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선 시장의 오만
1. 붉은 환호와 승자의 제단
남원 실내체육관(南原室內體育館) 바닥에 깔린 녹색 우레탄 위로 개표 방송을 알리는 확성기 소리가 찢어질 듯 울려 퍼졌다.
개표율 구십팔 퍼센트.
단상 중앙에 설치된 거대한 상황판 위로 붉은색 막대그래프가 경쟁 후보들의 푸른색과 노란색 수치를 아득히 짓누르며 상공으로 치솟았다.
칠십이 점 사 퍼센트라는 압도적인 득표율이었다.
우레와 같은 함성이 체육관의 높은 철골 천장을 뒤흔들었다.
"강태석! 강태석!"
연단을 가득 메운 지역 상공회의소 간부들과 시의원들, 그리고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삼거리 토건(三巨里土建)의 건장한 청년들이 일제히 기립해 손바닥이 터져라 박수를 쳤다.
그 환호성의 정점에 선 사내, 강태석(姜泰錫)은 짙은 감색 정장 차림으로 두 팔을 번쩍 치켜들고 있었다.
단단하게 각진 턱과 굵직한 이마 주름 사이로 스며 나오는 것은 소박한 감격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냥터를 완전히 틀어쥔 포식자가 내뿜는 지독하고도 서늘한 오만함이었다.
이 년 전, 전임 시장 성호석(成浩錫)이 내무부 기획조정실장으로 황급히 차출되어 떠나며 치러졌던 보궐선거는 어디까지나 잔여 임기를 채우는 과도기적 징검다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번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달랐다.
민선 자치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공식 선거에서, 그는 이제 남원의 어엿한 합법적 군주로 온전한 사 년의 임기를 공인받은 셈이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남원 시민 여러분!"
마이크를 쥐어 쥔 강태석의 목소리가 묵직한 중저음으로 장내를 장악했다.
"저 강태석이 약속했던 구도심 전면 개혁과 수변 관광특구 개발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시대의 명령입니다. 지난 이 년이 해묵은 낡은 규제를 걷어내고 뼈대를 세우는 시간이었다면, 앞으로의 사 년은 남원을 호남의 중심이자 거대한 번영의 성채로 탈바꿈시키는 완벽한 도약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터져 나온 갈채 속에서 꽃다발 세례가 그의 목에 걸렸다.
강태석은 만면에 너털웃음을 지으며 단상 아래로 고개를 숙이는 척했지만, 가늘게 뜬 두 눈동자는 체육관 입구 쪽에 서 있는 남원경찰서 서장과 남원지청 관계자들을 차갑게 훑어내리고 있었다.
누가 이 땅의 진짜 주인인가.
그들에게 똑똑히 각인시키는 오만한 눈빛이었다.
단상 바로 뒤편에 서 있던 배 대표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깍듯이 허리를 숙이며 귓속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시장님. 경쟁 후보 진영에서는 이미 사무실 불을 끄고 패배 선언문을 낭독했다고 합니다. 이제 남원에서 시장님의 뜻을 거스를 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거스를 놈이 애초에 어디 있었다고 그러나, 배 대표."
강태석이 목에 걸린 커다란 꽃다발을 거칠게 벗겨 비서관에게 던지듯 넘기며 낮게 코웃음 쳤다.
"중앙의 눈치나 보며 개발 도면이나 서랍 속에 처박아 두던 먹물 시장 놈의 시대는 끝났어. 행정이고 법이고 간에, 돈과 표를 틀어쥔 놈이 곧 법이라는 걸 이번 표수가 말해주는 거다."
그의 입꼬리가 흉포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요천각으로 차 돌려라. 오늘 밤은 남원의 유지들을 전부 불러 모아야겠어. 누가 내 충견이고 누가 딴마음을 품었는지, 술잔을 채워가며 똑똑히 선을 그어줘야지."
체육관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플래시 불빛과 붉은 장미 꽃잎들이 강태석의 구두 아래에 짓밟혔다.
