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가는 시간
1. 빗속의 계단과 서늘한 결심
관악산 자락을 적시던 밤비는 새벽이 다 되도록 그칠 줄을 몰랐다.
고시원 좁은 복도에 켜진 백열전구가 미약하게 깜빡거리며 시멘트 벽면에 눅눅한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계단을 딛는 성재환(成宰桓)의 발소리는 유난히 무거웠다.
바짓단은 젖어 축축했고, 백조당 인쇄소 앞 녹색 공중전화 부스에서 들려오던 지유의 마지막 비명과 거친 쇠붙이 소리가 귓가를 송곳처럼 후벼 파고 있었다.
'조금만 더 버텨줘. 내 공부가 거의 끝나가.'
그렇게 외치며 쥐어뜯듯 부여잡았던 수화기는 비정한 기계음만을 남긴 채 끊어졌었다.
재환은 흠뻑 젖은 손바닥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 살점을 파고들어 비릿한 피가 배어 나왔지만, 통증 따위는 가슴을 찢어발기는 무력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307호 삐걱거리는 철문을 열고 들어서자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묵은 책 냄새가 훅 끼쳐왔다.
세 평 남짓한 단칸방.
책장 앞쪽에 가지런히 꽂힌 7급 검찰사무직 교재들 뒤로, 성재환이 밤마다 목숨을 걸고 파고들었던 형법과 형사소송법, 그리고 헌법 주석서들이 빼곡하게 숨겨져 있었다.
벽면에는 붉은 실과 압정으로 엮인 남원시 정밀 지적도와 신문 스크랩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형법 제123조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 위반 뇌물죄, 그리고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 위반.
성호석(成浩錫)과 강태석(姜泰錫).
남원을 집어삼키고 어린 소녀의 목을 조르고 있는 두 거대한 권력의 이름이 붉은 펜으로 선명히 적혀 있었다.
재환은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책상 앞에 털썩 앉았다.
어제저녁 도착했던 제37회 사법시험 제1차 수석 합격 통지서가 차가운 형광등 불빛 아래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전국 수석.'
그따위 영광은 지유의 찢겨진 무릎 흉터 하나, 떨리는 숨소리 하나도 지켜내지 못하는 종이쪽지에 불과했다.
남은 시간은 고작 30일.
2차 시험을 치르고 검사로서의 전결권을 손에 쥐기 전까지, 자신은 남원으로 내려갈 수조차 없는 나약한 수험생에 불과했다.
그때, 좁은 방구석 낡은 다이얼 전화기가 요란한 경종을 울리며 울리기 시작했다.
새벽 다섯 시.
이 시간에 이 비선 번호로 전화를 걸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2. 성북동에서 걸려 온 전화
재환은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수화기를 들었다.
귀에 수화기를 대자마자, 낮고 메마른 음성이 건너왔다.
"일어났느냐."
성호석이었다.
내무부 기획조정실장이라는 막강한 권력의 자리에 오른 뒤로 그의 목소리는 남원에 있을 때보다 한층 더 차갑고 건조해져 있었다.
"……예, 아버지."
재환은 목소리를 낮추며 벽면에 걸린 지적도로 시선을 던졌다.
"오늘 아침 여덟 시까지 성북동 집으로 들어와라. 운전기사를 신림동 입구로 보냈다."
용건만을 통보하는 냉혹한 어조였다.
재환의 미간이 좁혀졌다.
"2차 시험이 한 달 남았습니다. 지금은 한 시가 급합니다."
"그 잘난 7급 시험 따위에 매달리는 꼴을 보려고 부른 게 아니다."
성호석의 음성에 서늘한 비웃음이 어렸다.
"법무부에서 명단이 넘어왔더구나. 1차 전국 수석 합격자 성재환. 네놈이 내 눈을 속이고 신림동 골방에 틀어박혀 무엇을 팠는지, 내 모를 줄 알았더냐?"
