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노벨
← 목록
3x
1.0
[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120화

돌아온 약속, 영원히 머무는 사랑

📅 2026-10-02 18:04•✍️ 만우자•👁️ 0•
최신 회차

1. 다시 찾아온 남원의 봄

 

겨우내 지리산 자락에서 불어오던 매서운 삭풍이 잦아들고, 요천(蓼川)의 물길 위로 봄볕이 투명하게 부서져 내렸다.

 

얼어붙었던 강둑의 흙이 풀리며 파릇한 쑥잎이 돋아났고, 강변을 따라 끝없이 도열한 수양버들은 연둣빛 새순을 눈부시게 틔워 내고 있었다.

 

남원 동문 우체국 뒷골목, 삼거리 김밥집의 낡은 함석 처마 끝에 매달린 놋쇠 풍경이 산들바람에 맑고 청아한 쇳소리를 울렸다.

 

가게 안에서는 이른 새벽부터 지어 올린 쌀밥의 구수한 김과 함께, 갓 볶아 낸 국산 통깨의 고소한 참기름 내음이 골목길 가득 번져 나갔다.

 

조리대 앞에 단정한 하얀 위생 앞치마를 두르고 선 한지유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김발을 굴리고 있었다.

 

정갈하게 채 썬 당근과 시금치, 간장에 조린 우엉, 달걀지단이 고슬고슬한 밥 위에 얹혀져 빈틈없이 말려 나갔다.

 

7년 전, 칼바람 속에서 쇠파이프 테러와 붉은 유성 페인트의 악의를 온몸으로 견뎌내야 했던 그 위태롭던 유리창은 이제 없었다.

 

가게 입구에는 목공소 윤 씨가 지리산 육송(陸松)을 깎아 만들어 준 묵직한 원목 간판이 단단히 걸려 있었다.

 

간판 모서리에는 깊고 푸른 흑청색 안료로 새겨 넣은 글귀가 햇살을 받아 잔잔히 빛났다.

 

'끝까지 남은 사랑.'

 

지유는 칼끝으로 단정하게 김밥을 썰어 내며 맞은편 2층 목조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창문을 활짝 열어둔 2층 '성재환 법률사무소'의 커다란 창가에는 지리산 봄바람에 하얀 커튼이 기분 좋게 흩날리고 있었다.

 

책상 앞에 단정한 흰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앉아 서류를 검토하던 성재환이, 마치 시선을 느낀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창틀 너머로 두 사람의 눈길이 허공에서 부드럽게 얽혔다.

 

재환의 입가에 피어난 온화하고 깊은 미소는, 차가운 검찰청 복도에서 피고인들을 내려다보던 날카로운 서슬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온기였다.

 

그는 쥐고 있던 만년필을 조심스레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내려왔다.

 

성큼성큼 골목길을 가로질러 김밥집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의 걸음걸이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오늘 날씨가 참 좋다, 지유야."

 

재환의 낮은 목소리가 아침 공기 속에 다정하게 녹아들었다.

 

지유는 썰어 둔 김밥 한 줄을 둥근 접시에 담아 내밀며 부드럽게 웃었다.

 

"아침 일찍부터 서류 보느라 눈 피로하지 않아? 장국 따뜻할 때 어서 한술 떠."

 

"네가 말아 준 김밥 냄새를 맡고 도저히 위에 앉아 있을 수가 있어야지."

 

재환은 익숙하게 평상에 걸터앉아 젓가락을 들었다.

 

윤기가 흐르는 김밥 한 점을 입에 넣고 천천히 씹는 그의 얼굴에 깊은 안도감이 어렸다.

 

지난 세월, 서울 신림동 고시촌의 삭막한 헌책방 골목과 서초동 대검찰청의 살벌한 특수부 취조실에서 컵라면과 찬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며 버텨냈던 고독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쥐었던 시퍼런 칼날을 내려놓고, 마침내 지유의 온기 곁으로 영원히 돌아왔다는 실감이 혀끝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2. 평상 위의 온기와 이웃들의 웃음

 

"성 변호사님, 벌써 내려와서 새색시 김밥으로 배를 채우고 계시네!"

 

골목 어귀에서 자전거 벨을 요란하게 울리며 나타난 우체국 집배원 박 씨가 자전거를 세우며 껄껄 웃었다.

 

어깨에 둘러멘 가죽 우편 가방에서는 갓 배달된 신문과 편지들이 묵직하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박 주임님, 식사 안 하셨으면 이리로 와서 한 줄 드세요. 오늘 아침에 방앗간에서 갓 짜 온 참기름이라 향이 유독 좋습니다."

