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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111화

점심시간의 김밥 두 줄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가을볕 내리는 삼거리 골목

 

남원 동문 우체국 뒷골목의 낮은 기와처마 위로 맑고 투명한 초가을 햇살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겨 거뭇해진 흙벽과 붉은 벽돌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속에는 이제 날카로운 한기 대신 완연한 계절의 풍요로움이 묻어났다.

 

골목 어귀를 휘감아 도는 선선한 바람결에 실려 온 것은 갓 볶아낸 통깨의 진하고 고소한 냄새, 그리고 무쇠 가마솥에서 막 쪄낸 햅쌀밥의 구수한 김이었다.

 

유난히도 모질고 시렸던 계절, 조폭들의 쇠파이프와 붉은 페인트, 그리고 공권력의 잔혹한 표적 단속으로 얼룩졌던 삼거리 김밥집의 처마 끝에는 이제 흉터 대신 새 생명이 깃들어 있었다.

 

목공소 윤 씨가 지리산 육송을 결대로 곱게 다듬어 내건 원목 현판이 가을 햇살 아래서 단아한 나무 향을 뿜어냈다.

 

성재환이 흑청색 잉크로 직접 써 내려갔던 그 결기 어린 필적을 고스란히 양각으로 새겨 넣은 문구, '끝까지 남은 사랑'이라는 글귀가 푸르스름한 윤기를 머금은 채 골목길을 굽어보고 있었다.

 

그것은 온갖 폭압 앞에서도 끝내 물러서지 않았던 지유 모녀의 결기였고, 마침내 법복을 입고 돌아와 약속을 지켜낸 재환의 맹세였으며, 침묵을 깨고 일어선 남원 민초들의 연대를 상징하는 징표였다.

 

주방 안쪽, 반질반질하게 닦인 조리대 앞에 선 한지유는 흰 무명 앞치마를 두르고 소매를 단정하게 걷어붙였다.

 

커다란 나무 함지박 속에서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는 하얀 햅쌀밥 위로, 남원 공설 방앗간 배 씨 아주머니가 아침 일찍 들고 온 진한 참기름을 두어 방울 떨구었다.

 

촤르르 퍼지는 고소한 향기가 좁은 주방을 단숨에 가득 채웠다.

 

지유는 굵은 천일염을 손끝으로 가볍게 흩뿌리고, 노릇하게 볶아낸 참깨를 넉넉히 얹은 뒤 나무 주걱을 비스듬히 쥐었다.

 

밥알이 으깨지지 않도록 주걱날을 세워 자르듯 섞어 나가는 지유의 손길은 더없이 유려하고 부드러웠다.

 

어머니 박순례가 살아생전 곁에서 늘 일러주던 그 손길 그대로였다.

 

'지유야, 밥을 비빌 때는 네 온기를 불어넣는다고 생각해야 헌다. 서두르면 밥알이 뭉개져 떡이 되고, 너무 식히면 김이 눅눅해져. 사람 마음도 그렇고 음식도 그런 법이다.'

 

어머니의 낮고 따스했던 음성이 귓전을 맴도는 듯하여 지유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대나무 김발 위에 바삭하게 구워낸 남원산 김 한 장을 반듯하게 펼쳐놓았다.

 

지유는 한 김 내보낸 온기 어린 밥을 두 손으로 조심스레 쥐어 김 위에 얹었다.

 

손끝에 닿는 온기는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가장 알맞은 온도였다.

 

밥알 하나하나가 숨을 쉬듯 얇고 고르게 펴 바른 뒤, 지유는 가지런히 준비해 둔 재료들을 차례로 집어 올렸다.

 

남원 앞마당 텃밭에서 아침 이슬을 털어내고 뜯어 와 소금물에 파릇하게 데쳐낸 시금치나물, 집간장에 은근한 불로 조려내어 검붉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우엉채, 달걀을 넉넉히 풀어 도톰하고 보드랍게 부쳐낸 노란 달걀지단, 아삭아삭하게 절여진 단무지와 주홍빛 당근채가 한 줄의 질서정연한 풍경을 이루었다.

 

어느 것 하나 넘치거나 모자람 없이 서로의 색과 맛을 살려주는 그 조화는, 어머니의 고단했던 생애가 남겨준 가장 순결한 유산이었다.

 

지유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엄지와 검지로 김발 끝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재료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고, 손바닥 전체로 부드럽고도 단단하게 말아 쥐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묵직하면서도 탄력 있는 감촉.

 

그것은 온갖 풍파를 겪어낸 뒤 비로소 온전하게 되찾은 삶의 무게이자, 평온의 실체였다.