재환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자신이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버지는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다.
내무부의 정보망과 사법부 인사 라인을 쥐고 흔드는 그에게 법무부의 수석 합격자 명단을 확인하는 일 따위는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웠을 터였다.
침묵이 흐르자 수화기 너머에서 차가운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숨길 필요 없다. 네놈이 칼을 갈고 있었다는 것쯤은 진작에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니 오거라. 네놈이 그토록 쥐고 싶어 하는 칼날이 얼마나 무디고 위험한지, 오늘 내 눈앞에서 똑똑히 확인시켜 줄 테니."
딸깍.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 통화가 끊겼다.
재환은 끊어진 수화기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하게 배어 나왔다.
아버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가문의 뜻을 거스르고 사법시험이라는 칼자루를 쥐려 한다는 것을.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분노나 경악이 아닌, 모든 것을 발밑에 두고 내려다보는 권력자의 기괴한 여유가 묻어 있었다.
재환은 옷걸이에 걸려 있던 단정한 남색 재킷을 꺼내 입었다.
안주머니 깊숙한 곳에 지유가 남겨주었던 자전거 스케치 조각과 백부의 검은 옻칠 만년필을 조심스럽게 갈무리했다.
캡 상단에 금빛으로 각인된 라틴어 법언이 손끝에 닿았다.
'Fiat justitia, ruat caelum.'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재환은 입술을 짓씹으며 방문을 열고 어둠 속으로 걸어 나갔다.
3. 높은 담장 너머의 성북동 사저
성북동 언덕길 꼭대기에 자리한 2층 대저택은 남원의 군수 관사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웅장하고 위압적이었다.
높다란 붉은 벽돌 담장 위로는 날카로운 쇠창살과 방범 철조망이 촘촘히 얽혀 있었고, 육중한 철문 앞에는 경비 인력이 매서운 눈초리로 오가는 차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시커먼 관용차가 자갈 깔린 안마당으로 들어서자, 잘 다듬어진 향나무와 적송들이 빗물을 머금은 채 음산한 푸른빛을 뿜어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짙은 마호가니 원목 냄새와 오래된 서류 냄새, 그리고 독한 시가 연기 냄새가 뒤섞여 재환의 코를 찔렀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실장님께서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남원에서부터 성호석을 그림자처럼 수행하던 비서실장이 고개를 숙이며 2층 계단을 가리켰다.
비서실장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재환은 말없이 계단을 올랐다.
삐걱거리는 나뭇결의 울림이 마치 거대한 짐승의 뱃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불길함을 자아냈다.
2층 맨 안쪽, 육중한 참나무 문 앞턱에 섰다.
재환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라."
낮게 깔리는 음성과 함께 문을 열자, 사방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방대한 법률 서적과 행정 문서로 가득 찬 거대한 서재가 드러났다.
창밖으로 서울 시내의 흐린 회색빛 스카이라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창가 앞, 성호석이 고급 가죽 안락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앉아 있었다.
그의 백발은 남원에 있을 때보다 더 희끗희끗해져 있었으나,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눈빛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칼날처럼 번뜩였다.
책상 위에는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과 함께, 붉은색 결재 도장이 찍힌 두툼한 황갈색 서류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앉거라."
성호석이 턱짓으로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재환은 꼿꼿한 자세로 걸어가 의자 끝에 걸터앉았다.
두 부자 사이에 흐르는 침묵은 얼음장보다 차가웠다.
4. 두 권력자의 대립과 비웃음
성호석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축인 뒤, 재환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얼굴이 제법 표독해졌구나. 신림동 구석바지에서 컵밥이나 주워 먹으며 법조문을 외우더니, 눈빛에 제법 독기가 올랐어."
"부르신 용건이 무엇입니까."
재환이 감정을 억누른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성호석은 픽 하고 차가운 실소를 터뜨렸다.
