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노벨
← 목록
3x
1.0
[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102화

광한루원의 결혼식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완월정의 푸른 아침

 

초가을 남원의 아침 공기는 요천에서 불어오는 맑은 물안개를 머금어 서늘하면서도 더없이 상쾌했다.

 

광한루원(廣寒樓苑)의 정문인 청허부(淸虛府)를 지나 완월정(翫月亭) 앞마당으로 들어서자, 수백 년 묵은 팽나무 고목의 무성한 잎새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금빛 햇살이 푸른 잔디밭을 눈부시게 비추고 있었다.

 

과거 지방 토착 권력의 사리사욕과 부패한 결탁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이 유서 깊은 누원은 이제 온전히 남원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와 있었다.

 

잔디밭 한가운데에는 붉은 융단 대신 정갈한 멍석과 모시천이 길게 깔렸고, 잔디밭 양옆으로는 소박한 백목련 가지와 들국화로 엮은 꽃길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초례청 중앙에는 청실홍실로 매듭지은 목안(木雁) 한 쌍과 대추, 밤, 그리고 남원 공설 방앗간에서 갓 빻아 올린 쌀로 빚은 백설기 시루가 단정하게 차려져 있었다.

 

"야, 최민재. 너 사모관대 비뚤어졌다."

 

성재환은 단정한 감색 정장 차림으로 다가가 민재의 머리에 얹힌 사모의 끈을 조심스럽게 바로잡아 주었다.

 

손끝에 닿는 사모의 감촉 너머로 민재의 팽팽하게 굳은 어깨와 가쁜 숨결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언제나 남원 시내를 종횡무진 누비며 거악의 비리를 캐내던 날카로운 기자의 눈빛은 간데없고, 잔뜩 긴장한 새신랑의 붉어진 뺨만이 어색하게 떨리고 있었다.

 

"재환아, 진짜 나 괜찮냐? 얼굴이 너무 하얗게 질린 건 아니지? 아까 거울 보니까 꼭 취조실 끌려가는 피의자 같던데."

 

민재가 목을 가다듬으며 특유의 너스레를 떨었지만, 단령 소매 속으로 꽉 쥔 주먹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피의자가 이렇게 번듯하면 검사가 기소도 못 하겠다. 아주 멋져. 오늘 세상에서 제일 당당한 신랑이다."

 

재환이 나지막이 미소 지으며 민재의 넓은 어깨를 툭 쳤다.

 

그 짧은 다독임 속에 지난 수년간 남원의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함께 목숨을 걸고 피 흘렸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밤재 터널의 피비린내와 법정의 살벌한 공방을 함께 견뎌낸 벗이 마침내 가장 평화로운 누원 아래서 새 삶을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고맙다, 재환아. 네가 오늘 이 자리에 서 주지 않았으면, 나는 이 옷 입고도 어딘가 죄지은 사람처럼 발이 안 떨어졌을 거다."

 

민재의 목소리가 살짝 잠겼다.

 

"고마운 건 나지. 네가 남원의 진실을 펜으로 지켜내지 않았다면, 나 역시 법복을 입고 돌아오지 못했을 테니까."

 

재환은 품속에서 정갈하게 정리된 혼례 진행 카드를 꺼내 들었다.

 

만년필로 한 자 한 자 눌러쓴 식순이었다.

 

가문의 원죄를 단죄하던 그 흑청색 잉크로 쓴 글씨였지만, 오늘은 피고인을 심판하는 공소사실이 아니라 벗의 영원한 사랑과 행복을 축복하는 다정한 언어들로 채워져 있었다.

 

2. 백년가약의 초례청

 

완월정 회랑 뒤편의 임시 대기실 문이 열리고, 신부의 입장을 알리는 은은한 풍물패의 가락이 누원 가득 울려 퍼졌다.

 

순간 잔디밭을 가득 메운 백여 명의 하객들이 일제히 숨을 죽이며 고개를 돌렸다.

 

녹색 원삼에 붉은 족두리를 곱게 얹은 윤하은이 수줍은 발걸음으로 모시 길을 걸어 나오고 있었다.

 

뺨에 찍은 연지곤지가 초가을 햇살을 받아 맑게 빛났고, 그 곁에는 옥색 치마에 미색 저고리를 정갈하게 받쳐 입은 한지유가 다정하게 하은의 옷자락을 매만져 주며 곁을 지키고 있었다.

 

지유의 손에는 하은의 떨리는 손을 감싸 쥔 따뜻한 온기가 서려 있었다.

