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버린 초고의 비밀
1. 쓰이지 않는 다음 화
“이번 작품도 반응이 없네요.”
김도진은 멍한 눈으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화면 구석에 박혀 있는 초라한 숫자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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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달린 단 하나의 댓글마저 작품 내용에 대한 감상이 아니었다.
작가님, 다음 화는 언제 올라오나요?
도진의 입가에서 자조 섞인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다음 화.
바로 그게 문제였다.
지금 그의 작업 문서에는 다음 화 분량이 한 줄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더 이상 써 내려갈 수가 없었다.
새하얀 화면 한가운데에서 깜빡이는 커서는 마치 그의 무력함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했다.
“씨발.”
짓씹듯 뱉어낸 짧은 욕설이 정적 속으로 흩어졌다.
도진은 피로에 절은 몸을 의자 깊숙이 파묻었다.
좁은 원룸의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책장에는 손때 묻은 역사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요사》와 《송사》, 그리고 국내 연구자들의 논문을 출력해 묶어둔 두툼한 파일들까지.
책상 위에도 형광펜 자국이 선명한 사료와 복사한 전투 지도, 복잡하게 얽힌 인물 관계도와 연표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리고 그 번잡한 사료들의 중심에 놓인 노트북 화면에는, 이번 신작의 제목이 덩그러니 떠 있었다.
《피로 쓴 고려》
김도진은 그 제목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적어도 처음 시작할 때만큼은 자신 있었다.
대부분의 작가가 그러하듯, 도진 역시 첫 원고를 쓰기 시작했을 때는 이번에야말로 다를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이건 된다’는 확신.
고려 거란 전쟁, 강감찬, 귀주대첩.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익숙한 이름과 사건들이었다.
하지만 도진이 주목한 곳은 전쟁의 영광스러운 결말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정리되기 전, 고려가 가장 절망적인 파국으로 치닫던 시기.
거란의 황제가 직접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오던 그 암담한 전란의 한가운데였다.
그리고 그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상하리만치 짧게 기록된 한 사람이 있었다.
양규.
도진은 사료 속에서 처음 그 이름을 발견했던 날, 며칠 동안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흥화진을 굳건히 지켜내고 거란군의 남하를 결사코 막아섰으며, 기습으로 곽주를 탈환하고 포로로 끌려가던 수만 명의 고려 백성을 구출해 낸 장수.
그리고 마침내 애전의 차가운 눈밭에서 온몸에 화살을 맞고 전사한 사람.
사서에 남겨진 기록은 고작 몇 줄에 불과했다.
그러나 도진에게는 그 메마른 몇 줄의 무게가 가슴을 짓누를 만큼 무겁게 다가왔다.
누군가는 전쟁에서 승리해 영웅이 되었고, 누군가는 역사를 뒤바꾸며 왕위에 올랐지만, 양규는 오직 사람들을 살려내고 장렬히 죽어갔을 뿐이었다.
그래서 더욱 쓰고 싶었다.
그 메마른 몇 줄의 행간 사이에 존재했을 수많은 혹독한 밤과 얼어붙은 전장, 굶주림에 떨던 병사들과 성벽 위에서 스러져간 이름 없는 민초들의 숨결을.
그리고 무엇보다, 양규라는 한 인간의 뜨거운 고뇌를.
하지만 문제는, 요즘 독자들은 그런 이야기를 결코 원하지 않는다는 잔혹한 현실이었다.
“고증이 너무 많다.”
“전개가 너무 느려요.”
“주인공은 대체 언제 먼치킨 됩니까?”
“설명충 극혐, 설명 좀 줄여주세요.”
처음에는 그저 웃어넘겼다.
세상 모든 독자가 같은 취향을 가질 수는 없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작품이 하나 끝나고, 또 하나가 소리 없이 묻히고, 이번 신작마저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처참한 반응을 얻자 이제는 웃을 여유조차 사라져 버렸다.
삐익—
정적을 깨고 요란하게 울린 휴대전화 화면에는 출판사 담당자의 이름이 떠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도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도진 작가님.”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도진의 심장을 쿵 내려앉게 만들었다.