"용건이라. 사법시험 1차 전국 수석 합격자 성재환. 최연소 기록이더구나. 대견하다고 머리라도 쓰다듬어 줄 알았더냐?"
"칭찬 따위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렇겠지. 네놈이 그 좁은 골방에서 허벅지를 찔러가며 밤을 새운 이유가 가문을 빛내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쯤은 내가 너무나 잘 아니까."
성호석의 눈빛이 일순간 매섭게 가라앉았다.
그는 책상 서랍에서 만년필을 꺼내 손가락 사이로 빙글 돌렸다.
재환의 가슴속에 품겨 있는 만년필과 흡사한 묵직한 독일제 만년필이었다.
"검사가 되겠다는 거겠지. 법복을 입고, 기소독점권을 쥐고, 당당하게 남원으로 내려가 내 목을 치고 강태석의 목을 비틀겠다는 거 아니더냐? 그 어린 기집애와 그 애비의 원수를 갚아주겠다며 말이다."
재환의 턱 근육이 굳게 수축했다.
아버지는 지유의 존재까지도, 자신의 가슴속에 도사린 복수심의 실체까지도 모두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것이 죄라면…… 죄를 짓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재환의 입에서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1991년, 요천 변 비옥한 과수원을 강제로 빼앗아 도로 용지로 헐값 수용하고, 친인척 명의로 노른자위 땅을 단독 환지 처분한 그 추악한 도둑질. 아버지가 강태석과 함께 저지른 그 죄악을 덮기 위해 남원의 수많은 사람들을 피눈물 흘리게 한 대가는 법으로 치러야 합니다."
성호석의 표정에는 놀라움도, 분노도 없었다.
오히려 턱을 괴며 재환을 한심하다는 듯 응시할 뿐이었다.
"도둑질이라. 헐값 수용이라."
성호석이 혀를 찼다.
"너는 아직도 세상이 법전 안에 적힌 활자 몇 줄로 굴러간다고 믿는 게로구나. 그 어린 계집애의 눈물과 억울함에 눈이 멀어, 정작 그 바닥 밑바닥에 도사린 진짜 권력의 아가리가 어떻게 움직였는지는 손톱만큼도 보지 못하고 있어."
"변명하지 마십시오! 아버지는 강태석과 손을 잡았고, 그 대가로 서울로 영전했습니다!"
재환이 결국 참지 못하고 주먹을 쥐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성호석이 탁, 하고 만년필을 책상 위에 내던졌다.
날카로운 마찰음이 서재의 무거운 공기를 갈랐다.
5. 탁자 위에 던져진 낡은 문건
"영전?"
성호석의 입가에 씁쓸하다 못해 기괴한 조소가 번졌다.
그는 책상 한구석에 놓여 있던 두툼한 황갈색 서류철을 집어 들어 재환의 가슴팍을 향해 툭 던졌다.
봉투 겉면에는 붉은색 고무인으로 '대외비(對外秘)'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고, 종이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가장자리가 누렇게 바래 있었다.
"풀어보아라."
성호석의 명령에 재환은 떨리는 손으로 봉투의 끈을 풀었다.
서류철을 꺼내자 가장 윗장에 박힌 굵은 활자가 눈에 들어왔다.
'1993년도 남원시 도시계획 및 환지 처분 특별 내사 보고서 - 내무부 감사관실 발췌본.'
그 뒤로는 수십 장에 달하는 정밀 지적도, 은행 계좌 추적 내역, 그리고 당시 전라북도 도지사와 내무부 정무차관의 친필 결재 서명이 담긴 이면 합의서 사본들이 줄줄이 엮여 있었다.
재환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문서의 내용은 그가 신림동 골방에서 수집했던 조각난 정보들과는 차원이 다른, 거대하고 끔찍한 실체를 담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엇입니까?"
"네놈이 말한 그 거룩한 환지 비리의 실체다."
