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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117화

끝까지 남은 사람에게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오작교의 서약

 

완월정 뒤란을 감싸 안은 밤공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광한루원(廣寒樓苑) 오작교(烏竹橋)의 둥근 홍예석 위로 서늘한 초가을 바람이 잔잔한 수면을 스치며 번져 나갔다.

 

물결 위에 부서지던 은백색 달빛은 흔들림 없이 두 사람의 발치에 고여 있었다.

 

한지유의 손가락에 끼워진 백금 반지가 달빛을 받아 시리도록 맑은 광채를 뿜어냈다.

 

반지 안쪽에 정교하게 음각된 라틴어 법언 'Mane nobiscum'과 흑청색 안료로 새겨진 '끝까지 남은 사람에게'라는 글귀가 지유의 체온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었다.

 

성재환은 한쪽 무릎을 꿇었던 자세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시선은 지유의 네 번째 손가락에서 단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7년이라는 시간 동안 수없이 가슴을 짓누르던 참담한 죄책감과 그리움이 마침내 제자리를 찾은 안식으로 바뀌고 있었다.

 

지유는 여전히 떨리는 숨을 내쉬며 자신의 왼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거칠어진 손끝과 굳은살, 지난 세월 삼거리 김밥집의 차가운 물에 손을 담그고 거친 도마를 닦아내며 버텨온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손이었다.

 

그 손가락 위에 올려진 백금 반지는 너무도 눈부셔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재환아."

 

지유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바람결에 바스러질 듯 애틋했다.

 

그녀의 두 눈동자에 가득 고여 있던 투명한 눈물이 마침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재환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뺨에 닿은 눈물방울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냈다.

 

지유의 살갗은 서늘했으나, 그 속에 담긴 심장의 온도는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전해져 왔다.

 

재환의 가슴 안쪽에서 뜨거운 기운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지유야."

 

재환의 나지막한 부름에 지유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달빛 아래에서 얽혀 들었다.

 

그곳에는 7년 전 열여덟 살의 소년과 소녀가 서로를 바라보며 삼켰던 비극의 눈물도, 남원역 플랫폼에서 피 흘리는 무릎으로 떠나가는 기차를 바라보아야 했던 참혹한 절망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오랜 고통을 관통해 온 자들만이 나눌 수 있는 견고하고 깊은 침묵만이 흐를 뿐이었다.

 

2. 만년필에 깃든 약속

 

성재환은 정장 안주머니에서 검은 옻칠이 매끄럽게 흐르는 만년필을 다시 꺼내 들었다.

 

서울 명문 로스쿨을 졸업한 백부에게 물려받았던 독일제 만년필이었다.

 

캡 상단에는 금빛으로 '成宰桓'이라는 이름 석 자와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이라는 법언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펜촉 안에는 지유가 남원여고 앞 문구점에서 용돈을 털어 사주었던, 깊고 푸른빛이 감도는 흑청색 잉크가 여전히 가득 채워져 있었다.

 

가문의 규율이자 사법 시험의 숙명이었고, 때로는 거악을 단죄하는 서슬 퍼런 칼날이었던 만년필이었다.

 

재환은 그 만년필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지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지유의 손끝에 차가운 옻칠의 감촉이 닿았다.

 

"이 만년필은 원래 내 가문의 법복을 위해 쥐었던 것이었어."

 

재환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오작교 돌난간을 울릴 만큼 단단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라는 말은, 누군가에게는 가문의 명예였고 출세를 위한 허울이었을지 몰라."

 

재환의 눈빛이 흔들림 없이 지유를 응시했다.

 

"하지만 신림동 고시촌 세 평 단칸방에서, 그리고 서울지검과 대검 특수부의 취조실에서 밤을 지새울 때마다 내게 정의는 다른 의미였어."

 

지유는 만년필을 쥔 손을 가만히 오므렸다.

 

차가운 만년필의 금속 닙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그 무게는 결코 차갑지 않았다.

 

그것은 재환이 7년 동안 짊어지고 싸워온 시간의 무게였다.

 

"내게 정의는 저 높은 법관석이나 대검찰청의 높은 빌딩 위에 있는 게 아니었어."

 

재환이 말을 이었다.

 

"남원에 홀로 남아 붉은 페인트와 쇠파이프의 공포 속에서도 문을 열었던 삼거리 김밥집의 새벽, 흙 묻은 고무신을 신고 억울함을 호소하던 박성두 노인의 눈물, 그리고 매일 밤 답장을 받지 못하면서도 써 내려간 네 편지들 속에 있었지."

