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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23화

남겨진 친구들의 연대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붉은 상흔과 새벽의 연기

 

새벽 네 시 반, 눅눅한 안개가 골목 바닥을 낮게 기어 다녔다.

 

동문 우체국 뒷골목의 좁은 삼거리는 쥐 죽은 듯 가라앉아 있었으나 공기에는 매캐한 시너 냄새와 덜 마른 붉은 래커 페인트의 비릿한 악취가 엉겨 붙어 있었다.

 

한지유는 굳은살이 박인 손에 철수세미를 쥔 채 쪼그려 앉아 있었다.

 

양철 셔터 하단에 거칠게 흩뿌려진 붉은 글씨는 아무리 문질러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철거 거부 빨갱이', '상가 발전 가로막는 년'.

 

손가락 마디마디가 시너 독에 아려오고 손톱 밑으로 붉은 물이 스며들었지만 지유는 입술을 깨문 채 솔질을 멈추지 않았다.

 

바닥에 놓인 양동이 물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수세미가 양철판을 긁어댈 때마다 삐걱거리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골목의 침묵을 찢었다.

 

건너편 떡집과 포목점의 덧문 틈새로 조심스럽게 새어 나오는 불빛들이 보였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어머니의 안부를 묻고 떡 한 덩이를 건네던 이웃들이었다.

 

지금 그들은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인 채, 쇠파이프를 든 용역 깡패들이 지나간 자리에 홀로 남겨진 열아홉 살 소녀를 숨죽여 훔쳐보고만 있었다.

 

지유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그 차가운 시선들과 마주치는 순간, 가슴속 밑바닥에서 악착같이 붙들고 있는 무언가가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지유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안개를 가르고 들려왔다.

 

자전거 바퀴가 자갈을 밟으며 멈추는 소리와 함께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이어졌다.

 

골목 어귀에서 뛰어온 윤하은의 두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하은은 헐레벌떡 달려와 바닥에 팽개쳐진 찢어진 비닐 천막과 셔터의 붉은 낙서를 보자마자 입을 틀어막았다.

 

"이게…… 이게 다 뭐야? 대체 누가……."

 

"쉿, 하은아. 소리 낮춰."

 

지유가 땀에 젖은 앞머리를 손등으로 쓸어 올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파랗게 질린 입술과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하은은 무릎을 꿇고 털썩 주저앉더니 지유의 손에서 거친 철수세미를 뺏어 들었다.

 

"손이 이게 꼴이 뭐야, 다 부르텄잖아! 왜 말을 안 했어? 어젯밤에 그런 놈들이 왔다 갔으면 바로 우리 집에 전화를 했어야지!"

 

"너까지 부르면 목공소 아저씨도 걱정하시잖아. 그리고…… 이런 꼴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우리가 남이야?"

 

하은의 눈에 왈칵 눈물이 고였다.

 

하은은 교복 소매를 걷어붙이고 바가지로 물을 퍼서 셔터에 끼얹었다.

 

"어떻게 사람이 이래? 저기 건너편 오 회장 아저씨도, 떡집 아줌마도 다 봤을 거 아니야! 쇠파이프 든 놈들이 셔터를 두들겨 패고 고함을 질렀는데 어떻게 문 하나 안 열어봐? 다들 미쳤어, 정말 미쳤다고!"

 

"다들 무서운 거야. 그리고…… 강태석 시장이 준다는 그 돈이 너무 커서 그래."

 

지유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상인회 어른들 탓하고 싶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어머니가 쓰러지셨을 때도 다들 조금씩은 도와줬던 분들이야. 강태석 그 인간이 사람 마음을 돈으로 흔들어놓은 거지."

 

"그렇다고 널 이렇게 생매장하듯 내팽개쳐? 어제 낮에는 우리 가게 앞까지 와서 배 씨 아저씨가 소리를 질렀어. 지유네 김밥집 때문에 자기들 보상금 깎이게 생겼다고, 너더러 제발 나가라고 하라고! 우리 아빠가 소금 뿌려서 쫓아내긴 했지만…… 나 진짜 남원 사람들이 이렇게 무서운 줄 몰랐어."

 

하은이 울분을 삼키며 붉은 페인트를 박박 문질렀다.

 

두 소녀의 손길 아래서 붉은 얼룩이 서서히 묽어지며 검은 잿빛 국물이 되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동쪽 하늘이 희뿌옇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새벽 다섯 시가 넘어가자 요천 변 방앗간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안개와 뒤섞였다.

 

지유는 일어서서 굳은 허리를 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켜자 정갈하게 닦인 스테인리스 조리대와 가스레인지가 드러났다.

 

지난주 소방과와 위생과의 표적 단속을 뚫어내기 위해 목공소 윤 씨와 민재, 하은이 피땀 흘려 고쳐놓은 주방이었다.

 

아무리 겉에 붉은 칠을 하고 천막을 찢어발겨도, 안쪽의 단단한 심장은 상하지 않았다.

 

"하은아, 울지 말고 쌀 안치자."

 

지유가 앞치마를 둘렀다.

