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림동의 고독한 밤
1. 빗속의 귀환과 닫힌 문
신림동 9동의 가파른 비탈길 위로 끈적한 밤비가 쉬지 않고 흘러내렸다.
백조당 인쇄소 앞 녹색 공중전화 부스에서 내던져지듯 튀어나온 성재환(成宰桓)의 걸음은 이미 제 궤도를 잃고 있었다.
귀청을 찢어발기던 쇠파이프 파쇄음과 유리창 깨지는 소리, 그리고 비명처럼 멎어버린 지유의 숨결이 귓속에서 끓는 쇳물처럼 맴돌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뚝 끊겨버린 기계적 침묵은 그 어떤 폭음보다 잔인하게 심장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재환은 빗물과 차가운 식은땀이 범벅이 된 얼굴을 거친 소매로 짓이기듯 훔쳐냈다.
물구덩이가 패인 시멘트 계단을 딛는 구두 밑창이 연거푸 미끄러졌으나 넘어질 틈조차 없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피비린내 나는 분노와 자괴감이 식도를 타고 바짝바짝 타올랐다.
'지유야.'
그 이름을 속으로 되뇌는 것만으로도 갈비뼈 안쪽이 으스러지는 듯한 격통이 밀려왔다.
남원은 평화롭다고, 오직 공부에만 전념하라고 속삭이던 지유의 거짓말들이 한순간에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되어 온몸에 박혀 들었다.
어머니의 병환, 붉은 페인트로 뒤덮인 김밥집 셔터, 쇠파이프를 든 토건 깡패들의 난동, 그리고 공권력의 침묵까지.
그 가혹한 지옥의 한복판에 열아홉의 지유를 홀로 던져둔 채, 자신은 이곳 신림동의 비좁은 방 한 칸에서 법(法)이라는 헛된 문자를 외우고 있었다는 사실이 뼛속까지 시린 수치심을 안겨주었다.
골목 꼭대기, 붉은 벽돌에 시커먼 곰팡이가 피어난 4층짜리 낡은 고시원 건물이 비안개 속에서 거대한 관짝처럼 솟아 있었다.
녹슨 철제 대문을 밀치자 삐걱거리는 쇳소리가 적막한 골목으로 날카롭게 흩어졌다.
가파르고 좁은 계단을 세 칸씩 뛰어오르는 동안 젖은 운동화에서 흙탕물이 뚝뚝 떨어져 계단참을 적셨다.
3층 복도 끝, 성인 남성 한 명이 간신히 몸을 뉘일 수 있는 세 평 남짓한 307호.
재환은 떨리는 손으로 열쇠를 구멍에 쑤셔 넣었다.
자물쇠가 풀리고 문이 열리자마자 눅눅한 습기와 곰팡이 냄새, 그리고 수만 페이지에 달하는 갱지 수험서의 묵은 종이 먼지가 숨을 턱 막히게 했다.
방 안으로 들어선 재환은 등 뒤로 문을 걷어차듯 닫아걸고 육중한 걸쇠를 채웠다.
철컥 소리와 함께 세상과의 유일한 통로가 차단되었다.
방 안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형광등 스위치를 올리자 깜빡거리던 백색 불빛이 낡은 방 안의 초라한 민낯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벽면 한쪽을 온통 차지하고 선 책장에는 두께가 한 뼘씩 되는 두꺼운 법서들이 빈틈없이 꽂혀 있었다.
형법총론, 형법각론, 민법강의, 헌법학원론, 형사소송법, 민사소송법, 행정법상하권.
그 책장 꼭대기에는 '7급 검찰사무직 대비'라고 적힌 얄팍한 공무원 수험서 두 권이 눈가림용으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얹혀 있었다.
지유가 알고 있는 성재환은 그저 가문의 감시를 피해 홀로 상경하여 하급 검찰 수사관이나 법원 서기보 시험을 준비하는 고학생이어야 했다.
