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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31화

지유 어머니의 임종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멎어가는 숨소리

 

남원의료원(南原醫療院) 본관 3층 중환자실 앞 복도의 형광등 하나가 신경질적으로 깜빡거렸다.

 

지지직거리는 전류음이 스산한 새벽 공기를 짓누르며 하얗게 바랜 타일 바닥 위로 엷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지유는 무릎 위에 두 손을 단정히 모은 채 플라스틱 장의자에 굳은 석상처럼 앉아 있었다.

 

손등에 남은 찰과상 자국은 여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고, 젖은 걸레와 소독약 냄새가 밴 앞치마 자락에서는 희미한 한기가 풍겼다.

 

새벽 네 시 삼십 분.

 

생과 사의 경계가 가장 가늘어지는 시간이었다.

 

자동문이 거친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초록색 수술복을 입은 당직 간호사가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한지유 보호자분! 어서 들어가 보세요! 혈압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습니다!"

 

쿵, 심장이 갈비뼈 안쪽을 부수고 내려앉는 듯한 충격이 지유의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지유는 튕겨 나가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에 쥐가 내려 휘청거렸지만 벽을 짚을 틈조차 없었다.

 

하은이 파리해진 얼굴로 지유의 팔을 부축했다.

 

"지유야!"

 

"엄마……!"

 

덧신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미닫이문을 밀치고 들어간 중환자실 내부는 기계음의 독무대였다.

 

삐이- 삐이- 삐이-.

 

침상 머리맡에 거치된 심전도 모니터의 초록색 파형이 완만하게, 그리고 처절하게 눕고 있었다.

 

수축기 혈압 50, 맥박 분당 42회.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이미 생명의 온기를 거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메말라 있었다.

 

만성 신부전과 급성 심부전으로 온몸이 거무죽죽하게 부어올랐고, 코와 입에 연결된 산소 호흡기 투명관 안쪽으로 가느다란 수증기가 맺혔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지유는 덜덜 떨리는 두 무릎을 꺾으며 침대 난간을 쥐었다.

 

차가운 쇳소리가 손바닥을 찔렀다.

 

"엄마, 나 왔어. 지유야, 엄마…… 내 말 들려?"

 

어머니의 감긴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가래 끓는 거친 호흡이 산소마스크 틈새로 새어 나왔다.

 

"선생님! 어떻게 좀 해보세요! 약이라도 더 써주세요, 제발요!"

 

지유의 처절한 절규에 곁에 서 있던 담당 당직의는 고개를 무겁게 가로저었다.

 

"심근 수축제가 최대 용량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미 신장이 완전히 멎었고…… 심장이 더는 버티지 못합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세상이 그대로 붕괴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어떤 행정 단속도, 쇠파이프를 든 조폭들의 협박도, 붉은 페인트의 공포도 지유를 무릎 꿇리지 못했었다.

 

성재환이 남겨둔 흑청색 잉크와 백부의 각인 만년필에 새겨진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라는 법언을 되새기며, 지유는 남원의 그 어떤 칼바람 앞에서도 울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이 메마르고 차가운 병상 위에서 그녀의 모든 세계가 바스러져 내리고 있었다.

 

2. 마지막 유언

 

"엄마, 가지 마. 나 아직 엄마한테 해준 게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지유는 어머니의 마른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수많은 김밥을 말고 방앗간 참기름을 묻혀가며 지유를 키워낸 그 거칠고 투박한 손에는 이제 온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깊게 팬 주름 사이로 투석 바늘이 남긴 검푸른 멍 자국들만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지유의 눈물이 뚝뚝 떨어져 어머니의 손등을 적셨다.

 

그 순간, 기적처럼 어머니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어머니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감겨 있던 눈을 떴다.

 

혼탁하게 흐려진 초점 속에서, 어머니의 시선이 가까스로 지유의 얼굴을 찾았다.

 

"지…… 유야……."

 

산소마스크 너머로 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유는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울부짖었다.

 

"응, 엄마. 나 여기 있어. 지유 여기 있어."

 

어머니의 시선이 지유의 이마와 뺨, 그리고 거칠게 튼 입술을 차례로 더듬었다.

 

마지막 남은 생명의 불꽃을 전부 끌어모으려는 듯, 어머니의 눈동자에 잠시 맑은 총기가 어렸다.

 

어머니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지유의 옷소매를 쥐려 애썼다.

 

그러나 힘이 들어가지 않아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지유가 황급히 어머니의 손을 가슴팍으로 가져가 꼭 쥐었다.

