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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26화

악마의 제안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어둠을 찢는 엔진 소리

 

골목의 희뿌연 새벽안개를 가르고 육중한 검은 물체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남원시장(南原市長) 강태석(姜泰錫)의 시찰용 관용차인 로얄 살롱이었다.

 

보닛 끝에 부착된 남원시 상징 봉황 깃발이 축축한 새벽바람에 젖어 무겁게 펄럭였다.

 

차량이 멈춰 선 곳은 삼거리 김밥집의 바로 앞, 지난밤 쇠파이프 난동으로 깨져 나간 유리 파편들이 채 다 쓸려 나가지 못한 아스팔트 위였다.

 

박스 테이프로 흉측하게 X 자를 그리며 기워진 통유리창 너머로, 검은 차체가 드리운 짙은 그림자가 식당 안쪽 조리대까지 길게 드리워졌다.

 

지유는 손에 쥐고 있던 김밥용 대나무 발을 내려놓지 않았다.

 

참기름을 묻힌 칼날을 도마 위에 조용히 얹어 둔 채, 천천히 고개를 들어 문밖을 응시했다.

 

유리 파편에 베여 하얀 붕대를 감아 쥔 손등에서 욱신거리는 박동이 전해졌지만, 지유의 시선은 물 한 방울 흔들리지 않는 새벽 우물처럼 고요했다.

 

쿵,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뒷좌석 차문이 열렸다.

 

비서관이 쏜살같이 튀어나와 문을 받쳐 들기도 전에, 거구의 사내가 차 바닥을 딛고 내려섰다.

 

윤이 번쩍이는 검은 에나멜 구두가 자갈과 유리 조각을 자근자근 짓밟으며 소리를 냈다.

 

단추를 풀어헤친 짙은 회색 더블 정장 차림의 강태석이었다.

 

그는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테이프로 칭칭 감긴 김밥집의 유리창을 올려다보며 기괴한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허, 꼴이 아주 볼만하구나."

 

가래 끓는 듯 묵직하고 탁한 음성이 깨진 유리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강태석은 수행원들을 손짓 한 번으로 물러서게 한 뒤, 거침없는 걸음으로 김밥집의 낡은 여닫이문을 밀어젖혔다.

 

딸랑거리는 초라한 방울 소리가 적막한 새벽 골목을 울렸다.

 

가게 안으로 들이닥친 그의 몸에서는 고급 시가 향과 알코올 냄새, 그리고 새벽 찬바람이 뒤섞인 비릿한 권력의 악취가 풍겼다.

 

2. 거인의 침범

 

강태석은 허리를 숙여 좁은 문을 통과하더니,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홀 한가운데 있는 삐걱거리는 4인용 합판 식탁 앞에 섰다.

 

단칸방과 주방을 합쳐도 고작 대여섯 평 남짓한 영세한 식당은, 그의 육중한 덩치 하나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힐 만큼 옹색해 보였다.

 

강태석은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곳곳에 튄 붉은 래커 자국을 솔로 박박 문질러 지우려다 번진 붉은 얼룩, 그리고 박스 테이프로 흉터처럼 봉합된 유리창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계집아이 혼자서 용을 썼어."

 

강태석이 턱을 까딱하며 조소 섞인 탄식을 내뱉었다.

 

"남원바닥에서 내 눈 밖에 나고도 이렇게 아침마다 문을 열어젖히는 놈은, 내 평생 장사하고 완장 차면서도 너 하나 처음 본다."

 

지유는 조리대 뒤에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그를 응시했다.

 

하얀 면 앞치마를 두른 단정한 옷차림, 밤새 잠 한숨 자지 못해 눈가에는 옅은 그늘이 져 있었으나, 그 눈동자만큼은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영업 준비 중입니다. 손님으로 오신 게 아니라면 나가 주십시오, 시장님."

 

지유의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다.

 

그 담담한 태도에 강태석의 눈썹 한쪽이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어지간한 시청 국과장들이나 지역 토건업자들도 자신의 눈빛 한 번에 오금을 저리며 머리를 조아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겨우 열아홉 살 먹은 계집아이가, 부친을 잃고 어미마저 중환자실에 처박아 둔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제 면전에 대고 나가라 명하고 있었다.

