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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110화

첫 번째 의뢰인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지리산 자락의 대치

 

굉음을 내뿜는 노란색 불도저의 거대한 쇠날이 메마른 흙먼지를 자욱하게 일으키며 전진하고 있었다.

 

지리산 산내면 우포리 산 14번지, 대대로 콩과 감자를 심어 오던 다랑논 비탈길은 이미 검붉은 생채기를 드러낸 채 무참히 파헤쳐져 있었다.

 

"야, 이 무식한 영감탱이들아! 목숨 아까우면 썩 비켜! 여긴 주식회사 지리산관광개발이 경매로 정당하게 낙찰받은 사유지야!"

 

붉은색 안전모를 삐딱하게 눌러쓴 용역 현장소장이 메가폰을 쥐고 찢어지는 고함을 내질렀다.

 

그의 등 뒤로는 쇠파이프와 각목을 든 건장한 체격의 사내 스무여 명이 험악한 기세로 농민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지리산 골바람에 흙먼지가 사납게 휘날리는 길목에서, 백발이 성성한 오 노인을 비롯한 대여섯 명의 노인들이 낡은 호미와 꽹과리를 쥔 채 아스팔트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죽여라, 이놈들아!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한 발짝도 못 지나간다!"

 

"강태석 시장 놈이 감옥에 들어갔는데도 네놈들이 아직도 설쳐 대? 이 땅이 어떤 땅인데! 30년 전에 우리 선산까지 죄다 헐값에 후려쳐 가 놓고!"

 

오 노인은 핏발 선 눈으로 가슴을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하지만 현장소장은 가소롭다는 듯 비열한 비웃음을 흘리며 불도저 운전석을 향해 손짓했다.

 

"밀어붙여! 뼈마디 부러져서 병원비 쥐여주면 그만이니까, 그냥 밀어버려!"

 

육중한 무한궤도가 덜컹거리며 흙더미를 타고 넘었다.

 

쇠 버킷이 오 노인의 무릎 앞 불과 3미터 앞까지 육박하던 그 순간, 날카로운 급제동 소리가 계곡 전체를 뒤흔들었다.

 

끼이익!

 

먼지투성이가 된 취재용 쥐색 르망 승용차가 흙먼지를 가르며 불도저의 진로를 대각선으로 가로막아 섰다.

 

차 문이 거칠게 열리고, 짙은 남색 정장 차림의 청년이 성큼 차체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성재환이었다.

 

그의 서슬 퍼런 시선이 현장소장과 멈칫거리는 불도저를 정면으로 꿰뚫었다.

 

조수석에서는 남원일보 완장을 찬 최민재가 일안반사식(SLR) 카메라를 번쩍 치켜들며 셔터를 연사하기 시작했다.

 

찰칵, 찰칵, 찰칵!

 

섬광처럼 터지는 셔터 소리에 각목을 쥐고 있던 용역들이 흠칫 뒤로 물러섰다.

 

"뭐, 뭐야! 넌 어떤 새끼야? 관청 끄나풀이야, 뭐야!"

 

현장소장이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붉히며 각목을 치켜들고 다가왔다.

 

성재환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품 안에서 단정하게 접힌 백색 공문서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변호사 성재환입니다."

 

낮지만 쇳소리가 섞인 묵직한 음성이 지리산 계곡의 소음을 일순간에 집어삼켰다.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 제1민사부의 공사중지가처분 결정문입니다."

 

재환의 손가락 끝에 잡힌 문서 상단에는 문성현 부장판사의 직인과 붉은 인주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주식회사 지리산관광개발 및 그 대리인은 산내면 우포리 산 14번지 일원에 대한 일체의 형질변경 및 공사를 즉각 중단하라. 이 결정문을 송달받은 즉시 중장비와 인력을 현장에서 철수하지 않을 경우, 형법 제314조 업무방해 및 민사집행법상 공무상표시무효, 그리고 폭처법상 특수협박 혐의로 전원 현행범 체포를 지휘하겠습니다."

 

"벼, 변호사? 웃기지 마! 성재환이면 얼마 전까지 남원지청에 있던 그 독종 검사 아니야?"

