아예 자기 가게 문을 닫아걸고 나와 김밥집 앞에서 사람들의 줄을 정리해 주는 자원봉사를 자처했다.

 

"자, 다들 차례대로 줄을 서세요! 어린 학생이 혼자 싸는 거라 시간이 좀 걸립니다! 천천히들 기다려주쇼!"

 

최 씨의 우렁찬 목소리에 손님들은 불평 한마디 없이 웃으며 순서를 기다렸다.

 

남원 시내 택시 기사들도 차를 골목 어귀에 대놓고 줄에 합류했다.

 

"어이, 한 아가씨! 나 다섯 줄 줘! 우리 택시 합승부 기사들 다 먹일라니까! 참기름 냄새가 요천 둑길까지 진동을 허네!"

 

기사들이 건네는 거친 농담과 웃음소리가 골목을 가득 메웠다.

 

그것은 단순한 음식 소비가 아니었다.

 

오랜 세월 토건 깡패들과 부패한 토착 권력의 폭압 아래 숨죽여 살아야 했던 남원 시민들이, 불의에 굴복하지 않고 버텨낸 작은 소녀를 향해 보내는 무언의 지지이자 연대의 표시였다.

 

사람들은 김밥 한 줄을 사며 자신의 양심을 사고 있었고,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네며 부패한 권력을 향해 조용한 저항의 표를 던지고 있었다.

 

지유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쑤셔왔고 어깨가 끊어질 듯 아파왔지만, 지유는 결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밥을 펴고, 재료를 얹고, 김을 만다.

 

어머니가 그랬듯, 한 줄 한 줄에 정직과 정성을 담아 눌러 붙였다.

 

김밥을 받아 든 손님들의 얼굴에 피어나는 따뜻한 만족감을 볼 때마다, 지유의 메마른 가슴속에 새로운 힘줄이 돋아나는 것 같았다.

 

오후 세 시가 넘어서자 준비해 둔 재료가 완전히 동이 났다.

 

단무지 한 조각, 당근 한 토막 남지 않았다.

 

쌀독 역시 바닥을 긁는 소리를 냈다.

 

"손님 여러분, 죄송합니다. 오늘 준비한 재료가 다 떨어졌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지유가 문밖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이자, 아직 줄을 서 있던 서른 명 남짓의 손님들이 아쉬운 탄성을 질렀다.

 

"아이고, 벌써 끝났어? 내일은 꼭두새벽부터 와야겠구먼."

 

"학생, 고생 많았어. 내일 또 올 테니까 푹 쉬어!"

 

손님들은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지유를 격려하며 흩어졌다.

 

가게 안에는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조리대 위에 엎드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지유의 곁으로 민재가 다가와 물수건을 건넸다.

 

"지유야, 대단하다. 오늘만 백 줄 넘게 팔렸어."

 

"응…… 손님들이 다 날 살려주려고 오신 것 같아."

 

지유는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조리대 위의 텅 빈 재료 통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해가 뉘엿뉘엿 서쪽 요천 너머로 기울기 시작하면서, 골목의 그림자가 급격하게 짙어지고 있었다.

 

약속된 어둠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6. 어스름 속의 그림자

 

노을이 붉게 타오르던 요천의 하늘이 서서히 잿빛으로 가라앉았다.

 

삼거리 김밥집의 낡은 형광등이 치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깜빡였다.

 

점심의 북적이던 온기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골목은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저녁 8시가 넘어가자 평소 늦게까지 불을 밝히던 인근 상가들이 하나둘 셔터를 내리기 시작했다.

 

칠기 골목의 배 씨가 가게 문을 걸어 잠그며 지유네 가게를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골목 어귀를 지키던 가로등 불빛마저 희미하게 깜빡이며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지유는 앞치마를 벗지 않은 채 주방 한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가게 안에는 지유와 최민재, 그리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구두 수선공 김 씨와 철물점 최 씨가 남아 있었다.

 

최 씨는 묵직한 쇠파이프와 렌치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담배를 태웠다.

 

"지유야, 걱정하지 마라. 그 박 씨 집배원 말대로 놈들이 포클레인을 끌고 오면 내가 이 렌치로 대가리를 부숴버릴 테니까."

 

최 씨의 거친 말에 김 씨가 혀를 찼다.

 

"이 사람아, 폭력으로 맞서면 저놈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공무집행방해니 폭력배니 몰아붙여서 지유까지 잡아넣을 거여. 법적으로 막아야지."