 

"엄마, 말하지 마. 힘드니까 숨 쉬어, 제발 숨 좀 크게 쉬어 봐……."

 

"들…… 어라…… 지유야…… 내 말…… 똑똑히 들어야 해……."

 

어머니의 가슴팍이 크게 들썩였다.

 

폐부 깊은 곳에서 긁어 올리는 듯한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가게…… 삼거리 가게…… 절대로…… 내주면 안 된다……."

 

"엄마……."

 

"그놈들…… 강태석이…… 그 악귀 같은 놈 손에…… 가게를 넘기면 안 돼……."

 

어머니의 눈가에서 메마른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단순히 재산이나 건물을 지키라는 뜻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눈빛에는 공포를 넘어선 서슬 퍼런 원한과 경고가 서려 있었다.

 

"카운터 밑…… 마룻바닥 아래…… 서류가…… 있다……."

 

"서류?"

 

지유는 숨을 멈췄다.

 

이미 며칠 전 카운터 밑바닥에서 확인했던 그 누런 서류철, 1991년 환지 처분 이의신청서와 성호석, 강태석의 직인이 찍힌 문서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어머니의 말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네 아버지…… 석규 씨가…… 평생을 피눈물 흘리며 숨겨둔…… 진짜 서류가…… 장판 밑…… 벽지 틈새에…… 있다……."

 

어머니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심전도 모니터의 알람음이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간호사가 다급히 다가오려 했지만, 지유는 어머니의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절대…… 강태석에게…… 빼앗기지 마라…… 그 서류가…… 네 아버지를 죽인…… 놈들의 목줄이다……."

 

"엄마!"

 

"성호석…… 그리고 강태석…… 다 한패야…… 하지만…… 지유야…… 너는…… 너는 살아야 한다…… 꺾이지 마라……."

 

어머니의 손이 마지막 힘을 다해 지유의 손을 쥐어짰다.

 

손가락 뼈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어머니는 지유의 젖은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가슴속 깊이 묻어둔 가장 아픈 말을 꺼냈다.

 

"미안하다…… 내 딸…… 공부도…… 더 못 시키고…… 짐만 지워줘서…… 미안해……."

 

"아니야, 엄마. 그런 말 하지 마! 내가 엄마 꼭 살릴 거야. 나 대학 안 가도 돼, 김밥집 하면서 엄마랑 평생 살면 돼! 그러니까 제발 눈 감지 마!"

 

지유가 목을 놓아 울부짖었지만, 어머니의 입가에는 비로소 희미하고 평온한 미소가 번졌다.

 

마치 모든 짐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어머니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석규 씨…… 우리 지유가…… 이렇게 잘 컸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어머니의 손에서 스르륵 힘이 빠져나갔다.

 

침대 시트 위로 어머니의 마른 팔이 힘없이 떨어졌다.

 

삐이이이이이이-.

 

귓청을 찢는 단조로운 전자음이 중환자실을 가득 메웠다.

 

심전도 화면에 그려지던 초록색 파형이 완벽한 일직선을 그렸다.

 

0.

 

0.

 

0.

 

붉은색 경고등이 켜지며 의사와 간호사들이 침상으로 달려들었다.

 

"에피네프린 1앰플 더! 제세동기 준비해!"

 

"비켜주세요, 보호자분! 심폐소생술 들어갑니다!"

 

의사가 어머니의 가슴팍 위로 올라타 체중을 실어 압박을 시작했다.

 

쿵, 쿵, 쿵.

 

어머니의 앙상한 갈비뼈가 힘없이 꺾이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전기 충격기가 충전되는 고주파음이 복도를 울렸다.

 

"차징 완료! 물러서세요! 쇼크!"

 

쾅!

 

어머니의 상체가 허공으로 들썩였다가 무력하게 떨어졌다.

 

그러나 기계는 아무런 대답도 돌려주지 않았다.

 

여전히, 차갑고 잔인한 일직선이었다.

 

"한 번 더! 차징 200! 쇼크!"

 

쾅!

 

다시 한번 어머니의 몸이 튀어 올랐지만, 뛰지 않는 심장은 끝내 침묵을 지켰다.

 

의사가 지친 기색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1996년 8월 19일, 오전 4시 48분. 임종하셨습니다."

 

사망 선고였다.

 

3. 찢겨진 새벽

 

단 한 번의 선고로 세상의 모든 빛이 꺼졌다.

