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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30화

민재의 비밀 서신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신림동의 초인종과 절룩이는 발소리

 

관악산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삭풍이 신림동 9동 비탈길을 매섭게 훑고 지나갔다.

 

밤사이 내리던 빗줄기는 멎었으나, 가파른 골목길 바닥에는 살얼음이 엷게 끼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서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307호의 낡은 철문 틈새로 스며든 한기가 방바닥의 온기를 사정없이 갉아먹고 있었다.

 

성재환(成宰桓)은 핏자국이 말라붙은 오른쪽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짓누르며 책상 앞에 꼿꼿이 앉아 있었다.

 

컴퍼스 바늘로 찍어 누른 자리는 불로 지진 듯 욱신거렸지만, 덕분에 흐릿해지려던 의식은 서릿발처럼 곤두서 있었다.

 

책상 위에는 어제 성북동에서 가져온 남원시 구도심 개발사업 특별감사 결과 보고서와 비자금 계좌 내역 사본이 펼쳐져 있었다.

 

그 위로 백부의 각인 만년필에서 흘러나온 흑청색 잉크가 형법 조항들과 얽혀 빼곡한 그물망을 치고 있었다.

 

그때였다.

 

고시원 1층 현관문이 둔탁하게 열리는 소리에 이어,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딛는 불규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터벅, 질질.

 

터벅, 질질.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절며 무언가에 쫓기듯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발소리였다.

 

발소리는 3층 복도를 따라 똑바로 다가와 307호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재환의 손이 반사적으로 책상 밑에 숨겨둔 묵직한 문진을 쥐었다.

 

성호석의 수족이나 강태석(姜泰錫)이 보낸 자들일지도 모른다는 경계심이 척추를 타고 번졌다.

 

이윽고 조심스럽고도 떨리는 손길로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똑, 똑똑.

 

똑.

 

규칙적인 신호였다.

 

남원 시절, 춘향관 뒤란 오솔길이나 요천 둑길에서 친구들끼리 장난처럼 맞추었던 그 박자였다.

 

재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누구냐."

 

문 너머에서 거친 숨소리와 함께 익숙하고도 잔뜩 쉬어버린 음성이 새어 나왔다.

 

"재환아…… 나다. 민재다."

 

2. 피투성이 몰골과 부서진 안경

 

재환은 벼락을 맞은 듯 자리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철컥, 빗장을 풀고 문을 활짝 젖히자 복도의 희미한 백열등 불빛 아래 한 사내가 위태롭게 서 있었다.

 

최민재(崔民宰)였다.

 

그의 몰골을 확인한 재환의 숨이 일순간 멎었다.

 

민재의 얼굴은 온전한 곳을 찾기 힘들 정도로 참혹했다.

 

오른쪽 눈두덩은 시퍼렇게 피멍이 들어 반쯤 감겨 있었고, 찢어진 입술가에는 마른 핏자국이 딱지처럼 엉겨 붙어 있었다.

 

반쪽 알이 산산조각 나 테이프로 칭칭 감아놓은 뿔테 안경 너머로 드러난 눈동자만이 핏발을 세운 채 흔들리고 있었다.

 

더욱이 민재의 오른쪽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고, 때 묻은 베이지색 코트 깃은 갈기갈기 찢겨 피와 흙먼지에 절어 있었다.

 

"민재야……! 너 몰골이 이게 대체……."

 

재환이 굳어버린 혀로 간신히 이름을 부르며 민재의 팔을 부축했다.

 

문설주를 붙잡고 간신히 버티던 민재는 재환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다리의 힘이 완전히 풀린 듯 앞으로 털썩 쓰러졌다.

 

재환은 민재의 육중한 몸을 온 힘으로 받아내며 방 안으로 끌어들였다.

 

"어이쿠, 야…… 살살 해라. 갈비뼈가 서너 대 나간 모양이다……."

 

민재가 잇새로 신음을 흘리며 벽에 등을 기댔다.

 

재환은 황급히 문을 걸어 잠그고 빗장을 질렀다.

 

세 평 좁은 방 안에 피비린내와 땀 냄새, 그리고 남원의 찬 바람 냄새가 훅 끼쳐왔다.

 

재환은 떨리는 손으로 물을 따라 민재의 입술에 대주었다.

 

민재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사람처럼 덜덜 떨리는 손으로 컵을 쥐고 단숨에 들이켰다.

 

물을 반쯤 흘려가며 마신 민재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재환을 올려다보았다.