 

강태석은 식탁 의자를 신경질적으로 끌어당겨 털썩 주저앉았다.

 

쇠파이프 다리가 바닥을 긁으며 끼익 하는 불쾌한 소음을 질렀다.

 

"손님이지. 내가 왜 손님이 아니겠냐? 새벽부터 목이 칼칼해서 네년 손으로 만 김밥 한 줄 얻어먹으러 왔는데."

 

그는 식탁 위에 거칠고 두툼한 손을 얹으며 턱짓했다.

 

"한 줄 말아 봐라. 지난번처럼 참기름 듬뿍 발라서."

 

지유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시장님께 팔 김밥은 없습니다."

 

"뭐라?"

 

"장사는 사람에게 음식을 파는 일입니다. 밤중에 용역들을 시켜 남의 삶의 터전을 쇠파이프로 부수고, 살인 협박을 낙서하고 간 자에게 내어줄 밥은 이 집 어디에도 없습니다."

 

지유의 한마디 한마디는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가게 밖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비서관이 기겁을 하며 문을 열고 들어오려 했으나, 강태석이 번쩍 손을 들어 제지했다.

 

강태석의 얼굴에서 조소가 걷히고, 맹수의 그것과 같은 기이한 안광이 번득였다.

 

3. 뱀의 혀, 악마의 거래

 

"쇠파이프? 허, 그 머저리 같은 놈들이 밤중에 실례를 좀 과하게 했나 보구나."

 

강태석은 짐짓 모르는 척 능청을 떨며 껄껄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소리 이면에는 섬뜩한 조롱이 가득했다.

 

"하지만 지유야. 세상이 원래 그런 거다. 바람이 불면 풀잎이 눕고, 큰 파도가 치면 낡은 조각배는 뒤집히는 법이지. 그걸 억울하다고 허공에 삿대질해 봐야 돌아오는 건 깨진 유리창과 네 손등의 피고름뿐이야."

 

그는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품 안쪽을 뒤적였다.

 

고급 양복 안주머니에서 묵직한 서류철 하나와 만년필 한 자루가 테이블 위에 탁 놓였다.

 

금박으로 남원시청 직인이 찍힌 고급 서류 봉투였다.

 

"어젯밤 일로 네가 겁을 집어먹고 도망쳤으면 난 널 아주 시시한 계집애로 보고 진작에 포클레인으로 밀어버렸을 게다. 그런데 넌 박스 테이프를 붙여 가며 버텼어. 그 오기, 그 독기…… 내 마음에 아주 쏙 들었어."

 

강태석이 서류 봉투를 툭툭 치며 지유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래서 내가 마지막으로 자비를 베풀러 직접 온 거다."

 

지유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 침묵을 승낙이라 착각한 것인지, 강태석의 목소리가 한층 기름지고 부드러워졌다.

 

마치 먹잇감을 옭아매려는 독사의 속삭임과도 같았다.

 

"이 서류가 뭔지 아느냐? 요천 변 관광특구 중심 상업지구, 새로 올라갈 초현대식 5층 테마 상가의 1층 코너 점포 분양 계약서다. 평당 수천만 원을 호가할 노른자위 자리지. 추가 분담금? 그딴 건 한 푼도 낼 필요 없다. 시장 특별 공급으로 네 이름 석 자만 올리면 그 자리에서 네 소유가 돼."

 

강태석은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그뿐인 줄 아느냐? 남원의료원 중환자실? 내가 원장에게 직접 전화 한 통만 넣으면, 네 어미는 오늘 당장 특실로 옮겨져 서울대병원에서 내려온 특진 의사 치료를 받게 될 거다. 지금까지 밀린 병원비 수백만 원, 앞으로 들어갈 수천만 원의 신장 투석비와 심장 수술비…… 내가 시 예산이든 내 개인 장학재단이든 털어서 전액 일시불로 대납해 주마."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피를 말리는 가난과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어머니의 숨통, 그리고 매일 밤 닥쳐오는 깡패들의 공포로부터 단번에 벗어날 수 있는 거대한 구원의 밧줄처럼 보였다.

 

강태석은 승리를 확신하듯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조건은 아주 간단해."