그래야만 남원의 작은 김밥집 소녀가 품을 수 있는 소박한 기다림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허름한 눈가림용 책 아래로 펼쳐진 현실은 전혀 달랐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고 견고한 사법의 철옹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성재환은 이 곰팡내 나는 토굴 속에서 스스로를 산채로 담금질하고 있었다.
2. 세 평 감옥의 비밀과 책상 위의 전장
재환은 비에 젖은 재킷을 벗어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다.
셔츠 안쪽까지 파고든 빗물이 등줄기를 타고 차갑게 흘러내렸지만 추위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온몸의 핏줄이 터져 나갈 듯 맥박이 빠르게 고동치고 있었다.
책상 앞 삐걱거리는 목재 회전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재환의 시선이 책상 중앙으로 향했다.
책상 위에는 손때와 형광펜 자국으로 모서리가 부풀어 오른 두꺼운 법전과 대법원 판례집들이 탑처럼 쌓여 있었다.
그 한가운데, 며칠 전 법무부로부터 도착한 한 장의 백색 통지서가 묵직한 문광석 서열 밑에 단정하게 눌려 있었다.
'제37회 사법시험 제1차 시험 합격 통지서.'
수험번호 110482, 성명 성재환.
그리고 우측 상단에 붉은 인주로 찍힌 선명한 압인 옆에는 전국 수석이라는 필기 성적 석차가 기록되어 있었다.
신림동 고시촌 역사상 최연소의 나이로 1차 시험을 수석 통과했다는 결과였다.
성북동의 아버지 성호석(成浩錫)은 아들이 관악산 자락 고시촌 골목에서 방황하며 패배자의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 믿고 있을 터였다.
가문의 뜻을 거역하고 지방의 김밥집 딸년에게 마음을 빼앗긴 채 제 앞가림조차 못 하는 낙오자로 여기며, 자신이 파놓은 거대한 권력의 장기판 위에서 언젠가 무릎 꿇고 빌며 돌아올 날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재환은 빌기 위해 공부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그토록 숭배해 마지않는 그 '중앙의 사법 권력'이라는 몽둥이를 제 손으로 완벽히 빼앗아 쥐기 위해 뼈를 깎아왔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재환의 입술 사이로 서늘한 읊조림이 새어 나왔다.
그는 책상 모서리에 놓인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을 쥐었다.
백부에게 물려받았던, 금빛 닙 위에 선명한 한자 '成宰桓'과 라틴어 법언 'Fiat justitia, ruat caelum'이 새겨진 물건이었다.
그 옻칠 표면을 어루만지던 재환의 시선이 만년필 옆에 놓인 작은 유리병으로 향했다.
지유가 남원여고 앞 허름한 문구점에서 푼돈을 모아 선물해 주었던 깊고 푸른빛의 흑청색 잉크병.
그 잉크는 이제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남원을 떠나오던 날부터 오늘 밤에 이르기까지, 재환이 써 내려간 모든 법률 답안과 남원의 비리를 적어 내려간 수첩은 오직 이 흑청색 잉크로만 채워졌다.
지유의 숨결과 눈물이 배어 있는 잉크였다.
재환은 만년필의 배럴을 열고 잉크 피스톤을 끝까지 끌어올렸다.
유리병 바닥에 찰랑거리던 마지막 흑청색 잉크 몇 방울이 만년필의 투명한 심장부로 남김없이 빨려 들어갔다.
이 잉크가 완전히 소진되기 전에, 모든 싸움을 끝내야 했다.
재환은 책상 한구석에 숨겨두었던 낡은 흑색 가죽 수첩을 꺼내 들었다.
통일호 열차 안에서부터 기록하기 시작했던, 부친 성호석과 삼거리 토건 강태석(姜泰錫)의 범죄 일지였다.
수첩을 펼치자 흑청색으로 빽빽하게 적힌 날짜와 지번, 인명들이 망령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1991년 남원군 요천 변 토지 구획 정리 사업.
한석규의 사과 과수원 4천 평 강제 도로 부지 수용.
성호석 군수의 처남 명의 차명 토지 단독 환지 처분.
