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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36화

세무조사의 칼날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흙먼지 낀 유리창 너머로

 

아침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남원 동문 우체국 뒷골목 삼거리 김밥집 앞은 평소와 다른 기묘한 긴장감에 짓눌려 있었다.

 

밤새 찬 이슬을 머금은 함석지붕 위로 눅눅한 쇠 냄새가 번졌다.

 

투명 박스 테이프로 촘촘히 기워진 전면 통유리창 너머로 성에 같은 뿌연 김이 서려 올랐다.

 

한지유(韓智攸)는 가스 화구 위에 올려진 커다란 무쇠 솥의 뚜껑을 열었다.

 

자욱한 흰 수증기와 함께 갓 지어낸 쌀밥의 구수한 단내가 좁은 주방을 가득 채웠다.

 

어머니가 살아생전 늘 입버릇처럼 이르던 말이었다.

 

'손님이 백 명이 오든 단 한 명이 오든 밥알에 윤기가 죽으면 장사는 끝난 게다.'

 

지유는 무쇠 솥에서 퍼 올린 고슬고슬한 쌀밥을 커다란 양푼에 담고, 남원 공설 방앗간에서 짜온 참기름과 굵은 천일염을 둘렀다.

 

나무 주걱을 비스듬히 뉘어 밥알이 뭉개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가르며 섞었다.

 

코끝을 찌르는 진한 참기름 내음 뒤편으로, 불과 며칠 전 남원의료원 지하 영안실에서 맡았던 서늘한 국화꽃 냄새가 불현듯 겹쳐 지나갔다.

 

지유는 입술 안쪽을 지그시 깨물며 손끝에 힘을 주었다.

 

어머니의 빈소에서 남원시장 강태석(姜泰錫)이 내밀었던 그 파렴치한 상속 포기 각서와, 그자의 번들거리던 눈빛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서슬 퍼런 불길이 치솟았다.

 

하지만 지유는 울지 않았다.

 

어머니가 남겨준 앞치마를 질끈 동여매고 조리대 앞에 섰다.

 

조리대 한구석, 원래라면 단정하게 놓여 있었어야 할 흑청색 잉크병 자리는 휑하니 비어 있었다.

 

강태석이 내던져 깨뜨린 잉크 얼룩은 시멘트 바닥 틈새로 깊게 스며들어 지워지지 않는 멍 자국처럼 남아 있었다.

 

그러나 지유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지유는 조리대 밑, 흙벽 깊은 홈을 손끝으로 가만히 가늠해 보았다.

 

간밤에 민재의 경고를 듣고 옮겨 숨겨둔 1968년 토지 매각 이면계약서 원본이 차가운 흙벽 깊숙한 곳에서 숨을 죽인 채 잠들어 있었다.

 

그 서류는 아버지 한석규의 억울한 원혼이자, 강태석과 성호석을 단죄할 가장 날카로운 비수였다.

 

"지유야."

 

가게 문틈으로 들릴 듯 말 듯 한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골목 어귀에서 구두 수선통을 지키던 절름발이 김 씨 아저씨였다.

 

김 씨는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절며 김밥집 처마 밑으로 바짝 붙어 섰다.

 

그의 주름진 얼굴은 흙빛으로 질려 있었다.

 

"지유야, 문 닫아라. 어서 셔터 내리고 뒷문으로 피해."

 

지유는 참기름 묻은 나무 주걱을 내려놓고 문간으로 다가갔다.

 

"김 씨 아저씨, 아침부터 왜 그러세요?"

 

"지금 저 큰길가에 남원세무서 검은 승합차가 섰다. 차에서 내린 놈들이 서류 가방이랑 철제 상자를 들고 이 골목 쪽으로 꺾어 들어왔어. 시장 놈이 보낸 게 분명해. 저놈들 보통 세무조사가 아니야. 장부고 통장이고 다 털어서 꼬투리 잡히면 오늘로 가게 문에 압류 딱지 붙일 작정이다!"

 

김 씨의 떨리는 손이 지유의 소매를 붙잡으려다 허공을 맴돌았다.

 

주변 상가들의 문도 하나둘 굳게 닫히고 있었다.

