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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24화

심야의 위협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어둠이 삼킨 골목의 숨소리

 

남원 동문 우체국 뒤란을 타고 번지는 밤안개는 요천(蓼川)의 물비린내를 품어 축축하고 차가웠다.

 

자정을 훌쩍 넘긴 구도심의 좁은 골목길은 낮 동안의 소란을 모조리 삼켜버린 채 기괴할 만큼 무거운 침묵에 잠겨 있었다.

 

가로등 하나가 전구의 수명이 다해가는지 희미한 주황빛을 내뿜으며 찌르륵거리는 소리를 불규칙하게 뱉어냈다.

 

그 흐릿한 불빛 아래, 삼거리 김밥집의 낡은 함석 간판만이 위태로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가게 안쪽 단칸방의 불은 일찌감치 꺼져 있었다.

 

그러나 방 안에 누워 있던 한지유(韓智由)는 단 한순간도 눈을 감지 못했다.

 

낮에 번영회 사무실에서 벌어졌던 폭풍 같은 소동이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맴돌았다.

 

오 회장이 내민 기만적인 계약서의 실체를 까발리고, 상인들이 분노에 차 동의서를 갈기갈기 찢어발기던 그 순간의 격앙된 공기.

 

그리고 민재가 내민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던 한양토건 박진철 회장의 뱀 같은 목소리까지.

 

거대한 사기극을 막아냈다는 안도감도 잠시, 지유의 온몸을 옭아맨 것은 뼈마디를 파고드는 서늘한 불안이었다.

 

강태석이 어떤 사람인가.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자는 피붙이라도 짓밟아버리는 토건 조폭 출신의 남원시장이다.

 

자신의 야심 찬 관광특구 개발 계획이 어린 여학생의 입술 끝에서 시작된 폭로로 어그러졌다는 사실을 그자가 결코 용납할 리 없었다.

 

낮의 싸움이 법과 서류를 앞세운 합법의 가면극이었다면, 이제 그 가면 뒤에 숨겨진 추악한 흉기가 드러날 차례였다.

 

지유는 이불 밑에서 단정하게 모아 쥔 두 손을 꽉 쥐었다.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단칸방 바닥 아래, 낡은 카운터 밑바닥 비밀 판자 속에 잠들어 있는 누런 서류철의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1990년대 초 부친 한석규(韓錫奎)의 숨통을 끊어놓았던 환지 비리의 원본 서류.

 

성호석과 강태석의 이름이 나란히 박힌 그 종이 뭉치는 지유에게 남겨진 마지막 보루이자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다.

 

'절대 빼앗길 수 없어.'

 

지유는 조용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겉옷을 벗지 않은 채였다.

 

얇은 스웨터 차림 그대로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바로 그때였다.

 

골목 저편에서 거친 타이어 마찰음과 함께 묵직한 디젤 엔진 소리가 낮게 깔려왔다.

 

보통의 승용차 소리가 아니었다.

 

무거운 화물차나 승합차가 골목길 어귀에서 속도를 줄이며 멈춰 서는 소리였다.

 

덜컹거리는 쇠붙이 소리, 그리고 낮게 웅얼거리는 사내들의 거친 음성이 밤안개를 뚫고 지유의 귓바퀴를 때렸다.

 

"이쪽이다. 번영회 앞 골목부터 막아."

 

"망볼 놈 둘 남기고, 나머지는 단숨에 치고 빠진다."

 

피가 차갑게 식어 내리는 감각에 지유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직감이 벼락처럼 온몸을 관통했다.

 

2. 박살 난 유리창과 핏빛 경고

 

지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카운터 쪽으로 발을 디디는 찰나였다.

 

쾅-!

 

귀청을 찢는 파열음과 함께 김밥집 정면의 커다란 통유리창이 산산조각 났다.

 

두꺼운 강화유리가 아니었던 탓에 유리 파편들은 폭탄이 터지듯 실내로 비산했다.

 

비명조차 지를 틈이 없었다.

 

와장창, 쨍그랑거리는 굉음이 적막한 삼거리 골목을 난도질했다.