성호석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너는 내가 강태석 그 양아치 토건 놈과 손을 잡고 남원 땅을 털어먹은 뒤 서울로 영전했다고 믿고 있겠지. 천만에. 나는 영전한 것이 아니다."
성호석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나는 쫓겨난 것이다. 강태석 그 개새끼와, 그 뒤에 도사린 중앙 정치 깡패들에게 밀려나 남원에서 강제로 축출당한 것이란 말이다."
재환의 숨이 멎었다.
남원을 호령하던 철권의 시장, 냉혹한 지배자였던 성호석이 쫓겨났다니.
이것은 그가 지난 2년 동안 믿어 의심치 않았던 모든 전제를 근본부터 뒤흔드는 말이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아버지는 내무부 요직으로 영전했고, 강태석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남원시장이 되었습니다!"
"강태석이 어떻게 남원시장이 되었을 것 같으냐?"
성호석이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1991년 환지 처분 당시, 나는 남원의 낙후된 구도심을 밀어내고 요천 변을 개발해 중앙 정계로 올라갈 실적을 만들려 했다. 그 과정에서 토착 토건 세력이던 강태석의 자금과 주먹이 필요했던 것은 사실이지. 그 과수원 터…… 한석규의 땅도 그 개발 축의 중심에 있었기에 강제 수용을 밀어붙였다. 그건 인정하마."
성호석은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강태석은 단순한 토건업자가 아니었다. 그놈은 내무부 내의 거물 정무라인, 그리고 다가올 대선을 준비하던 중앙 정치 실세들에게 직접 줄을 대고 있었어. 남원의 개발 이권에서 나오는 수백억 원대의 비자금을 그자들에게 상납하면서, 뒤로는 나의 약점을 잡기 위해 군청 퇴직자들을 매수해 원천 측량 대장을 빼돌려 조작했다."
6. 음모의 전모와 밝혀지는 진실
재환은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내사 보고서 14페이지에는 충격적인 기록이 적혀 있었다.
1993년 가을, 내무부 감사관실이 남원에 불시 파견되었을 때, 표적이 되었던 것은 성호석의 개인 비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강태석이 주도한 불법 환지와 토지 강탈 사건의 혐의를 성호석에게 몽땅 뒤집어씌워, 그를 사법 처리 직전까지 몰고 갔던 공작의 기록이었다.
'남원시장 성호석의 단독 환지 관여 의혹 건은 중앙 정무라인과의 조율을 거쳐 기소 유예 및 직권 사직 처리 후, 내무부 기획조정실 유폐 형식으로 보직 이동.'
'조건: 남원 일대 관급 공사 및 도시계획 전권을 차기 민선 시장 후보(강태석) 측에 일괄 이양할 것.'
재환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문서에 적힌 문장들이 번개처럼 뇌리를 내리쳤다.
내무부 불시 감사의 진짜 목적은 성호석의 비리를 단죄하는 정의의 칼날이 아니었다.
지방의 유력 행정가였던 성호석의 목줄을 죄어 중앙의 허수아비로 복속시키고, 남원의 모든 토건 이권과 행정 권력을 강태석 일파에게 통째로 넘겨주기 위한 '정치적 기획 사정'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 남원 관사로 찾아왔던 강태석이 아버지에게 내밀었던 그 서류는……."
재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기억 저편, 비 내리던 날 관사 응접실에서 강태석이 거만하게 성호석의 앞에 던져놓았던 누런 서류봉투가 떠올랐다.
"그래. 1991년 환지 처분 원천 측량 대장과 이면 합의 각서 원본."
성호석의 얼굴이 굴욕과 분노로 일그러졌다.
"내가 사인하지도 않은 불법 대토 내역에 내 직인을 찍어 위조한 서류였다. 강태석은 그것을 들고 와서 나를 협박했지. 얌전히 남원을 비우고 서울로 올라가지 않으면, 내무부 감사반을 통해 나를 쇠고랑 채워 감옥에 처넣겠다고. 중앙의 정무수석과 내무부 차관이 이미 자기 뒤에 서 있다고 말이다."