 

"너…… 살이 왜 이렇게 쪽 빠졌냐. 뼈다귀만 남았네, 성재환이."

 

그 참혹한 몰골로도 민재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헛기침을 삼켰다.

 

"그딴 농담 할 때냐! 몸이 이 지경이 되도록 대체 무슨 짓을 당한 거야? 공중전화에서 들렸던 그 쇠파이프 소리가……."

 

재환의 목소리가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피 끓는 자괴감과 분노가 용암처럼 치밀어 올랐다.

 

"그래…… 그놈들이다. 한양토건 개새끼들."

 

민재가 마른침을 삼키며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나 부러진 쇄골 때문에 팔이 올라가지 않자,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재환아…… 내 안주머니…… 안주머니에 손 좀 넣어봐라. 어서."

 

3. 품속에서 꺼낸 피 묻은 서류

 

재환은 무릎을 꿇고 민재의 해어진 코트 안주머니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은 것은 체온으로 눅눅해진 두툼한 서류 뭉치와 단단한 플라스틱 테이프였다.

 

조심스럽게 끄집어내자, 피 묻은 비닐 지퍼백에 꽁꽁 싸인 물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피가 모서리에 스며든 종이 뭉치, 소형 마이크로 카세트테이프 하나, 그리고 낯익은 문방구 원고지 몇 장이었다.

 

"신문사에서…… 쫓겨났다."

 

민재가 벽에 머리를 기대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 빌어먹을 남원일보 사주 놈이 강태석의 돈에 눈이 멀어서…… 내가 쓰던 비리 폭로 기사를 통째로 파쇄기에 처넣더구나. 항의했더니 그 자리에서 해고 통보를 내렸어. 그리고…… 신문사 문을 나서자마자 봉고차 두 대가 따라붙었다."

 

민재의 턱이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너한테 전화 걸던 그 순간에…… 각목이랑 쇠파이프가 날아들었어. 지유가 아니었으면 난 그 자리에서 대가리가 깨져 요천 바닥에 가라앉았을 거다. 지유가…… 그 조그만 애가 온몸으로 날 감싸고 야채 트럭 상인들을 불러 모으지 않았다면 말이다."

 

재환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졌다.

 

'지유가 날 감쌌다.'

 

그 한마디가 재환의 심장에 비수처럼 꽂혔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던 지유의 떨리던 숨소리, 애써 담담한 척 남원은 평화롭다고 거짓말을 하던 그 가련한 음성이 눈앞의 참상과 겹쳐졌다.

 

지유는 피투성이가 된 친구를 안고 쇠파이프를 든 깡패들의 폭력 한가운데 서 있었던 것이다.

 

"지유는…… 지유는 다치지 않았냐? 무사한 거냐?"

 

재환이 민재의 어깨를 움켜쥐며 울부짖듯 물었다.

 

민재는 고통을 참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몸뚱이는…… 어떻게든 버텼다. 하지만 마음은…… 이미 뼈마디까지 다 으스러졌어, 재환아."

 

민재의 눈시울이 붉게 젖어 들었다.

 

"어젯밤에 남원의료원 응급실에 실려 가서 깁스를 하자마자, 야간 통행금지도 없는 새벽 찻길을 달려 서울로 도망쳐 왔다. 남원 시내 모든 병원과 버스터미널에 강태석의 용역 놈들이 깔려 있었거든. 내가 잡히면 이 서류들도 끝장이고…… 남원의 진실을 너한테 전할 놈이 세상에 아무도 남지 않으니까."

 

민재는 피 묻은 비닐백을 재환의 손에 쥐여주었다.

 

"열어봐라. 내가 신문사 캐비닛에서 목숨 걸고 필사한 강태석 일파의 범죄 일지와…… 지유가 너한테 부치지 못하고 숨겨왔던 진짜 현실이다."

 

4. 지유의 침묵이 남긴 상흔

 

재환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비닐백을 열었다.

 

지퍼를 열자 익숙한 종이 냄새 사이로 쌉싸름한 묵향과 지유의 체취가 희미하게 번져 나왔다.

 

맨 위에 놓인 것은 최민재의 비밀 취재 수첩과 한양토건 박진철 회장의 뇌물 거래 녹음테이프였다.

 

그리고 그 밑에 깔려 있던 단정한 편지 봉투 서너 장.

 

봉투 겉면에는 흑청색 잉크로 '서울 성재환 앞'이라고 적혀 있었으나, 우표도, 소인도 찍혀 있지 않았다.

