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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12화

남원의 새로운 지배자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시장 집무실의 새 주인

 

남원시청 2층 시장 집무실의 육중한 마호가니 원목 문이 거칠게 밀려 열렸다.

 

시청 복도에 길게 깔린 자주색 카펫 위로 삼거리 토건 출신의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흙먼지 묻은 구둣발을 당당히 디디며 줄지어 들어섰다.

 

그들의 선두에는 이제 막 보궐선거 당선증을 거머쥐고 남원의 새로운 수장 자리에 오른 강태석(姜泰錫)이 서 있었다.

 

기름기가 번지르르하게 흐르는 얼굴, 빳빳하게 다려진 더블 버튼 감색 정장 위로 굵은 금목걸이가 언뜻언뜻 번뜩였다.

 

그는 성호석(成浩錫) 전임 시장이 수년간 단정하게 가꾸어 놓았던 정갈한 집무실을 마치 전리품을 둘러보듯 오만한 눈길로 훑었다.

 

벽면에 정갈하게 걸려 있던 '위민행정(爲民行政)' 붓글씨 액자가 그의 시선에 걸렸다.

 

성호석이 관료의 체면과 엄격한 명분을 내세우며 걸어 두었던 표구였다.

 

강태석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어이, 저런 거치적거리는 액자 쪼가리부터 당장 떼어내."

 

강태석이 턱짓으로 벽면을 가리키자, 곁에 서 있던 깍두기 머리의 심복 배 대표가 잽싸게 달려가 액자를 낚아챘다.

 

우지끈하는 파열음과 함께 액자가 벽에서 뜯겨 나가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튀었다.

 

집무실 구석에서 사색이 된 채 도열해 있던 시청 국·과장급 간부 공무원들이 일제히 몸을 떨며 마른침을 삼켰다.

 

강태석은 바닥에 뒹구는 부서진 액자를 구둣발로 짓밟으며 집무실 한가운데 놓인 육중한 가죽 소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는 소파 깊숙이 몸을 파묻고 거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안주머니에서 은색 시가 케이스를 꺼내 두툼한 여송연 하나를 물자, 배 대표가 재빨리 지포 라이터의 불꽃을 갖다 댔다.

 

치익 소리와 함께 독한 타바코 연기가 집무실의 묵직한 공기를 휘감았다.

 

강태석은 연기를 천장으로 길게 뿜어내며,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간부들을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다들 얼빠진 표정으로 서서 뭐 하는 거요?"

 

걸걸하면서도 탁한 강태석의 음성이 묵직하게 울렸다.

 

"성호석 영감이 중앙으로 줄행랑치고 나니까, 남원에 주인이 없는 줄 알았소?"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시청 간부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누구 하나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지난 수년간 남원 일대의 골재 채취권과 관급 공사를 독점하며 뒤통수를 치고 주먹을 휘두르던 삼거리 토건의 거두였다.

 

그런 자가 이제는 합법적인 시장의 탈을 쓰고 그들 머리 위에 군림하게 된 것이었다.

 

"오늘부터 이 남원의 법과 원칙은 바로 나 강태석이요."

 

강태석은 여송연 재를 크리스털 재떨이에 툭툭 털어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성호석 시절의 탁상공론 따위는 오늘부로 다 집어치워. 내 뜻에 토를 달거나 미적거리는 놈들은, 그게 국장이든 과장이든 당장 보따리를 싸게 만들 테니까."

 

2. 피바람 부는 관료 숙청

 

그의 선언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이튿날 아침, 남원시청 게시판에는 유례없는 대규모 파격 인사 발령 통보문이 나붙었다.

 

성호석 전임 시장 시절 행정의 중추를 맡아 원칙을 지키려 했던 총무국장, 도시계획과장, 감사계장이 모조리 직위 해제되거나 한직인 면사무소와 사업소 관리요원으로 좌천되었다.

 

시청 복도는 쥐 죽은 듯한 공포와 침묵 속에 잠겼다.

 

오후 세 시, 시장 부속실로 불려간 도시과장 정태섭은 땀으로 젖은 손바닥을 바지에 문지르며 떨리는 걸음으로 들어섰다.

 

정태섭은 1990년대 초 남원 일대 토지 구획 정리 사업의 실무를 도맡았던 정통 기술직 관료였다.