남원의 밤하늘 위로 쏘아 올려진 당선 축하 폭죽이 요란한 굉음을 토해내며 어두운 강물을 붉게 물들였다.
2. 프레스 카드를 쥔 소년
체육관 기자석 맨 뒷줄, 낡은 합판으로 짜인 임시 책상 구석에서 최민재는 목에 걸린 취재용 프레스 카드를 조용히 매만졌다.
남원일보사(南原日報社) 수습기자 최민재.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대학 진학 대신 지역 신문사 편집국의 사환 겸 인턴 기자로 바닥부터 구르기 시작한 지 어느덧 반년이 흐르고 있었다.
교복을 벗고 제법 빳빳한 무명 셔츠를 입었지만,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만큼은 이 년 전 구 남원역 승강장에서 기차를 배웅하던 그날의 소년 그대로였다.
민재는 손에 쥔 볼펜을 하얗게 질릴 만큼 강하게 틀어쥐고 있었다.
체육관 단상 위에서 번들거리는 얼굴로 만세를 부르는 강태석의 모습이 망막에 박힐 때마다 명치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칠십이 퍼센트라는 압도적인 지지율.
그 화려한 수치 이면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민재는 신문사 바닥을 기어 다니며 온몸으로 목격해 왔다.
삼거리 토건이 시공권을 따낸 수변 위락시설 부지 주변 상인들에게 뿌려진 선심성 선거 자금, 통반장들을 동원한 조직적인 경로당 현금 살포, 그리고 구도심 영세 상인들을 찾아가 '재개발에 딴소리하면 시청 위생과를 동원해 문을 닫게 하겠다'며 으름장을 놓던 어깨들의 그림자.
그 모든 비열한 수작이 한데 뭉쳐져 마침내 '압도적 민의'라는 그럴싸한 가면을 뒤집어쓴 채 승리의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최 수습, 멍하니 서서 뭐 해? 얼른 스케치 기사 마감 쳐서 본사 윤전실로 넘겨야지!"
선배인 사회부 박 기자가 담배 연기를 훅 내뿜으며 민재의 어깨를 툭 쳤다.
"제목은 국장님이 이미 뽑아두셨어. '민선 1기 남원시장, 토건의 거두 강태석 압승으로 위대한 도약 선언'이라고 크게 박고, 밑에 단상 사진 세 칸짜리로 얹어. 사설 쪽에도 시정 안정화에 협조해야 한다는 칼럼 실릴 테니까 모난 소리 집어넣지 말고 분위기 띄우는 문장으로만 채워라."
"선배님, 이번 선거 기간 동안 접수된 선거법 위반 고발 건만 여섯 건입니다. 삼거리 토건 관급 공사 입찰 비리 의혹도 아직 경찰 내사 종결 처리가 안 났는데, 이렇게 일방적인 찬양 기사만 나가는 건……."
민재가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단한 어조로 되묻자 박 기자가 기가 차다는 듯 혀를 찼다.
"야, 최민재. 너 아직도 세상 물정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나? 우리 신문사 일 년 치 관공서 광고비랑 인쇄 용지 납품권을 누가 결재하는 줄 알아? 저기 서 있는 강태석 시장이야. 내사 종결? 허, 남원경찰서 수사과장이 지난주에 삼거리 토건 자회사 이사 자리로 영전한 거 못 들었어? 바보 같은 소리 말고 시키는 대로 써. 괜히 튀는 짓 하다가 수습 딱지도 못 떼고 잘리기 싫으면."
박 기자는 꽁초를 바닥에 비벼 끄며 기자실 밖으로 휘청거리며 나갔다.
홀로 남은 민재는 입술을 짓씹었다.
취재 수첩을 펼쳤다.
낡은 수첩의 뒷장에는 신문사 캐비닛 깊숙한 곳에서 몰래 필사해 둔 강태석 일파의 비정상적인 관급 수주 내역과 수상 내역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1994년 10월, 남원시 우수 중소기업 표창 - 삼거리 토건.'