그 조심스러움이 오히려 다가올 통보를 더 불길하게 예고하고 있었다.
“네, 말씀하세요.”
“이번 작품 말인데요…….”
도진은 체념하듯 눈을 감았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스쳤다.
“아직 초반이니까 조금 더 지켜보긴 해야 하는데…… 그래도 아무래도 독자 반응이 생각보다 너무 좋지 않아서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지금이라도 방향을 조금 바꿔보는 건 어떨까 싶어서 연락드렸습니다.”
도진이 말없이 침묵을 지키자, 담당자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요즘 독자분들이 직관적으로 좋아하는 코드들이 있잖아요. 회귀라든지, 상태창이라든지…… 아니면 현대 지식을 이용해서 역사를 시원하게 바꾸는 사이다 전개 같은 거요.”
씁쓸한 실소가 도진의 입가에 맺혔다.
“고려 시대에 난데없이 상태창이라도 띄우면 참 재미있겠네요.”
짧은 침묵이 이어지자 도진은 한숨처럼 덧붙였다.
“농담입니다.”
“하하…… 네, 작가님. 아무튼 긍정적으로 고민해 주세요.”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리고…….”
담당자가 말을 멈추는 짧은 침묵 속에서, 도진은 뒤이어 나올 말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다음 화 원고가 이번 주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출판사 차원에서도 연재를 잠시 중단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결코 웃어넘길 수 없는 엄포였다.
“……알겠습니다.”
통화가 끊기자, 방 안에는 다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지나치게 조용해진 원룸 안에서는 낡은 냉장고가 돌아가는 기계음만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
도진은 미동도 없이 멍하니 앉아 있다가, 천천히 전화기를 내려놓고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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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지식으로 역사를 시원하게 바꾸라…….”
그는 허탈하게 헛웃음을 흘렸다.
남들은 참으로 쉽게 말하곤 했다.
하지만 도진이 아는 역사는 그렇게 가벼운 손짓 하나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설령 바꿀 힘이 주어진다 한들, 피와 목숨으로 쓰인 그 거대한 흐름을 제멋대로 뒤흔들 자격이 과연 누구에게 있단 말인가.
도진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양규 장군의 짧은 기록지를 집어 들었다.
다시 보아도 가슴이 먹먹할 만큼 짧디짧은 문장이었다.
종이를 내려놓은 그는 더 이상 이 숨 막히는 방 안에 머물 수가 없었다.
“바람이나 좀 쐬고 오자.”
메아리처럼 흩어지는 혼잣말에 대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진은 옷걸이에 걸려 있던 겉옷을 대충 걸쳐 입고 밖으로 나섰다.
2. 간판 없는 서점의 검은 책
인사동 골목은 평일 늦은 오후답게 한산했다.
관광객들이 북적거리는 큰길에서 몇 걸음만 비껴서도 분위기는 전혀 다른 세상처럼 고요해졌다.
도진은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늘어선 기념품 가게와 은은한 차 향을 풍기는 전통 찻집,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웃으며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모습은 늘 보던 익숙한 풍경이었다.
오래된 고서와 옛 기록을 좋아했던 그는 종종 머리를 식히러 이 일대를 찾곤 했다.
엄밀히 말하면 오래된 책 자체보다, 세월의 켜 위에 남겨진 누군가의 체취와 흔적을 좋아했다.
누군가 정성스레 밑줄을 그어둔 구절이나 바랜 페이지 사이에 끼워진 낡은 메모, 손때 묻은 책갈피 같은 것들을 마주할 때마다 형언하기 힘든 기묘한 감정이 차올랐다.
수십 년 전, 혹은 백여 년 전의 이름 모를 누군가가 읽었던 글줄을 지금의 자신이 고스란히 더듬고 있다는 사실.
시간이 아득히 단절된 듯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끈으로 깊게 이어져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
막다른 골목 어귀에 다다랐을 때, 도진은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분명 수없이 지나다녔던 길목이었는데, 낯선 풍경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런 가게가 원래 있었나?’
간판조차 걸려 있지 않은 채, 낡아 해진 목재 문 하나가 굳게 닫혀 있었다.