 

책상 뒤에 비스듬히 앉아 결재 서류를 넘기던 강태석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서늘한 눈빛이 정태섭의 얼굴에 가 닿았다.

 

"정 과장, 얼굴이 왜 그렇게 흙빛인가? 마치 저승사자라도 본 얼굴이네 그래."

 

"아, 아닙니다, 시장님."

 

정태섭이 굳은 목소리로 답하며 서류철을 가슴에 꼭 껴안았다.

 

강태석은 피식 웃으며 책상 위를 툭툭 쳤다.

 

"그 품에 안고 있는 거, 이리 내놔 봐."

 

정태섭이 주저하며 책상 위에 올려놓은 것은 '남원 요천 수변 구역 개발 제한 및 도시계획 고시안'이었다.

 

성호석 전 시장이 중앙으로 떠나기 직전, 과도한 난개발과 특혜 시비를 막기 위해 단단히 묶어두었던 최종 규제 문서였다.

 

강태석은 서류의 내용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은 채 첫 장을 거칠게 넘겼다.

 

"요천 변 수변 구역 개발 제한, 그리고 구도심 삼거리 일대 상업 지구 개발 보류……."

 

강태석이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성호석 영감이 지 혼자 깨끗한 척, 선비 행세를 하느라 남원 바닥 숨통을 아주 틀어막아 놨었구먼 그래."

 

"시장님, 그 규정은 하천 범람 방지와 구도심 소상공인들의 생존권을 위해 도청과 환경처의 승인을 거쳐 수립된 것입니다. 이를 일방적으로 해제하면 향후 감사원 감사나 법적 분쟁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정태섭이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직언했다.

 

그러나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강태석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쾅!

 

강태석이 육중한 손바닥으로 책상을 세차게 내리쳤다.

 

책상 위의 명패와 결재 도장함이 요란하게 들썩였다.

 

정태섭은 화들짝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감사원? 법적 분쟁?"

 

강태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태섭의 코앞까지 육중한 덩치를 들이밀었다.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독한 담배 냄새와 살기 띤 숨결이 정태섭의 얼굴을 덮쳤다.

 

"정 과장, 자네 아직도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그렇게 몰라? 성호석이 왜 중앙으로 영전해서 꽁무니를 뺐을 것 같나? 그 양반이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하고 나한테 이 자리를 고스란히 넘겨준 이유가 뭔지 정말 모른단 말인가?"

 

강태석의 번들거리는 눈동자에 소름 끼치는 조소가 번졌다.

 

"내 서랍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자네가 알면, 그 입에서 감사원 소리가 쏙 들어갈 텐데 말이야."

 

정태섭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소문으로만 무성했던 1991년 환지 비리의 내막을 강태석이 완벽히 쥐고 있음을 암시하는 협박이었다.

 

"남원의 주인은 이제 나 강태석이야. 내가 길을 내라면 길을 내고, 내가 허물라면 허무는 거다. 내 말 뜻 알아듣겠나?"

 

"하, 하지만 법적인 절차가……."

 

"시끄러워!"

 

강태석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두툼한 도시계획 서류철을 번쩍 들어 올려 정태섭의 가슴팍에 내리꽂듯 내던졌다.

 

서류철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수십 장의 도면과 결재 문서들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당장 오늘 날짜로 요천 수변 구역 개발 제한 전면 해제 고시안 작성해 와. 그리고 삼거리 일대 유통 단지 지정 및 강제 수용 승인 서류도 함께 올려."

 

강태석이 서늘하게 덧붙였다.

 

"내일까지 내 책상 위에 그 서류가 올라오지 않으면, 자네는 내일부터 지리산 뱀사골 출장소로 출근하게 될 거야. 평생 뱀이나 잡으면서 정년 채우고 싶지 않으면, 머리 똑바로 굴려."

 

정태섭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흩어진 도면들을 주워 담았다.

 

수치심과 공포가 온몸을 짓눌렀다.

 

그는 허리를 굽힌 채 뒷걸음질 치듯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태석은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벽에 걸린 남원시 대형 지도로 다가갔다.

 

요천을 끼고 도는 푸른 물줄기와 그 옆으로 붉은 선이 그어진 삼거리 골목길.

 

그의 뭉툭한 손가락이 지유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삼거리 김밥집 부근을 꾹 눌렀다.