'1995년 3월, 전북도지사 표창 지역건설 발전유공자 - 강태석.'
'1995년 5월, 남원경찰서 행정발전위원회 위원장 위촉 - 배종수(삼거리 토건 부사장).'
비리와 횡령으로 얼룩진 토건 깡패들이 합법적인 표창과 명예를 훈장처럼 달고, 관공서와 경찰의 요직을 파고들어 완벽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이 법망을 피하기 위해 만든 방패막이가 바로 이 조작된 표창과 위촉장들이었다.
민재는 볼펜 끝으로 수첩에 적힌 강태석의 이름 석 자를 강하게 내리눌렀다.
종이가 찢어질 듯 날카로운 자국이 남았다.
'재환아.
네가 서울에서 썩은 법을 도려낼 칼을 갈고 있다면, 나는 여기서 이놈들이 감춘 썩은 살점을 낱낱이 파헤쳐 놓을게.'
머릿속에서 이 년 전 떠나간 성재환의 단단한 눈빛과, 홀로 김밥집 불을 밝히며 어머니의 약값을 벌고 있을 한지유(韓智由)의 수척해진 얼굴이 겹쳐졌다.
민재는 이를 악물며 프레스 카드를 옷깃 안쪽으로 단단히 찔러 넣었다.
펜은 아직 무력했으나, 기록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믿고 있었다.
3. 요천각의 썩은 축배
광한루원 뒤편, 검푸른 요천(蓼川) 물결을 굽어보는 최고급 전통 요정 요천각(蓼川閣)의 회랑은 밤이 깊어질수록 흥청거렸다.
붉은 융단이 깔린 이층 대청마루는 남원의 권력과 재력을 쥔 자들이 모여들어 뿜어내는 술 냄새와 기름진 음식 냄새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가야금 가락과 기생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은은하게 깔리는 방 안, 상석에 앉은 강태석은 양복 상의를 벗어 젖힌 채 금장 라이터로 굵은 시가를 태우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연기가 천장의 고풍스러운 서까래를 자욱하게 뒤덮었다.
"시장님, 다시 한번 대승을 축하드립니다!"
남원시의회 의장 박동철(朴東哲)이 번들거리는 이마를 조아리며 두 손으로 양주잔을 채웠다.
"칠십이 퍼센트라니요. 이건 남원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입니다. 시의회 차원에서도 시장님이 추진하시는 요천 수변 상업지구 전환 특별조례안, 다음 주 임시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도록 이미 손을 다 써두었습니다."
"고생했네, 박 의장."
강태석이 한 손으로 잔을 받아 단숨에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얼음이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독한 알코올 냄새가 번졌다.
그의 맞은편에는 삼거리 토건의 핵심 하청업체 대표들과 남원시청 도시과, 토지행정과 간부들이 빽빽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강태석의 입술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보궐선거로 들어와서 제일 답답했던 게 뭔지 아나?"
강태석이 시가를 재떨이에 짓이기며 탁자 위에 팔을 얹었다.
육중한 덩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에 좌중의 웃음소리가 일순간 뚝 끊겼다.
"성호석 그 인간이 남겨두고 간 찌꺼기들이었어. 서울로 줄타기해서 올라간 놈이 남원에 뭘 안다고, 광한루원 경관이니 역사문화재 보존구역이니 하면서 노른자위 땅을 죄다 개발제한구역으로 꽁꽁 묶어놨었지. 내가 지난 이 년 동안 시청 지하 문서고 지적과 대장실 특수 금고에 성호석 그놈의 약점 대장을 틀어쥐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중앙 놈들이 벌써 날 흔들었을 거야."
강태석이 비열하게 큭큭거리며 웃었다.
"하지만 이제 사정이 달라졌어. 오늘로써 나는 남원 시민들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은 합법적 시장이다. 성호석이도 이제 내무부에서 장관 자리 노리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 감히 지 고향 땅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참견 못 해. 안 그런가, 배 대표?"