 

현장소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검찰청 포토라인에서 현직 시장 강태석을 단번에 무릎 꿇리고, 스위스 비밀 계좌까지 모조리 동결시켜 버렸던 그 전설적인 청년 검사의 얼굴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검사 때려치우고 변호사 개업했다더니, 왜 이런 촌구석 땅싸움에 끼어들어!"

 

"검사든 변호사든 상관없습니다."

 

재환은 천천히 한 걸음 다가서며 소장의 턱밑에 법원의 결정문을 들이밀었다.

 

"불법 강제 철거를 멈추지 않는다면, 당신들이 감옥에 간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까요."

 

민재가 플래시를 터뜨리며 소장의 일그러진 얼굴을 정면에서 담아냈다.

 

"이거 내일 남원일보 1면에 아주 대문짝만하게 나가겠네요. '강태석 시장 구속되자 잔당들, 지리산 농민 상대 불법 폭력 철거 감행'. 소장님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소장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메가폰을 떨어뜨렸다.

 

용역 사내들이 눈치를 보며 쇠파이프를 하나둘 슬그머니 바닥에 내려놓기 시작했다.

 

"철, 철수해! 일단 차 빼!"

 

소장의 다급한 고함과 함께 불도저가 시커먼 매연을 뿜으며 후진하기 시작했다.

 

흙먼지가 서서히 가라앉는 길바닥에서 오 노인이 오열하며 재환의 구둣발 앞에 엎드렸다.

 

"성 변호사님…… 성 변호사님! 아이고, 우리 땅을 살려주셨네, 우리 마을을 살려주셨어!"

 

재환은 차가운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오 노인의 거친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어르신, 일어나십시오. 이 땅은 어르신들의 피땀입니다. 그 누구도 법을 어겨가며 빼앗을 수 없습니다."

 

지리산 골짜기 위로 맑은 가을 햇살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2. 삼거리의 따뜻한 평상

 

오후가 되자 남원 시내 동문 우체국 뒷골목 삼거리 김밥집 앞은 평화로운 훈기로 가득 찼다.

 

목공소 윤 씨가 지리산 육송을 깎아 달아준 원목 간판 '끝까지 남은 사랑' 아래로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바람을 타고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가게 맞은편 2층 붉은 벽돌 건물 창문에는 '성재환 법률사무소'라는 하얀 글씨가 단정하게 햇살을 반사하고 있었다.

 

지유는 앞치마를 두른 채 조리대 앞에 서서 정성스럽게 김밥을 말고 있었다.

 

고슬고슬하게 지어진 햅쌀밥 위에 참기름을 듬뿍 바르고, 어머니 박순례가 남겨준 손맛 그대로 정갈하게 볶아낸 당근과 우엉, 단무지, 시금치를 가지런히 얹었다.

 

그녀의 시선은 틈틈이 열린 문 너머 맞은편 2층 계단을 향하고 있었다.

 

'우포리 현장에서 다치지는 않았을까.'

 

지리산으로 떠난 지 네 시간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그때 골목 어귀에서 낯익은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흙투성이가 된 르망 승용차가 멈춰 서고, 차에서 내린 최민재와 성재환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유의 얼굴에 꽃처럼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손에 묻은 밥풀을 행주에 닦아내며 단숨에 가게 밖으로 뛰어나갔다.

 

"재환아!"

 

재환은 흙먼지가 잔뜩 묻은 옷소매를 털어내다 지유를 발견하고는 부드럽게 눈매를 휘었다.

 

"지유야."

 

"다친 데는 없어? 어떻게 됐어? 농민분들은……?"

 

재환의 곁에서 기지개를 켜던 민재가 넉살 좋게 끼어들었다.

 

"말도 마라, 지유야. 우리 성 변호사님이 법원 가처분 결정문 한 장으로 불도저 쇠날을 딱 가로막았거든. 아주 지리산 도적 떼 쫓아내듯 멋지게 쓸어버렸지!"

 

"민재야, 과장이 심하다."

 

재환이 헛기침을 하며 민재의 등을 툭 쳤지만, 얼굴에는 은은한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지유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두 사람을 김밥집 앞 넓은 평상으로 이끌었다.

 

"어서 앉아. 배고프지? 막 싼 김밥이랑 따뜻한 멸치 육수 끓여 뒀어."