 

김밥을 말고 붉은 페인트를 지워내느라 굳은살이 박였던 그 손은 이제 그 어느 때보다 곱고 우아하게 빛나고 있었다.

 

재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지유의 얼굴에 멎었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팽나무 잎새 사이로 쏟아진 아침 햇살이 지유의 단아한 이마와 맑은 눈동자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지유 역시 고개를 들어 사회자석에 선 재환과 눈을 마주쳤다.

 

찰나의 교차였지만, 두 사람의 눈빛 속에는 7년간 겪어낸 지독한 상처와 이별, 그리고 마침내 되찾은 평온에 대한 무언의 약속이 깊게 일렁였다.

 

재환은 마이크를 잡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법정에서 거악 강태석을 향해 서슬 퍼런 추상같은 논고를 토해내던 검사의 음성이 아니라, 한없이 따뜻하고 깊은 울림을 머금은 목소리가 완월정 기둥을 타고 번져 나갔다.

 

"화창한 결실의 계절, 백년의 역사가 숨 쉬는 이곳 광한루원 완월정에서 신랑 최민재 군과 신부 윤하은 양의 전통 혼례를 거행하겠습니다."

 

하객석에서 잔잔한 박수와 함께 환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동문 우체국 집배원 박 씨, 골목길 세탁소 김 씨, 그리고 요천 제방 수해의 아픔을 함께 딛고 일어선 남원 구도심의 이웃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불과 얼마 전까지 드리워져 있던 공포와 불안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정직한 땀과 양심으로 버텨낸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의 미소가 가득했다.

 

"신랑, 신부 교배례(交拜禮)."

 

재환의 단정한 진행에 따라 민재와 하은이 초례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섰다.

 

손을 씻고 모시천 위에 무릎을 꿇은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깊고 정중하게 절을 올렸다.

 

서로의 삶을 평생 존중하고 지키겠다는 맹세였다.

 

"다음은 합근례(合巹禮) 순서입니다. 하나의 박이 둘로 나뉘었다가 다시 하나로 합쳐지는 표주박 잔처럼, 두 사람은 이제 온전히 하나가 됨을 하늘과 땅, 그리고 남원의 이웃들 앞에 서약합니다."

 

지유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표주박 잔에 맑은 청주를 따라 신랑과 신부에게 건넸다.

 

민재와 하은이 잔을 나누어 마시고 맞잡은 손을 높이 들어 올리자, 잔디밭을 둘러싼 하객들이 일제히 기립해 뜨거운 함성과 박수를 쏟아냈다.

 

"민재야, 장가 잘 갔다!"

 

"하은아, 오늘 정말 천사 같다! 행복해야 한다!"

 

완월정 지붕 너머로 가을 하늘이 드높고 푸르게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어둠이 완전히 걷힌 남원이 이 젊은 부부에게 바치는 가장 눈부신 축복이었다.

 

3. 오작교의 바람과 부케

 

전통 혼례의 정식 절차가 끝나고, 완월정 앞 잔디밭은 하객들의 웃음소리와 잔치 음식의 구수한 냄새로 활기를 띠었다.

 

남원 공설 방앗간에서 공수해 온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가을바람을 타고 퍼져 나갔고, 삼거리 김밥집에서 정성스레 준비한 잔치 떡과 전들이 평상 가득 차려졌다.

 

"자, 이제 사진 찍고 부케 던집니다! 다들 여기 보세요!"

 

동문 우체국 박 씨가 삼각대에 얹힌 낡은 필름 카메라 뒤에서 손을 흔들며 외쳤다.

 

신랑 민재와 신부 하은을 중심으로 재환과 지유, 그리고 이웃 상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섰다.

 

"하나, 둘, 셋! 춘향이처럼 활짝!"

 

철컥, 하는 기계식 셔터 소리와 함께 눈부신 플래시가 터졌다.

 

카메라 렌즈 너머로 비친 사람들의 얼굴에는 한 점의 그늘도 없었다.

 

사진 촬영이 끝나자 민재가 능글맞은 표정으로 하은의 손에 들려 있던 들국화와 흰 백합으로 엮은 부케를 가리켰다.

 

"자, 하은아. 누구한테 던질지는 이미 정해져 있지?"

 

하은이 까르르 웃으며 뒤를 돌아섰다.

 

신부 들러리로 서 있던 지유가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어머, 하은아, 난 왜…… 뒤에 다른 아가씨들도 많은데!"

 

"지유야, 딴소리하지 말고 준비나 해. 이건 처음부터 네 거였어."