 

지유의 가슴이 먹먹하게 죄어왔다.

 

그녀는 난간 위에 놓여 있던 낡은 양철 과자 상자를 떠올렸다.

 

재환이 떠나고 홀로 남겨진 방 안에서, 밤마다 호롱불 아래 써 내려갔던 수백 통의 부치지 못한 편지들이었다.

 

그 편지들은 원망이 아니라 재환을 향한 염려와 믿음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검사가 되었고, 그 약속을 완성하기 위해 서울의 모든 자리를 버리고 남원으로 돌아왔어."

 

재환의 손이 지유의 손을 감싸 쥐었다.

 

"이제 이 펜은 세상을 심판하는 칼날이 아니라, 너와 함께 남원의 약자들을 지키고 우리의 내일을 적어 내려가는 약속의 도구야. 내 모든 시작이었던 너에게, 내 모든 마지막을 맡길게."

 

지유는 만년필을 가슴팍에 꼭 끌어안았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온기가 퍼져 나가며 굳어 있던 지난날의 응어리가 눈 녹듯 흩어졌다.

 

3. 7년의 상처를 지나

 

바람이 수양버들 가지를 흔들며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오작교 아래 연못 위로 수련 잎들이 달빛을 머금은 채 잔잔하게 흔들렸다.

 

지유는 조심스럽게 한 걸음 다가가 재환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재환의 단정한 정장 깃에서 풍겨오는 익숙한 편백나무 향과 서늘한 밤공기, 그리고 그 밑바닥에 흐르는 따뜻한 체온이 지유의 온몸을 감쌌다.

 

재환은 망설임 없이 팔을 둘러 지유를 자신의 품 안 가득 끌어안았다.

 

부서질세라 조심스러우면서도 결코 놓지 않겠다는 듯 굳건한 포옹이었다.

 

지유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재환의 가슴에 이마를 댄 채 참아왔던 흐느낌을 터뜨렸다.

 

어머니 박순례가 남원의료원 차가운 중환자실에서 숨을 거두던 날의 비명도, 영안실을 봉쇄하겠다며 협박하던 조폭들의 살기등등한 눈빛도, 홀로 김밥을 말며 벽을 타고 흐르는 붉은 페인트를 석유로 문질러 닦아내던 외로운 새벽도, 이 순간 재환의 품 안에서 모두 녹아내리고 있었다.

 

"재환아……."

 

지유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나 정말 무서웠어. 네가 떠나던 날, 남원 톨게이트 아스팔트에 넘어져 피가 철철 흐르는데…… 네 관용차가 먼지를 날리며 사라지는 걸 보면서 세상에 나 혼자만 버려진 것 같았어."

 

지환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으로 욱신거렸다.

 

그는 지유의 등을 단단히 쓸어내리며 그녀의 머리칼에 입을 맞추었다.

 

"알아. 다 알아, 지유야."

 

"김밥집 유리가 깨지고, 썩은 오물이 날아들고, 사람들이 날 보고 손가락질할 때도…… 난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어. 내가 울어버리면, 내가 무너져버리면 서울에서 홀로 싸우는 네가 돌아올 집이 사라질까 봐."

 

지유는 재환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손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그 약속 하나만 붙들고 버텼어. 학생증 사진 뒤에 네가 적어준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는 그 글자 하나만 매일 밤 만지작거리면서……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 악마 같은 강태석이 찾아와 무릎 꿇으라고 협박했을 때도…… 난 네가 돌아올 거라는 걸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어."

 

재환의 눈가에서도 끝내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려 지유의 어깨를 적셨다.

 

그는 그녀를 더 깊이 품에 안았다.

 

두 사람의 심장 박동이 오작교의 차가운 돌바닥을 울릴 듯 하나로 겹쳐 뛰고 있었다.

 

"미안해. 너무 늦게 와서, 너 혼자 그 험한 지옥을 견디게 해서 정말 미안해."

 

재환의 목소리가 젖은 숨과 함께 떨려 나왔다.

 

"하지만 지유야, 이제 어디에도 가지 않아. 대검찰청의 부장자리도, 서울의 화려한 출세길도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 내가 돌아온 이유는 오직 너였고, 내가 법을 지키려 한 이유도 네가 살아가는 이 땅 남원이었어."

