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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106화

돌아온 사람의 대답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어둠을 가르는 호통

 

자정을 갓 넘긴 시각, 남원 동문 우체국 뒷골목은 얼어붙은 듯 적막했다.

 

가로등 불빛조차 닿지 않는 삼거리 김밥집 맞은편 낡은 기와집 처마 밑 어둠 속에서, 낮게 웅얼거리는 무전기 잡음이 새어 나왔다.

 

"……타깃은 점포 내에 혼자 있다. 불은 꺼졌으나 안쪽 단칸방에 희미한 그림자가 보인다. 차량 접근 신호 주면 즉시 진입해 끌어낸다. 성재환 그놈이 서울에서 더 날뛰지 못하게 확실한 목줄을 채운다."

 

검은 야구모자를 깊게 눌러쓴 사내의 손에 묵직한 쇠파이프와 가죽 장갑이 쥐여 있었다.

 

그의 옆에 웅크린 또 다른 사내는 품속에서 접이식 칼을 만지작거리며 비열한 미소를 흘렸다.

 

그들이 김밥집의 닫힌 미닫이문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떼려던 찰나였다.

 

골목 어귀를 가득 메우며 서늘한 엔진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둠을 단숨에 찢어발기는 새하얀 상향등 두 줄기가 골목 벽면과 두 사내의 전신을 대낮처럼 환하게 비추었다.

 

"뭐, 뭐야!"

 

사내들이 갑작스러운 강광에 눈을 찌푸리며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끼이익―!

 

날카로운 마찰음을 내며 멈춰 선 차량은 흙탕물을 뒤집어쓴 짙은 감색 세단이었다.

 

앞 범퍼와 보닛에는 방금 고속도로를 시속 백육십 킬로미터로 질주해 내려온 듯 굵은 빗물과 진흙 범벅이 말라붙어 있었다.

 

운전석 문이 거칠게 열렸다.

 

차에서 내린 남자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친 짙은 감색 정장 차림이었다.

 

그의 서늘한 눈빛에는 핏발이 서려 있었고, 양손에는 서류가방 대신 날카로운 분노가 서려 있었다.

 

성재환이었다.

 

"누구 허락을 받고 남의 집 앞을 기웃거리는 거냐."

 

낮게 깔린 목소리가 골목의 찬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사내들은 본능적으로 마른침을 삼키며 뒷걸음질을 쳤다.

 

"성…… 성재환 검사?"

 

"당신이 왜 벌써 여기에 있어? 서울고검에 있어야 할 놈이……!"

 

재환은 대답 대신 단정한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가로등 불빛 아래 드러난 그의 뺨에는 서늘한 밤바람과 식지 않은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재환의 품 안쪽 주머니에서 묵직한 공무원증과 긴급체포영장 서류철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울에서 네놈들의 목줄을 쥔 상관들은 이미 바닥에 대가리를 박고 있다. 여당 대선 캠프 브로커든, 청와대 하수인이든 상관없다. 내 구역에서 누구를 감히 건드리려 드느냐."

 

사내 하나가 기겁하며 품속의 흉기를 꺼내 휘두르려 했다.

 

그러나 재환의 움직임이 한발 더 빨랐다.

 

재환은 망설임 없이 전진하여 사내의 손목을 낚아채 비틀었다.

 

뚝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칼이 아스팔트 바닥으로 떨어지며 쨍그랑 맑은 파열음을 냈다.

 

재환은 비틀거리는 사내의 멱살을 그대로 틀어쥐고 골목 벽면에 사정없이 처박았다.

 

쿵―!

 

"크악……!"

 

"너희는 오늘 밤 나를 잘못 건드렸다. 특수약취유인 예비 및 흉기소지,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 위반이다. 네놈들이 남원 땅을 살아서 걸어 나갈 수 있을 것 같으냐."

 

재환의 서슬 퍼런 눈동자를 마주한 사내는 숨이 턱 막힌 듯 파랗게 질려 사시나무 떨듯 떨기 시작했다.