술병을 들고 대기하던 배 대표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그렇고 말고요, 시장님. 성호석 전 시장 측에서도 이번 선거 축하 난을 보내왔더군요. 자기들도 과거 환지 대장 원본이 시장님 금고에 있는 이상,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그래. 칼자루는 내가 쥐었다."
강태석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품 안에서 붉은색 결재용 만년필을 꺼내 술상 위에 툭 던졌다.
"내 임기 첫날 결재는 이미 정해져 있다. 삼거리 일대 도시환경정비 특별구역 최종 확정 고시. 그리고 남원역에서 동문 우체국을 잇는 도로 확장 공사 구간의 잔여 가옥 강제 철거 행정대집행이다."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굳어졌다.
동문 우체국 골목, 그곳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 자리에 모인 이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던 남원시청의 신임 도시과장이 땀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저…… 시장님. 그 삼거리 골목 안쪽에 있는 김밥집 말입니다. 그 한석규 유족들이 버티고 있는 그 가게…… 아직 토지 수용 보상 협의 서명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 집 안주인이 남원의료원 중환자실에서 신부전증으로 몇 년째 사경을 헤매고 있어서, 자칫 강제로 밀었다가는 지역 여론이나 인권단체 쪽에서 잡음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만……."
"잡음?"
강태석의 눈썹이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빈 크리스털 양주잔을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도시과장은 질겁하며 무릎을 꿇고 엎드렸고, 기생들은 비명을 삼키며 방구석으로 물러앉았다.
"여론? 인권?"
강태석이 상체를 불쑥 내밀며 바닥에 엎드린 과장의 정수리를 노려보았다.
"오늘 선거 결과 못 봤어? 남원 시민 칠십 퍼센트가 내 개발 공약에 표를 몰아줬어! 그 알량한 김밥집 하나 때문에 백억짜리 상가 타운 공사를 멈추라고? 남편 잃고 과수원 뺏겼다고 십 년 넘게 피해자 코스프레나 해대는 버러지 같은 모녀에게 시정이 휘둘려야겠나?"
그의 목소리에 살기가 번뜩였다.
"법대로 해, 법대로! 공익을 위한 수용 절차는 이미 밟았어. 공탁금 걸어놨으니 법적으로는 이미 시청 땅이란 말이다. 그 계집애 혼자 새벽부터 밤까지 김밥 말아 약값 대느라 버티고 있다지? 아주 기특해 죽겠어, 어?"
강태석이 거칠게 턱을 쓰다듬으며 비열한 미소를 흘렸다.
"지 애미 병원비 대느라 대학도 못 가고 골목에 틀어박혀서 바둥거린다더니, 배짱 하나는 제 애학 아비를 닮았단 말이지. 배 대표."
"예, 시장님."
"이번엔 붉은 래커칠 따위로 겁만 주고 끝내지 마라. 다음 주 월요일 새벽, 포클레인 세 대를 동시에 동문 우체국 앞길로 집어넣어. 가게 셔터문부터 박살 내고 집기류를 전부 트럭에 실어 폐기물 처리장으로 보내. 막아서는 년이 있으면 공무집행방해로 경찰에 넘겨버리고."
"알겠습니다, 시장님. 남원경찰서 경비과와도 이미 손발을 맞춰 두었으니, 이번엔 뼈도 못 추리게 확실하게 끝내겠습니다."
배 대표가 살기등등하게 고개를 숙였다.
강태석은 새 술잔을 집어 들며 요천각의 닫힌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밖으로는 어둠 속에 잠긴 요천 강물과 저 멀리 광한루원의 거대한 팽나무 윤곽이 어렴풋이 보였다.
'한석규, 네놈이 지하에서 피눈물을 흘려도 상관없다.
네 딸년이든, 서울로 도망간 성호석이 아들놈이든 간에…… 이 남원에서 내 손바닥을 벗어날 수 있는 놈은 단 하나도 없어.'
탐욕과 광기로 번들거리는 그의 웃음소리가 기생들의 가야금 소리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4. 야간 윤전기 소리와 비밀 노트
새벽 세 시, 남원일보사 지하 윤전실.