 

칠기사 배 씨도, 철물점 최 씨도 가게 안쪽에서 문을 반쯤 걸어 잠근 채 숨을 죽이고 내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연민과 두려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강태석이라는 거대한 지방 권력이 휘두르는 채찍이 이번에는 합법의 탈을 쓴 '세무조사'라는 형태로 영세 김밥집을 덮쳐오고 있음을 모두가 직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유는 셔터 줄을 잡지 않았다.

 

오히려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김 씨를 향해 잔잔하지만 단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피하면 제가 죄를 지은 게 되잖아요. 저는 도둑질한 적도 없고, 손님들 돈 떼어먹은 적도 없어요."

 

"지유야! 저것들은 법을 만드는 놈들 편이란 말이다! 순진하게 굴면 뼈도 못 추려!"

 

"아저씨, 저 순진하지 않아요."

 

지유의 눈동자가 깊고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장사예요. 1원 한 장 속인 적 없어요. 올 테면 오라고 하세요."

 

그때였다.

 

골목 입구에서 구두 밑창이 자갈과 흙바닥을 거칠게 짓이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 명의 남자가 짙은 감색 양복 차림으로 김밥집 앞을 가로막아 섰다.

 

선두에 선 사내는 남원세무서 특별조사반 팀장 한기철(韓基哲)이었다.

 

그의 가슴팍에는 번쩍이는 공무원증이 걸려 있었고, 손에는 모서리가 각진 두꺼운 검은색 가죽 서류철이 들려 있었다.

 

한기철의 뒤를 따르는 두 명의 젊은 조사관들은 압수 물품을 담을 커다란 플라스틱 박스와 알루미늄 서류함을 각각 들고 있었다.

 

골목길의 공기가 순식간에 살얼음판처럼 얼어붙었다.

 

2. 압수 집행의 횡포

 

한기철은 박스 테이프로 얼기설기 기워진 유리창을 힐끗 훑어보더니 경멸이 섞인 헛기침을 내뱉었다.

 

"여기가 동충동 182번지, 삼거리 김밥집 맞지?"

 

지유는 조리대 앞치마에 두 손을 얹은 채 꼿꼿이 서서 그를 응시했다.

 

"네, 맞습니다만. 무슨 일이시죠?"

 

한기철은 대답 대신 품에서 붉은 직인이 선명하게 찍힌 공문 한 장을 꺼내 지유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특별세무조사 착수 및 금융·회계 장부 현장 압수수색 통지서.'

 

공문 맨 위쪽에는 굵은 고딕체로 위압적인 문구가 적혀 있었고, 하단에는 남원세무서장의 직인과 함께 '국세기본법 및 조세범처벌법에 의거함'이라는 법조문이 빽빽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남원세무서 조사과 한기철 계장이다. 본 업소는 최근 3개년간 부가가치세 및 종합소득세 신고 과정에서 현금 매출을 고의로 누락하고 무자료 식자재를 매입해 조세를 포탈했다는 구체적인 제보가 접수되었다. 이에 국세기본법 제81조에 의거, 오늘부로 특별 세무조사에 착수하며 사업장 내 보관 중인 일체의 거래 장부, 영수증, 금융 거래 내역 일체를 현장 압수한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에 서 있던 두 명의 조사관이 신발을 신은 채 주방 문턱을 넘으려 했다.

 

"잠깐 멈추세요!"

 

지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좁은 가게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조사관들의 발이 허공에서 굳어졌다.

 

한기철이 미간을 사납게 찌푸리며 지유를 노려보았다.

 

"뭐 하는 짓이야? 공무집행방해로 경찰 부를까? 어린 학생이라고 봐주는 거 없어."

 

"공무집행이요?"

 

지유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한기철의 코앞으로 한 걸음 걸어 나왔다.

 

지유의 키는 한기철의 어깨에 겨우 닿을 정도였지만, 그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슬은 거구의 사내를 압도하고 남음이 있었다.

 

"국세기본법 어디에 영세 간이과세자 점포에 사전 통지도 없이 들이닥쳐 주방까지 군홧발로 짓밟으라는 규정이 있죠? 조사 대상 선정 사유와 범위, 조사 기간이 명시된 공식 통지서는 최소 7일 전에 도달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한기철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겨우 고등학교를 갓 졸업했을 법한 계집아이가 국세기본법의 사전 통지 절차를 입에 올릴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한기철은 곧 비열한 실소를 흘리며 공문을 흔들었다.