 

지유가 김밥집 단칸방 양철 상자 속에 차곡차곡 모아두기만 하고 차마 부치지 못했던, 침묵의 편지들이었다.

 

재환은 숨을 죽인 채 첫 번째 편지를 펼쳤다.

 

반듯한 지유의 글씨체가 흑청색 선을 그리며 눈앞에 펼쳐졌다.

 

'재환아, 오늘은 비가 많이 내렸어.

 

가게 앞 처마 밑에 서서 네 생각을 했어.

 

너는 신림동에서 끼니는 거르지 않고 공부하고 있는지, 옷은 따뜻하게 입고 다니는지 늘 걱정이야.

 

어머니는 조금 편찮으시지만 의사 선생님께서 곧 차도를 보일 거라고 하셨어.

 

가게 일도 하은이랑 이웃분들이 많이 도와주셔서 아무 문제 없어.

 

그러니 재환아, 남원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말고 오직 너의 시험에만 전념하렴.

 

나는 네가 준 약속 하나만으로도 평생을 버틸 수 있으니까.'

 

거짓말이었다.

 

모든 문장이 처절하고 가슴 아픈 거짓말이었다.

 

편지지의 모서리는 눈물 자국으로 누렇게 번져 울퉁불퉁하게 말라붙어 있었다.

 

재환의 시야가 걷잡을 수 없이 흐려졌다.

 

눈물 한 방울이 편지지 위로 툭 떨어져 지유의 이름을 적신 잉크를 푸르게 번지게 만들었다.

 

"병원은…… 어머니 병세는 대체 어떠신 거냐?"

 

재환이 짓이겨진 목소리로 물었다.

 

민재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 만성 신부전에 급성 심부전까지 겹쳐서 남원의료원 중환자실에 계신다. 하루라도 투석기를 돌리지 않으면 당장 숨이 넘어가는 상태야."

 

민재의 목소리에 굵은 물기가 배어 나왔다.

 

"그 병원비를 대겠다고…… 지유가 대입 모의 원서를 교무실 복도에서 제 손으로 찢어발겼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낮에는 김밥을 말고 밤에는 병원 지하 세탁실에서 피고름 묻은 환자복을 빨며 락스 물에 손이 다 짓무르도록 일하고 있어. 그 조그만 손이…… 겨울 동상에 걸려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도 말이다!"

 

쿵.

 

재환의 주먹이 책상을 내리찍었다.

 

서재가 울리고 만년필이 굴러떨어졌다.

 

'대입 원서를 찢었다고?'

 

남원에서 함께 요천 둑길을 걸으며, 서울로 함께 올라가 대학 교정을 거닐자던 그 맑은 꿈을 제 손으로 찢어발겼다는 말인가.

 

자신이 신림동 골방에서 법조문을 외우며 고상하게 미래를 준비하는 동안, 지유는 병원 지하 시체실 옆 세탁장에서 피 묻은 시트를 빨며 하루하루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5. 폭로되는 남원의 지옥도

 

민재는 숨이 가쁜 듯 가슴을 움켜쥐며 말을 이었다.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남원의 현실은 재환이 상상했던 그 어떤 지옥보다도 잔혹했다.

 

"강태석 그 악마 새끼가…… 지유를 가만두지 않았다."

 

"강태석이…… 지유에게 무슨 짓을 했어?"

 

재환의 눈에서 핏발이 솟구쳤다.

 

살기가 서린 음성에 민재마저 순간 섬뜩한 한기를 느낄 정도였다.

 

"처음에는 위생과를 보냈다. 공설 방앗간에서 짜온 참기름병을 불량식품이라며 바닥에 내던져 깨부수고, 영업정지 15일짜리 시정명령서를 발부했지. 그다음 날엔 소방과를 보냈어. 5일 안에 수백만 원짜리 금속 배관이랑 방염 석고보드를 안 깔면 강제 폐쇄하겠다고 협박장을 들이밀더군."

 

민재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목공소 윤 씨 아저씨랑 우리가 밤을 새워가며 설비를 뜯어고쳐 적합 판정을 받아내니까…… 이번엔 삼거리 일대 삼만 평을 관광특구 개발정비구역으로 묶어버렸다. 상인회 간부 놈들을 돈으로 매수해서 지유 김밥집을 동네 발전을 가로막는 역적 놈으로 몰아세우고, 상인들을 선동해 불매운동을 벌였어."

 

재환의 이가 뿌드득 갈렸다.

 

합법의 탈을 쓴 관권의 폭력.