 

그때 골목 뒤편에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리며 남원경찰서 순찰차 두 대가 골목 양쪽을 완벽히 포위했다.

 

차에서 뛰어내린 형사들이 나머지 한 놈을 바닥에 내리누르며 차가운 쇠 수갑을 채웠다.

 

"성 주임검사님! 연락받고 즉시 출동했습니다!"

 

형사의 보고에 재환은 벽에 처박아두었던 사내의 멱살을 털어내듯 놓아주었다.

 

"남원지청 당직실로 인치하고, 소지품 전부 압수해 통화 기록 털어내세요. 서울 대선 캠프 연락망이 나올 겁니다. 단 한 놈도 놓치지 말고 배후까지 엮어 넣으세요."

 

"예! 알겠습니다!"

 

경찰들이 혼비백산한 괴한들을 순찰차 뒷좌석에 쑤셔 넣고 경광등을 번쩍이며 떠나갔다.

 

골목에는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2. 밤안개 속의 불빛

 

사이렌 소리가 멀어지자, 골목은 다시 깊은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재환은 헐떡이는 숨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가게 처마 밑, 지리산 육송으로 정갈하게 깎아 만든 새 간판이 은은한 가로등 불빛을 받고 있었다.

 

'끝까지 남은 사랑.'

 

자신이 지유의 흑청색 잉크로 직접 종이에 적어주었던 글씨를 본떠 목공소 윤 씨가 새겨 넣은 그 문구가, 어둠 속에서 유독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간판 아래, 굳게 닫혀 있던 삼거리 김밥집의 미닫이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드르륵―.

 

소음과 사이렌 소리에 잠에서 깬 지유가 문틈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수수한 옥색 면 원피스 차림에 하얀 앞치마를 두른 지유는, 골목길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재환의 모습을 발견하고 굳어버렸다.

 

"재환아……?"

 

지유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렸다.

 

불과 서너 시간 전, 피눈물을 삼키며 서울로 떠나보냈던 사람이었다.

 

라디오 긴급 속보에서는 그가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검찰청을 급습해 거악의 병보석 음모를 분쇄했다는 소식이 흘러나왔었다.

 

그런 그가 지금, 서울에서 삼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이곳 남원 골목길에 홀로 서 있었다.

 

구두코에는 흙먼지가 하얗게 앉아 있었고, 넥타이는 삐뚤어졌으며, 정장 어깨 위에는 고속도로의 밤안개와 이슬이 축축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지유야."

 

재환이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지유는 꿈이 아님을 깨달았다.

 

지유는 슬리퍼도 제대로 꿰어 신지 못한 채 문지방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타박타박, 차가운 아스팔트 위를 내달리는 발소리가 골목의 정적을 깨뜨렸다.

 

재환은 다가오는 지유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지유가 멈춰 서기도 전에, 재환의 단단하고 긴 팔이 지유의 어깨와 등을 와락 끌어안았다.

 

와락―.

 

거칠고 뜨거운 숨결이 지유의 귓가를 스쳤다.

 

재환의 가슴팍에 얼굴이 파묻힌 지유는,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언제나 차갑고 단정하던 검사 성재환이 아니었다.

 

오직 한 사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짓눌려 온 힘을 다해 밤길을 찢고 달려온, 한 남자의 처절한 온기였다.

 

"다친 데는 없어? 괜찮은 거야?"

 

재환의 목소리가 짓물린 듯 갈라져 있었다.

 

그는 지유의 등을 단단히 껴안은 채, 혹시라도 그녀가 상처를 입었을까 봐 떨리는 손으로 지유의 어깨를 매만졌다.

 

지유는 그의 품 안에서 고개를 저었다.

 

"응…… 난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어. 그런데 넌…… 넌 어떻게 된 거야? 서울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여기 있는 거야?"

 

지유의 눈가에 순식간에 굵은 눈물방울이 맺혔다.

 

그녀는 재환의 가슴을 살짝 밀어내며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초췌하게 야윈 뺨, 붉게 충혈된 눈, 굳게 다문 입술.

