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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100화

아버지와의 화해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흙바닥 위의 무릎

 

교룡산 기슭으로 불어오는 초가을 바람은 마른 솔잎 향을 품고 있었다.

 

선산 초입의 비탈진 흙길 위에서 성호석은 미동도 없이 꿇어앉아 있었다.

 

한때 남원군수를 지내고 내무부 차관의 자리까지 올랐던 인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그의 어깨는 심하게 여위어 있었다.

 

짙은 감색 양복의 바짓무릎에는 거친 황토와 젖은 모래알이 잔뜩 엉겨 붙어 있었다.

 

그가 떨리는 두 손으로 받쳐 든 가죽 서류철의 모서리가 가느다랗게 흔들렸다.

 

지유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흙바닥에 무릎을 꿇은 성호석을 내려다보았다.

 

어머니 박순례의 흙무덤에 따뜻한 김밥과 징역 12년 판결문 정본을 올리고 내려오던 길이었다.

 

가슴속에 남아 있던 7년간의 시린 응어리가 어머니의 묘소 앞에서 비로소 풀려나간 참이었다.

 

그런 지유의 시야에 들어온 성호석의 백발은 7년 전 시장 관사의 높은 철문 너머로 얼핏 보았던 서슬 퍼런 권력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세월의 무게와 가문이 저지른 씻을 수 없는 원죄에 짓눌려 완전히 바스러진 노인의 형상이었다.

 

재환은 지유의 반 걸음 뒤에서 묵묵히 부친의 둥글게 굽은 등허리를 응시했다.

 

각인 만년필을 쥐고 법정에서 피고인 강태석의 숨통을 끊어놓던 서슬 퍼런 검사의 눈빛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한 인간으로서의 처연함과 숙연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지유야."

 

성호석의 메마른 입술 사이로 갈라진 음성이 흘러나왔다.

 

바람결에 부서지듯 희미했지만, 그 안에 담긴 자책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내 비록 네 어머니의 산소 앞까지 감히 올라갈 염치는 없어서, 여기서 기다렸다."

 

성호석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지유의 낡은 운동화 코와 자신이 꿇어앉은 차가운 흙바닥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삼십 년 전, 네 아버지 한석규 씨의 손을 잡고 동충리와 하정리 일대를 번듯한 고을로 일구자고 약속했던 사람이 바로 나였다. 하지만 강태석 그 간악한 자의 흉계와 중앙 권력의 칼날 앞에서 나는 비겁하게 눈을 감았다. 내 일신의 안위와 가문의 영달을 지키겠다는 허황된 욕심에, 네 부모가 피땀으로 일군 요천 변 비옥한 과수원 사천오백 평을 도로 부지라는 허울 좋은 구실로 강탈당하는 것을 묵인하고 도장을 찍어주었다."

 

성호석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거렸다.

 

두 손으로 쳐든 서류철 위로 투두둑 눈물방울이 떨어져 짙은 얼룩을 만들었다.

 

"그 죄가 씨앗이 되어 네 아버지를 화병으로 잃게 만들었고, 홀로 남은 네 어머니와 너를 칠 년 동안 그 지옥 같은 공포와 테러 속으로 밀어 넣었다. 내가 뿌린 죄악의 가시밭길을, 아무 죄도 없는 어린 네가 온몸으로 받아내며 피를 흘리게 했다. 내가 죽어 지하에 가더라도 네 아버지를 무슨 면목으로 뵐 것이며, 어제 저승으로 가신 네 어머니의 넋을 어찌 위로할 수 있겠느냐."

 

성호석은 들고 있던 서류철을 흙바닥에 내려놓고, 두 손을 땅에 짚은 채 이마를 흙바닥에 깊숙이 처박았다.

 

거친 자갈이 이마를 짓눌렀지만 그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납작 엎드렸다.

 

2. 참회의 증서

 

"어르신, 일어나세요."

 

지유의 담담한 목소리가 산기슭의 고요를 갈랐다.

 

성호석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이 죄인을 용서하지 말거라. 용서를 바라고 이러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이것만은 받아다오."