 

지유가 쟁반 가득 썰어 온 김밥 두 줄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국물을 평상 위에 차려냈다.

 

맞은편 목공소에서 대패질을 하던 윤 씨와 동문 우체국 집배원 박 씨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어이, 성 변호사! 지리산에 도깨비 잡으러 갔다더니 무사히 다녀왔구먼!"

 

"윤 씨 아저씨 덕분입니다. 사무실 현판이 워낙 반듯해서 법원 판사님도 결정을 금방 내려주셨습니다."

 

재환의 너스레에 이웃들의 웃음소리가 골목길에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지유는 재환의 어깨에 묻은 흙먼지를 손수건으로 조심스럽게 털어내 주었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재환은 지유의 작은 손을 가만히 쥐었다.

 

"지유야."

 

"응?"

 

"창밖으로 네 가게가 바로 보이더라. 서류를 쓰다가 고개를 들면 네가 보여. 그러니까……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어."

 

지유의 귓가에 엷은 홍조가 번졌다.

 

그녀는 재환의 밥그릇에 김밥 한 점을 얹어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앞으로도 그럴 거야. 넌 억울한 사람들 지켜줘. 난 여기서 널 지킬 테니까."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골목 어귀에서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낡은 고무신을 질질 끄는, 어딘가 힘겹고 처량한 발걸음 소리였다.

 

3. 낡은 보따리와 흙 묻은 고무신

 

발소리의 주인공은 머리가 허옇게 센 칠십 대 초반의 노인이었다.

 

빛바랜 회색 모시적삼에 무릎이 닳아 떨어진 모직 바지를 입은 노인은, 한 손에 누렇게 변색된 낡은 보자기 보따리를 가슴에 꼭 끌어안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2층 건물의 '성재환 법률사무소'라는 하얀 현판을 올려다보다가, 평상에 앉아 있는 재환 일행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노인의 발밑에 신겨진 검정 고무신 코에는 바싹 마른 붉은 황토가 엉겨 붙어 있었다.

 

요천 변 갈대밭이나 강둑 근처에서 오랫동안 흙일을 한 사람의 흔적이었다.

 

"저…… 저기,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요."

 

노인의 목소리는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

 

가뭄 든 논바닥처럼 바싹 마른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여기가…… 성재환 검사님, 아니 성재환 변호사님이 계시다는 그곳이 맞습니까?"

 

재환은 쥐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맞습니다. 제가 성재환입니다, 어르신."

 

노인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서울에서 거물 시장 강태석을 단번에 잡아넣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얼굴이 실렸던 그 서슬 퍼런 검사가 이렇게 젊고 단정한 청년일 줄은 미처 몰랐던 모양이었다.

 

더구나 고급 양복을 빼입고 높은 의자에 앉아 있을 줄 알았던 법률가가, 허름한 골목길 평상에서 김밥을 먹고 있는 모습에 노인은 몹시 당황한 듯 뒷걸음질을 쳤다.

 

"아이고, 나 같은 늙은이가…… 천하의 성 변호사님 식사하시는데 결례를 범했습니다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노인이 연신 허리를 굽히며 돌아서려 하자, 지유가 얼른 평상에서 내려와 노인의 소매를 부드럽게 붙들었다.

 

"어르신, 아니에요. 결례라니요. 어디서 오셨어요? 다리가 몹시 편찮아 보이시는데, 일단 여기 앉아서 숨 좀 돌리세요."

 

지유의 따뜻한 손길에 노인은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엉거주춤 멈추어 섰다.

 

재환 역시 성큼 다가와 노인의 다른 쪽 팔을 부축했다.

 

"먼 길을 걸어오신 것 같습니다. 어르신, 사무실로 올라가시지요. 제 사무실은 바로 저 위 2층입니다."

 

"아닙니다, 변호사님…… 제 꼴이 이래서……."

 

노인은 흙투성이가 된 자신의 검정 고무신과 때 묻은 보따리를 내려다보며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법률사무소라는 데를 가보긴 했습니다만, 문간에서부터 서기 놈들이 신발에 흙 떨어진다고 쫓아내더군요. 돈 없으면 말도 붙이지 말라면서요. 번쩍거리는 바닥을 더럽힐까 봐…… 저는 그냥 여기서 말씀만 전하고 가도……."