 

"오늘 김밥 싸야 해. 어머니 병원비도 내야 하고, 오늘부터 상인회에서 본격적으로 불매운동 한다고 했으니까…… 단 한 줄이라도 사러 오는 손님이 있으면 웃으면서 팔아야 해."

 

하은은 눈물을 훔치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오늘 당근 채 썰고 달걀지단 부칠게. 나 이제 지단 안 태우고 예쁘게 부칠 수 있어."

 

지유는 말없이 하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어깨를 타고 전해지는 온기가 차갑게 식어 있던 가슴을 서서히 데워주었다.

 

세상이 온통 적으로 변한 것 같은 삭막한 골목 한가운데서도, 자신을 향해 뻗어 있는 손이 단 하나라도 존재한다는 사실이 지유를 다시 숨 쉬게 했다.

 

2. 어둠 속의 비밀 회동

 

오전 일곱 시, 구도심 번영회 사무실이 있는 상가 2층 복도는 적막했다.

 

아직 출근 시간이 아니었지만 최민재는 이미 한 시간 전부터 계단참 구석 어둠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남원일보사 수습기자 신분증이 목에 걸려 있었고, 품 안에는 어제 오후 번영회 지하 다방에서 한양토건 박진철 회장과 상인회 오 회장이 주고받은 검은 뒷거래 육성이 담긴 소형 카세트테이프가 묵직하게 들어차 있었다.

 

계단 아래에서 거친 구두 굽 소리가 울렸다.

 

포목점 오 회장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도둑고양이처럼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한양토건의 현장소장이자 강태석의 행동대원 중 하나인 배 대표의 부하가 바짝 붙어 있었다.

 

"이거 확실한 거지? 시청 도시과에 오늘 열 시까지 제출해야 특별 보상금 대상자로 묶인다고 했소."

 

오 회장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걱정 마쇼, 오 회장님. 박 회장님이 남원시장님한테 직접 언질 받았습니다. 번영회 임원 열 명한테는 신축 테마 상가 1층 노른자위 코너 자리 우선 분양권에다가, 프리미엄 피(P) 붙여서 되팔 수 있게 전매 제한도 싹 풀어주기로 공증서 써 드린다니까요."

 

"그…… 삼거리 김밥집은 어쩔 텐가? 어젯밤에 애들 보냈다면서?"

 

"아, 그깟 계집애 하나 버틴다고 대세가 꺾입니까? 오늘 아침에 상인들한테 공문 돌려서 김밥집 출입하는 놈은 상인회에서 제명하고 보상 평가 감점 먹인다고 으름장을 놓으세요. 지들이 굶어 죽지 않고 배겨?"

 

두 사람의 비열한 웃음소리가 복도 벽을 타고 흘렀다.

 

사무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둔탁한 소리가 나자 민재는 숨을 죽인 채 계단 난간을 꽉 쥐었다.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고 턱관절이 부서질 듯 맞물렸다.

 

'더러운 인간들.'

 

민재는 어제 녹음한 카세트테이프의 감촉을 손끝으로 확인했다.

 

어제 지하 다방 소파 뒤편에서 엿들은 대화는 상상을 초월하는 추악한 야합이었다.

 

강태석 남원시장은 삼거리 일대 3만 평을 '관광특구 개발정비구역'으로 지정하면서, 상인들에게는 '시세의 130% 보상'이라는 달콤한 사탕발림을 던졌다.

 

하지만 그 130%라는 숫자는 현재 시세가 아니라 1992년 공시지가, 즉 3년 전의 헐값 기준이었다.

 

실제 상인들이 손에 쥐는 돈은 지금 상가를 팔았을 때 받을 수 있는 권리금과 바닥 시세의 70%에도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새로 짓는다는 '남원 춘향 전통 테마 타운' 상가에 입주하려면 평당 600만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추가 건축 분담금을 현금으로 납부해야 했다.

 

결국 수십 년간 피땀 흘려 터전을 일군 영세 세입자와 노점상들은 쥐꼬리만 한 보상금을 받고 쫓겨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오직 시청과 결탁해 뒷돈을 챙긴 오 회장과 번영회 간부 몇몇만이 특혜 분양권을 받아 막대한 시세 차익을 챙기는 잔인한 사기극이었다.

 

민재는 수첩을 꺼내 오 회장의 사무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정비사업 주민 동의서 및 보상금 산정 기준표' 사본의 조항들을 빠르게 머릿속으로 복기했다.

 

어제 늦은 밤, 시청 지적과와 도시과를 드나들며 친분을 쌓았던 하급 공무원 선배를 통해 몰래 빼돌려 복사해 둔 서류였다.

 

그 계약서의 제8조 3항과 제12조 특약에는 상인들의 숨통을 끊어놓을 독소 조항들이 빽빽하게 박혀 있었다.

 

'보상금 수령 후 30일 이내 자진 퇴거하지 않을 시, 기지급된 보상금의 배액을 위약벌로 배상하며 시는 즉각 행정대집행을 단행한다.'

 

'신축 상가 분양 면적 및 위치 배정은 시행사(한양토건)의 고유 권한으로 하며, 피분양자는 일체의 민형사상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이건 보상이 아니었다.

