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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109화

작은 변호사 사무실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새벽의 망치 소리

 

지리산 동쪽 자락에서 피어오른 짙은 새벽안개가 요천의 잔잔한 물결을 타고 남원 시내로 스며들고 있었다.

 

밤새 차갑게 식어 있던 남원 동문 우체국 뒷골목의 묵직한 적막을 깨뜨린 것은 규칙적이면서도 힘 있는 둔탁한 소리였다.

 

탕, 탕, 탕.

 

삼거리 김밥집 바로 맞은편, 세월의 더께가 앉은 낡은 2층 붉은 벽돌 건물 외벽에 사다리를 받쳐 둔 목공소 윤 씨가 굵은 대못을 힘차게 박아 넣고 있었다.

 

거친 모서리를 대패로 수십 번 밀어내고, 곱게 사포질한 뒤 투명한 동백기름을 듬뿍 먹인 지리산 육송(陸松) 원목 현판이었다.

 

은은하게 번져 나오는 붉은 소나무 특유의 그윽한 솔향이 서늘한 새벽 공기 속으로 퍼져나갔다.

 

권력과 부를 과시하듯 금박을 번쩍거리거나, 서슬 퍼런 위압감을 주는 거창한 한자 문구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얀 페인트로 단정하고 곧게, 힘주어 새겨 넣은 순 한글 여덟 글자였다.

 

'성재환 법률사무소'.

 

"윤 씨 아저씨, 오른쪽 모서리가 새끼손가락 반 마디쯤 내려앉은 것 같습니다."

 

골목 바닥에서 두꺼운 목장갑을 낀 최민재가 턱을 젖힌 채 올려다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어깨에는 낡은 취재용 카메라 가방을 단단히 메고, 한 손으로는 덜컹거리는 나무 사다리 다리를 온몸으로 지탱하고 있었다.

 

남원일보의 정식 사회부 기자가 된 후 매일같이 밤샘 취재를 이어가면서도, 벗의 새로운 출발을 돕기 위해 새벽 네 시부터 달려온 그의 눈빛은 맑게 깨어 있었다.

 

"오냐, 민재야. 잠깐만 꽉 잡고 있어 봐라. 이 육송이란 놈이 워낙 결이 억세고 단단해서 말이다. 지리산 칼바람을 백 년은 넘게 버텨낸 놈이라 쇠못 대가리가 자꾸 튕겨져 나올라 칸다."

 

윤 씨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팔소매로 훔쳐내며 망치를 다시 고쳐 쥐었다.

 

탕, 탕!

 

맑고 경쾌한 쇠붙이 울림이 좁은 골목길의 벽돌담을 타고 울려 퍼졌다.

 

마침내 육중한 나무 현판이 오랜 세월을 견뎌온 붉은 벽돌 틈새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굳건하게 자리를 잡았다.

 

마지막 못이 박히는 청명한 쇳소리에 응답하듯, 바로 맞은편 삼거리 김밥집의 미닫이문이 스르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정갈하게 다려진 남색 면 앞치마를 두른 한지유가 양손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뚝배기와 묵직한 양은 주전자를 받쳐 든 채 조심스레 걸어 나왔다.

 

새벽부터 커다란 무쇠 솥에서 푹 우려낸 구수한 멸치 육수와 볶은 통깨의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던 새벽 골목을 단숨에 온기로 감쌌다.

 

"윤 아저씨, 민재야. 찬바람 맞으며 고생 그만하시고 이것 좀 드세요. 새벽 공기가 아직 뼈마디까지 시려요."

 

지유가 2층으로 통하는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 참 아래, 소박한 원목 평상 위에 정성스레 찻상을 내려놓았다.

 

뽀얗게 김을 뿜어내는 둥굴레 보리차 주전자 곁에는, 갓 쪄낸 윤기 흐르는 햅쌀에 지리산 고사리와 당근, 우엉을 꽉 채워 만 따뜻한 김밥 세 줄이 정갈한 놋그릇에 담겨 있었다.

 

"이야, 이 고소한 냄새 좀 봐라. 지유 표 김밥 한 줄이면 어젯밤 시청 당직실 뒤지느라 꽁꽁 얼어붙었던 뱃속이 확 녹아내리겠다."