 

"법? 어제 세무서 놈들 봤잖아! 그놈들이 법대로 하든가? 시장 끄나풀 깡패 놈들한테 법이 어딨어!"

 

두 노인의 거친 언쟁 속에서도 지유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지유의 시선은 단칸방 벽면에 걸린 낡은 괘종시계의 초침을 좇고 있었다.

 

째깍, 째깍, 째깍.

 

자정을 향해 달려가는 초침 소리가 마치 카운트다운처럼 귓전을 때렸다.

 

그때, 민재의 삐삐가 요란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민재는 허리춤에서 호출기를 떼어내 액정에 찍힌 번호를 확인했다.

 

서울 지역번호 02로 시작하는 낯선 번호였다.

 

"서울이야……?"

 

민재가 다급히 가게 구석의 다이얼 공중전화로 달려가 동전을 넣고 번호를 눌렀다.

 

수화기를 귀에 댄 민재의 어깨가 굳어졌다.

 

"여보세요? 네, 최민재입니다. 선배…… 아니, 네? 누구시라고요?"

 

민재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지유는 숨을 죽인 채 민재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낮고, 차갑고, 날카로웠다.

 

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지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네…… 네, 알고 있습니다. 오늘 밤 중장비 도로 점용 허가가 나 있습니다. 네…… 서울지검이요? 지금 출발하셨다고요?"

 

민재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민재가 멍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지유야……."

 

"민재야, 누구야?"

 

지유가 다가가 묻자 민재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갈라진 목소리로 답했다.

 

"성재환이야."

 

가게 안의 공기가 일순간 멎었다.

 

김 씨와 최 씨도 언쟁을 멈추고 민재를 바라보았다.

 

"재환이가…… 방금 서울지검 특수2부 집무실에서 전화를 걸었어. 강태석이 오늘 밤 포클레인 세 대를 동원해 김밥집을 완전히 밀어버리라는 비밀 지시를 내린 걸 서울지검 내사망이 포착했대."

 

지유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재환이가…… 뭐라고 했는데?"

 

"재환이가 지금 서울지검 특수부 수사관들이랑 같이 전주지검 남원지청을 경유하는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서 내려오고 있대. 춘향 테마랜드 비자금 40억 원 계좌 영장이랑 강태석 직권남용 체포영장까지 전부 다 쥐고…… 직접 차를 몰고 남원으로 오고 있어."

 

민재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재환이가 말했어. '지유한테 전해줘. 새벽 2시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버텨달라고. 내가 그전에 도착해서 모든 걸 끝내겠다'고……."

 

지유는 휘청거리는 몸을 조리대 모서리에 기댔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그는 오고 있었다.

 

자신을 가두려 했던 가문의 억압을 뚫고, 서울지검 특수부 검사의 법복을 품에 안은 채, 3년 전 약속했던 그 모습 그대로 남원을 향해 어둠을 가르고 달려오고 있었다.

 

7. 굉음과 함께 들이닥친 칼날

 

그러나 어둠의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밤 11시 40분.

 

골목 밖 큰길 쪽에서 땅을 뒤흔드는 육중한 디젤 엔진의 굉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궁.

 

가게 바닥의 유리 파편들이 잘게 떨렸고, 탁자 위의 유리컵이 덜덜거리며 춤을 추었다.

 

골목 어귀로 시커먼 거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란색 대형 포클레인 세 대가 굉음을 내뿜으며 좁은 골목길을 가득 메운 채 서서히 진입하고 있었다.

 

포클레인의 거대한 궤도 바퀴가 아스팔트를 짓이기며 다가왔고, 그 뒤편으로는 각목과 쇠파이프를 든 30여 명의 한양토건 용역 깡패들이 검은 마스크를 쓴 채 떼를 지어 따라붙었다.

 

포클레인 맨 앞좌석 조수석에서 뛰어내린 자는 한양토건 대표 박진철이었다.

 

그 뒤로 강태석 남원시장의 비서관이 서류철을 든 채 거만한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다 밀어버려."

 

박진철이 손에 든 무전기에 대고 거칠게 짓씹듯 명령했다.

 

"건물 안에 사람이 있든 없든 상관없다. 안전진단 D등급 노후 건물 붕괴 위험에 따른 긴급 행정대집행이다. 싹 다 깔아뭉개고 잔해 속에서 종이 쪼가리 하나 남기지 말고 긁어모아 태워버려!"

 

포클레인의 육중한 쇠바가지가 허공으로 번쩍 치켜들려졌다.