 

"법을 어디서 주워들었나 본데, 조세포탈의 혐의가 명백하고 증거인멸의 우려가 긴급하다고 인정될 때는 사전 통지 없이 즉시 착수할 수 있어. 조세범처벌절차법에 따른 정당한 집행이야. 비켜라. 뒤져서 나오는 게 없으면 깨끗하게 끝나겠지만, 방해하면 현행범으로 쇠고랑 찬다."

 

한기철의 손짓에 두 조사관이 거칠게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카운터 서랍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철제 동전통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며 100원짜리와 500원짜리 동전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야, 저기 서랍장 밑바닥 다 뜯어봐. 금고나 비밀 통장 숨겨둔 거 없는지 샅샅이 뒤져!"

 

한기철의 눈길은 일반적인 세무조사관의 그것이 아니었다.

 

매출 전표나 영수증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의 번들거리는 시선은 오직 하나, 카운터 바닥의 들린 마룻판과 벽지 틈새, 서류가 숨겨질 만한 은밀한 구석만을 집요하게 훑고 있었다.

 

강태석이 내린 진짜 지령이 무엇인지 지유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년이 쥐고 있는 1968년 이면계약서를 반드시 찾아내서 내 손에 가져와라. 세무조사든 뭐든 구실을 붙여서 가게를 통째로 뒤집어엎어!'

 

조사관 하나가 손에 쥔 드라이버로 카운터 밑바닥 나무판자를 뜯어내려 했다.

 

지유의 손이 떨려왔다.

 

하지만 그 서류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지유는 조용히 숨을 고르며, 품 안에서 낡은 노트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옷깃에 꽂혀 있던 볼펜을 빼 들었다.

 

"성함이 한기철 계장님이라고 하셨죠?"

 

지유는 서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공책에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1996년 9월 7일 오전 8시 45분. 남원세무서 조사과 한기철. 그리고 동행한 조사관 두 분의 관등성명과 소속을 밝히세요."

 

한기철이 뒤를 돌아보며 어이없다는 듯 헛숨을 들이켰다.

 

"뭐?"

 

"어떤 구체적 탈세 제보인지 출처를 밝히지 않으셨고, 영장 없는 불법적 가택수색에 준하는 기물 파손 행위를 하고 계십니다. 서랍 밑바닥을 쇠막대로 뜯어내는 행위가 세무 장부 영치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적으세요. 이름 밝히지 않으시면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와 특수재물손괴로 남원지청에 정식 고소장을 제출하겠습니다."

 

한기철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이 조그만 년이 보자 보자 하니까! 네 애비 닮아서 주둥이만 살았구나? 어디서 협박질이야! 야! 다 집어치우고 이 집구석 장부란 장부는 모조리 긁어모아! 당장 세무서로 압송해!"

 

조사관들이 주방 선반에 꽂혀 있던 낡은 공책 몇 권을 거칠게 낚아챘다.

 

3. 1원 한 장 틀리지 않는 진실

 

"그 장부들, 가지고 가실 필요 없습니다."

 

지유의 서늘하고 맑은 음성이 난장판이 된 가게 안에 울려 퍼졌다.

 

지유는 몸을 돌려 조리대 뒤편, 가장 정갈하게 닦아둔 목재 찬장 안쪽에서 두툼한 가죽 바인더 세 권을 꺼내 들었다.

 

쿵.

 

무거운 바인더가 스테인리스 조리대 위에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짙은 갈색 표지 위에는 어머니의 투박하지만 단정한 글씨체와, 그 뒤를 이은 지유의 정갈한 필체로 연도가 적혀 있었다.

 

'1993년도 삼거리 김밥 일일 결산록.'

 

'1994년도 삼거리 김밥 일일 결산록.'

 

'1995년 및 1996년도 수불 및 현금 출납 원장.'

 

한기철이 의아한 눈으로 바인더를 바라보았다.

 

"이게 뭐냐?"

 

"계장님이 찾으시는 세무 장부입니다."

 

지유는 망설임 없이 첫 번째 바인더를 펼쳤다.

 

종이가 넘어가는 맑은 소리와 함께 한기철과 두 조사관의 시선이 책장 위로 쏠렸다.

 

펼쳐진 내지에는 그야말로 경악할 만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단순한 가계부가 아니었다.

