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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17화

권력의 불쾌한 호의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가라앉지 않는 먼지

 

남원 동문 우체국 뒷골목 삼거리 김밥집의 낡은 함석 차양 밑으로 스며드는 바람은 여전히 쇠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아스팔트 바닥에는 며칠 전 들이닥쳤던 포클레인의 궤도 자국이 흉터처럼 깊게 파여 있었고, 빗물에 씻겨 내려가지 못한 붉은 래커 자국이 회벽 모퉁이에 핏자국처럼 말라붙어 있었다.

 

도마 위에 얹힌 식칼이 일정한 간격으로 도마를 쳤다.

 

탁, 탁, 탁, 탁.

 

한지유(韓智攸)는 손목의 힘을 고르게 실으며 잘 지어진 밥과 데친 시금치, 노란 단무지와 짭조름하게 조린 우엉이 단단히 말려든 김밥을 썰어 나갔다.

 

손끝이 조금씩 저려왔지만 멈출 수 없었다.

 

어머니가 남원의료원 중환자실 차가운 침대 위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동안, 지유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좁은 도마와 펄펄 끓는 보리차 주전자뿐이었다.

 

카운터 아래쪽, 약간 들려 있는 낡은 합판 밑에 성호석과 강태석의 직인이 찍힌 1991년 환지 비리 원본 서류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자들…….'

 

지유는 이를 악물며 마지막 김밥 한 줄의 꼬투리를 가지런히 썰어 은박지 도시락에 담았다.

 

아침 여섯 시 반.

 

첫 손님으로 찾아온 인근 병원 간호사들이 도시락을 챙겨 나가자, 가게 안에는 다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지유는 앞치마에 묻은 참기름을 닦아내며 가슴 안쪽 교복 안주머니를 살며시 매만졌다.

 

그곳에는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서 보내온 성재환(成宰桓)의 관제엽서와, 그가 광한루원 오작교에서 남겨주었던 학생증 증명사진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흑청색 잉크로 꾹꾹 눌러쓴 그 단단한 필체를 떠올리는 것만이, 이 비릿하고 잔인한 현실 속에서 그녀를 지탱하는 유일한 방파제였다.

 

골목 어귀에서 낮게 깔리는 육중한 배기음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일반 승용차와는 확연히 다른, 묵직하고 기름진 엔진 소리.

 

지유는 칼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골목길 저편, 햇살이 채 닿지 않은 응달을 가르며 검은색 대형 세단 한 대가 서서히 미끄러져 들어오고 있었다.

 

본넷 앞부분에 금빛으로 번쩍이는 남원시 상징 봉황 깃발을 단 차량.

 

민선 1기 남원시장 강태석(姜泰錫)의 시찰용 관용차, 로얄 살롱이었다.

 

2. 검은 차와 초대장

 

끼이익, 하는 불쾌한 마찰음과 함께 차가 김밥집 유리문 바로 앞에 정확히 멈춰 섰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짙은 감색 양복을 빼입은 수행비서가 내렸다.

 

이어 조수석에서 내린 남자는 며칠 전 포클레인 대열을 지휘했던 배 대표가 아니었다.

 

시청 비서실 명찰을 옷깃에 단, 기름기 흐르는 얼굴의 중년 비서관이었다.

 

그는 주변 상인들의 시선을 의식한 듯 옷매무새를 가다듬더니, 손에 고급 가죽 서류철을 든 채 성큼성큼 가게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문 위에 달린 녹슨 방울이 맑지 못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한지유 양?"

 

비서관은 가게 안을 훑어보며 지유를 불렀다.

 

그의 시선에는 좁고 낡은 분식집에 대한 은근한 멸시와 함께, 묘하게 조심스러워하는 기색이 뒤섞여 있었다.

 

지유는 도마 앞을 벗어나 카운터 앞에 섰다.

