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 서재의 첫 불꽃
1. 되살아나는 북방의 기억
책장이 넘어가듯 갈라진 칠흑 같은 어둠 너머로, 형언할 수 없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도진의 전신을 집어삼켰다.
귓가를 찢어발기듯 울리던 메마른 목소리.
— 그래.
단 한마디의 대답이었으나, 그것은 천 년의 시공간을 가로질러 날아온 전율 그 자체였다.
도진은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방금 전까지 작업실 책상 위에서 타오르다 꺼져버린 촛불의 잔향, 그리고 타버린 초고의 빈 한지 위에서 갓 피어오르던 짙은 먹향이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나를 아는 자 누구인가.'
'이 차가운 북방의 바람 끝에서……'
초고에 피어났던 처절한 묵흔과 암전된 화면에 떠올랐던 물음이 머릿속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조금 전 자신이 온 영혼을 갈아 넣듯 타이핑했던 문장들.
[1010년 11월, 초겨울의 압록강 너머에서 거란의 40만 대군이 몰고 오는 검은 먹구름이 서북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 문장들이 활자를 벗어나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도진은 의자를 짚으려 허공을 더듬었지만 손에 닿는 감촉은 아무것도 없었다.
작업실의 벽과 바닥, 컴퓨터 본체의 기계음까지 세상의 모든 소음과 현실의 경계가 물속의 먹물처럼 번지며 아득하게 녹아내렸다.
떨어지는 감각.
그러나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추락이 아니었다.
자신이 써 내려가던 문장 속으로, 역사의 거대한 소용돌이와 영웅의 사념이 응축된 미지의 심상(心象) 공간으로 존재 자체가 빨려 들어가는 기묘한 전율이었다.
갈라진 어둠의 틈새 너머, 미지의 심연에서 번져 나온 서늘한 푸른빛이 시야 전체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세상이 뒤집혔다.
2. 끝없는 서가와 백지의 예언
눈을 뜬 순간, 도진은 숨을 들이켰다.
서늘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하…….”
입에서 옅은 입김이 흘러나왔다.
도진은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자신이 서 있다는 사실부터 이상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 작업실 책상 앞에서 미친 듯이 원고를 타이핑하고 있었다.
손끝에 남아 있던 플라스틱 자판의 감촉이 아직 생생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방이 어둠이었다.
천장도 보이지 않았다.
벽도 없었다.
발밑만 희미하게 보였다.
도진은 천천히 몸을 숙였다.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차갑고 축축한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바닥에 깔린 짙은 먹물과 서늘한 기운이었다.
어둠 저편에서 작은 불빛 하나가 흔들렸다.
촛불이었다.
검은 어둠 속에 홀로 떠 있는 듯한 작은 불꽃.
도진은 한참 동안 그 불꽃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세상 전체가 침묵 속에 잠겨 있는 듯했다.
촛불에 가까워질수록 주변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났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책장이었다.
높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책장들이 어둠 속에 서 있었다.
한 줄이 아니었다.
수십 줄.
아니, 도진의 눈으로는 끝을 확인할 수 없었다.
서가와 서가 사이에는 좁은 통로가 있었고, 그 통로는 어디까지 이어지는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책들이 꽂혀 있었다.
낡은 책도 있었고 새 책도 있었다.
두꺼운 목판본과 얇은 필사본, 한지로 감싼 문서와 이름조차 알아볼 수 없는 오래된 기록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도진은 자신도 모르게 가까운 책장으로 다가갔다.
손을 뻗어 책등 하나를 훑었다.
낯익은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고려사》.
옆에는 《요사》가 있었다.
조금 더 옆으로 가자 송나라의 기록과 고려의 외교문서를 엮은 듯한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도진의 눈빛이 서서히 변했다.
그는 역사 작가였다.
역사에 관한 책이라면 일반 독자보다 훨씬 집요하게 들여다보는 사람이었다.
한 문장을 쓰기 위해 사료를 여러 권 대조하고, 같은 사건을 기록한 서로 다른 문헌의 차이를 확인하며, 기록되지 않은 부분은 당시의 지리와 군사 체계까지 끌어와 추론하는 것이 그의 작업이었다.
그래서 이상했다.
이곳의 책들은 단순히 오래된 책이 아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와 모르는 역사의 경계에 서 있었다.
도진은 한 권을 빼냈다.
책장을 넘겼다.
고려의 북방 변경에 관한 기록이었다.
몇 장을 넘기던 손이 멈췄다.
자신이 아직 읽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기록이었다.
도진의 숨이 가빠졌다.
“이런 기록이…… 있었나?”
페이지를 넘겼다.
한자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하지만 일부 문장은 이상하게도 읽을 수 있었다.
마치 자신이 알고 있는 언어로 번역되어 눈앞에 떠오르는 것처럼.
도진은 책장을 빠르게 넘겼다.
그러다 어느 순간 손이 멈췄다.
자신의 책이었다.