 

민재가 목장갑을 벗어 던지며 넉살 좋게 웃었다.

 

그는 젓가락도 쓰지 않고 두툼한 김밥 한 꼬투리를 집어 입안 가득 욱여넣더니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때 2층 계단 위에서 묵직하고 차분한 발소리가 삐걱거리며 울려 퍼졌다.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페인트 얼룩과 먼지가 하얗게 묻은 편안한 면바지를 입은 성재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품에는 며칠간 닦아내고 정리한 두툼한 법전 서너 권과 대법원 판례집이 안겨 있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에서 거악의 목덜미를 겨누던 최연소 특임팀장의 서슬 퍼런 검사복도, 서울고검 공판부장실의 문을 박차고 들어가 병보석 음모를 단칼에 베어 넘기던 날카로운 정장 차림도 아니었다.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권력의 칼을 스스로 내려놓고, 고향 남원의 흙 냄새 속으로 온전히 돌아온 청년 성재환의 담백하고 편안한 얼굴이었다.

 

"재환아, 위를 봐라. 간판 수평이 아주 자로 잰 것처럼 반듯하게 걸렸다. 네 마음에 드냐?"

 

민재가 김밥을 씹으며 엄지손가락을 불쑥 치켜세웠다.

 

재환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머리 위에 걸린 육송 현판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성재환 법률사무소'.

 

어둠을 헤치고 떠오른 투명한 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쏟아져 내리며, 붉은 소나무의 고운 나뭇결과 하얀 글씨를 눈부시게 비추고 있었다.

 

그 간판의 정면, 불과 대여섯 걸음 떨어진 맞은편에는 며칠 전 목공소 윤 씨와 이웃들이 힘을 모아 달아준 삼거리 김밥집의 간판이 마주 서 있었다.

 

'삼거리 김밥', 그리고 그 아래 짙은 청색 안료로 새겨 넣은 재환의 친필 문구, '끝까지 남은 사랑'.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선 두 개의 나무 간판은, 지난 7년간 겪어낸 처절했던 이별과 폭압의 상처를 보듬으며 서로를 영원히 지켜주겠다는 듯 굳건하게 시선을 맞대고 있었다.

 

"나무 향이 참 그윽하고 좋습니다, 윤 아저씨. 손이 많이 가셨을 텐데 정말 고맙습니다."

 

재환이 허리를 깊숙이 숙여 윤 씨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고맙기는 뭐가 고마워. 서울서 대검찰청 높은 벼슬자리도 헌신짝처럼 버리고 우리 같은 사람들 지키겠다고 내려온 양반인데, 내가 이런 판때기 하나 제대로 못 다듬어주면 남원 땅에서 목수 질 해 먹었다는 소리 못 하지. 자, 서 있지 말고 어서 안쪽 짐 마저 올리자고."

 

윤 씨가 호탕하게 웃으며 사다리를 접어 어깨에 멨다.

 

2. 문턱 없는 평상

 

2층 사무실의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자, 갓 대패질한 소나무 향과 맑은 가을바람이 기분 좋게 뺨을 스쳤다.

 

이곳은 흔히 보아온 권위적이고 차가운 법률사무소의 풍경과는 전혀 달랐다.

 

의뢰인을 기죽게 만드는 육중한 수입산 가죽 소파도, 번쩍거리는 유리 탁자도, 벽면을 빈틈없이 채운 화려한 자격증이나 위촉패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대여섯 명이 넉넉히 둘러앉을 수 있는 커다란 평상형 원목 탁자가 널찍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윤 씨가 며칠 동안 땀을 흘리며 정성스레 다듬은 그 소나무 평상은 모서리가 둥글넓적하고 부드러웠다.

 

논밭에서 막 일을 마치고 온 농민들이 흙 묻은 고무신을 벗고 편히 걸터앉아 다리를 뻗을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고 온기를 채워 넣은 배려였다.

 

탁자 한쪽 구석에는 단정한 벼루와 연적, 그리고 성재환이 백부에게 물려받아 가슴에 품고 다녔던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이 놓여 있었다.