 

조리대 위에 놓인 무쇠 식칼 끝에 참기름을 살짝 바른 지유는 숨을 멈추고 일정한 간격으로 김밥을 썰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칼날이 바삭한 김을 가르고, 차진 밥알과 아삭한 채소의 결을 차례로 통과하는 경쾌한 소리가 조용한 가게 안에 맑게 울려 퍼졌다.

 

지유는 썰어낸 김밥의 단면을 보며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가운데에 얌전히 박힌 노란 달걀과 초록빛 시금치, 붉은 당근이 한 폭의 정갈한 수채화처럼 어우러져 있었다.

 

지유는 옻칠이 곱게 된 단정한 2단 찬합을 열었다.

 

아래 칸에 조심스럽게 한 줄, 그리고 위 칸에 또 한 줄.

 

정확히 두 줄의 김밥이 찬합 안에 흐트러짐 없이 정갈하게 자리를 잡았다.

 

지유는 작은 보온병을 꺼내 무쇠 냄비에서 끓고 있던 맑은 멸치장국을 가득 담았다.

 

남원 토종 무와 다시마, 디포리를 넣고 맑게 우려낸 장국에서는 은은한 바다 내음과 구수한 온기가 피어올랐다.

 

보온병 마개를 꼭 닫은 지유는 행주로 조리대를 정돈한 뒤 가게 통유리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는 통유리창 너머로, 좁은 골목길 바로 맞은편에 자리 잡은 2층 붉은 벽돌 건물이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창문에 단정한 하얀 페인트로 적힌 '성재환 법률사무소'라는 글자 안쪽, 2층 창가 책상머리에 고개를 깊이 숙인 채 서류를 넘기고 있는 익숙한 청년의 그림자가 보였다.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붙이고, 한 손에는 검은 만년필을 쥔 채 미간을 찌푸리며 기록에 몰두해 있는 성재환의 옆모습.

 

7년 전 광한루원 오작교 위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의 그 맑고 올곧은 눈매 그대로, 청년은 여전히 세상의 부조리와 맞서 싸우듯 진지한 얼굴이었다.

 

지유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형언할 수 없는 벅찬 애틋함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그녀는 찬합과 보온병을 정갈한 하얀 무명 보자기에 감싸 네 귀퉁이를 단단히 묶었다.

 

가게 문을 열고 나서자 처마 끝에 매달린 놋쇠 풍경이 가을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며 딸랑, 딸랑 청아한 쇳소리를 흩뿌렸다.

 

2. 문턱 없는 2층 계단

 

골목길로 내려서는 지유의 발걸음은 가볍고도 조심스러웠다.

 

남원 동문 우체국 자전거를 받쳐 세우던 집배원 박 씨가 어깨에 멘 묵직한 가죽 우편 가방을 고쳐 메며 지유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이쿠, 지유 양! 점심 배달 가는 길인가 보네?"

 

"네, 박 아저씨. 오늘 배달 많으셨어요? 날이 많이 선선해졌어요."

 

"그럼, 가을바람이 솔솔 부니까 일하기는 딱 좋지. 아침 일찍부터 성 변호사님 사무실 창문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더라고. 박 노인네 소송 준비하느라 밤을 꼬박 새운 모양이던데, 지유 양이 어서 가서 든든하게 챙겨 먹여야겠어."

 

박 씨는 골목길 맞은편 2층 건물을 흐뭇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 동네에 그런 큰 인물이 떡하니 버티고 있어 주니까, 골목길 걸어 다닐 때마다 가슴이 다 펴진다니까. 예전엔 시청 놈들이나 조폭 놈들 차만 지나가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는데 말이여. 어서 가봐, 밥 식겠다!"

 

"네, 박 아저씨. 아저씨도 우체국 들어가셔서 따뜻한 밥 꼭 챙겨 드세요."

 

지유는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고 맞은편 붉은 벽돌 건물 입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래된 건물 1층은 과거 복덕방과 표구사가 거쳐 간 탓에 묵은 먼지와 칠이 벗겨진 흔적이 역력했지만, 2층으로 이어지는 나무 계단은 놀라울 만큼 정갈했다.

 

목공소 윤 씨가 대팻밥을 날리며 틈새를 메우고 기름칠을 해둔 덕에, 계단을 오를 때마다 편백나무의 은은하고 깊은 향이 코끝을 스쳤다.

 

삐걱, 삐걱.

 

발을 디딜 때마다 낡은 목재가 내는 소리가 정겨운 박자를 만들었다.