 

성호석이 떨리는 손으로 흙투성이가 된 서류철을 열어젖혔다.

 

누렇게 바랜 종이들이 아니라, 최근 법무사의 공증 직인과 전주지방법원 등기소의 압인이 선명하게 찍힌 깨끗한 백색 서류들이었다.

 

성호석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서류의 첫 장을 짚었다.

 

"남원읍 동충리와 하정리 일대, 삼거리 김밥집 터를 포함해 네 아버지로부터 불법 강탈되었던 사천오백 평 전답에 대한 소유권 원상회복 증서다. 강태석 명의로 묶여 있던 가압류와 근저당은 재환이가 기소하면서 국고 환수 및 몰수 보전 조치를 완료했고, 내가 중앙 정계에 있으면서 차명으로 묶어두었던 잔여 지분 일체를 네 명의로 온전히 이전하는 공증 증서다."

 

지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재환 역시 한 걸음 다가서며 부친의 손에 들린 서류를 확인했다.

 

단순한 배상 각서가 아니었다.

 

성씨 가문이 남원에 보유하고 있던 종중 소유의 토지 지분까지 전부 털어내어 한지유의 이름으로 온전히 돌려놓은, 완벽한 권리 포기 및 원상회복 합의서였다.

 

"그리고 이 뒤에 붙은 것은……."

 

성호석이 숨을 헐떡이며 다음 장을 넘겼다.

 

그의 손끝에 묻은 붉은 인주 자국이 애처롭게 번져 있었다.

 

"성북동 사저와 내 퇴직금, 성씨 일가의 잔여 부동산 일체를 처분하여 설립하기로 한 공익 재단 신탁서다. 이 서류가 발효되면 성씨 가문의 모든 사유 재산은 삼거리 일대 소외된 상인들과 수해 이재민들, 그리고 네가 남원에서 펼치고자 하는 복지 사업의 기금으로 귀속된다. 내 아들 재환이의 앞길에 가문의 피 묻은 유산이 단 한 조각도 남지 않도록, 내 손으로 가문의 모든 기득권을 끊어냈다."

 

성호석의 음성은 절규에 가까웠다.

 

자신의 삶 전체를 지탱해 오던 권력과 재산을 완전히 불태워버림으로써, 아들의 사법적 결백을 증명하고 지유 가문에 진 빚을 털어내겠다는 처절한 배수진이었다.

 

재환은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 성호석은 비정하고 냉혹한 권력관을 강요하던 군림자가 아니었다.

 

중앙 정계의 협박 속에서 아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오물을 뒤집어썼고, 마침내 아들이 장성하여 법의 칼날로 거악을 베어내자 스스로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흙바닥에 엎드린 한 가련한 아비였다.

 

지유는 조용히 무릎을 굽혔다.

 

성호석의 눈높이에 맞춰 흙길 위에 단정히 앉은 지유는, 노인의 거칠고 주름진 손 위에 자신의 작은 손을 가만히 얹었다.

 

성호석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눈물과 흙탕물로 범벅이 된 성호석의 눈에, 맑고 깊은 지유의 검은 눈동자가 비쳤다.

 

3. 씻겨 내려간 원죄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 제게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이 있어요."

 

지유의 음성은 맑고 잔잔했다.

 

교룡산 기슭을 스쳐 지나가는 솔바람처럼, 듣는 이의 상처 난 가슴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온기가 깃들어 있었다.

 

"남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김밥을 말면 밥알이 쉬어버리고, 원망을 품고 칼을 쥐면 제 손가락을 베는 법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남원을 사랑하셨고, 삼거리 김밥집의 그 작은 도마 위에서 사람들의 배를 채워주는 일을 평생의 자부심으로 여기셨어요. 강태석 시장이 들이닥쳐 참기름병을 깨뜨리고 용역들이 쇠파이프로 가게를 부술 때도, 어머니가 가장 슬퍼하셨던 건 빼앗긴 땅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 깃든 독기였습니다."