 

지유가 반갑게 맞이하며 갓 만 김밥 한 줄을 은박지에 싸서 내밀었다.

 

"아이고, 새색시 인심은 여전하구먼. 그래, 오늘은 법원 출석 없어?"

 

"네, 오늘은 종일 사무실에서 우포리 농민분들 배상금 정산 서류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급한 일정이 없어서 조금 한가하네요."

 

재환이 장국 그릇을 내려놓으며 깍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목공소 앞을 비질하던 윤 씨가 커다란 빗자루를 기대어 세워 두고 터벅터벅 걸어왔다.

 

그의 투박한 손에는 지리산 참나무를 깎아 만든 작은 나무 조각 두 개가 쥐어져 있었다.

 

"성 변호사, 이거 받아 봐."

 

윤 씨가 쑥스러운 듯 건넨 것은 정교하게 깎아 옻칠을 올린 손바닥만 한 목각 기러기 한 쌍이었다.

 

"완월정 대례 때 쓰던 큰 기러기는 사당에 두고, 이건 내가 자투리 육송 좋은 놈으로다가 밤새 깎은 거여. 둘이 책상 머리에 하나씩 두고 백년해로하라고."

 

재환은 두 손으로 정중하게 목각 기러기를 받쳐 들었다.

 

은은한 솔향과 함께 나무의 결이 손끝에 따스하게 닿았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사무실 창가에 소중히 모셔 두겠습니다."

 

"감사는 무슨. 우리 골목길 억울한 눈물 다 닦아 준 사람이 성 변호사인데. 아, 저기 방앗간 배 씨 아지매도 오네!"

 

골목 건너편에서 앞치마를 두른 공설 방앗간 배 씨 아주머니가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시루를 들고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지유야, 재환아! 이것 좀 맛봐라. 쑥이 하도 연하고 좋길래 멥쌀가루 빻아서 첫 쑥버무리를 쪘다. 봄철 첫 쑥을 먹어야 한 해 동안 잔병치레를 안 하는 법이여."

 

배 씨 아주머니가 널찍한 채반에 담긴 쑥버무리를 평상 한가운데에 턱 하니 내려놓았다.

 

초록빛 쑥 향이 고소한 김밥 냄새와 어우러져 골목 전체를 따스하게 채웠다.

 

지유가 젓가락을 챙겨 이웃들에게 건네는 사이, 멀리서 유모차를 밀며 걸어오는 익숙한 그림자가 보였다.

 

"어머, 하은아! 민재야!"

 

지유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환한 반가움으로 물들었다.

 

남원일보 기자 수첩을 뒷주머니에 꽂은 최민재가 늠름한 표정으로 앞장서 오고 있었고, 그 곁에서 윤하은이 하얀 레이스가 달린 포근한 유모차를 조심스레 밀고 있었다.

 

유모차 안에서는 지난겨울 남원에 큰 축복처럼 태어난 딸, '단비'가 보드라운 분홍빛 턱받이를 한 채 곤히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야, 성재환! 넌 변호사 사무실 문 열어 두고 김밥집 평상에서 온종일 신선놀음이냐?"

 

민재가 짓궂게 웃으며 재환의 어깨를 툭 쳤다.

 

"기사 마감은 다 쳐놓고 농땡이 치러 온 거냐, 최 기자?"

 

재환도 지지 않고 입꼬리를 올리며 민재를 맞받아쳤다.

 

"말도 마라. 강태석 그 인간 대법원 상고 기각 확정 판결 소식 1면에 특필하고 막 인쇄소 넘기고 오는 길이다. 이제 그 작자도 전주교도소에서 12년 꽉 채우고 나와야지. 140억 추징금도 국고 환수 다 끝났고."

 

민재의 목소리에 깊은 통쾌함과 홀가분함이 묻어났다.

 

30년 동안 남원을 짓누르던 거대한 악의 사슬이 마침내 법의 심판대 위에서 영원한 마침표를 찍은 것이었다.

 

하은이 지유의 손을 꼭 잡으며 유모차를 가리켰다.

 

"지유야, 단비가 오늘 아침에 옹알이를 유독 크게 하더라고. 대모 얼굴 보고 싶어서 보챈 게 틀림없어."

 

지유는 조심스레 몸을 숙여 잠든 단비의 작고 붉은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숨을 내쉴 때마다 오르내리는 작고 연약한 가슴, 평화롭게 감긴 두 눈을 바라보는 지유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피비린내 나는 폭압과 공포의 시대를 온몸으로 버텨낸 끝에, 마침내 이 땅에 이토록 찬란하고 순결한 새 생명이 꽃처럼 피어난 것이었다.