 

그 모든 것이 그가 얼마나 무모하고 필사적으로 달려왔는지를 웅변하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들었어. 서울고검 공판부장을 체포하고 대검 특임팀장이 되었다고……. 나라 전체가 네 이름으로 뒤흔들리고 있는데, 거길 비워두고 왜 남원으로 내려온 거야? 너 이러다 큰일 나면 어쩌려고……!"

 

지유의 질책 섞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재환의 앞날을 위해, 그가 짊어진 정의라는 무거운 짐을 위해 자신의 외로움 따위는 몇 번이고 삼켜낼 준비가 되어 있던 그녀였다.

 

그렇기에 그의 이 무모한 귀환이 벅차도록 고마우면서도, 가슴이 찢어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3. 돌아온 사람의 대답

 

재환은 말없이 지유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훔쳐냈다.

 

그의 손끝은 밤바람에 차갑게 식어 있었지만, 지유의 살갗에 닿는 온기는 더없이 다정했다.

 

재환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서울고검 공판부장실을 엎어버리고, 그놈들이 쥐고 있던 허위 진단서와 뇌물 장부를 전부 압수했다. 강태석의 병보석 청구서는 내 손으로 찢어발겼어. 그놈은 이제 휠체어를 타고 법원을 빠져나갈 꿈도 꾸지 못할 거다."

 

"그럼…… 거기서 수사를 마무리해야지. 대검 중수부에서 널 찾을 텐데……."

 

지유가 울먹이며 말하자, 재환은 품 안쪽에서 물건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바로 몇 시간 전, 지유가 그의 가슴팍 안주머니에 정성스레 꽂아주었던 물건들이었다.

 

단정한 하얀 손수건에 소중히 싸인 검은 옻칠 만년필.

 

그리고 지유의 정성이 담긴 흑청색 잉크병이었다.

 

재환은 손수건을 펼쳐 지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 캡 상단에 새겨진 문구가 가로등 불빛 아래 은은하게 빛났다.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재환이 지유의 눈을 깊게 들여다보며, 단호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유야. 네가 나한테 그랬지. 더 넓은 세상으로 가서, 더 큰 거악을 무릎 꿇리고 오라고. 하지만 난 말이다."

 

재환의 목소리가 골목길의 잔잔한 공기를 흔들었다.

 

"내가 서울로 갔던 것은 돌아오기 위함이었지, 다시 떠나기 위함이 아니었다."

 

지유의 숨이 멎었다.

 

재환은 지유의 손을 꼭 쥐며 말을 이었다.

 

"거악을 단죄하고 법을 바로 세우는 것은 검사로서의 책무다. 하지만 내가 그 험한 길을 걷고, 칼날 같은 법전을 외우고, 피를 흘려가며 버텨온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어. 너와 내가 살아가는 이 작은 골목길, 매일 정직하게 김밥을 말고 땀 흘려 일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재환의 눈빛에 흔들림 없는 확신이 차올랐다.

 

"남원에 네가 있고, 우리가 지켜낸 이 작은 터전이 있는데…… 내가 서울의 높은 빌딩 숲에서 무엇을 위해 권력을 쥐고 앉아 있겠니. 서울의 대검찰청 특임팀장 자리도, 대검 중수부의 화려한 요직도 내 자리가 아니다. 내 자리는 바로 여기, 네 곁이다."

 

지유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둑이 터지듯 무너져 내렸다.

 

7년 전, 서울행 기차에 실려 강제로 떠나야 했던 열여덟의 소년.

 

그리고 그 소년을 기다리며 피 흘리는 무릎으로 톨게이트를 달리던 소녀.

 

두 사람을 갈라놓았던 것은 가문의 죄악과 거대한 권력의 폭압이었다.

 

그러나 지금, 청년이 된 성재환은 그 누구의 강요도 아닌 자신의 의지로, 세상의 모든 영화와 출세를 팽개치고 오직 그녀를 향해 돌아왔다.

 

"재환아……."

 

지유는 참지 못하고 재환의 품으로 다시 파고들었다.

 

재환은 지유를 부서질 듯 힘껏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체온이 차가운 밤안개를 흩뿌리며 골목길을 가득 채웠다.