 

그 말에 재환의 가슴 밑바닥에서 깊은 탄식이 차올랐다.

 

법은 언제나 높은 성벽 뒤에 숨어 있었고, 그 문턱을 넘지 못한 약자들은 문간에서조차 흙 묻은 신발을 부끄러워해야 했다.

 

재환은 노인의 거친 손을 놓지 않은 채 단호하고도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어르신, 제 사무실은 흙 묻은 신발을 신고 들어오셔도 되는 곳입니다. 지리산 나무로 바닥을 짜서 아무리 흙이 묻어도 물걸레로 닦아내면 그만입니다. 어서 올라가시지요."

 

지유도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노인의 보따리를 조심스레 받아 들었다.

 

"제가 시원한 보리차랑 따뜻한 차 한잔 올릴게요. 올라가요, 어르신."

 

노인의 메마른 눈가에 왈칵 투명한 눈물이 맺혔다.

 

노인은 떨리는 다리를 이끌며 재환과 지유의 부축을 받아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한 계단씩 오르기 시작했다.

 

4. 빼앗긴 논 다섯 마지기

 

2층 성재환 법률사무소의 문이 열리자 은은한 육송 냄새와 종이 냄새가 코끝을 감돌았다.

 

화려한 가죽 소파나 번쩍이는 유리 테이블 대신, 목공소 윤 씨가 정성껏 짜준 넓은 평상형 원목 탁자와 단정한 책장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가을바람이 책상 위에 놓인 단정한 만년필과 서류들을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재환은 노인을 원목 탁자 상석에 조심스럽게 앉혔다.

 

지유가 쟁반에 정갈한 도자기 찻잔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구수한 결명자차의 온기가 탁자 위에 은은하게 피어올랐다.

 

"목이 많이 타셨을 텐데, 천천히 드세요."

 

노인은 떨리는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싸 쥐고 단숨에 반을 들이켰다.

 

타들어 가던 목구멍으로 따뜻한 온기가 흘러들자, 그제야 노인은 참았던 거친 숨을 토해냈다.

 

"고맙습니다, 참말로 고맙습니다…… 색시가 마음씨가 비단결 같구먼요."

 

노인은 가슴에 품고 있던 누런 보자기를 조심스럽게 풀기 시작했다.

 

보자기 안에는 네 모퉁이가 닳아 너덜너덜해진 두툼한 서류 뭉치와 낡은 주민등록증, 그리고 붉은 인주가 번진 영수증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노인의 손가락 마디마디는 굳은살로 뒤덮여 펴지지 않을 정도로 굳어 있었다.

 

"제 이름은 박성두(朴成斗)라고 합니다요. 남원읍 하정리 요천 변에서 평생 농사만 짓던 늙은이지요."

 

박성두 노인은 서류 뭉치 맨 위에 놓인 누렇게 바랜 종이 한 장을 떨리는 손으로 집어 재환의 앞에 내밀었다.

 

'토지수용 통지서 및 보상금 수령 통보'.

 

발행일자는 1992년 4월, 남원군수 성호석의 직인과 삼거리 토건의 고무인이 찍혀 있는 서류였다.

 

재환의 눈동자가 서류에 적힌 부친 성호석의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가늘게 흔들렸다.

 

지유 역시 숨을 들이켜며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1992년 봄, 남원 일대 구도심 토지 구획 정리와 환지 처분이 한창 진행되던 바로 그 비극의 시기였다.

 

"어르신, 이 서류는……."

 

재환이 묻자 박 노인의 목소리에 피맺힌 한이 묻어났다.

 

"요천 변에 우리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문전옥답 논 다섯 마지기가 있었습니다요. 자갈 하나 없이 기름진 땅이라 사시사철 벼가 누렇게 익던 우리 집안의 목숨줄이었지요. 그런데…… 92년도에 삼거리 토건 강태석 놈들이 군청 놈들을 끼고 들어와서는, 거기가 관광 도로가 나는 공공용지라고 강제로 뺏어갔습니다요."