 

계단참을 돌아 2층 복도에 다다르자, 반쯤 열린 사무실 문틈으로 사각거리는 펜촉 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사무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손잡이를 돌릴 필요도 없이 그저 살짝 밀기만 하면 누구나 들어설 수 있도록, 문고리는 늘 헐겁게 열려 있었다.

 

억울한 사연을 가슴에 품고 남원 골목길을 헤매던 농민들과 노점상들이 주저 없이 문턱을 넘을 수 있도록 배려한 성재환의 고집이었다.

 

지유는 조용히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사무실 공기는 가을 햇살의 온기와 묵은 종이 냄새, 그리고 흑청색 잉크의 서늘한 향으로 채워져 있었다.

 

서울 서초동의 대형 법률사무소나 관공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육중한 마호가니 책상이나 번쩍이는 수입 가죽 소파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사무실 한가운데에는 목공소 윤 씨와 이웃들이 지리산 육송을 대패질해 넓게 짜준 평상형 원목 탁자가 널찍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신발을 벗고 올라앉아 편하게 다리를 뻗을 수도 있고, 흙 묻은 작업복 차림의 농민들이 부담 없이 둘러앉아 막걸리 잔을 기울일 수도 있는 소박한 평상 탁자였다.

 

벽면 한쪽에는 법무부 장관의 표창장이나 화려한 검사 임관장 대신, 남원시 관내 지적도와 1990년대 초반 토지 구획 정리 현황도가 붉은 색연필 자국과 함께 빽빽하게 붙어 있었다.

 

창가 책상머리에 앉아 있던 성재환이 인기척을 느끼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검은 뿔테 안경 너머로 지유를 발견한 재환의 피로에 젖은 눈매가 봄눈 녹듯 순식간에 부드럽게 풀렸다.

 

"지유야."

 

"아직도 서류 보고 있었어요? 벌써 한 시가 다 되어가요. 박 아저씨 말씀 들으니까 아침 일찍부터 불 켜놓고 있었다면서요."

 

지유가 품에 안은 무명 보따리를 살짝 들어 보이며 부드러운 타박을 건넸다.

 

재환은 손에 쥐고 있던 검은 옻칠 만년필을 조심스레 황동 펜 받침대에 내려놓고,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얹었다.

 

눈가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그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어제 박성두 어르신이 맡겨두고 가신 1992년 요천 변 토지 수용 대장을 다시 들여다보고 있었어. 남원군수가 공공 도로 개설을 명분으로 토지수용위원회를 열어 강제 수용을 의결한 날짜가 10월 14일인데, 강태석의 처남 조상태가 운영하는 동서개발로 불하 계약서가 체결된 게 바로 다음 날인 10월 15일이야.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공공용지가 민간 모텔 부지로 둔갑한 거지. 이건 공익사업법상 중대하고 명백한 하자가 있어서 무효 확인 청구의 요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어. 형사재판 때 압수해 뒀던 비자금 장부의 일자와도 톱니바퀴처럼 딱 맞아떨어져."

 

사법적 쟁점과 증거 관계를 설명하는 재환의 목소리는 날카롭고 빈틈이 없었지만, 그 밑바닥에는 억울하게 땅을 빼앗기고 한평생 피눈물을 흘렸을 노인을 향한 깊은 연민이 깔려 있었다.

 

지유는 책상 앞으로 다가가 보따리의 매듭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끼니를 거르면 몸이 상해요. 우포리 현장에 달려가서 가처분 결정문 들고 용역들 쫓아내고 온 게 엊그제인데, 밤잠까지 줄여가며 이러면 어떡해요."

 

지유가 2단 찬합의 뚜껑을 열자, 잘게 썬 김밥 두 줄이 영롱한 자태를 드러냈다.

 

참기름의 진한 향기가 잉크 냄새 가득하던 사무실 공기를 단숨에 밀어내며 포근한 온기를 불어넣었다.

 

3. 평상 위에 마주 앉은 온기

 

재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유에게 다가갔다.

 

새벽부터 부지런히 쌀을 씻고 채소를 다듬느라 손끝이 살짝 붉어진 지유의 작은 손을 양손으로 가만히 감싸 쥐었다.

 

손끝에서 전해져 오는 온기에 재환의 지친 가슴이 깊게 가라앉았다.

 

"여기 평상으로 가자. 어르신들이 와서 차 마시던 자리인데, 너랑 마주 앉아서 밥을 먹기엔 여기가 제일 좋아."

 

재환은 지유를 이끌고 넓은 평상형 원목 탁자로 가 마주 보고 앉았다.