 

하은이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뒤를 살짝 돌아보더니, 하나, 둘, 셋 구령과 함께 부케를 등 뒤로 높이 던져 올렸다.

 

새하얀 백합과 노란 들국화가 허공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가을 햇살 속을 날아올랐다.

 

바람에 흩날리던 꽃다발은 잔디밭에 서 있던 지유의 품 안으로 거짓말처럼 정확하게 떨어져 내렸다.

 

얼떨결에 두 손으로 꽃다발을 받아 든 지유는 가슴에 안긴 꽃들을 내려다보며 뺨을 붉혔다.

 

꽃잎에 맺힌 싱그러운 풀 냄새와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와아! 지유가 받았다! 다음은 성 검사랑 지유 차례네!"

 

"아이고, 우리 지유 시집갈 날도 머지않았구먼!"

 

주변에 둘러선 시장 상인들과 하객들이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지유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 부케 뒤로 살짝 고개를 숙였지만, 입가에 번지는 수줍고도 벅찬 미소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그 모습을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고 있던 재환의 입가에도 깊고 다정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재환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지유가 겪어야 했던 그 잔혹한 폭압의 시간들, 붉은 페인트로 물들었던 손과 눈물의 세월을 보상이라도 하듯, 오늘 꽃을 품에 안은 지유의 모습은 세상 그 무엇보다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금 허공에서 얽혀 들었다.

 

재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지유에게 무언의 확답을 보냈다.

 

'다음은, 우리 차례야.'

 

그 다정한 눈빛에 지유 역시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며 꽃다발을 더욱 소중히 품에 안았다.

 

4. 평상 위의 잔치

 

혼례 잔치는 오후 내내 완월정 그늘 아래서 흥겹게 이어졌다.

 

남원 관내의 풍물패들이 장구를 치며 흥을 돋우었고, 이웃들은 막걸리 잔을 부딪치며 서로의 무사를 축하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요천 제방 붕괴와 시장의 폭압으로 피눈물을 흘리던 남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완월정 마당은 치유와 회복의 온기로 가득 차 있었다.

 

재환과 민재는 마당 한구석 팽나무 그늘 아래 놓인 평상에 걸터앉았다.

 

민재는 사모관대를 벗고 편안한 모시 두루마기 차림으로 막걸리 사발을 들이켜고 있었다.

 

"살 것 같다. 야, 성재환. 나 아까 진짜 오줌 지릴 뻔했다. 취재할 때는 시장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 안 했는데, 하은이 얼굴 보니까 다리가 덜덜 떨리더라."

 

"잘하더라, 최 기자. 평생 그렇게 하은이한테 잡혀 살면 아무 문제 없겠다."

 

재환이 장난스럽게 잔을 채워주며 대꾸했다.

 

민재가 씩 웃으며 사발을 내려놓더니, 진지한 눈빛으로 재환을 바라보았다.

 

"재환아. 어제 서울에서 한국일보 보도국장이 직접 내려왔었어."

 

재환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중앙 일간지에서?"

 

"응. 남원 참사랑 토착 비리 단독 보도 쓴 거 보고, 사회부 정식 기자로 특별 채용하겠다고 하더라. 연봉도 남원일보 세 배는 준다면서 바로 서울 올라오라고."

 

재환은 묵묵히 민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기자로서 서울 중앙지의 러브콜은 평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출세의 기회였다.

 

민재는 완월정 너머로 유유히 흐르는 요천 물줄기를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단칼에 거절했다."

 

"……정말 후회 안 해?"

 

"후회는 무슨. 서울 가서 번드르르한 정치인들 꽁무니나 쫓아다니는 것보다, 여기서 내 손으로 이웃들 이야기 쓰고 억울한 사람들 목소리 담아내는 게 훨씬 내 체질이야. 남원에 강태석 같은 놈들이 또 안 나오리라는 법 있냐? 내가 남원일보 1면에 버티고 서서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지. 그래야 너도 남원에서 일하기 편할 거 아니냐."

 

민재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재환의 가슴 한구석이 묵직하게 차올랐다.

 

자신들이 피 흘려 지켜낸 고향, 그리고 그 곁에 남아 함께 삶을 꾸려갈 벗이 있다는 사실이 말할 수 없이 든든했다.

 

"고맙다, 민재야. 진짜 고마워."

 

"사내새끼들끼리 징그럽게 고맙다는 소리는 그만해라. 그나저나 너야말로 어쩔 셈이냐? 남원에 완전히 남기로 한 건 지유 씨한테도 다 말했지?"