 

"무슨 일이시죠?"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비서관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품에서 묵직한 흰색 봉투 하나를 꺼내 카운터 위에 얌전하게 올려놓았다.

 

고급 한지에 남원시청의 관인이 은은하게 찍힌 정갈한 봉투였다.

 

"시장님께서 전하라 하셨네."

 

"시장님이요?"

 

"그래. 강태석 시장님께서 지난번 이곳을 직접 둘러보신 뒤로, 자네 사정이 영 마음에 걸리신 모양이야. 어린 나이에 어머니 병간호하랴, 이 험한 가게 꾸려가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걸 아시고…… 특별히 자리를 마련하셨다."

 

비서관의 말투는 정중함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그 밑바닥에는 '감히 시장님의 부름을 거절할 수 있겠느냐'는 오만이 두껍게 깔려 있었다.

 

"오늘 정오, 요천각(蓼川閣) 난초실이다."

 

요천각.

 

광한루원 뒤편 요천 변에 숨어 있는, 남원 지역 유지들과 정재계 거물들이 은밀하게 모여 이권을 나누는 최고급 요정이었다.

 

평범한 남원 시민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주눅이 들 만한 그 은밀한 권력의 아지트를, 대낮에 고등학생에 불과한 지유를 불러들이는 장소로 내민 것이다.

 

지유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 들어갔다.

 

"제가 시장님을 뵐 이유가 없습니다."

 

비서관의 눈썹이 꿈틀했다.

 

남원 시내에서 시장의 부름을 받고 이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보게, 한지유 양. 시장님께서 자네를 곤란하게 하려는 게 아니야. 남원의료원 원장에게도 이미 언질을 넣어두셨네. 자네 어머니 입원비와 특진비 전액, 그리고 향후 수술비까지 시 차원의 특별 구제 기금과 시장님 개인 후원회에서 책임져 주시겠다고 하셨어."

 

지유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어머니의 병원비.

 

당장 이번 주말까지 정산하지 않으면 일반 병실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독촉장을 받아 든 지유에게, 그것은 가장 잔인하고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강태석은 그 약점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포클레인으로 밀어버리려던 폭력을 거두는 척하더니, 이제는 그 빈자리에 거액의 돈과 후원이라는 이름의 사슬을 들이밀고 있는 것이었다.

 

"어머니 병원비는…… 제가 법과 원칙에 따라 감당하겠습니다."

 

지유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저희는 시의 특별 구제 대상도 아니고, 시장님 개인의 동정을 받을 이유도 없습니다."

 

비서관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법과 원칙? 어린 아가씨가 세상 물정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먼. 그 고집 피우다 어머니 산소 먼저 차리게 생겼는데 자존심이 밥을 먹여주나? 시장님께서 직접 차까지 보내 태워 오라 명하셨네. 밖의 관용차 보이지? 차 타고 가서 시장님이 차려주시는 점심 한 끼 공손하게 얻어먹고 오면 될 일이야. 그러면 모든 게 순리대로 풀릴 텐데, 왜 스스로 가시밭길을 가려 해?"

 

비서관은 봉투를 툭툭 치며 몸을 돌렸다.

 

"정오까지 차가 골목 입구에서 대기할 걸세. 영리하게 생각하게. 시장님의 호의를 걷어차고 남원에서 무사히 발붙이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비서관이 문을 밀고 나갔다.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와 함께 매캐한 디젤 연기가 좁은 가게 안으로 들이닥쳤다.

 

카운터 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흰 봉투.

 

지유는 차가운 손으로 봉투를 집어 들었다.

 

봉투 안에는 요천각 난초실 초대장과 함께, 남원의료원 중환자실 미납금 전액이 적힌 보증 확인서 한 장이 번쩍이는 금색 클립에 끼워져 있었다.

 

권력이 내미는 가장 달콤하고도 더러운 덫이었다.

 

3. 요천 둑길의 분노

 

낮 열한 시 반.