 

지유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너무나 거대한 절망은 울음조차 삼켜버리는 법이었다.

 

지유는 멍하니 서서, 간호사가 어머니의 얼굴 위로 하얀 천을 덮어 올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바라보던 그 따뜻하고 애절했던 눈동자가 차가운 광목천 아래로 사라졌다.

 

"엄마……?"

 

지유가 헛웃음 같은 숨을 내뱉으며 손을 뻗었다.

 

"엄마, 왜 덮어……? 엄마 숨 막혀…… 벗겨줘…… 우리 엄마 숨 쉬어야 한단 말이야……."

 

지유가 미친 사람처럼 달려들어 하얀 천을 걷어내려 했다.

 

간호사들이 당황하여 지유를 붙잡았다.

 

"보호자분, 이러시면 안 됩니다! 진정하세요!"

 

"놓으세요! 우리 엄마 아직 따뜻해요! 손이 아직 따뜻하단 말이에요!"

 

지유가 뿌리치며 버둥거렸다.

 

뒤에서 지켜보던 하은이 울음을 터뜨리며 지유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지유야! 지유야, 제발…… 이러지 마…… 아줌마 가셨어…… 지유야……!"

 

"아니야! 하은아, 엄마가 날 두고 어디를 가! 어제까지 김밥 싸던 사람이야! 내가 돈 벌어온다고 했잖아, 내가 다 갚는다고 했잖아!"

 

지유는 하은의 품에 안겨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차가운 병원 복도 타일 바닥에 무릎이 닿았지만,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온몸의 신경이 모조리 얼어붙은 것 같았다.

 

지유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바닥을 긁었다.

 

손톱이 타일 틈새에 끼어 부러지고 피가 배어 나왔지만 통증조차 없었다.

 

하염없이 터져 나오는 오열이 목구멍을 찢었다.

 

"엄마…… 엄마아……!"

 

그것은 짐승의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남원에 홀로 남겨져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삼키고, 부패한 토건 세력 강태석의 비열한 탄압과 표적 단속을 맨몸으로 견뎌냈던 열아홉 소녀였다.

 

동문 우체국 앞 공중전화가 쇠파이프에 박살 나고 전화선이 끊어지던 그 순간에도 재환을 위해 눈물을 참았던 지유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부재는, 지유를 지탱하던 세계의 가장 밑바닥 주춧돌을 통째로 뽑아내 버렸다.

 

이제 이 세상에 자신을 지켜줄 피붙이는 단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완벽한 고아.

 

남원이라는 거대하고 부패한 아가리 속에 던져진, 아무런 방패도 없는 가녀린 목숨 하나.

 

하은은 바닥에 주저앉아 지유를 꼭 껴안고 함께 피눈물을 쏟았다.

 

"지유야…… 내가 있잖아…… 우리가 있잖아…… 제발 정신 좀 차려봐……."

 

중환자실 밖으로 어머니의 시신이 실린 침대가 밀려 나왔다.

 

바퀴가 굴러가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지하 영안실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차가운 쇠창살 너머로 어머니의 침대가 실려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지유는 핏발 선 눈으로 그 문을 응시했다.

 

'절대 뺏기지 마라.'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이 환청처럼 귓전을 맴돌았다.

 

'그 악귀 같은 놈 손에…… 가게를 넘기면 안 돼…… 네 아버지를 죽인 놈들의 목줄이다…….'

 

지유의 떨리던 어깨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눈물로 얼룩진 뺨 위로, 형언할 수 없는 서늘한 기운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슬픔이 한계치를 넘어서자, 그 자리에 시퍼런 칼날 같은 증오와 각성이 솟구쳐 올랐다.

 

어머니를 죽인 것은 병이 아니었다.

 

과수원을 강탈하고, 아버지를 화병으로 죽게 만들고, 남은 김밥집마저 빼앗기 위해 위생과와 소방과를 앞세워 피를 말리고, 끝내 병원비로 목을 조르며 첩이 되라고 조롱했던 자.

 

강태석.

 

그리고 그 모든 비리의 씨앗을 뿌리고 서울로 영전해 간 성호석.

 

지유는 피 묻은 손으로 바닥을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하은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유를 쳐다보았다.

 

"지유야……?"

 

"하은아."

 

지유의 목소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낮고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 오열하던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엄마 모셔야 해. 가자."

 

4. 유품과 피 묻은 서류

 

남원의료원 지하 1층 영안실 한구석의 간이 안치실.