 

엔진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을 토해내며 삼거리 김밥집의 테이프 기운 통유리창을 향해 곤두박질치려는 찰나였다.

 

쾅!

 

김밥집의 알루미늄 문이 활짝 열리며 한지유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지유는 하얀 앞치마를 두른 채, 오른손에는 어머니의 3개년 회계 장부를, 왼손에는 국세기본법과 행정대집행법 법전이 적힌 낡은 종이를 꼭 쥐고 있었다.

 

지유의 뒤로 쇠파이프를 든 최 씨와 몽둥이를 쥔 김 씨, 그리고 카메라를 치켜든 최민재가 나란히 버텨 섰다.

 

"멈추세요!"

 

지유의 카랑카랑한 외침이 포클레인 엔진 굉음을 뚫고 골목길에 울려 퍼졌다.

 

지유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포클레인의 육중한 궤도 바퀴 바로 한 걸음 앞까지 걸어가 섰다.

 

서슬 퍼런 소녀의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친 포클레인 기사가 기겁하며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이이익!

 

거대한 쇠바가지가 지유의 머리통 불과 1미터 위에서 거친 쇳소리를 내며 멈추어 섰다.

 

박진철이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삿대질을 해댔다.

 

"이 미친년이 제 목숨 귀한 줄 모르고 어디서 알짱거려! 야! 비켜서지 않으면 대가리부터 갈아버린다!"

 

용역들이 쇠파이프로 길바닥을 내리치며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그러나 지유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지유는 품에서 낮에 집배원 박 씨가 전해주었던 서류 사본을 꺼내 허공에 높이 치켜들었다.

 

"남원시청 건설과 야간 중장비 도로 점용 허가 제1996-48호! 허가 조건 제3조, '점용 구간 내 사유 시설물에 대한 물리적 철거 및 훼손을 엄격히 금하며, 위반 시 허가를 즉시 취소한다'!"

 

지유의 맑고 서슬 퍼런 목소리가 골목의 허공을 갈랐다.

 

"당신들이 들고 온 건 도로 점용 허가증이지, 법원의 강제 철거 집행 영장이 아니야! 행정대집행법 제3조에 따른 사전 계고와 영장 송달도 없이 사유 재산과 주거 시설을 중장비로 파괴하는 건 형법 제366조 재물손괴, 제319조 주거침입, 그리고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특수공갈 및 살인미수다!"

 

열아홉 살 소녀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빈틈없는 법리 조항에 박진철과 시청 비서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지유는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포클레인 바퀴 앞으로 다가섰다.

 

"밀어봐. 밀어서 날 죽여봐! 어디 내 몸뚱이와 이 가게를 깔아뭉개고 네놈들이 원하는 대로 진실을 묻어봐라!"

 

지유의 눈동자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 그 자체였다.

 

그 기세에 눌린 30여 명의 장정들이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때였다.

 

골목길 양편의 어둠 속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수많은 불빛이 켜지기 시작했다.

 

철물점 최 씨의 신호에 맞춰, 삼거리 골목과 동문 우체국 일대의 상인들, 그리고 낮에 김밥을 사 갔던 이웃 주민 수십 명이 플래시와 몽둥이, 냄비와 꽹과리를 들고 골목길로 쏟아져 나온 것이었다.

 

"어린애를 죽이려고 작정을 했구나, 이 살인마 놈들아!"

 

"우리가 다 보고 있다! 한 발자국만 더 움직여봐라!"

 

상인들이 인간의 띠를 만들어 지유의 김밥집 앞을 겹겹이 에워쌌다.

 

정직하게 살아온 소녀를 지키기 위해, 남원의 억눌렸던 민심이 거대한 방파제가 되어 일어선 순간이었다.

 

박진철이 당황하여 뒤를 돌아보며 이를 갈았다.

 

"이 새끼들이 다 죽으려고 환장했나…… 야! 밀어! 그냥 다 밀어버려! 시장님이 다 책임진다고 했어!"

 

포클레인 기사가 다시 레버를 당기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

 

골목 끝자락, 남원 시내 방면에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밤하늘을 찢어발기며 다가왔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붉고 푸른 경광등 불빛 세 대가 어둠을 뚫고 맹렬한 속도로 질주해 삼거리 골목 어귀에 급제동했다.

 

검은색 세단 두 대와 호송 승합차 한 대였다.