 

"응. 남원지청에 남아서, 끝까지 약자들을 지키는 법을 세우겠다고 약속했어."

 

"그래, 그거면 됐다. 성재환 검사님이 남원에 버티고 계시는데 어떤 놈이 감히 허튼수작을 부리겠어."

 

두 청년은 마주 보며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5. 팽나무 그늘 아래서

 

잔치가 무르익어 하객들이 하나둘씩 돌아갈 채비를 할 무렵, 재환과 지유는 소란스러운 마당을 빠져나와 춘향관 뒤란 오솔길로 향했다.

 

수령 수백 년 된 팽나무 고목 아래는 인적이 드물고 고즈넉했다.

 

7년 전, 교복을 입은 열여덟의 소년과 소녀가 처음으로 마주쳐 비밀스러운 교감을 나누고 만년필을 주고받았던 바로 그 자리였다.

 

지유의 손에는 여전히 하은에게 받은 부케가 소중하게 쥐여 있었다.

 

팽나무의 짙은 그늘 아래 서자,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부서진 햇살이 두 사람의 발치에 모자이크처럼 아른거렸다.

 

"오늘 정말 고생 많았어, 재환아."

 

지유가 부케를 가슴에 품은 채 재환을 올려다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민재 녀석 긴장 풀어주느라 진땀 뺀 거 말고는 없지."

 

재환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지유의 손을 가만히 감싸 쥐었다.

 

꽃을 쥔 지유의 작은 손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맥박이 재환의 손바닥을 타고 심장으로 흘러들었다.

 

"지유야."

 

"응?"

 

"아까 부케 받을 때…… 무슨 생각 했어?"

 

재환의 나직한 물음에 지유의 뺨이 다시금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지유는 수줍은 듯 시선을 내리깔아 꽃잎을 매만지며 작게 속삭였다.

 

"그냥…… 엄마 생각이 났어."

 

"어머니가?"

 

"응. 엄마가 살아계셨으면, 오늘 하은이 혼례 보면서 제일 많이 우셨을 텐데. 그리고 내 손에 들린 이 꽃 보면서, '우리 지유도 이제 좋은 사람 만나서 고생 끝내야지' 하면서 웃으셨을 것 같아서."

 

지유의 눈가에 투명한 이슬이 살짝 맺혔지만,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깊은 그리움과 함께 마침내 찾아온 평안이 담긴 눈물이었다.

 

재환은 조심스럽게 다른 한 손을 들어 지유의 뺨에 맺힌 눈물방울을 엄지로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손끝에 닿는 부드러운 살결 너머로 지유가 겪어온 7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머니도 지금 하늘에서 보고 계실 거야. 환하게 웃으시면서 우리 축복해 주실 거다."

 

"응, 나도 알아."

 

지유가 고개를 들어 재환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눈빛에는 흔들림 없는 신뢰와 절대적인 사랑이 담겨 있었다.

 

재환은 품 안주머니에서 묵직한 만년필 하나를 꺼내 들었다.

 

백부에게 물려받아 가문의 규율과 숙명을 상징했던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

 

캡 상단에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이라는 라틴어가 선명하게 새겨진, 그리고 지유의 흑청색 잉크가 가득 채워져 있는 그 만년필이었다.

 

"이 만년필, 기억하지?"

 

"어떻게 잊겠어. 7년 전 네가 이 팽나무 아래 떨어뜨렸던 거잖아. 내가 주워서 하얀 손수건에 싸서 돌려줬던……."

 

"이 만년필로 남원의 거악들을 단죄하는 공소장을 썼고, 강태석에게 징역 15년을 구형하는 논고를 썼어. 그리고 우리 아버지의 죄를 기록하고 단죄하는 아픔도 이 펜으로 치러냈지."

 

재환은 만년필을 지유의 작은 손바닥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서늘한 옻칠의 감촉이 지유의 손끝에 닿았다.

 

"이제 이 펜으로 분노와 심판의 글을 쓰는 일은 끝났어. 앞으로 내가 검사로서 작성할 모든 서류는, 이 남원의 약자들을 지키고 억울한 눈물을 닦아주는 약속이 될 거야."

 

재환은 지유의 손을 꼭 쥐며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약속도, 이 펜으로 쓸 생각이야."

 

"재환아……."