 

재환은 품에서 지유를 살며시 떼어놓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달빛 아래 빛나는 그의 눈동자는 맑고 투명했으며,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떠나는 사람이 아니라, 영원히 네 곁에 머무는 사람으로 살 거야. 매일 아침 네가 김밥을 마는 소리에 잠에서 깨고, 맞은편 2층 사무실 창가에서 너를 바라보며 억울한 이웃들의 소장을 쓰고, 저녁이면 손을 잡고 이 요천 둑길을 걸을 거야. 내 남은 모든 생을 너와 함께 머물겠다."

 

지유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그것은 7년 만에 비로소 피어난, 열여덟 살 소녀 시절의 티 없이 맑고 순수한 미소였다.

 

"응. 머물러줘. 내 곁에, 끝까지 남아줘."

 

두 사람의 얼굴이 서서히 가까워졌다.

 

오작교의 가장 높은 곳, 수백 년 전 춘향과 몽룡이 사랑을 맹세했던 그 유서 깊은 돌다리 위에서 두 사람의 입술이 부드럽게 맞닿았다.

 

가을밤의 찬 바람도 그 온기를 흩뜨리지 못했다.

 

달빛은 두 사람을 따뜻하게 감싸 안으며 요천의 은빛 물결 속으로 조용히 잦아들었다.

 

4. 숨죽여 지켜본 벗들

 

완월정으로 이어지는 뒤란 오솔길, 수령 수백 년 된 팽나무 고목의 거대한 그림자 뒤편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거 봐, 내가 뭐랬어. 재환이 저 녀석, 서울 가더니 말만 번지르르해진 줄 알았더니만 제법이잖아."

 

나지막하지만 웃음기가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최민재였다.

 

남원일보사 정식 사회부 기자가 된 민재는 팽나무 기둥에 등을 기댄 채 오작교 쪽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아내 윤하은이 서 있었다.

 

하은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민재 씨는 그런 소리가 나와요? 난 가슴이 미어져서 숨도 못 쉬겠는데."

 

하은이 손수건으로 눈가를 콕콕 찍어 누르며 작게 타박했다.

 

"지유가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는지 알잖아요. 어머니 돌아가시고 그 넓은 김밥집에 홀로 남아서…… 그 조폭 놈들이 들이닥칠 때마다 지유 혼자 그 차가운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다고요. 저 두 사람이 저렇게 손을 잡기까지 몇 년이 걸렸는데……."

 

하은의 배 속에는 이제 막 6주 차에 접어든 새 생명, '단비'가 자라고 있었다.

 

고난의 시대를 뚫고 남원에 내린 축복 같은 아이였다.

 

하은은 자신의 배를 가만히 어루만지며 오작교 위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지유가 겪어온 고통의 세월을 누구보다 곁에서 생생하게 지켜보았던 하은이었기에, 오늘 밤의 기적이 더욱 눈물겨웠다.

 

민재는 하은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 안았다.

 

"알지. 내가 왜 모르겠어. 재환이 저 자식도 서울 신림동에서 뼈를 깎았어. 밥 먹을 시간도 아껴가며 법전을 파고, 남원 소식 들릴 때마다 피눈물을 흘리면서 버텼다고. 두 사람 다 독종이야. 그러니까 그 지옥 같은 강태석 카르텔을 법으로 때려잡고 여기까지 온 거지."

 

민재의 목소리에는 친구를 향한 깊은 존경과 긍지가 묻어 있었다.

 

그는 품속에서 작은 수첩을 만지작거렸다.

 

남원일보 수습기자 시절부터 목숨을 걸고 채증했던 강태석의 비리 메모들, 하정리 삼거리에서 덤프트럭 테러를 당해 피를 흘리면서도 지켜냈던 취재 수첩이었다.

 

그 모든 희생과 투쟁이 헛되지 않았음을 오늘 밤의 오작교가 증명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하은아, 우리 이제 나가봐야 하지 않겠어? 저러다 날 새겠어."

 

"잠깐만요. 조금만 더 둘만의 시간을 주자고요. 지금 저 둘한테는 세상에 둘밖에 없을 텐데, 우리가 눈치 없이 끼어들면 어떡해요."

 

하은이 민재의 옷소매를 잡아끌며 속삭였다.

 

하지만 오작교 위의 두 사람은 이미 인기척을 눈치채고 있었다.

 

재환이 입술을 떼며 지유를 향해 엷은 미소를 지었다.

 

"저기 팽나무 뒤에 숨어서 도청하는 기자가 한 명 있는 것 같은데."

 

지유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완월정 오솔길 쪽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하얀 얼굴에 수줍은 홍조가 번져 나갔다.