 

성호석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어르신께서 삼십 년 전에 저지르신 침묵과 타협이 얼마나 무거운 비극이었는지, 저는 칠 년 동안 온몸으로 겪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르신을 저주하며 돌아가시지 않았습니다. 성 시장도 결국 권력의 덫에 걸린 가련한 아비였을 뿐이라고, 그 집 아들이 짊어지고 갈 짐이 너무 무거워 안쓰럽다고 하셨어요."

 

지유의 눈가에 투명한 이슬이 맺혔지만, 눈물은 흘러내리지 않았다.

 

지유는 성호석이 내민 서류철을 조심스럽게 받아 품에 안았다.

 

"이 땅과 서류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제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고 삼거리 골목의 힘없는 이웃들을 지키는 울타리로 쓰겠습니다. 그러니 어르신, 이제 그만 흙바닥에서 일어나세요."

 

지유는 두 손으로 성호석의 여윈 팔을 부축했다.

 

"재환이가 법복을 입고 남원으로 돌아와 제 손을 잡아준 순간, 제 마음속의 원망은 이미 끝났습니다. 재환이는 어르신의 아들이기 전에,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겠다던 약속을 지켜낸 사람입니다. 그 약속 하나를 믿고 버텨온 칠 년이었기에, 저는 성씨 가문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성호석은 지유의 손길에 이끌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노인의 굽은 등 뒤로 굵은 눈물방울이 흙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지유는 품속에서 정갈하게 접어둔 하얀 손수건을 꺼냈다.

 

칠 년 전 광한루원 처마 밑에서 재환의 젖은 머리칼을 닦아주었고, 재환의 각인 만년필을 소중히 싸서 품에 안았던 바로 그 손수건이었다.

 

지유는 손수건을 펴 성호석의 이마와 뺨에 묻은 흙먼지를 조심스럽게 닦아내기 시작했다.

 

성호석은 어린 소녀의 따뜻한 손길 앞에서 참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소리 죽여 흐느꼈다.

 

삼십 년간 심장을 짓누르고 있던 죄책감의 쇠사슬이, 법과 형벌이 아닌 피해자의 순결한 온기 앞에서 비로소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4. 부자의 대면

 

지유가 한 걸음 물러서자, 성호석의 젖은 시선이 아들 성재환에게로 향했다.

 

검은 양복 차림의 성재환은 똑바로 선 채 부친을 바라보고 있었다.

 

칠 년 전, 서울로 강제 압송되던 기차 안에서 백부의 만년필로 부친의 이름을 비리 수첩에 적어 넣으며 복수를 맹세했던 열여덟의 소년은, 이제 어엿한 대한민국 검사가 되어 거악을 무너뜨리고 아비의 앞에 서 있었다.

 

성호석은 흙 묻은 양복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재환아."

 

"예, 아버지."

 

낮고 단단한 음성이었다.

 

성호석은 아들의 당당한 체구와 흔들림 없는 눈빛을 바라보며 가슴이 미어지는 회한을 느꼈다.

 

"내가 너를 서울 성북동에 가두고, 대치동 학원가로 몰아넣으며 법조인이 되라고 윽박질렀던 것은…… 썩어빠진 남원의 흙탕물에 너를 빠뜨리지 않겠다는 오만 때문이었다. 바닥의 정의에 매달려서는 개미처럼 짓밟힐 뿐이니, 중앙의 권력을 쥐고 세상을 지배하라고 강요했지. 하지만 너는 내 비틀린 권력관을 비웃기라도 하듯,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와 가장 정직한 법으로 나를 심판했다."

 

성호석의 입꼬리에 자조적인 미소가 맺혔다.

 

"남원지청 취조실에서 네가 내민 피의자 신문조서에 지장을 찍던 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리고 동시에…… 내 아들이 비로소 나보다 훨씬 위대한 인간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재환은 말없이 가슴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의 손끝에 닿은 것은 백부에게 물려받았던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이었다.

 

캡 상단에 새겨진 라틴어 법언,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그리고 그 만년필 안에는 지유가 남원여고 앞 문구점에서 선물해 주었던 깊고 푸른 흑청색 잉크가 채워져 있었다.