몇 년 전 온 힘을 쏟아부어 완결까지 펴냈던 바로 그 역사소설.
초판본 표지부터 마지막 판권지까지 분명 완간된 완성본 그대로였다.
도진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이건 또 뭐야.”
책을 펼쳤다.
자신이 피땀 흘려 써 내려간 익숙한 문장들이 한 장 한 장 이어졌다.
그러나 결말부에 이르러 마지막 장을 넘기자, 도진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백지였다.
분명 완결된 책이어야 하건만, 뒷부분에 존재하지 않아야 할 텅 빈 여백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 백지의 가장 아랫부분에 작은 먹점 하나가 툭 찍혀 있었다.
도진은 손가락을 가까이 가져갔다.
먹점이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그 작은 점에서 검은 선이 뻗어나가며 글자를 엮어내기 시작했다.
도진은 그대로 굳었다.
선 하나가 이어지고.
또 하나가 이어졌다.
그 모습은 너무나 익숙했다.
조금 전 작업실에서 보았던 것과 같았다.
“……설마.”
먹물이 글자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문장이 완성되지 않았다.
중간에서 멎었다.
마치 누군가가 피 묻은 손으로 쓰다가 멈춘 것처럼.
그때였다.
사각.
어딘가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도진이 고개를 들었다.
아무도 없었다.
다시.
사각.
이번에는 조금 더 가까웠다.
도진은 책을 내려놓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었다.
책장 사이의 통로는 생각보다 깊었다.
몇 개의 모퉁이를 돌자 작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에 책상이 있었다.
그리고 책상 위에 촛불 하나가 놓여 있었다.
도진은 걸음을 멈췄다.
촛불 아래에는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검게 그을린 표지.
타다 남은 가장자리.
그리고 희미하게 남아 있는 네 글자.
양규 난중 초고.
도진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 책이었다.
작업실 책상 위에 있어야 할 바로 그 책.
그는 천천히 다가가 책을 집었다.
손끝이 떨렸다.
“어떻게…….”
대답은 없었다.
도진은 책을 펼쳤다.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까지 빠르게 넘겼다.
기억과 같았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에 이르자.
그는 숨을 멈췄다.
방금 전 작업실에서 집필하기 직전 보았던 문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를 아는 자 누구인가.
그 아래의 문장도 있었다.
이 차가운 북방의 바람 끝에서……
도진은 그 글자를 한참 바라봤다.
그 순간.
페이지가 저절로 넘어갔다.
사각.
그리고 또 한 장.
사각.
도진은 책을 놓치지 않으려고 두 손으로 붙잡았다.
다음 페이지가 펼쳐졌다.
그곳에는 방금 전 자신이 모니터에 미친 듯이 쳐 내려갔던 1010년 11월의 문장들이 먹물로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3. 피 묻은 갑옷의 장수
그리고 그 백지 위로 희미한 환영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먹물 얼룩처럼 번지더니.
산맥의 형상이 되고.
성벽의 윤곽이 되고.
아득한 벌판의 실루엣이 되었다.
그 너머에서 수많은 기마의 흔적이 어렴풋이 스쳐 지나갔다.
말발굽 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스쳤다.
멀리서 울리는 북소리.
바람을 가르는 병사들의 함성.
쇠와 쇠가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
그 잔향들은 책에서 나는 것이 아니었다.
도진의 머릿속과 심상 공간 전체를 메아리치고 있었다.
서늘한 바람이 지나갔다.
도진은 옷깃을 여몄다.
어둠 너머로 거대한 성벽의 실루엣이 떠올랐다.
도진은 그 윤곽을 알고 있었다.
“흥화진…….”
성벽 위로 희미하게 펄럭이는 깃발.
고려의 깃발이었다.
도진은 그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 어둠과 책장 사이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도진의 시선이 그 사람에게 고정됐다.
흙먼지와 마른 풀잎, 그리고 검붉게 굳어가는 선혈로 뒤덮인 갑옷.
몸통을 감싼 철편 곳곳이 거란 기병의 칼날과 창끝에 찢기고 패여 있었다.
40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인 11월 초겨울, 적의 선봉대를 정찰하다 복병과 맞닥뜨려 처절한 야간 난전을 치르고 방금 막 막사로 귀환한 직후의 모습이었다.
찢어진 갑옷의 틈새마다 아직 식지 않은 붉고 검은 피가 쉴 새 없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도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양규.”
그 순간, 양규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정면으로, 도진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시선이 허공을 맴돌지 않았다.
사선을 뚫고 방금 막 살아 돌아온 장수의 서늘하고 깊은 눈동자가, 책상 맞은편에 선 도진의 눈 속으로 날카롭게 꽂혀 들어왔다.
도진은 숨이 턱 막혔다.
천 년의 세월을 뚫고 나온 실제 영웅의 시선이 자신의 온몸을 옭아매는 듯한, 숨 막히는 압도감이었다.
살아 숨 쉬는 한 인간의 날 선 시선이 도진의 전신을 서늘하게 짓눌렀다.