 

노인의 주름진 뺨을 타고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빛바랜 종이 위로 스며들었다.

 

"평당 쌀 한 말 값도 안 되는 헐값을 보상금이라고 던져주더니, 그거 안 받으면 공탁 걸고 불도저로 밀어버리겠다고 협박을 해댔습니다. 내가 군청에 찾아가서 군수 면담을 신청하고 군청 마당에 드러누웠더니…… 강태석이 밑에 있던 깡패 놈들이 밤중에 우리 오두막을 덮쳤습니다요."

 

노인의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쇠파이프로 가간살림을 모조리 때려 부수고, 내 아내를 마당으로 내동댕이쳤습니다. 그 충격으로 병약하던 집사람이 자리에 드러누웠는데…… 병원비는커녕 약값 한 푼 없어서, 그해 가을을 못 넘기고 피를 토하며 세상을 떴습니다요."

 

정적이 사무실 안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창밖 요천 변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가 마치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의 곡소리처럼 서글프게 들려왔다.

 

지유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어머니 박순례가 남원의료원 중환자실에서 피를 토하며 스러져 가던 그 참혹했던 날들의 고통이 노인의 절규와 겹쳐지며 가슴을 후벼 팠다.

 

"그 뒤로 어떻게 되셨습니까?"

 

재환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 안에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의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집사람 장례를 치르고 나니 남은 게 없더군요. 길바닥에 나앉아 요천 변 다리 밑에서 움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요, 변호사님!"

 

노인이 벌떡 일어나 탁자를 짚었다.

 

"도로가 난다던 그 기름진 내 땅에 도로가 난 게 아니었습니다! 강태석 그놈이 시장이 되더니, 그 땅을 제 처남 명의의 동서개발로 헐값에 불하해 버리고는, 거기다 호화 수변 모텔이랑 가든 식당 허가를 내줬습니다요! 공공용지라고 피눈물 흘리게 뺏어가 놓고, 제놈들 배때지 불리는 장사장판을 벌인 겁니다!"

 

노인은 품속에서 구겨진 관보 스크랩과 토지대장 등본을 꺼내 탁자 위에 흩뿌렸다.

 

"내가 법원에도 가보고 경찰서에도 가봤습니다. 하지만 법원 앞 변호사 놈들은 강태석 시장 이름 석 자만 들으면 손사래를 치며 날 문전박대했습니다. 군청이고 검찰이고 다 한패거리라며,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고 비웃더군요. 그렇게 4년을…… 죽은 아내 영정 사진 하나 품에 안고 피눈물을 흘리며 살았습니다."

 

노인은 흙 묻은 고무신을 신은 채 바닥으로 무릎을 꿇었다.

 

"성 변호사님! 며칠 전에 신문을 봤습니다. 변호사님이 그 악귀 같은 강태석을 잡아넣고 법정에 세우셨다는 기사를요! 그리고 어제…… 그 높은 벼슬 다 버리고 이 남원 바닥에 힘없는 사람들 도와주는 법률사무소를 여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변호사님, 제발…… 제 죽은 아내의 원한 좀 풀어주십시오. 내 땅을 되찾지 못해도 좋습니다. 그놈들이 도둑놈이고 살인자였다는 것만…… 나라 법으로 밝혀주십시오!"

 

5. 약속의 만년필

 

바닥에 이마를 대고 흐느끼는 노인의 등은 앙상하게 굽어 있었다.

 

재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노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자신의 무릎을 꿇어 노인과 시선을 나란히 맞추었다.

 

"어르신, 고개를 드십시오."

 

재환의 단단한 손이 노인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노인이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고개를 들자, 재환의 맑고 깊은 눈동자가 그를 온전히 담아냈다.

 

"어르신이 겪으신 그 고통, 그 절망…… 저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재환의 목소리는 낮고 엄숙했다.

 

"당시 군청에서 부당하게 공권력을 휘두르고 그 불법 수용에 결재 도장을 찍었던 남원군수가…… 바로 제 친부였습니다."

 

"예……?"

 

박 노인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노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재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삶을 파탄 내고 아내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그 원수 같은 군수의 아들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었다.