 

재환은 만년필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아버지께서 제게 물려주신 것은 권력을 향한 맹목적인 욕망이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서울의 고시원 단칸방에서 벽면 가득 법리도를 그리며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를 향한 증오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재환의 시선이 부친의 주름진 눈가로 향했다.

 

"아버지가 김문현의 협박 속에서 저를 살리기 위해 홀로 삼켰던 그 비참한 침묵을 알았을 때, 저는 결심했습니다. 권력에 굴복해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린 아버지의 족쇄를, 법을 공부한 아들인 제가 직접 끊어내겠다고 말입니다. 아버지를 감옥에 보내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한 인간을 죄악의 수렁에서 건져내기 위해 저는 검사가 되었습니다."

 

성호석의 눈에서 다시금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고맙다, 재환아. 정말로 고맙다……. 이 못난 아비를 용서하지 마라. 다만…… 네가 지켜낸 그 정의의 끝에, 한 점의 부끄러움도 남지 않도록 나를 철저히 단죄해다오."

 

재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원지원 제1호 대법정에서, 문성현 부장판사는 아버지의 자백 조서와 수사 협조를 참작하여 국고손실 및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 징역 일 년에 집행유예 이년을 선고했습니다. 형사적 처벌은 법에 따라 엄정히 내려졌습니다. 그러니 이제…… 가문의 멍에를 내려놓으십시오, 아버지."

 

재환이 다가가 부친의 거친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부자의 체온이 맞닿는 순간, 삼십 년간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냉혹한 권력의 벽과 침묵의 상처가 눈 녹듯 스러져 내렸다.

 

5. 요천 둑길의 바람

 

교룡산을 내려온 세 사람은 늦은 오후의 가을빛이 황금색으로 부서지는 요천 둑길로 향했다.

 

요천 변의 수양버들은 선선한 바람에 가지를 흔들고 있었고, 둑길 아래 맑은 물줄기는 칠 년 전 그날처럼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성호석은 지유와 재환의 곁에서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와 모든 것을 털어낸 그의 걸음걸이는 한결 가벼워 보였다.

 

둑길 중간에 이르렀을 때, 성호석이 걸음을 멈추고 요천 건너편의 구도심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동문 우체국의 붉은 벽돌 건물과 그 뒤편 삼거리 김밥집 골목의 처마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칠 년 전, 내가 너를 서울로 강제로 데려가던 날…… 이 둑길을 차를 타고 지나갔었다."

 

성호석이 아득한 눈빛으로 회상에 잠겼다.

 

"그때 룸미러로 뒤를 보았더니, 저 멀리 톨게이트 진입로 아스팔트 위에서 피를 흘리며 달려오던 어린 여학생 하나가 보였다. 차를 멈추라고 소리치며 차창을 두드리던 재환이의 울부짖음을, 나는 기사에게 속도를 올리라는 서슬 퍼런 호통으로 짓밟았지."

 

성호석은 지유를 돌아보았다.

 

지유의 치맛자락 아래, 오른쪽 무릎에 남아 있는 옅은 흉터가 가을 햇살 아래 언뜻 드러났다.

 

"그 아이가…… 저 흉터를 품고 칠 년을 버텨내어, 마침내 내 아들을 이렇게 훌륭한 법조인으로 돌려보내 주었구나. 지유야, 네가 내 아들을 살렸고, 네가 우리 성씨 집안의 영혼을 구원했다."

 

지유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어르신, 재환이는 원래부터 곧고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한 것은 그저…… 재환이가 돌아올 자리를 비워두지 않고 김밥을 말며 기다린 것뿐이에요."

 

그때 둑길 저편에서 요란한 자전거 벨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유야! 성 검사님!"

 

고개를 돌리자, 남원일보 완장을 찬 최민재가 카메라를 목에 걸고 자전거 페달을 거세게 밟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뚱거리는 자전거 짐받이에는 화사한 원피스를 차려입은 하은이 위태롭게 매달려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머, 지유야! 묘소 다녀오는 길이야?"

 

하은이 자전거가 멈추기도 전에 뛰어내리며 지유에게 달려와 와락 안겼다.