 

방부제 냄새와 차가운 냉기가 감도는 작은 방 철제 선반 위에, 간호사가 건네준 어머니의 마지막 유품이 담긴 낡은 비닐 주머니가 놓여 있었다.

 

지유가 며칠 전 야간 청소를 하며 어머니에게 갈아입혀 드렸던 낡은 면내의 한 벌, 그리고 지유의 손때가 묻은 털양말 한 켤레가 전부였다.

 

그리고 주머니 맨 밑바닥에, 피와 땀에 절어 누렇게 변색된 작은 보따리 하나가 들어 있었다.

 

어머니가 처음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 올 당시, 속옷 안쪽 허리춤에 옷핀으로 단단히 고정해 두었던 천 조각이었다.

 

지유는 떨리는 손으로 녹슨 옷핀을 뽑아냈다.

 

천을 한 겹 한 겹 벗겨내자, 기름종이에 겹겹이 싸인 두툼한 종이 뭉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뭐지……?"

 

하은이 숨을 죽이며 다가섰다.

 

종이는 낡을 대로 낡아 바스러질 듯 바스락거렸다.

 

맨 겉장에는 붉은 인주가 번진 글씨가 적혀 있었다.

 

'남원읍지구 토지 매각 및 지분 양도 이면계약서(南原邑地區 土地 賣却 및 持分 讓渡 裏面契約書)'.

 

작성 일자는 1968년 5월.

 

무려 30년 가까운 세월 전의 날짜였다.

 

지유는 굳은 손가락으로 첫 장을 넘겼다.

 

누렇게 바랜 갱지 위로 붓펜으로 정갈하게 눌러쓴 조항들이 어지럽게 펼쳐졌다.

 

'남원군 남원읍 동충리 및 하정리 일대 전답 4,500평에 관한 소유권 명의 신탁 및 개발 이익 분배 약정'.

 

그리고 문서 맨 마지막 장에 찍힌 세 사람의 이름과 붉은 인감도장이 지유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명의 신탁자: 한석규(韓錫奎).

 

공동 수탁 및 관리인: 강태석(姜泰錫).

 

그리고 입증 및 인허가 보증인: 성호석(成浩錫).

 

쿵.

 

지유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벼락이 내리쳤다.

 

손끝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왔다.

 

1991년의 환지 처분 비리가 전부가 아니었다.

 

두 가문의 악연은, 강태석과 성호석이라는 괴물들의 결탁은 이미 30년 전, 지유의 아버지 한석규가 남원의 젊은 지주였던 시절부터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서류에 적힌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남원 구도심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전, 강태석은 한석규의 토지를 관리해 주겠다며 접근했고, 당시 남원군청의 유력 공무원이었던 성호석은 관청의 인허가를 무기로 이 토지의 소유권을 차명으로 분할 이전하는 데 깊숙이 관여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제5조 특약.

 

'본 토지의 실수유권은 한석규에게 귀속되며, 관청의 도시계획 고시 후 지분 70%를 원소유자에게 무조건 반환한다. 위반 시 본 계약을 근거로 형사 처벌 및 전액 배상을 감수한다.'

 

이면계약서 뒤편에는 당시 주고받은 사설 약속어음 사본과, 성호석이 직접 관인을 날인해 준 측량 도면의 복사본까지 핀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강태석과 성호석은 30년 전부터 한석규의 땅을 담보로 자신들의 권력을 쌓아 올렸던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1991년, 성호석이 군수가 되고 강태석이 토건 회사의 거물이 되었을 때, 그들은 이 서류의 존재를 은폐하기 위해 한석규의 남은 과수원마저 도로 공공용지로 강제 수용하며 아버지를 파멸로 몰아넣었던 것이었다.

 

아버지는 이 계약서를 끝까지 품에 안고 홀로 외로운 법정 싸움을 벌이다 피를 토하고 쓰러졌고, 어머니는 남편의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이 서류를 목숨처럼 가슴에 품고 살아왔던 것이다.

 

"지유야…… 이거 성재환…… 재환이 아버지 이름 아니야?"

 

하은이 사색이 되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성호석.

 

지유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서울 신림동에서 흑청색 잉크로 엽서를 쓰며, 법복을 입고 내려와 모든 부패를 심판하겠다고 맹세했던 성재환.

 

'지유야, 조금만 더 버텨줘. 내 공부가 거의 끝나가.'

 

그의 절박했던 음성이 귓전을 울렸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지유의 집안을 30년에 걸쳐 도륙 낸 원흉의 몸통이었다.