 

"참 예쁘다. 정말 고마워, 하은아. 이렇게 건강하게 자라 줘서."

 

지유의 속삭임에 단비가 배시시 웃는 듯 작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골목길 평상 주변으로 이웃들이 모여들어 쑥버무리를 나누고 김밥을 집어 먹으며 웃음꽃을 피웠다.

 

과거 시청 위생과의 표적 단속과 경찰의 늑장 출동, 조폭들의 쇠파이프 난동에 공포로 떨며 문을 걸어 잠가야 했던 그 처참했던 골목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고 상처를 보듬어 준 민초들의 정직한 연대가, 마침내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위대한 승리의 일상을 꽃피워 내고 있었다.

 

3. 춘향관 뒤란 오솔길의 기억

 

"재환아, 점심 지나고 잠깐 시간 비워 둘 수 있어?"

 

이웃들이 각자의 일터로 돌아가고 골목이 잠시 한적해졌을 무렵, 지유가 조리대 정리를 마치며 조용히 물었다.

 

재환이 앞치마를 벗는 지유를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늘은 종일 비워 둬도 괜찮아.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어?"

 

"광한루원에 벚꽃이 활짝 피었대. 완월정 앞마당도 그렇고, 오작교 주변으로 꽃잎이 날리기 시작했다고 방앗간 아주머니가 그러시더라고."

 

지유의 눈동자에 맑은 설렘이 번져 있었다.

 

재환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는 2층 사무실로 올라가 책상 위에 놓인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백부에게 물려받았던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

 

캡 상단에 '成宰桓'이라는 이름과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이라는 법언이 새겨진 그 펜은, 이제 세상을 베어내는 검사의 차가운 흉기가 아니었다.

 

지유가 선물해 주었던 깊은 밤빛의 흑청색 잉크를 가득 머금은 채, 가난한 농민들의 빼앗긴 땅을 되찾아 주고 억울한 이웃들의 탄원서를 적어 내려가는 따뜻한 지팡이가 되어 있었다.

 

재환은 만년필을 양복 안주머니에 소중히 꽂아 넣고 아래로 내려왔다.

 

두 사람은 소박하고 단정한 옷차림으로 나란히 김밥집 문을 나섰다.

 

골목길을 벗어나 요천을 따라 뻗은 제방 둑길에 들어서자, 남원의 따스한 봄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과거 폭우 속에 맥없이 터져 나가며 구도심을 삼킬 뻔했던 붕괴 현장은, 튼튼한 화강암 축대와 정갈한 산책로로 완벽히 복구되어 있었다.

 

둑길 양옆으로 끝없이 이어진 벚나무들은 터질 듯 부풀어 오른 분홍빛 꽃망울들을 일제히 터뜨리고 있었다.

 

"기억나, 재환아? 열여덟 살 봄에 우리 여기서 자전거 타던 날."

 

지유가 요천의 잔잔한 물결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잊겠어. 네가 뒤뚱거리며 타던 자전거 뒤를 내가 행여나 넘어질까 봐 숨이 턱에 닿도록 쫓아 뛰어갔었는데."

 

"그때 네가 잡아 주지 않았으면 난 진작에 개천 풀숲으로 굴러떨어졌을 거야."

 

지유가 키득키득 웃으며 재환의 팔을 살며시 감싸 쥐었다.

 

재환은 걸음을 멈추고 지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치마 밑단 사이로 드러난 지유의 오른쪽 무릎에는, 7년 전 서울로 떠나던 자신의 관용차를 뒤쫓다 톨게이트 아스팔트 바닥에 갈려 남겨진 거친 흉터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재환의 가슴 한구석이 여전히 시큰하게 저려 왔다.

 

지유는 재환의 시선이 어디에 머무는지 단번에 알아차리고는, 잡고 있던 팔에 조금 더 다정하게 힘을 주었다.

 

"이제 하나도 안 아파. 비가 와도 쑤시지도 않고.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

 

"그 상처를 볼 때마다 내 가슴이 찢어져."

 

"이건 상처가 아니야, 재환아. 네가 반드시 돌아올 거라는 걸 하루도 잊지 않게 해 준, 내 믿음의 훈장이었어."

 

지유의 맑고 결연한 목소리가 봄바람에 실려 재환의 귓가를 울렸다.

 

두 사람은 광한루원 북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섰다.