문패나 글자 하나 붙어 있지 않았고 흔한 유리창조차 없어 안쪽의 기척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그저 오랜 세월을 버텨온 문 한 짝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도진은 홀린 듯 그 문 앞에 우두커니 섰다.
지나는 행인 하나 없이 차가운 골목바람만이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로 그때,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충동이 도진의 뇌리를 강하게 스쳤다.
저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강렬한 예감이었다.
도진은 망설임 끝에 놋쇠 손잡이를 쥐었다.
끼익 하는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낡은 문이 열리자마자, 묵직하고 퀴퀴한 고서 특유의 냄새가 훅 끼쳐왔다.
“콜록.”
도진은 반사적으로 기침을 뱉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밖에서 보던 것과 달리 내부는 생각보다 꽤 넓었다.
천장에 닿을 듯 높이 솟은 책장들이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그 안에는 낡은 고서와 빛바랜 한문 서적, 표지가 해진 필사본과 출처를 알 수 없는 고문서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도진은 압도된 채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계십니까? 사장님?”
하지만 가게 안에는 쥐죽은 듯한 적막만이 감돌 뿐,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웠거니 생각하며 발길을 돌리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점 가장 깊숙한 구석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강하게 부르는 듯한 묘한 감각 때문이었다.
도진은 삐걱거리는 낡은 나무 바닥을 조심스레 밟으며 서가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조선 후기의 문집과 일제강점기의 신문, 낡은 필사본들을 무심코 스쳐 지나가는 동안,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잊은 채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다른 책들과 홀로 동떨어져 놓인 작은 서가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그곳에 그것이 있었다.
불에 시커멓게 그을린 책.
아니, 책이라기보다는 두툼한 옛 한지 뭉치를 노끈으로 묶어둔 것에 가까웠다.
겉장은 절반이나 불에 타 바스러져 있었고 모서리는 잿빛으로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도진은 숨을 삼키며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손끝이 거친 종이 표면에 닿는 순간, 찌릿하고 강렬한 전율이 손가락을 타고 올라왔다.
“읏.”
마치 정전기에 감전된 듯 손끝이 찌릿하게 저려왔다.
도진은 찌푸린 미간을 손으로 쓸며 조심스럽게 표지의 검은 재와 먼지를 털어냈다.
사각거리는 마찰음 사이로 희미하게 묵향 밴 한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楊規亂中草稿.
양규.
난중.
초고.
한자를 읽어 내려가던 도진의 손이 얼어붙었다.
“……양규?”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듯 세차게 요동쳤다.
《양규 난중 초고》라니, 역사학계는 물론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도진은 헛것을 보았나 싶어 떨리는 손으로 표지를 다시 훑었지만, 적혀 있는 글자는 명백했다.
누군가의 악의적인 장난인가, 아니면 정교하게 만들어진 현대의 소품인가.
의구심이 걷잡을 수 없이 피어올랐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급히 책장을 넘겼다.
종이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 위태로웠다.
첫 장에 적힌 문장을 마주한 도진은 숨을 죽이고 글자를 더듬어 나갔다.
흥화진, 거란, 눈, 피, 성벽…….
단어들은 낯익었으나 문체는 도진이 알던 메마른 정사의 기록이 아니었다.
후대의 역사가가 차분히 정리해 둔 서술이 아니라, 전장의 피비린내 속에서 방금 칼을 내려놓은 무장이 피 묻은 손으로 거칠게 토해낸 듯 생생하고 처절한 문장이었다.
한 장을 넘기고, 또 한 장을 넘길수록 도진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갔다.
“이게…… 대체 뭐야.”
그 어디에도 공개된 적 없는 구체적인 정황들이 빼곡했다.
흥화진의 치밀한 병력 배치와 성벽 아래에 차마 수습하지 못하고 묻어야 했던 전우들의 시체, 밤마다 땅을 울리던 거란 기병의 말발굽 소리와 병사들이 나누던 은밀한 유언들까지.
그리고 그 모든 기록의 중심에는 거듭해서 등장하는 이름, ‘양규’가 있었다.
그것은 제삼자가 관찰한 시선이 아니었다.