 

"남원에 영원히 남겠다는 약속. 그리고 평생 네 곁에서 네 울타리가 되어주겠다는 약속. 지유야, 너만 괜찮다면…… 다음 광한루원 혼례의 주인공은, 우리 두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팽나무 잎새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일순간 멎은 듯했다.

 

지유의 커다란 눈망울에 고인 눈물이 툭 하고 떨어져 재환의 손등을 적셨다.

 

어떤 화려한 보석이나 미사여구보다 더 깊고 진실한 청혼이었다.

 

지유는 손에 쥔 만년필과 꽃다발을 가슴에 꼭 끌어안으며, 울음 섞인 미소를 지었다.

 

"응…… 응, 재환아. 나도…… 나도 그래. 평생 네 곁에 있을게."

 

재환은 지유를 와락 끌어안았다.

 

지유의 어깨를 감싸 안은 재환의 품속으로 백합의 짙은 향기와 지유의 따스한 온기가 가득 차올랐다.

 

7년 전 비극적인 이별을 고했던 광한루원의 오작교와 완월정이, 이제 두 사람의 영원한 백년가약을 축복하듯 눈부신 오후의 황금빛 햇살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6. 불청객과 검은 그림자

 

축복과 사랑의 여운이 완월정 마당에 길게 드리워지던 늦은 오후였다.

 

하객들이 대부분 돌아가고, 민재와 하은이 이웃 상인들과 함께 평상을 정리하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을 때였다.

 

광한루원 정문인 청허부 쪽에서 낯선 엔진 소리가 정적을 깨뜨리며 울려 퍼졌다.

 

끼이익.

 

검은색 그랜저 한 대가 완월정 진입로 흙길 앞에 거칠게 멈춰 섰다.

 

차량 번호판에는 '서울' 표기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최고급 관용 세단이었다.

 

재환과 지유는 팽나무 그늘에서 걸어 나오다 차가 멈춰 선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평상을 치우던 민재와 하은도 의아한 표정으로 빗자루를 멈추었다.

 

차 뒷좌석 문이 열리고, 빳빳하게 다려진 짙은 회색 줄무늬 정장을 입은 중년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테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날카롭고 차가운 눈매, 그리고 기름하게 빗어 넘긴 백발이 섞인 머리칼.

 

그의 가슴팍에는 검찰청의 상징인 봉황 문양 배지가 은은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그의 뒤를 이어 검은 서류 가방을 든 젊은 수행원 두 명이 절도 있게 차에서 내려 도열했다.

 

사내는 주위를 둘러보며 잔디밭에 흩어진 꽃잎과 초례청의 흔적을 무감각한 눈빛으로 훑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완월정 앞마당에 서 있는 성재환을 향해 다가왔다.

 

흙먼지를 밟으며 다가오는 그의 구둣발 소리가 평화롭던 마당의 공기를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재환의 눈빛이 일순간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상대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대검찰청 검찰연구관이자, 법무부 검찰국에서 인사와 기획을 총괄하는 핵심 실세인 한진우 부장검사였다.

 

서울지검 특수부 시절, 성호석 차관의 위세를 등에 업고 재환을 중앙 요직으로 끌어올리려 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오랜만이구나, 성재환 검사."

 

한진우가 재환의 코앞에 멈춰 서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결코 축하를 건네러 온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권력의 상층부에서 잔뼈가 굵은 노회한 관료 특유의 계산된 냉기가 서려 있었다.

 

"한진우 부장님. 남원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재환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단호하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미 아까 전의 다정한 청년이 아닌, 서슬 퍼런 특수부 검사의 그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한진우는 곁에 서 있는 지유와 그녀의 품에 안긴 부케를 힐끗 쳐다보더니, 혀를 쯧 차며 조소하듯 중얼거렸다.

 

"남원의 영웅 노릇에 도취되어 잔치나 즐기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말이다."

 

"용건만 간단히 말씀하십시오."

 

재환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한진우는 턱짓으로 뒤편의 수행원에게 신호를 보냈다.

 

수행원이 가죽 서류 가방을 열고, 붉은색 대외비 직인이 찍힌 두툼한 서류철 하나를 꺼내 한진우에게 건넸다.

 

서류철 표지에는 대한민국 법무부와 대검찰청의 공식 휘장이 선명하게 압인되어 있었다.

 

한진우는 서류철을 든 채 재환의 가슴팍을 툭 치듯 내밀었다.

 

"오늘 정오, 법무부 장관 결재와 청와대 재가가 최종 완료된 정식 인사 발령 통지서다."

 

완월정 마당의 모든 이들이 숨을 삼켰다.