 

공권력을 사유화하여 한 소녀의 삶의 터전을 말려 죽이려 했던 그 집요하고 악랄한 수법들이 낱낱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재환아."

 

민재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상인들이 계약서의 사기 조항을 알고 동의서를 찢어발기자…… 강태석은 한양토건 조폭 깡패들을 풀었다. 심야에 복면을 쓴 놈들이 쇠파이프를 들고 들이닥쳐서 김밥집 통유리창을 산산조각 내고, 붉은 페인트로 '다음은 네년 목이다'라고 벽에 도배를 해놓고 도망쳤어."

 

"……!"

 

"신고를 받고 출동한 중앙파출소 경찰 놈들은 현장을 보존하기는커녕, 어린 기집애가 고집을 피워 화를 자초했다며 오히려 지유를 윽박지르고 사건을 덮으려 했다. 경찰서, 시청, 토건 깡패들이 전부 한통속이 되어 지유의 숨통을 조이고 있단 말이다!"

 

재환의 전신이 분노로 경련하듯 떨렸다.

 

눈앞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남원의 모든 법과 질서는 이미 썩어 문드러져 조폭의 몽둥이와 다를 바 없었다.

 

그 거대한 폭력의 아가리 앞에서, 지유는 홀로 서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엊그제 새벽엔……."

 

민재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강태석이 직접 관용차를 타고 김밥집으로 찾아왔다. 박스 테이프로 기워놓은 그 깨진 유리창 문을 열고 들어와서…… 요천 변 신축 상가 1층 점포 분양권과 어머니 병원비 전액을 대줄 테니, 제 곁으로 들어오라고…… 첩년이 되라고 지유에게 악마의 제안을 던졌다."

 

6. 깨진 잉크병과 불굴의 고백

 

'첩년이 되라고?'

 

재환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거대하게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살인 충동이 온몸의 혈관을 타고 폭주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뚝뚝 떨어졌지만, 재환은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민재를 응시했다.

 

그 눈빛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지옥의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온 복수의 화신과도 같았다.

 

"지유는…… 지유는 뭐라고 했어."

 

재환의 목소리는 기이할 정도로 낮고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 고요함 뒤에는 언제라도 남원 시내를 통째로 불태워버릴 폭풍이 도사리고 있었다.

 

민재는 피 묻은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울먹였다.

 

"지유가…… 그 더러운 제안서를 면전에서 내던지며 소리쳤다. '내 마음은 이미 남원에 남은 것이 아니라, 정의를 세우기 위해 떠난 이에게 가 있다'고…… 성재환 네 이름을 그 악마의 눈앞에 똑똑히 들이댔단 말이다!"

 

재환의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정의를 세우기 위해 떠난 이.'

 

그 절체절명의 공포와 억압 속에서도, 지유는 강태석의 권력 앞에 무릎 꿇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무기 삼아 맞섰던 것이다.

 

"그 말을 들은 강태석이 미친놈처럼 날뛰었어."

 

민재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말을 이었다.

 

"네 이름을 듣자마자 강태석이 눈이 뒤집혀서…… 조리대 위에 놓여 있던 유리병을 집어 바닥에 내던져 깨부쉈다. 네가 선물했던 그 흑청색 잉크병…… 남원여고 앞에서 너를 생각하며 샀다던 그 잉크병이 산산조각 나면서, 지유의 하얀 앞치마와 바닥이 온통 검푸른 피처럼 물들어버렸어."

 

재환의 시선이 책상 위의 만년필로 향했다.

 

지금 만년필 닙에 머금어져 있는 그 푸른 잉크.

 

그것이 바로 지유의 앞치마를 적시고 남원 김밥집 바닥에 낭자하게 흩뿌려진 그 눈물의 파편이었던 것이다.

 

"강태석이 떠나면서 으름장을 놓았다. 오늘 밤 안으로 김밥집을 강제 철거하고, 남원의료원 중환자실에 있는 지유 어머니의 산소호흡기를 떼서 길바닥에 내팽개쳐 버리겠다고…… 지유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겠다고 선언했어. 재환아, 지유가 지금 죽어가고 있다! 남원이 지옥으로 변했단 말이다!"

 

민재가 바닥에 엎드려 통곡했다.

 

갈비뼈의 고통도 잊은 채, 피멍 든 이마를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찧으며 절규했다.