 

매일 아침 들여온 식자재의 내역이 붉은 잉크와 검은 잉크로 완벽하게 구분되어 기록되어 있었다.

 

'남원 공설 방앗간 참기름 2되 - 14,000원 (영수증 번호 제104호 첨부)'

'동문 제일 정미소 신동진 쌀 1가마 - 112,000원 (간이영수증 첨부)'

'남원 공설시장 단무지 5박스, 우엉 3관 - 23,500원'

'당일 김밥 판매 수량: 일반 김밥 142줄(줄당 1,000원), 참치 김밥 38줄(줄당 1,500원). 총 매출액 199,000원.'

 

'잔돈 준비금 20,000원, 마감 현금 시재 219,000원. 오차 0원.'

 

모든 날짜마다 지출 영수증 원본이 날짜순으로 반듯하게 풀로 붙여져 있었고, 그 옆에는 어머니가 직접 날인한 작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심지어 하루 장사를 마치고 바닥에 떨어진 10원짜리 동전 하나, 손님이 잔돈을 받지 않고 두고 간 50원짜리 동전 하나까지 '잡이익' 항목으로 1원 단위까지 낱낱이 기재되어 있었다.

 

지유는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한기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저희 어머니는 글을 길게 배우지 못하셨지만, 남의 돈 무서운 줄은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손님들에게 김밥 한 줄을 팔 때마다 참기름 한 방울, 소금 한 톨까지 부끄러움 없이 장사하셨어요. 여기 1993년부터 지난달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시기 전날까지의 모든 현금 매입과 매출 내역이 적혀 있습니다."

 

한기철은 침을 꿀꺽 삼키며 손가락으로 장부의 숫자를 짚어 내려갔다.

 

"이, 이런 건 얼마든지 짜맞춰서 조작할 수 있어! 현금 매출을 누락하고 장부에는 적게 적었을지 누가 알아?"

 

"조작이요?"

 

지유는 차갑게 미소 지었다.

 

"그 뒤쪽을 보시죠. 정미소와 방앗간, 야채 가게 배달부의 확인 서명과 날짜별 매입 단가표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세무서 컴퓨터에 등록된 남원 시내 쌀 도매가격과 방앗간 참깨 시세를 조회해 보세요. 저희가 사들인 쌀의 양과 김밥 한 줄에 들어가는 밥의 정량(210g)을 계산해 보시면, 판매된 김밥 줄 수와 오차 범위 1% 이내로 정확히 일치합니다."

 

한기철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지유의 설명은 빈틈이 없었다.

 

단순한 장부가 아니라, 한 편의 완벽한 회계 감사 보고서였다.

 

신림동 고시촌에서 재환이 밤을 새워가며 정리하던 법리 구조처럼, 지유는 어머니의 삶이 담긴 장부를 완벽한 숫자의 방패로 다듬어놓았던 것이다.

 

"어디 찾아보세요."

 

지유가 바인더를 한기철 쪽으로 탁 밀어놓았다.

 

"단 1원이라도 누락된 현금이 있는지, 무자료로 빼돌린 쌀 한 톨이 있는지 털어보시라고요. 만약 1원이라도 계산이 맞지 않는다면 제가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가게를 비우고 세무서로 걸어 들어가겠습니다. 하지만!"

 

지유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낮아졌다.

 

"모든 숫자가 단 1원의 오차도 없이 맞아떨어진다면, 계장님은 법적 근거도 없는 허위 제보를 빌미로 영세 상인의 영업을 방해하고 기물을 파손한 죄를 온전히 뒤집어쓰셔야 할 겁니다."

 

두 명의 젊은 조사관들은 이미 질려버린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이 들고 온 압수 상자는 텅 빈 채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장부를 넘기던 한기철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털어낼 먼지가 없었다.

 

아니, 털면 털수록 자신들의 비열한 표적 탄압만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뿐이었다.

 

4. 골목 밖의 눈과 귀

 

김밥집 밖, 모퉁이 담장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던 최민재는 망원렌즈가 달린 소형 카메라의 셔터를 쉼 없이 눌렀다.

 

찰칵, 찰칵.

 

모터 드라이브의 미세한 구동음이 골목길의 긴장감 속에 묻혀 들어갔다.

 

민재의 머리에는 아직 붕대가 감겨 있었고, 각목에 맞았던 관자놀이 부근은 푸르스름하게 멍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맹수처럼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민재는 카메라를 내리고 손에 쥔 취재 수첩을 빠르게 넘겼다.