도진은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남자는 입을 열지 않았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공간이었다.
그때, 책상 위의 촛불이 기괴하게 일렁이며 파르르 흔들렸다.
불꽃이 좌우로 크게 휘청였다.
그것은 단순한 실내의 외풍이 아니었다.
천 년 전 전장, 압록강 너머에서 양규를 추격해 온 거란군 선봉대가 쏘아 올린 신호탄의 불길과, 흥화진 막사 틈새를 후벼 파는 북방의 거센 칼바람이 이 심상 서재의 촛불과 실시간으로 동기화되어 요동치고 있는 것이었다.
과거의 거란군이 양규를 향해 포위망을 좁혀오며 압박할수록, 촛불은 더욱 사납게 흔들렸다.
동시에 양규의 찢어진 왼쪽 어깨 갑옷 틈새에서 붉은 피 한 방울이 왈칵 흘러내렸다.
뚝.
바닥의 먹물 위로 떨어졌다.
도진의 눈이 커졌다.
거란의 살기가 거세지듯 촛불이 다시 한번 거칠게 불꽃을 튀기며 휘청이자, 양규의 옆구리 자상에서 울컥, 하고 새로운 피가 쏟아져 내렸다.
양규의 미간이 순간적인 고통으로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도진은 숨을 삼키며 흔들리는 촛불과 양규의 상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과거의 바람이 잦아들고 촛불이 온전히 제자리를 찾아 고요해지자, 흐르던 피도 거짓말처럼 멎었다.
도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우연이 아니었다.
‘이 불꽃이…… 과거 전장의 살기와 장군의 생명을 그대로 잇고 있구나.’
거란군의 압박에 촛불이 일렁일 때마다, 장수의 몸에서 피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양규의 손이 허리춤으로 향했다.
야간 난전에서 적의 피로 붉게 물든 칼자루를 쥐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철컥.
칼날이 아주 조금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눈앞의 장수에게 자신은 정체불명의 불청객이자 언제 칼을 뽑을지 모를 경계의 대상일 터였다.
4. 먹물 필담과 섭리의 반동
말을 해야 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허공으로 흩어질 뿐 입 밖으로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도진은 천천히 손을 들어 적의가 없음을 보이며, 간절하게 머릿속으로 한 문장을 떠올렸다.
'나는 당신을 압니다.'
그 순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찰랑거리던 바닥의 짙은 먹물 위로, 도진이 마음속으로 그린 생각이 서서히 번지기 시작했다.
먹물이 스스로 뭉치고 갈라지며, 두 사람 사이의 바닥 위에 뚜렷한 흰색의 글자를 띄워 올렸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양규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칼자루를 쥐고 있던 거친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굳었다.
도진은 숨을 죽인 채 다시 한번 강렬하게 생각을 집중했다.
자신이 평생 사료를 뒤지며 가슴을 쥐어뜯었던 그 수많은 밤들.
흥화진을 지키고, 곽주를 되찾고,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쏟아붓고 사라져간 사내.
그리고 역사서의 몇 줄 뒤에 가려진, 차갑고 잔인한 죽음.
도진의 절박한 의지가 먹물 바닥 위로 다시 빠르게 새겨졌다.
[당신을 살릴 겁니다.]
글자가 바닥 위에서 파문처럼 짙게 퍼져나갔다.
[이 비극적인 결말을…… 두고 보지 않을 겁니다.]
바닥에 떠오른 글자를 내려다보던 양규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안도나 나약한 기대 따위는 없었다.
자신의 죽음조차 이미 각오하고 전장에 뛰어든 백전노장의 눈빛이었다.
양규는 도진이 적이 아닌 아군임을 직감하고 칼자루를 쥐었던 손의 힘을 서서히 거두었으나, 전신에서 뿜어내는 서슬 퍼런 무장의 기백만은 털끝만큼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자신의 운명에 섭섭해하거나 도망칠 생각 따위는 애초에 없다는 듯한 단호한 태세였다.
양규가 도진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발치 아래, 먹물이 다시 소용돌이치며 양규의 묵직한 사념을 굵고 거친 한자의 형태로 바닥에 띄워 올렸다.
[섭리를 거스르는 대가는 무거울 터인데.]
그 글자가 완성되는 순간,
콰아아아앙-!
책상 위의 촛불이 미친 듯이 날뛰며 일순간 사그라들었다.
“윽?!”
쩌저적, 쩍!
거대한 심상 서재의 공간 전체가 마치 거대한 유리창처럼 금이 가며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시공간이 뒤틀리며 현실로 사정없이 튕겨 나가는 아득한 추락감 속에서, 도진은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극심한 한기가 자신의 살인적인 칼바람과 살을 에는 한기가 전신을 도려내는 듯한 격통을 느꼈다.
단순한 환각이 아니었다.
천 년 전, 영하 이십 도의 북방 전장에서 불어오는 살인적인 칼바람이 시공을 뚫고 넘어와 도진의 현실 육체를 직접 찢어발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