 

지유의 어깨가 들썩이며 쏟아내는 눈물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기나긴 인내와 고통의 세월이 마침내 완벽한 구원으로 마침표를 찍는 안도의 오열이었다.

 

4. 닫힌 문 안의 온기

 

재환은 지유의 어깨를 감싸 안고 김밥집 안으로 들어섰다.

 

드르륵, 미닫이문이 닫히며 골목의 서늘한 바람이 차단되었다.

 

가게 안은 온통 따뜻하고 구수한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지리산 편백나무로 새로 짠 조리대와 선반, 그리고 낮에 이웃들이 칠해준 단정한 크림색 벽면이 주황빛 백열전구 아래서 아늑하게 빛나고 있었다.

 

"발 시려웠겠다. 얼른 방으로 들어가자."

 

지유가 젖은 눈가를 훔치며 재환을 안쪽 단칸방으로 이끌었다.

 

방바닥은 지유가 밤새 온기를 유지해 둔 덕에 따스했다.

 

재환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서울에서부터 쉬지 않고 달려온 피로가 온몸의 관절마다 묵직하게 밀려왔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지난 몇 년간 한 번도 찾아볼 수 없었던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다.

 

지유는 부엌으로 나가 작은 주전자에 보리차를 끓였다.

 

타닥타닥, 가스레인지 불꽃 위에서 주전자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잠시 후, 지유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도자기 찻잔 두 개와 하얀 접시를 들고 들어왔다.

 

접시 위에는 지유가 저녁에 정성스레 말아둔 따뜻한 김밥 한 줄이 정갈하게 썰려 놓여 있었다.

 

단무지와 시금치, 잘게 볶은 당근과 계란 지단, 그리고 공설 방앗간 배 씨 아주머니가 짜준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저녁도 안 먹고 달려왔지? 얼른 이것부터 먹어."

 

지유가 찻잔과 젓가락을 건넸다.

 

재환은 김밥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소박하고 정직한 맛에, 재환의 목구멍이 찌르르하게 울렸다.

 

권력자들의 화려한 만찬이나 서울의 값비싼 음식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순결한 맛이었다.

 

어머니 박순례가 남긴 정직함과, 지유가 7년간 눈물로 지켜낸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맛있어. 정말…… 눈물 나게 맛있다."

 

재환의 말에 지유가 찻잔을 쥐고 희미하게 웃었다.

 

"어머니가 가르쳐준 대로만 말았어. 밥알에 소금 간을 세게 하지 않고, 참기름만 정직하게 둘렀지."

 

재환은 찻잔을 들어 따뜻한 보리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가웠던 속이 훈훈하게 풀려나갔다.

 

방 한구석, 지유의 작은 책상 위에는 성호석 전 차관이 무릎 꿇고 건넸던 '토지 원상회복 증서'와 '공익 재단 신탁서', 그리고 문성현 판사의 판결문 정본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7년 전 재환이 신림동에서 보냈던 관제엽서와 지유가 차마 부치지 못했던 편지들이 담긴 낡은 양철 상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모든 비극의 파편들이, 마침내 이곳에서 안식을 찾은 채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5. 법복을 벗는 결심

 

지유는 조용히 김밥을 먹는 재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 단정한 눈썹, 그리고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재환아. 그런데…… 대검 특임팀장은 어떻게 되는 거야? 정말 이렇게 남원으로 내려와도 괜찮은 거야? 서울에서는 널 가만두지 않을 텐데……."

 

재환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지유의 손을 가만히 감싸 쥐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한 점의 망설임도 없었다.

 

"새벽에 서울고검을 급습하기 전, 정종길 중수부장님께 사직서를 제출하고 왔다."

 

지유의 눈이 크게 뜨였다.

 

"사직서……? 검사직을 그만두겠다고?"

 

"응."

 

재환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중수부장님은 펄쩍 뛰셨지. 이 수사만 성공적으로 끝내면 검찰 역사상 최연소 부장, 차장 자리가 보장된다고. 대검 특임수사팀장 명의로 여당 대선 자금 게이트를 파헤치면 넌 국민적 영웅이 될 거라고 하셨어."