 

"설마 민재랑 하은이야?"

 

"응. 아까부터 저기서 망을 보겠다고 자청하더니, 정작 숨을 생각도 없는 모양이야."

 

재환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에 오솔길 쪽에서 헛기침 소리가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

 

"크흠! 야, 성재환! 사람 성의를 그렇게 왜곡하면 쓰나! 우리가 목숨 걸고 주변 순찰 돌며 방해꾼들 막아준 건 생각도 안 하고!"

 

민재가 팽나무 뒤에서 쑥스러운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그 뒤를 하은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따라 나왔다.

 

"지유야! 축하해! 정말, 정말 축하해!"

 

하은이 오작교 돌계단을 사뿐사뿐 뛰어 올라왔다.

 

임신 초기라 조심해야 한다는 민재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은은 다리 위로 올라와 지유를 와락 껴안았다.

 

지유 역시 웃음을 터뜨리며 친구의 품에 안겼다.

 

네 사람의 웃음소리가 달빛 어린 광한루원 정원에 맑게 울려 퍼졌다.

 

5. 완월정의 가을밤

 

민재는 재환의 어깨를 툭 치며 씩 웃었다.

 

"어이, 성 변호사. 프러포즈 멋지게 성공했으니 이제 한턱 쏴야지? 요천 둑길부터 처마 밑까지 동선 짠다고 나 며칠 동안 취재도 팽개치고 발바닥에 땀나게 뛰어다닌 거 알지?"

 

"그래. 평생 갚아도 모자랄 빚이지. 남원일보 1면에 대서특필이라도 할 줄 알았더니 조용히 지켜봐 줘서 고맙다, 친구야."

 

재환이 민재의 손을 굳게 맞잡으며 말했다.

 

두 남자의 눈빛 속에서 오랜 세월을 함께 헤쳐온 깊은 전우애와 우정이 교차했다.

 

하은은 지유의 왼손을 잡아끌어 반지를 이리저리 비춰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머, 세상에…… 반지 너무 예쁘다. 지유야, 너 손에 딱 맞아. 안쪽에 글씨 새겨진 것 좀 봐. '끝까지 남은 사람에게'…… 아이고, 성 변호사님, 서울 가시더니 언제 이런 로맨틱한 기술을 다 배우셨대?"

 

하은의 짓궂은 농담에 지유가 뺨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하은아, 놀리지 마."

 

"놀리긴 뭘 놀려! 너 오늘 세상에서 제일 예뻐, 지유야. 박순례 어머니가 하늘에서 보셨으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어머니의 이름이 나오자 잠시 숙연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그것은 슬픔의 침묵이 아니었다.

 

마치 어머니가 이 오작교 위에 함께 서서 딸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고 있는 듯한 평온한 온기였다.

 

지유가 가슴에 안고 있던 만년필을 소중히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머니도 다 보고 계실 거야. 내일 아침에 재환이랑 같이 교룡산 선산에 찾아뵐 거야. 이 반지랑, 재환이 만년필 보여드리면서 말씀드릴 거야. 우리 약속 다 지켰다고, 이제 아무 걱정 하지 마시라고."

 

재환이 지유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어머니께서 지켜주신 덕분에 우리 모두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내일 아침 일찍 김밥 두 줄 싸서 올라가자."

 

"응.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방앗간 참기름 듬뿍 발라서 말아갈게."

 

지유의 대답에 민재가 손뼉을 치며 끼어들었다.

 

"좋아! 그럼 내일 교룡산 다녀오는 길에 우리 집도 들러. 우리 어머니가 씨암탉 한 마리 잡아서 백숙 끓여놓겠다고 벼르고 계시거든. 남원 바닥에 성재환이랑 한지유 결혼한다고 소문나면 온 동네가 뒤집어질 텐데, 미리 몸보신이라도 해둬야지."

 

"맞아요, 지유야. 동문 우체국 박 씨 아저씨랑 목공소 윤 씨 아저씨, 방앗간 배 씨 아주머니까지 다들 너희 둘 소식만 목 빠지게 기다리고 계셔. 오늘 밤에 비밀로 하느라 내가 얼마나 입이 근질거렸는지 알아?"

 

하은의 말에 모두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30년간 남원을 옥죄고 있던 강태석의 토건 폭력과 행정 테러의 암흑이 걷히자, 비로소 찾아온 평범하고도 찬란한 이웃들의 온정이었다.