 

강태석이라는 칼을 쥐고 휘두른 진짜 배후.

 

서류를 쥔 지유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배어 나왔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비극의 무게가 지유의 턱밑까지 차올랐다.

 

재환은 과연 알고 있을까.

 

자신이 단죄하겠다는 남원의 썩은 뿌리가,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가 파놓은 거대한 죄악의 무덤이라는 사실을.

 

그때, 영안실 복도 저편에서 육중한 구두 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5. 검은 그림자

 

뚜벅, 뚜벅, 뚜벅.

 

정적을 깨뜨리는 발소리는 불길할 정도로 규칙적이었다.

 

지유는 반사적으로 이면계약서를 가슴속 안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었다.

 

옷핀으로 단단히 여미고 겉옷 단추를 목 끝까지 채웠다.

 

영안실 입구의 유리문이 거칠게 밀리며,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장정 서넛이 안으로 들어섰다.

 

앞장선 사내는 한양토건 박진철 회장의 오른팔이자, 며칠 전 삼거리 김밥집의 통유리창을 박살 내고 붉은 페인트 낙서를 남겼던 그 조폭 우두머리였다.

 

사내의 눈빛은 피로와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의 뒤로 남원시청 비서실의 말단 계장 하나가 서류 가방을 든 채 쥐새끼처럼 눈치를 살피며 따라붙었다.

 

하은이 기겁하며 지유의 앞을 가로막았다.

 

"너…… 너희들 뭐야!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발을 들여!"

 

조폭 사내는 하은을 비웃듯 흘겨보더니, 거칠게 껌을 씹으며 지유에게 다가왔다.

 

"어이, 한지유 학생. 어머니가 새벽에 아주 편안하게 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시장님께서 특별히 위로의 뜻을 전하라 하셔서 말이지."

 

사내가 주머니에서 하얀 봉투 하나를 툭 던졌다.

 

봉투가 차가운 타일 바닥 위로 힘없이 떨어졌다.

 

'남원시장 강태석'이라는 관인이 찍힌 조의금 봉투였다.

 

지유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차갑게 굳은 얼굴, 핏기 하나 없는 입술, 그러나 그 눈빛만큼은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치워."

 

지유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낮았지만, 안치실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 만큼 서늘했다.

 

사내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이게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보네. 야, 계장. 서류 꺼내."

 

뒤에 서 있던 시청 계장이 마른침을 삼키며 가방에서 서류철을 꺼내 들었다.

 

'남원 구도심 관광특구 개발정비사업 상속 재산 처분 및 조기 이주 합의서'.

 

이미 고인이 된 지유 어머니의 명의와 지유의 이름이 나란히 인쇄되어 있는 공문서였다.

 

계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지유에게 말했다.

 

"저, 한지유 학생……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으니 이제 상속권자는 학생 혼자입니다. 여기 인감도장만 찍으면, 남원의료원에 밀린 중환자실 입원비와 오늘 장례식 비용 일체를 시장님께서 특별 장학 기금으로 전액 대납 처리해 주시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신축 상가 우선권도……."

 

"개소리 집어치워."

 

지유가 말을 자르며 계장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계장은 그 서슬 퍼런 눈빛에 질려 뒤로 반 걸음 물러섰다.

 

조폭 사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사내가 성큼 다가와 지유의 턱밑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계집애가 곱게 말할 때 처먹지, 끝까지 주둥이를 놀리네. 야, 네 애미 시신 저 냉동고에서 편하게 썩게 두고 싶냐?"

 

"뭐라고?!"

 

하은이 비명을 지르며 대들었지만, 뒤에 서 있던 다른 덩치가 하은의 어깨를 거칠게 밀쳐냈다.

 

하은이 벽에 부딪히며 주저앉았다.

 

지유의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지유는 피 묻은 손을 주먹 쥐며 사내의 눈을 한 치도 피하지 않고 쏘아보았다.

 

"손대지 마. 내 어머니 몸에 손끝 하나라도 댔다간, 네놈들 숨통을 내가 끊어놓을 테니까."

 

사내가 어이없다는 듯 헛바죽을 지었다.

 

"허, 이 년 보소? 기운이 아주 철철 넘치네. 그래, 어디 한번 버텨봐라. 시장님이 오늘 오전 10시까지 시청으로 이 서류 안 들고 오면, 장례고 뭐고 영안실부터 봉쇄하라고 하셨다. 네 애미 염도 못 하고 길바닥에 패개쳐지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기어 나와."