 

"꺅!"

 

지유는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카운터 뒤쪽 바닥으로 몸을 웅크렸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들이 벽과 진열장에 부딪히며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살을 에일 듯한 겨울바람이 박살 난 창틀을 통해 사납게 들이닥쳤다.

 

"어이, 기집애 안에 있냐?"

 

거칠고 메마른 목소리가 깨진 창문 틈으로 들이박혔다.

 

어둠 속에서 검은 마스크와 털모자로 얼굴을 꽁꽁 싸맨 건장한 사내 세 명이 쇠파이프와 각목을 든 채 들이닥쳐 있었다.

 

골목 바깥에는 서너 명이 망을 보며 쇠사슬을 손에 감고 서 있는 형상이 흐릿하게 비쳤다.

 

"오늘 아주 날을 잡았구나, 엉? 어용 상인회니 뭐니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면 어떻게 되는지 아직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년이 모르는 모양인데."

 

사내 하나가 긴 쇠파이프로 남아 있던 유리창 파편을 닥치는 대로 부수며 안으로 불쑥 들이밀었다.

 

주방의 양은 냄비와 플라스틱 그릇들이 바닥으로 나뒹굴며 요란한 쇠소리를 냈다.

 

김밥을 말던 정갈한 도마가 쇠파이프에 찍혀 두 동강 났다.

 

지유는 파편 더미에 파묻힌 채 숨을 헐떡였다.

 

왼쪽 손등에 튄 유리 파편 탓에 피가 배어 나왔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카운터 밑바닥의 서류.

 

사내들의 목적이 그 서류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지유의 가슴을 짓눌렀다.

 

지유는 이를 악물고 카운터 하단을 온몸으로 막아서듯 버텼다.

 

하지만 깡패들의 목적은 당장의 수색이 아니었다.

 

그것은 철저한 공포의 각인이자 파멸의 예고였다.

 

"야, 가져와."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손짓하자, 뒤에 섰던 덩치가 페인트 통을 덜컥거렸다.

 

퍽-!

 

진득하고 비릿한 화학 약품 냄새를 풍기는 시뻘건 페인트가 가게 안쪽 하얀 벽면과 박살 난 메뉴판 위로 무자비하게 뿌려졌다.

 

붉은 액체가 피눈물처럼 흘러내렸다.

 

사내는 스프레이 락카를 꺼내 들더니 남아 있는 벽체와 부서진 셔터 문에 거칠게 글씨를 갈겨댔다.

 

'경고. 목숨이 아까우면 당장 남원을 떠나라. 다음은 네년 목이다.'

 

붉은 글씨가 번져가는 광경을 지유는 핏발 선 눈으로 응시했다.

 

공포를 넘어서는 차가운 분노가 지유의 심장을 꿰뚫었다.

 

"오늘 밤은 맛보기다."

 

우두머리 사내가 쇠파이프 끝으로 바닥의 깨진 유리 조각을 탁탁 두드리며 비열하게 짓씹었다.

 

"남원 땅 좁은 줄 모르고 날뛰지 마라. 시장님 발목 잡으려다가는 니 에미년 목숨줄부터 끊어지는 수가 있어. 알았냐?"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골목 입구에서 망을 보던 자의 다급한 휘파람 소리가 울렸다.

 

"형님! 저쪽 골목에서 사람 튀어나옵니다!"

 

"빠져!"

 

사내들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깨진 유리창 너머로 흙먼지를 일으키며 사내들이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골목 어귀에 대기하고 있던 무등록 봉고차가 굉음을 내며 질주해 사라졌다.

 

3. 찢겨진 적막, 달려온 발소리

 

골목길에 다시 찾아온 것은 귀가 먹먹할 정도의 적막이었다.

 

지유는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게 바닥은 그야말로 지옥의 난장판이었다.

 

은빛으로 번뜩이는 유리 파편들이 온 바닥을 뒤덮고 있었고, 붉은 페인트가 바닥과 벽을 난도질해 마치 도살장 같은 풍경을 자아냈다.