 

만년필 캡 상단에 깊이 새겨진 라틴어 법언,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이라는 문구 위로 창가에서 쏟아져 들어온 가을 볕이 투명하게 부서졌다.

 

그 곁에는 지유가 학창 시절 용돈을 쪼개어 사주었던, 깊고 푸른빛을 머금은 흑청색 잉크병이 소중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하은이는 아직 안 일어난 거야? 신혼 첫날부터 색시를 혼자 내버려 두고 쏘다니면 어떡해, 민재야."

 

지유가 주전자와 김밥 접시를 평상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민재를 가볍게 흘겨보았다.

 

"야, 하은이가 나보다 열 배는 더 바쁘다. 광한루원 완월정에서 전통 혼례 치르고 나더니, 남원 색시 티를 팍팍 내면서 새벽같이 부녀회로 달려갔어. 그 부패한 구도심 번영회 놈들이 강태석 밑에서 상인들 삥 뜯었던 회비 횡령 장부 있잖아. 그거 낱낱이 파헤쳐서 억울하게 뺏긴 상인들한테 환원시켜 주겠다고 아침부터 포목점 골목을 휘젓고 다닌다니까."

 

민재가 찻잔을 단숨에 비워내며 혀를 내둘렀다.

 

그의 목소리에는 아내에 대한 은근한 자랑스러움과 애정이 듬뿍 묻어 있었다.

 

민재의 말마따나 남원은 빠르게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30년간 남원을 암흑처럼 지배하던 거악 강태석이 징역 12년과 추징금 140억 원을 선고받고 철창에 갇힌 지 보름 남짓.

 

시청과 경찰서, 상인회를 거미줄처럼 옭아매고 있던 부패 카르텔의 사슬이 끊어지자, 억눌려 있던 남원의 숨통이 마침내 트이고 있었다.

 

하지만 수십 년간 뿌리박힌 악의 잔재는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

 

재환이 평상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누렇게 바랜 서류철 하나를 말없이 펼쳤다.

 

어제저녁 늦은 시각, 지리산 산내면 우포리에서 버스를 타고 달려온 농민 대책위원장이 피눈물을 흘리며 건네주고 간 서류였다.

 

'산내면 우포리 산 14번지 일대 농지 매매계약서 및 지상권 설정 합의서'.

 

서류 끝머리에는 한양토건과 동서개발의 차명 직인이 찍혀 있었고, 강태석의 처남이자 비자금 세탁의 행동대장이었던 조상태의 서명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민재야, 어제 남원일보 자료실에서 확인했다는 그 법인 명단, 다시 한번 확인해 봤어?"

 

재환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평상 주변을 무겁게 메웠다.

 

민재의 얼굴에서도 장난기가 싹 가시고, 사회부 기자 특유의 날카로운 긴장감이 떠올랐다.

 

"응. 조상태 그놈이 구속되기 직전에 지리산 자락 임야랑 과수원을 빼돌리려고 차명으로 급조한 페이퍼 컴퍼니가 맞더라. 법인명이 '주식회사 지리산관광개발'이야. 강태석이 1심에서 140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추징금을 선고받으니까, 감옥 바깥에 남아 있는 토건 잔당 놈들이 그 돈을 강제 집행당하기 전에 남은 부동산을 헐값에 팔아치우고 현금을 챙겨 튀려는 속셈이지. 우포리 어르신들이 평생 피땀 흘려 일군 다랭이논이랑 감나무 밭 칠만 평이 그놈들의 첫 번째 타깃이야. 오늘 아침 열 시에 용역 깡패들이 불도저 세 대를 앞세우고 마을로 밀고 올라간다고 으름장을 놓았대."

 

민재의 설명이 이어지자 지유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불도저.

 

삼거리 김밥집의 처마를 박살 내고, 어머니 박순례가 목숨처럼 지키던 가게를 짓밟으려던 그 흉측한 쇠 버킷의 굉음이 생생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강태석이 감옥에 갇혔는데도…… 그 밑에 있던 자들이 아직도 그런 짓을 벌인단 말이야?"

 

지유의 목소리에 깊은 슬픔과 분노가 배어 나왔다.

 

재환은 조용히 손을 뻗어 탁자 위의 각인 만년필을 쥐었다.