 

권력의 칼날을 휘두르던 검사의 서슬 퍼런 위압감도, 영세 상인을 짓밟던 부패 권력의 공포도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만이 남아 있었다.

 

네 사람은 오작교 난간에 나란히 기대어 서서 요천 변으로 흐르는 가을밤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동문 우체국 골목 어귀, 따뜻한 크림색 불빛을 밝히고 있을 삼거리 김밥집과 그 맞은편 2층의 성재환 법률사무소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약자를 지키는 법률사무소와 배고프고 지친 이들에게 온기를 건네는 김밥집.

 

그곳이 바로 두 사람이 평생을 바쳐 일구어갈 새로운 삶의 터전이었다.

 

6. 교룡산으로 향하는 아침

 

이튿날 새벽, 남원 시내를 감싸고 있던 푸르스름한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동문 우체국 뒷골목 삼거리 김밥집의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가 청명한 가을 하늘로 곧게 솟아올랐다.

 

처마 밑에 걸린 원목 간판, '끝까지 남은 사랑'이라는 글귀가 갓 떠오른 아침 햇살을 받아 짙은 청색으로 선명하게 빛났다.

 

가게 안에서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와 갓 지은 밥 냄새가 골목 가득 퍼져 나가고 있었다.

 

지유는 정갈한 앞치마를 두르고 조리대 앞에 서서 김밥을 말고 있었다.

 

고슬고슬하게 지어진 흰 쌀밥 위에 정성껏 채를 썰어 볶은 당근과 시금치, 단무지와 계란지단을 얹고, 남원 공설 방앗간에서 갓 짜온 통깨 참기름을 붓으로 듬뿍 발라냈다.

 

칼이 도마에 닿을 때마다 경쾌하고 단정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에서 은은하게 반짝이는 백금 반지가 칼질을 하는 손놀림을 따라 부드러운 궤적을 그렸다.

 

"일찍 일어났네, 지유야."

 

가게 문이 열리며 단정한 감색 니트에 면바지 차림을 한 성재환이 들어섰다.

 

손에는 깨끗하게 닦인 보온병과 돗자리가 들려 있었다.

 

재환은 조리대 앞으로 다가와 지유가 말고 있는 김밥을 다정하게 내려다보았다.

 

지유가 고개를 들며 배시시 웃었다.

 

"어머니한테 갈 김밥인데 늦잠을 잘 순 없잖아. 방금 다 쌌어. 장국도 따뜻하게 끓여서 보온병에 담았고."

 

재환은 지유의 앞치마 끈을 바로잡아 주며 그녀의 손을 살며시 쥐었다.

 

어제 오작교에서 끼워주었던 반지가 여전히 완벽하게 그녀의 손가락을 감싸고 있었다.

 

"가자. 어머니가 기다리시겠다."

 

두 사람은 정성스레 포장한 2단 찬합과 보온병을 챙겨 가게를 나섰다.

 

골목길로 들어서자 마침 우체국 문을 열던 집배원 박 씨가 자전거를 세우며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이쿠, 성 변호사님! 지유 아가씨! 아침 일찍 어디 가시나 봐요?"

 

박 씨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맞잡은 손, 그리고 지유의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은빛 반지에 멎었다.

 

박 씨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이내 세상을 다 가진 듯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고! 드디어! 드디어 국수 먹게 생겼네! 윤 씨 아저씨! 배 씨 아주머니! 이리 나와 봐요! 우리 성 변호사님이 드디어 해냈어!"

 

박 씨의 우렁찬 목소리가 골목길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목공소에서 대패질을 하던 윤 씨가 대팻밥을 털며 뛰어나왔고, 방앗간에서 깨를 볶던 배 씨 아주머니가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앞치마를 펄럭이며 달려왔다.

 

"어머나, 세상에! 반지 맞췄네! 아이고, 지유야! 축하한다, 정말 축하해!"

 

배 씨 아주머니가 지유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글썽였다.

 

"어머니가 살아서 이 꼴을 보셨어야 하는데…… 그래도 하늘에서 다 보고 계실 겨. 장하다, 지유야. 고맙습니다, 성 변호사님. 우리 지유 눈에서 눈물 안 나게 꼭꼭 아껴주셔야 해요!"

 

"명심하겠습니다, 아주머니. 평생 지유 곁에 머물겠습니다."

 

재환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답하자, 목공소 윤 씨가 껄껄 웃으며 재환의 등을 탕탕 두드렸다.