 

상인들의 목에 스스로 밧줄을 걸게 만드는 백지위임장이었다.

 

'지유 혼자서는 이 거대한 사기극을 밝혀낼 수 없어. 상인들도 지금 눈이 멀어서 저 독사 같은 놈들의 손을 잡고 있는 거야.'

 

민재는 결연한 눈빛으로 신문사 출입증을 옷 안으로 집어넣었다.

 

신문사 편집국 데스크는 이미 강태석 시장이 쥐여준 관공서 광고비와 인쇄용지 납품권에 눈이 멀어 있었다.

 

민재가 가져간 비리 메모와 뇌물 녹음테이프를 보았을 때 사회부장은 뺨을 후려칠 듯이 화를 내며 테이프를 빼앗으려 들었다.

 

지방 일간지 수습기자라는 명함은 강태석이라는 거대한 괴물 앞에서는 아무런 방패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내부 고발자로 찍혀 신문사에서 쫓겨나고 신변의 위협을 받을 판이었다.

 

'합법적인 언론이 입을 닫았다면, 내가 직접 바닥에서 싸우는 수밖에 없다.'

 

민재는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았다.

 

그의 자전거는 신문사가 아닌, 삼거리 김밥집을 향해 쏜살같이 내달렸다.

 

3. 김밥을 마는 손길

 

오전 아홉 시 반, 김밥집 안에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와 갓 지은 밥 냄새가 가득 퍼져 있었다.

 

하은은 머리에 수건을 단정하게 두르고 커다란 양푼에 담긴 밥을 주걱으로 부지런히 갈랐다.

 

소금과 참기름을 알맞게 두르고 주걱 날을 세워 밥알이 으깨지지 않도록 섞는 솜씨가 제법 능숙했다.

 

"지유야, 밥 간 어때? 네가 먹어봐."

 

하은이 숟가락으로 밥 한술을 떠서 지유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지유는 조심스레 맛을 보더니 엷은 미소를 지었다.

 

"딱 좋아. 하은이 너 이제 우리 엄마보다 밥 더 잘 비비겠다."

 

"히히, 내가 요천 방앗간 딸 경력 십팔 년인데 참기름 냄새만 맡아도 간을 알지!"

 

하은이 가슴을 탕탕 치며 장난스레 웃었다.

 

어두웠던 주방 안이 하은의 웃음소리로 잠깐이나마 환해졌다.

 

지유는 김발 위에 거친 면이 위로 오도록 김을 펴놓고 밥을 얇게 폈다.

 

그 위에 갈색으로 정성껏 조린 우엉채, 직접 채 썰어 볶은 당근, 소금물에 절여 물기를 꽉 짠 오이, 두툼하게 부쳐낸 노란 달걀지단, 그리고 분홍빛 햄과 단무지를 가지런히 올렸다.

 

김발을 말아 쥐는 지유의 손끝은 단단하고 야무졌다.

 

김밥 옆구리가 터지지 않도록 지그시 힘을 주어 둥글게 말아낸 뒤 칼날에 참기름을 살짝 묻혀 일정한 두께로 썰어냈다.

 

도마 위에 놓인 김밥 단면은 오색 꽃처럼 정갈했다.

 

어머니가 남원의료원 중환자실 차가운 침대에 누워 사경을 헤매는 동안, 지유는 이 작은 도마 위에서 하루하루 어머니의 생명을 건져 올리고 있었다.

 

김밥 한 줄에 천 원.

 

어머니의 하루 투석비와 중환자실 입원비를 감당하려면 매일 수백 줄을 말아야 했다.

 

손가락 관절마다 파스를 붙이고 새벽마다 시너 냄새를 맡아가며 버티는 이유였다.

 

하지만 가게 밖의 공기는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늘 이 시간이면 아침 출근길 직장인들과 완월정, 광한루원을 찾는 관광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어야 할 시간이었지만, 가게 안은 적막했다.

 

유리문 밖 골목 어귀에 번영회 청년 둘이 팔짱을 낀 채 서서 김밥집 쪽으로 걸어오는 손님들을 노골적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야, 저기 빨갱이 집 김밥 먹으면 배탈 난다! 상가 재개발 막는 재수 없는 집이야!"

 

청년들이 험악하게 혀를 차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위협하자, 손님들은 힐끔거리며 발길을 돌려 골목 밖으로 빠져나갔다.

 

"저…… 저 개자식들이 진짜!"

 

하은이 칼을 내려놓고 뛰어나가려 하자 지유가 얼른 하은의 손목을 잡았다.

 

"하은아, 참아. 싸우면 저 사람들이 노리는 대로 되는 거야. 업무방해로 경찰 부르면 강태석 시장 경찰들이 우리한테 뒤집어씌울 거야."

 

"그럼 이걸 보고만 있어? 장사 다 망치게 생겼는데?"

 

하은의 눈에 억울함과 분통이 터져 나왔다.

 

그때 가게 문에 달린 작은 종이 맑은 소리를 내며 울렸다.

 

딸랑.

 

"계십니까."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뜻밖에도 골목 끝에서 낡은 구두 수선대를 운영하는 지체장애인 김 씨 아저씨였다.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절며 목발을 짚은 김 씨 아저씨는 주위를 살피며 들어와 문을 얼른 닫았다.