 

가게 뒤란 문이 벌컥 열리며 숨을 헐떡이는 인영이 뛰어 들어왔다.

 

남원일보사 수습기자 완장을 팔에 찬 최민재였다.

 

그의 머리는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고, 손에는 취재 수첩이 구겨질 듯 쥐어져 있었다.

 

"지유야!"

 

민재는 가게 앞에 서 있는 관용차를 보고 사색이 되어 달려온 참이었다.

 

"그 인간들이…… 강태석 놈들이 또 왔어? 가게 건드렸어?"

 

"아니야, 민재야. 가게는 안 건드렸어."

 

지유가 차분하게 물 한 잔을 건넸다.

 

민재는 물을 단숨에 들이켜더니 카운터 위에 놓인 고급 한지 봉투를 발견하고 눈을 부릅떴다.

 

"이게 뭐야? 요천각? 이 미친놈이…… 지유 너한테 지금 거길 오라고 차를 보낸 거야?"

 

"어머니 병원비를 대주겠대. 후원도 해주고."

 

"개수작이야!"

 

민재가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낡은 선반이 흔들렸다.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데! 지난 10년 동안 남원 일대 관급 공사 다 후려치고, 깡패 동원해서 사람들 피눈물 뽑아먹은 놈이야. 삼거리 토건 때부터 온갖 더러운 짓으로 시장 자리까지 기어 올라간 놈이, 이제 와서 자선사업가 행세를 해? 지유 너, 절대 가면 안 돼. 그 자리에 발 들이는 순간 그놈 손아귀에서 평생 못 벗어나!"

 

민재의 목소리는 분노와 두려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신문사 수습기자로 들어가 강태석 일파의 뒤편을 캐면 펼수록, 그들의 손에 묻은 피와 탐욕의 깊이는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었다.

 

"알아, 민재야."

 

지유가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거길 왜 가겠어. 안 가."

 

"그럼 저 차는 어쩌고? 저 비서 놈들이 밖에서 버티고 있잖아! 당장 내가 가서 신문사 기자라고 들이받고 쫓아낼까?"

 

"아니, 그러지 마. 네가 나서면 너까지 다쳐. 신문사에서 겨우 자리 잡았는데, 강태석한테 밉보이면 너 그 일도 못 하게 돼."

 

지유는 조용히 앞치마를 벗어 개켰다.

 

그녀의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내가 직접 나가서 거절할 거야. 어설프게 피하면 저 사람들은 또 다른 핑계로 찾아와서 어머니를 흔들고 가게를 위협할 테니까. 내 입으로 똑똑히 전해야 해."

 

"지유야……."

 

"걱정하지 마. 난 성재환의 약속을 품고 있는 사람이야. 그깟 권력 앞에 고개 숙이지 않아."

 

지유는 카운터 서랍을 열고 단정한 면 손수건을 꺼내 흰 봉투를 정갈하게 감쌌다.

 

권력의 추악한 제안에 조금의 오염도 묻히지 않겠다는 듯한, 단호하고도 정결한 손길이었다.

 

4. 거절의 품격

 

정오를 십 분 앞둔 시각.

 

삼거리 골목 입구에 세워진 로얄 살롱 세단의 뒷좌석 창문이 반쯤 내려가 있었다.

 

차 안에는 요천각으로 향하기 전, 직접 지유를 태워 가기 위해 몸을 싣고 온 강태석이 앉아 있었다.

 

값비싼 이탈리아제 양복에 번쩍이는 금장 시계를 찬 강태석은 시가를 피워 물며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득의양양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자신의 한마디에 남원의 경찰서장도, 세무서장도 고개를 조아렸다.

 

수억 원대의 관급 공사를 쥐락펴락하는 자신이, 찢어지게 가난한 여고생 하나에게 내민 호의였다.