 

단단하게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 마디마디에 묵직한 힘이 들어갔다.

 

"강태석이라는 거악의 우두머리는 쓰러졌지만, 그 거대한 나무 밑에서 썩은 열매를 받아먹던 잔당들은 여전히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어. 그자들에게는 사법부의 준엄한 판결문보다 당장 제 주머니를 채울 현금 몇 푼이 더 절박하니까. 공권력의 감시가 닿지 않는 지리산 외딴 산골 마을을 노린 거지. 하지만 이번엔 절대로 뜻대로 되지 않을 겁니다."

 

재환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창틀 아래로 삼거리 김밥집의 커다란 통유리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쇠파이프 테러로 거미줄처럼 박살 나 박스 테이프로 흉측하게 기워져 있던 옛 상흔은 온데간데없고, 맑고 투명한 유리창 안으로 따뜻한 백열등 불빛이 다정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가 이웃들의 손을 잡고 끝까지 버텨냈듯이, 저 외로운 농민들도 무너지지 않도록 법의 울타리를 쳐야 합니다."

 

3. 창문 너머의 시선

 

"어머, 다들 아침부터 왜 이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계실까! 경사스러운 날에 인상 펴세요!"

 

무겁게 가라앉으려던 사무실의 공기를 단숨에 깨뜨린 것은 계단 아래에서 들려온 경쾌하고 낭랑한 목소리였다.

 

양손에 커다란 보자기로 싼 붉은 시루떡 상자를 든 윤하은이 계단을 씩씩하게 뛰어 올라왔다.

 

신혼 첫날의 피로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하은의 두 뺨은 불그스레한 생기로 가득 차 있었다.

 

"하은아! 언제 온 거야?"

 

지유가 반색하며 얼른 달려가 묵직한 떡 상자를 함께 맞잡았다.

 

"언니, 내가 남원 시내에서 제일 쌀 좋기로 소문난 방앗간 세 군데를 털어서 갓 쪄낸 팥시루떡이야. 우리 성 변호사님이 서울서 대검찰청 특임팀장이라는 어마어마한 꽃길을 걷어차고 남원 백성들 살리겠다고 오셨는데, 개업 떡이라도 온 동네에 넉넉히 돌려야 기가 살지! 최민재, 넌 마누라가 무거운 떡 상자 들고 오는데 멍하니 앉아서 김밥만 축내고 있을래?"

 

하은의 매서운 호통에 민재가 헛기침을 연신 해대며 얼른 떡 상자 밑바닥을 받쳐 들었다.

 

"알았다, 알았어. 우리 윤 총무님 기세에 남원 천지가 다 흔들리겠네. 평생 취재 수첩만 쥐고 살 줄 알았더니, 마누라 덕분에 지게꾼 노릇부터 배우게 생겼다."

 

"잔말 말고 힘이나 써! 동문 우체국이랑 저기 요천 둑길 청소하시는 어르신들, 그리고 공설 방앗간까지 싹 다 돌려야 하니까!"

 

하은과 민재가 서로 투덕거리며 떡 상자를 나누어 들고 다시 계단을 우당탕탕 내려갔다.

 

골목 아래에서 두 사람의 유쾌하고 풋풋한 웃음소리가 메아리치며 아침 안개를 흩어놓았다.

 

시끌벅적하던 소란이 잦아들자, 2층 사무실 안에는 다시 성재환과 한지유, 두 사람만의 고요가 내려앉았다.

 

동쪽 창가로 부드럽게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지유의 앞치마 자락과 머리칼이 살랑 흔들렸다.

 

지유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창가로 다가갔다.

 

나무 냄새가 물씬 풍기는 창틀에 두 손을 얹고 밖을 내려다보았다.

 

이곳 2층 창가에 서면, 맞은편 김밥집의 풍경이 마치 손을 뻗으면 닿을 듯 선명하게 보였다.

 

가마솥에서 하얗게 피어오르는 수증기, 정갈하게 정리된 편백나무 도마, 카운터 모퉁이에 놓인 작은 흑청색 잉크병, 그리고 이른 아침부터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웃 손님들의 따뜻한 미소까지.