쿠구구궁, 쿵, 쿵, 쿵.
거대한 쇠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며 지하 공간 전체를 흔드는 진동과 함께 매캐한 잉크 냄새가 진동했다.
회색 윤전기 위로 새하얀 활자판이 쉼 없이 미끄러져 내려오며 강태석의 커다란 웃는 얼굴이 인쇄된 조간신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민선 1기 남원호 출항, 강태석 시장 압도적 득표로 재선!'
최민재는 잉크로 얼룩진 장갑을 낀 채 인쇄기에서 갓 토해내진 신문 뭉치를 묶어 트럭 적재함으로 나르고 있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지만, 그의 신경은 오직 바지 주머니 속에 찔러 넣어둔 작은 취재 수첩에 쏠려 있었다.
작업이 잠시 멈춘 틈을 타, 민재는 신문 더미 뒤편의 어두운 비상계단으로 몸을 숨겼다.
호주머니에서 손때 묻은 삼색 볼펜과 수첩을 꺼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페이지를 넘겼다.
그곳에는 오늘 밤 체육관과 시청 기자실을 돌며 몰래 귀동냥하고 훔쳐본 정보들이 번호별로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1. 남원시 우수 중소기업 표창 (1994. 10) - 삼거리 토건 (대표: 강태석)'
'비고: 당시 도로 개설 관급 공사 입찰 담합 혐의로 검찰 내사 중이었으나, 표창 수상 직후 기소유예 처분됨.'
'2. 남원경찰서 행정발전위원회 위원장 위촉 (1995. 5) - 배종수'
'비고: 삼거리파 부두목 출신이자 토건 상무.
위촉식 일주일 뒤 구도심 상인들의 폭력 갈취 고소 사건 전원 각하 처리.'
'3. 전북도지사 표창 지역건설 발전유공자 (1995. 3) - 강태석'
'비고: 추천 공적조서에 기재된 하천 정비 실적 대부분이 허위 측량으로 조작된 의혹 있음.
당시 지적과 실무자는 직후 사직하고 삼거리 토건 계열사로 이직.'
민재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이것은 단순한 이력서가 아니었다.
피와 뇌물, 폭력으로 얼룩진 범죄 집단이 관청의 포상과 표창을 이용해 스스로의 신분을 합법적인 지역 유지로 세탁해 온 추악한 위장의 연표였다.
강태석은 이 가짜 훈장들을 앞세워 관급 공사를 독식하고, 경찰의 칼날을 무력화하며 마침내 시장의 관복까지 꿰어찬 것이었다.
"민재야, 너 거기서 뭐 하냐?"
갑자기 계단 문이 삐걱 열리며 수송부 김 반장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민재는 반사적으로 수첩을 등 뒤로 숨기며 태연한 척 웃음을 지었다.
"아, 반장님. 먼지가 너무 심해서 잠깐 바람 좀 쐬고 있었습니다."
"자식, 빠져가지고. 얼른 나와서 시청이랑 법원 배달 판부터 묶어라. 오늘 조간은 시청에서 전 부서에 다 돌린다고 평소보다 세 배는 더 찍어내야 한단 말이다."
"예, 바로 가겠습니다!"
민재는 수첩을 가슴 안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었다.
가슴팍에 닿는 종이 뭉치의 두께가 마치 차가운 쇳덩이처럼 묵직하게 심장을 짓눌렀다.
신문사 윤전실을 나선 민재는 낡은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았다.
새벽바람이 아직 서늘하게 뺨을 스쳤다.
어둠에 잠긴 남원 시내를 가로지르며, 그의 자전거 바퀴는 자연스럽게 동문 우체국 뒷골목을 향해 구르고 있었다.
5. 김밥집의 새벽 불빛과 굳은살
새벽 네 시 반.
남원 시내 전체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시간이었지만, 동문 우체국 안쪽 좁은 골목길 한구석에는 홀로 노란 백열등 불빛을 뿜어내는 작은 창이 있었다.
삼거리 김밥집.