 

"아저씨……."

 

지유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김 씨 아저씨는 번영회 눈치를 보느라 땀으로 젖은 이마를 훔치며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지폐 세 장을 조심스럽게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지유 학생, 김밥 세 줄만 싸 줘. 점심이랑 저녁때 먹게."

 

"아저씨, 번영회 사람들이 밖에서 보고 있을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아저씨한테 해코지할까 봐 그래요."

 

지유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속삭이자 김 씨 아저씨는 거칠게 트튼 손으로 지유의 손등을 툭툭 쳤다.

 

"해코지하라 그래. 내가 이 골목에서 삼십 년 구두 닦았어. 네 아버지, 석규 씨가 살아생전에 나한테 어떻게 해줬는데…… 그 비 오던 날 내 리어카 바퀴 빠졌을 때 자기 트럭 몰고 와서 진흙탕에서 꺼내준 사람이 네 아버지야. 저 오 회장 놈이나 강태석 놈이 번지르르한 소리 지껄여도 난 알아. 누가 진짜 사람이고 누가 짐승인지. 기죽지 마라, 지유 학생. 하늘이 보고 있어."

 

김 씨 아저씨의 투박한 한마디에 하은은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고, 지유의 눈가에도 뜨거운 열기가 번졌다.

 

지유는 정성껏 싼 김밥 세 줄에 한 줄을 더 얹어 알루미늄 포일로 꼼꼼하게 감쌌다.

 

"아저씨, 이건 덤이에요. 따뜻할 때 드세요."

 

"아이고, 학생도 어려운데 뭘 자꾸…… 고마워, 잘 먹을게. 힘내야 해, 알았지?"

 

김 씨 아저씨가 김밥 봉지를 품에 소중히 안고 문을 나섰다.

 

밖에서 감시하던 청년들이 김 씨 아저씨를 향해 삿대질하며 욕설을 퍼부었지만, 아저씨는 묵묵히 목발을 짚으며 앞만 보고 걸어갔다.

 

그 굽은 등 뒤로 맑은 가을 햇살이 비쳐 내렸다.

 

지유는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묵직한 힘을 느꼈다.

 

모두가 적으로 돌아선 것 같아도, 진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반드시 존재했다.

 

그 한 사람의 온기만으로도 이 차가운 겨울 같은 골목을 버텨낼 이유는 충분했다.

 

4. 폭로된 기만과 독소 조항

 

가게 문이 다시 거칠게 열렸다.

 

땀에 젖은 머리칼을 흩날리며 뛰어 들어온 이는 민재였다.

 

민재는 어깨에 멘 낡은 가죽 가방에서 두툼한 서류 뭉치를 꺼내 식탁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지유야, 하은아. 이거 봐."

 

민재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민재야, 숨 좀 돌리고 말해. 물 줄까?"

 

하은이 보리차 컵을 건넸지만 민재는 고개를 저으며 서류의 첫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럴 시간 없어. 오 회장 그 인간, 오늘 오전 열 시에 상인들 도장 찍은 동의서 들고 시청 도시과로 들어간대. 벌써 구도심 상인 칠십 퍼센트가 도장을 찍었어. 이대로 넘어가면 삼거리 전체가 강제 수용 절차로 직행이야."

 

"칠십 퍼센트나요? 그렇게 많이요?"

 

지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강태석이 평당 백삼십 퍼센트 보상해 준다고 현혹했으니까. 상인들은 지금 시세의 일 점 삼 배를 받는 줄 알고 좋아라 도장을 찍고 있어. 하지만 이 계약서 원본을 봐."

 

민재는 볼펜을 꺼내 서류의 세부 항목에 붉은 밑줄을 그어가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기자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과 분석력이 돋보였다.

 

"여기 제4조 보상금 산정 기준을 봐. '지가공시 및 토지등의 평가에 관한 법률에 의거하되, 기준 지가는 1992년도 표준지 공시지가를 적용한다.' 이게 뭔 소린지 알아?"

 

하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1992년? 지금이 1995년인데 왜 3년 전 걸 써?"

 

"그게 바로 함정이야. 지난 3년 동안 남원 시내 땅값이 얼마나 올랐는데! 1992년 공시지가는 지금 실거래가의 반토막도 안 돼. 거기에 백삼십 퍼센트를 얹어줘 봐야, 지금 상인들이 나가서 전세 한 칸 얻을 돈도 안 나오는 거야!"

 

지유는 숨을 들이켰다.

 

"그럼 상인들이 속고 있는 거네요?"

 

"속는 정도가 아니야. 완전히 도살장에 끌려가는 거지. 더 끔찍한 건 여기 제12조야. 신축 상가 우선 분양권! 강태석은 상인들한테 새 상가 준다고 큰소리쳤지? 여기 단서 조항을 봐. '단, 수분양자는 조합이 책정한 평당 건축비 및 기반시설 분담금을 전액 현금 납부하여야 하며, 미납 시 분양 자격은 자동 박탈된다.'"