삼거리 토건 강태석의 현장 용역 폭력 동원 및 등기 위조.
그리고 내무부 감사반 파견 직후 벌어진 전격적인 서류 은폐와 성호석의 중앙 내무부 기획조정실장 영전.
모든 퍼즐이 완벽하게 맞물려 있었다.
지유의 집안을 풍비박산 내고 지유의 아버지를 원통한 죽음으로 몰아넣은 주범은 바로 자신의 아버지 성호석이었고, 그 더러운 피 묻은 손을 씻어준 충견이 바로 지금 남원시장의 자리에 앉아 지유를 짓밟고 있는 강태석이었다.
3. 벽면을 가득 채운 남원의 참상
재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좁은 방의 한쪽 벽면을 가리고 있던 낡은 옥색 커튼을 거칠게 젖혔다.
커튼 뒤 콘크리트 벽면이 드러나는 순간, 그곳에 펼쳐진 광경은 고시생의 공부방이 아니라 거대한 특수부 검사실의 브리핑 룸을 방불케 했다.
벽면 전체가 전라북도 남원시의 정밀 지적도와 붉은색 실로 엮인 수십 장의 신문 스크랩, 그리고 인물 관계도로 도배되어 있었다.
중앙에는 강태석의 얼굴 사진이 실린 남원일보 1면 기사가 붉은 압정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민선 1기 남원시장 강태석 압도적 당선.'
재환의 눈동자가 그 기사 밑으로 덕지덕지 붙은 최근의 스크랩 기사들을 훑어내렸다.
'남원 구도심 동충동 일대, 대규모 관광특구 개발정비구역 지정 추진.'
'시청 위생과·소방과, 구도심 노후 영세 상가 합동 특별 안전점검 단속 강화.'
'요천 수변 테마 상가 조성 사업, 한양토건 기반 공사 독점 수주 유력.'
기사 하나하나가 남원에서 보내온 비명이었다.
신문사 수습기자로 들어갔다던 친구 민재가 며칠 전 서울로 부쳐온 비밀 취재 메모들이 기사들 틈바구니에 꽂혀 있었다.
민재의 메모에는 시청 내부의 추악한 거래가 날것 그대로 적혀 있었다.
'태석이 시장 직인을 쥐자마자 지적과 지하 특수 금고에 91년도 환지 대장 원본을 납 봉인함. 열쇠는 시장 본인이 직접 소지.'
'위생과, 소방과 차례로 삼거리 김밥집에 투입. 표적 단속으로 영업정지 및 강제 폐쇄 유도 중.'
'한양토건 박진철 동원, 번영회 매수해 상인들 동의서 징구. 거부하는 김밥집에 야간 쇠파이프 테러 사주.'
재환의 턱관절이 부서질 듯 꽉 맞물렸다.
지유는 편지마다 남원의 요천 둑길에 봄까치꽃이 피어났다고, 김밥집 참기름 냄새가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으니 아무 걱정 말고 법서만 보라고 적어 보냈었다.
그 하얀 편지 봉투 뒤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깨진 유리창을 테이프로 기워 붙이고 있었을 지유의 가녀린 손이 떠올랐다.
오늘 밤,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던 그 끔찍한 쇠파이프 소리와 지유의 마지막 비명.
'지유야, 조금만 더 버텨줘. 내 공부가 거의 끝나가.'
자신이 내뱉었던 그 말이 얼마나 무력하고 잔인한 유예 선고였는지를 깨닫자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첫차를 타고 남원으로 달려 내려가 그 파렴치한 깡패 놈들의 멱살을 쥐어틀고, 아버지의 목전에 만년필을 들이대며 모든 죄악을 토해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재환은 벽면을 짚은 주먹을 부르르 떨며 스스로의 충동을 억눌렀다.
지금 맨몸으로 내려간다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고작 전직 시장의 철없는 아들이자, 고시 낭인에 불과한 스무 살의 청년이 남원의 토착 권력 카르텔을 상대로 무엇을 바꿀 수 있단 말인가.