 

'남원세무서 조사과 한기철 계장.'

 

'조사관 2명 대동. 관용 승합차(전북 7 가 44XX).'

 

'오전 8시 42분 무단 진입 및 카운터 마룻바닥 강제 훼손 시도.'

 

'지유의 완벽한 3개년 회계 장부 제출로 집행 교착 상태.'

 

민재는 어젯밤 사법연수원의 성재환과 나눴던 통화 내용을 한 글자도 잊지 않고 있었다.

 

'민재야, 강태석은 결코 합법적으로 지유를 이길 수 없어. 그자가 세무서를 보내든 깡패를 보내든, 그 모든 불법적인 행정 권력 남용의 순간을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기록해 둬. 날짜, 시간, 공무원의 이름, 그들이 한 위법한 말 한마디까지. 내가 검사가 되어 내려가는 날, 그 기록들이 전부 그자들의 목을 옭아맬 공소장이 될 거다.'

 

재환의 서슬 퍼런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민재는 펜촉을 꾹꾹 눌러가며 한기철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했다.

 

그때, 칠기사 골목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가게 문을 닫아걸고 숨죽이고 있던 시장 상인들이 하나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구두 수선공 김 씨가 절뚝거리며 앞장섰다.

 

"이보쇼, 세무서 양반들!"

 

김 씨의 거친 고함이 골목을 갈랐다.

 

한기철이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김 씨는 손에 쥐고 있던 낡은 구두칼을 허리춤에 꽂은 채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남원에서 장사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아! 삼거리 김밥집 지유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외상 한 번 안 깔고, 배고픈 거지들한테도 김밥 한 줄 그냥 말아주던 사람이야! 그런 집을 털어? 털 게 없어서 고아 된 계집아이 밥주걱을 뺏으러 와?"

 

뒤이어 철물점 최 씨와 떡집 박 씨도 합세했다.

 

"맞아요! 세무 조사를 하려면 저기 요천 변에 수십억짜리 빌딩 올리는 토건 놈들이나 조사할 일이지, 하루에 김밥 백 줄 팔아 겨우 입에 풀칠하는 집을 왜 들쑤셔?"

 

"우리가 다 봤어! 아침부터 들어와서 멀쩡한 가게 바닥을 뜯고 깽판 치는 거 우리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상인들이 하나둘 김밥집 앞으로 모여들며 험악한 포위망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강태석의 서슬에 눌려 지유를 외면하고 몸을 사리던 이웃들이었다.

 

하지만 지유가 조금의 비굴함도 없이 당당하게 1원짜리 하나 틀리지 않는 장부를 내밀며 관헌들을 꾸짖는 모습을 보자, 억눌려 있던 상인들의 가슴속에서 분노와 부끄러움이 동시에 터져 나온 것이었다.

 

민재는 그 광경을 놓치지 않고 셔터를 눌렀다.

 

포위된 한기철의 이마에서 비 오듯 땀이 쏟아져 내렸다.

 

완벽한 패배였다.

 

서류는커녕, 김밥집 장부는 털끝만큼의 흠집조차 잡을 수 없을 만큼 결백했다.

 

거기에 성난 민심까지 들끓기 시작하자 한기철은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5. 빗나간 비수

 

"조, 조용히들 하세요! 우리는 정당한 공무를 수행 중입니다!"

 

한기철이 헛기침을 내뱉으며 고함을 질렀지만, 목소리에는 이미 힘이 빠져 있었다.

 

지유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한기철을 응시하며 조리대 위의 장부를 덮었다.

 

탁.

 

가죽 바인더가 닫히는 소리가 마치 법정에서 재판장이 내리는 판결봉 소리처럼 무겁게 울렸다.

 

"장부는 다 보셨습니까?"

 

지유의 담담한 물음에 한기철은 마른침을 삼켰다.

 

"……장부의 형식적 기재는 확인했다. 하지만 이건 원본 대조와 정밀 실사가 필요한 사안이야."

 

"그럼 가져가세요."

 

지유는 바인더 세 권을 한기철의 품에 안겨주듯 내밀었다.