 

반대로 김밥집 조리대 앞에 서서 고개를 들면, 이 사무실의 평상과 책상, 그리고 서류를 넘기는 재환의 반듯한 옆모습이 언제든 한눈에 들어올 구조였다.

 

"정말…… 바로 코앞이네."

 

지유가 창밖을 내려다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안도감과 벅찬 감정이 묻어 있었다.

 

재환이 조용히 다가와 지유의 곁에 섰다.

 

두 사람의 어깨가 서늘한 가을바람 속에서 다정하게 맞닿았다.

 

"지유야."

 

"응, 재환아."

 

"7년 전에는 말이다…… 네가 어디서 무얼 하는지, 아침밥은 거르지 않는지, 아침마다 피 흘리던 그 무릎을 부여잡고 홀로 울고 있지는 않은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어. 서울 신림동 고시촌의 창문 하나 없는 세 평짜리 어두운 방에 유폐되듯 갇혀서, 남쪽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며 속을 까맣게 태웠지. 내가 무너지면 너를 지킬 수 없다는 공포 하나로 버텼어."

 

재환의 깊은 눈동자에 지나간 세월의 참담했던 기억이 아스라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지유의 작고 단단한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매일같이 찬물에 손을 담그고, 뜨거운 밥솥을 만지며 거칠어진 손이었지만, 재환에게는 세상 그 어떤 보석보다 귀하고 따스한 온기였다.

 

"그런데 이제는…… 눈만 들면 네가 보여. 네가 밥을 짓는 모습도, 손님들에게 따뜻한 김밥을 건네는 모습도, 피곤할 때 처마 밑에 나와 기지개를 켜는 모습까지…… 전부 다 내 눈으로 지켜볼 수 있어. 네가 내 눈앞에 숨 쉬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더 이상 두려울 게 없다."

 

지유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온전히 담아내고 있는 재환의 눈을 마주 보았다.

 

"나도 그래, 재환아. 항상 네가 서울의 험악한 권력자들 틈에서 차가운 칼을 품고 위태롭게 싸우는 것만 같아서, 밤마다 가슴을 졸이며 뜬눈으로 지새웠어. 하지만 이제는…… 억울한 사람들의 하소연을 들으며, 이 창가에서 묵묵히 만년필을 쥐고 있는 네 뒷모습을 언제든 올려다볼 수 있잖아. 그게 나한테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안식이 되는지 몰라."

 

지유는 품속에서 정갈하게 접힌 하얀 면 손수건을 꺼냈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 처마 밑에서 재환의 젖은 얼굴을 닦아주었고, 재환이 서울로 강제 압송되던 날 서로의 손을 묶어주었던 그 온기의 손수건이었다.

 

지유는 그 손수건으로 평상 탁자 위에 놓인 만년필 스탠드 주변의 가느다란 나무 부스러기를 정성스레 쓸어내렸다.

 

"이 만년필…… 이제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 감옥에 가두는 날카로운 창이 아니라, 억울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지켜주는 따뜻한 방패로 쓰는 거지?"

 

"그래. 약자의 약속을 지키는 가장 단단한 방패로 쓸 거야."

 

재환이 만년필을 쥐고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깊은 흑청색 옻칠 위로 아침 햇살이 스며들며 은은하고 성스러운 빛을 발했다.

 

바로 그 평화로운 순간, 계단 아래에서 다급하고 거친 흙발 소리가 정적을 깨뜨리며 솟구쳐 올랐다.

 

쿵, 쿵, 쿵, 쿵!

 

4. 지리산에서 온 비명

 

"성 변호사님! 성 변호사님, 계십니까요!"

 

숨이 턱 끝까지 헐떡이며 넘어가는 처절한 비명이었다.

 

삐걱거리는 계단 문을 부서질 듯 박차고 뛰어 올라온 이는, 어제저녁 어스름에 찾아왔던 산내면 우포리 농민 대책위원장, 오씨 노인이었다.

 

노인이 신고 있는 무릎까지 올라오는 낡은 고무장화에는 지리산 비탈길의 붉은 황토진흙이 덩어리째 엉겨 붙어 있었다.