 

"성호석의 씨종자 놈도 떠났고, 남원에 내 앞길을 막을 자는 이제 아무도 없어."

 

3. 대장실의 어둠과 봉인된 진실

 

같은 시각, 남원시청 별관 지하 1층 지적과 문서고.

 

컴컴하고 서늘한 공기가 감도는 문서고 안쪽 대장실에는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눅진하게 배어 있었다.

 

철제 덧문이 달린 대형 금고 앞에는 지적계장 최영식과 강태석의 오른팔인 배 대표가 마주 서 있었다.

 

배 대표의 험악한 인상과 가죽점퍼 안주머니에 언뜻 비치는 묵직한 쇠파이프 자루에 최영식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저, 배 대표님…… 정말 이걸 전부 비공개로 묶으라는 말씀이십니까?"

 

최영식이 식은땀을 닦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시장님 지시다. 귀가 먹었어?"

 

배 대표가 험상궂은 눈을 부라리며 으름장을 놓았다.

 

"1990년부터 1993년까지 작성된 남원 구도심 토지 구획 정리 원천 대장, 그리고 환지 처분 조서 원본 일체. 오늘부로 전부 시장 특별 결재 없이는 열람도, 복사도 절대 불가능한 '영구 비공개 제한 문서'로 묶어서 특별 금고에 봉인해."

 

최영식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이건 남원 시민들의 재산권과 직결된 기본 공문서입니다. 만약 토지 소유주들이나 유족들이 정보 공개 청구를 하거나 소송을 제기하면……."

 

"소송? 누가 소송을 해?"

 

배 대표가 비릿하게 웃으며 최영식의 어깨를 거칠게 툭 쳤다.

 

"그딴 소송 걸 만한 놈들은 이미 10년 전에 다 뒈졌거나, 삼거리에서 김밥이나 말면서 빌어먹고 있어. 그리고 이제 시장님이 누구신지 잊었어? 법이고 소송이고, 남원에서는 강태석 시장님 도장 하나면 다 끝나는 거야."

 

배 대표는 품에서 붉은색 인주와 단단한 황동 자물쇠, 그리고 굵은 철사 끈을 꺼내 대장실 선반 위에 탁 올려놓았다.

 

"토지 대장 원본에 손을 대는 놈이 있거나, 바깥으로 단 한 장이라도 유출되는 날에는…… 알지? 자네 식구들 목숨줄도 이 장부랑 같이 봉인되는 줄 알아."

 

서늘한 협박에 최영식은 더 이상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낡은 가죽 표지의 '1991년 남원군 토지 환지 처분 원천 측량 대장'을 꺼내 들었다.

 

성재환의 부친 성호석이 단독 환지로 친인척 명의를 빼돌리고, 한지유의 부친 한석규의 푸르른 과수원을 강제로 헐값에 수용했던 그 피 묻은 비리의 증거물이었다.

 

최영식은 굵은 철사로 장부철을 칭칭 동여맨 뒤, 납 봉인을 찍고 황동 자물쇠를 채웠다.

 

철컥.

 

차가운 쇠붙이가 맞물리는 소리가 어두운 문서고 안을 무겁게 울렸다.

 

남원의 지난 10년의 죄악과 진실이, 그렇게 어둠 속으로 완전히 생매장되는 순간이었다.

 

배 대표는 자물쇠 열쇠 두 개를 챙겨 주머니에 넣으며 만족스럽게 씩 웃었다.

 

"수고했어, 최 계장. 시장님께 충성하면 떡고물이 떨어지지만, 딴마음을 품으면 요천 강바닥에 콘크리트 공구리 쳐져서 가라앉는 법이지. 명심해."

 

배 대표가 어둠 속으로 유유히 사라지자, 홀로 남은 최영식은 주저앉듯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남원에 드리운 어둠은 이제 그 누구도 걷어낼 수 없을 만큼 깊고 짙어져 가고 있었다.

 

4. 흔들리는 식탁, 굳건한 맹세

 

남원 동문 우체국 안쪽 골목, 삼거리 김밥집의 저녁은 무겁고 처연했다.

 

가게 안에는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강태석이 보궐선거에서 시장으로 당선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후, 골목 상인들과 주민들은 삼거리 일대에 곧 철거 용역이 들이닥칠 것이라는 흉흉한 흉문에 휩싸여 발길을 뚝 끊어버렸다.