 

"내가 지켜주겠다고 했는데…… 재환이 너 올 때까지 든든한 오작교가 되어주겠다고 맹세했는데…… 난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힘없는 지방 찌라시 수습기자 따위는 조폭들의 각목 하나도 막아내지 못했단 말이다!"

 

7. 무너진 제방과 피 묻은 서약

 

방 안에는 오직 민재의 거친 오열과 창문을 흔드는 삭풍 소리만이 가득했다.

 

재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눈물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든 슬픔과 죄책감은 극한의 분노 속에서 차갑게 응고되어, 시퍼렇게 날이 선 단검으로 변해 있었다.

 

재환은 바닥에 쓰러진 민재를 부축해 침대 위에 눕혔다.

 

그리고 책상 서랍에서 구급약 상자를 꺼내 민재의 찢어진 이마와 뺨에 소독약을 바르고 거즈를 붙여주었다.

 

"재환아…… 당장 남원으로 내려가자. 지금 내려가지 않으면 지유가 정말 죽는다……."

 

민재가 떨리는 손으로 재환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재환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동자는 얼어붙은 호수처럼 고요했다.

 

"지금 내가 내려가면, 무엇을 할 수 있지?"

 

재환의 나직한 반문에 민재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너를 이렇게 만든 깡패들을 찾아가 주먹질이라도 할까? 지유 어머니를 쫓아내려는 남원의료원 원장실을 찾아가 무릎이라도 꿇을까? 아니면 시청 시장실로 쳐들어가 강태석의 멱살을 잡을까?"

 

재환의 음성에 서늘한 이성이 깃들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공무집행방해와 폭행죄로 쇠고랑을 차고 남원경찰서 유치장에 갇힐 뿐이다. 지유를 지키기는커녕, 강태석의 발밑에서 개처럼 짓밟혀 흔적도 없이 지워질 뿐이야."

 

"그럼…… 그럼 이대로 지유를 보고만 있겠다는 거냐?"

 

민재가 분통을 터뜨리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재환은 민재의 어깨를 지그시 눌러 앉혔다.

 

"보고만 있지 않아."

 

재환은 품속에서 어제 성북동에서 가져온 서류를 꺼내 민재의 눈앞에 펼쳐 보였다.

 

'남원시 구도심 개발사업 특별감사 결과 보고서 및 비자금 리스트 - 성호석 친필 원본.'

 

민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자로서 수없이 찾아 헤매던, 관급 공사 담합과 뇌물 상납의 핵심 장부였다.

 

"이건…… 성 시장의……?"

 

"그래. 내 아버지가 남원에서 쫓겨나면서 강태석의 목을 베기 위해 숨겨두었던 독화살이다."

 

재환은 민재가 가져온 녹음테이프와 비밀 취재 수첩, 그리고 성호석의 내사 문건을 나란히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퍼즐의 마지막 조각들이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강태석은 남원의 왕이 아니다. 그놈은 그저 중앙 정치 깡패들의 돈세탁을 도맡아 온 일개 토건 양아치에 불과해."

 

재환의 손가락이 서류 위의 이름을 가리켰다.

 

"직권남용, 특가법상 뇌물, 업무방해교사,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 위반. 이것들을 한데 엮어 검사의 이름으로 공소장을 쓰는 순간, 강태석뿐만 아니라 그 뒤를 봐주는 남원경찰서장과 시청 간부들까지 모조리 사형대에 올릴 수 있다."

 

8. 사법의 칼날을 쥔 자

 

민재는 숨을 헐떡이며 재환을 올려다보았다.

 

단칸방 벽면을 가득 채운 법리 분석도와 남원시 지적도, 그리고 책상 위에 펼쳐진 방대한 법서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성재환은 단순히 책상물림 고시생으로 세월을 보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남원 전체를 집어삼킨 거대한 악의 카르텔을 단죄할 사법의 전쟁을 홀로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남은 시간은 30일이다."

 

재환이 시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2차 시험을 치르고, 합격증을 쥐는 그날…… 나는 검사로서 남원에 내려간다."

 

"하지만 30일은 너무 길다, 재환아! 지유는 당장 오늘 밤을 버티지 못할지도 몰라!"

 

민재가 절박하게 외쳤다.

 

재환은 품속에서 백부의 각인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서랍 깊숙한 곳에서 정갈한 백지 한 장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렸다.

 

"지유는 무너지지 않아."

 

재환의 목소리에는 지유를 향한 절대적인 신뢰가 서려 있었다.

 

"지유는 강태석의 면전에서 내 이름을 부르며 버텨낸 아이다. 그 아이가 버티고 있는 한, 나 역시 단 한순간도 흔들릴 수 없어."