 

지유는 보온병을 열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맑은 장국을 정갈한 나무 그릇에 따라 재환의 앞에 놓아주었다.

 

"국물부터 먼저 한 모금 드세요. 속이 따뜻해져야 밥도 잘 넘어가는 법이에요. 오늘 아침에 방앗간 배 씨 아주머니가 일부러 가게로 찾아오셨더라고요. 성 변호사님이 우포리 농민들 땅을 불도저 밑에서 지켜내 주셨다는 소문이 골목에 쫙 퍼졌다면서, 제일 좋은 통깨로 짠 참기름이라고 한 병 쥐여주고 가셨어요. 변호사님 김밥 싸드릴 때 아끼지 말고 팍팍 치라고요."

 

지유의 말에 재환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숟가락으로 따뜻한 장국을 떠먹었다.

 

구수하면서도 깊은 감칠맛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밤새 긴장으로 굳어 있던 위장을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이어서 나무젓가락으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김밥 한 알을 집어 입에 넣었다.

 

입안에 넣자마자 고소한 참기름 향과 짭조름하게 간이 밴 햅쌀밥이 부드럽게 퍼져나갔다.

 

아삭하게 씹히는 우엉의 깊은 맛, 시금치의 싱그러운 향, 그리고 달걀지단의 포근한 식감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어머니 박순례가 살아생전, 삼거리 김밥집을 지키며 만들어내던 바로 그 정직하고 깊은 맛이었다.

 

지난 7년간, 서울 신림동 고시촌의 곰팡내 나는 단칸방에서 굳은 빵과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사법시험에 매달리던 그 처절한 밤마다, 재환이 사무치도록 그리워했던 바로 그 온기였다.

 

재환은 천천히 김밥을 씹어 삼키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온기 속에서 피로가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정말 맛있다, 지유야. 세상 어떤 화려한 호텔 요리를 가져다줘도 너랑 마주 앉아 먹는 이 김밥 두 줄이랑은 바꿀 수가 없어."

 

"거짓말은. 그냥 평범한 김밥인데요, 뭐. 특별한 재료가 들어간 것도 아닌걸요."

 

"아니, 평범하지 않아. 이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음식이야."

 

재환은 젓가락을 가지런히 내려놓고 찬합 속에 단정하게 담긴 김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지난 시간의 파편들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서울에서 대검찰청 특임팀장 자리를 내려놓고 남원으로 내려오겠다고 사직서를 냈을 때, 검찰 선배들이 하나같이 나를 붙잡고 말렸어. 서초동의 꽃길이 눈앞에 열려 있는데, 왜 그 시골 구석으로 내려가 흙 묻은 농민들 소송이나 맡으며 인생을 낭비하려 하느냐고 말이지. 다들 내가 출세욕을 버리지 못해 미친 줄 알았을 거야. 하지만 난 그때 서초동의 그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딛고 서서 뼈저리게 깨달았거든."

 

재환의 시선이 지유의 맑은 눈망울로 향했다.

 

"내가 7년 동안 피를 토하듯 법서를 외우고, 가문의 죄악을 단죄하겠다며 칼을 갈았던 건 권력의 꼭대기에 앉아 남들을 짓밟기 위함이 아니었어. 억울하게 어머니를 잃고, 삶의 터전을 빼앗긴 채 차가운 길바닥으로 내몰려야 했던 너를 지키지 못했다는 그 죄책감과 무력함을 다시는 겪지 않기 위해서였지. 그리고 마침내 모든 죗값을 치르게 한 뒤에, 이렇게 점심때마다 너와 마주 앉아 네가 정성스레 지어준 밥을 나누어 먹는 이 평범한 일상을 지키기 위한 거였어. 나한테는 이 김밥 두 줄이, 세상의 그 어떤 화려한 판결문이나 권력의 칼자루보다 훨씬 더 거룩하고 소중한 정의야."

 

재환의 진심 어린 고백에 지유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어머니가 남원의료원 중환자실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을 때, 가게 앞마당으로 들이닥치던 굴착기의 쇠 버킷 앞에서 홀로 맨몸으로 버텨야 했을 때, 온 세상이 자신을 버렸다고 느꼈던 그 참혹한 절망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 청년은 화려한 권력의 자리를 미련 없이 던져버리고 자신의 눈앞에 앉아 있었다.

 

지유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김밥 한 알을 집어 재환의 밥그릇 위에 얹어주었다.

 

"재환아."

 

"응, 지유야."