 

가게 주방 구석에서는 지유의 어머니가 잦아드는 기침을 토해내며 참기름 병을 닦고 있었다.

 

남편 한석규를 억울하게 잃었던 10년 전의 악몽이 되살아난 탓인지, 어머니의 얼굴은 며칠 새 몰라보게 수척해져 있었다.

 

"엄마, 그만하고 들어가서 좀 누워 계세요. 제가 다 치울게요."

 

한지유가 앞치마를 두른 채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부드럽게 달랬다.

 

어머니는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지유의 손을 파들거리며 꼭 쥐었다.

 

"지유야…… 강태석이가 기어이 시장이 됐단다. 그 흉악한 인간이 남원 시장이 됐어. 이제 우리는 어쩌면 좋으냐……. 네 아버지를 그렇게 허망하게 보내고 겨우 지켜온 이 가게마저 빼앗기면……."

 

어머니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손등에 불거진 거친 힘줄이 딸을 지키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어미의 절망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지유는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을 억누르며, 어머니의 거친 손을 두 손으로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우리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엄연히 우리 힘으로 일군 가게잖아요. 제가 절대로 이 가게, 어머니 곁을 지킬 거예요."

 

지유의 눈동자는 맑았지만, 그 안에는 꺾이지 않는 심지가 굳건히 박혀 있었다.

 

어머니를 겨우 안방으로 모셔 눕히고 문을 닫고 나온 지유는 홀로 텅 빈 김밥집 홀에 섰다.

 

형광등 불빛 아래로 적막이 흘렀다.

 

지유는 조심스럽게 교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곳에는 네모나게 접힌 하얀 손수건과, 그 속에 소중히 보관된 성재환의 반명함판 증명사진이 들어 있었다.

 

사진을 꺼내 조심스럽게 뒤집었다.

 

자신이 선물했던 깊고 푸른 흑청색 잉크로, 단정하고도 힘 있는 필체로 적힌 재환의 맹세.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글자를 손끝으로 천천히 어루만지자, 광한루원 오작교 위에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다친 무릎을 보듬어주던 재환의 따뜻한 손길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재환아…….'

 

지유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너는 지금 서울의 차가운 빌딩 숲과 억압 속에서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겠지.

 

가문의 서슬 퍼런 칼날 밑에서, 피눈물을 삼키며 법전을 파고들고 있겠지.

 

'너는 그곳에서 정의를 벼리고 있듯이, 나는 이곳 남원에서 우리들의 터전을 지킬 거야.

 

어떤 비바람이 몰아쳐도, 그 누구도 이곳을 부수지 못하게 내가 버텨낼 거야.'

 

그때, 덜컹거리며 김밥집 유리 미닫이문이 열렸다.

 

"지유야!"

 

거친 숨을 몰아쉬며 뛰어 들어온 이는 최민재였다.

 

자전거를 타고 온 동네를 샅샅이 돌고 왔는지,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교복 셔츠는 땀에 젖어 있었다.

 

"민재야, 숨 좀 돌려. 무슨 일 있어?"

 

지유가 놀라 물을 한 컵 따라 건넸다.

 

민재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뒤, 거칠게 소매로 입을 닦으며 분통을 터뜨렸다.

 

"시청 놈들이 완전히 미쳤어. 방금 시청 게시판에 공고가 떴는데, 강태석 그 인간이 취임하자마자 삼거리 일대를 '도시환경정비 특별구역'으로 지정했대. 조만간 강제 철거 보상 협의회를 연다면서 용역 깡패 놈들이 상가마다 돌아다니며 으름장을 놓고 있어!"

 

민재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게다가 시청 안에 있던 양심적인 공무원들은 전부 좌천됐고, 과거 토지 대장까지 싹 다 비공개로 봉인해 버렸대. 완전히 남원을 지 혼자 주무르는 왕국으로 만들 작정이야, 그 쓰레기 같은 놈이!"

 

민재의 분노 어린 목소리가 조용한 가게를 울렸다.

 

지유는 조용히 물컵을 정리하며 창밖의 어두운 골목을 바라보았다.

 

올 것이 오고 있었다.

 

재환이 떠나기 전 경고했던 그 거대한 악의 실체가 마침내 남원 전체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민재야."

 

지유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응?"