성호석은 이를 갈았다.
그 냉혹하고 자존심 강한 인물이 겪었을 치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나는 남원에서 밀려난 패배자다, 재환아. 네놈이 생각하는 것처럼 위풍당당하게 영전한 권력자가 아니라, 강태석 그 조폭 새끼의 계략에 걸려들어 남원의 안방을 통째로 내주고 서울 한구석에 볼모로 잡혀 있는 허수아비란 말이다!"
쿵.
성호석이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서재 안의 공기가 무겁게 요동쳤다.
재환은 숨을 들이쉬는 법조차 잊은 채 멍하니 서류를 응시했다.
성호석의 악랄함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으나, 그 악랄함조차도 강태석이라는 더 거대하고 추악한 괴물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진실.
강태석은 처음부터 성호석의 권력을 이용해 토지를 강탈한 뒤, 중앙 정계의 썩은 동아줄을 잡고 성호석마저 협박해 남원의 완전한 군주로 올라섰던 것이다.
7. 무너진 균형과 드러난 이빨
"그런데…… 왜 이 문건을 제게 보여주시는 겁니까?"
재환이 서류를 쥐어뜯듯 움켜쥐며 성호석을 쏘아보았다.
진실을 알았다고 해서 부친의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나약함과 탐욕 때문에 괴물에게 날개를 달아준 비겁자일 뿐이었다.
성호석은 서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댔다.
그의 눈빛에 지독한 독기가 서렸다.
"강태석 그놈이 선을 넘었기 때문이다."
"선을 넘다니요?"
"남원은 이미 그놈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시의회, 경찰서, 법원 지원, 심지어 지역 언론사까지 전부 그놈의 돈과 조폭들에게 장악당했지. 그런데 그놈이 이제는 남원을 넘어 전라북도 도지사 선거 자금줄까지 넘보고 있더구나. 중앙의 내 정적들과 결탁해서, 내 목줄을 완전히 끊어버리려고 사방에 로비를 뿌리고 있어."
성호석의 손가락이 책상 모서리를 파고들었다.
"그놈이 쥐고 있는 1991년 환지 비리 대장…… 그 조작된 원본 서류가 시청 지하 특수 금고에 있는 한, 나는 평생 그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언젠가 그놈이 그 서류를 터뜨리는 날, 나는 내무부에서 파면당하고 감옥으로 끌려가게 될 테니까."
재환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 들어갔다.
"결국…… 당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나를 이용하려는 것이군요."
재환의 직설적인 일갈에 성호석은 부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뻔뻔스러울 정도로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이용? 그래, 이용이다. 하지만 너 역시 나를 이용해야만 할 것이다."
성호석이 상체를 불쑥 앞으로 내밀었다.
"너는 검사가 되고 싶어 하지. 그 알량한 정의감으로 남원의 카르텔을 부수고, 네놈의 그 계집애를 구하고 싶어 안달이 났지 않느냐? 그런데 어쩌나? 지금의 너로서는 남원에 발을 들이는 순간, 강태석의 용역들에게 다리가 부러져 요천 물에 처박힐 뿐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그렇다!"
성호석이 호통을 쳤다.
"경찰도, 군청도, 검찰 지청도 이미 강태석의 밥상머리 아래서 뼈다귀를 핥고 있다! 네놈이 사법시험을 패스하고 검사 임관을 받는다 한들, 갓 부임한 초임 검사 따위가 감히 현직 시장이자 중앙 정계의 물주인 강태석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있을 것 같으냐? 영장 하나 청구하지 못하고 지방 한구석으로 좌천되어 썩어 문드러질 뿐이다!"
성호석의 말은 잔인할 정도로 정확했다.
재환 역시 신림동에서 형사소송법과 검찰청법을 파고들며 가장 뼈저리게 고뇌했던 현실이었다.