 

민재는 자전거를 둑길 잔디밭에 아무렇게나 패대기치듯 세워두고 숨을 헐떡이며 다가왔다.

 

성호석 전 차관의 모습을 발견한 민재와 하은은 순간 멈칫하며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남원을 호령하던 전임 시장이자 내무부 차관이었던 거물이 흙 묻은 양복 차림으로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호석은 두 청년의 긴장을 알아채고, 먼저 온화하게 허리를 굽혀 목례를 건넸다.

 

"최 기자, 그리고 윤 양. 남원의 정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준 자네들의 용기를 전해 들었네. 내 부끄러운 과거를 대신해 고개 숙여 감사하네."

 

민재는 당황하여 머리를 긁적이며 허리를 숙였고, 하은 역시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아닙니다, 어르신…… 저희는 그저 지유 곁에 있었을 뿐인데요."

 

민재가 쑥스러운 듯 웃으며 가방에서 두툼하게 인쇄된 신문 한 뭉치를 꺼내 들었다.

 

남원일보 1면 톱기사였다.

 

'요천 제방 참사 부실공사 및 140억 비자금 수괴 강태석 시장 징역 12년 중형 선고! 법은 약자의 약속이다!'

 

성재환 검사의 준엄한 구형 논고와 문성현 판사의 판결 요지가 대서특필되어 있었다.

 

배도식 국장의 이름 대신, '사회부 최민재 기자'라는 바이라인이 굵은 활자로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이것 보십시오, 성 검사님! 오늘 남원 시내에 뿌려진 조간입니다! 시민들이 신문사를 에워싸고 신문을 서로 사 가겠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동문 우체국 집배원 아저씨들은 아예 오토바이에 이 신문을 깃발처럼 꽂고 배달을 돌고 계시더라고요!"

 

민재의 목소리는 벅찬 감격으로 떨리고 있었다.

 

6. 김밥집의 온기

 

해질녘, 남원 동문 우체국 안쪽 골목길은 따뜻한 등불로 밝혀지기 시작했다.

 

삼거리 김밥집의 낡은 미닫이문 위에는 칠 년 전 지유의 어머니가 손수 매달아 두었던 놋쇠 풍경이 가을바람에 흔들리며 맑고 청아한 소리를 냈다.

 

딸랑, 딸랑.

 

어두운 골목을 지키던 폭압의 그림자는 완전히 걷혀 있었다.

 

포클레인의 쇠 버킷이 들이닥쳤던 자리, 붉은 페인트로 '빨갱이 소굴'이라 도배되었던 벽면은 시민들과 목공소 윤 씨가 깨끗한 회벽으로 덧발라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고소한 참기름 냄새와 갓 지은 햅쌀밥의 구수한 김이 좁은 식당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남원 공설 방앗간에서 국산 통깨로 정성스레 짜온 참기름의 향기였다.

 

위생과 직원의 구둣발에 산산조각 났던 비극의 참기름병은 이제 없었다.

 

선반 위에는 단골손님들과 방앗간 주인이 새로 가져다준 맑고 투명한 유리병들이 가지런히 줄지어 서 있었다.

 

지유는 앞치마를 두르고 조리대 앞에 섰다.

 

조리대 한구석에는 깨진 흑청색 잉크병 대신, 재환이 서울에서 내려올 때 새로 사다 준 단정한 사각 유리병 잉크가 묵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지유의 손놀림은 거침이 없었다.

 

김 발 위에 바삭한 김을 얹고, 따뜻한 밥을 얇게 펴 바른 뒤 노란 단무지와 정갈하게 볶은 당근, 시금치, 계란 지단을 올려 단단하게 말아 쥐었다.

 

칼날에 참기름을 살짝 묻혀 일정한 두께로 썰어내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착, 착, 착.

 

테이블에는 성호석과 성재환, 민재와 하은이 마주 앉아 있었다.

 

지유는 정성껏 썰어낸 김밥 세 접시와 따뜻한 멸치 장국을 상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어르신, 드셔보세요.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방식 그대로 만 김밥이에요."

 

성호석은 젓가락을 들기 전, 접시에 담긴 단정한 김밥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밥알 하나하나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있었고, 재료들의 색감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었다.