 

"나도 그래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가게에 혼자 남겨졌을 때, 매일 밤 문을 걸어 잠그고 웅크려 누워 있으면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어요. 가난이나 배고픔보다 더 끔찍했던 건, 내가 아무리 피를 토하며 소리를 질러도 세상 누구 하나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을 거라는 그 막막한 고립감이었어요. 힘 있는 자들은 거짓말로 서류를 꾸미고, 경찰도 시청도 다 그 사람들 편인데 나 같은 아이가 무슨 수로 버틸 수 있을까 싶었죠. 그런데…… 당신이 법복을 입고 내려와 그 굴착기 앞을 막아서 주었을 때, 그리고 어머니의 억울한 일기장을 법정에서 낭독하며 그 잔인한 자들을 무릎 꿇렸을 때 비로소 깨달았어요."

 

지유의 눈가에 투명한 이슬이 맺혔지만, 그녀의 입가에는 더없이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

 

"법이라는 게 강한 자들이 약자를 내리누르는 흉기가 아니라, 상처 입고 피 흘리는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품어주는 따뜻한 솜이불이 될 수도 있다는 걸요. 어제 박성두 할아버지가 흙 묻은 고무신을 벗지도 못하고 계단 참에서 벌벌 떨며 우실 때, 난 우리 어머니 얼굴을 봤어요. 평생을 억울함에 가슴이 문드러져 가면서도 어디 하소연할 데조차 없었던 그 수많은 어머니와 아버지들의 얼굴이요. 그분들이 이제는 주저 없이 이 문을 열고 들어와 당신 앞에 앉아 억울함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되었잖아요. 그러니까 난…… 당신이 검사를 그만두고 이 낡은 2층 건물에 변호사 사무실을 연 게, 내 평생 가장 자랑스럽고 고마워요."

 

지유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재환의 가슴속 응어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재환은 평상 위로 손을 뻗어 지유의 손을 가만히 쥐었다.

 

두 사람의 손가락이 단단하게 얽혔다.

 

굳이 긴 말을 더 보태지 않아도, 7년의 세월을 건너온 두 사람의 영혼은 이미 온전한 하나가 되어 있었다.

 

4. 창가에 비친 그림자

 

찬합의 김밥 두 줄이 깨끗하게 비워진 뒤, 지유는 찬합을 챙겨 넣고 주전자에서 따뜻하게 우려낸 구수한 둥굴레차를 머그잔에 따랐다.

 

재환은 찻잔을 손에 쥐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유리창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남원 동문 우체국 뒷골목은 평화로운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수업을 마친 남원여고 학생들이 알록달록한 가방을 메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골목길을 지나가고 있었고, 김밥집 앞 평상에는 인근 채소가게 김 씨와 건어물전 아주머니가 걸터앉아 지유가 미리 썰어두고 간 김밥 접시를 나누며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과거 조폭들의 험악한 고함과 시청 관용차의 위압적인 경적 소리로 얼룩졌던 골목길은, 이제 완벽한 일상의 평온을 되찾아 숨 쉬고 있었다.

 

그 평화로운 풍경의 중심에, 투명하게 닦인 통유리창과 크림색 벽면으로 새단장된 삼거리 김밥집이 든든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지유가 곁으로 다가와 재환의 팔에 조용히 머리를 기댔다.

 

재환에게서 풍기는 은은한 비누 향과 종이 냄새가 지유의 마음을 한없이 편안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참 신기해요, 재환아.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저 창문마다 투명 테이프가 거미줄처럼 붙어 있고, 밤마다 붉은 페인트가 칠해져서 아침에 눈뜨는 게 지옥 같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거짓말처럼 세상이 맑아질 수 있을까요?"

 

재환은 지유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강태석이라는 거대한 탐욕의 둑이 무너졌기 때문이지. 하지만 지유야, 그 악의 고리를 끊어낸 건 내 법리나 검찰의 수사력만으로 된 게 아니었어."

 

재환은 지유를 내려다보며 진심 어린 눈빛을 건넸다.

 

"너와 어머니가 끝까지 저 자리를 지켜냈기 때문이야. 포클레인이 들이닥치고 쇠파이프가 날아드는 공포 속에서도 도망치지 않았고, 남원세무서의 악랄한 표적 조사 앞에서도 단 1원의 부정도 없이 정직한 장부를 들이밀었잖아. 그 정직함이 있었기에 시민들의 양심이 깨어났고, 그 양심이 모여 부패한 권력을 무너뜨린 방파제가 된 거야. 결국 남원을 구한 건 네가 지켜낸 그 정직한 삶이었어."

 

지유는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재환의 가슴팍 양복 주머니를 바라보았다.