 

어머니의 목숨 줄을 쥐고 흔들었으니, 제아무리 독종이라 한들 울며불며 차 문을 열고 타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계집애가 눈빛 하나는 독하더니만, 결국 돈과 권력 앞에서는 무릎 꿇는 법이지. 성호석 그 위선자 놈도 그랬고, 세상만사가 다 그런 게야.'

 

그때, 또각거리는 단정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강태석이 시선을 돌렸다.

 

골목 저편에서 걸어오는 한지유의 모습이 보였다.

 

남원여고 교복 차림 그대로였다.

 

헝클어짐 없는 단정한 단발머리, 빳빳하게 다려진 옷깃, 그리고 무엇보다 강태석을 압도했던 그 맑고 서늘한 눈동자가 한낮의 햇살 아래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걸음걸이에는 비굴함이나 주저함 따위는 털끝만큼도 섞여 있지 않았다.

 

오히려 거대한 법정에 홀로 증언대에 오르는 증인처럼 엄숙하고 단단했다.

 

차 옆을 지키고 서 있던 수행비서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뒷좌석 문을 열어젖혔다.

 

"타시지요, 한 양. 시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지유는 차 문 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열린 차 문 앞에 반듯이 멈춰 서서, 뒷좌석에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강태석을 똑바로 응시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정면으로 부딪쳤다.

 

강태석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그가 기대했던 눈물이나 굴복의 빛은 지유의 얼굴 어디에도 없었다.

 

지유는 손에 쥐고 있던, 하얀 면 손수건으로 감싼 봉투를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그리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정중한 각도로 고개를 숙였다.

 

"남원시장님."

 

목소리는 맑았고, 골목길의 소음을 가르며 선명하게 울렸다.

 

"보내주신 후의는 감사하오나, 이 자리는 제가 나아갈 자리가 아닙니다."

 

강태석의 손가락에 끼워진 시가의 연기가 뚝 멈췄다.

 

"……뭐라?"

 

지유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강태석의 번들거리는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손수건에 싸인 봉투를 차 시트 위로 정중하게 내려놓았다.

 

"저희 어머니의 병환은 자식인 제가 땀 흘려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시의 정당한 복지 체계가 아닌, 시장님 개인의 특혜나 후원을 받을 까닭이 없습니다."

 

"한지유."

 

강태석의 목소리가 굵게 가라앉았다.

 

짐승의 으르렁거림 같은 살기가 묻어났다.

 

"네 어미가 당장 숨이 넘어가게 생겼는데, 그깟 자존심 부릴 때인 줄 아느냐? 내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네 어머니는 최고급 병실에서 서울 명의의 치료를 받을 수 있다. 이 강태석이가 베푸는 은혜를 거절하고 남원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압도적인 권력의 폭력.

 

옆에 서 있던 비서관마저 숨을 죽이며 지유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지유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맑고 단단해졌다.

 

"저희 아버지는 남원의 비옥한 과수원을 빼앗기고 화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지유의 한마디에 강태석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확장되었다.

 

"아버지는 땅을 빼앗겼을 때도 비굴하게 구걸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 역시 정직하게 김밥을 말아 저를 키우셨지, 누군가의 불의한 호의에 기대어 목숨을 구걸하길 바라지 않으십니다."

 

지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점심 식사는 시장님의 귀한 손님들과 나누십시오. 저는 제 도마 앞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지유는 다시 한번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예의를 다한 거절이었기에, 그 거절은 강태석의 심장에 더 깊고 잔인한 굴욕으로 박혀 들어갔다.

 

상대를 욕하거나 거칠게 대들었다면 '어린것의 패기'라 치부하고 짓밟아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유는 완벽한 예의와 품격을 갖춘 채, 강태석의 권력과 돈을 '불의하고 천박한 것'으로 규정하며 짓밟아버린 것이다.

 

지유는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다.

 

골목길을 걸어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은 가녀렸지만, 마치 수백 년을 버텨온 광한루원의 팽나무처럼 뿌리 깊고 꼿꼿했다.