 

찬바람이 숭숭 들이치는 깨진 창문 사이로 남원의 싸늘한 밤공기가 밀려들었다.

 

지유의 손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이 바닥의 페인트 위로 섞여 들었다.

 

"지유야! 한지유!"

 

골목 끝자락에서 다급하게 외치는 목소리와 함께 거친 숨을 몰아쉬는 발소리가 메아리쳤다.

 

최민재(崔民在)였다.

 

남원일보사 수습기자 신분증을 목에 건 채 외투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민재가 숨을 헐떡이며 김밥집 문간으로 뛰어들었다.

 

깨진 유리창과 붉게 물든 벽을 목격한 민재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이, 이게 다 뭐야……!"

 

민재는 바닥의 유리 조각을 밟으며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이닥쳤다.

 

바닥에 웅크린 채 피를 흘리고 있는 지유를 발견하자 민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지유야! 너 다쳤어? 어디 다친 데 없어? 괜찮아?"

 

민재가 무릎을 꿇으며 지유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의 손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지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저었다.

 

"나, 괜찮아…… 민재야. 난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손에 피가 이렇게 철철 나는데!"

 

민재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지유의 다친 손등을 황급히 감쌌다.

 

그의 시선이 벽면에 휘갈겨진 붉은 협박 문구로 향했다.

 

'다음은 네년 목이다.'

 

민재의 턱관절이 부서질 듯 맞물렸다.

 

"개자식들…… 짐승만도 못한 새끼들! 기어이 이런 짓까지 해?"

 

민재는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유리 조각이 그의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분노에 찬 민재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한양토건 놈들이야. 시장 놈 사주를 받고 움직인 거라고! 내가 번영회에서 오 회장 뇌물 녹음테이프를 깠을 때부터 이런 짓을 꾸밀 줄 알았어. 그런데 이렇게 바로 들이닥칠 줄은……!"

 

민재는 헐떡이며 지유를 부축해 일으켰다.

 

지유는 흔들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겨우 섰다.

 

그녀의 눈동자는 붉은 페인트와 깨진 유리창을 지나, 카운터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비밀 서류는 무사했다.

 

그 사실을 확인하자 비로소 멎었던 숨이 터져 나왔다.

 

"민재야, 네가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시간이 이렇게 늦었는데……."

 

지유의 갈라진 목소리에 민재가 붉어진 눈으로 지유를 바라보았다.

 

"신문사 편집국에 있다가 선배 놈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어. 오늘 밤 삼거리 쪽에 '대청소'가 있을 거라는 둥, 시청 도시과랑 경찰서가 미리 손을 맞춰놨다는 둥 하는 소리 말이야. 뭔가 불길해서 자전거를 타고 미친 듯이 달려왔는데…… 젠장, 내가 한 발 늦었어.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왔어도……!"

 

자책감에 젖은 민재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지유는 피 묻은 손으로 민재의 팔을 지그시 잡았다.

 

"아냐, 민재야. 네 탓이 아니야. 네가 오지 않았으면 저 사람들은 가게를 다 불태우고 갔을지도 몰라. 네가 달려오는 발소리를 듣고 도망친 거야."

 

지유의 음성은 놀라울 정도로 차분해져 있었다.

 

비록 몸은 떨리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공포에 굴복한 피해자의 눈이 아니라, 적의 실체를 똑똑히 확인한 투사의 눈이었다.

 

"신고해야 해."

 

민재가 벌떡 일어섰다.

 

"경찰에 신고하자. 이 정도면 명백한 야간 주거침입에 특수재물손괴, 살인 협박이야. 현장 보존하고 당장 순찰차 부를게."

 

민재는 동문 우체국 앞 공중전화로 달려가기 위해 발을 돌렸다.

 

지유는 말리지 않았다.

 

아니, 경찰이 이 사태에 어떻게 반응할지 똑똑히 확인해야만 했다.

 

남원의 공권력이 누구의 발밑에 엎드려 있는지, 그 잔혹한 현실의 바닥을 지유는 제 눈으로 직접 보아야 했다.