 

은빛 클립이 달린 검은 옻칠 만년필이 꽂혀 있었다.

 

독일제 만년필의 캡 상단에 새겨진 라틴어 법언,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지유는 앞치마 주머니 속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책상 위에 단정하게 올려놓았다.

 

손바닥만 한 유리병 안에서 깊고 짙푸른 빛을 뿜어내는 잉크병이었다.

 

흑청색 잉크.

 

검은빛 속에 푸른 바다의 심연을 품은 듯한 그 빛깔은, 7년 전 지유가 남원여고 앞 문구점에서 용돈을 털어 사주었던 바로 그 잉크였다.

 

"남원여고 앞 문구점에 들렀더니, 문구점 아저씨가 서랍 깊은 곳에서 이 잉크를 꺼내주시더라고요. 성 변호사가 남원에 다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일부러 옛날에 들여왔던 그 회사의 흑청색 잉크를 구해두셨대요. 당신이 쓰는 글씨는 남원을 살리는 글씨니까, 꼭 이 잉크를 쓰게 해달라면서요."

 

재환은 감격 어린 눈으로 흑청색 잉크병을 집어 들었다.

 

유리병을 투과한 가을 햇살이 책상 위에 푸른 보석 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남원을 떠나던 날, 피눈물을 삼키며 수첩에 부친과 강태석의 비리를 적어 내려갈 때 썼던 잉크, 그리고 지유를 구하기 위해 공소장을 쓰고 구형 논고를 쓸 때마다 가슴을 적셨던 바로 그 빛깔이었다.

 

"고마워, 지유야. 이 잉크로 박성두 어르신의 소장을 한 글자 한 글자 눌러쓸게. 권력자들의 죄를 밝히는 데 썼던 이 잉크를, 이제는 억울한 사람들의 빼앗긴 터전을 되찾아주는 데 바칠게."

 

재환은 옻칠 만년필의 배럴을 조심스럽게 돌려 열었다.

 

잉크병 뚜껑을 열고 금빛 닙을 깊숙이 담근 뒤 피스톤을 천천히 끌어올렸다.

 

꾸르륵, 하며 흑청색 잉크가 만년필의 심장부로 빨려 들어가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그 소리는 마치 약자를 지키기 위한 새로운 무기를 장전하는 엄숙한 의식과도 같았다.

 

만년필 닙에 묻은 여분의 잉크를 닦아내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쿵, 쾅!

 

1층 현관 철문이 거칠게 부딪히는 굉음과 함께,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무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다급한 발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우당탕탕!

 

단 한 사람의 걸음걸이가 아니었다.

 

여러 사람의 무겁고 거친 발소리가 낡은 목조 계단을 부서뜨릴 듯 뒤흔들며 올라오고 있었다.

 

지유와 재환이 놀라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찰나, 굳게 닫혀 있던 사무실 문이 거칠게 젖혀졌다.

 

5. 계단을 메운 사람들과 뜻밖의 서류

 

"재환아! 성 변호사! 안에 있어?!"

 

남원일보 취재 완장을 팔에 두른 최민재 기자가 목에 무거운 일안반사식 카메라를 걸치고, 땀범벅이 된 얼굴로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민재의 셔츠는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거칠게 몰아쉬는 숨결마다 다급함이 묻어났다.

 

그의 바로 뒤이어 윤하은이 가슴팍에 커다란 가죽 서류 가방과 누런 서류철 뭉치를 터질 듯이 안고 뛰어 들어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하은의 이마에도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등 뒤, 좁은 2층 복도와 계단에는 흙 묻은 작업복과 빛바랜 고무신, 낡은 장화를 신은 낯선 장정들과 노인들이 굳은 표정으로 가득 메우고 서 있었다.

 

"민재야, 하은아? 무슨 일인데 이렇게 넋이 나가서 뛰어와?"

 

재환이 만년필을 쥔 채 책상에서 황급히 일어나 다가서자, 최민재가 손에 쥐고 있던 잉크 냄새도 채 마르지 않은 남원일보 석간 가쇄본과 흑백 사진 몇 장을 평상 탁자 위에 거칠게 내던졌다.

 

"재환아, 큰일 났어! 아니, 큰일이라는 말로는 다 설명이 안 돼. 이게 지금……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백배, 천배는 더 거대하고 끔찍한 판으로 폭발하고 있어!"

 

"진정해, 민재야. 숨부터 고르고 차근차근 말해봐. 무슨 일이야?"