 

"우리가 두려워하면, 그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되는 거야. 그 사람들은 우리가 겁을 먹고 스스로 도망치기를 기다리고 있어."

 

지유가 고개를 돌려 민재를 바라보았다.

 

비록 나약한 여고생의 몸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그 어떤 거센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바위 같은 결의가 서려 있었다.

 

"재환이가 떠나면서 나한테 약속했어. 반드시 법복을 입고, 가장 날카로운 정의의 칼을 쥐고 이곳 남원으로 돌아오겠다고. 그때까지 우리가 이곳을 지켜내지 못하면, 재환이가 돌아와서 기댈 곳이 어디에 있겠어?"

 

지유의 말에 민재는 가슴이 쿵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자신보다 훨씬 작고 가녀린 소녀가, 이 거대한 폭력 앞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서 있었다.

 

민재는 주먹을 불끈 쥐며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지유야. 내가 성재환 그 자식한테 남원에 뼈를 묻고 너희 둘의 튼튼한 오작교가 되어주겠다고 큰소리쳤잖아. 삼거리 토건 놈들이 포클레인을 끌고 오든, 용역 깡패를 풀든, 내 몸뚱이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이 가게 문 앞은 절대로 못 넘어가게 할 거야."

 

두 소년 소녀의 눈빛이 허공에서 단단하게 맞물렸다.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의 고요 속에서, 그들은 서로의 어깨를 받치며 다가올 거대한 시련에 맞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5. 요천의 밤안개와 새로운 폭군

 

깊은 밤, 남원 시내를 휘감아 흐르는 요천 변에는 축축하고 차가운 밤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광한루원 뒤편, 기와지붕이 웅장하게 솟아 있는 고급 전통 요정 요천각(蓼川閣)의 2층 난간에는 붉은 청사초롱이 어둠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은밀한 밀실 안에는 시의회 의장 박동철, 삼거리 토건의 바지사장들과 지역 유지들이 둘러앉아 연신 술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상석에는 남원시장 강태석이 거나하게 취한 얼굴로 금가락지를 낀 손을 내저으며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

 

"하하하! 박 의장, 술 한잔 더 받으시오! 오늘 밤은 남원의 역사가 새로 쓰이는 밤이야!"

 

"축하드립니다, 강 시장님! 아니, 이제는 남원의 진정한 맹주이십니다!"

 

박동철이 비굴하게 허리를 조아리며 양주를 강태석의 잔에 가득 따랐다.

 

"성호석 그 샌님 같은 인간 밑에서 숨죽이고 지내느라 다들 얼마나 답답했소? 이제 시의회고 뭐고, 우리끼리 똘똘 뭉쳐서 남원 바닥을 싹 뜯어고쳐 봅시다! 요천 변에 최고급 호텔 올리고, 삼거리에는 초현대식 쇼핑타운을 짓는 겁니다!"

 

"좋지, 아주 좋아!"

 

강태석이 술잔을 단숨에 비워내고 탁자에 쾅 내려놓았다.

 

그의 얼굴에는 탐욕과 오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때, 밀실의 미닫이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배 대표가 들어와 강태석의 귀에 대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형님, 지적과 대장실 작업 완벽하게 끝냈습니다. 1991년 환지 원천 대장이랑 성호석 관련 서류들, 전부 특수 금고에 봉인해서 열쇠는 제가 챙겼습니다. 시청 놈들 중에 주둥이 놀릴 만한 놈들도 싹 다 쳐냈습니다."

 

강태석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찢어졌다.

 

"수고했다. 이제 성호석 그 여우 같은 놈도 내 손바닥 안에서 못 벗어나. 중앙에서 아무리 출세를 한들, 이 원본 장부가 내 손에 있는 한 그놈은 내 영원한 방패막이가 될 수밖에 없지."

 

강태석은 창가로 걸어가 난간을 짚고 어두운 요천을 내려다보았다.

 

저 멀리 어둠 속에 잠긴 남원 시내와, 작고 희미한 불빛 하나만이 깜빡이고 있는 삼거리 골목이 보였다.

 

강태석의 눈빛이 살쾡이처럼 번뜩였다.

 

"어이, 배 대표."

 

"예, 시장님."

 

"내일부터 당장 삼거리 쪽에 작업 들어가. 그 김밥집 과부 년한테 마지막 통보를 보내. 순순히 도장 찍고 나가지 않으면, 한밤중에 포클레인으로 지붕을 뜯어버리겠다고 전해."