 

민재가 미간을 찌푸리며 성큼 다가왔고, 지유는 불길한 예감에 숨을 들이쉬며 부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재환은 서류철을 받아 들지 않고 한진우의 얼굴을 묵묵히 응시했다.

 

"저는 이미 남원지청 정규 잔류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남원에 남아 관내 토착 비리 잔여 수사와 공소유지를 책임지겠다고 총장님께도 보고드렸습니다."

 

한진우가 낮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총장님? 그래, 총장님도 네 고집은 인정하셨지. 하지만 성재환, 대한민국 검찰 조직이 일개 평검사의 낭만적인 고향 지키기 놀음에 휘둘릴 만큼 한가한 곳인 줄 아느냐?"

 

한진우의 눈빛이 서슬 퍼렇게 번뜩였다.

 

"너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1과 특임연구관 및 특별수사팀장으로 전격 발령한다. 직급은 부부장 대우. 대한민국 검찰 역사상 최연소 특수수사팀장 보직이다."

 

순간 민재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대검 중수부 특임팀장.

 

그것은 대한민국 모든 검사들이 평생을 바쳐도 닿기 힘든 최고 권력의 정점이자, 살아있는 권력을 직접 벨 수 있는 사법의 심장부였다.

 

하지만 재환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거절하겠습니다. 저는 남원에 남습니다."

 

"거절? 하, 네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한진우가 한 걸음 더 다가서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압도적인 중압감이 실려 있었다.

 

"성재환. 네가 남원에서 잡아넣은 강태석은 고작 썩은 가지 하나에 불과해. 네가 강태석의 비자금 장부와 스위스 계좌를 털면서 건드려놓은 판도라의 상자가 지금 서울을 어떻게 뒤흔들고 있는지 정말 모르느냐?"

 

재환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김문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김문현뿐만이 아니야."

 

한진우가 서류철의 첫 장을 넘겨 재환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곳에는 피고인 강태석의 스위스 비밀 계좌와 지리산 별장 비자금 장부에서 파생된 거대한 계좌 추적 결과표가 빽빽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대한민국 정재계와 청와대 핵심 실세들의 이름이 붉은 펜으로 줄줄이 동그라미 쳐져 있었다.

 

"강태석의 140억 비자금은 여당 대선 경선 자금의 저수지였다. 그 돈이 흘러 들어간 종착역에 현직 부총리와 법무부 전 장관, 그리고 내각의 거물들이 줄줄이 엮여 있어. 지금 서울은 피바람이 불기 직전이다. 저들은 자신들의 목줄을 죄어오는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특수부를 해체하려 들고 있어."

 

한진우는 서류철을 덮어 재환의 가슴에 콱 박아 넣었다.

 

"이 거악의 게이트를 열어젖힌 건 바로 너야, 성재환. 네가 남원에서 쏘아 올린 탄환이 서울의 심장부를 직격했다고! 이 사건의 시작과 끝을 완벽하게 꿰뚫고 있는 검사는 대한민국에 너 하나뿐이다. 네가 올라와서 칼을 쥐지 않으면, 저 괴물들은 김문현 하나 꼬리 자르기로 털어내고 강태석마저 상고심에서 보석으로 빼내 갈 거다!"

 

'강태석을 상고심에서 빼내 간다.'

 

그 한마디가 완월정 마당에 비수처럼 내리꽂혔다.

 

지유의 낯빛이 하얗게 질려갔다.

 

7년간의 피눈물 끝에 법정에 세워 단죄했던 그 괴물이, 서울의 거대한 권력 카르텔과 결탁하여 다시 풀려날 수도 있다는 경고였다.

 

한진우는 지유를 매섭게 노려본 뒤, 다시 재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내일 아침 9시, 대검찰청 대회의실에서 정식 임명장 수여식이 열린다. 차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 지금 당장 서울로 출발해야 해."

 

바람이 거세게 불어와 팽나무 잎새를 사납게 뒤흔들었다.

 

잔디밭에 떨어져 있던 백합 꽃잎들이 어지럽게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남원에 남아 약자의 곁을 지키며 지유와의 평온한 사랑을 가꾸려 했던 재환의 맹세 앞에,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거대한 국가적 소용돌이와 사법의 숙명이 다시금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재환은 손에 쥐어진 묵직한 인사 발령 통지서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곁에서 하얗게 질린 채 자신을 떨리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한지유를 돌아보았다.

 

초가을의 눈부셨던 축복은 간데없고, 두 사람의 앞길에 또다시 거대한 운명의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