남원경찰서장부터 시청 간부들, 법원의 판사들까지 이미 성호석과 강태석의 거미줄 같은 인맥과 돈줄에 얽혀 있는 그 썩은 웅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지유와 함께 자멸하는 길에 불과했다.
남원을 구하고 지유를 살려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절대적인 사법의 칼날, 중앙지검 특수부 검사의 기소독점권과 영장청구권을 제 손으로 틀어쥐는 것.
대한민국 사법부의 그 어떤 권력자도 감히 꺾을 수 없는 정당한 법의 집행관이 되어 남원 땅을 밟는 것만이, 저 거대한 악의 카르텔을 단칼에 베어 넘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4. 형법전과 칼날의 연마
벽시계의 초침이 자정을 넘어 새벽 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정확히 한 달.
사법시험 제2차 논술형 본시험이 치러지는 10월 초순까지, 30일이라는 지옥 같은 유예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2차 시험은 4일 동안 헌법, 민법, 형법, 상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행정법 등 7개 과목의 방대한 논점을 주관식 논술로 풀어내야 하는 시험이었다.
매년 수천 명의 법대 졸업생과 수십 년을 썩은 고시 낭인들이 단 몇 점 차이로 낙방의 고배를 마시는 잔혹한 전쟁터였다.
재환은 피가 배어 나오는 손바닥을 책상 위에 짚고 의자에 다시 앉았다.
그는 책상 정면에 두꺼운 전지 한 장을 새로 압정으로 고정했다.
그리고 흑청색 잉크가 채워진 각인 만년필을 들어 굵은 글씨로 단죄의 대상들을 적어 내려갔다.
'1.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형법 제123조) - 공무원이 그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때.'
피의자 강태석, 남원시청 위생과장, 소방과장.
표적 행정지도를 통한 김밥집 고사 작전과 허위 시정명령, 이행강제금 협박의 법리적 구성 요건을 빠짐없이 짚어냈다.
'2.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알선수재) - 공무원의 직무에 속한 사항의 알선에 관하여 금품이나 이익을 수수, 요구 또는 약속한 자.'
피의자 성호석, 강태석, 한양토건 박진철.
1991년 환지 비리 당시 단독 환지 대토와 뇌물 공여, 그리고 이번 민선 1기 남원시장 선거에서의 정치 자금 세탁 경로.
'3.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위반(단체등의구성·활동, 야간공동재물손괴, 야간공동상해) - 2인 이상이 공동하여 야간에 흉기를 휴대하고 사람을 상해하거나 재물을 손괴한 때.'
피의자 한양토건 배 대표 및 용역 폭력배 일당.
그리고 이들을 비호하고 사건을 고의로 은폐·축소한 남원경찰서 중앙파출소 경찰관들에 대한 직무유기죄(형법 제122조).
만년필 촉이 종이를 긁어내는 서걱거리는 소리가 좁은 방 안을 사납게 채웠다.
재환의 눈빛은 이미 수험생의 눈이 아니었다.
법정의 높은 단상에서 피고인들의 죄상을 낱낱이 낭독하는 검사의 형형한 살기가 그 눈동자 속에서 번뜩이고 있었다.
재환은 형법전의 책장을 넘겼다.
형법 제250조 살인죄, 제257조 상해죄, 제314조 업무방해죄, 제324조 강요죄.
수백 개의 조문과 수천 개의 대법원 판례가 재환의 뇌리 속에서 하나의 거대한 그물망으로 엮여 들어갔다.
남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악행들은 단순한 폭력이 아니었다.
형법전의 조문 하나하나로 옭아매어 그들의 목을 죌 수 있는 명백한 범죄의 구성 요건들이었다.
재환은 왼쪽 팔목을 내려다보았다.
잠이 쏟아질 때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기 위해 고무줄로 동여맸던 손목은 이미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그는 책상 서랍에서 날카로운 컴퍼스 침을 꺼내 들었다.
식어버린 커피를 들이켜는 것 따위로는 밀려드는 육체의 피로와 절망감을 이겨낼 수 없었다.