 

민재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그 추가 분담금이 평당 육백만 원이야. 떡집 아줌마나 칠기사 배 씨 아저씨가 무슨 수로 현금 일억, 이억을 구해 와? 결국 입주도 못 해보고 분양권은 박 회장의 한양토건으로 헐값에 강제 귀속되는 거야. 상인들은 평생 일군 가게를 헐값에 뺏기고 빚더미에 앉아 쫓겨나는 거라고!"

 

서류를 들여다보던 하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사기를 쳐? 다들 평생 장사만 하느라 이런 법률 용어 같은 거 하나도 모를 텐데!"

 

"오 회장과 집행부 놈들은 알고 있어. 그놈들은 뒤로 한양토건한테 억대 뇌물 받고, 신축 상가 1층 알짜배기 지분을 무상으로 넘겨받기로 이면 계약을 맺었거든."

 

민재는 주머니에서 카세트테이프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여기 다 녹음되어 있어. 어제 박진철 회장이랑 오 회장이 나눈 대화야. 김밥집 불매운동 사주한 내용, 깡패들 시켜서 천막 찢으라고 시킨 내용까지 전부."

 

지유는 검은색 테이프를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어젯밤 자신의 가게를 부수고 붉은 페인트를 뿌린 자들의 배후가, 결국 자신들이 '이웃'이라 믿었던 상인회 회장의 사주였다는 사실이 가슴을 후벼 팠다.

 

하지만 슬픔보다 더 거대한 분노가 지유의 눈동자를 푸르게 물들였다.

 

"민재야, 이거 신문사에 낼 수 있어? 기사로 쓸 수 있어?"

 

지유의 물음에 민재는 고통스럽게 입술을 깨물었다.

 

"부장이…… 묵살했어. 강태석 시장이 남원일보 사주한테 이미 손을 썼어. 내가 이걸 기사로 올리면 난 바로 해고되고, 테이프는 파쇄기에 들어갈 거야."

 

"그럼…… 어떡해?"

 

하은이 울먹였다.

 

민재는 서류와 테이프를 집어넣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신문사가 안 쓰면, 우리가 직접 알려야 해. 오 회장이 시청에 동의서 제출하기 전에, 상인회 총회를 다시 열든가 골목에서 상인들을 붙잡고 이 계약서의 실체를 까발려야 해. 도장을 찍은 상인들도 아직 시청에 접수되기 전이면 동의 철회서를 낼 수 있어!"

 

지유는 카운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 헐거운 판자 밑에는 1991년, 자신의 아버지가 피눈물을 흘리며 뺏겼던 과수원의 진실—성재환의 부친 성호석과 강태석이 결탁했던 환지 비리 원본 서류가 숨겨져 있었다.

 

10년 전 아버지는 홀로 법을 믿고 싸우다 저들의 비열한 공작에 속아 땅을 뺏기고 한을 품은 채 돌아가셨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강태석은 똑같은 수법으로 구도심의 가난한 상인들을 도륙하려 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비극을 여기서 되풀이하게 둘 수는 없어.'

 

지유가 앞치마를 벗었다.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쫓기는 어린 여학생의 것이 아니었다.

 

"민재야, 나랑 가자."

 

"지유야? 어디를?"

 

"번영회 사무실. 오 회장이 상인들 서류 들고 시청으로 출발하기 전에 막아야 해. 상인들 다 불러 모아줘. 내가 직접 저 계약서 조항들을 읽어줄 거야."

 

"위험해! 거기 한양토건 깡패들이 지키고 있을 텐데!"

 

하은이 지유의 팔을 붙잡았다.

 

지유는 하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하은아, 도망치면 영원히 도망쳐야 해. 어제는 위생과였고, 그저께는 소방과였고, 어젯밤엔 깡패들이었어. 내가 가만히 있으면 다음엔 우리 가게가 무너지고, 그음엔 떡집이, 그다음엔 배 씨 아저씨네 칠기사가 부서질 거야. 우리가 남원에 남아서 재환이를 기다리기로 했다면…… 남원을 지켜야 해."

 

지유의 목소리에는 흔들림 없는 결의가 서려 있었다.

 

민재는 지유의 단단한 눈빛을 바라보며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서울 신림동에서 홀로 고시 공부를 하며 법의 칼날을 갈고 있을 성재환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재환아, 네가 없는 이곳에서 지유는 이렇게 싸우고 있다.'

 

민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아. 가자, 지유야. 내가 네 방패가 되어줄게."

 

5. 요천 둑길의 맹세

 

번영회로 향하기 직전, 하은이 잠시 가게 셔터를 내리는 동안 민재와 지유는 골목 밖 요천 둑길 어귀에 섰다.

 

가을바람이 요천 변 수양버들을 스치며 은빛 물결을 일으켰다.

 

저 멀리 광한루원의 누각 지붕이 아련하게 보였다.

 

불과 2년 전 봄날, 벚꽃이 흩날리던 요천 둑길에서 성재환과 함께 자전거를 타며 웃었던 기억이 바람결에 묻어났다.

 

그때 재환은 이 요천을 바라보며 '어떤 불의에도 타협하지 않는 참된 법'을 세우겠다고 맹세했었다.