일개 검사의 힘만으로는 거대한 토착 카르텔과 중앙 정계가 얽힌 괴물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영장을 청구해도 부장검사 선에서 반려될 것이고, 기소를 시도해도 상부의 압력에 의해 공소권 없음이나 무혐의 처분으로 뭉개질 것이 뻔했다.
8. 성호석의 제안, 독이 든 칼날
서재 안에는 오직 창문을 때리는 거센 빗소리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성호석은 서랍 깊숙한 곳에서 또 다른 묵직한 열쇠 하나와 직인이 찍힌 서류 한 장을 꺼내 놓았다.
'남원시 구도심 개발사업 특별감사 결과 보고서 - 성호석 친필 원본.'
"내가 남원시장 시절, 강태석과 삼거리 토건이 관급 공사에서 빼돌린 비자금 장부의 은닉처와, 그놈들이 시청 간부들에게 뿌린 뇌물 리스트를 정리해 둔 극비 내사 문건이다."
성호석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시청 지하 특수 금고에 보관된 환지 처분 원천 대장은 강태석의 무기이지만, 이 문건은 그놈의 숨통을 일거에 끊어놓을 수 있는 나의 독화살이다. 중앙 사정 라인에서도 오직 나만이 쥐고 있는 유일한 원본이지."
재환의 시선이 그 문건에 못 박혔다.
성호석이 남원에 있을 때부터 은밀히 작성해 두었던 강태석의 치명적인 비리 기록.
이것만 있다면, 강태석의 정경유착과 직권남용, 특가법상 뇌물공여 혐의를 낱낱이 입증하여 그를 법정에 세울 수 있었다.
"이것을…… 왜 내게 넘기는 겁니까."
재환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성호석은 차가운 눈으로 아들을 응시했다.
"한 달 뒤, 2차 시험을 치르고 수석으로 합격하거라. 연수원에 들어가는 즉시 사법연수원 자치회장을 맡고, 수료와 동시에 서울지검 특수부나 전주지검 남원지청의 수사 검사 자리를 요구해라. 내가 가진 모든 내무부 인맥과 사법부 라인을 동원해 너를 그 자리에 꽂아 넣어주마."
성호석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남원으로 내려가거라. 네놈이 갈고닦은 그 법이라는 칼자루로, 강태석의 목을 베어 와라. 그놈을 감옥에 처넣고, 시청 지하 금고를 압수수색해서 내 이름이 적힌 환지 비리 대장을 모조리 불태워 없애버려라."
재환의 가슴속에서 거대한 역겨움과 전율이 동시에 치밀어 올랐다.
아버지는 자신을 아들이 아닌,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고 과거의 치부를 지워줄 가장 예리한 '사법의 사냥개'로 쓰려는 것이었다.
"내가…… 당신의 죄를 덮어줄 것이라 생각합니까?"
재환이 이를 악물며 물었다.
"강태석을 치고 나면, 그 칼끝은 반드시 당신을 향할 겁니다. 성호석, 당신 역시 그 환지 비리의 공범이자 출발점이니까!"
그 말에 성호석은 잠시 굳어있더니, 이내 서재가 떠나가라 광기 어린 폭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그래! 바로 그 눈빛이다!"
성호석은 책상을 치며 웃어댔다.
웃음소리가 잦아들자, 그의 눈빛은 다시 지옥의 마귀처럼 번뜩였다.
"칼끝을 나에게 겨누겠다고? 좋다. 강태석을 먼저 찢어발기고 오너라. 그놈을 무너뜨리고 남원의 그 썩은 뻘밭에서 살아 돌아온다면…… 그때는 네놈이 나를 기소하든, 내 목에 칼을 들이대든 마음대로 해보아라!"