 

"알겠습니다, 형님. 내일 날 밝는 대로 애들 풀어서 확실하게 손봐주겠습니다."

 

배 대표가 비열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강태석은 밤안개가 자욱한 요천의 강물을 향해 독한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냈다.

 

남원은 이제 완벽하게 그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성호석의 그림자는 지워졌고, 새로운 폭군의 철권통치가 남원의 숨통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6. 관악의 바람, 벼려지는 칼날

 

같은 시각,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서울 관악산 자락 신림동 고시촌.

 

남원의 축축한 밤공기와는 전혀 다른, 살을 에는 듯한 메마르고 서늘한 바람이 헌책방 골목을 휩쓸고 지나갔다.

 

가파른 비탈길을 따라 다닥다닥 붙어 있는 낡은 고시원 건물들 창문마다 새벽까지 꺼지지 않는 백열등 불빛들이 위태롭게 명멸하고 있었다.

 

그 비좁고 컴컴한 고시원 단칸방 중 하나.

 

책 한 권을 간신히 펼칠 만한 작은 합판 책상 앞에 성재환이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성북동 사저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낮에는 학원에서, 밤에는 이곳 신림동 헌책방 골목의 좁은 독서실을 전전하며 사법시험의 방대한 법리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두께가 한 뼘도 넘는 두툼한 민법총칙과 형법요론, 헌법학 원론이 빽빽하게 쌓여 있었다.

 

벽면에는 지유가 요천 둑길에서 그려 건네주었던 작은 자전거 스케치 조각이 압정으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연필 선 하나하나에 배어 있는 지유의 따뜻한 숨결과 남원의 바람이, 지친 재환의 심장을 쉼 없이 두드리고 있었다.

 

재환은 백부에게 물려받은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을 쥐었다.

 

캡 상단에 새겨진 선명한 금빛 각인.

 

'成宰桓.'

 

'Fiat justitia, ruat caelum.'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지유가 선물해 주었던 깊고 푸른 흑청색 잉크가 가득 채워진 펜촉이 사각거리며 두꺼운 법서의 여백을 맹렬하게 가로질렀다.

 

그의 눈빛은 불과 두 달 전 남원을 떠나올 때의 상처 입은 소년의 것이 아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서늘한 침묵과, 부친 성호석과 토착 세력 강태석이 저지른 죄악을 반드시 제 손으로 처단하겠다는 서슬 퍼런 투지가 서려 있었다.

 

재환은 책 한편에 놓인 낡은 비리 기록 수첩을 펼쳤다.

 

서울로 향하던 통일호 기차 안에서부터 기록하기 시작했던 그 수첩이었다.

 

[1991년 남원군 토지 환지 처분 및 과수원 강제 수용 사건]

 

- 주모자: 성호석(전 남원시장, 현 내무부 기획조정실장), 강태석(삼거리 토건 회장)

- 피해자: 한석규(한지유의 부친) 및 남원 구도심 영세 농민 12인

- 범죄 사실: 환지 측량 조작, 소유권 강제 이전, 공문서 위조 및 행사,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재환은 만년필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펜촉 끝에서 흑청색 잉크가 짙은 피처럼 번져 나갔다.

 

"아버지, 그리고 강태석……."

 

재환의 입술 사이로 서늘하고 단호한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당신들이 세운 그 썩은 왕국이 얼마나 견고하든 상관없습니다. 내가 반드시 법복을 입고, 당신들의 죄악을 세상의 가장 밝은 빛 아래로 끌어내릴 테니까."

 

재환은 만년필을 조용히 내려놓고, 가슴 안주머니에서 지유가 정갈하게 접어주었던 하얀 손수건을 꺼내 얼굴의 땀을 닦아냈다.

 

손수건에 배어 있는 은은한 비누 향기가 가슴 깊은 곳의 불안을 잠재우고 차가운 이성을 되찾아 주었다.

 

'지유야, 조금만 기다려 줘.

 

내가 반드시 모든 것을 바로잡고, 너의 곁으로 돌아갈 테니.'

 

관악산 자락에서 불어오는 거친 새벽바람 속에서, 남원의 비극을 끝장낼 정의의 칼날이 소리 없이, 그러나 가장 예리하게 벼려지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