 

수령 수백 년 된 아름드리 팽나무 고목들이 웅장한 가지를 뻗어 연둣빛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고, 춘향관 뒤란으로 이어지는 호젓한 흙길 위로는 벚꽃 잎들이 하얀 눈가루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7년 전, 서울로 떠나야 하는 가문의 무거운 굴레 속에서 번민하던 재환이 팽나무 아래 벤치에 홀로 앉아 있을 때, 지유가 조심스레 다가와 흑청색 잉크병을 건네주었던 바로 그 오솔길이었다.

 

'정의를 세우는 사람이 되어 주세요. 하늘이 무너져도 꺾이지 않는 푸른 글씨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 주세요.'

 

그날 지유가 건넸던 순수한 잉크 한 병이, 서울의 거대한 권력과 유혹, 친부의 죄악 앞에서 방황하던 성재환을 마침내 참된 인간이자 법조인으로 바로 세운 나침반이었다.

 

재환은 오솔길 흙바닥에 떨어지는 꽃잎을 밟으며, 품속 안주머니에 손을 얹었다.

 

그의 심장 박동과 맞닿은 자리에서 만년필이 묵직한 체온을 전해 오고 있었다.

 

4. 오작교 위의 벚꽃비

 

연못가로 다가서자 호수 한가운데 우뚝 솟은 완월정(玩月亭)이 그 고아한 자태를 드러냈다.

 

완월정 앞마당 잔디밭은 푸른 기운을 한껏 머금고 있었고, 못물 위에는 봄바람을 탄 분홍빛 벚꽃 잎들이 수천수만 척의 작은 돛단배처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연못을 가로지르는 돌다리, 오작교(烏竹橋)가 눈부신 봄 햇살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돌로 깎아 만든 둥근 네 개의 홍예(虹霓) 위로 벚꽃비가 쏟아져 내렸다.

 

바람이 한번 스쳐 지나갈 때마다 벚나무 가지들이 일제히 몸을 흔들며 은백색과 연분홍빛 꽃잎들을 눈보라처럼 허공에 흩뿌렸다.

 

재환과 지유는 오작교 돌계단을 하나씩 천천히 밟아 올랐다.

 

다리 가장 높은 난간에 이르러 멈춰 섰을 때, 지유는 난간에 두 손을 얹고 못물을 내려다보았다.

 

수면 위로 비친 두 사람의 모습 위로 꽃잎들이 끊임없이 내려앉으며 둥근 파문을 그렸다.

 

"여기서 참 많은 일이 있었네."

 

지유가 흩날리는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아련하게 속삭였다.

 

"학생증 사진 모서리를 잘라 건네며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했던 날도, 온 남원이 뒤집히고 괴한들에게 쫓기다 너를 다시 만났던 날도, 그리고…… 네가 이 다리 위에서 내게 무릎을 꿇었던 날도."

 

지유의 네 번째 손가락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백금 반지가 햇살을 반사했다.

 

반지 안쪽에 새겨진 라틴어 법언과 한글 문구가 다시금 선명하게 떠올랐다.

 

'Mane nobiscum(우리와 함께 머무소서).'

 

'끝까지 남은 사람에게.'

 

재환은 지유의 곁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는 정장 안주머니에서 검은 옻칠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금빛 닙이 봄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였다.

 

재환은 만년필을 지유의 손바닥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지유야."

 

"응, 재환아."

 

"그날 서울행 기차 안에서 이 펜을 쥐었을 때, 내 안에는 오직 분노와 복수심밖에 없었어. 가문의 죄악을 도려내고, 강태석을 파멸시키고, 내 아버지를 법정에 세우겠다는 서슬 퍼런 칼날만 품고 있었지."

 

재환의 눈빛이 깊고 투명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 길고 어두웠던 터널을 지나 내가 마침내 남원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건, 그 칼날 때문이 아니었어. 네가 내게 채워 주었던 흑청색 잉크의 온기, 네가 삼거리 골목에서 홀로 버텨내며 지켜 준 그 사랑이 나를 여기까지 이끈 거야."

 

지유는 손바닥에 닿은 만년필을 가만히 쥐었다.

 

매끄러운 옻칠의 감촉 너머로 7년간 재환이 감내해야 했던 수많은 밤의 고뇌와 무게가 오롯이 전해져 왔다.

 

"떠나는 사람보다 남아서 기다리는 사람의 시간이 훨씬 더 가혹하다는 걸 알아. 붉은 페인트가 칠해지고 굴착기가 가게를 부수려 할 때도,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홀로 빈소를 지킬 때도, 넌 내 약속 하나만 믿고 그 자리에 서 있어 줬지."

 

재환의 목소리가 엷게 떨려 왔다.

 

그의 단단한 눈매에 촉촉한 물기가 차올랐다.