 

"성 변호사, 자네는 이미 우리 남원의 기둥이야. 걱정 말고 다녀와! 결혼식 날짜만 잡히면 내가 남원에서 제일 튼튼하고 멋진 지리산 육송으로 신혼 가구 싹 다 짜줄 테니까!"

 

이웃들의 왁자지껄한 축복 속에서 지유의 얼굴은 붉게 물들었고, 재환의 입가에는 행복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골목 사람들의 따뜻한 배웅을 뒤로하고, 두 사람은 교룡산으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7. 묘소 앞에 바친 눈물

 

남원 시내를 벗어나 교룡산(蛟龍山) 중턱으로 접어들자, 붉고 노랗게 물든 활엽수림이 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겨냈다.

 

인적 드문 오솔길을 따라 올라선 양지바른 산비탈, 푸른 잔디가 곱게 덮인 한지유 가문의 선산이 나타났다.

 

그 한가운데, 어머니 박순례의 봉분이 단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봉분 주변에는 잡풀 하나 없이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지난번 강태석에 대한 징역 12년 판결문 정본을 바치러 왔을 때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는 서슬 퍼런 사법 단죄의 마침표를 찍는 비장함이 감돌았으나, 오늘 이 자리는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롭고 따스했다.

 

지유는 봉분 앞에 무릎을 꿇고 정갈하게 돗자리를 폈다.

 

재환 역시 그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지유는 가방에서 찬합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가지런히 썰린 김밥 두 줄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맑은 장국이 어머니의 묘소 앞에 정성스레 올려졌다.

 

지유는 어머니의 묘비석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차디찬 화강암의 감촉 너머로 생전 어머니의 거칠고 따뜻했던 손길이 느껴지는 듯했다.

 

"엄마."

 

지유의 첫마디에 맑은 눈물방울이 묘비석 위로 툭 떨어졌다.

 

"지유 왔어요. 재환이랑 같이 왔어요."

 

재환은 품속에서 백부의 각인 만년필을 꺼내 찬합 옆에 단정하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지유의 왼손을 잡아 어머니의 묘소 앞에 조용히 내보였다.

 

달빛 아래서 끼워주었던 백금 반지가 가을 아침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였다.

 

"어머니, 성재환입니다."

 

재환의 목소리는 엄숙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담고 있었다.

 

"7년 전, 남원을 떠나며 지유에게 약속했었습니다. 반드시 법복을 입고 돌아와 가문의 죄악을 단죄하고, 지유를 지키겠다고요."

 

재환은 고개를 숙여 묘소를 향해 깊은 절을 올렸다.

 

이마가 차가운 흙바닥에 닿았다.

 

그것은 사법 정의를 완성한 검사로서의 보고가 아니라, 한 여인을 평생 목숨 바쳐 사랑하겠다고 맹세하는 사위로서의 엄숙한 청혼이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먼 길을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세상을 단죄하는 검사가 아니라, 지유의 곁에서 평생 머무는 남편이자 이 땅의 약자들을 지키는 변호사로 살아가려 합니다."

 

재환이 몸을 일으켜 지유를 바라보았다.

 

지유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피눈물로 지켜내신 삼거리 김밥집, 그리고 지유의 맑은 영혼을 제가 남은 생애 동안 온 힘을 다해 지키겠습니다. 단 한 순간도 지유를 홀로 두지 않고, 끝까지 함께 머물겠습니다. 부디 저희를 굽어살펴 주십시오."

 

지유는 어머니의 봉분을 끌어안듯 몸을 웅크리며 조용히 흐느꼈다.

 

어머니가 남원의료원 차가운 침상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남겼던 유언이 귓전을 맴돌았다.

 

'지유야…… 가게를 지켜라. 그놈들에게 무릎 꿇지 마라…… 그리고, 재환이 그 아이의 눈빛을 믿어라…….'

 

어머니는 알고 계셨던 것이다.

 

성씨 가문과의 30년 악연 속에서도, 어린 소년 성재환이 품고 있던 그 순수하고 단단한 눈빛만큼은 거짓이 아니었음을 어머니는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다.

 

산바람이 불어와 교룡산 숲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수풀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마치 어머니가 두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장하다, 내 딸 지유야. 고맙다, 재환아' 하고 속삭이는 듯했다.

 

지유는 눈물을 닦아내며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묘비석 옆에 놓인 만년필과 반지를 바라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어머니의 축복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비극의 세월은 끝났다.

 

원망과 증오의 사슬은 끊어졌고, 그 자리에는 오직 흔들리지 않는 사랑과 영원한 약속만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8. 돌아온 약속의 무게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두 사람은 묘소를 정돈하고 교룡산을 내려왔다.