 

"그런데 왜……."

 

"그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니니까."

 

재환이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권력형 비리를 파헤치는 일은 다른 훌륭하고 강직한 특수부 검사들이 이어받을 거다. 내가 수집한 140억 원대 비자금 원부와 스위스 계좌 거래 내역, 그리고 권진태 공판부장의 뇌물 증거까지 완벽하게 편철해서 수사팀에 넘겨주었어. 이제 판은 짜였고, 그들은 법의 심판을 피할 수 없어."

 

재환의 시선이 지유의 손등에 머물렀다.

 

"하지만 지유야. 내가 그 높은 검찰청 청사 안에 갇혀 있는 동안, 이 남원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지? 시장이라는 자가 법을 무기 삼아 너희 모녀를 짓밟았고, 조폭들이 쇠파이프를 휘둘렀으며, 소방법과 세무조사가 가난한 상인들의 목을 죄었다. 그리고 오늘 밤에도…… 서울의 권력자들이 보낸 사냥개들이 네 목숨을 노리고 이 골목길까지 침입했어."

 

재환의 목소리에 묵직한 무게가 실렸다.

 

"법이 권력자의 손에 들어가면 무자비한 칼이 되지만, 힘없는 자들의 손에 쥐어지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패가 된다. 그걸 깨닫게 해준 건 법전이 아니라, 바로 너였어."

 

재환은 방 한구석에 놓인 옻칠 만년필을 바라보았다.

 

"난 검찰의 칼이 되어 권력의 정점에 서는 것보다, 이곳 남원에 남아 짓밟히는 사람들의 방패가 되어주고 싶다. 공권력에 억울하게 당하고도 하소연할 곳 없는 사람들, 법을 몰라 평생 일군 터전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영세 상인들과 농민들…… 그들의 손을 잡아주는 변호사가 될 거다."

 

지유는 숨을 죽인 채 재환의 말을 들었다.

 

검사 성재환.

 

모두가 우러러보는 권력의 칼날을 쥐고 세상을 호령할 수 있는 그가, 스스로 그 화려한 법복을 벗어 던지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오직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곁바람을 막아주는 작은 울타리가 되기 위해서.

 

"후회하지 않겠어?"

 

지유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 평생의 노력이 담긴 자리잖아. 신림동 고시촌 세 평 방에서 뼈를 깎아가며 얻어낸 검사 자리잖아."

 

재환이 지유의 눈을 바라보며 맑게 웃었다.

 

"내 평생의 노력은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니었어. 너를 지키고, 남원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지. 그리고 그 약속은 이미 지켜졌다."

 

재환의 손이 지유의 뺨을 다정하게 감싸 안았다.

 

"남원에 남아 너와 함께 밥을 먹고, 요천 둑길을 걷고, 억울한 이웃들의 법률 서류를 써주는 삶…… 그것이 내가 꿈꾸는 진짜 정의이자 내 남은 삶이다."

 

지유의 눈에서 다시 한번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번에는 슬픔도, 아픔도 아닌 온전한 환희와 존경의 눈물이었다.

 

그녀는 재환의 손바닥에 얼굴을 기대며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뜻이 그렇다면, 난 네 결정을 온 마음으로 지지할래. 네가 검사든, 작은 시골 변호사든 상관없어. 넌 나에게 언제나 약속을 지키러 돌아온 성재환이니까."

 

6. 새벽빛이 내리는 골목

 

단칸방의 작은 창문 틈으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둠이 서서히 물러가며, 남원 시내의 지붕들이 맑은 가을 하늘 아래 제 모습을 드러냈다.

 

밤새 긴장했던 몸이 풀린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요천 쪽에서 불어오는 청량한 새벽바람에 처마 끝 놋쇠 풍경이 딸랑딸랑 맑은 소리를 냈다.

 

재환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창밖 맞은편을 가리켰다.

 

"지유야, 저기 보여?"