양규 자신이 직접 전장을 보고, 부하들의 절규를 듣고, 처절하게 고뇌하며 내린 판단의 궤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도진은 벅차오르는 심장 박동을 주체하지 못한 채 책을 덮었다가, 이내 홀린 듯 다시 펼쳤다.
천 년 전 장수의 친필 초고가 지금까지 온전히 남아 있을 리는 만무했다.
만약 사실이라면 역사학계를 송두리째 뒤흔들 대사건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문장들을 읽어 내려갈수록 그 외의 설명은 도무지 성립되지 않았다.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던 도진은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뚝 멈춰 섰다.
그곳은 마치 누군가가 고의로 태워 없앤 것처럼 검게 타들어 가 있었고, 상당한 분량의 페이지가 완전히 소실되어 있었다.
그리고 불탄 흔적 뒤로 이어진 것은 아무런 글자도 적혀 있지 않은 새하얀 한지뿐이었다.
원래는 분명 무언가 적혀 있었을 빈 종이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도진의 등골 위로 서늘한 소름이 돋아났다.
바로 그때였다.
“그 책을 보셨습니까?”
“허억!”
소스라치게 놀란 도진이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다가왔는지, 카운터 곁에 낡은 조끼를 걸친 백발의 노인이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깊게 파인 주름 사이로 드러난 노인의 눈빛에는 뜻밖에도 손님을 향한 놀라움이 전혀 서려 있지 않았다.
마치 도진이 그 책을 집어 들 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한 기묘한 시선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안에 아무도 안 계신 줄 알고…….”
“괜찮습니다.”
노인은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와 도진의 손에 들린 책을 내려다보았다.
“이 책, 얼마입니까?”
도진의 다급한 물음에도 노인은 곧바로 입을 열지 않았다.
“제가 역사 소설을 쓰고 있어서 양규 장군 관련 사료를 찾고 있었습니다. 혹시 이 책의 출처를 알고 계십니까?”
도진의 물음에 노인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출처를 알았더라면 진작 그 자리에 그대로 두지 않았겠지요.”
“……네?”
“다만 그 책은 아주 오래전부터 바로 그 자리에 놓여 있었습니다. 내가 이 가게 문을 열기 훨씬 전부터 말입니다.”
도진은 노인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이 가게는 대체 언제부터…….”
“사겠습니까?”
단호하게 말을 끊어버리는 노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질문을 받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도진은 품에 안긴 책을 내려다보았다.
이 책을 두고 돌아선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현금은 턱없이 부족했고,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켜 확인한 통장 잔고를 보며 질끈 눈을 감았다.
“……카드 결제도 됩니까?”
“됩니다.”
노인이 긁어 내민 결제 단말기의 금액을 확인한 순간, 도진은 기겁하며 손을 덜덜 떨었다.
“잠깐만요, 사장님. 이거 가격을 잘못 입력하신 거 아닙니까? 낡은 책 한 권이 대체 왜 이 가격입니까?”
“그 책을 진정으로 원하신다면, 그 정도 대가는 치르셔야 합니다.”
노인의 확고한 태도에 도진은 통장 잔고와 앞으로 닥쳐올 월세, 공과금, 카드값을 머릿속으로 미친 듯이 계산했다.
결론은 참담했다.
이 책을 산다면 한동안 끼니마다 라면으로 때워야 했다.
침묵 끝에 도진은 결심한 듯 카드를 내밀었다.
“……사겠습니다.”
삑 하는 기계음과 함께 결제가 떨어지자, 노인은 비로소 만족스러운 듯 처음으로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아주 훌륭한 선택을 하셨습니다.”
완전히 망한 선택일지도 모른다는 자조가 속에서 차올랐지만, 검게 그을린 책을 품에 꼭 끌어안고 문을 나서는 순간 도진의 가슴속에는 형언할 수 없는 확신이 자리 잡았다.
이 책은 반드시 자신이 끝까지 읽어내야 하며, 나아가 반드시 세상에 써 내려가야만 한다는 강렬한 사명감이었다.