 

5. 서늘한 모멸과 맹독

 

"저, 저 발칙한 년이……!"

 

수행비서가 얼굴이 벌게져 지유의 뒤를 쫓아가려 했다.

 

"야! 거기 안 서? 시장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어디서……!"

 

"그만둬."

 

뒷좌석에서 낮고 서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비서관이 흠칫 놀라며 멈춰 섰다.

 

차 안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강태석은 손에 쥐고 있던 시가를 차 바닥의 재떨이에 천천히 비벼 껐다.

 

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사그라졌다.

 

시트 위에 얌전하게 놓인 하얀 손수건과 봉투.

 

강태석의 시선이 그 손수건에 꽂혔다.

 

지유의 손때가 묻은, 소박하지만 결백한 면 손수건.

 

강태석의 입꼬리가 천천히 비틀려 올라갔다.

 

웃고 있었지만, 눈동자에는 지독한 모멸감과 뒤틀린 살의가 번뜩이고 있었다.

 

'과수원……? 한석규의 딸년이라 이거지.'

 

1991년, 자신이 성호석과 결탁해 요천 변 비옥한 과수원을 도로 부지로 헐값 수용하고 자갈밭으로 내쫓았던 그 농부의 딸.

 

그 계집애가 지금 자신을 향해 아비의 이름을 들먹이며 칼을 꽂은 것이다.

 

단순한 거절이 아니었다.

 

성호석을 등에 업고 남원을 호령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 누구도 강태석의 면전에서 이런 식의 치욕을 안긴 자는 없었다.

 

모두가 그의 발밑에 엎드려 돈을 바라고, 공사를 애원하고, 자비를 빌었다.

 

그런데 제 어미 목숨 줄을 쥐고 흔들어도, 어린 계집애 하나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을 경멸했다.

 

그 경멸이 강태석의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던 열등감과 정복욕을 미친 듯이 자극했다.

 

'손에 쥐어지지 않는 칼이라…….'

 

강태석은 떨리는 손으로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거칠고 투박한 손으로 손수건의 감촉을 매만지는 그의 손가락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시장님, 당장 저 김밥집을…… 포클레인으로 쓸어버릴까요?"

 

비서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쓸어버려?"

 

강태석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이 뱀처럼 번뜩였다.

 

"아니. 그렇게 쉬운 길을 갈 수는 없지. 단칼에 베어버리면 아픔을 모르는 법이야."

 

강태석은 손수건을 주머니 속에 깊숙이 쑤셔 넣었다.

 

"부러뜨릴 거다. 그 잘난 뼈마디 하나하나를 내 손으로 직접 으스러뜨려 놓을 거야. 지 어미가 피를 토하며 병원 문밖으로 쫓겨나고, 제 발로 이 요천각 난초실 바닥을 기어 들어와 내 구둣발을 핥으며 살려달라고 애원할 때까지."

 

강태석의 목소리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침착했다.

 

"시청으로 돌아가자."

 

"예, 시장님."

 

"가서 위생과장과 소방과장을 내 집무실로 부르라고 해."

 

차 문이 쾅 닫혔다.

 

검은색 로얄 살롱은 거대한 먹구름처럼 골목길을 빠져나가며 매캐한 먼지를 토해냈다.

 

6. 신림동에서 온 온기

 

차가 떠나간 삼거리 김밥집 안.

 

가게 안으로 돌아온 지유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싱크대 모서리를 꽉 쥐었다.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한 것을 간신히 버텨냈다.

 

"지유야! 괜찮아?"

 

가게 뒤편에 숨어 있던 민재가 뛰쳐나와 지유의 어깨를 붙잡았다.

 

"괜찮아, 민재야. 아무 일도 없었어."

 

지유는 창백해진 얼굴로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은 여전히 북망산천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강태석의 눈빛.