 

"약속을 지키러 돌아온 사람은 결코 영웅이 아니야. 그 약속을 끝까지 믿고 자리를 지켜 준 사람만이, 세상을 무너지지 않게 지탱하는 진짜 기적이지."

 

지유의 뺨 위로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이나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오랜 인내와 시련의 세월이 마침내 온전하고 거룩한 구원으로 승화되었음을 깨달은 영혼의 감격이었다.

 

"재환아, 난 단 한 번도 네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적 없어."

 

지유가 눈물을 머금은 채 환하게 미소 지었다.

 

"네가 떠나던 날 오작교에서 건네준 증명사진 뒷면의 글씨를 볼 때마다, 난 알 수 있었어. 성재환이라는 사람은 세상을 다 버려도 약속만은 버리지 못할 사람이라는 걸. 그래서 난 외롭지 않았어. 네가 돌아올 자리를 깨끗하게 쓸고 닦아 놓는 것만으로도 내 하루하루는 가득 차 있었으니까."

 

재환은 지유의 손을 꼭 쥐었다.

 

그의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지유의 여린 손가락과 백금 반지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5. 꽃잎 날리는 자리에서 나눈 맹세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며 광한루원 전체가 거대한 꽃잎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완월정의 처마 끝을 스친 꽃잎들이 오작교 위로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아득히 멀어지고, 오직 두 사람을 둘러싼 바람 소리와 꽃잎 스치는 소리만이 귓가를 맴돌았다.

 

재환이 조심스레 손을 뻗어 지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지유의 젖은 뺨을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지유는 떨리는 숨을 들이쉬며 재환의 품으로 한 걸음 더 파고들었다.

 

두 사람의 거리가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재환의 깊고 짙은 눈동자가 지유의 맑은 눈망울을 가만히 응시했다.

 

말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지난 7년간의 비극과 눈물, 수많은 협박과 공포, 서울과 남원을 가르던 억겁 같던 거리, 그리고 마침내 이뤄 낸 사법 정의와 평화의 모든 순간들이 두 사람의 눈빛 속에서 하나로 녹아내렸다.

 

재환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지유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까치발을 들었다.

 

오작교 한가운데, 쏟아지는 벚꽃비 속에서 두 사람의 입술이 부드럽게 맞닿았다.

 

처음에는 봄바람처럼 조심스럽고 애틋한 온기였다.

 

그러나 이내 서로의 존재를 온전히 확인하듯, 입술을 겹쳐 오는 온도는 깊고 뜨거워졌다.

 

재환의 단단한 팔이 지유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겼고, 지유는 그의 목을 감싸 쥐며 자신의 모든 숨결과 체온을 내어주었다.

 

입술을 통해 전해지는 것은 단순한 연정의 떨림이 아니었다.

 

세상의 폭압 앞에서도 무릎 꿇지 않았던 결기, 서로를 향한 절대적인 신뢰, 그리고 영원히 헤어지지 않고 이 땅에 함께 머물겠다는 거룩한 서약이었다.

 

한참 동안 이어진 깊고 벅찬 입맞춤 끝에, 두 사람의 이마가 맞닿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두 사람의 볼 위로 흩날리던 벚꽃 잎 하나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지유가 붉어진 얼굴로 눈을 뜨며 재환을 올려다보았다.

 

재환은 벅찬 숨을 고르며 지유의 머리칼에 묻은 꽃잎을 다정하게 털어내 주었다.

 

"지유야, 내 모든 생은 이제 너와 이 남원의 땅 위에 머물 거야."

 

재환의 목소리는 바위처럼 단단하고, 봄볕처럼 따스했다.

 

"약속을 지킨 자와, 끝까지 남은 사람. 그 둘이 함께 걸어가는 길이라면 세상 어떤 비바람이 불어와도 두렵지 않아."

 

지유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리 여기서,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 손잡아 주면서 평생 함께 살아가자."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오작교 난간에 기대어 섰다.

 

저 멀리 요천 둑길을 따라 자전거를 탄 아이들이 웃음소리를 터뜨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남원 시내 저편에서는 활기찬 시장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봄바람을 타고 아스라이 밀려왔다.

 

광한루원 경내를 가득 메운 수천 그루의 벚나무들이 일제히 꽃잎을 날리며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하듯 눈부신 꽃길을 열어 주고 있었다.

 

한 사람은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한 사람은 그 약속을 믿고 끝까지 남아 자리를 지켰다.

 

그 오랜 기다림과 인내가 마침내 찬란한 봄날의 기적을 완성해 냈다.

 

두 사람의 맞잡은 손가락 사이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사랑의 온기가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

목록으로
최신 회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