 

주름진 얼굴은 허연 흙먼지와 비 오듯 쏟아지는 식은땀으로 엉망진창이었고, 굳은살 박인 거친 손은 사시나무 떨듯 격렬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어르신! 진정하십시오. 무슨 일입니까?"

 

재환이 황급히 다가가 휘청거리는 노인의 겨드랑이를 단단히 부축했다.

 

지유 역시 사색이 되어 평상 위로 달려가 따뜻한 둥굴레차를 대접에 가득 따라 노인의 떨리는 손에 쥐여주었다.

 

"그…… 그 천벌을 받을 놈들이…… 깡패 놈들이 벌써 불도저를 끌고 마을로 쳐들어왔소!"

 

노인은 찻물을 절반이나 바닥에 쏟아내며 오열하듯 말을 토해냈다.

 

"오늘 아침 열 시에 온다더니…… 순 거짓말이었소! 아침 여덟 시도 안 돼서 덤프트럭 두 대랑 시커먼 쇠 바가지를 단 대형 포클레인을 앞세우고 들이닥쳤소! 마을 어귀에서 칠순 넘은 노인네들이 맨몸으로 길바닥에 드러누웠는데…… 그 인정머리 없는 용역 놈들이 쇠 파이프를 휘두르며 노인네들을 도랑창으로 내던지고…… 그 흉측한 쇠 바가지로 머리통을 짓이겨버릴 것처럼 위협하면서 우리 집 감나무 밭이랑 다랭이논 둑을 벌써 절반이나 무참하게 파헤쳐 놨소! 경찰에 살려달라고 몇 번을 신고를 해도…… 산내파출소 순경 놈들은 사유지 권리 분쟁이라 경찰이 개입할 수 없는 민사 문제라면서 얼굴조차 안 비치고 있소!"

 

노인이 끝내 다리에 힘이 풀려 마루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제 가슴을 쾅쾅 내리쳤다.

 

"강태석 시장이 감옥에 처박혔다 해서 이제야 우리 같은 백성들도 두 다리 뻗고 살겠구나 싶었는데…… 그 밑에서 피 빨아먹던 토건 조폭 놈들이 남은 땅을 홀라당 팔아치우고 도망치겠다고 우리 목줄을 조르고 있소!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논밭이 저 불도저 바가지에 다 뭉개지면…… 우리 마을 마흔두 가구는 올겨울에 굶어 죽을 수밖에 없소! 변호사님, 제발…… 제발 우리 우포리 사람들 좀 살려주시오!"

 

노인의 이마가 차가운 소나무 평상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닿았다.

 

땅을 치는 피맺힌 절규가 사무실의 공기를 무겁고 시리게 짓눌렀다.

 

그 순간, 골목에 떡을 돌리고 올라오던 민재와 하은도 계단 문간에 굳은 채 얼어붙었다.

 

"이 파렴치한 자식들…… 강태석이 징역을 살러 가니까 이제는 대놓고 깡패 짓을 벌여?"

 

민재가 이를 악물며 어깨에 멘 카메라 가방 끈을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재환의 두 눈이 서서히, 그러나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과거 검찰 취조실에서 피의자를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던 서슬 퍼런 살기가 아니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심연처럼 고요하면서도, 그 어떤 폭압과 불의 앞에서도 절대 물러서지 않을 사법 정의의 단단한 분노였다.

 

"어르신, 일어나십시오."

 

재환이 허리를 숙여 노인의 어깨를 감싸 쥐고 힘주어 일으켜 세웠다.

 

그의 손길은 한없이 다정했으나, 실려 있는 힘은 바위처럼 묵직했다.

 

"이 사무실에 들어오신 이상, 흙 묻은 신발이라 해서 바닥에 엎드리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정당하게 땀 흘려 농사지은 어르신들이 왜 무릎을 꿇습니까? 무릎을 꿇고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자들은, 저 바깥에서 남의 터전을 힘으로 짓밟고 있는 불법 용역들입니다."

 

재환은 곧장 평상 탁자로 성큼성큼 걸어가 두툼한 민사소송법전과 소송 서식 바인더를 단숨에 펼쳤다.

 

"민재야."

 

"말해, 재환아."