 

거절당하는 순간 그 잔인한 얼굴에 스쳐 지나간 서늘한 모멸감과, 마치 먹잇감을 통째로 삼키겠다고 벼르는 맹수의 눈빛을 지유는 똑똑히 보았다.

 

폭풍이 몰아칠 것이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 더 잔인하고 교묘한 칼날이 숨통을 조여올 것임을 지유는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었다.

 

"그 인간 눈빛 봤어. 완전히 독이 올랐어."

 

민재가 이를 갈며 말했다.

 

"지유야, 이대로는 안 돼. 성재환한테 알려야 해. 재환이가 아무리 고시 공부 중이라 해도, 이 상황을 알고는 있어야……."

 

"안 돼."

 

지유가 단호하게 민재의 말을 끊었다.

 

"재환이한테는 절대 안 돼."

 

"지유야!"

 

"재환이는 지금 자기 인생 전부를 걸고 서울에서 싸우고 있어. 부친의 그 거대한 억압 속에서, 법의 칼을 쥐겠다고 뼈를 깎는 고통을 견디고 있단 말이야. 그런데 남원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알리면…… 재환이가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겠어? 당장 책 덮고 남원으로 내려오겠지. 그러면 재환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건데?"

 

지유의 눈에 눈물이 고였지만, 눈빛만은 투명했다.

 

"재환이가 온전한 법복을 입고, 저 썩은 자들을 법의 이름으로 심판할 수 있을 때까지…… 내가 여기서 버텨야 해. 아버지가 남겨주신 이 땅과, 어머니의 목숨과, 재환이와의 약속을…… 내 손으로 지켜낼 거야."

 

민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지유의 가녀린 어깨 위에 얹힌 짐의 무게가 너무도 무거워, 가슴이 미어질 것만 같았다.

 

그때, 우체부 아저씨의 오토바이 경적 소리가 뾱뾱 울리며 가게 앞에 멈춰 섰다.

 

"삼거리 김밥집! 서울서 엽서 왔어요!"

 

지유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민재가 얼른 뛰어나가 우체부에게서 엽서를 받아왔다.

 

광화문 우체국 소인이 선명하게 찍힌 관제엽서였다.

 

지유는 떨리는 손으로 엽서를 받아 들었다.

 

재환의 단정하고 힘 있는 필체가 엽서 뒷면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지유가 선물했던 그 깊고 푸른 흑청색 잉크의 빛깔이었다.

 

'지유에게.

 

신림동의 밤은 깊고 바람은 차갑지만, 네가 선물해 준 잉크로 법전을 적어 내려갈 때마다 내 가슴속에는 남원의 푸른 노을이 번진다.

 

너의 무릎 상처는 좀 어떠니.

 

덧나지 않고 잘 아물고 있는지 매일 밤 기도한다.

 

이곳의 법전은 두껍고 세상의 불의는 견고해 보이지만, 나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라 했던 만년필의 법언처럼, 나는 반드시 가장 날카롭고 온전한 정의의 칼이 되어 네 곁으로 돌아갈 것이다.

 

광한루원 팽나무 아래에서 나누었던 맹세를 단 한 순간도 잊은 적 없다.

 

부디 아프지 말고, 밥 잘 챙겨 먹고 있어라.

 

반드시, 너를 지키러 갈 테니.

 

- 서울에서, 성재환.'

 

엽서를 읽어 내려가는 지유의 눈에서 마침내 참았던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눈물방울이 흑청색 글씨 위에 번져 푸른빛으로 흩어졌다.

 

지유는 엽서를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거대한 권력의 폭압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이 작은 종이 한 장에 담긴 온기가 그녀의 얼어붙은 영혼을 녹여내고 있었다.

 

'재환아.'

 

지유는 눈물을 닦아내며 다시 도마 앞에 섰다.

 

'나도 무너지지 않아. 네가 올 때까지, 절대로 부러지지 않을 거야.'

 

그녀는 칼을 쥐었다.