페인트가 벗겨진 낡은 함석 차양 밑, 유리창에는 이 년 전 용역들이 뿌리고 갔던 붉은 래커 자국이 신나로 문지르고 긁어낸 탓에 희뿌연 흉터처럼 긁힌 채 남아 있었다.
드르륵.
민재가 조심스럽게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자, 고소한 참기름 냄새와 밥 짓는 구수한 김이 훅 끼쳐왔다.
주방 도마 앞, 머리를 질끈 묶고 낡은 앞치마를 두른 한지유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뜨거운 밥을 식히고 있었다.
열아홉, 꽃다운 청춘의 나이였지만 그녀의 손가락 마디마디는 거친 물일과 칼질로 인해 굳은살이 단단히 박여 있었다.
잠을 자지 못해 눈가에는 옅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으나,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만큼은 그 어떤 외압에도 꺾이지 않은 정갈한 기품을 품고 있었다.
"지유야."
민재의 목소리에 지유가 고개를 돌렸다.
놀란 기색도 없이, 그녀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젖은 행주로 손을 닦았다.
"민재 왔어? 신문사 일 끝난 거야?"
"응, 방금 배달 트럭 보내고 오는 길이야. 어머니는…… 병원에서 좀 어떠셔?"
민재가 카운터 앞 간이 의자에 걸터앉으며 묻자, 지유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이내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어제 오후에 투석 받고 오셨는데, 혈압이 또 떨어져서 주말까지는 집중치료실에 계셔야 한대. 그래도 의사 선생님이 이번 고비만 넘기면 일반 병실로 옮길 수 있을 거라고 하셨어. 약값도…… 이번 달치 병원비는 어제 새벽 단체 주문 들어온 거 납품하고 나면 맞출 수 있을 것 같아."
담담하게 말하는 지유의 목소리 밑에 깔린 처절한 고통을 알기에 민재는 목구멍이 턱 막혀왔다.
남원여고에서 전교 일등을 놓치지 않던 영민한 소녀였다.
서울의 명문대에 진학해 법학을 공부하겠다던 꿈을 품었던 아이였다.
그런 지유가 어머니의 병원비를 대기 위해 교무실 복도에서 제 손으로 대입 원서를 찢어발기고, 이 차가운 부엌 바닥에서 하루 스무 시간씩 김밥을 말고 있었다.
민재는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품 안에서 오늘 자 조간신문 한 부를 꺼내 조심스럽게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신문 1면 톱기사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강태석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었다.
지유의 시선이 신문 위로 떨어졌다.
그녀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굳어졌다.
"결국…… 다시 됐구나."
"압도적이래. 표를 칠십 퍼센트나 가져갔어."
민재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지유야, 신문사 선배들이랑 시청 놈들 떠드는 걸 들었는데…… 강태석이 취임하자마자 여기 삼거리 골목부터 손대겠다고 벼르고 있어. 포클레인을 들여보낸다는 말까지 돌아. 너 혼자 여기서 버티는 거, 이제 정말 위험해."
지유는 대답 대신 도마 위에 김 한 장을 반듯하게 펼쳤다.
고슬고슬하게 지어진 밥을 주걱으로 퍼 담아 얇게 펴 바르고, 노란 단무지와 붉은 당근, 초록색 시금치를 차례로 얹었다.
그녀의 동작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었다.
김밥을 단단하게 말아 쥔 지유가 칼로 조심스럽게 썰어내며 입을 열었다.
"민재야."
"응."
"도망치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되는 거잖아."
지유가 썰어낸 김밥 한 조각을 접시에 가지런히 담으며 신문 1면의 강태석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 가게 카운터 밑바닥에 우리 아버지가 남겨둔 서류가 있어. 성호석 전 시장과 저 강태석이 짜고 우리 과수원을 강탈했던 환지 처분 이의신청서 원본. 저들이 왜 이렇게 포클레인까지 끌고 와서 이 작은 가게를 부수지 못해 안달인지 알아? 우리가 무서워서가 아니야.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의 흔적이 이 흙바닥 밑에 묻혀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야."