 

남원 시내로 접어드는 요천 제방 둑길에는 눈부신 가을 햇살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지난여름, 강태석 일파의 비자금 횡령과 부실시공으로 무너져 내렸던 제방 옹벽은 이제 단단하고 견고한 화강암 축대로 완벽하게 복구되어 있었다.

 

수해의 상처를 지워낸 둑길 위로 시민들이 평화롭게 오가고 있었고, 강물은 유유히 푸른 빛을 띠며 흘러갔다.

 

재환과 지유는 손을 맞잡은 채 나란히 둑길을 걸었다.

 

열여덟 살 시절, 낡은 자전거를 타고 내달리던 그 길이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던 가문의 거대한 비극과 다가올 이별의 공포를 안고 달렸던 길이었지만, 지금 두 사람의 발걸음은 더없이 가볍고 확고했다.

 

"재환아."

 

지유가 걸음을 멈추고 요천 강물을 바라보며 불렀다.

 

"응, 지유야."

 

"서울에서 내려올 때…… 대검찰청 특임팀장 자리랑 부장검사 자리 제안받았을 때, 솔직히 조금도 아깝지 않았어?"

 

지유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재환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지유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요천 너머 지리산 능선을 바라보았다.

 

"아깝다는 생각이 1초라도 들었다면, 난 애초에 남원으로 내려오지도 않았을 거야."

 

재환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검찰청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줄 알았어. 부친 성호석이 말했던 것처럼, 중앙의 거대한 권력을 쥐어야만 개미처럼 짓밟히지 않는다고 믿었던 적도 있었지. 하지만 서울고검 공판부장실을 엎어버리고 나오는 순간 명확하게 깨달았어."

 

재환이 지유를 돌아보았다.

 

"권력은 쥐면 쥘수록 더 큰 권력의 노예가 될 뿐이야. 법이 약자를 지키는 방패가 되지 못하고 권력자들의 칼자루가 되는 순간, 그건 정의가 아니라 폭력일 뿐이지.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높은 검사석이 아니라, 억울하게 눈물 흘리는 남원 사람들의 곁이었어. 그리고…… 그곳에 네가 있었으니까."

 

지유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자신이 사랑한 사람, 7년의 세월을 바쳐 기다려온 성재환이라는 남자는 결코 권력에 취해 길을 잃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진정한 법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었고, 사랑의 숭고함을 아는 사람이었다.

 

"맞은편 2층 사무실 창문 말이야."

 

지유가 턱 끝으로 삼거리 골목 방향을 가리키며 장난스레 말했다.

 

"내가 김밥 말다가 고개 들면 네 책상이 딱 보이더라. 일 안 하고 딴청 피우면 다 감시할 거야."

 

"각오하고 있어. 대신 나도 소장 쓰다가 눈이 피로해지면 창문 열고 소리칠 거야. 김밥 한 줄만 올려 보내 달라고."

 

두 사람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요천 강바람을 타고 맑게 흩어졌다.

 

9. 골목길에 피어난 잔치

 

두 사람이 동문 우체국 뒷골목으로 들어섰을 때, 골목길은 이미 거대한 축제의 도가니로 변해 있었다.

 

"어이쿠! 신랑 신부 행차하신다! 길을 비켜라!"

 

우체국 박 씨 아저씨의 쩌렁쩌렁한 외침과 함께 꽹과리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골목 한가운데에는 목공소 윤 씨가 지리산 육송으로 뚝딱 짜낸 커다란 평상 세 개가 길게 이어 붙여져 있었다.

 

그 위에는 공설 방앗간 배 씨 아주머니가 시루째 쪄온 따끈따끈한 시루떡과 과일전 김 씨가 내놓은 탐스러운 사과와 배, 그리고 민재 어머니가 끓여낸 뽀얀 닭백숙이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지유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자, 윤하은이 지유의 팔짱을 끼며 환하게 웃었다.

 

"무슨 일이긴! 남원의 자랑, 성재환 변호사님이랑 우리 삼거리 김밥집 지유가 국수 먹여준다는데 가만히 있을 동네 사람들이 어디 있어!"

 

"어제 오작교에서 프러포즈 성공했다는 특종을 내가 남원일보 1면에 실으려다 참았거든. 대신 동네 호외는 돌렸지!"