 

그리고 다시 단단하게, 세상의 모진 바람을 향해 칼날을 겨누듯 김밥을 썰기 시작했다.

 

7. 시청 집무실의 음모

 

같은 시각, 남원시청 2층 시장 집무실.

 

육중한 티크 원목 책상 뒤에 앉은 강태석은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남원 시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지유가 돌려주고 간 하얀 면 손수건이 쥐어져 있었다.

 

손수건 모서리에 수놓아진 조그마한 들꽃 자수.

 

강태석은 손수건을 책상 위에 거칠게 내던졌다.

 

노크 소리와 함께 집무실 문이 열렸다.

 

"시장님, 부르셨습니까."

 

시청 위생과장과 소방과장이 긴장된 표정으로 들어와 허리를 굽혔다.

 

민선 시장의 서슬 퍼런 위세 앞에 두 공무원은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었다.

 

강태석은 의자를 천천히 돌려 두 사람을 마주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감정도 묻어나지 않는 냉혹한 표정이 서려 있었다.

 

"동문 우체국 뒷골목, 삼거리 김밥집 알지?"

 

위생과장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 골목이 남원의 얼굴인데, 음식 파는 가게 꼬락서니가 아주 엉망이야. 시민들 건강을 책임지는 시정 책임자로서 도저히 묵과할 수가 없더군."

 

강태석은 서류철을 툭 던졌다.

 

"내일부터 당장 특별 점검 들어가."

 

"점검…… 말씀이십니까?"

 

"위생 규정, 원산지 표기, 조리대 청결 상태, 유통기한, 칼과 도마 살균 상태까지 법에 적힌 규정이란 규정은 토씨 하나 빼놓지 말고 샅샅이 털어."

 

강태석의 목소리는 독사처럼 차갑게 내려앉았다.

 

"단 한 건이라도 꼬투리가 잡히면 즉각 시정명령 내리고, 그래도 버티면 영업정지 때려. 그리고 소방과."

 

소방과장이 화들짝 놀라며 배를 바짝 당겼다.

 

"예, 시장님!"

 

"그 건물 지은 지 30년이 넘은 목조 노후 건물이야. 소방법 위반 사항 없는지 철저하게 조사해. 소화기 비치 상태, 배선 피복 상태, 비상구 확보 여부 전부 털어서 수백만 원짜리 시설 교체 명령 공문 보내."

 

"하, 하지만 시장님…… 그 일대 영세 상가들은 대부분 구조상 그 기준을 맞추기가 불가능……."

 

"불가능하니까 하라는 거야!"

 

강태석이 책상을 쾅 내리쳤다.

 

쩌렁한 고함에 두 과장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합법이라는 칼이 왜 있는지 몰라? 대가리 뻣뻣하게 쳐들고 법과 원칙을 떠드는 년한테는, 그 법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서운 몽둥이인지 뼈저리게 가르쳐 줘야 하는 법이야!"

 

강태석의 눈에 서늘한 광기가 번뜩였다.

 

"내일 아침 아홉 시 정각. 두 부서 합동으로 들이닥쳐. 문 닫을 때까지, 쥐새끼 한 마리도 못 빠져나가게 물어뜯어."

 

"예! 알겠습니다, 시장님!"

 

두 과장이 허겁지겁 고개를 숙이며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고, 집무실 안에는 다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강태석은 책상 위에 놓인 지유의 손수건을 다시 집어 들었다.

 

손가락으로 손수건을 으스러지도록 쥐어짜며, 그는 요천 변 저편을 향해 낮게 읊조렸다.

 

"어디 한번 버텨봐라, 한지유. 네 년이 언제까지 그 고결한 척하는 모가지를 빳빳이 들고 있을 수 있는지…… 내가 똑똑히 지켜봐 줄 테니."

 

창밖으로 짙은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남원의 하늘 위로, 거대한 행정의 폭력이 빚어낼 또 다른 폭풍우가 시커멓게 드리우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