3. 활자가 살아 숨 쉬는 밤
서교동 작업실로 돌아왔을 무렵에는 이미 붉은 노을마저 저물고 짙은 땅거미가 내려앉아 있었다.
도진은 문을 잠그자마자 외투를 벗을 생각도 잊은 채 책상 앞으로 달려갔다.
노트북 전원을 켜고, 낡은 고서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낡은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만이 고요한 방 안에 나직하게 울려 퍼졌다.
사각, 사각.
도진은 한 줄을 읽고 다시 곱씹으며 조심스레 메모를 남겼다.
흥화진, 서기 1010년, 거란 성종의 친정, 그리고 결사 항전의 도순검사 양규.
그러나 사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려 할수록 펜을 쥔 손이 자꾸만 멈칫거렸다.
종이 위에 새겨진 글자 하나하나가 활자를 넘어 눈앞에 살아 숨 쉬는 듯했기 때문이다.
‘북쪽에서 바람이 불었다.’
지극히 평범한 한 줄의 묘사였지만, 도진의 귓가에는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 소리가 뚜렷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귓전을 때리는 스산한 바람 소리에 도진은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냉난방기도 꺼져 있었다.
“피곤해서 헛소리가 들리나 보네…….”
며칠 동안 수면 부족에 시달렸으니 헛것을 들을 수도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도진은 다시 고서로 시선을 떨구었다.
‘눈이 사람의 발목을 삼켰다.’
그 문장을 읽어 내려간 순간, 난데없이 발끝에서부터 얼음장 같은 냉기가 찌릿하게 타고 올라왔다.
도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금 전까지 온기가 남아 있던 작업실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고 있었다.
보일러 계기판은 정상이었고 외풍이 들 만한 틈새도 없었다.
그런데도 방 안의 온도는 기이할 정도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대체 뭐야…….”
이상함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도진은, 책장 속 다음 문장에 시선을 빼앗겨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의 의식은 뼛속까지 시려오는 추위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머릿속에서 거대한 전장의 파노라마가 폭풍처럼 되살아나고 있었다.
성벽을 굳건히 지키고 선 병사들의 결연한 얼굴, 눈 덮인 북방의 험준한 산맥과 저 멀리 지평선을 까맣게 메운 거란군의 군기들, 땅을 뒤흔드는 함성, 그리고 그 모든 비극의 한가운데에 우뚝 선 사내의 거친 뒷모습.
‘이게 정녕 양규 장군의 모습이라면…….’
홀린 듯 손을 뻗은 도진은 노트북의 문서 창을 열고 주저 없이 새 파일의 제목을 써 내려갔다.
《양규》
군더더기 없는 단 두 글자였다.
깜빡이는 커서를 보며 고서의 첫 장을 응시하던 그는, 거침없이 첫 문장을 써 내려갔다.
1010년 11월, 초겨울의 압록강 너머에서 거란의 40만 대군이 몰고 오는 검은 먹구름이 서북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한 줄, 두 줄, 그리고 한 문단.
평소 같았으면 사료와 어휘를 대조하느라 한 문장을 쓰고도 수십 번을 고쳐 썼을 테지만, 지금은 달랐다.
머릿속에 펼쳐진 전장의 광경이 너무도 생생하여 그저 보이는 그대로 화면에 쏟아붓기만 하면 되었다.
타다닥, 타다다닥.
경쾌하고 빠른 타건음이 어두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도진의 눈빛에는 전에 없던 열기가 타올랐다.
“그래, 이렇게 시작하는 거였어.”
자신이 그동안 역사 소설을 쓰며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비로소 깨달은 것 같았다.
치밀한 고증과 방대한 사료, 역사적 사실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야기는 결국 사람이 읽는 것이었다.
양규가 몇 년도에 태어나 어떤 관직을 거쳤는가보다, 그가 왜 목숨을 걸고 싸웠으며 무엇을 지키기 위해 처절하게 죽어갔는지를 먼저 보여주어야 했다.
도진의 손가락은 신들린 듯 움직였다.
역사책의 메마른 몇 줄 속에 갇혀 있던 양규를, 피와 살이 뛰는 온전한 인간으로 반드시 되살려내겠노라 다짐했다.