 

지유가 조용히 다가와 노인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어르신. 저 역시 30년 전 그 환지 비리로 아버지를 잃었고, 얼마 전까지 저 앞 김밥집에서 강태석 일파의 쇠파이프와 행정 탄압에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하지만 성 변호사는…… 자신의 가문이 저지른 원죄를 결코 덮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아버지를 직접 법정에 세워 죗값을 치르게 했고, 30년간 썩어 있던 남원의 어둠을 온몸으로 깨부순 사람입니다."

 

노인은 멍하니 지유와 재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청년의 눈빛에는 일말의 거짓이나 비겁한 변명이 없었다.

 

오직 가문의 죄악에 대한 뼈아픈 참회와, 약자를 향한 준엄한 사법적 결기만이 서려 있을 뿐이었다.

 

재환은 노인을 부축해 다시 원목 탁자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책상 앞으로 걸어가 서랍을 열었다.

 

서울 명문 로스쿨을 졸업한 백부에게 물려받았던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

 

금빛 닙과 캡 상단에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이라는 라틴어 법언과 함께 '成宰桓'이라는 한자 이름이 아로새겨진 그 만년필이었다.

 

재환은 지유가 선물했던 깊고 푸른빛이 감도는 흑청색 잉크병을 열었다.

 

만년필 피스톤을 돌려 흑청색 잉크를 가득 채우자, 묵직한 펜촉 끝에서 서슬 퍼런 정의의 기운이 감돌았다.

 

재환은 단정한 법원 제출용 소장 용지를 탁자 중앙에 펼쳐 놓았다.

 

사각, 사각.

 

만년필 촉이 종이를 가르는 맑고 경쾌한 쇳소리가 고요한 사무실 안에 울려 퍼졌다.

 

6. 첫 번째 소장

 

'소장(訴狀)'.

 

'원고: 박성두'.

 

'피고: 대한민국 및 남원시, 주식회사 동서개발'.

 

'청구 취지: 피고 남원군수가 1992년 4월 16일 원고에 대하여 행한 토지수용처분은 무효임을 확인한다. 피고 주식회사 동서개발은 원고에게 해당 토지에 관한 소유권이전등기말소 절차를 이행하라.'

 

재환의 만년필은 거침없이 흑청색 글씨를 새겨나갔다.

 

행정소송법과 토지수용법, 그리고 헌법상 재산권 보장 조항이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치밀한 논리로 종이 위를 채워나갔다.

 

"어르신.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수용은 '공공의 필요'가 있을 때만 극히 제한적으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관광 도로를 낼 목적이 아니라 특정 토건 세력에게 사익을 안겨주기 위해 강제 수용을 감행했다면, 이는 공권력의 중대하고 명백한 남용이자 원천 무효입니다."

 

재환은 고개를 들어 노인을 바라보며 설명했다.

 

"비록 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당연무효인 행정처분은 제소 기간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게다가 강태석 시장의 형사재판 과정에서 요천 변 수변공원 개발 비리와 관련된 동서개발의 차명 비자금 장부가 이미 법정 증거로 채택되었습니다. 그 장부 속에 어르신의 땅을 강제 편입시켜 불하한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박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쥐어뜯었다.

 

자신이 관공서 문간을 전전할 때마다 '법적으로 이미 끝난 일'이라며 비웃던 그 높은 법이, 청년 변호사의 입을 통해 비로소 자신을 지켜주는 방패가 되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소장 작성을 마친 재환은 맨 마지막 장에 자신의 이름을 정갈하게 적어 넣었다.

 

'원고 소송대리인 변호사 성재환'.

 

그리고 백부의 각인 만년필 옆에 놓여 있던 변호사 직인을 붉은 인주에 묻혀 힘차게 내리찍었다.

 

쿵.

 

단단한 육송 탁자가 묵직하게 울렸다.

 

노인은 소장을 내려다보며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변호사님…… 그런데, 제가 드릴 돈이 없습니다요. 장롱 밑바닥을 다 털어도 십만 원짜리 수표 한 장 없는데…… 이 큰 은혜를 무슨 돈으로 갚아야 할지……."

 

노인이 낡은 쌈짓돈을 꺼내려 하자, 재환은 노인의 거친 손등을 따뜻하게 덮어 눌렀다.