 

"카메라 챙겨라. 필름 넉넉하게 넣고, 남원경찰서장실 직통 유선 번호랑 전주지법 남원지원 당직실 번호 즉시 다이얼 돌릴 준비 해."

 

"외우고 있다. 셔터 박살 날 때까지 현장 싹 다 찍어 누를 테니까 걱정 마."

 

재환은 이어 문간에 서 있는 하은을 향해 단호하게 시선을 돌렸다.

 

"하은 씨, 지금 즉시 오토바이를 타고 남원지원 민원실로 가주십시오. 문성현 부장판사님 집무실 부속실에 연락을 취해, 대검 특임팀장 출신 성재환 변호사가 '민사소송법 제300조에 따른 공사중지 및 통행방해금지 가처분 신청서'와 '형법상 특수공무집행방해 및 업무방해 고소장'을 직접 들고 청사로 출발한다고 긴급 보고를 넣어주십시오. 법원이 가처분 결정을 머뭇거리는 1분 1초 사이에 힘없는 농민들의 목숨이 위태롭다고 전하십시오."

 

하은이 결연한 눈빛으로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성 변호사님! 십 분 안에 법원 문 부수고 들어가서 판사님 방에 소식 넣을게요!"

 

하은이 바람처럼 돌아사 계단을 번개같이 뛰어내려 갔다.

 

잠시 후 골목 밖에서 요란한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굉음을 내며 멀어져 갔다.

 

재환은 각인 만년필의 캡을 묵직하게 비틀어 열었다.

 

금빛 찬란한 펜촉이 지유의 흑청색 잉크병 속으로 깊숙이 잠겼다가 올라왔다.

 

순백의 백지 위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날카로운 획들이 번개처럼 내리꽂혔다.

 

'공사중지가처분신청서'.

 

'신청인: 전북 남원군 산내면 우포리 주민 대책위원회 대표 오태석 외 42인'.

 

'피신청인: 주식회사 지리산관광개발 대표이사 조상태의 대리인 박진철 외 3인'.

 

사각, 사각, 사각.

 

펜촉이 질긴 백지를 거침없이 파고드는 소리가 사무실 안을 팽팽한 전장의 기운으로 가득 채웠다.

 

재환의 법리 구성은 빈틈이 없었다.

 

어젯밤 새벽까지 치밀하게 검토해 둔 폐쇄 등기부등본의 맹점, 1993년 관군 합동 개발 당시 위조된 농민들의 백지위임장, 그리고 강태석 일파가 은닉 자산을 처분하기 위해 급조한 페이퍼 컴퍼니의 자금 세탁 정황이 논리정연한 사법의 칼날로 엮여 들어갔다.

 

'피신청인들의 작태는 형사재판 확정판결을 앞둔 범죄 은닉 재산의 불법적인 처분 행위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헌법 제121조가 천명한 경자유전의 원칙과 농민들의 생존권을 물리적 폭력으로 짓밟는 중대한 불법 침탈 행위인바, 본안 판결 선고 시까지 일체의 중장비 진입, 굴착, 수목 벌채 및 통행 방해 행위를 즉각 금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마침내 결론을 맺은 재환은 신청인 대리인 란에 자신의 이름을 서슬 퍼렇게 새겨 넣었다.

 

'신청인들의 소송대리인 변호사 성재환'.

 

붉은 인주를 묻힌 개인 인장이 종이 위에 묵직하게 찍혔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사법 정의의 방패가 완성되었다.

 

5. 첫 번째 출진

 

완성된 가처분 신청서와 증거 서류철을 가죽 가방에 쓸어 담은 재환이 벽에 걸려 있던 감색 재킷을 걸쳐 입었다.

 

지유가 곁으로 다가와 구겨진 재킷 깃을 부드러운 손길로 바로잡아 주었다.

 

그녀의 깊은 눈동자에는 불안이나 두려움의 그림자는 조금도 없었다.

 

오직 흔들림 없는 절대적인 믿음과 숭고한 응원만이 맑게 차올라 있었다.

 

"재환아."

 

"응, 지유야."

 

"다치지 말고, 조심해서 다녀와. 그리고…… 우포리 어르신들의 눈물, 꼭 닦아주고 와."