 

4. 미온적인 불청객, 남원 카르텔의 민낯

 

신고를 한 지 무려 마흔 번의 분침이 지나서야 순찰차 한 대가 느릿느릿 골목길로 기어들어왔다.

 

경광등조차 켜지 않은 채였다.

 

차 문이 열리고 남원경찰서 중앙파출소 소속의 경사 하나와 순경 하나가 내렸다.

 

그들의 입에서는 역한 담배 냄새와 함께 귀찮음이 잔뜩 묻어나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경사는 깨진 유리창과 피처럼 낭자한 붉은 페인트를 보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마치 이미 일어날 일을 다 알고 있었다는 듯한, 지극히 무심하고 태연한 태도였다.

 

"어디 다친 사람은 없고?"

 

경사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껌을 짝짝 씹으며 물었다.

 

민재가 기가 차서 앞을 가로막았다.

 

"경사님! 다친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현장을 좀 보십시오! 신원 미상의 괴한 서너 명이 쇠파이프를 들고 쳐들어와서 가게를 박살 내고 살인 협박 문구를 남기고 도망쳤습니다! 피해자 손에 유리 파편이 박혀 피까지 흘렸어요! 이건 명백한 강력 범죄입니다!"

 

민재가 기자 신분증을 내밀며 언성을 높이자, 경사는 흘깃 신분증을 쳐다보더니 혀를 찼다.

 

"아이고, 남원일보 최 기자 양반인가? 거 참, 밤늦게 열정이 대단하시네. 그런데 말이야, 최 기자. 이게 무슨 강력 범죄까지야. 요즘 구도심 정비사업 때문에 상인들끼리 이권 다툼이 심하다더니, 지들끼리 홧김에 술 처먹고 깽판 친 거구먼."

 

"뭐라고요? 이권 다툼이요?"

 

민재의 목소리가 뒤집혔다.

 

"조직폭력배들이 흉기를 들고 계획적으로 테러를 저지른 겁니다! 봉고차를 대기시켜놓고 망까지 보면서 저지른 짓이라고요! 지금 당장 도주로 파악해서 검문검색 안 띄웁니까?"

 

그러자 젊은 순경이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아, 이 양반아. 밤중에 불도 안 켜진 골목에서 얼굴도 안 보였다면서 무슨 검문검색 타령이야. 그리고 이 골목에 방범카메라가 있어 뭐가 있어? 목격자도 없고 증거도 없는데 누구를 잡으라는 거야?"

 

"증거요? 이 쇠파이프 자국과 붉은 페인트, 그리고 저기 남겨진 협박 글씨가 증거 아닙니까!"

 

민재가 벽을 가리키며 악을 썼다.

 

하지만 경사는 담배꽁초를 길바닥에 툭 던져 비벼 끄며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카운터 쪽에 서 있는 지유를 힐끔거리며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한지유 학생이라고 했나? 내가 듣자 하니 학생이 동네 어른들 하는 개발 사업에 사사건건 훼손을 놓고 초를 쳤다면서? 상인회 어르신들이 오죽 답답했으면 이런 짓까지 벌였겠어.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말도 몰라? 적당히 보상금 받고 타협해서 나갈 생각을 해야지, 어린 학생이 고집 피우다가 화를 자초한 거 아니야?"

 

경사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경찰의 언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강태석 남원시장과 한양토건, 그리고 타락한 번영회가 뱉어내던 논리와 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다.

 

'경찰까지…… 전부 한패였어.'

 

지유는 차가운 전율을 느꼈다.

 

소방과 위생과의 표적 단속, 번영회의 집단 따돌림, 그리고 한밤의 쇠파이프 테러와 경찰의 방조.

 

남원이라는 거대한 도시 전체가 하나의 썩어빠진 카르텔이 되어, 힘없는 여고생 하나와 낡은 김밥집을 쥐어짜고 짓밟으려 들고 있었다.

 

법과 정의를 수호해야 할 제복 입은 경찰관이, 피해자를 범죄를 유발한 원인 제공자로 몰아가고 있었다.