성호석은 서류철을 재환의 가슴팍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하지만 기억하거라, 재환아. 칼을 쥐지 못한 자의 정의는 개 짖는 소리에 불과하다. 네놈이 한 달 뒤 시험에 떨어지거나 비틀거린다면, 네놈이 지키려던 그 계집애는 강태석의 포클레인 아래 깔려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선택해라. 칼을 쥐고 괴물이 될 것인가, 골방에서 정의를 읊조리다 모든 것을 빼앗길 것인가!"
9. 칼날을 벼리는 시간
성호석의 서재를 나서는 재환의 손에는 두툼한 내사 문건이 쥐어져 있었다.
성북동 저택의 육중한 철문을 나서는 순간, 쏟아붓던 빗줄기는 잦아들고 잿빛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재환은 품속에 서류를 단단히 감추었다.
아버지가 건넨 것은 구원의 손길이 아니었다.
피와 오물로 얼룩진, 저주받은 독이 든 칼자루였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그것이 악마가 던져준 칼일지라도, 지금 자신에게는 남원의 거대한 악을 도려낼 칼날이 절실했다.
'지유야.'
재환은 성북동 언덕길을 걸어 내려가며 가슴속 만년필을 꽉 쥐었다.
공중전화 너머로 들려오던 지유의 비명, 쇠파이프가 깨부수던 소리, 그리고 늑장 출동한 경찰들의 비열한 웃음소리가 뼛속까지 시리게 파고들었다.
남원은 지금 전쟁터였다.
지유는 피 흘리는 무릎으로, 깨진 유리창을 테이프로 기워가며 홀로 그 지옥을 버텨내고 있었다.
자신이 신림동 골방에서 나약하게 눈물이나 흘리고 있을 시간 따위는 단 1초도 없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다시 신림동으로 돌아오는 내내, 재환은 단 한순간도 눈을 감지 않았다.
307호 고시원 방으로 돌아온 재환은 문을 걸어 잠그고 책상 앞에 앉았다.
성호석이 넘겨준 남원시 비자금 내사 문건을 펼쳐 들었다.
거기에는 삼거리 토건 강태석이 관급 공사 입찰을 담합하고, 폭력 조직을 동원해 상인들을 협박하며, 시청과 경찰서 간부들에게 뇌물을 상납한 구체적인 계좌 번호와 날짜, 금액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재환은 백부의 검은 옻칠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잉크통에는 지유가 선물했던 마지막 흑청색 잉크가 아주 조금 남아 있었다.
만년필 촉을 적시자, 짙고 푸른 잉크가 백지 위로 번져나갔다.
형법 제129조 수뢰죄.
형법 제133조 뇌물공여죄.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 제4조 단체등의 구성·활동.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 제2조 뇌물.
재환의 손끝에서 법조문들이 날카로운 창검이 되어 서류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단순한 수험용 법리가 아니었다.
이것은 30일 뒤 사법시험 2차 시험 답안지에 쏟아부을 피 묻은 무기이자, 훗날 남원 법정에 강태석과 성호석을 세울 공소장의 초안이었다.
시계 초침이 무자비하게 돌아갔다.
재환은 졸음이 쏟아질 때마다 책상 서랍에서 날카로운 제도용 컴퍼스를 꺼내 자신의 오른쪽 허벅지를 사정없이 찔렀다.
찌릿한 격통과 함께 붉은 피가 바짓단을 적셨다.
고통이 신경을 타고 뇌수를 깨울 때마다, 남원역 플랫폼에서 눈물을 삼키던 지유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반드시 돌아간다.'
재환은 이를 악물었다.
'법복을 입고, 가장 잔혹하고 완벽한 심판관이 되어 너에게 돌아갈 것이다.'
성재환의 눈빛에서 소년의 티는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어둠이 걷히고 새벽 햇살이 창살 틈으로 비쳐들 때, 재환의 손 아래에는 강태석 카르텔을 단죄할 완벽한 법리 체계도가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칼날은 이미 갈아졌다.
이제 그 칼을 휘두를 자격을 증명할 최후의 한 달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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