 

"어르신, 성재환 법률사무소의 수임료는 이미 받았습니다."

 

"예……? 제가 아무것도 드린 게 없는데, 무얼 받으셨다는 말씀입니까요?"

 

재환은 곁에 선 지유를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르신이 4년간 흘리신 그 억울한 눈물, 그리고 법이 바로 서야 한다는 그 믿음. 그것이 제가 받은 가장 무겁고 값진 수임료입니다. 이 소송은 전액 무료로 진행됩니다."

 

"아이고…… 변호사님…… 성 변호사님!"

 

노인은 끝내 탁자에 엎드려 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렸다.

 

평생을 억눌리고 짓밟혀 온 가난한 농민의 서러움이, 4년 만에 비로소 따뜻한 눈물이 되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유는 손수건을 꺼내 노인의 눈물을 정성스레 닦아주었다.

 

그 손길은 7년 전, 그리고 어머니를 떠나보내던 날의 자신을 위로하던 바로 그 사랑의 온기였다.

 

7. 문턱을 낮춘 방파제

 

노인의 울음소리가 잦아들 무렵, 계단 아래에서 또 다른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남원일보 최민재 기자가 계단을 뛰어 올라오며 문을 벌컥 열었다.

 

"재환아! 지유야! 밖을 좀 봐라!"

 

재환과 지유는 창가로 다가갔다.

 

김밥집 앞 골목길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다.

 

지리산 산내면 우포리에서 불도저를 막아냈다는 소식을 들은 마을 주민들, 그리고 과거 강태석 일파와 삼거리 토건에 억울하게 가게를 뜯기거나 토지를 헐값에 강탈당했던 구도심의 영세 상인들이었다.

 

동문 우체국 집배원 박 씨가 우포리 오 노인과 함께 사람들을 이끌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저마다 낡은 서류 봉투와 누렇게 변색된 토지대장, 억울한 고소장들이 들려 있었다.

 

"성 변호사가 진짜로 우리 같은 사람들 편을 들어준단 말이지?"

 

"우포리 불도저도 법원 종이 한 장으로 딱 멈춰 세웠다잖여!"

 

"강태석 놈한테 뺏긴 우리 방앗간 터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사람들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망설임 대신, 생전 처음 품어보는 희망의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재환은 창밖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권력의 높은 청사,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의 화려한 특임팀장 자리를 박차고 이곳 남원으로 내려온 이유.

 

그것은 바로 이 힘없고 소외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법이 가진 본래의 약속을 지켜내기 위함이었다.

 

'법은 권력자의 방패가 아니라, 약자의 약속이어야 한다.'

 

재환이 법정에서 피를 토하듯 선언했던 그 신념이, 이제 비로소 이 작은 골목길에서 살아 숨 쉬며 거대한 방파제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박성두 노인이 눈물을 닦고 일어서며 소장을 가슴에 품었다.

 

"변호사님, 제가 먼저 나가서 저 사람들에게 말하겠습니다. 우리 성 변호사님은 가짜가 아니라고, 진짜로 우리 같은 사람들을 살려주는 참된 법관이라고 말입니다!"

 

노인이 낡은 고무신을 끌고 당당하게 계단을 내려가자, 골목길에서 환호와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사무실 안에는 다시 두 사람만이 남았다.

 

지유는 책상 위에 놓인 각인 만년필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어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재환의 정장 안주머니에 소중히 꽂아주었다.

 

"재환아."

 

"응, 지유야."

 

"이제 정말로 시작이네."

 

"그래. 이제 진짜 시작이야. 너와 내가 지켜낸 이 남원에서, 다시는 억울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없도록 만들 거야."

 

재환은 지유의 손을 꼭 쥐었다.

 

그의 시선이 창밖 맞은편 삼거리 김밥집의 나무 간판 '끝까지 남은 사랑'과, 2층의 '성재환 법률사무소' 현판으로 이어졌다.

 

약자를 향한 사랑과 정의의 법이 마주 보며 서 있는 그곳이야말로, 두 사람이 목숨을 걸고 돌아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안식처였다.

 

가을 노을이 붉게 물들어가는 요천 변 너머로, 새로운 내일을 알리는 맑고 청아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