 

민재는 눈이 뒤집혀 경사의 멱살을 잡을 기세로 달려들었다.

 

"말 다 했습니까! 당신 경찰 맞아? 강태석 시장한테 뇌물 처먹고 조폭들 뒤나 봐주는 삼거리 토건 하수인이냐고!"

 

"이 새끼가 진짜!"

 

경사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지며 민재의 멱살을 낚아채려 했다.

 

"공무집행방해로 유치장에 처넣어 줘? 어디서 쥐뿔도 없는 수습기자 놈이 공권력에 대들고 지랄이야!"

 

"해보세요! 어디 처넣어 보라고! 내일 아침 신문에 당신 이름 석 자랑 남원경찰서의 직무유기 행태를 대문짝만하게 박아버릴 테니까!"

 

일촉즉발의 유혈 사태가 벌어지려는 찰나였다.

 

5. 침묵의 응시, 부러지지 않는 칼날

 

"그만하세요."

 

가게 안을 가르고 나온 것은 낮고 서늘한 지유의 목소리였다.

 

유리 파편을 밟으며 걸어 나오는 지유의 발소리가 사각사각 울렸다.

 

손등에 감은 흰 손수건 위로 붉은 피가 배어 나와 선명한 꽃처럼 번져 있었지만, 지유의 얼굴에는 눈물 한 방울조차 고여 있지 않았다.

 

경사와 순경, 그리고 씩씩거리던 민재의 시선이 일제히 지유에게 쏠렸다.

 

지유는 경사의 바로 코앞까지 걸어와 똑바로 그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열아홉 여고생의 맑고 깊은 눈동자에는 일말의 두려움도, 굴복의 기색도 없었다.

 

오히려 그 투명하고 서늘한 눈빛에 압도당한 것은 덩치 큰 사내인 경사 쪽이었다.

 

경사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반 발짝 뒤로 물러섰다.

 

"학생…… 뭐, 할 말 있어?"

 

지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고, 단어 하나하나가 얼음송곳처럼 단단했다.

 

"경사님 명찰에 적힌 이름 석 자, 잘 보았습니다. 지금 하신 말씀, 조서에 한 글자도 빠짐없이 그대로 적어주세요."

 

"뭐?"

 

"피해자가 고집을 피워 화를 자초했다는 말. 신원 미상의 괴한들이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살인 협박을 했는데도 목격자가 없어 수사할 수 없다는 말. 그리고 상인들의 단순한 홧김 난동이니 피해자가 감내해야 한다는 그 판단까지. 전부 정식 사건 접수 대장에 적어주십시오."

 

경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이, 이 기집애가 어디서 조서를 쓰라 마라 훈계질이야?"

 

"못 적으시겠다면, 제가 적겠습니다."

 

지유는 교복 치마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과 볼펜을 꺼냈다.

 

흔들림 없는 손으로 수첩을 펴고 경사의 계급과 성명, 그리고 파출소의 출동 시각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각거리는 펜촉 소리가 적막한 골목길에 칼날처럼 울려 퍼졌다.

 

"이건 단순한 유리창 파손 사건이 아닙니다. 이 자리에 계신 두 분 경찰관께서 어떤 태도로 현장을 방치하고 은폐하려 했는지, 저는 시간 단위로 전부 기록해 둘 겁니다. 그리고 법이 바로 설 날이 오면, 이 기록을 들고 제일 먼저 책임을 물을 겁니다."

 

순경이 기가 질린 듯 경사의 소매를 슬그머니 잡아당겼다.

 

"선배님…… 일단 대충 접수하고 가시죠. 쟤 보통 독종이 아닌 것 같습니다."

 

경사는 지유의 서늘한 눈빛을 더 이상 마주하지 못하고 시선을 회피했다.

 

어린 계집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어지간한 거물 정치인이나 고위 관료 못지않게 서슬 퍼렜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뭐 하는 년이길래 눈 하나 깜짝 안 해?'

 

경사는 헛기침을 크게 하며 서류철을 탁 덮었다.