독자들이 그의 고뇌에 울고 분노에 함께 떨며, 마지막 순간 그의 죽음 앞에서 소중한 이를 잃은 듯 오열하게 만들고 싶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식어버린 커피잔 위로 어둠이 짙게 깔렸지만 도진은 집필을 멈추지 않았다.
방 안의 기온은 계속해서 영하로 곤두박질치고 있었고, 그가 내쉬는 숨결마다 하얀 입김이 흩어졌지만 모니터에 몰입한 그는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4. 천 년을 건너온 물음
바로 그때였다.
타닥, 하는 미세한 소리가 정적을 깼다.
타이핑 소리가 아니었다.
고개를 든 도진의 시선이 책상 한구석에 놓인 캔들로 향했다.
은은하게 흔들리던 촛불이 별안간 파앗 소리를 내며 섬뜩한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뭐야?”
도진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굳어버렸다.
그 순간, 방 안을 채우던 컴퓨터 팬 소리와 바깥의 소음마저 거짓말처럼 일제히 소멸했다.
오직 도진의 가슴속에서 세차게 방망이질 치는 심장 소리만이 쿵, 쿵, 귓전을 때렸다.
도진은 떨리는 시선으로 책상 위에 펼쳐진 《양규 난중 초고》를 바라보았다.
불에 타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아야 할 새하얀 빈 종이 위에, 툭 하고 검은 먹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툭, 하고 또 한 방울.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허공에서 붓을 대고 누르는 것처럼, 검은 먹물이 종이 속에서부터 천천히 솟구쳐 오르며 번져가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설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굳어버린 도진의 눈앞에서, 번져가던 먹물은 이내 명확한 한자의 형태를 갖추었다.
我知我者 誰乎.
나를 아는 자, 누구인가.
그리고 그 아래로 또다시 새로운 글줄이 피어나듯 새겨졌다.
此寒北風之端……
이 차가운 북방의 바람 끝에서…….
문장은 거기서 뚝 멈추었다.
마치 다음 대답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여운을 남긴 채였다.
도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만져본 한지 위의 먹물은 아직 마르지 않은 채 짙은 먹향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떨리는 음성을 집어삼키듯, 난데없이 거센 바람이 방 안을 휘감아 돌았다.
덜컹거리는 창문과 함께 푸른 촛불이 위태롭게 춤을 추더니, 노트북 화면이 찰나의 순간 검게 꺼져버렸다.
그리고 암전된 화면 정중앙에, 도진이 결코 친 적 없는 하얀 글씨가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대는 누구인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동시에 책상 위 초고의 빈 한지 위에서도 먹물이 번져 오르며 화면과 똑같은 문장을 새겨 넣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현대적인 조작이나 장치라고 치부하기엔 닥쳐온 현상이 너무도 비현실적이었다.
그리고 그 공포를 확신으로 바꾸듯, 귓가 바로 옆에서 지극히 낮고 거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아주 아득한 세월의 저편에서 건너온 듯한 메마른 목소리였다.
“……누구냐.”
도진이 경악하여 눈을 크게 뜬 그 찰나, 푸른 촛불마저 파악 소리를 내며 꺼져버렸다.
완전한 암흑 속에 갇힌 작업실 안에서, 눈보라를 헤치며 달려온 이의 거칠고 지친 숨소리가 뚜렷하게 들려왔다.
온몸이 마비된 듯 굳어버렸지만, 엄습하는 공포보다 먼저 뇌리를 스치는 하나의 이름이 있었다.
천 년 전 북방의 혹한 속에서 성을 지키고 백성들을 구해낸 뒤 역사 속으로 스러져간 그 영웅의 이름.
도진의 바르르 떨리는 입술 사이로 마침내 그 이름이 흘러나왔다.
“……양규 장군님?”
“그래.”
짙은 어둠 속에서 묵직한 대답이 돌아왔다.
생전 처음 듣는 목소리였지만 그 주인이 누구인지 의심할 여지조차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도진의 눈앞을 가로막고 있던 칠흑 같은 어둠이 한 권의 오래된 책장이 넘어가듯 천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