 

그의 상체가 지유 쪽으로 스르륵 기울어졌다.

 

"내 사람이 되어라."

 

낮게 깔린 목소리에 음습한 욕망이 노골적으로 묻어났다.

 

"저 밖에서 얼쩡거리는 쥐새끼 같은 최민재 놈 치워버리고, 내 밑으로 들어와. 내가 시청 문화관광과에 특별 채용 자리를 만들어 줄 테니, 넌 낮에는 단정하게 옷 입고 내 곁에서 일정 챙기고 보좌해라. 밤에는…… 네 영리한 머리로 이 남원 구도심 상인 놈들 구워삶는 법을 내게 가르쳐 주면 돼. 그러면 넌 더 이상 이따위 쉰내 나는 밥 짓지 않아도 되고, 네 어미는 호강하며 천수를 누릴 거다. 어떤 깡패 새끼도, 어떤 순경 놈도 감히 너를 건드리지 못해. 넌 남원시장 강태석의 가장 아끼는 사람이 되는 거니까."

 

4. 박스 테이프의 결기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식당 안에는 벽에 걸린 낡은 괘종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째깍째깍 울릴 뿐이었다.

 

강태석은 느긋하게 지유의 반응을 기다렸다.

 

병원비에 쫓겨 스스로 대입 원서를 찢어버린 계집아이다.

 

새벽마다 손등을 찢기며 유리창을 닦아내는 처지다.

 

이런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제안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을 인간은 없다고, 그는 살아온 반평생의 비열한 경험을 통해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유의 시선은 테이블 위의 금빛 서류철이 아니라, 흉터처럼 기워진 통유리창 너머를 향해 있었다.

 

그곳에는 자신이 손수 엮어 붙인 투명 테이프의 결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약속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지난밤, 단칸방 낡은 과자 상자 속에서 꺼내 보았던 재환의 얼굴이 떠올랐다.

 

흑청색 잉크로 새겨져 있던 단단한 필체.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그 소년은 지금 서울 신림동의 차디찬 고시촌 단칸방에서, 썩어빠진 가문과 세상의 불의를 심판하기 위해 제 뼈를 깎으며 법전을 파고들고 있었다.

 

그 소년이 남원의 정의를 바로잡기 위해 돌아오는 그날까지,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은 단순한 김밥집이라는 가게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두 사람이 나눈 신념이었고, 부당하게 짓밟힌 아버지 한석규의 명예였으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이었다.

 

지유가 마침내 강태석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 눈빛은 너무나 투명하고 차가워서, 마주 보던 강태석의 심장에 순간 서늘한 균열을 일으킬 정도였다.

 

"시장님."

 

지유의 입술이 단정하게 열렸다.

 

"새 상가도, 어머니의 병원비 대납도…… 제겐 그저 남의 피눈물로 지은 독배로 보일 뿐입니다."

 

강태석의 미소가 굳어졌다.

 

"뭐라?"

 

"아버지가 억울하게 빼앗긴 과수원 터 위에 지어질 건물입니다. 남원의 이웃 상인들을 속이고, 쫓아내고, 피눈물 흘리게 만든 자리에 세워질 상가입니다. 그런 곳에서 장사를 하고, 그런 더러운 돈으로 어머니의 목숨을 연명한다면…… 제 어머니는 눈을 뜨자마자 저를 부끄러워하며 스스로 곡기를 끊으실 겁니다."

 

지유는 조리대 밖으로 한 걸음 걸어 나왔다.

 

피 묻은 붕대를 감은 손을 가슴 앞에 단정히 모은 채, 그녀는 거대한 악의 화신을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말씀하셨지요. 시장님의 사람이 되라고."

 

지유의 목소리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서슬 퍼런 결기가 실렸다.

 

"제 마음은 이미 남원에 남은 것이 아니라, 정의를 세우기 위해 이곳을 떠난 이에게 가 있습니다. 제 몸을 부술 수는 있어도, 제 영혼과 마음은 그 누구도 돈이나 권력으로 사지 못합니다."

 

5. 짓밟힌 만년필, 불타는 증오

 

순간, 식당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강태석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더니, 이내 흉측한 살기로 일그러졌다.

 

완벽한 거절이었다.