지유의 눈동자에 푸른 불꽃 같은 결기가 서렸다.
"내가 여기서 물러서면, 우리 아버지는 평생 사기꾼에 화병으로 죽은 실패자로 남게 돼. 그리고 어머니도…… 삶의 의지를 잃어버리실 거야. 그러니까 난 안 떠나. 부술 테면 부수라고 해. 난 이 자리를 지킬 거야."
민재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끼며 안주머니의 수첩을 꺼내 지유 앞에 내려놓았다.
"나도 도망 안 쳐, 지유야."
"민재야, 이건……?"
"강태석 일당이 지난 삼 년 동안 자기들 죄를 덮으려고 받아 챙긴 가짜 훈장과 표창 내역이야. 경찰, 시청, 도청까지 전부 돈으로 매수한 기록들이지. 신문사 인턴으로 있으면서 캐비닛을 뒤져서 하나씩 적어뒀어."
민재의 목소리에 단단한 힘이 실렸다.
"재환이가 서울에서 검사가 되어 돌아올 때까지, 이 기록들을 모아둘 거야. 재환이가 법의 칼날을 들고 내려왔을 때, 단번에 저놈들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확실한 칼집을 내가 여기서 만들어 둘 테니까."
'재환'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지유의 굳건하던 눈매가 아주 잠깐 부드럽게 흔들렸다.
그녀는 앞치마 속 주머니를 가만히 어루만졌다.
그곳에는 서울 광화문 우체국 소인이 찍힌 낡은 관제엽서 한 장과, 뒷면에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이라고 적힌 학생증 증명사진이 언제나 심장 가장 가까운 곳에 품어져 있었다.
'재환아.
너는 그곳에서 흔들림 없이 나아가고 있니.
나는 여기서 내 몫의 싸움을 하고 있어.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 네가 부끄럽지 않도록…… 나 역시 부끄럽지 않게 이 자리를 지켜낼게.'
지유는 눈물을 삼키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민재의 손을 꼭 쥐었다.
"고마워, 민재야. 정말 고마워."
두 청춘의 맹세가 새벽 어스름이 걷히기 시작하는 작은 김밥집 부엌을 단단한 온기로 채워나갔다.
6. 어둠 속의 헤드라이트
동문 우체국 뒤편 골목길의 어둠이 옅은 잿빛으로 물들어가던 새벽 다섯 시 십오 분.
골목 초입에서 묵직한 디젤 엔진음과 함께 육중한 진동이 지면을 흔들었다.
우우웅-.
조용하던 골목길의 적막을 찢으며 거대한 그림자 세 개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노란색 페인트가 칠해진 삼립토건 소속의 포클레인 세 대였다.
그 뒤를 이어 번쩍이는 검은색 고급 세단 두 대와, 쇠파이프와 각목을 든 건장한 용역 삼십여 명을 태운 봉고차가 골목 입구를 완전히 틀어막았다.
철컥.
세단의 뒷좌석 문이 열리며 짙은 선글라스를 낀 배 대표가 흙바닥으로 구두를 내딛었다.
그의 입가에는 비열하고 잔혹한 조소가 걸려 있었다.
"싹 쓸어버려."
배 대표가 손가락을 튕기며 낮게 짓オープン했다.
"시장님 명령이다. 기둥 하나 남기지 말고 완벽하게 주저앉혀라. 안에 누가 있든 상관하지 마. 방해하는 년놈들은 공무집행방해로 경찰 백차에 쑤셔 넣으면 그만이니까."
"예, 형님!"
각목을 든 용역들이 거친 고함을 내지르며 삼거리 김밥집을 향해 물밀듯이 쇄도했다.
쿠구구궁!
선두에 선 포클레인의 거대한 쇠 버킷이 허공으로 높게 들려 올려졌다.
그 묵직한 쇳덩이가 막 아침을 준비하던 김밥집의 낡은 함석지붕을 향해 서슬 퍼런 궤적을 그리며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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