 

"가져가셔서 국세청 전산망이든, 시청 세무과든 어디든 대조해 보세요. 대신, 정식 압수 목록 교부서를 이 자리에서 작성해 주셔야겠습니다. 압수 일시, 물품의 수량, 담당 조사관의 서명이 들어간 공식 영치 조서 말입니다."

 

한기철은 지유가 내민 바인더를 받아들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

 

이 장부를 정식으로 세무서로 가져가는 순간, 조세포탈 혐의는 완벽하게 '무혐의'로 종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표적 감사를 지시한 강태석 시장의 의도를 달성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세무서 차원에서도 엉뚱한 영세업자를 들쑤셔 망신만 샀다는 비난을 뒤집어써야 했다.

 

강태석이 원한 것은 이런 결백한 장부가 아니었다.

 

오직 1968년 토지 매각 이면계약서 원본, 그것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가게 구석구석을 아무리 눈으로 훑어도 그런 낡은 종이 쪼가리는 보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어디다 숨겨둔 거야?'

 

한기철의 속이 타들어 갔다.

 

더 이상 이곳에 지체했다가는 모여든 상인들과 기자들의 눈에 띄어 일만 걷잡을 수 없이 커질 판이었다.

 

한기철은 헛기침을 크게 하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흠! 오늘은 현장 실태 확인으로 갈음하겠다. 장부는 사업장에서 자체 보관하고 있도록 해. 차후 추가 소명이 필요하면 정식 출석요구서를 발송할 테니 그리 알아라!"

 

비겁하고 비열한 퇴각 선언이었다.

 

한기철은 뒤에 선 조사관들에게 턱짓을 했다.

 

"철수한다. 챙겨!"

 

조사관들은 텅 빈 플라스틱 상자를 허겁지겁 들고 도망치듯 김밥집 문밖으로 빠져나갔다.

 

골목을 가득 메우고 있던 상인들이 길을 터주며 사나운 야유를 쏟아냈다.

 

"퉤! 세금 도둑놈들! 부끄러운 줄 알아라!"

 

"다시는 이 골목에 발도 붙이지 마라!"

 

한기철 일행은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큰길가에 세워둔 승합차를 향해 거의 뛰어가다시피 사라졌다.

 

승합차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골목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멀어지자, 김밥집 안에는 거짓말 같은 정적이 찾아왔다.

 

지유는 바닥에 흩어진 100원짜리 동전들을 내려다보았다.

 

긴장이 풀리자 온몸의 힘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두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지유는 조리대를 짚고 꼿꼿하게 버텨 섰다.

 

이겼다.

 

합법의 탈을 쓰고 쳐들어온 권력의 첫 번째 칼날을, 지유는 어머니의 정직과 자신의 결기로 부러뜨려 놓았다.

 

"지유야!"

 

가게 안으로 상인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김 씨 아저씨가 흩어진 동전들을 주워 담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장하다, 지유야. 참말로 장해. 네 어미가 하늘에서 보고 활짝 웃었을 게다."

 

철물점 최 씨도, 떡집 박 씨도 지유의 손을 잡으며 미안함과 대견함이 뒤섞인 눈물을 흘렸다.

 

"우리가 못나서…… 그동안 시장 놈 무서워서 모른 척해서 미안하다, 지유야."

 

"아니에요. 와주셔서 감사해요, 아주머니, 아저씨."

 

지유는 상인들의 손을 꼭 잡아주며 가만히 미소 지었다.

 

하지만 지유는 알고 있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강태석은 한 번 빗나간 칼날에 만족할 위인이 아니었다.

 

세무조사라는 합법적 수단이 통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 그 악귀는, 이제 더욱 잔혹하고 노골적인 물리적 폭력을 준비할 것이 분명했다.

 

6. 관사의 어둠과 타오르는 뇌관

 

같은 시각, 남원 시장 관사 2층 서재.

 

육중한 암막 커튼이 드리워진 방 안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어스름한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고급 가죽 소파에 깊숙이 몸을 파묻고 있던 강태석은 전화기를 든 채 살벌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한기철의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변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 시장님…… 면목 없습니다. 그 가시내가 보통이 아닙니다. 3년 치 장부를 1원짜리 하나 안 틀리게 들이미는 통에…… 게다가 골목 상인들이 떼로 몰려와서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일단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류는…… 가게 안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우지끈.

 

강태석의 손아귀에서 크리스털 재떨이가 비틀리는 소리가 났다.