 

단순한 거절이 아니라, 자신이 평생을 걸쳐 긁어모은 부와 권력, 그리고 남원이라는 왕국 자체를 통째로 쓰레기통에 처박는 듯한 모멸적인 거절이었다.

 

"……떠난 놈?"

 

강태석의 목구멍에서 으르렁거리는 맹수의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뇌리에 번개처럼 한 인물이 스쳐 지나갔다.

 

성호석의 아들, 성재환.

 

서울로 압송되듯 끌려가며 자신을 노려보던 그 서늘한 눈빛의 소년.

 

"그놈이더냐? 성호석이 아들놈, 그 핏덩이 새끼를 말하는 게야?!"

 

콰앙!

 

강태석이 주먹으로 식탁을 내리쳤다.

 

합판 테이블이 부서질 듯 비명을 지르며 금이 갔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그따위 헛소리를 지껄이며 도망친 고시 낭태 새끼를 아직도 기다리고 자빠졌단 말이냐! 그놈 아비가 네 애비 과수원을 갈취해 중앙 벼슬자리를 꿰찼는데, 넌 그 원수의 자식새끼를 품에 안고 내 호의를 걷어차?!"

 

강태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거대한 그림자가 지유의 온몸을 집어삼킬 듯 덮쳐왔다.

 

강태석은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서류 봉투를 집어던지더니, 지유의 멱살을 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지유는 피하지 않고 차가운 눈으로 그 손을 쏘아보았다.

 

그 결기에 질린 강태석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대신 그의 시선이 조리대 옆, 지유가 매일 아침 정갈하게 닦아두는 작은 유리병으로 향했다.

 

지유가 재환에게 선물했던 것과 똑같은, 깊고 푸른빛이 감도는 흑청색 잉크병이었다.

 

강태석은 비열하게 입꼬리를 비틀며 잉크병을 낚아챘다.

 

"이따위 알량한 장난질로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냐?"

 

"손대지 마세요!"

 

지유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날카롭게 흔들렸다.

 

그 동요를 포착한 강태석은 잔인한 쾌감을 느끼며, 지유가 보는 면전에서 잉크병을 바닥을 향해 내던졌다.

 

쨍그랑!

 

유리병이 산산조각 나며, 짙고 푸른 흑청색 잉크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지유의 하얀 앞치마와 버선코, 그리고 테이프로 기워진 유리창 하단에 마치 검푸른 피처럼 처절한 자국이 번져 나갔다.

 

"기억해라, 한지유."

 

강태석은 깨진 잉크병 파편을 구두 뒷굽으로 짓이기며 한 걸음 다가왔다.

 

"네년이 내 손을 잡지 않은 대가가 무엇인지, 뼈저리게 가르쳐 주마. 김밥집? 오늘 해가 지기 전에 네년 손으로 간판을 내리게 만들어 주마. 그리고 네 어미? 남원의료원에서 쫓겨나 길바닥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가게 만들 테니…… 어디 그 잘난 정의를 물고 늘어지며 서울 간 놈 목이나 빠지게 기다려 보거라!"

 

강태석은 침을 퉤 뱉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식당을 빠져나갔다.

 

쾅, 하고 닫힌 문밖에서 로얄 살롱의 거친 굉음이 울리더니, 매캐한 배기가스를 남긴 채 골목을 빠져나갔다.

 

6. 잉크 방울에 깃든 맹세

 

폭풍이 휩쓸고 간 식당 안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지유는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발밑에는 깨진 잉크병 유리 조각들과 함께, 검푸른 잉크가 바닥 타일 틈새로 지워지지 않을 얼룩을 그리며 스며들고 있었다.

 

하얀 앞치마에 튄 잉크 방울들이 마치 깊은 멍 자국처럼 선명했다.

 

지유의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스르륵 주저앉은 지유는 떨리는 손으로 잉크 파편을 주워 담으려 했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또다시 손끝을 찔러 붉은 핏방울이 배어 나왔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붉은 피와 검푸른 잉크가 손바닥 위에서 뒤섞였다.

 

'재환아…….'

 

지유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릴 뻔했으나, 그녀는 이를 악물고 눈물을 도로 삼켰다.