 

김밥집 바로 맞은편, 골목 모퉁이에 자리한 낡은 2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이 보였다.

 

예전에 작은 한약방과 복덕방이 입주해 있다가 오랫동안 비어 있던 아담한 건물이었다.

 

2층에는 커다란 창문이 나 있어, 바로 아래 삼거리 김밥집의 처마와 마당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위치였다.

 

"저 건물 2층…… 아버지가 남겨주신 공익 신탁 기금으로 정리해 둔 곳이야."

 

재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에 작은 사무실을 낼 생각이다. 문턱이 낮아서 누구나 편하게 문을 두드릴 수 있는 곳. 돈이 없어도 억울한 사연만 들고 오면 차 한잔 마시며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그런 곳 말이다."

 

지유가 창밖의 건물을 바라보며 가슴 벅찬 미소를 지었다.

 

"사무실 간판은 뭐라고 걸 건데?"

 

재환은 지유의 손을 꼭 쥐며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글쎄…… '성재환 법률사무소'라고 단정하게 걸어야겠지. 그리고 창문 바로 아래에는 '삼거리 김밥집 맞은편'이라고 작게 써 붙일까 봐."

 

"뭐야, 그게."

 

지유가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오랜 세월 동안 그녀의 얼굴을 짓누르고 있던 그늘이 완전히 걷히고, 열여덟 벚꽃 날리던 봄날 광한루원에서 재환을 바라보며 수줍게 웃던 그 순수한 소녀의 웃음이 완벽하게 되살아나 있었다.

 

재환은 그 웃음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탁자 위에 놓인 각인 만년필에 새벽 햇살이 비쳐 금빛으로 일렁였다.

 

'Fiat justitia, ruat caelum.'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그 법언은 이제 권력을 단죄하는 서슬 퍼런 칼날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지탱하는 따뜻한 서약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7. 약속의 증표

 

아침 해가 지평선 위로 완전히 솟아오르자, 골목길은 활기찬 아침의 기운으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 멀리 동문 우체국 쪽에서 우체부 박 씨의 자전거 경적 소리가 따르릉 울렸다.

 

공설 방앗간 배 씨 아주머니가 고소한 기름 냄새를 풍기며 셔터를 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환과 지유는 나란히 문을 열고 가게 밖 평상으로 나왔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맑은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지유는 품 안에서 작은 열쇠 하나를 꺼내 재환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게 뭐야?"

 

"맞은편 2층 건물 열쇠야. 어제 윤 씨 아저씨가 건물 청소 다 끝났다면서 나한테 맡겨두고 가셨거든."

 

지유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우리, 지금 가볼래? 네가 일하게 될 새로운 자리."

 

재환은 손바닥 위의 작은 쇠 열쇠를 내려다보며 벅찬 감정을 삼켰다.

 

"그래, 가보자."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골목을 건넜다.

 

아침 햇살이 두 사람의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다정하게 감싸 안았다.

 

낡은 나무 계단을 밟고 올라가 2층 문을 열자, 시원한 아침 바람과 함께 쏟아지는 햇살이 텅 빈 실내를 가득 채웠다.

 

창문 너머로 푸른 요천 제방길과 저 멀리 지리산의 유려한 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바로 아래로 내리면, 정갈하게 새단장된 삼거리 김밥집의 크림색 지붕과 '끝까지 남은 사랑'이라는 간판이 손에 닿을 듯 선명하게 보였다.

 

재환은 창가에 서서 지유를 돌아보았다.

 

"지유야."

 

"응?"

 

"이제 아무 데도 안 가. 어떤 거대한 권력이 불러도, 어떤 화려한 명예가 유혹해도…… 난 평생 여기서 너를 지키고 남원을 지킬 거다."

 

지유는 조용히 다가가 재환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두 사람의 맞잡은 손 사이로, 7년의 세월을 견뎌낸 단단한 사랑과 불변의 신념이 눈부신 햇살 속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방황과 투쟁의 기나긴 밤을 지나, 마침내 자신의 자리로 온전히 돌아온 사람만이 건넬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대답이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