 

지유가 황급히 둥굴레차 찻잔을 민재와 하은에게 건넸지만, 민재는 차를 마실 틈도 없다는 듯 탁자 위의 사진들을 손가락으로 거칠게 두드렸다.

 

"이것 좀 봐! 남원지원 앞마당이랑 시청 민원실 앞이야. 오늘 아침 일찍부터 주천면, 산내면, 송동면 농민들이 꽹과리랑 피켓을 들고 몰려와서 청사를 완전히 에워쌌어!"

 

사진 속에는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거친 손으로 피켓을 든 수십 명의 농민들이 법원 정문 앞마당에 빽빽하게 운집해 있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피켓에는 '강탈당한 우리 문전옥답을 즉각 돌려달라!', '토건 조폭 강태석의 불법 환지 사기 규명하라!'는 절규 어린 문구들이 선명했다.

 

"어제 네가 우포리 현장에 달려가서 공사중지가처분으로 토건 잔당들 불도저를 막아내고, 박성두 어르신의 1992년 요천 변 농지 강제 수용 무효 소송을 무료로 맡았다는 기사가 오늘 아침 남원일보 1면에 대대적으로 실렸잖아. 그런데 그 기사가 나가자마자 남원 전역이 발칵 뒤집혔어!"

 

민재의 상기된 목소리에, 숨을 헐떡이던 윤하은이 품에 안고 있던 두툼한 밤색 가죽 바인더와 누렇게 바랜 공문서 뭉치를 평상 위에 쿵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먼지가 풀썩 피어오르며 낡은 종이 냄새가 사무실을 뒤덮었다.

 

"성 변호사님, 이 서류를 보세요. 남원군청 지적과에서 30년간 근무하다 2년 전에 명예퇴직한 고창석 계장님이라는 분이 계세요. 그분이 오늘 아침 민재 선배 기사를 신문사에서 읽자마자, 평생 집안 장롱 밑바닥에 숨겨두었던 이 서류철을 들고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 신문사 편집국으로 달려오셨어요."

 

하은이 떨리는 손으로 서류철의 첫 장을 넘겼다.

 

겉표지에는 붉은색 고무인으로 '극비(極秘)'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고, 그 아래로 정갈한 먹물 글씨가 적혀 있었다.

 

'1991년 1995년 남원군 관내 토지 구획 정리 및 특별 환지 정리 대장 원본'.

 

성재환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그는 책상에서 안경을 집어 들고 서류철 앞으로 다가섰다.

 

서류를 넘기는 재환의 손끝에 팽팽한 긴장감이 실렸다.

 

대장 속에는 수백 명에 달하는 남원 농민들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본래 소유하고 있던 지번과 면적, 그리고 관광 도로 개설 및 하천 정비사업이라는 명목으로 헐값에 강제 수용된 내역이 낱낱이 기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수용된 비옥한 문전옥답 10만 평은 도로가 된 것이 아니라, 삼거리 토건 강태석의 친인척과 차명 법인들, 그리고 당시 군청 유력자들의 손으로 고스란히 단독 환지 불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대장의 결재란 맨 마지막 칸에는, 너무나도 익숙하고 가슴을 후벼 파는 직인이 선명한 붉은 인주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남원군수 성호석(成浩錫)'.

 

재환의 친부이자, 권력의 꼭대기에서 비극적인 침묵을 지켜야 했던 성호석의 관인이었다.

 

그 옆에는 삼거리 토건 대표이사 강태석의 직인이 나란히 찍혀 있었다.

 

"이게…… 전부 다 사실이었단 말인가."

 

재환의 목소리가 억눌린 고통으로 잘게 떨려왔다.

 

친부가 남긴 가문의 원죄가, 단순한 몇 필지의 땅이 아니라 남원 전역 10만 평에 걸쳐 수백 명 농민들의 삶을 도륙했던 거대한 비극의 실체로 눈앞에 펼쳐진 것이었다.

 

그때, 열린 문틈으로 조심스러운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복도를 가득 메우고 서 있던 농민들 사이를 헤치고, 허리가 굽고 주름이 깊게 팬 노인 한 명이 흙 묻은 털모자를 두 손으로 공손히 모아 쥔 채 사무실 안으로 발을 디뎠다.

 

주천면에서 평생 벼농사를 지어왔다는 박 노인의 손마디는 옹이처럼 굳어 있었고, 손톱 밑에는 지워지지 않는 검은 흙때가 끼어 있었다.

 

"성…… 성 변호사님……."

 

노인은 차마 신발을 벗고 평상 위로 올라오지 못한 채, 마룻바닥에 선 채로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더듬었다.