 

그리고 지금, 재환은 서울 신림동 고시촌의 좁은 단칸방에서 흑청색 잉크로 법전을 파고들고 있을 터였다.

 

민재가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요천 둑길 난간을 짚었다.

 

그의 곁으로 하은이 다가와 조용히 섰다.

 

하은은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둑길 아래 유유히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침묵은 무겁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며 서로의 상처와 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깊고 투명한 침묵이었다.

 

"민재야."

 

하은이 나지막이 불렀다.

 

"응?"

 

"너…… 기자 일 그만두게 되면 어떡해? 너 어릴 때부터 남원을 부끄럽지 않은 곳으로 만드는 멋진 기자가 되는 게 꿈이었잖아."

 

민재는 둑길 너머 요천 물결을 응시하며 엷게 웃었다.

 

"기자가 별거냐. 힘없는 사람들 편에서 진실을 기록하고 소리쳐 주는 게 기자지. 높은 놈들한테 꼬리 치고 광고비 받아먹는 찌라시 노릇 할 거면, 난 차라리 지금 때려치우는 게 맞아."

 

민재는 고개를 돌려 하은을 바라보았다.

 

늘 밝고 씩씩하던 하은의 커다란 눈망울에 수심이 가득 차 있었다.

 

민재는 가슴 한구석이 찌릿해지는 통증을 느꼈다.

 

언제나 지유의 뒤에서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주던 하은이었지만, 그녀 역시 열아홉 살의 여린 소녀일 뿐이었다.

 

민재는 조심스럽게 하은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하은이 움찔하며 민재를 올려다보았다.

 

민재의 투박한 손바닥이 하은의 가녀린 손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하은아."

 

"……응?"

 

"이번 일 끝나고, 강태석 저 악마 같은 놈 끌어내리고 나면…… 나랑 약속 하나 해줄래?"

 

하은의 볼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바람이 두 사람의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무슨 약속?"

 

"나, 남원 안 떠나. 서울로 도망치지도 않을 거고, 끝까지 여기서 남원 지킬 거야. 재환이가 사법시험 붙어서 검사 법복 입고 내려올 때까지…… 지유가 혼자 외롭지 않게, 우리가 지유의 울타리가 되어주자."

 

민재는 하은의 손을 조금 더 꽉 쥐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지유가 재환이 품으로 안전하게 돌아가고, 이 남원에 진짜 봄이 오면…… 그때 나랑 결혼해 줘. 너랑 평생 이 요천 보면서 살고 싶어."

 

하은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툭 떨어져 민재의 손등 위로 번졌다.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사방이 낭떠러지 같은 절망의 시간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온전히 확인한 자만이 흘릴 수 있는 눈물겨운 안도감이었다.

 

하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민재의 품에 이마를 기댔다.

 

"응…… 약속해. 내가 평생 네 밥 해줄게. 대신 지유 울타리, 절대 부서지지 않게 네가 꽉 잡고 있어야 해. 알았지?"

 

"그래.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킬게."

 

둑길 저편에서 걸어오던 지유가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서로의 손을 꼭 쥔 채 바람을 맞서고 있는 민재와 하은.

 

그 아름다운 연대의 뒷모습을 보며 지유는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길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비록 서울의 재환은 닿을 수 없이 먼 곳에 있었지만, 재환이 남겨두고 간 이 따뜻한 친구들이 지금 자신의 등 뒤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었다.

 

지유는 옷깃을 여미며 가슴속 품어둔 재환의 증명사진을 지그시 눌렀다.

 

'재환아, 나 절대 쓰러지지 않아. 네가 돌아올 이 남원을, 우리가 반드시 지켜낼게.'

 

6. 찢겨진 장막을 걷고

 

오전 아홉 시 오십 분, 구도심 번영회 사무실 앞 복도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터질 듯했다.

 

오 회장은 검은 가죽 서류가방을 가슴에 품은 채 계단을 내려오려 하고 있었다.

 

가방 안에는 삼거리 상인 백여 명 중 칠십여 명의 인감이 날인된 '관광특구 개발정비사업 조기 이주 및 보상 협의 동의서'가 들어 있었다.

 

그의 뒤에는 한양토건 소속 덩치 큰 사내 셋이 호위하듯 버티고 서 있었다.

 

"비켜라, 최 기자. 나 지금 시청 시장실에 들어가야 해. 시장님이 직접 서류 받으시겠다고 약속하셨단 말이다."

 

오 회장이 헛기침을 하며 계단을 막아선 민재를 밀쳐내려 했다.

 

그러나 민재는 꿈쩍도 하지 않고 버텼다.

 

"오 회장님, 그 가방 안에 든 서류, 상인들 목줄인 거 알고 계시죠? 1992년도 공시지가 기준 보상금에, 신축 상가 추가 분담금 평당 육백만 원! 그거 상인들한테 단 한 번이라도 설명하셨습니까?"

 

민재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계단 아래와 1층 로비에 서성이던 상인들이 웅성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떡집 박 씨, 칠기사 배 씨, 철물점 최 씨 등 아침부터 서류 제출 결과를 기다리던 상인 대여섯 명이 불안한 눈빛으로 다가왔다.