 

"에이, 거 참! 누가 수사 안 해준다고 했나? 일단 순찰차 돌리면서 주변 수색해 볼 테니까, 학생은 내일 날 밝으면 파출소 나와서 진술서나 써. 가자, 김 순경!"

 

경사와 순경은 도망치듯 순찰차에 올라탔다.

 

쾅 닫히는 차 문 소리와 함께 순찰차는 허겁지겁 골목을 빠져나갔다.

 

붉은 후미등이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지유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6. 새벽빛 아래의 맹세

 

경찰이 떠나간 뒤, 골목길에는 다시 혹독한 추위만이 남았다.

 

"지유야……."

 

민재가 다가와 참담한 표정으로 지유를 불렀다.

 

그의 두 눈에 맺힌 눈물이 마침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미안하다. 내가 신문사에 있으면서도 이런 쓰레기 같은 카르텔 하나 못 찢고…… 너한테 이런 꼴을 보이고…… 정말 미안해."

 

민재는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기자라는 자부심, 남원을 지키겠다는 다짐이 경찰의 뻔뻔한 직무유기 앞에서 무력하게 부서진 탓이었다.

 

지유는 조용히 다가가 민재의 어깨를 토닥였다.

 

"울지 마, 민재야. 우리가 왜 울어. 죄지은 놈들이 울어야지."

 

지유는 바닥에 떨어진 빗자루를 집어 들었다.

 

손등의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와 빗자루 손잡이를 붉게 물들였지만, 지유는 아랑곳하지 않고 깨진 유리 조각들을 쓸어 모으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유리 파편이 부딪히는 소리가 새벽을 깨웠다.

 

민재도 눈물을 훔치며 깨진 쓰레받기를 들고 지유의 곁에 붙어 섰다.

 

두 소년 소녀는 아무 말 없이, 묵묵하게 난장판이 된 삶의 터전을 치워나갔다.

 

깨진 유리 조각을 한 포대 가득 담아내고, 쏟아진 그릇들을 주워 담았다.

 

벽에 뿌려진 붉은 페인트는 물걸레로 아무리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았다.

 

붉은 흉터처럼, 남원의 추악한 권력이 남긴 낙인처럼 벽면에 흉측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지유는 걸레질을 멈추고 붉은 낙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음은 네년 목이다.'

 

지유의 입술가에 희미하고 서늘한 미소가 어렸다.

 

'겁먹지 않아.

 

너희가 이럴수록, 난 더 분명히 알겠어.

 

너희가 지금 얼마나 두려움에 떨고 있는지.

 

카운터 밑의 서류가 세상에 드러나는 날, 너희가 쌓아 올린 그 거대한 성채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릴 거라는 걸…… 너희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거야.'

 

동쪽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어둠이 걷히고 새벽안개가 요천 변으로 흩어지는 시간.

 

지유는 가게 안쪽 방으로 들어가 책상 서랍을 열었다.

 

거기에는 신림동 고시촌에서 재환이 보냈던 관제엽서들이 정갈하게 묶여 있었다.

 

지유는 조심스럽게 엽서 한 장을 꺼내 들었다.

 

'Fiat justitia, ruat caelum.'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재환의 각인 만년필에 새겨져 있던 그 라틴어 법언이, 흑청색 잉크의 단단한 필체 너머로 살아 숨 쉬는 듯했다.

 

지유는 피 묻은 손으로 엽서를 가만히 쓸어내렸다.

 

'재환아.

 

남원의 하늘은 지금 새카맣게 무너져 내리고 있어.

 

하지만 난 도망치지 않아.

 

네가 법복을 입고 이 썩어빠진 땅으로 돌아오는 그날까지,

난 이 깨진 유리창을 온몸으로 막아서며 내 자리에서 버틸 거야.

 

그러니 너는 뒤돌아보지 말고, 오직 칼날만을 갈아줘.'

 

지유는 엽서를 가슴에 품고, 다시 깨진 창문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아침을 여는 찬란한 햇살이 박살 난 유리창 틀 사이로 비쳐 들며, 피 묻은 지유의 얼굴과 깨진 잔해들을 눈부시게 비추기 시작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