 

강태석의 눈등에 굵은 힘줄이 흉측하게 돋아올랐다.

 

"……장부? 1원짜리 하나 안 틀려?"

 

강태석의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살기는 방 안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내가 언제 그깟 김밥 몇 줄 값 털어오라고 했어? 내가 찾아오라는 건 그 서류였잖아, 이 밥통 같은 새끼야!"

 

"죄, 죄송합니다, 시장님! 다음번에 영장을 정식으로 발부받아서……."

 

콰창!

 

강태석은 수화기를 내던져 벽에 산산조각 내버렸다.

 

플라스틱 파편이 카펫 위로 어지럽게 튀었다.

 

서재 문가에 서 있던 처남 조상태(趙相泰)가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매형…… 진정하십시오."

 

"진정? 지금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강태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조상태의 멱살을 잡을 듯이 다가섰다.

 

그의 눈은 핏발이 서서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 서류가 세상 밖으로 나가면 나만 죽는 줄 알아? 너, 춘향 테마랜드 공사비 40억 빼돌린 거, 세창물산 명의로 차명 계좌 12개 만들어둔 거, 그거 전부 그 서류 한 장에서부터 줄줄이 엮여 들어가는 거야! 성호석 그 교활한 여우 새끼도 그 서류 때문에 나한테 꼼짝 못 하고 있었는데, 그깟 코흘리개 계집애 하나를 못 꺾어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조상태는 사색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매형, 그럼 이제 어떡합니까? 세무서 놈들도 발을 뺐으니, 합법적으로 건드릴 구실은 다 떨어졌습니다."

 

강태석은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거칠게 젖혔다.

 

관사 마당 너머로 남원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저 멀리 요천의 물줄기가 가을 햇살을 받아 번쩍이고 있었다.

 

강태석의 입꼬리가 잔인하게 뒤틀렸다.

 

"합법? 내가 언제부터 법 따위 지켜가며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그래?"

 

강태석의 눈빛에서 차가운 광기가 번뜩였다.

 

"어용 상인회도 실패했고, 소방법도, 세무조사도 안 먹혔어. 그럼 남은 건 하나뿐이지. 뿌리째 뽑아버리는 거다."

 

"매형…… 설마?"

 

"박진철이 불러라."

 

강태석의 입에서 한양토건 사장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놈한테 전해. 야밤에 포클레인 세 대 끌고 들어가서 삼거리 김밥집이고 나발이고 그 일대 판잣집들을 통째로 밀어버리라고 해. 계집애가 안에 있든 말든 상관없어. 깔려 죽으면 사고사로 위장하면 그만이고, 서류는 무너진 잔해 밑에서 불태워버리면 끝이다. 내일 아침 해가 뜨기 전에 그 자리를 아스팔트로 덮어버려."

 

살기 어린 명령이 서재 안을 무겁게 짓눌렀다.

 

조상태는 섬뜩한 전율을 느끼며 허리를 깊게 숙였다.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박 회장에게 연락하겠습니다."

 

조상태가 황급히 문을 열고 나갔다.

 

홀로 남은 강태석은 양주병을 집어 들어 병째 들이켰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독한 알코올이 그의 뒤틀린 욕망을 더욱 뜨겁게 지펴 올렸다.

 

"성호석…… 그리고 한석규……."

 

강태석이 으르렁거리듯 중얼거렸다.

 

"네놈들의 질긴 목숨 줄을 오늘 밤 내가 완벽하게 끊어주마."

 

7. 맹세의 서신과 벼려지는 칼

 

같은 시각, 경기도 고양시 일산 사법연수원 자치회관 공중전화 부스 앞.

 

성재환은 수화기를 귓가에 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최민재의 격앙된 음성이 쏟아져 들어왔다.

 

"재환아! 방금 상황 끝났다! 지유가 해냈어! 3년 치 장부를 1원 한 장 틀리지 않게 완벽하게 내밀어서 세무서 특별조사반 놈들을 완전히 개망신 주고 쫓아냈다!"

 

재환의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지유야…….'

 

어머니를 잃고 홀로 남은 그 가녀린 어깨로, 공권력이라는 거대한 폭력의 파도를 온몸으로 막아낸 지유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졌다.

 

재환의 주먹이 하얗게 질리도록 쥐어졌다.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재환은 입술을 깨물며 감정을 억눌렀다.