 

"뭐, 뭐라고? 1992년 공시지가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최 기자?"

 

배 씨가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오 회장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 이 자식이 어디서 헛소문을 퍼뜨려! 야, 애들아! 이 새끼 당장 끌어내! 어디서 남원일보 핏덩이 수습 새끼가 공갈을 쳐!"

 

한양토건 사내들이 험악한 표정으로 주먹을 쥐고 민재의 멱살을 잡으려 달려들었다.

 

그 순간, 계단 아래에서 서늘하고 단호한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손대지 마세요!"

 

상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단정한 남원여고 교복 차림의 한지유가 계단을 꼿꼿이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어젯밤 시너로 지워내지 못한 붉은 페인트 얼룩이 손등과 손톱 밑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지만, 그녀의 걸음걸이에는 단 한 치의 비틀거림도 없었다.

 

지유의 손에는 민재가 입수한 정비사업 계약서 원본 사본이 들려 있었다.

 

"지…… 지유야?"

 

배 씨가 당황하여 뒷걸음질 쳤다.

 

지유는 오 회장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계단 한가운데 섰다.

 

"오 회장님. 정말 최 기자 말이 거짓말인가요? 그럼 상인 어르신들 앞에서 이 계약서 제4조와 제12조를 큰 소리로 읽어보실 수 있으세요?"

 

"뭐, 뭐야? 너 따위 어린 계집애가 뭘 안다고 건방지게 끼어들어! 당장 꺼져!"

 

오 회장이 삿대질하며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지유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서류를 펼쳐 들었다.

 

맑고 또렷한 목소리가 상인들의 귓전을 때렸다.

 

"'제4조. 토지 및 지장물의 보상 평가는 1992년도 표준지 공시지가를 기준으로 산정한다.' 배 씨 아저씨, 아저씨 칠기사 건물, 3년 전 공시지가로 백삼십 퍼센트 받아봐야 삼천만 원도 안 나와요. 지금 나가서 그 돈으로 요천 건너편 상가 전세나 얻을 수 있을 것 같으세요?"

 

배 씨의 턱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삼…… 삼천만 원? 아니, 오 회장! 백삼십 퍼센트면 지금 시세보다 삼천은 더 얹어준다고 하지 않았소!"

 

"거, 거짓말입니다! 저년이 지금 상가 재개발 훼방 놓으려고 소설을 쓰는 겁니다!"

 

오 회장이 말을 더듬으며 뒤로 물러섰다.

 

지유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떡집 박 씨를 바라보며 서류의 다음 장을 넘겼다.

 

"'제12조. 신축 상가 수분양자는 평당 육백만 원의 추가 건축 분담금을 현금 완납하여야 한다.' 박 씨 아줌마, 아줌마 떡집 스무 평 분양받으려면 현금 일억 이천만 원을 당장 내야 한대요. 그 돈 없으면 분양권 박탈당하고 쫓겨난대요! 오 회장님이 이 얘기, 도장 찍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해주셨어요?"

 

복도가 순식간에 벌집을 쑤셔놓은 듯 뒤집혔다.

 

"뭐야?! 일억 이천?!"

 

"우리가 그 큰돈이 어디 있어!"

 

"오 회장, 이게 진짜야? 진짜 저 서류에 그렇게 적혀 있어?!"

 

상인들이 계단을 뛰어 올라와 오 회장을 둘러쌌다.

 

한양토건 사내들이 상인들을 밀쳐내며 위협하려 했지만, 평생의 전 재산을 날릴 위기에 처한 상인들의 분노는 폭력보다 거셌다.

 

"이거 놔라! 내 도장 돌려줘! 시청에 제출하지 마!"

 

배 씨가 오 회장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배 씨, 미쳤어? 이거 놓지 못해?!"

 

아수라장이 된 복도 한가운데서 민재가 품 안에서 카세트테이프를 번쩍 치켜들었다.

 

"상인 여러분! 오 회장은 한양토건 박진철 회장한테 뇌물 받고 신축 상가 1층 무상 분양 약속까지 받았습니다! 여기 그 증거 녹음테이프가 있습니다! 오늘 열 시에 이 서류가 시청으로 들어가면 여러분은 법적으로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습니다! 당장 동의 철회서를 쓰셔야 합니다!"

 

"철회서 써! 당장 내 도장 내놔, 이 도둑놈아!"

 

상인들이 오 회장의 가죽 가방을 뺏기 위해 달려들었다.

 

가방이 찢어지며 하얀 서류 뭉치들이 계단 아래로 눈발처럼 흩날렸다.

 

오 회장은 사색이 되어 깡패들의 부축을 받으며 비상계단으로 도망쳤다.

 

상인들은 바닥에 떨어진 자신들의 동의서를 주워 허겁지겁 이름을 찢어발겼다.

 

그 난장판 속에서 지유는 조용히 계단 난간을 잡고 섰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며 다리가 풀릴 것 같았지만, 지유는 결코 주저앉지 않았다.

 

강태석이 놓아둔 거대한 사기의 덫에 균열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비록 완벽한 승리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상인들이 진실의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오늘 새벽의 피눈물은 헛되지 않았다.