 

성호석은 떨리는 손으로 김밥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은은한 참기름 향과 함께 아삭한 채소의 단맛, 그리고 밥알의 찰기가 입안 가득 부드럽게 퍼져나갔다.

 

권력의 정점에서 드나들었던 서울 최고급 요정 청운각의 산해진미나 남원 요천각의 화려한 주안상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의 체온과 정직한 노동이 빚어낸 순결한 맛이었다.

 

성호석은 씹는 내내 목이 메어 김밥을 쉬이 삼키지 못했다.

 

"참으로…… 따뜻하구나."

 

노인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칠 년 동안 이 작은 김밥 하나로 그 모진 풍파를 견뎌냈단 말이냐. 이 맛을 지키기 위해 어린 네가 그 험한 꼴을 당했단 말이냐……."

 

재환은 부친의 곁에서 묵묵히 김밥을 입에 넣었다.

 

신림동 고시촌 세 평 단칸방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법전을 외울 때, 남원에서 올라온 엽서 한 장과 지유가 새벽에 싸 들고 왔던 김밥의 온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온기가 없었다면, 그는 사법시험 수석도, 대검 특수부 검사도 되지 못한 채 복수심에 불타는 괴물로 전락했을 터였다.

 

민재와 하은은 볼이 미어터져라 김밥을 우물거리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크으! 역시 지유 김밥은 남원제일이 아니라 대한민국 제일입니다! 배도식 국장이 쫓겨나고 신문사가 정상화되면, 제가 삼거리 김밥집을 남원의 문화유산으로 지정해야 한다고 사설을 쓸 겁니다!"

 

민재의 너스레에 하은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사설은 무슨 사설이야! 기사나 오타 없이 똑바로 써! 그래도…… 지유야, 정말 맛있다. 이제 진짜 나쁜 놈들 다 잡혀가고 우리 세상 온 거지?"

 

하은이 지유의 손을 꼭 잡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지유는 하은의 손을 마주 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응, 하은아. 이제 아무도 우리 가게 부수러 안 와. 어머니랑 약속한 대로, 나 여기서 평생 김밥 말면서 너희들 지켜볼 거야."

 

식당 밖 골목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문 우체국 집배원 박 씨와 목공소 윤 씨, 그리고 시장 상인들이 축하 떡과 과일을 들고 문을 두드렸다.

 

"지유야! 성 검사님 계시냐!"

 

"어르신도 오셨다면서요! 저희가 축하 막걸리 한 통 받아왔습니다!"

 

좁은 김밥집 안으로 이웃들의 온기와 웃음소리가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성호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상인들의 거친 손을 일일이 맞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속죄의 눈물은 어느덧 화해와 연대의 온기로 승화되고 있었다.

 

7. 푸른 밤의 약속

 

자정이 가까워진 시각, 골목의 축제가 잦아들고 이웃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갔다.

 

성호석은 민재의 부축을 받아 시내 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서울 성북동 사저를 처분하고 공익 재단을 설립하는 절차를 밟기 위해 내일 아침 일찍 상경하기로 한 참이었다.

 

떠나기 전, 성호석은 지유와 재환의 손을 겹쳐 쥐어주며 가슴 깊은 축복을 건넸다.

 

"둘이서 함께 걸어가거라. 세상이 무너져도 무너지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너희 둘이 내게 가르쳐주었으니…… 부디 행복하거라."

 

아버지를 배웅하고 돌아온 재환과 지유는 불 꺼진 삼거리 김밥집 앞 평상에 나란히 앉았다.

 

초가을 밤하늘에는 은구슬을 뿌려놓은 듯 무수한 별들이 총총히 박혀 있었다.

 

요천 쪽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밤바람이 두 사람의 뺨을 간지럽혔다.

 

재환은 자신의 양복 겉옷을 벗어 지유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둘러주었다.

 

옷깃에 밴 은은한 먹물 냄새와 소나무 향기가 지유의 코끝을 맴돌았다.

 

지유는 겉옷깃을 여미며 재환의 어깨에 가만히 머리를 기댔다.