 

지유의 눈동자에 7년 전 봄날, 오작교 위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던 그 순결한 약속의 빛이 다시금 반짝였다.

 

재환이 희미하지만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지유의 이마를 가만히 짚었다.

 

"금방 다녀올게. 저 창문 활짝 열어두고 있어. 법원에서 가처분 결정문 받아내고 우포리 불도저 멈춰 세운 뒤에, 돌아오자마자 저 창가로 제일 먼저 손 흔들 테니까."

 

"응. 어르신들 모시고 오면 다 같이 먹을 수 있게, 따뜻한 멸치장국 한 솥 가득 끓여놓고 기다릴게."

 

재환은 눈물을 훔치는 오씨 노인의 손을 단단히 붙잡고 삐걱거리는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섰다.

 

골목 밖으로 나서자, 눈부시게 푸른 가을 하늘 아래 남원 구도심의 이웃들이 길 양편으로 웅성거리며 모여 서 있었다.

 

공설 방앗간 배 씨 아주머니, 동문 청과물 김 씨 아저씨, 우체국 집배원 박 씨, 그리고 포목점 노인들까지.

 

그들의 손에는 하은이 조금 전 나누어준 시루떡 접시가 들려 있었다.

 

"성 변호사님! 우포리 소식 들었소!"

 

배 씨 아주머니가 고춧가루 묻은 앞치마를 털어내며 목청을 돋우었다.

 

"그 피도 눈물도 없는 토건 깡패 놈들, 시장 놈이 징역 살러 끌려가니까 이제는 산골짜기 순진한 농민들 고혈을 짜내려고 발악을 떠네! 변호사님, 우리 방앗간 배달 트럭이랑 청과물 용달차 다 끌고 우포리로 따라갈까요? 그 망할 놈의 포클레인 앞을 우리가 트럭으로 틀어막아 버릴 테니까!"

 

"맞아요! 삼거리 김밥집 부수러 용역들 쳐들어왔을 때도 우리가 꽹과리 치고 인간 띠 만들어서 막아냈는데, 우포리라고 못 갈 거 뭐 있소! 당장 시동 걸까요?"

 

청과물 김 씨 아저씨도 몽둥이를 치켜들 기세로 거들었다.

 

남원 시민들의 마음속에는 이미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거대한 정의의 방파제가 세워져 있었다.

 

권력의 폭압 앞에 숨죽이고 눈치를 보던 과거의 남원이 결코 아니었다.

 

재환이 걸음을 멈추고 모여선 이웃들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르신들, 아주머니,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번 싸움은 몽둥이나 트럭을 앞세우지 않으셔도 됩니다. 법이라는 것이 힘 있는 자들의 지배 도구가 아니라, 피땀 흘려 정직하게 살아가는 약자들을 지키는 굳건한 약속이라는 사실을 제가 법정에서 똑똑히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저를 믿고 가게를 지켜주십시오. 우포리 어르신들의 땅을 온전히 지켜내고 당당하게 돌아오겠습니다."

 

재환의 차분하면서도 서슬 퍼런 확신에 찬 목소리에 상인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리며 박수를 보냈다.

 

골목 어귀에서 미리 시동을 걸어두고 기다리던 최민재의 낡은 르망 승용차가 요란한 배기음을 토해냈다.

 

재환과 오씨 노인이 서둘러 차에 올라탔다.

 

차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는 찰나, 재환은 룸미러를 통해 2층 사무실 창가를 올려다보았다.

 

활짝 열린 창가에 선 지유가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 사이로 하얀 면 손수건을 높이 쳐들고 힘차게 흔들고 있었다.

 

그 손수건의 순백색 빛깔이 아침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였다.

 

벽돌 벽에 걸린 소박한 '성재환 법률사무소'라는 나무 간판과, 맞은편 김밥집 처마 밑의 '끝까지 남은 사랑' 간판이 서로를 굳건히 응시하며 서 있었다.

 

자동차가 요천 둑길의 푸른 물결을 끼고 지리산 산내면 우포리를 향해 거침없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남원의 눈부신 가을 하늘 아래, 약자를 지키기 위해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은 공익 변호사 성재환의 숭고한 첫 번째 출진이 장엄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