 

강태석의 저주는 현실이 되어 닥쳐올 것이다.

 

오늘 당장 시청의 모든 부서가 동원되어 숨통을 조여올 것이고, 병원에서는 어머니의 퇴원 독촉이 빗발칠 것이다.

 

남원은 이제 거대한 감옥이자 사형장이 되어 자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지유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녀는 찢겨진 앞치마를 벗어 바닥의 잉크를 묵묵히 닦아내기 시작했다.

 

'부수려면 부숴 봐.'

 

그녀의 눈빛 속에서 절망은 가라앉고, 타오르는 불꽃 같은 결의가 피어올랐다.

 

'내가 여기서 쓰러지면, 네놈들이 저지른 죄악은 영원히 어둠 속에 묻히겠지. 내 아버지가 당한 억울함도, 재환이가 짊어진 그 무거운 법의 무게도…… 전부 허공으로 흩어지겠지.'

 

지유는 카운터 아래 숨겨진 낡은 판자를 내려다보았다.

 

그 밑에는 1991년 환지 처분 원천 증거 서류가 숨쉬고 있었다.

 

그것은 성호석과 강태석, 두 거대한 괴물을 단죄할 가장 치명적인 비수였다.

 

지유는 일어섰다.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고, 새 앞치마를 둘렀다.

 

깨진 창문 틈새로 차가운 아침 바람이 들이쳤지만, 그녀는 다시 밥솥 뚜껑을 열고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밥을 주걱으로 퍼 올렸다.

 

7. 다가오는 그림자

 

오전 열 시, 남원 시내의 공기는 살얼음판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동문 우체국 앞 공중전화 부스에 한 남자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뛰어 들어왔다.

 

남원일보사 수습기자 최민재였다.

 

그의 얼굴은 흙빛으로 질려 있었고, 셔츠 깃은 땀과 비에 젖어 엉망이었다.

 

민재는 떨리는 손으로 동전을 밀어 넣고 다이얼을 돌렸다.

 

신문사 편집국에서 방금 전 벌어진 참극 때문이었다.

 

강태석 시장의 외압을 받은 편집국장이 민재가 작성한 '삼거리 구도심 불법 용역 테러 및 배후 유착 의혹' 취재 기사 원고를 그의 면전에서 갈가리 찢어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리고 즉각적인 대기발령과 함께 사원증을 압수하고 그를 신문사 밖으로 내동댕이쳤다.

 

"야, 최민재! 네놈이 정식 기자나 된 줄 알아? 남원에서 강태석 시장 이름 석 자 건드리고 살아남을 언론인이 있을 것 같아? 당장 짐 싸서 꺼져!"

 

편집국장의 악에 받친 고함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했다.

 

권력의 거미줄은 생각보다 훨씬 더 깊고 잔혹하게 남원 전체를 죔쇠처럼 조이고 있었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수화기 너머에서 신호음이 울렸다.

 

민재는 김밥집으로 전화를 걸려다 말고, 황급히 손가락을 멈추었다.

 

아니다.

 

김밥집 전화는 시청이나 도청의 감청에 노출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민재는 품 안에서 낡은 수첩을 꺼냈다.

 

그 수첩 한구석에는 오래전 성재환이 서울로 떠나기 직전 남겨주었던, 신림동 고시촌 골목 끝 백조당 인쇄소 앞 공중전화 번호가 적혀 있었다.

 

'형…… 재환이 형.'

 

민재는 마른침을 삼키며 다시 동전을 쑤셔 넣었다.

 

이 지옥 같은 고립 속에서 지유를 지키고 이 거대한 괴물들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이제 서울에 있는 재환에게 진실을 알려야만 했다.

 

더 이상 지유의 '괜찮다'는 거짓 편지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되었다.

 

다이얼이 덜컹거리며 돌아가는 소리가 적막한 공중전화 부스 안에 무겁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 순간, 부스 유리창 밖으로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 둘이 그림자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두꺼운 각목이 들려 있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마침내 딸깍, 하고 연결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서울의 차갑고 메마른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온 바로 그 찰나,

와장창!

 

공중전화 부스의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며 둔탁한 각목이 민재의 어깨를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수화기가 허공으로 튕겨 나가며 대롱대롱 매달렸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