 

사내는 바닥에 침을 탁 뱉고는 뒤돌아섰다.

 

"가자. 냄새나는 시체 구덩이에 더 있어 봤자 재수만 옴붙지."

 

사내들이 낄낄거리며 안치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바닥에 팽개쳐진 하얀 조의금 봉투 위로 더러운 구두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하은이 울며 지유에게 기어 왔다.

 

"지유야…… 흑, 지유야 어떡해…… 저 악마 같은 놈들이 장례식까지 막겠대…… 민재는 연락도 안 되고…… 어떡해……."

 

지유는 바닥에 떨어진 강태석의 조의금 봉투를 굽어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발을 들어, 구두 굽으로 그 봉투를 짓밟았다.

 

뿌지직, 종이가 찢겨 나가며 하얀 가루처럼 바스러졌다.

 

6. 홀로 벼리는 칼날

 

지유는 품속에 손을 넣었다.

 

가슴팍 안쪽에서 단단하게 만져지는 30년 전의 이면계약서.

 

그리고 그 밑에 언제나처럼 품고 있던, 성재환의 학생증 증명사진.

 

사진 뒷면에 흑청색 잉크로 적혀 있던 그의 글씨.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지유의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입술을 너무 세게 깨문 탓이었다.

 

'재환아.'

 

마음속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얼굴을 떠올리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왔다.

 

그는 지금 신림동의 좁은 고시원 방에서, 자신을 구하겠다고 허벅지를 컴퍼스로 찔러가며 법서를 파고들고 있을 터였다.

 

자신의 아버지가 지유의 부모를 어떻게 짓밟았는지도 모른 채.

 

오직 지유와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순수한 신념 하나로 온몸을 불사르고 있을 재환.

 

지유는 품속에서 사진을 꺼내지 않았다.

 

꺼내어 보면,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려 그에게 살려달라고, 남원으로 제발 내려와 달라고 울부짖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가 내려온다면, 강태석과 성호석이 파놓은 이 거대한 진흙탕 속에서 재환마저 파멸하고 말 것이다.

 

재환은 법복을 입어야 했다.

 

그가 검사가 되어, 가장 높은 곳에서 합법의 칼자루를 쥐기 전까지는 이 지옥을 그에게 보여줄 수 없었다.

 

'엄마.'

 

지유는 뒤편의 차가운 철제 안치대를 돌아보았다.

 

하얀 광목천 아래 누워 있는 어머니의 형체.

 

평생을 남편의 억울함을 품고, 참기름 냄새 가득한 작은 김밥집에서 딸 하나만을 바라보며 버텨온 여인.

 

그 어머니가 마지막 숨을 거두며 남긴 말.

 

'절대 뺏기지 마라. 너는 살아야 한다. 꺾이지 마라.'

 

지유의 눈에서 마침내 마지막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나약한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자신의 유년과, 순수했던 첫사랑의 기억과, 세상에 대한 마지막 일말의 기대를 모두 불태워버리는 결별의 눈물이었다.

 

지유는 거칠게 소매로 눈물을 훔쳐냈다.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열아홉 살 여고생의 그것이 아니었다.

 

부모를 모두 잃고, 세상의 가장 밑바닥에서 피를 흘리며 칼을 쥐어 잡은 고독한 투사의 눈빛이었다.

 

"하은아."

 

지유가 단호하게 말했다.

 

"일어나."

 

하은이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지유를 올려다보았다.

 

"지유야……?"

 

"엄마 장례 치를 거야. 저놈들이 막든, 경찰이 오든, 시장이 오든 내 손으로 엄마 마지막 길 배웅할 거야."

 

지유는 벽에 걸린 거울을 보며 흐트러진 머리칼을 단정하게 쓸어 넘겼다.

 

피 묻은 앞치마를 벗어 개어 두고, 단정한 검은색 카디건의 단추를 채웠다.

 

그리고 품속의 이면계약서를 다시 한번 손으로 꾹 눌렀다.

 

강태석, 그리고 성호석.

 

두 괴물이 쌓아 올린 남원의 부패한 성채를 무너뜨릴 뇌관이 지금 지유의 심장 위에 얹혀 있었다.

 

지유는 안치실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창밖으로 짙푸른 새벽 여명이 걷히고, 피처럼 붉은 아침 햇살이 남원의 하늘을 찢으며 번져가고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 위에 세워질, 가장 처절하고 시퍼런 복수의 서막이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