그는 허벅지의 살점을 컴퍼스 침으로 사정없이 찔렀다.
날카로운 통증이 척수를 타고 뇌관을 강타하는 순간, 흐려지려던 시야가 서슬 퍼렇게 되살아났다.
'지유는 지금 이 순간에도 피를 흘리고 있다.'
그 고통에 비한다면 허벅지를 찌르는 통증 따위는 사치에 불과했다.
재환은 이를 악물며 다시 흑청색 만년필을 쥐었다.
모의고사 답안지 위에 쏟아지는 글씨들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판례의 요지, 학설의 대립, 사안의 포섭과 결론.
손가락 마디마디가 뒤틀리고 굳은살이 터져 피가 배어 나왔지만 만년필을 쥔 손은 멈추지 않았다.
5. 신림동 고시촌의 새벽과 불변의 맹세
새벽 네 시가 가까워지자, 밖을 내리치던 빗줄기가 조금씩 잦아들며 짙은 안개로 변해 창문을 두드렸다.
창밖 신림동 9동의 비탈길 아래로 하나둘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새벽 강의를 듣기 위해 학원으로 향하는 고시생들의 무거운 발소리가 젖은 골목길을 울렸다.
그들은 저마다 입신양명과 가문의 영광, 혹은 안락한 미래를 꿈꾸며 이 고시촌의 진흙탕을 걷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성재환에게 사법시험은 출세의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내기 위한 마지막 방패이자, 가문의 추악한 죄악을 제 손으로 도려내기 위한 서슬 퍼런 단두대였다.
재환은 마침내 마지막 형사소송법 모의고사 답안지의 결론을 맺고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책상 위에는 밤새 작성한 수십 장의 실전 답안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의 시선이 책상 구석, 투명한 플라스틱 액자에 끼워진 작은 흑백 사진 한 장에 멎었다.
남원을 떠나오기 전날 밤, 광한루원 오작교 위에서 지유의 손을 잡고 나누었던 마지막 약속.
학생증 모서리를 잘라 지유에게 건네주었던 반명함판 증명사진의 원본 필름에서 뽑아낸 단 한 장의 사진이었다.
그 옆에는 지유가 요천 둑길에서 자전거를 타던 자신의 뒷모습과 팽나무 고목을 연필로 정성스럽게 스케치해 주었던 빛바랜 종이 조각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스케치북 귀퉁이에 적혀 있던 지유의 단정한 글씨.
'바람이 불어도, 나무는 흔들리지 않는다.'
재환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지유의 글씨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지유는 흔들리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머니의 병환과 폭력배들의 위협, 그리고 상인들의 배척 속에서도 그 작은 손으로 김밥을 말고, 유리창을 기워 붙이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유야."
재환의 목소리가 텅 빈 방 안을 낮게 울렸다.
"조금만 기다려."
그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주저함도, 흔들림도 없었다.
"한 달 뒤다. 내가 그 법복을 입고, 너에게로 간다."
그것은 신에게 바치는 기도가 아니었다.
자신의 영혼과 피를 담보로 걸고 스스로에게 내리는 서슬 퍼런 집행 명령이었다.
재환은 지유의 스케치를 가슴 안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심장이 뛰는 자리 바로 위에 닿은 종이의 온기가 차갑게 식어 있던 가슴을 뜨겁게 덥혀왔다.
그는 젖은 옷을 벗어 던지고 정갈하게 다려둔 새 셔츠로 갈아입었다.
책상 위의 형법전과 행정법전을 가방에 쑤셔 넣고, 백부의 검은 옻칠 만년필을 셔츠 깃 안쪽에 단단히 꽂았다.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서는 재환의 눈빛에는 더 이상 슬픔이나 절망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차가운 투기와 단죄의 의지만이 형형하게 타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신림동의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는 그의 등 뒤로, 서울의 차가운 새벽 여명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그 새벽빛은 머지않아 남원의 썩은 권력을 통째로 불태워버릴 거대한 심판의 서막을 알리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