 

"신문을 보고…… 염치없는 줄 알면서도 온 동네 사람들과 달구지를 타고 시내로 나왔소. 우리 집안이 4대째 피땀 흘려 일궈온 주천면 요천 변 기름진 논 닷 마지기도 저 대장에 적힌 대로 공공 도로를 낸다며 강제로 뺏겼소. 평당 쌀 한 말 값도 안 되는 헐값 보상금을 던져주고 불도저로 논을 뭉개버리더니, 나중엔 그 땅에 도로 대신 강태석이 놈 조카 명의로 대형 주유소랑 가든 식당이 들어섰더이다. 군청에 가서 내 땅 돌려달라고 꽹과리를 쳤더니, 군청 놈들이 경찰을 불러 나를 유치장에 가두고 빨갱이 딱지를 붙였소. 내 마누라는 화병으로 피를 토하고 삼 년 전에 세상을 떴는데……."

 

노인의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노인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품속 안주머니를 뒤져, 땀과 눈물에 젖어 너덜너덜해진 1991년 토지 수용 확인서 사본을 꺼내 평상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오늘 아침 신문에…… 성 변호사님이 박성두 노인네 억울한 땅을 되찾아주겠다고 소송을 냈다기에, 군청 놈들한테 짓밟히고 법원 문턱도 못 넘던 우리 같은 버러지 같은 농민들도 혹시나…… 혹시나 우리 억울한 한을 풀어줄 수 있을까 해서 염치 불고하고 이렇게 몰려왔소. 제발…… 제발 우리 땅 좀 돌려받게 해주시오, 변호사님!"

 

노인이 무릎을 꺾고 마룻바닥에 풀썩 엎드리려 하자, 재환이 용수철처럼 튀어나가 노인의 양팔을 굳게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어르신, 이러지 마십시오. 무릎을 꿇으셔야 할 사람은 어르신이 아니라, 제 가문과 이 나라의 썩은 공권력입니다."

 

재환의 목소리는 비장하리만치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노인의 뒤로, 2층 복도와 좁은 나무 계단을 빽빽하게 메우고 있던 수십 명의 농민들이 저마다 품속에서 꼬깃꼬깃하게 접어둔 누런 서류 봉투들을 꺼내 들기 시작했다.

 

계단 아래 1층 입구를 넘어, 골목길 맞은편 삼거리 김밥집 앞마당까지 흙 묻은 작업복을 입은 남원 농민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최민재가 재환의 곁으로 다가와 귀에 나직하고도 엄중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재환아. 박성두 어르신 한 사람의 소송이 아니야. 남원 군청과 강태석의 토건 카르텔에 땅을 뜯기고 피눈물을 흘리며 살아온 피해자가 확인된 것만 100명이 넘어. 그 100명의 농민들이 지금 너 하나만 바라보고, 네가 내건 '약자의 약속'이라는 그 말 한마디만 믿고 이 계단을 메우고 있어."

 

창밖을 내다보자, 가을 햇살이 부서져 내리는 삼거리 골목길은 어느새 수많은 사람의 숨결과 한숨, 그리고 실낱같은 희망으로 가득 차 일렁이고 있었다.

 

평화로웠던 점심시간의 온기 위로, 지난 30년간 짓밟혀왔던 남원 민초들의 거대한 분노와 피눈물이 해일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그것은 박성두 노인의 1호 사건을 넘어, 남원의 역사를 바로잡아야 하는 거대한 집단 공익 소송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지유가 천천히 걸어와 재환의 곁에 섰다.

 

그녀는 떨리는 재환의 차가운 손을 두 손으로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

 

지유의 맑고 단단한 눈동자가 재환의 흔들리는 시선을 깊게 응시했다.

 

'두려워하지 마, 재환아. 당신은 혼자가 아니야. 내가 당신 곁에 있고, 이 사람들이 당신의 등 뒤에 있어.'

 

말없는 눈빛이 전해주는 무한한 신뢰와 사랑에, 재환의 심장이 다시금 거세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재환은 천천히 심호흡을 내쉬며,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검은 옻칠 만년필을 굳게 쥐어 잡았다.

 

지유가 채워준 흑청색 잉크를 머금은 금빛 펜촉이 햇살을 받아 서슬 퍼런 칼날처럼 번뜩였다.

 

'Fiat justitia, ruat caelum.'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가문의 원죄를 속죄하고, 남원 민초들의 피눈물을 닦아내기 위한 청년 변호사 성재환의 두 번째 사법적 결전이, 지유가 건넨 김밥 두 줄의 온기를 품고 장엄하게 막을 올리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