 

민재와 하은이 계단을 올라와 지유의 곁에 섰다.

 

세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서로의 눈빛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읽을 수 있었다.

 

우리는 버텨냈다.

 

친구들의 연대는 권력의 칼날보다 질기고 단단했다.

 

7. 폭풍의 그림자

 

같은 시각, 남원시청 2층 시장 집무실.

 

육중한 참나무 책상 뒤에 앉은 강태석 남원시장은 손에 든 만년필을 뚝 부러뜨렸다.

 

부러진 펜대에서 검은 잉크가 흘러나와 집무실 카펫을 적셨다.

 

비서관과 소방과 이진구 계장이 고개를 조아린 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뭐라고? 동의서 제출이 무산돼?"

 

강태석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살기는 집무실 안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송구합니다, 시장님…… 번영회 사무실에서 남원일보 최민재 수습기자 놈과…… 그 삼거리 김밥집 한지유 년이 계약서 조항을 상인들한테 폭로하는 바람에…… 상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서류를 다 찢어발겼다고 합니다."

 

비서관의 보고에 강태석의 눈가가 파르르 경련했다.

 

강태석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에 이진구 계장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한지유…… 그 어린 년 하나를 못 꺾어서 이 사달을 내?"

 

강태석이 천천히 창가로 걸어갔다.

 

창밖으로 남원 시내와 요천 변의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성호석이 서울로 영전하며 버리고 간 이 도시를 완전히 집어삼키기 위해, 강태석은 수십억 원의 뇌물과 조폭 세력을 동원해 합법의 탈을 썼다.

 

그런데 겨우 열아홉 살짜리 계집애 하나와 풋내기 기자 놈 하나가 자신의 거대한 계획에 사사건건 고춧가루를 뿌리고 있었다.

 

"박진철이 불러."

 

강태석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예, 예? 한양토건 박 회장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불러서 전해라. 법이고 행정이고 나발이고 다 집어치우라고."

 

강태석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두 눈은 핏발이 서서 섬뜩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오늘 밤, 삼거리 김밥집을 완전히 흔적도 없이 쓸어버리라고 해. 쇠파이프를 쓰든 중장비를 끌고 가든 상관없으니까, 내일 아침 해가 뜰 때 그 가게에 온전한 유리창 한 장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놓으라고."

 

"시, 시장님…… 그래도 언론이나 경찰 눈이……."

 

"남원 경찰서장이 누구 돈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는데? 최민재 그 애송이 기자 놈은 신문사 사주한테 전화해서 당장 해고 통보 날리라고 해. 더 이상 말로 안 한다."

 

강태석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삼거리 일대 개발 계획 조감도를 거칠게 구겨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피를 봐야 정신을 차리겠다면, 아주 뼈까지 으스러뜨려 주지."

 

깊은 밤 열한 시.

 

삼거리 김밥집의 불은 꺼져 있었다.

 

하은과 민재를 억지로 집으로 돌려보낸 지유는 홀로 가게 안쪽 좁은 방에 앉아 있었다.

 

방 안에는 희미한 백열전구 하나만이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지유는 책상 서랍을 열고 낡은 양철 과자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서울 신림동에서 온 성재환의 첫 관제엽서와 함께, 지유가 그동안 밤마다 써 내려갔지만 차마 부치지 못했던 수십 통의 답장 편지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지유는 책상 위에 놓인 재환의 학생증 증명사진을 집어 들었다.

 

사진 속 열여덟의 재환은 여전히 단정하고 맑은 눈빛으로 지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진 뒷면에 적힌 재환의 친필 서약.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지유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 글씨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오늘 하루 동안 겪었던 공포와 긴장감이 그제야 풀려나오며,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려 사진 모서리를 적셨다.

 

"재환아……."

 

지유는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나 오늘 잘 싸웠지? 도망치지 않고…… 우리 아버지처럼 속지 않고, 어른들 앞에서 당당하게 버텼어."

 

지유는 편지지를 꺼내 들었다.

 

지유가 선물했던 흑청색 잉크병은 재환의 품에 있었기에, 지유는 몽당연필을 쥐고 꾹꾹 눌러쓰기 시작했다.

 

'재환아, 남원은 여전히 평화로워. 요천 변 수양버들은 가을바람에 은빛으로 흔들리고, 광한루원 팽나무는 변함없이 푸르러. 어머니 병세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니까 넌 아무 걱정 말고 법전에만 매진해. 넌 정의로운 검사가 되어야 하니까…… 널 기다리는 것만이 내게 가장 쉬운 일이야.'

 

눈물로 얼룩진 거짓 편지를 조심스럽게 접어 양철 상자 속에 넣는 순간이었다.

 

쿵——!

 

골목 밖에서 둔탁하고 거친 쇳소리가 울렸다.

 

이어 어둠 속에서 여러 대의 오토바이 엔진 소리와 함께 거친 욕설이 김밥집 앞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어둠을 가르는 쇠파이프 끌리는 섬뜩한 소리가 셔터 문 바로 밖에서 멈춰 섰다.

 

지유의 숨이 멎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