 

재환은 만년필을 쥐고 지유에게 보낼 서신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잉크통에 남은 마지막 흑청색 잉크가 종이 위로 스며들며 서슬 퍼런 글자를 새겼다.

 

'지유에게.

 

민재를 통해 네가 겪은 모든 지옥을 전해 들었다.

 

너의 무릎 흉터, 너의 깨진 유리창, 그리고 네 앞치마를 물들인 흑청색 눈물을 내 가슴속에 뼈저리게 새겼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버텨다오.

 

나는 부친의 꼭두각시가 되기를 거부했고, 이 썩은 세상을 법으로 단죄할 칼자루를 손에 쥐었다.

 

30일 뒤, 나는 법복을 입고 검사가 되어 남원으로 돌아간다.

 

네 어머니의 병원비를 빼앗고, 너의 일상을 파괴하며, 아버지의 과수원을 훔쳐 간 강태석과 성호석, 그리고 그 뒤에 숨은 모든 부패 카르텔을 내 손으로 법정에 세워 단죄할 것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겠다던 그 맹세는 결코 거짓이 아니다.

 

내가 너의 곁으로 돌아갈 때까지, 부디 살아만 있어 다오.

 

너의 재환.'

 

재환은 편지를 정갈하게 접어 봉투에 넣고, 자신의 학생증 증명사진 뒷면에 적었던 그 글귀를 다시 한번 되새겼다.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그는 봉투를 민재의 손에 쥐여주었다.

 

"민재야, 부탁한다. 오늘 밤 첫 기차로 다시 남원으로 내려가 다오."

 

"재환아……."

 

"지유에게 이 편지를 전해줘. 그리고 하은이와 함께 지유의 곁을 지켜다오. 어머니의 투석비는 내가 어떻게든 마련해서 오늘 오후 전신환으로 병원에 부치겠다."

 

재환의 눈빛에 비장한 결의가 타올랐다.

 

"성호석의 비자금 내사 문건을 일부 사본으로 떠서 남원경찰서장과 강태석의 비서실에 익명으로 배달해라. '성재환이 모든 비리 장부를 쥐고 검찰 수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경고장을 던지는 거야. 그놈들은 두려움 때문에 당장 지유의 가게를 포클레인으로 밀어버리지 못할 것이다."

 

9. 결전의 30일을 향하여

 

민재는 편지 봉투를 품속 깊숙이 갈무리했다.

 

재환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결기와 이성적인 지략에, 민재는 가슴속에 응어리졌던 절망감이 서서히 불꽃으로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알았다……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지유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막아내마."

 

민재가 부러진 몸을 일으키며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환은 자신의 두터운 겨울 외투를 벗어 민재의 어깨에 둘러주고, 지갑에 있던 전 재산을 털어 민재의 손에 쥐여주었다.

 

"치료부터 받고 내려가라. 조심해야 한다."

 

"너도…… 밥 굶지 말고, 꼭 합격해라. 남원에서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민재는 절뚝이는 다리로 307호 문을 나섰다.

 

복도 끝으로 멀어지는 민재의 발소리를 들으며, 재환은 굳게 문을 걸어 잠갔다.

 

방 안에는 다시 정적만이 감돌았다.

 

재환은 책상 앞으로 돌아왔다.

 

만년필 촉에 묻어 있던 마지막 흑청색 잉크는 이제 완전히 말라 있었다.

 

더 이상 쓸 수 있는 지유의 잉크는 없었다.

 

하지만 재환의 가슴속에는 그 어떤 잉크보다도 붉고 뜨거운 복수의 피가 들끓고 있었다.

 

재환은 책상 서랍에서 날카로운 제도용 컴퍼스를 꺼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이미 상처로 얼룩진 오른쪽 허벅지의 살점을 다시 한번 깊숙이 찔러 넣었다.

 

욱신거리는 맹렬한 고통이 척추를 타고 솟구쳤다.

 

"큭……."

 

신음을 삼키며 재환은 형법 주석서를 펼쳤다.

 

'지유야, 조금만 기다려라.'

 

피가 배어 나오는 허벅지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재환은 광기 어린 눈빛으로 법조문을 백지 위에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벽면에 걸린 달력의 숫자는 정확히 30일을 가리키고 있었다.

 

법복을 입고 남원의 지옥을 심판할 자, 성재환의 가장 처절하고도 고독한 마지막 질주가 새벽 여명 속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