 

차 문이 열리며 단정한 감청색 정장에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이는 건장한 사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서울지방검찰청 특수2부 소속 수사관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한가운데, 길게 펄럭이는 검은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한 청년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가슴팍에는 서슬 퍼런 금빛 검찰 배지가 번뜩이고 있었고, 한 손에는 법원의 붉은 직인이 선명히 날인된 대형 압수수색 및 체포영장이 들려 있었다.

 

성재환이었다.

 

8. 사법의 새벽, 돌아온 약속

 

"동작 그만."

 

성재환의 나직하지만 골목 전체를 얼어붙게 만드는 서늘한 음성이 정적을 찢었다.

 

그 목소리는 3년 전 요천 둑길에서 자전거를 타며 지유에게 속삭이던 소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대한민국 최고 권력의 심장부에서 거악을 단죄하기 위해 스스로 칼날이 된 특수부 검사의 서슬 퍼런 포효였다.

 

박진철과 시청 비서관이 사색이 되어 굳어버렸다.

 

"너…… 넌 뭐야?"

 

박진철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재환의 뒤에 버텨 선 서울지검 수사관이 신분증을 내밀며 벼락같이 외쳤다.

 

"서울지방검찰청 특수2부 성재환 검사님이시다! 전원 무기 버리고 대열에서 이탈하지 마라! 움직이면 특수공무집행방해로 즉시 현행범 체포한다!"

 

'성재환 검사.'

 

그 이름 석 자가 떨어지는 순간, 현장에 있던 모든 이들의 숨이 멎었다.

 

전임 시장 성호석의 아들이자, 사법시험 전국 수석, 그리고 마침내 법복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온 이.

 

재환은 포클레인과 조폭들을 벌레 보듯 차갑게 훑어내린 뒤, 비서관의 멱살을 잡듯 영장을 눈앞에 들이밀었다.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뇌물수수, 업무상 횡령, 그리고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 위반. 피의자 강태석, 박진철, 조상태에 대한 법원의 사전 구속영장 및 남원시청, 한양토건, 동서개발에 대한 전면 압수수색 영장이다."

 

재환의 서슬 퍼런 선고에 비서관의 다리가 풀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박진철이 쇠파이프를 떨어뜨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수사관들, 현장의 포클레인 세 대 전량 압류하고, 용역 전원 현행범으로 체포해 남원지청 유치장으로 압송하세요. 한 놈도 빼놓지 말고 조서 받습니다."

 

"예, 검사님!"

 

수사관들이 전광석화처럼 들이닥쳐 한양토건 용역들의 팔을 꺾고 수갑을 채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골목길은 패배자들의 비명과 쇠고랑 소리로 뒤덮였다.

 

상인들과 주민들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도하며 숨을 죽였다.

 

어둠이 걷혀가는 새벽의 푸른빛 속에서, 마침내 모든 소란이 정리되어 가고 있었다.

 

재환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포클레인의 거대한 잔해를 지나, 흩어진 유리 파편을 밟으며, 하얀 앞치마를 두른 채 꼿꼿이 서 있는 단 한 사람을 향해 다가갔다.

 

지유는 들고 있던 법전 종이를 떨어뜨렸다.

 

테이프로 기워진 유리창 앞, 새벽이슬을 맞으며 서 있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 들었다.

 

3년의 세월이었다.

 

신림동 고시촌의 피 묻은 컴퍼스와, 남원의료원 영안실의 삼베 상복과, 깨진 흑청색 잉크병의 파편을 지나 마침내 마주 선 순간이었다.

 

재환의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차갑고 냉철하던 검사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지유만을 바라보며 피눈물을 삼켜왔던 한 남자의 애절한 얼굴이 드러나 있었다.

 

재환이 코트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지유의 떨리는 손바닥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3년 전 광한루원 오작교에서 건넸던, 뒷면에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이라고 적혀 있던 바로 그 학생증 증명사진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독일제 검은 옻칠 각인 만년필이 함께 놓였다.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지유야."

 

재환의 갈라진 목소리가 지유의 귓전을 적셨다.

 

"약속 지키러 왔다. 늦어서…… 정말 미안해."

 

지유의 눈에서 참아왔던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리며 만년필의 금빛 닙을 적셨다.

 

지유는 말없이 고개를 저으며 만년필과 사진을 가슴에 꼭 품어 안았다.

 

동문 우체국 너머, 지리산 능선 위로 붉고 찬란한 여명이 솟아오르며 삼거리 김밥집의 깨진 유리창을 눈부시게 비추기 시작했다.

 

길고 길었던 어둠의 밤이 끝나고, 마침내 정의와 심판의 새로운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