 

칠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온전히 쉬지 못했던 고단한 영혼이, 마침내 가장 안전한 항구에 닻을 내린 듯 평온한 숨을 내쉬었다.

 

"재환아."

 

"응, 지유야."

 

"참 신기하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세상이 다 끝난 줄 알았거든. 혼자 남아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버티나, 매일 밤 부치지 못한 편지를 쓰면서 울었는데……."

 

지유의 손가락이 재환의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오늘 어머니 산소에 다녀오고, 어르신의 사죄를 받고 나니까…… 마음속에 가시처럼 박혀 있던 아픔들이 전부 씻겨 내려간 것 같아. 어머니도 이제 하늘에서 활짝 웃고 계실 거야."

 

재환은 지유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그의 손끝에 칠 년간 펜대를 쥐어 굳은살이 박인 감촉과, 지유의 칼질에 굳은살이 박인 감촉이 단단하게 얽혀 들었다.

 

"지유야, 내일 남원지청에 정식으로 사직원을 낼 생각이었어."

 

재환의 나지막한 고백에 지유가 놀란 듯 고개를 들어 재환을 바라보았다.

 

"사직원을? 왜…… 이제 겨우 모든 걸 바로잡았는데?"

 

재환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지유를 마주 보았다.

 

"내 아버지가 저지른 원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니까. 비록 법적으로는 집행유예를 받았고 재산을 털어 속죄했다지만, 남원 시민들에게 성씨 일가가 남긴 상처는 깊어. 그런 내가 남원에서 검사라는 권력의 칼을 계속 쥐고 있는 것은 오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지유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재환아."

 

지유의 맑은 눈동자가 별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났다.

 

"법은 권력자의 방패가 아니라 약자의 약속이어야 한다고, 법정에서 네가 직접 말했잖아. 네가 옷을 벗고 떠나면 남원에 남겨진 수많은 약자들은 누구를 믿고 살아가? 강태석 같은 괴물이 또 나타났을 때, 누가 그 무시무시한 권력 앞에 칼을 빼 들겠어?"

 

지유는 재환의 손을 들어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대었다.

 

"너는 남원에 남아 있어야 해. 네 아버지가 빼앗았던 이 땅에서, 너는 검사로서 가장 정직하고 따뜻한 법의 울타리가 되어주어야 해. 내가 여기서 김밥을 말며 사람들의 허기를 채우는 것처럼, 너는 법으로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어야 해. 그게…… 네가 남원에서 갚아야 할 가장 아름다운 속죄야."

 

재환의 가슴에 벅찬 전율이 번져나갔다.

 

이 작은 여인은 언제나 자신보다 크고 깊었다.

 

사법시험 수석이라는 타이틀과 검사라는 직함 뒤에 숨은 자신의 나약함과 번민을, 지유는 언제나 순결한 지혜로 어루만져 주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재환은 품속에서 백부의 각인 만년필을 꺼내 지유의 손바닥 위에 얹어주었다.

 

'成宰桓'.

 

'Fiat justitia, ruat caelum'.

 

그리고 지유의 흑청색 잉크로 물든 금빛 닙.

 

"이 만년필은 이제 내 것이 아니라 네 거야. 칠 년 전 광한루원에서 네가 주워주었던 그날부터, 내 모든 정의와 법은 너라는 사람을 향해 있었어. 내가 흔들릴 때마다, 내가 권력에 취하려 할 때마다 네가 이 만년필을 들어 나를 깨우쳐줘."

 

지유는 두 손으로 만년필을 꼭 쥐며 눈물을 글썽였다.

 

"응. 평생 네 곁에서 네 만년필에 잉크를 채워줄게."

 

재환은 지유를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

 

교룡산 자락에서 불어온 가을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두 가문을 삼십 년간 옭아맸던 참혹한 토지 강탈의 악연과 칠 년의 피눈물 나는 비극은, 마침내 온전한 사랑과 용서,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정의 속에서 완전히 매듭지어졌다.

 

깊어가는 남원의 푸른 밤하늘 아래, 상처 입었던 영혼들이 마침내 참된 평안을 찾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