 

최민재가 숟가락을 마이크처럼 쥐고 너스레를 떨자, 좌중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골목길에 모인 이웃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박성두 노인도 말끔하게 빤 무명 바지저고리를 차려입고 평상 한구석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과거 강태석 일파에게 땅을 빼앗기고 피눈물을 흘리며 2층 계단을 눈물로 올라왔던 그 노인이었다.

 

성재환 변호사의 무료 변론으로 잃어버렸던 땅을 되찾고, 아내의 영전에 승소 판결문을 바친 후 노인의 얼굴에는 10년은 젊어진 듯한 화색이 돌고 있었다.

 

"성 변호사님! 지유 아가씨! 이리 와서 막걸리 한잔 받으시오!"

 

박성두 노인이 떨리는 손으로 막걸리 사발을 채워 올렸다.

 

재환은 두 손으로 정중하게 사발을 받아들였다.

 

"어르신,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평생을 해도 모자라지! 우리 같은 늙은이들, 힘없는 농민들 땅 되찾아주고 사람답게 살게 해준 은인인데! 지유 아가씨랑 백년해로하시오. 내가 죽을 때까지 두 사람을 위해 빌 테니까!"

 

노인의 진심 어린 축복에 재환은 사발을 단숨에 비워냈다.

 

골목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지유는 배 씨 아주머니가 건넨 시루떡을 받아 이웃들에게 나누어주며 눈시울을 붉혔다.

 

테러의 흔적으로 얼룩졌던 낡은 골목, 붉은 페인트로 '빨갱이 소굴'이라 낙서 질 당하고 쇠파이프를 든 조폭들이 으르렁거리던 그 공포의 골목이, 이제는 사람 냄새와 웃음소리가 넘쳐나는 따뜻한 사랑방이 되어 있었다.

 

정의가 바로 서고, 약속이 지켜진 땅에서 민초들이 누려야 할 온전한 행복이었다.

 

10. 끝까지 남은 사람에게

 

잔치가 무르익고 가을 햇살이 뉘엿뉘엿 기울어가던 늦은 오후, 재환과 지유는 잠시 소란을 피해 맞은편 2층 성재환 법률사무소로 올라왔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골목길에서 들려오는 이웃들의 정겨운 노랫가락과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밀려들었다.

 

사무실 한가운데 놓인 넓은 평상형 원목 탁자 위에는 박성두 노인의 사건 서류와, 105인 농민들의 토지 등기 원상회복 완료 통지서가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 옆에는 지유가 선물했던 흑청색 잉크병과 백부의 각인 만년필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지유는 창가에 기대어 서서 맞은편 김밥집 처마 밑을 내려다보았다.

 

'끝까지 남은 사랑.'

 

재환의 친필을 본떠 짙은 청색 안료로 새겨 넣었던 그 글귀가 오후의 황금빛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재환이 조용히 다가와 지유의 등 뒤에서 그녀를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두 사람의 맞잡은 손에서 백금 반지가 부드럽게 맞닿으며 맑은 쇳소리를 냈다.

 

"지유야."

 

재환이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어제 오작교에서 했던 말, 기억해?"

 

지유가 고개를 돌려 재환의 턱에 뺨을 비비며 웃었다.

 

"어떤 말? 워낙 멋진 말을 많이 해서 다 기억하기 힘든데."

 

"내 남은 모든 생을 너와 함께 머물겠다는 말."

 

재환의 목소리는 잔잔했으나, 그 속에 담긴 울림은 오작교의 돌다리보다 더 깊고 단단했다.

 

"떠나는 사람은 약속을 남기지만, 끝까지 남은 사람은 그 약속을 지켜내. 넌 지난 7년 동안 이 자리에서 남원을 지키고, 우리 사랑을 지키고, 정의를 지켜냈어. 이제는 내가 네 곁에 끝까지 남아 그 약속의 무게를 함께 짊어질게."

 

지유는 재환의 품 안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의 심장 소리가 그녀의 뺨을 타고 온몸으로 전해져 왔다.

 

더 이상의 두려움도, 슬픔도 없었다.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 안쪽의 문구처럼, 그들은 이제 서로에게 영원히 머무는 사람이었다.

 

창밖으로 붉은 노을이 남원 하늘을 온통 주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요천 변의 물결도, 광한루원의 고목들도, 그리고 이 소박하고 따뜻한 동문 골목길도 모두 그 찬란한 빛 속에 젖어 들고 있었다.

 

약속을 품고 돌아온 청년과, 끝까지 자리를 지켜낸 여인의 사랑은 그렇게 남원의 대지 위에 가장 아름다운 결실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