 

"민재야, 다친 곳은 없어? 지유는 무사하고?"

 

"응, 지유는 다치지 않았어. 상인들도 지유의 당당한 모습을 보고 다들 뛰어나와서 세무서 놈들을 에워싸고 쫓아내는 걸 내가 다 사진으로 찍었다. 한기철이란 놈의 관등성명이랑 위법 행위도 내 수첩에 낱낱이 적어뒀어."

 

"잘했어. 정말 고생 많았다, 민재야."

 

재환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울림은 쇠를 녹일 듯 단단했다.

 

"하지만 민재야, 지금부터가 진짜 위험해."

 

수화기 너머 민재의 숨소리가 멎었다.

 

"……진짜 위험하다니? 세무조사도 물리쳤잖아."

 

"강태석은 이제 궁지에 몰렸어. 합법의 탈을 쓴 칼날이 모두 부러졌으니, 그자가 다음으로 쓸 카드는 가장 원초적이고 잔인한 폭력뿐이야. 오늘 밤, 어쩌면 당장 몇 시간 뒤에 한양토건 깡패들과 중장비를 동원해 김밥집을 물리적으로 깔아뭉갤 거다."

 

민재의 숨이 턱 막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럼 지유는……! 당장 피신시켜야 하는 거 아니야?"

 

"지유는 피하지 않을 거야. 어머니와의 약속이 있고, 그 서류를 지켜야 하니까."

 

재환은 전화기 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사법연수원의 붉은 벽돌 건물들을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이미 모든 계산과 결전의 시간표가 완성되어 있었다.

 

"민재야, 내 말 잘 들어. 오늘 밤 내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여야 해."

 

"말해, 재환아. 뭐든 할게."

 

"네가 가진 한기철의 위법 세무조사 현장 사진과 강태석의 친필 사적 보복 메모 사본, 그리고 춘향 테마랜드 비자금 차명 계좌 메모를 남원경찰서가 아니라 전주지방검찰청 남원지청 당직실과, 전북일보 사회부 데스크로 동시에 팩스를 넣어. 그리고 남원소방서 상황실에 삼거리 일대 노후 목조건물 방화 우려 신고를 익명으로 미리 접수해 둬."

 

민재가 떨리는 손으로 메모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지유 곁을 끝까지 지켜줘. 중장비가 들어오면 정면으로 맞서지 말고, 반드시 상인들과 함께 소리를 질러 사람들을 모아야 해. 시간을 벌어야 해. 단 하루라도."

 

"재환이 너는? 너는 지금 어떻게 되는 거야?"

 

재환은 자신의 가슴팍 안주머니를 어루만졌다.

 

그 안에는 지유가 선물했던 흑청색 잉크의 마지막 흔적이 담긴 백부의 만년필과, 연수원 교수실에서 정종길 교수가 쥐여준 서울지검 특수2부 파견 검사 신분증이 들어 있었다.

 

수료식과 임관식까지 남은 시간은 단 일주일.

 

하지만 재환은 그 일주일을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나도 지금 남원으로 출발한다."

 

재환의 단호한 선언에 민재가 숨을 삼켰다.

 

"뭐? 하지만 너 아직 정식 발령 전이잖아! 무단으로 이탈하면 임관에 문제 생기는 거 아니야?"

 

"상관없어."

 

재환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지유를 잃고, 정의를 잃는다면 검사의 법복 따위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어. 정종길 교수님께는 이미 말씀드렸고, 서울지검 특수부 내사 1팀 수사관 두 명이 지금 내 차로 합류하기로 했다. 강태석의 차명 계좌 영장은 내가 서울에서 직접 들고 내려간다."

 

전화를 끊은 재환은 공중전화 부스를 걸어 나왔다.

 

가을바람이 그의 단정한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재환은 기숙사 방으로 올라가 벽에 걸려 있던 검은색 검사 법복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지유의 낡은 학생증 사진을 품에 넣었다.

 

'Fiat justitia, ruat caelum.'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만년필 캡에 새겨진 그 서슬 퍼런 라틴어 법언이 재환의 심장 속에서 거대한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재환은 망설임 없이 코트 깃을 세우며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연수원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남원을 향해, 지유를 향해, 그리고 가문과 부패 권력의 심장을 겨눈 마지막 심판을 향해.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